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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기업 가운데 삼성전자와 현대차를 제외하고 요즘 글로벌 진출에 적극적인 곳을 꼽으라면 단연 롯데그룹입니다. 대다수 해외 진출 기업들이 전자·자동차·철강 같은 제조업인데 비해, 롯데의 주력 업종은 백화점·호텔·마트·식음료·면세점 같은 서비스·소비재 산업이라는 게 색다릅니다.
더욱이 롯데의 해외진출은 그룹 총수인 신동빈(辛東彬·58) 회장 본인이 직접 진두지휘한다는 점에서 패기와 도전, 신선함이 느껴집니다. 신 회장은 1997년 그룹 부회장을 맡으며 경영 전면에 나설 때부터 해외 진출을 강조했는데, 2009년 3월에 ‘2018 아시아 톱(Top)10 글로벌 기업’이라는 비전을 발표하면서 글로벌 사업 확장에 가속도를 내고 있습니다(신동빈 회장 단독인터뷰 바로가기).
이 비전은 2018년까지 그룹 총매출 200조원을 달성하고 해외 매출 비중을 30%선까지 높인다는 청사진인데, 한국의 내수(內需) 기업이란 꼬리표를 던지고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하겠다는 야심찬 구상입니다.
소비재 대기업 최초로 인도네시아·중국·베트남·러시아 등 본격 진출, ‘현지화’에 승부수 걸어
롯데의 이런 웅지(雄志)는 현장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올 6월 22일 경제 활기가 넘치는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 있는 복합단지 안에 백화점·면세점·롯데리아 등이 들어가는 ‘롯데쇼핑 에비뉴점’을 오픈한 게 한 사례입니다.
이 점포는 쇼핑 특화거리로 조성 중인 자카르타 메가 꾸니안 지역의 복합단지인 '찌푸트라 월드 자카르타'에 자리잡은 ‘롯데 쇼핑타운’인데, 롯데면세점만 해도 국내 업계 가운데 사상 최초로 해외에서 문을 연 시내 면세점입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이날 행사에 참석한 롯데 경영진은 옷차림부터 스폿라이트를 받았습니다. 현지 귀빈(貴賓)들에게 매장을 설명한 신동빈 회장과 신헌 롯데백화점 사장, 황각규 롯데그룹 국제실 사장, 이원준 롯데면세점 대표 모두 ‘남방셔츠’ 바람에 현지인 옷을 입고 나온 것입니다.
남방셔츠의 남방(南方)은 남쪽이라는 뜻입니다. 동남아지역은 덥기 때문에 현지인은 통풍이 잘되도록 헐렁하게 옷을 입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남아 현지인이 주로 입는 옷이라는 뜻으로 쓰기 시작한 말입니다.
한국에서 열린 개관식이었다면 재벌 회장이 남방셔츠 걸치고 나왔을까요? 체면에 신경쓰지 않고 철저하게 현지 사정과 관습에 맞춰 글로벌화를 꼭 성공시키겠다는 롯데 경영진의 강한 열의를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었지요.
사실 롯데그룹은 전형적인 내수 기업입니다. 유통·식품 같은 내수 업종이 그룹 총매출의 89%를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최근 롯데의 해외 공격 경영은 눈부실 정도입니다. 최선두 주자인 롯데마트의 경우, 한국을 포함한 4개국에 244개 매장을 두고 있습니다. 한국에 103개, 중국에 105개, 인도네시아에 32개, 베트남에 4개인데, 이미 해외에 있는 매장이 국내 보다 41개나 더 많습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덕분에 롯데마트의 매출은 홈플러스를 능가했고, 대형마트 순위가 3위에서 2위로 올랐습니다.
롯데백화점도 내년 이맘때에는 해외 점포가 8개로 늘 것으로 보입니다. 롯데케미칼, 롯데제과 등도 부지런히 해외 진출을 하고 있습니다. 그룹내 매출 순서를 따지면 유통→화학 및 건설→식품→관광의 순서로 많습니다.
이런 와중에 전문경영인들은 한층 바빠졌습니다.
A계열사 사장은 사석(私席)에서 “국내에 있으면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눈치가 보인다”라고 토로했습니다. B계열사 사장은 “해외 출장을 최근 수 년 간 다니면서 처음 깨달은 것이 있는데, 해외 출장에서 가장 불편한 점은 먹는 것도 아니고 자는 것도 아니라 호텔 베개라는 사실이다”고 하더군요. 그는 그래서 집에서 쓰는 딱딱한 베개를 각 출장지에 두고 다니고 있답니다.
노병용 롯데마트 사장의 경우, 올 1월부터 매월 첫째주와 셋째주는 한국에 머물며 국내 사업을, 둘째와 넷째주는 중국으로 넘어가 현장을 챙기는 ‘격주 경영’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주에는 베이징, 넷째주에는 상하이를 주로 찾고, 다섯째주가 있는 달에는 마지막 주에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등 동남아로 날아갑니다.
롯데백화점은 지난달 국외 점포 점장(店長)에 현지인을 앉히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중국에 주재하던 한국인 점장은 모두 복귀시키고 톈진(天津)과 웨이하이(威海) 점장을 모두 현지 채용 중국인으로 발령낸 것이지요. 이에 따라 롯데백화점 5개 국외 점포 중 절반이 현지 점장 체제로 운영 중입니다. 현지화에 승부수를 던진 것이지요.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롯데의 글로벌 진출 역시 ‘순풍에 돗단듯’ 술술 풀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선 롯데그룹은 아직도 해외 매출에서 상당한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주력 기업인 롯데쇼핑의 경우, 해외 법인 중 인도네시아 빼고는 이익을 보는 곳이 없습니다. 다른 계열사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원하던 만큼 이익·매출 증가 안 이뤄져…올들어 두차례 세무조사 등으로 ‘내우(內憂)’ 겹쳐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습니다. 최근 3년간 해외 매출 증가율은 매년 16%인데, 비중은 11%로 3년 연속 그대로입니다. 그냥 전체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2018년 총매출 200조원도 힘들고, 해외 매출 비중 30% 달성도 쉽지 않습니다. 앞으로 5년 정도 남았는데, 그렇게 극적으로 매출이 늘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없습니다.
내부적으로 롯데그룹 수뇌부는 이런 여러 문제점에 대해 시시각각 세밀하게 챙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계속 손해만 보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경영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에다 국내 사정도 심상찮습니다. 올 2월 롯데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호텔롯데에 대한 세무조사가 이뤄진지 불과 다섯달 만인 지난달 16일, 서울국세청 조사4국 직원 150여명이 롯데쇼핑에 예고없이 들이닥쳐 4개 사업부문(백화점, 마트, 시네마, 슈퍼)을 샅샅이 뒤지며 세무조사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정기 세무조사냐 특별 세무조사냐”를 놓고 말이 있었지만, 이 정도의 인력 동원은 특별 세무조사에서나 가능하다는 게 중론입니다. 특히 롯데쇼핑은 호텔롯데와 함께롯데의 해외 진출과 인수·합병을 견인하는 양대 축(軸)이라는 점에서 롯데측은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명박(약칭 MB) 정부때 잠실 제2롯데월드 허가를 받는 등 MB정부의 최대 수혜자로 꼽히던 롯데가 5년 간 단맛 끝에 큰 시련을 겪을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돌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롯데그룹은 MB정부 5년 새 46개인 계열사가 79개로, 49조 2000억원이던 자산 총액은 95조8000억원으로 두배 가까이 팽창했으니 최고의 수혜자라는 말이 무색치는 않아 보입니다.
상황이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냥 멈출 수는 없다는 데 롯데의 깊은 고민이 있습니다.
우선 국내 경제는 저(低)성장 모드가 확연합니다. 따라서 내수 기업으로 머물면 성장의 기회는 더욱 좁아지고 없습니다. 이럴 경우 내수 기업을 인수합병하거나 점유율을 더 늘려야 하는데, 이건 경제 민주화 같은 문제로 어렵습니다. 결국 해외로 가야 합니다.
롯데의 해외진출은 지금 한창 투자해야 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롯데가 가장 확고한 위치를 갖고 있는 백화점을 국내에서 연다면, 손익분기점까지 가는 데 3~4년, 비용을 다 회수하는 데 7~8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해외에서는 이보다 더 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고 해서 국내에만 머문다면 우물안에서 말라죽을 게 뻔하다는 것입니다.
국내에서 고강도 세무조사와 경제민주화 바람, 해외에서 경쟁사들의 견제와 텃세 같은 갖은 악재를 뚫고 롯데가 과연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을까요? 롯데의 도전과 응전은 단순히 롯데 한 기업의 성쇠(盛衰)를 좌우하는 사안이 아닙니다.
롯데의 성공 여하에 따라 포화상태에 이른 국내 시장을 벗어나 글로벌화를 지향하는 많은 한국 기업들이 용기를 가질 수도, 반대로 잔뜩 겁을 먹고 움츠려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롯데그룹이 산적한 장애물들을 뚫고 아시아 시장에서 명실상부한 톱10 기업으로 우뚝 서서 많은 다른 한국 기업인들도 더 활기차고 왕성하게 해외로 뻗어가 국부(國富)를 증진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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