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어느 날.......친구 윤x형군과 나는 [박이균]형의 순회 방문을 맞아 오전 봉사 모임에 나갔어요.
그 날, 어쩌다 오전에 시간이 났는지 지금은 기억 없지만, 그 날 그 충격 너무 심해 대화의 기억은 생생합니다.
그 친구의 형은 세 번 교도소 다녀왔어요.
한 번은 정식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고, 두 번째, 세 번째는 교도소 문 나오자마자 또 관에서 채 갔지요.
믿음이 대단한 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친구는 늘 마음에 걸렸나봅니다. (믿음이 부족했겠지요^^*)
에궁 ~!또 딴 길로 세는군…
바이더웨이~!
암튼 그 친구는 자기 형의 그 처절한 믿음 투쟁, 그리고 인생 허비, 낙오 등이 증말로 맘 상했나봐요.
그래서 더더욱 1975년 강조 했던 조직에 분노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박이균] 형에게 파수대 제본 들이밀고 따질 듯 묻자, 난감한 얼굴의 [박이균]형은 그 날 저녁 집회 때 없던 주제로 연설을 했습니다.
[주께서 말씀 하시기를…….도둑이 초저녁에 올른지? 한 밤중에 올른지? 새벽에 올른지? 모르므로 너희들은 항상 깨어 있으라~!]
그랬습니다.
말씀의 요지는 1975년은 초저녁에 해당 한다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조직은 주의 말씀에 따라 초저녁부터 깨어 있을 것을 강조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저, 솔직히 말할까요?
당시 저는 그 말씀을 십분 이해 했습니다. 제 친구의 그 따짐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했구요.
언젠가(1975년 전)형들과 함께 야그를 하던 중에 누군가 말했어요.
[나는 1975년에 아마겠돈이 오지 않는다 해도 나는 주를 계속 섬기리~!]
을마나 멋져 보였는지요~!
그것은 당시 우덜이 속한 조직이 참(진리(眞理))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그런 표현을 그 형이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솔직히 1975년 마지막? 그거 실감 안 났었어요. 하지만 참은 하나다~! 따라서 그 날 아마겠돈 안 와도 난 주 여호와를 섬기리~!
참은 조건이 읎다~!
무조건 믿는 것이 참이다~!
암튼 아무리 날나리 증인 생활 했던 나였지만 그 형의 견해에 찬동 했었거든요.
그러나,
1977년 서울 지역은 [인천]에서 대회를 했었는데
하여튼 그 지역대회 최악이었어요~!
연설 도중 어수선한 그 모습, 도무지 연설에 귀 기울이는 사람(형제, 자매)들이 별로 없는 겁니다.
모두가 허탈…….
그 이후 의문을 품게 되었지요.
그리고 얼마 후 조직의 [1975년에 대하여 과도한 기대를 갖게 한 것은 실수였다]는 공식적인 견해를 파수대를 통해 보고,
아이고~! 나는 속았다~!
그랬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시 스톡홀름 증후군 환자 였었기에, 그저 달팽이처럼 흘러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질이었거든요...인질~!
실수?
일부 통치체 성원의 실수?
1969년, 제가 침례 받은 해였습니다.
장충체육관에서 침례 받았어요.
그 때는 한국이 아주 못 살던 때였기에 외자 유치, 차관 등에 혈안이 되어 있던 한국 정부는 정부 수립 이후 가장 많은 외국인들이 단체로 한국 방문 하는 것에 고무되어 당시 한국 정부는 [지상의 평화 국제대회] 참석 하는 외국인들을 위해 김포공항에서 숙소까지 [대한여행사 리무진 버스]에 분승한 참가자들을 시경 소속 [기동대. (당시 기동대 싸이카는 할리 데이비슨,으로 증말 멋졌다.)]싸이카 부대가 앞 뒤 호위를 했었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 부인이 여증이었다. 그래서 그의 한국 방문 때 그 부인 여증이 육영수 여사님께 전도를 했다 등등의 소문이 있었던 그 때였어요.
하여간 외국인들이 함께 하는 그 대회에서 침례 받은 것 제딴에는 을마나 자부심 가졌었는지....픗~!
당시 어린 저는 그런 야그에 얼마나 고무 되었었는지요?
그래서 그 대회 절정의 공개강연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나단 H 노워]씨의 공개강연을 박종일 씨가 동시 통역을 했는데,
그 연설 주된 내용은 예루살렘 멸망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멸망 되리라~!] 그것이 연설의 주된 주제 였지만 다가올 1975년의 그 긴박함의 때를 강조한 연설이었습니다.
[노워]씨는 당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붕에 있던 자는 지붕에서 내려가지 않고 지붕에서 지붕으로 도망 가야 했습니다. 밭에서 밭을 갈던 사람은 호미를 던져 버리고 그 길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집에 있던 자들은 살림살이 버려두고 그 길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역사는 반복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긴급한 때를 닥치면 그리 해야 합니다.]
어찌 생생히 기억 하냐구요?
에궁~!
제가 침례 받은 해였어요.
1968년 깨어라를 통해 [클라이맥스] 충격을 받았던 어린 나이에 그 연설은 증말로 긴장감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솔직히 그 때 종일이 형 통역은 증말 멋졌거든요. 연설자 제스처까지 그대로 흉내 내며 통역할 때 제 가슴엔 불이 활활 타오르기도 하였구요.)
그래서 기억 합니다.
암튼, 역사는 반복된다~!
1968년 깨어라를 통해 6,000년 기간 중 가장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해가 1975년이고, 그 해에 구덩이로 치닫는 기관차가 사정없이 내려 꽂히는 그 그림…….
그리고 [노워] 통치체 장의 [지붕에서 지붕으로 도망 하라]는 그 연설은 불을 지폈던 것이지요.
긴장감의 최고조~!
그러다가 1973년 [짐 틸릭]의 지역대회 연설…만약 1975년에 아마겠돈이 오지 않는다 해도 그 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있는 해가 될 것입니다. 등등.......
원주에서 순회 방문 중 연설하시다 화마로 돌아가신 [정태용] 형은 [적은무리]였습니다.
그 형이 순회감독으로 돌기 전의 어느 날…(1975년 직전으로 기억 됩니다)
공개강연 연사로 초대 되어 제가 속한 회중으로 연설 오셨어요.
그 형 제 친구인 박X덕 군에게 [여기 경찰에서 사찰 나오는 듯한 수상한 움직임은 없나? 참석자들 중 수상한 사람들은 없나?] 확인 하시고는 긴장감 높은 과격한 연설을 했었던 것도 기억 납니다.
어느 날인가?
저녁 집회 때 (당시는 등화관제 민방공 훈련 탓에 회관 마다 두터운 커튼이 걸려 있었죠.) 커튼 굳게 쳐서 빛 하나 새지 않게 하라고 하고는 과격한(?)연설을 했었던 존경하는 김x석 형의 연설도 기억 납니다.
박미 대회회관 짓는데 건설 책임자였던 형이었어요.
때의 긴박성~!
얼마 남지 않는 인간존제 6.000년의 끝,
그리고 천년 통치...
신세계...
1975년 전엔 그 날이 다가올수록 적들(?)의 무자비한 박해가 있을 것이다~!
짐승의 등에 탄 음녀들의 조직적인 탄압과, 짐승의 박해...
그리고 그 박해의 절정은 등에 탄 음녀를 짐승이 무러 뜯는 것으로 절정에 이를 것이며,
이 때 여증들은 더 무지비한 박해와 탄압을 받을 것이다~!
틈만 나면 강조 되었던 주제 였습니다.
활 시위 팽팽하게 당길 때의 그 긴장감...
그리고 공포...
1975년 직전에 다가올수록 마치
혹세무민 사교집단의 휴거 철야 기도처럼 그랬었습니다.
아이고~!
그게 다 긴박성, 때의 초급박, 그걸 강조 하느라 그랬었거든요.
근데, [1975년에 지나친 기대를 갖게 한 것은 조직의 실수였다]?
일부 편향된 믿음의 광신자들의 지나친 기대감이 불러 온 헤프닝이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 창조의 그 간격 기간내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 간격은 몇 주, 길어야 몇 달 이었을 것입니다.]
그건 1975년 전의 주장이었고,
제 친구 윤X형 군이 박이균 형에게 파수대 제본 들이 밀고 물었을 때
박이균 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읽어보게…….길어야 몇 달 이었을 것입니다. 라고 했지 몇 달이었다~! 라고 단정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게 정답이올시다.
[길어야 몇 달 이었을 것입니다]
[것입니다]
그게 지난 한 세기 동안 성경에도 없는 통치체들이 면피용으로 자주 쓰던 표현
네,
것입니다.
[0000....이었을것입니다.]
여담 하나...
제 친구 중에 이x덕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녀석 지금은 스톡홀름 증후군에서 벗어나 있어요. 어느 날, 이민 간 외국 어느 곳의 회중에 아직 인질로 잡혀 있을 때 어느 장로가 집회 오는 중에 교통 사고 위험을 피해 무사히 집회 올 수 있었는데, 이는 하느님의 보호가 확실하다~! 그랬다나? 그것은 진실로 믿음의 좋은 표현일 수 있고 감사함의 표현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 친구 그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정태용 형은 하느님이 보호 안 해 부부가 왕국회관에서 불 타 죽었냐?
그 친구는 역설적으로 한 말이었어요. 적은무리였던 정태용 형은 믿음이 부족해 불 타 돌아가신 것이었냐? 그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정태용 형을 생각해 봅니다. 스톡홀름 증후군...그리고 인질...1975년이 가져온 그 폐해를 생각해 봅니다. 1975년 이후 현 세상의 물질은 신세계에선 아무런 쓸모가 없다~! 하면서 모든 재산 팔아 1975년 가을 까지 먹을 것 남겨두고 여러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던 형들도 생각 납니다. 그러나 그 이후 그런 형들은 모두 분별없는 믿음의 행위자로 낙인 찍혔던 것도 생각 납니다.
첫댓글 아이고 ,69년인가 장춘 체육관 대회에 저도 있었는데 , 그 때 결혼한지 얼마 되지않았고 대구 살다가 서울 온 이 00자매님이 결혼 식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그 답례로 짜장면을 사준 기억이 납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당시 정권이 김포 공항에서 여증 대회 참석자들을 위하여 빨간 키펫을 깔아 주었다는 이야기 가 있었는데 직접 보지 못해 사실 여부를 확인해 드릴 수가 없군요.
정말 옛날 야그네요
연설 내용은 잘 기억이 안나니 ...무엇이라 말하기가 좀 ,,,,,
최초로 한국 대회 만명이 참석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1988년이던가요? 부모님 몰래 참석한 지역대회에서 받아든 <계시록 - 그 웅대한 절정은 가까왔다!> 책. 감격에 겨워 몰래 저녁마다 읽어 곧 다 떼게 만들었던 그 긴박감, 절정감! 현란한 삽화와 그럴 듯한 해석에 온 정신을 다 빼앗겼습니다. 그 책의 영어명이 Revelation - Its Grand Climax at Hand! 인데, 그 ‘at hand’ 라는, 정말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직까지 유효한 모양이죠? ㅎㅎㅎ
그 때도 짐승을 올라 탄 ‘큰 음녀 (the Great Harlot)’의 섬뜩한 그림에 전율을 느끼며 온 정신이 ‘아마겟돈’에만 팔려 있었는데요. 그 후로도 계속 강조했던 종말의 임박! 오오, 그 긴장!!! ......... 요즘은 또 무슨 약발이 먹히고 있을까요? ㅋㅋㅋㅋㅋ
너무나 생생한 이야기, 정말 잘 읽었습니다. 입다님처럼 정확히 기억하고 계신 분들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의 이러한 글들이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모아서 자료실에 정리를 해야 할텐데요...
입다 님 기억력 무지 좋으시네요~~ 지도 기억을 좀 더듬어야~~ 근데, 원주 방화 사건이 몇년도에 있었던가여~~ ??
에고~! 원주 방화사건은 증말로 가슴 아픈 사건입니다.(조직의 비리를 폭로하는 입장이라도...)1992년 10월 4일 일요일 오후 2시 40분 경 (검색으로 확인 함)에 발생함. 사망14명(남6명, 여 8명), 부상 25명(남11명, 여14명) 어쨌든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정태용 형님 부부와 그 날 그 자리에 있던 죄(?)로 유명을 달리한 님들을 기리며...)
감사 합니다.... 14 년전 이네~~ 각 회중에서 부조한다고 부조금도 뫃으고~~야튼 한 15년전 사건 이었네요~~ㅜㅜ
운영자님 1975 를 따로 소제목 아이콘으로 빼주심이 어떨는지요. 한참 찾았다. 그리구 그러면 더 많은 글들이 올라올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