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밝혀진 내막
상운은 배가 고팠다.
고파도 너무 고팠다.
비록 이틀밖에 굶지는 않았지만 굶는데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주방(廚房)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굶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남들처럼 해주는 음식은 못 얻어먹었을지언정 먹는 것에 있어서는 남부럽지 않았었다. 그런 그에게 이틀의 굶주림은 실로 참기 힘든 일이었다.
배가 고프니 잠도 오지 않는다.
잠에 깊이 빠졌다가 일어났을 때, 자신까지 합쳐 세 명이 남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되지도 않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생각 속에 빠져 있던 상운은 가벼운 인기척과 함께 석문 사이로 팔랑 떨어져 내리는 한 장의 양피지를 발견했다.
사면 폭이 한 자 남짓한 첩지(帖紙)와 함께 접혀진 양피지였다. 그것은 석실 내의 허공에서 기이한 각도로 회전하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상운의 전신 모공이 긴장으로 인해 곤두섰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석실 안을 살폈다.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주위를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단정히 접혀 있던 양피지가 상운의 손에 의해 펼쳐지자 돌연 상운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달아오르는 듯하더니 이내 이마 위로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으으……."
양피지를 홀린 듯 바라보던 상운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어느 한순간 그의 오른손이 자신의 회의단삼(灰衣短衫) 밑의 바지 속을 파고들었고, 갑자기 석실 안의 분위기는 미묘하게 뜨거워졌다.
그는 이 중요한 시기에 가장 금물인 자위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두 발끝이 오므라지며 왼손에 들려져 있던 양피지는 그의 손안에서 구겨져 축축이 젖고 있었다.
* * *
두 번째 살인은 관홍이 죽은 지 하루 만에 일어났다.
살인의 대상!
그는 바로 두 명의 소녀 중 하나인 홍의소녀 요지였다.
아이들은 너무나도 처참한 죽음 앞에 아연 질색을 금치 못하며 시체를 힐끔힐끔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너무해! 이건 정말 너무해!"
자의소녀 백빈영이 요지의 시체를 가로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싸안고 여섯 소년에게 원성 어린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요지의 시체는 진정 잔인의 극치였다.
전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으며 고통을 참느라 악문 이빨이 입술을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여인의 은밀한 곳, 그곳이 참혹하리만큼 처참하게 변해 버린 것이다. 누군가가 그녀를 겁탈한 후 잔혹하게 만들어 버린 게 분명했다.
그녀의 방은 세 번째 석실인지라 두 번째 석실의 관홍과 네 번째 석실의 강욱이 죽고 난 뒤엔 다른 석실과 인접해 있지 않는 곳이 되어 있었다.
간살(姦殺)!
누가 보아도 잔인무도했다.
"백빈영, 너는 잠깐 나가 있어라."
감군악의 얼굴에 처음으로 엷은 흥분의 빛이 떠올랐다.
잠시 주춤하던 백빈영은 형편없이 찢겨진 요지의 홍의를 주워 대충 그녀의 알몸을 가려준 후 소년들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석실을 빠져 나갔다.
감군악이 소년들 앞으로 나서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정말 비열한 자식이군!"
순간 소운평이 매섭게 감군악을 몰아붙였다.
"그런 식으로 슬쩍 네 자신을 빼내려 하지 마라. 흉수는 분명 우리 여섯 중 하나다. 네가 그런다고 네 자신이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감군악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식도가 번쩍 머리 위로 치켜올려졌다.
"뭐라고? 이놈! 너는 내 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기나 하는 것이냐?"
당장이라도 내리칠 기세였다.
"왜들 이래?"
장엽이 재빨리 그들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
감군악은 여전히 성이 풀리지 않는지 두 눈에서 새파란 광망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때 그 팽팽한 긴장감을 파고드는 음성이 하나 있었다.
"야! 이 계집애 죽긴 했어도 저승에서는 여자 풍류 귀신이 되겠군. 쩝쩝……. 아깝다, 아까워. 내 색싯감으로 딱 좋았을 텐데."
소년들의 팽팽한 시선은 이미 음성이 들려오는 쪽을 향하고 있었다.
"저 바보 새끼!"
그들의 눈에서 지금껏과는 다른 불똥이 튀었다.
백리운도는 지금 백빈영이 가려준 홍의자락을 하나하나 들추며 요지의 나신을 감상하듯 이곳저곳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스런 미소가 매달려 있는 입가엔 침마저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감군악의 신형이 벼락같이 백리운도에게 부딪쳐 갔다.
"이 더러운 놈!"
퍽―! 퍼퍽―!
"억! 어이쿠!"
백리운도는 배를 싸잡고 새우처럼 등을 굽힌 상태에서 감군악의 무수한 주먹 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감군악은 요지의 시체를 보자 자신의 누이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한 닢의 은자를 위해 뭇 남성의 노리개가 되어야 했던 가련한 누이를…….
평소에 자신을 감정을 거의 드러내 놓지 않던 그가 이 사건에만은 뚜렷한 분노의 빛을 띠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백리운도의 몸을 마구 두들겨 패고 난 후에야 감군악의 시선이 다른 소년들을 향해 돌려졌다.
"자, 방법은 하나! 모두 바지를 벗어! 야, 너도 빨리 바지를 벗어라."
감군악은 아직도 배를 싸잡고 고래고래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백리운도를 바라보며 차갑게 소리쳤다.
소년들의 시선이 잠시 서로를 향했다.
제일 먼저 허리띠를 푼 것은 소운평이었다.
백리운도도 바지춤을 풀고 있는 소년들 틈으로 끼었다.
"에이그……. 저 계집애, 죽으려면 고이 죽지. 찾아 먹을 것은 다 찾아 먹고 죽어 버렸으니 저 모양이지. 제길!"
이내 감군악과 소운평을 필두로 소년들의 바지춤이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순간 그들은 우선 자신들의 것을 내려다보았다.
상대를 확인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확인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었던가?
그러나 이때 백리운도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바보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우히히힛! 꼭 전시장 같군. 장엽과 군악의 것은 비슷하고… 소운평, 너는 어떻게 그것도 너 생긴 것과 똑같으냐? 와! 고서풍의 것이 제일 크구나. 어? 상운, 네것은 왜 그렇게 빠알갛게 부풀었느냐?"
옷도 벗지 않고 목을 길게 빼며 말하는 백리운도의 말이 상운의 것에 이르자, 내심 긴장을 하며 백리운도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소년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운을 향해 던져졌다.
상운은 기겁을 했다.
"아, 아냐! 이건 어젯밤에……."
그러나 그를 제외한 다른 소년들은 이미 바지춤을 추키며 그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섰다.
"아냐! 너 이 병신 새끼! 이건 어젯밤에……."
상운은 소년들의 눈초리에 질려 두서없이 외쳐댔다.
소운평이 차갑게 상운의 당혹해 하는 표정을 비웃었다.
"상운, 너는 이곳에서도 낮과 밤을 구별해 살았더냐?"
상운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정말이야! 정말이란 말이야!"
"알았다. 상운, 네 말을 믿어주마. 비록 무엇이 정말인지는 모르지만… 운악, 칼을 이리……."
장엽이 싸늘하게 웃으며 감군악의 손에서 식도를 건네 받았다.
상운의 두 눈에 공포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이, 이런… 안돼!"
"허, 실컷 재미봤으면 됐지, 안되긴 뭐가 안돼? 이 비열하고 더러운 자식!"
푸― 욱!
"허― 억!"
장엽의 어깨에 걸린 상운의 턱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그의 두 눈알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불거져 있었다. 마치 가죽북이 찢기는 듯한 소리를 일으키며 장엽의 손이 상운의 뱃가죽에 수를 놓듯 움직였다.
"으― 아― 악!"
장엽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상운의 몸이 바닥으로 주르르 허물어져 내렸다.
"아, 아, 아닌… 데……."
허물어져 내린 상운의 신형은 실로 끔찍했다.
처참지경!
망나니의 아들 장엽의 살인수법은 진정 완벽한 공포로 나머지 소년들의 눈에 비춰지고 있었다.
그토록 잔인하게 죽이면서도 다정하게 포옹하듯 상대에게 칼을 쑤셔 넣는 그의 얼굴에는 차라리 쾌감 같은 빛이 흐르고 있었다.
"왝―! 우웩―! 아이고……."
소년들의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이 한켠에 쪼그리고 앉아 연신 구토를 해대고 있는 백리운도를 향해 돌려졌다.
백리운도는 똥물까지라도 토해낼 듯 심한 구토를 했다.
* * *
후훗! 나는 알지.
결코 상운은 요지를 죽이지 않았어.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
하지만 그들은 이 싸움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던 거야.
누군가 뻗친 죽음의 손길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며 그 손길을 빌어 또 하나가 죽길 바랄 뿐이지.
어차피 일곱을 죽여야 하니까…….
세상이 두렵다.
겨우 이 나이의 아이들이 이토록 위선(僞善)과 가식(假飾)의 탈을 쓰고 음모를 꾸밀 정도이니, 사오십 년 이상을 산 늙은 구렁이들의 음모는 얼마나 구역질을 일으키게 할까?
나는 아까 비록 거짓 구토를 했지만 결코 거짓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어설픈 껍데기로 자신을 가리려는, 아직은 순수해야 할 영혼들에 대한 혐오감으로 일어난 구역질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분명 오늘 어느 놈이 내 목을 죄러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죽을 때는 아직 안되었다.
하나가 더 죽어야 비로소 내 차례인 것이다.
* * *
스스… 스스스……!
발걸음은 여인의 것인 양 숨을 죽이려 애썼다.
일 장 간격으로 천장과 양측 벽면에 붙은 야명주의 불빛을 따라 길게 이어진 복도에 하나의 백영(白影)이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백영의 왼손에는 길이 반 자 남짓한 비수가 푸른 청광(靑光)을 섬뜩하게 발하고 있었다.
백영은 조심스럽게 하나의 석실에 귀를 밀착시켰다.
그러나 이내 무엇이 여의치 않았던지 다음 번 석실로 걸음을 옮겼다. 계속해서 다음, 다음으로…….
이윽고 백영은 조심스럽게 마지막 석문 앞에 다다랐다.
그곳은 바로 백리운도가 묵고 있는 석실이었다.
백영의 얼굴 위로 가느다란 미소가 스쳤다.
석실 안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 그것은 석실 전체가 울릴 만큼 요란스런 코고는 소리였다.
백영은 왼손에 잡고 있던 비수를 오른손으로 옮겨 잡고 석문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 이 문을 소리 없이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세상 모르고 잠든 바보의 목줄기를 왼손으로 죄고 오른손의 비수로 일섬(一閃) 빛을 폭사시키면 되는 것이다.
비록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바보였지만 여하간 하나가 줄어드는 것이다.
백영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그― 그― 긍―!
한참을 기울여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음향이 울리며 석실 문이 세 치쯤 벌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에이, 이놈의 쥐새끼! 밥을 안 준다고 이젠 귀를 잘라먹으려 하는구나. 제길……."
백리운도의 음성이었다.
순간 백영의 신형이 쾌속하게 석문을 떠나 문 옆 벽에 착 달라붙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반사동작이었다.
"드르렁―! 드르렁―! 드르렁―!"
다시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백영의 얼굴에는 잠시 갈등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백영은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더니 다시 석문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그…….
또 한차례 경미하다 못해 희미한 음향을 몰고 석문이 몇 치쯤 더 벌어졌다.
그때 돌연 백리운도의 기겁에 찬 음성이 왈칵 터졌다.
"아얏! 이 빌어먹을 자식! 임마, 거길 물면 신선 할아버지가 와도 못 고쳐. 에이그, 콱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음냐, 음냐."
벽면으로 재차 몸을 붙인 백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이건 우연치고는 너무도 절묘한 우연이었다.
비록 또 다시 백리운도의 코고는 소리가 석실을 진동하고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석문을 일으킬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백영은 창백한 얼굴로 몇 번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빠르게 복도를 달려가 다섯 번째 석실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다섯 번째 석실은 소운평의 방이었다.
* * *
빨리 끝내자.
그것만이 피차(彼此)에게 좋은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작정했다.
네게 가장 평온한 죽음을…….
살인의 제물이여, 목적의 희생물이여!
잘 가게나.
이승에서 못 이룬 꿈, 부디 저승에서나마 이루길…….
이름 없는 꽃이나마 한 송이, 은은한 염불이나마 한 자락 깔고 싶지만…….
개운치 못한 심금(心琴)의 눈물 한 방울 구천염로(九泉閻路) 위에 찍어두겠네.
* * *
― 소운평이 죽었다!
아이들은 누군가의 외침에 우르르 소운평이 있던 다섯 번째 석실로 모여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죽음이었다.
반드시 눕혀진 자세, 좁은 입술 위로 배어 물린 한 가닥 미소.
그리고 스스로의 극락왕생을 빌었음인가? 소운평의 두 손은 자신의 가슴 위에서 경건하게 합장되어 있었다.
그 특유의 지혜와 치밀함으로 다른 아이들의 한 단계 위에 섰던 소운평이었다.
죽음마저도 그답게 맞이했던 것이다.
아이들의 시선이 의혹에 잠겼다.
어찌 사람이 저토록 평온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죽음이었다.
소운평은 죽었으되 결코 죽음을 느끼게 하지 않는 시체로 누워 있었던 것이다.
"마치 석가(釋迦)가 열반(涅槃)에 든 듯하군."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이 자식, 도대체 무슨 꿈을 꾸다가 죽었길래… 도화나무 밑에서 뽕 따는 꿈이라도 꾸고 있었단 것인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소운평의 시체를 세밀히 살피던 백리운도의 말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소년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백빈영을 바라보았다.
"네가 꾀었지?"
느닷없는 말이었다.
순간 백빈영의 좀 수척해지긴 했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옥용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던 백리운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제길! 아니면 그만이지 왜 울상을 짓냐? 괜히 입장 난처하게시리……."
"너……."
백빈영은 겨우 그 한마디를 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백리운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계집들이란 그저 잘생기나 못생기나 주제를 알기도 전에 무조건 저러니… 헌데 누구일까?"
이때 장엽이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백리운도를 향해 소리쳤다.
"야, 이 멍청이! 어서 꺼져 버리지 못해?"
"아, 알았어. 나도 범인 한 번 잡아보려 했는데… 그래, 너희들끼리 잡아서 어떻게 하든 마음대로 해라."
백리운도는 뒷걸음질로 그 석실을 빠져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아이들은 소운평의 시체를 세세히 살폈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다.
무공을 모르는 그들이 아무리 소운평의 시체를 세밀히 살펴본다 한들 어찌 미간(眉間)에 찍힌 바늘구멍보다 미세한 상흔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결국 소운평의 죽음은 처음으로 해결을 못보고 그대로 묻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 * *
감군악, 장엽, 고서풍, 백빈영, 백리운도.
이제 남은 것은 그들 다섯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두 사람은 또 다시 죽음의 그림자 속에 파묻혀 질식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죽음의 표적이 될 사람은 누구누구일까?
냉막한 아이 감군악일까?
무자비한 아이 장엽일까?
아니면 겁 많은 아이 고서풍일까?
섬세한 미모의 소녀 백빈영일까?
그것도 아니면 공히 바보로 인정되고 있는 백리운도일까?
이제 그들 중 두 사람만 더 죽는다면 이 길고 지루한 공포의 시간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숨조일 듯 지루한 시간은 더욱 더 짙은 공포를 안고 이어질 뿐 그 막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족히 사흘의 시간은 지났으리라.
그 사흘 동안 아이들은 누군가를 죽여야겠다는 생각 이전에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보호본능을 앞섰던지 시간은 보이지 않는 죽음의 칼을 물고 그저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 * *
찌익―! 사각사각!
옷이 찢기는 듯한 소리가 어느 석실에선가 울렸다. 이어 무엇인가로 석벽을 긁는 소리가 잠깐 정적을 깼다가는 사라졌다.
장엽은 고리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방문 틈새를 비집고 들이밀어지는 회포(灰袍) 자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진하게 떠올랐다.
어렵게 들이밀어지고 있는 회포자락은 바로 누군가가 자신과 협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 직감한 것이다.
문가에 일던 인기척이 사라졌다.
장엽은 문틈 사이로 두 치쯤 내밀어진 회포자락을 잽싸게 낚아챘다. 결대로 마구 찢긴 회포자락 위에는 돌가루를 침에 이겨 쓴 듯한 글씨가 희미하게 쓰여 있었다.
<모든 것을 오늘 안으로 끝내자. 나는 고서풍을 맡을 테니 너는 바보를 책임져라.>
간단한 내용의 글귀였다.
그러나 회포자락을 건네준 자의 의도는 명백히 드러나 있었다.
장엽은 그 글을 읽는 순간 뇌리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감군악!'
장엽은 감군악이 자신에게 회포자락을 보냈다고 확신했다. 감군악이 회의(灰衣)를 입고 있으니 더더욱 명백하다 생각했다.
"그래. 너라면 충분히 내게 이런 제의를 할 놈이다. 하지만 나더러 바보녀석을 죽이라니… 내게 손쉬운 상대를 골라준 것은 고마우나, 살인을 즐기고자 하는 나에게 그런 놈을 죽이라는 것은 벌레를 죽이라는 것보다도 더 치욕스런 일이다."
말은 그러했으나 회포자락을 잡은 그의 손끝은 흥분으로 인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기는 필요 없다. 나는 이 두 손으로 그 바보녀석의 목줄을 한순간에 끊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 나는 십중삼(十中三)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 * *
행운.
감군악, 고서풍, 백빈영 등 삼 인에게 지금처럼 완벽한 행운은 한 번도 없었다.
굴러들어온 떡이라고나 할까?
그들은 그 행운을 열 개의 석실 중 맨 끝 석실 속에서 말없는 환호성으로 내지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백리운도가 거처하는 석실이었다.
두 구의 시신(屍身).
참혹했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껏 일어난 그 어떤 장면보다 비극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었다.
두 개의 몸이 한데 엉킨 채 두 쌍의 손이 서로의 목줄기를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장엽은 위에서, 백리운도는 장엽의 밑에 깔린 채 서로의 목을 죈 상태로 숨져 있었던 것이다.
특히 백리운도의 죽은 모습은 실로 끔찍했다.
두 눈동자는 하얗게 뒤집혀 있었으며, 입술 옆으로 길게 늘어진 혀의 길이는 무려 세 치도 넘었다.
그에 비해 장엽은 지렁이 같은 핏물이 시퍼렇게 곤두서고 두 눈만이 툭 튀어나와 있을 뿐이었다.
누가 보아도 그 모습은 장엽이 백리운도를 습격했으며 그에 맞서 백리운도도 악착같이 장엽의 목줄기를 잡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추측해 낼 수 있었다.
돌연 한 줄기 냉소에 찬 조소가 실내의 분위기를 깼다.
"후훗! 어리석은 놈들. 자승자박(自繩自縛)을 한 셈이군."
뜻밖에도 항상 겁먹은 표정으로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어대던 고서풍의 음성이었다.
순간 감정의 변화를 좀처럼 보이지 않던 감군악의 두 눈에 한 줄기 빠른 이채가 스쳤다. 그의 시선이 혈색 감도는 고서풍의 얼굴을 향해 천천히 돌려졌다.
고서풍의 입에서는 득의 어린 대소가 터져 나왔다.
"으하핫! 군악, 무얼 그리 이상한 눈으로 보느냐? 살기 위해선 때로 자신을 감출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소운평이 제 잘났다고 떠들어대다가 죽었고, 백리운도 저 바보녀석은 지나치리만큼 바보스러워 결국 저렇게 죽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넌 여태껏 네 자신을 위장했다는 말이냐?"
"위장? 글쎄, 위장이란 말이 합당할지는 몰라도 목적 달성을 위해 내 자신을 숨긴 것만은 사실이다. 덕분에 너희들을 경동시키기 위한 안배로 관홍을 죽였을 때도 나를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강욱이 내 대신 누명을 쓰고 죽었지만……."
고서풍의 무서운 변신이었다.
일단 조그만 사건이라도 터지면 먼저 몸부터 떨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는 바로 지금의 이 순간을 위해서 스스로를 겁쟁이라는 허울 속에 가둬 놓았던 것이다.
감군악의 두 눈에 일순 의혹의 빛이 일었다.
"강욱은 분명……?"
"군악, 너는 강욱이 관홍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새삼 왜 내게 확인하려 하느냐? 정 궁금하다면……."
고서풍은 감군악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그의 눈에선 사이(邪異)로운 빛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너희들 몰래 너희들의 신체적인 특징을 면밀히 살폈다. 물론 군악, 너의 오른쪽 귀 뒤에 난 점까지도 말이야. 헌데 강욱의 잘려진 엄지손가락만큼 이용하기 좋은 것도 없더군."
감군악의 완강한 신형이 보이지 않을 만큼 흔들렸다.
고서풍의 치밀한 관찰력과 철저한 음모!
그것이 이 석실의 균형을 처음으로 무너뜨렸다는 것을 생각하니 등줄기로부터 소름이 쫙 끼쳐왔다.
"그럼, 네가 요지마저도……?"
"군악, 너는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릴 하느냐? 비록 천하를 욕심내는 나 고서풍이지만 그런 남자답지 못한 짓은 하지 않는다. 또 그때는 더 이상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되는 때였다. 나는 단지 균형을 깨뜨려 놓은 것으로 내가 계획한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음! 그렇다면 누가……?"
감군악이 의혹 어린 시선을 고서풍에게 던지고 있을 때, 옆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백빈영이 잘게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그건 나의 작품이었어요."
감군악의 신형이 흠칫했다.
고서풍의 여유만만하던 표정도 굳어졌다.
백빈영은 요사스러우리만큼 아름다운 얼굴에 배시시 웃음을 피워 올리며 말을 이었다.
"왜요? 나는 그러면 안되라는 법 있나요?"
두 소년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요지가 비록 여자이긴 하나 분명 열 명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녀를 죽인 거예요. 죽이는 방법이 잔인하긴 했지만 그래야만 내게 돌아올 의심도 그만큼 줄어드니 할 수 없더군요."
"그럼 상운은?"
고서풍이 시리도록 하얗게 웃고 있는 백빈영의 얼굴을 눈부신 듯 바라보며 물었다.
백빈영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건 내가 기녀들 사이에서 거래되는 춘화도(春畵圖) 중 극상의 것을 상운의 방에 밀어 넣은 결과예요. 호호호……! 사내들이란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닌가요?"
"음……!"
"으음……!"
감군악과 고서풍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무거운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헌데, 나는 분명 요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소운평은 누가 죽였지요? 군악, 당신인가요?"
백빈영의 물음에 감군악은 무겁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고서풍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차가운 냉혈한(冷血漢) 감군악.
무서운 효웅(梟雄) 고서풍.
사갈(蛇蝎) 같은 미소녀 백빈영.
그들은 갑자기 오리무중(五里霧中)에 빠지고 말았다.
도대체 누가 소운평을 죽였단 말인가?
자신들이 아니면 죽어 있는 저들 두 사람 중 하나라는 얘기가 아닌가?
장엽이었을까, 아니면 백리운도?
"어쨌든 군악 당신은 단지 굴러들어 온 떡을 받아먹은 입장이로군요."
백빈영의 조소가 은근히 담긴 말에 감군악의 눈빛이 냉막하게 굳어들었다.
"난 떡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죽이러 오는 놈이 없었을 뿐이다."
감군악은 차갑게 말을 내뱉더니 몸을 돌렸다.
백빈영이 가볍게 안색을 일변시키며 다급히 물었다.
"어딜 가는 거지요?"
"그럼 이곳에서 시체와 계속 살라는 말이냐? 이제 셋이 남았으니 줄을 당겨야 하지 않겠느냐?"
감군악의 무심하고도 냉막한 말은 고서풍과 백빈영을 일시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내 백빈영이 죽어 있는 백리운도와 장엽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군악, 확인하는 의미에서 저 둘을 당신의 칼로 한 번 찌르고 가요."
실로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다.
문을 나서려던 감군악의 몸이 거칠게 돌려 세워졌다.
"간악한 계집!"
그는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고서풍 또한 백빈영의 말에 잠시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내 감군악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러나 백빈영은 무엇이 그리 찜찜한지 볼썽사납게 죽어 있는 백리운도의 시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야 석실을 빠져 나갔다.
그녀는 사실 백리운도의 죽음이 선뜻 이해되질 않았다.
비록 그녀가 애초엔 여덟 명의 소년들 중 감군악과 장엽을 가장 강한 자로 동시에 꼽긴 했었지만, 백리운도를 그들 두 사람보다 강하지 않으면 제일 약한 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실을 빠져나가는 백빈영의 뇌리 속엔 끝내 백리운도의 존재가 찜찜한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 * *
"어이쿠, 이녀석아! 이제 그만 놓아라."
이것은 열 번째 석실에서 들려온 음성이었다.
잠시 후 열 번째 석실의 문이 열리며 흑의소년 하나가 만면 가득 바보스런 웃음을 띤 채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의 어깨 위에는 한 마리의 흑색쥐가 앉아 있었다.
백리운도였다.
장엽의 억센 손아귀 아래 숨이 끊겼던 그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폭우가 쏟아지던 법왕사에서 일어났던 하나의 괴사(怪事)를 기억하고 있다.
다름 아닌 귀식이양공(龜息移兩功)!
백리운도는 바로 그 귀식이양공을 펼쳐 한동안 죽은 것처럼 위장했던 것이다.
귀식이양공은 절정의 무공 소유자라 해도 알아채기 힘든 신비지공(神秘之功)이었다.
"휴, 혼났네. 그 악독한 계집."
백리운도는 복도를 걸으며 백빈영이 감군악에게 했던 마지막 말을 뇌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 계집은 필시 바가지도 악독하게 긁어대겠군."
백리운도의 풀어진 눈동자에 푸시시 웃음이 배어 올랐다.
"하지만 그만하면 밤일용으로 쓸 만하다 할 수 있지."
백리운도는 백빈영을 밤일용으로 정해 놓기라도 한 것인가?
중얼거리며 걷던 백리운도가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첫번째 석실 앞이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까마득한 천장으로부터 길게 늘어져 있는 굵은 금색줄 앞에서 걸음을 멈춘 것이었다.
금색줄은 흑의죽립인이 열 명의 아이들 중 세 명의 아이가 남았을 때 당기라고 했던 바로 그 줄이었다.
감군악과 고서풍, 백빈영 등 세 명은 이미 그 줄을 당겼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어느 곳으론가 옮겨졌을 것이다.
백리운도도 좋든 싫든 간에 그 줄을 잡아 당겨야 했다. 그 줄이 이곳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열쇠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백리운도는 오른손을 들어 서슴없이 금색줄을 잡아당겼다.
우― 우― 웅―!
덜― 컹!
무시무시한 굉음이 울리며 백리운도가 버티고 선 바닥이 돌연 반으로 쫘악 갈라졌다.
"엇―!"
백리운도의 입에서 다급한 헛바람이 토해졌다.
그러나 그 헛바람은 다음 순간 백리운도의 몸과 함께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의 나락 속으로 삼켜져 버렸다.
바닥은 어느 틈엔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본래 그러했듯이 사위엔 오로지 정적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람 한점 없는 황량한 오지(奧地)인 듯 삭막한 정적뿐…….
이제 이곳에는 다섯 구의 소년의 시체와 한 구의 소녀의 시체만이 남아 하릴없이 악취를 풍기며 썩어갈 것이다.
* * *
아득히 떨어져 내렸다.
인간의 몸뚱이로 허공을 이렇듯 한없이 떨어져 내린다면 바닥에 떨어져 죽기 이전에 파편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다.
백리운도는 가슴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달짝지근한 단내를 느꼈다.
전신의 기혈이 마구 뒤엉키기 시작한 것이다.
백리운도는 급히 기식(氣息)을 멈추고 떨어져 내리는 대로 신형을 맡겼다.
배교의 운기토납법(運氣吐納法) 중 단자결(斷字訣)!
너무도 극렬한 공기의 압박으로 인해 뒤틀리는 기혈을 우선 외부의 힘으로부터 단절시킨 것이었다.
엉켜들던 기혈이 점차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그의 떨어져 내리는 속도는 여전했다.
오히려 더욱 더 가속이 붙어 맹렬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비류직하(飛流直下)!
비록 단자결로 내면에 가중되던 압박감은 얼마간 해소했지만 이대로 계속 떨어져 내리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백리운도의 시선이 까마득한 어둠의 밑바닥을 향해 던져졌다.
언뜻 희미한 불빛이 환상처럼 어른거렸다.
이제 바닥이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 속도로 떨어져 내린다면 그의 몸이 쇠몸뚱이라 해도 떨어지는 순간 필시 피곤죽이 되고 말 것이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하압―!"
돌연 기합성과 함께 백리운도의 몸이 떨어져 내리던 자세 그대로 한 바퀴 회전되었다.
멋진 비룡번신(秘龍 身)의 수법이었다.
이어 배를 밑으로, 등을 위로 한 자세에서 두 팔과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 풍차처럼 신형을 돌리기 시작했다.
빠르고도 자연스런 연결이었다.
백리운도는 일순간에 대붕포란(大鵬抱卵)과 풍차급전(風車急轉)의 신법을 동시에 펼쳐낸 것이었다.
그 일련의 멋들어진 연결 이후 백리운도의 떨어지는 속도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허공 중에 그대로 신형을 정지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백리운도가 펼친 무공은 그리 현묘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동작의 자연스런 연결과 빠른 임기응변은 웬만한 일류고수도 흉내내기 힘든 절묘한 것이었다.
이때 풍차처럼 돌며 떨어져 내리는 백리운도의 시야로 급기야 나락의 바닥이 확 들어왔다.
순간 백리운도의 신형이 우뚝 멈춰지는가 싶더니 머리를 축으로 하여 환상과도 같은 호선을 허공 중에 그려냈다.
그리고 그 호선은 가볍고도 경쾌한 착지로 이어졌다.
수백여 장을 급전직하로 떨어져 내려온 것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지극히 가벼운 착지였다.
백리운도의 시선이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그곳은 하나의 거대한 동혈(洞穴)이었다.
화산이 폭발한 후 만들어진 듯한 지하공간이었다.
그리고 백리운도가 떨어져 내린 수백여 장의 나락은 화산의 분출구였던 듯했다.
백리운도는 동혈의 반대편 벽의 십여 장쯤 위에 걸린 하나의 그물을 발견했다.
그것은 아마도 먼저 떨어져 내린 삼 인의 아이를 위한 배려였던 것 같았다.
그물을 잠시 바라보던 백리운도는 조심스럽게 동혈의 입구로 몸을 날렸다. 이어 소리 한점 없이 동혈 벽면에 등을 기댄 채 동굴 안의 기척을 살폈다.
그러나 고요하다 못해 죽음과도 같은 정적만이 감돌 뿐이었다.
단지 이따금씩 천장에 매달렸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그 정적을 깨곤 했다.
똑! 똑! 똑!
백리운도는 껄끄러운 동혈 벽면에 등을 바싹 밀착시킨 채 끝을 알 수 없는 동혈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동혈은 용암이 분출된 상태의 천연적인 빈 공간에 인공을 가미시킨 듯 천장에 정(釘) 자국이 선명했고 십여 장 간격으로 큼지막한 야명주가 한 알씩 박혀 있었다.
얼마를 걸어 들어갔을까?
문득 백리운도의 두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도대체가 사람의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돌연 '저벅― 저벅―' 백리운도의 의혹을 깨기라도 하듯 멀리서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왔다 싶은 순간 그 발자국 소리는 어느새 지척지간에서 일고 있었다.
백리운도의 신형이 옆에 있는 용암 석주 뒤쪽으로 유령처럼 번뜩 스며들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두 눈으로 한 사람의 모습이 파고들었다.
삼십 세쯤 되어 보이는 창백한 얼굴의 회의인이었다.
그런데 그의 가슴 한복판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신(神) 일백이(一百二)라는 글자가 핏빛으로 선명히 찍혀 있었다.
그의 창백한 시선이 부지중 백리운도가 숨어 있는 용암 석주를 향해 던져졌다.
감산도(坎山刀)를 굳게 움켜쥐고 석주 주위를 살피던 그의 눈이 번갯불처럼 번뜩였다.
'제길! 들켰구나!'
백리운도는 내심 그렇게 소리쳤다.
바로 그 순간 그의 흑의 속에서 한 마리 흑색 쥐가 확 튀어나오더니 회의인의 앞을 가로질러 맞은편 벽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음, 쥐새끼였나?"
회의인은 흑색 쥐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차갑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리운도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 자는 순찰무사인 듯하거늘 일개 순찰무사의 감지력(感知力)이 저토록 뛰어나다니!'
방금 회의인의 이목을 흩어 놓았던 흑색 쥐가 백리운도의 바짓가랑이를 타고 어깨 위로 기어 올라왔다.
"후훗! 한낱 미물인 네가 은혜를 갚을 줄 알다니… 지금부턴 네게 맡겨야겠다."
백리운도는 쥐의 조그만 어깨를 대견스럽다는 듯 쓰다듬어준 후 바닥에 내려놓았다.
쥐도 백리운도의 의도를 알았다는 듯 '쪼르르' 거친 동혈 바닥 위로 빠르게 가기 시작했다.
백리운도는 즉시 쥐의 뒤를 따라갔다.
원래 동물의 감각은 사람의 그것보다 월등하다.
백리운도가 이 쥐와 친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백리운도는 사공 시절 이 쥐의 본능적인 움직임을 보고 날씨와 바람의 방향 및 물결의 높이를 추측해 내곤 했던 것이다.
쥐와 백리운도 사이에 영(靈)이 통했다고나 할까?
백리운도는 쥐가 서면 재빨리 몸을 숨기고 또 다시 가면 그 뒤를 따르고를 반복했다. 분명한 것은, 쥐가 설 때마다 순찰무사인 듯한 자가 백리운도가 숨어 있는 앞을 지나쳤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자칫 발각당할 뻔했던 백리운도는 숨을 때마다 아예 귀식이양공을 펼쳤다.
그런데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간 인물들은 한결같이 앞가슴에 신(神) 자를 새긴 회의 차림이었으나 신 자 다음의 번호만은 각기 다른 숫자를 하고 있었다.
길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가운데 길이 원류(源流)인지 그 길은 좌우의 두 길에 비해 세 배는 넓어 보였다.
쥐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그 중 오른쪽 동혈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용담호혈(龍潭虎穴)에 들어온 백리운도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로지 쥐를 쫓아 앞으로 나갈 뿐이다.
그런데 오른쪽 길로 들어선 쥐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갔다.
그 길은 음침할 뿐만 아니라 물이 발목까지 차 올라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또 다시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그러나 쥐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 중 오른쪽 길로 내달렸다.
갈림길은 수도 없이 계속 나타났다.
동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다.
쥐는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오른쪽 길로만 달렸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동혈은 암흑으로 변해 있었다.
점점 줄어가던 야명주가 지금의 길로 들어서자 한 알도 붙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백리운도는 전신 공력을 눈으로 끌어올렸다.
시야가 희뿌옇게 밝아왔다.
이때 돌연 한동안 계속해서 내달리던 쥐가 우뚝 멈춰 서서 백리운도를 돌아보았다. 위험신호였다.
백리운도는 재빨리 석벽에 몸을 바싹 밀착시키고 청각을 곧추세웠다.
"하암……."
백리운도의 예리한 청각을 자극하며 파고드는 소리, 그것은 분명 사람의 음성이었다.
무료함을 달랠 길 없어 내는 하품 소리였다.
백리운도는 벽에서 은밀히 시선을 빼어 음성이 들려온 쪽을 살펴보았다.
칙칙한 암흑의 저쪽으로부터 희뿌연 빛이 아스라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백리운도는 최대한 소리를 죽여 그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대략 오십여 장쯤 나아갔을까?
그의 눈에 한 명의 회의인의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회의인의 뒤론 거미줄처럼 촘촘한 쇠창살이 보였다.
'무엇인가 있다. 어쩌면 이곳의 비밀을 풀지도 모르겠다!'
백리운도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일순 예리한 빛을 발했다.
뇌옥(牢獄).
그는 눈앞에 보이는 저곳을 지하뇌옥이라 단정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빨라졌다.
'이곳의 비밀을 풀려면 일단 저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
다음 순간 '툭!' 백리운도가 잡고 있던 벽면의 돌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선명한 음향을 일으켰다.
회의인이 흠칫하는 모습이 보였다.
툭―!
앞의 것보다 더 큰 음향이 동혈을 울렸다.
회의인이 신형을 바짝 긴장시키며 감산도를 빼 들고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십여 장, 십여 장, 오 장…….
이윽고 그는 소리가 난 지점까지 다가섰다.
순간 그의 두 눈에서 의혹의 빛이 일었다.
그의 앞엔 남루한 흑의의 추면소년(醜面少年)이 죽은 듯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가 보기에는 추면소년은 이미 죽어 있었다.
길게 빼문 혀, 희멀겋게 뒤집힌 눈동자…….
앞가슴에 신(神) 이백칠(二百七)이라는 글자를 새긴 회의인은 의아롭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이곳에 소년의 시체가 있다는 것은 그로선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알 수 없는 노릇이로군. 어찌 이 자가 이곳까지 들어와서 죽을 수 있었단 말인가?"
잠시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그는 이내 추면소년을 안아 들었다.
"귀찮게 됐지만 일단은 보고를 하는 수밖에……."
그는 투덜거리며 쇠창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쇠창살 안에선 몇 쌍의 눈동자가 회의인과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축 늘어져 있는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인이 시체를 안은 채 뇌옥 옆 벽면의 볼록하게 튀어나온 물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물체는 변고가 생겼을 때 어디론가 신호를 보내는 장치인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회의인은 등뒤 척중혈(脊中穴)과 양관혈(陽關穴)이 화젓가락에 데인 듯한 통증과 함께 전신의 힘이 그곳으로 봇물처럼 터져 나감을 느꼈다.
회의인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벌렁 나자빠졌다.
"히힛! 멋지게 속는군."
"너……?"
회의인은 나자빠진 자세에서 다시 회생한 소년을 불신에 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 백리운도라고 해."
백리운도의 바보 같은 얼굴 위로 진한 웃음이 배어 올랐다.
"으으으……."
회의인의 입에서 참담한 신음성이 토해졌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서서히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귀식이양공!
백리운도의 귀식이양공이 또 한차례 빛을 발한 것이었다.
"푹 쉬고 있으라고……."
백리운도는 신형을 돌려 뇌옥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