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정한 다니엘”(다니엘 1:8) 주일설교 22.10. 30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단 1:8)
X 인으로 살기 어려운 시대다. 세속주의는 성 윤리, 구원, 교육, 국가의 적절한 역할, 공공복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계속 밀어내고 있다. 여론은 기독교에 등을 돌렸다. 영 칼럼니스트이자 사회 평론가 멜라니 필립스는 “종교적 기적이나 G의 존재와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신화와 편협이 가득했던 지나간 원시 시대의 미신 취급한다.”
단은 G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바벨론 제국의 한복판에서 G의 백성에게 일어난 일을 기록한 책. 단과 세 친구가 살던 치열한 삶은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다.
단서는 국가적 위기인 동시에 개인적 위기로 시작. 당시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단 1:1) G의 백성인 유다인들은 G이 약속하신 가나안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침략.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단 1:1)
바벨론은 그 지역에서 가장 강한 제국이 작은 왕국을 공격했지만 어떤 면에서 딱히 공포에 떨 이유가 없었다. G의 백성은 전에도 수없이 공격과 침입과 포위 당했다. 극심한 재난도 여러 번 겪을 때 G은 그들을 보호하셨고 끝내 승리케 하셨는데 그들이 계속 G을 거역하고 G의 법을 지키겠다고 말로만 떠들면 어떤 결과가 따를지 선지자들을 통해 경고하심.
마침내 재난이 임했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G의 전 그릇 얼마를 그(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시매”(단 1:2) 왕과 수많은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G의 집 곧 G이 G의 백성 가운데 거하심을 상징하던 성전이 파괴되었다. 바벨론 왕은 성전의 기물들을 시날 땅에 있는 자기가 섬기는 신들의 신전으로 가져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다(단 1:2)
시날 땅
IS 백성들은 “시날 땅”(단 1:2-3) 바벨론으로 끌려감. 시날 땅에 바벨론은 창 11장에 바벨탑 장소(창 11:2) 인류가 힘을 G의 목적에 반기를 들었던 곳. “이 세상을 누가 운영하는지 신에게 똑똑히 보여 주겠다. 우리 스스로 하늘 끝까지 닿는 탑을 쌓고 나서 무엇을 할지 우리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바벨탑은 그런 의미였는데 유다의 젊은이들이 그 곳으로 끌려갔다. 그들이 그곳에서 믿음을 지키기는커녕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신앙을 지키며 살 수 있을까?
바벨론의 세계관 앞에서(알리스티어 백,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믿음을 지킬까 중)
느부갓네살왕은 제국을 운영하는 법을 알았다. 그는 한 신하에게 유다 사람 중 최고 인재들을 자기 왕궁으로 데려와 개조시킬 것을 명했다. 그들이 패배한 옛 IS의 세계관을 완전히 버리고 바벨론의 훌륭한 시민이요 종복 되도록 만들었다. 이면의 논리는 “저들을 끌고 와서 이름을 바꾸고 우리의 탁월한 프로그램을 통해 반강제, 혹 필요시 강제로 교육 시키면 세상에 관한 저들의 생각을 충분히 바꿔 놓을 수 있을거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은 익숙했던 것과 안전하고 편안한 일상에서 떠나 낯선 곳으로 끌려갔다. 환경의 변화만으로도 사람의 모든 것이 변하기에 충분하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청소년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이런 일이 많다. 대학 가면 자주 가는 장소와 친구가 바뀐다. 더 이상 가족들이 그들의 믿음을 일일이 챙겨 주지 못하면 결국 그들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 장소만 바뀌어도 ‘잠시 신앙생활을 쉬자. 아니 신앙을 떠날까?’ 생각한다.
하지만 장소가 달라졌지만 이들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지 않아서 교육을 달리했다. 그들에게 바벨론, 곧 갈대아의 문학과 언어를 가르쳤다. 읽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바꿔 놓는다. 이것이 바벨론 정복자들의 목표였다. 강력한 국가들은 하나같이 그 백성, 특히 아이들에게 같은 세계관, 우선순위, 윤리와 도덕을 가르친다. 바벨론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창씨개명)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각각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바벨론식 이름이다. 이 이름들에도 신을 높이는 의미가 담겨 있지만 이 신은 G이 아닌 다른 신이었다. 바벨론의 신들이었다. 당신의 이름이 당신의 정체성과 얼마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라. 이 청년들은 새로운 이름과 함께 새로운 정체성을 받았다. 청년들은 바벨론의 조치를 따랐다. 사는 곳이 바뀌고, 새로운 교육을 받고, 새 이름을 받았다. 생존의 다른 방도가 없었다.
혹시 말썽을 일으킬지 모르는 이 유다의 청년들을 바벨론의 충성스러운 신하들로 개조하기 위해 한 가지 조치가 더해진다.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단 1:5)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 1:8) 다른 곳으로 자신들을 끌고 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바벨론이 강요하는 새로운 교육을 거부할 수 없었다. 억지로 주어진 새 이름을 거부하기에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식단만큼은 바꾸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먹는 것을 그렇게까지 고집 부릴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구약에서 G의 백성들의 중요한 특징은 무엇을 먹을지, 먹지 않을지에 대한 그분의 법을 따랐다. G의 백성들에게 식단은 단순한 외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G께 속했다는 깊은 확신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바벨론의 포로로 바벨론식 교육과 개명 당한 상태에서 그들을 유대의 신앙적 뿌리와 하나로 묶어 주는 마지막 끈은 음식이었다. 단은 결정한다. “지금까지는 받아들였지만 더 이상 안돼 여기까지가 한계선을 넘지 않을 것 여기서 내 입장을 지킬 것.”
김상복 목사 칼럼, 믿음 지키키 중
믿음을 일종의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의 공식처럼 생각한다. 믿음을 한껏 끌어올린다면, 우리가 부유하고 건강을 유지하며 모든 기도가 자동으로 응답 되는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하지만 삶은 그렇게 공식처럼 작동되지 않는다. 그 증거로 히 저자는 구약의 믿음의 거인들의 삶을 “참 믿음”을 이루는 요소가 뭔지를 감동적으로 상기시켜주고 있다(히 11장)
“믿음이 없이는 G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11:6) 믿음을 “참았다”(27절)는 단어를 사용한다. 믿음의 결과 어떤 영웅들은 군대를 따돌리거나 칼을 피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고 승리하나 채찍질과 돌에 맞고 몸이 톱에 잘리는 등 11장 결론으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39절)
그렇게 떠올려지는 믿음의 모습은 단순한 공식으로 맞지 않는다. 믿음은 때로 승리하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붙드는” 굳센 결단을 요구한다. 그들은 “G이 그들의 G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16절)
믿음은 궁극적으로 G이 주관하신다는 것과, 이 생이나 다음 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G은 그분의 약속을 참으로 지키실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본질로 돌아간 스타벅스
스타벅스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커피 브랜드다. 스타벅스가 한창 인기를 끌 즈음인 2007년에 창업자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가 회사의 CEO로 복귀했다. 회사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함이었는데 실제로 그 시기에 스타벅스는 기업 지표상 문제가 없었다. 어찌 보면 여전히 잘나가는 중이었는데 그는 위기를 감지. 기업의 외적인 면,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스타벅스 정신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커피와 안락한 분위기가 있는 휴식처’라는 고유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언제부터인가 커피 향보다 샌드위치 냄새가 나고 커피가 아닌 그 외의 상품을 팔고 있는 공간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
그가 다시 CEO로 복귀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미국 내 7100개 매장을 동시에 닫고 바리스타 교육을 실시한다.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매장을 닫으면 수백만 불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기 때문. 하지만 그는 스타벅스라는 카페의 본질을 먼저 돌아봤다. ‘커피가 있는 안식처’라는 본래 컨셉에 충실하기 위해 커피를 만드는 이들에게 다시금 목적의식을 심어 본질로 돌아가게끔 만든 것. 이를 통해 스타벅스는 재도약했다.
본질로 돌아가기 위한 질문
생각과 질문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 질문이 가진 탁월성은 사유를 자극하고,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엘리자베스 하스 에더샤임(Elizabeth Haas Edersheim)이 쓴 《피터 드러커, 마지막 통찰》(The Definitive Drucker, 명진출판 역간)에 그의 질문에 통찰력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경영의 그루로 꼽고 있는 피터 드러커에 대해 “보이는데도 그 의미를 모르는(visible but not seen) 새로운 현실을 알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다. 책에서 그가 던진 질문들을 소개하는데 고객과 접촉하기 위한 드러커의 네 가지 질문을 소개한다.
1. 당신의 고객은 누구인가?
2. 고객은 뭘 가치 있게 생각하는가?
3. 고객과의 관계에서 당신이 얻은 결과는 뭔가?
4. 당신의 대(對) 고객 전략은 당신의 기업 전략과 잘 부합하는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J의 질문
J도 탁월한 질문을 통해 본질로 이끄셨다. J이 황제의 도시 빌립보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제자들의 대답이 이어졌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J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X시요 살아 계신 G의 아들입니다”(마 16:16) 이 대답은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유머 – 설교 시간에 일어난 일
어느 교회에서 일어난 일. 담임목사가 설교하는데 그날따라 스피커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결국 뒤에 앉아 있던 성도 한 분이 견디다 못해 강단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목사님, 뒤에서 잘 안 들립니다. 크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그 성도 앞자리에 있던 한 집사님이 뒤 돌아봤다. 어디든 끼기 좋아하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주책맞은 그 집사가 안 들린다는 성도에게 “괜찮아요. 들을 것도 별로 없어요.”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A.W. 토저(A. W. Tozer)는 교회가 안은 본질적 문제를
“많은 교회가 기독교의 진리에 물을 타 버려서 그것이 독일지라도 그 누구도 죽일 수 없고 그것이 약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고칠 수 없게 되었다.”
교회의 보편성과 특수성(김병삼, 치열한 도전 중)
G의 교회는 보편성과 특수성이란 두 가지 양면성이 있다. 그중 보편성이란 이 땅의 모든 교회가 동일하게 삼위일체 G을 믿는다. 그렇기에 이 땅의 모든 교회는 그 삼위일체 G을 동일하게 예배한다. 지역과 교단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G을 찬미하는 한 보편적 교회에 속한다. 예배는 그 교회가 지니는 보편성의 중심에 있다. 그래서 교회가 존재할 때 예배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교회=예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하나는 특수성. 어떤 교회가 지역 혹 특정한 대상을 향한 G의 마음을 구체적인 사역으로 옮길 때 나타나는 개별적인 특징이다. 교회마다 세워진 지역과, 구성원이 다르며, 요청되는 사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소망을 주는 구원의 공동체로 교회의 핵심 축 두 개. 하나는 G을 예배하는 공동체, 즉 예배를 통해 G을 경험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 또 하나는 교회의 특수성을 살려 지역을 섬기는 커뮤니티 교회다. 그런데 이 특수성을 발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보편성, 즉 교회가 예배하는 공동체로 바로 서는 것. 보편성이 전제되지 않은 특수성은 분명 한계가 있다.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
한 수도원의 주방장 1611년 프랑스령에 속한 로렌느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18세였던 어느 날 G의 섭리와 능력을 깨닫고 회심 후 참전한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장애를 입었고 하는 일들도 의미와 성취를 찾지 못하다가 55세에 수도원행을 택했다.
수도원 주방에서 일하게 된 그는 그때부터 로렌스 형제(Br. Lawrence)라며 주어진 일을 했지만 감사함이 없었다. 적당히 불평하고 내일을 걱정하는 평범한 삶, 아니 허드렛일을 하며 기쁨 없는 재미없는 삶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G을 만나는 길이 있고 임재를 경험하는 삶을 살 수 있음을 확신 G의 임재를 훈련 했다. 특별한 비결은 아니다. 단지 일상의 삶에서 G을 기억하는 것. 그 후 25년간 수도원에서의 삶은 G과 교제하는 삶, 임재를 경험하는 삶으로 채워졌다. 그는 예배의 자리를 일상의 삶의 공간으로 연결, G의 임재에 대한 연습을 사람들과 나누었다. 평범한 예배를 통해 매 순간 G의 임재를 체험, 그래서 그가 남긴 서신은 그 자체가 은혜다(G의 임재연습)
그는 복잡한 종교 형식이나 방편들을 건너뛰고 G을 깊이 묵상함으로 영혼을 살찌우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긴 생애를 마치고 G께로 가는 마지막 길에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형제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하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금 나는 내가 앞으로 영원히 하게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G을 찬양하고 G의 영광을 노래하고 G을 숭모하고 나의 전심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바치는 일입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다른 것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G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입니다.” 너무도 평범한 삶을 살다 간 로렌스 형제의 위대함은 평생 G을 예배하며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G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무리 중에서 가장 지혜롭고 통찰력 깊은 학생들이었다. 심지어 바벨론의 엘리트들보다도 뛰어났다(단 1:19-20) 그들은 밝고 용모가 단정했으며 누구보다도 근면했다. 모든 일에 집중력을 발휘하고, 지각하는 법이 없는 훌륭한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절대 넘지 않기로 결심한 한계선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뿌리와 연관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심기를 건드리는(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 한이 있더라도 그 선을 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런 종류의 결단은 어쩌다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시련의 순간에 갑자기 솟아나지 않는다. 위기는 사람의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낸다. 위기는 이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드러낼 뿐이다. 이 청년들은 이것을 타협해야 하는 순간, 이미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이 다른 음식 먹기 위해 왕의 환관장을 설득해야 했다(환관장이 거절한다고 굴복할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윗사람을 거역하면서 자기 뜻대로 하기보다 설득해서 허락받는 편이 나았다) 환관장은 4명의 유다 청년을 좋아했지만 자기 목숨보다 더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이 원하는 대로 해 주다가 왕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아(단 1:10) “다니엘, 너를 좋아하고 네 신앙을 이해하고 존중하지만 네 원하는 대로 해 주면 내 목숨이 위태로워.”
하지만 단은 환관장이 거절해도 G의 뜻을 타협하거나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비유를 들자면, CEO가 내키지 않는 반응을 보이자 그는 COO를 찾아갔다(단 1:12-13) “우리에게 열흘 동안 채소와 물만 주신 뒤에 우리의 안색을 왕의 음식을 먹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러고 나서 당신이 보신 것에 따라 이 종들에게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
용기 있다. 단은 “시험 해 봅시다. 옳다고 믿는 바대로 할 것 G이 역사하실 줄 믿는다.”
열흘 후 단과 친구들은 모두 감독관 앞에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단 1:15-16) 그들은 훈련과 교육 받는 3년동안 채식했다.
단과 세친구의 결단에 G이 함께 하셨다.
9절: “G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17절: “G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사실 단 1장, 바벨론의 침공과 느부갓네살의 승리도 G이 하신 일로 기록되어 있다.
2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G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바벨론의 침공과 승리는 G이 느부갓네살에게 그 승리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다에 큰 복 주셨던 G은 포위군에게 승리를 주신 G이기도 하다. 유다 백성이 포로로 끌려간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다. 성전이 파괴된 것도 G이 허락하신 일이다.
G은 이런 거시적인 차원뿐 아니라 대인적인 일과 개인적인 일도 일일이 통치하신다. G은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머나먼 땅으로 끌려가 새로운 교육을 받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관장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신념을 따르는 내내 결단력과 은혜를 주셨다.
유머 - 착각은 자유
여자가 쳐다보면 자기한테 호감 있는 줄 안다. 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해 자기를 싫다고 하면 한번 튕기는 거라고 여긴다. # 남자들의 착각
남자가 먼저 말을 걸면 자기한테 관심 있는 줄 안다. 남자가 자기와 같은 방향으로 걸으면 관심 있어서 따라오는 줄 안다. # 여자들의 착각
자기가 서울대 갈 수 있을 줄 안다. # 초딩의 착각
앞사람 등 뒤에 숨어서 잘 때 선생님이 안 보이면 선생님도 자기를 안 보는 줄 안다. # 중고딩의 착각
우리 애는 정말 착한데 친구를 잘못 만나서 삐뚤어진 줄 안다. # 세상 엄마들의 착각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는 아닌 줄 안다. # 우리의 착각
신앙인들 사이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착각은 무엇일까? ‘나는 G을 잘 믿는다’가 아닐까?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할 때 중요한 건 하나님의 판단이다.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그 생각이 나만의 착각이 되지 않기 위해 신앙의 달음질을 하는 것이다.
내가 문제입니다 - 체스터턴의 일화
C. S. 루이스가 영적인 아버지로 여기던 체스터턴(G. K. Chesterton)은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관리에 소홀하여 몸무게가 135kg에서 180kg을 오르내렸고, 가격표가 달린 구두를 신고 다니고 격식을 차릴 곳에 옷을 대충 입고 갔으나 교회의 본질, X인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 아주 뛰어났다. 〈런던타임스〉에서 ‘무엇이 세상의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원고 청탁했을 때 그는 아주 간단하고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은 답변을 써 보냈다.
“편집장 귀하, 바로 내가 문제입니다.”
J. D. 그리어(J. D. Greear) 목사가 쓴 《지저스 컨티뉴드》(Jesus Continued, 두란노 역간)에는 이런 예화가 있다. 한 목사님이 설교 중에 교인 10명을 앞으로 불렀다. 그러곤 소방차에 필요한 역할을 하나씩 맡겼다. 한 사람은 운전수가 되고 또 다른 사람은 사이렌 통제, 어떤 사람은 호스를 맡고 또 다른 사람은 소방차 뒤에 달린 이름 모를 작은 핸들을 돌리는 역할을 맡기는 식이었다. 그들이 각자 역할을 흉내 내자 목사가 그들에게 물었다.
“자, 이제 묻겠다.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10명은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을 설명했다. 핸들 돌리는 역할, 사이렌 통제, 운전수 등의 답을 듣고 “다 틀렸다. 여러분의 목적은 모두 불 끄는 거다. 모두 세상 끝까지 복음 전한다는 큰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각자 역할은 다를지라도 우리의 사명은 똑같다.”
불편과 낭비를 감수하라
스스로 종이 되려 했던 바울의 삶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그의 가문과 학벌, 소위 ‘금수저’ 조건에도 그는 왜 그토록 어려운 인생을 살았을까?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때, 로마의 시민권 기득권에도 그는 자기 권리를 사용 않고 X인으로서 핍박과 어려움을 당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사명 때문.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J를 X라고 고백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기로 작정했다. 이러한 바울의 삶은 그 옛날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그 후 2천 년 기독교 역사 중에 반복되었다. J의 제자들이 열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이 당시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로도 중국에서, 인도에서,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종이 되어 복음을 증거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수년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 청년들이 죽임 당한 일도 있다. 지극히 평범한 청년 X인들이 의료 선교 활동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피랍되어 비참하게 목숨 잃었다. 이 일에 대해 많은 분들이 애도했지만 한편에선 ‘낭비’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참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내가 굳게 믿는 것 중 하나는 헌신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의미 없는 죽음인 것 같아 보였던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봐도 알 수 있다. 1866년 대동강변에서 복음 전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지만 그가 건넨 성경책을 통해 누군가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1907년 부흥의 불씨가 된 장대현교회가 세워졌다. 지금 그곳에는 X인들의 헌금으로 평양과학기술대학이 세워졌다.
테리 루퍼의 의사 결정의 4단계 <하나님의 속도> 중에서
텍슨 LP의 창업주 ‘테리 루퍼’가 인생의 번아웃을 경험한 이후 자신의 속도를 줄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로 선택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가장 탁월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경청하기 위해 삶의 속도를 줄이는 연습을 해 왔다.
저자는 더 이상 자신의 계획에 집착하지 않으며 나 자신을 J의 뜻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상태, 의식적으로 J의 결정을 기다리는 상태를 '중립'(neutral)이라 말한다. 중립에 도달하는 독특하고 결정적인 4단계를 통해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고 역설한다.
저자는 이 책을 쓴 동기를 단순하게 “당신이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왼쪽으로 가야 할지 고민할 때 G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돕고 싶기 때문이다.” G과 속도를 맞추어 그분의 뜻을 발견하고 구체적인 방향을 구하기 원하는 X인이라면 누구나 G의 음성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으며, 거룩한 G의 속도에 도달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한다.
'누가 당신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가?', '지금 당신이 달리는 속도는 얼마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G께 운전대를 내주지 않은 채 길 안내만 맡기는 모습을 지적한다. "유한한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G의 계획을 헤아릴 수 있을까? 앞서 말한 '중립'의 상태가 될 때까지 G의 속도에 맞추어 감속하면 된다. 거기서부터 자신의 위치를 찾아 어느 교차로를 언제, 어떻게 지나야 하는지 주님의 가르침에서 분별할 수 있다."
저자가 소개하는 의사결정의 4단계. ▷1단계 : 친구 되신 J과 의논한다. ▷2단계 : 사실을 수집한다. ▷3단계 : 상황을 주시한다. ▷4단계 : 중립을 지킨다. 하지만 G의 속도에 맞추는 것은 웬만해선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J이 모든 과정을 인도하고 계시므로 G이 단계별 순서를 정하시도록 할 것, G의 이끄심은 이 과정의 어떤 한 단계와도 분리되지 않음을 기억. "G은 당신을 위한 계획을 나타내시기 위해 모든 단계를 사용하실 것이다."
G과 발맞추어 걷는 연습을 할 때 기억해야 할 4가지. △성급하게 굴지 말 것 △연습, 또 연습할 것 △단순화할 것 △G을 의지할 것.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속도를 늦추기로 한 결정을 통해 처음 세 단계가 우리를 중립에 도달하는 네 번째 마지막 단계로 이끌 것" 'G의 뜻' 선물을 받고 궁극적으로는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위치에 완벽하게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느려진 영성 속도로 삶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전개되는 상황을 더 잘 파악하게 되면서 "통제할 수 없었던 사건과 결정들 가운데 계신 G의 손길을 볼 수 있는 '더 나은 안목'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 "얼마 안 있어 달라지는 자신의 반응을 보기 시작했다"고 "좌절을 목적지로 가는 길이 지연된 사건으로 인식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분이 나를 위해 문을 닫으시고, 이미 활짝 열어놓으신 다른 문으로 나를 더 가까이 보내신다. 하나님이 내게 전해주시려는 새로운 가능성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G은 처음 세 단계를 사용 "J, 제가 어떤 일 하기 원하십니까?" 질문에 마음을 열게 하셨다고. "내 의지가 중립에 도달했고, 내가 내놓은 어떤 해결책보다도 G이 원하시는 것을 정말 원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성령님이 내가 생각해낸 것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 나를 조용히 이끌어주실 때까지 기다리며 J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를 계속할 수 있었다"
"지속적으로 G과 보조를 맞춘다는 것은 X이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내 삶의 속도와 요구에서 벗어나 J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J의 거룩한 속도의 목적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속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친구이신 J과 교감하고 성령님의 속삭임을 들을 기회를 준다.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우리는 흔히 속도를 올린다. 하지만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 곧 중립에 도달하는 독특하고 결정적인 단계를 완전히 마칠 때까지 느린 속도를 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목표다. 거기에 도달하면 자기 뜻보다 G의 뜻을 열망하게 된다."
"너 자신을 믿지 말라, 악마는 네가 하나님 노릇하는 것을 좋아한다." 자신을 자주 일깨운다는 저자는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를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보다 숙련된 분야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말한다. 결정이 필요한 분야에서 내가 능숙할수록 나 혼자 힘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속도를 줄여 G의 뜻을 찾기보다 자신의 지식을 계속 밀고 나가기 쉽기 때문이다. "G께 의지하는 것은 그분과 상의하고 그분이 이끄시도록 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G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은 모든 분야에서 진정한 전문가인 G과 상의하고 기다리는 것."
"내 최고의 GPS는 'G의 위치 파악 시스템'(God Positioning System)"이라는 저자는 G이 필요함을 아는 것이 가장 큰 힘임을 힘주어 말한다. "그분을 의지할 때, G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고 목적하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약함을 J의 강함과 맞바꾸어 시편 기자가 지적한 실수를 피할 수 있다." 'L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 127:1) "'헛된 삶', '헛된 사업', '헛된 관계'. 우리의 진정한 힘이신 분을 제외하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의 작은 왕국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저자가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G께 순종하는 축복을 경험하며 G의 뜻을 분별하고 실행하는 것이 책을 쓰고 싶은 가장 큰 이유. "속도를 줄여서 중에 이르기까지 이 과정을 따르면, J과 실제적으로 단순하게 동행하면서 G의 뜻을 중심에 둔 즐거운 삶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