틱낫한 스님,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고통을 평화, 기쁨, 자유(해탈)로 바꾸기->>
제28장 내면의 부처님(불성)과 접촉하기
Touching the Buddha Within
1968년에 나는 캄보디아 불교의 지도자인 삼덱 마하 고사난다(Samdech Maha Ghosananda) 그리고 나의 애제자이자 친구이자 동료인 찬 콩 비구니와 함께 인도에 갔다. 며칠 동안 우리는 해질녘까지 영취산 꼭대기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옛날에 부처님도 우리와 똑같은 눈으로 똑같은 일몰을 바라보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그리고 정념 하는 자세로 산을 걸어내려 왔는데, 그날 이후 나는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계속해서 걷고 있다.
영취산(靈鷲山, 그리드라쿠타, 기사굴산, 굴산, Vulture Peak-마가다국의 서울 왕사성-라즈기르 교외에 있는 산으로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렀다.)도 아름답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호주 그리고 북남미도 아름답다. 안개가 낀 산도 아름답고, 안개가 끼지 않은 산도 아름답다. 사계절도 아름답다. 당신도 아름답고, 당신의 친구도 아름답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접하는 것을 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문제는 우리는 과연 일몰을 볼 수 있는 눈과 땅을 느낄 수 있는 발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당신의 눈을 우리에게 빌려주신다면, 우리는 그 눈을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될까? 주변 환경이 완벽해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행복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단 몇 초 동안 정념(正念, Mindfulness, 알아차림, 마음챙김, 사띠Sati) 하는 자세로 호흡을 하는(호흡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즉시 행복해질 수 있다.
공자님은 이렇게 말했다.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겠는가?”
때로 우리는 모든 시대의 사회적 불의라는 짐을 짊어진 채 고해(苦海)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나는 무엇을 해왔던가?”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괴로움을 겪을 때면 이렇게 자문한다.
“누가 나를 망쳤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악행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남들에게 알릴 수 있을까? 내게 고통을 준 사람들에게 어떻게 앙갚음해야 하나?”
똑같은 조건에 처해 있으면서도 우리가 겪는 것만큼 괴로움을 겪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명한 사람의 자문을 종이에 써두고 고통을 겪을 때마다 읽는 것도 좋은 일이다.
물론 우리에게 고통을 겪을 권리가 있기는 하지만, 수행자에게는 수행을 하지 않을 권리가 없다. 우리 모두는 사랑과 이해를 받을 필요가 있지만, 수행은 그저 이해와 사랑을 기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사랑하거나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상대방을 보다 잘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누가 우리를 배신한다면, 그 이유를 물어보자. 그 책임이 전적으로 상대방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는 배신의 씨앗에 물을 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상대방이 떠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도록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상대방을 비난하는 자세만 견지한다면, 상황은 더욱 나빠질 따름이다.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는 성실함의 씨앗에 물을 주는 법을 익히게 되면 그 씨앗은 다시 꽃을 피우게 될 지도 모른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성질을 깊숙이 들여다보면(통찰하면, 꿰뚫어보면)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데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정념, 집중, 그리고 지혜를 적용해보면, 자신과 상대방을 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고통을 확인하는 고성제, 그 근원을 파악하는 집성제, 고통을 변화시키고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찾는 멸성제와 도성제(8정도)를 수행해야 한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그저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바로 행동 방식인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수행을 시작해야 한다. 명예, 돈,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정념 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윽고 이해와 연민의 마음을 얻게 되면, 이러한 것들이 자타의 고통을 줄이는 데 쓸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것만으로 이미 어느 정도 삶의 의미를 찾게 된 셈이다.
자아를 구성하는 있는 5온(色-물질-air, water, soil, heat, 몸/ 수(受 feeling 느낌-감정)/상(想 perception 인식작용)/행(行 의지작용volition, 49가지 마음 작용들, 정신적 형성들ㅡmental formations)/식(의식, consciousness 아뢰야식 마음mind)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수행(관자재보살...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반야심경)을 계속 하면 우리를 비롯한 만물 속에 있는 불생불멸의 실재를 접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가장 커다란 안도감을 얻게 된다. 실재를 접하게 되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면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게 된다.
우리에게 조용히 앉아서 호흡을 알차차리고 깊숙이 들여다보고 귀 기울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편히 쉴 수 있는 방 같은 것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 혼자 또는 다른 이들과 함께 걷기명상(walking meditation 발걸음을 알아차리는 걷기 명상)을 할 수 있는 공원 또는 그 밖에 다른 평화로운 장소가 필요하다. 교육자, 건축가, 예술가, 국회의원과 사업가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는 함께 힘을 합쳐 평화, 조화, 기쁨 그리고 내관(內觀)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공간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지금 우리의 학교에서는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부모, 교사, 그리고 학생들은 그런 상황을 고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학교는 그저 지식을 기계적으로 전달해주는 곳이 아니다. 학교 또한 어린이들의 행복, 사랑 그리고 이해를 배울 수 있고 교사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통해 학생들을 기를 수 있는 곳이 되어야만 한다. 병원에도 가족, 의료진, 환자 그리고 다른 이들이 앉아서 호흡을 하고 자신을 진정시킬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시청은 책임 있는 사람들이 지역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의회는 우리가 당면한 실제 문제가 참되이 거론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교육자, 부모, 교사, 건축가, 의료진, 정치가 또는 작가라면, 우리의 집단적인 깨달음을 위해 필요한 기관을 설립하는 데 조력해야 한다.
국회의원들은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의사소통을 잘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주의 깊게 보고 듣고 사랑이 깃든 말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기 가족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불행한 사람을 뽑는다면, 그들이 우리가 사는 도시나 나라를 행복하게 해주리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저 얼굴이 잘생겼다거나 목소리가 좋다고 해서 표를 던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도시, 나라, 삶을 그런 사람들에게 내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우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해야만 한다. 우리는 깊숙이 들여다보고 서로 속내를 털어놓음으로써 진정한 화합을 이룰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내야 한다. 우리는 최선의 결정을 함께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안팎에 두루 걸친 평화가 필요하다.
부처님의 마음(佛性,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실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볼 줄 아는 지혜로운 마음)은 우리 각자 속에 들어 있다. 정념(알아차림) 할 때 부처님은 거기 계신다. 내가 아는 네 살 먹은 어떤 아이는 화가 날 때면 하던 일을 멈추고 정념하는 자세로 호흡을 하고(호흡을 알아차림 하고) 나서 엄마와 아빠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지금 내 마음속에 계시는 부처님을 만나고 있어요.”
우리는 정념(正念, Right Mindfulness, 마음 챙김, 알아차림, Sati) 하는 자세로 호흡하고(호흡을 알아차리고) 걷고(걸음을 알아차리고) 모든 일을 하면서 날마다 우리 안에 있는(무의식,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건전한 씨앗(이해와 사랑 같은 마음을 알아차림하여)에 물을 줌으로써 그 씨앗을 잘 보살펴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계시는 부처님과 접촉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데, 그것은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려본다는 것은 불생불멸의 세계, 즉 바다(생멸이 없다)와 파도(생멸이 있다)가 하나인 세계를 접한다는 뜻이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가 겪는 고통이 그저 이삼십 년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습관(업, 까르마)의 힘(業力)이 남아 있다. 정념 하는 자세로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습관을 익히게 된다. 걸을 때면 걷는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서있을 때면 서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앉아있을 때면 앉아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런 식으로 수행하면 옛날의 습관이 차츰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살아가는 새로운 습관이 들게 된다. 정념 하는 자세가 확립되면, 우리는 우리가 변화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다.
함께 어울려 잘 살아가면 부처님의 마음을 접하게 된다. 개인, 가족, 도시, 나라 그리고 전 세계에 걸친 공동체 차원에서 수행을 해야 한다.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의 행복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숨 쉬고, 웃고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정념의 빛을 비추는 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깊숙이 들여다보고 철저하게 접함으로써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실천 수행하여야 한다. 변화와 치유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심오한 것이다. 그것은 그저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날마다 실천할 수 있다. 그 가르침을 실천에 옮겨서 현실화시켜야 한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28장 全文)
There is so much violence in our schools. Parents, teachers, and students need to work together to transform the violence. Schools are not just places for transmitting technical know-how. They must also be places where children can learn to be happy, loving, and understanding, where children can nourish their students with their own insights and happiness.(......)
The heart of the Buddha is in each of us. When we are mindful, the Buddha is there. I know a four-year-old boy who, whenever he is upset, stops what he is doing, breathes mindfully, and tells his mommy and daddy, "I am touching the Buddha within." We need to take care of the healthy seeds that are in us by watering them every day through the practice of mindful breathing, mindful walking, mindfully doing everything. We need to touch the Buddha within us. We need to enter our own heart, which means to enter the heart of the Buddha. To enter the heart of the Buddha means to be present for ourselves, our suffering, our joys, and for many others. To enter the heart of the Buddha means to touch the world of no-birth and no-death, the world where water and wave are one.
When we begin the practice, we bring our suffering and our habit energies with us, not just those of twenty or thirty years, but the habit energies of all our ancestors. Through the practice of mindful living, we learn new habits. Walking, we know that we are walking. Standing, we know that we are standing. Sitting, we know that we are sitting. Practicing this way, we slowly undo our old habits and develop the new habit of dwelling deeply and happily in the present moment. With mindfulness in us, we can smile a smile that proves our transformation.
The heart of the Buddha has been touched by our being wonderfully together. Please practice as an individual, a family, a city, a nation, and a worldwide community. Please take good care of the happiness of everyone around you. Enjoy your breathing, your smiling, your shining the light of mindfulness on each thing you do. Please practice transformation at the base through deep looking and deep touching. The teachings of the Buddha on transformation and healing are very deep. They are not theoretical. They can be practiced every day. Please practice them and realize them. I am confident that you can do it.
-Thich Nhat Hanh,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Touching the Buddha Within, pp. 252-254.
첫댓글 생각하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