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
안유정
오랜만에 하이힐 신을 일이 생겼다. 신발장을 열어보니 내가 찾는 힐은 선반 맨 구석에 마치 엎드려서 엉덩이를 높이 쳐든 듯 힘겹게 뒷굽을 보이고 있었다. 검은색 소가죽에 앞코가 둥근 디자인으로 회사 다닐 때 주로 신던 것이었다. 화려한 디자인의 다른 하이힐들도 많았지만 불편해서 모두 버렸고, 단순한 모양이지만 발이 편한 이 한 켤레만 남겨 두었다. 신발을 꺼내어 전신 거울 앞에 섰다. 발에 잘 맞을지 걱정하며 한 번 신어봤다. 하이힐은 마치 ‘주인님 기다렸어요.’라고 말하듯 발에 딱 맞았다. 세월이 무색할 정도였다.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구두의 가죽 표면은 내 발 모양에 맞게 울룩불룩 튀어나온 채 그대로 형태가 잡혀있었다.
늘 그렇듯 하이힐은 내 몸에 마법을 부리는 것 같았다. 9cm 굽에 올라선 내 모습을 보니 턱은 쇄 골 쪽으로 당겨지고, 가슴은 펴지며, 엉덩이는 위로 솟고, 종아리는 날씬해져 다리가 더 길어 보였다. 신발 한 켤레로 몸매가 교정되는 것 같았다. 몸의 자태가 올곧아지고 키도 커지니 자신감도 높아졌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테헤란로를 런웨이 삼아 당당히 거닐던 회사원일 때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 당시 자주 입었던 치마 정장에도 이 하이힐이 제격이었다. 회사에 지각하는 아침엔 이 구두를 신고 뛰기도 했다. 회식을 마치고 늦은 밤 귀가할 때면 술에 취해 비틀대는 나는 뒷굽을 지팡이 삼아 중심을 잡아가며 겨우 집에 도착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퉁퉁 부은 발을 좁은 구두에 다시 욱여넣고 또 하이힐 위에 곡예를 하며 출근했다. 그 당시 비슷비슷한 키의 여직원들끼리 각자 취향에 맞는 하이힐을 신고 도토리 키재기를 하며 재미있게 일했던 게 생각나 잠시 키득거렸다.
하이힐은 롤러코스터 같은 직장생활과도 모양이 닮았다. 철저한 성과주의에 따라 나를 승진시키기도 했고, 바닥으로 매몰차게 내치기도 했다. 회사생활은 업무 외에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큰 과제였다. 일의 연장선이었던 잦은 회식도 넘어야 할 산이었기에 퇴근 후 무거운 발을 이끌고 새벽 술자리까지 버티고 앉아있기도 했다. 또 복장이나 태도도 중요시했기에 반듯한 이미지를 위해 하이힐은 포기할 수 없는 신발이었다. 높은 구두는 내 키만 커지게 해준 게 아니었다. 내 마음가짐도 고고하게 해주어 업무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었다. 하지만 불편한 신발로 인해 더 빨리 피로해졌다. 하이힐의 뒤축이 닳을수록 내 몸도 점점 축이 났다. 그렇게 나는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고단한, 물밑 백조의 발처럼 분주한 직장생활을 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벨 소리를 듣자마자 벽시계부터 봤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 시간이 다 되었다는 남편의 전화였다. 나는 가방을 챙겨 그대로 하이힐을 신고 문을 나섰다. 계단 손잡이를 짚어가며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뒤 시동이 걸려있는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철퍼덕 앉았다. 긴 한숨을 내뱉으며 하이힐부터 벗어버렸다. 잠시 굽 높은 신발을 신었다고 복숭아뼈가 콕콕 쑤셔왔다. 목적지에 가는 동안 차에서 발을 좀 쉬게 했다. 얼마 뒤 발목 통증이 사라졌을 즈음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 주차 요원이 열어주는 차 문 사이로 하이힐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내딛고 도도하게 걸었다. 주변 시선을 가르며 예약석 팻말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남산 타워가 보이는 창가 자리였다. 곧이어 예술작품 같아서 먹기에도 아까운 코스 음식들이 나왔다. 내가 스무 살 무렵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거의 이십 년 만에 소원을 풀게 된 날이었다. 그렇게 눈과 입으로 식사를 즐기고 어느덧 디저트가 나왔다. 넓고 네모난 하얀 접시 테두리에 초콜릿을 녹여 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Happy 10th Wedding Anniversary. 결혼 10주년을 축하한다는 영문 레터링이었다. 들쑥날쑥하고 끊길 듯 말듯 이어지는 필기체는 우리 부부가 살아온 십 년의 세월과 닮았었다.
나는 회사 재직 중 결혼을 했고 바로 아이를 갖게 됐다. 그 후로 십 년 동안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아이들을 돌보느라 굽이 낮은 신발만 신었다. 자신을 꾸밀 여유도 없이 나를 희생했던 육아와 끝없는 집안일은 실적도 없이 반복되며 나를 무기력하게 했다. 차라리 치열했어도 성과로 보상받던 회사생활이 훨씬 보람 있다고 생각했다. 우울한 현실에 지칠 때면 다시 그 하이힐을 신고 복직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버텼다. 하지만 십 년 동안 일할 기회도, 그 구두를 다시 신을 일도 없었다. 나는 내가 가장 화려했던 직장인 시절로 늘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모처럼 생긴 부부만의 식사 자리를 빌려, 다시 하이힐을 신고 자신을 꾸미며 그 갈망을 달래 보았다.
어느새 남편은 딱딱한 초콜릿 글자를 포크로 모두 깨부수어 먹었다. 사진으로만 찍고 그대로 남겨 두고 싶은 내 마음과는 달랐다. 결혼기념일 축하 글자는 레스토랑에서 준비해 준 깜짝 이벤트였다. 내가 식당을 예약할 때 미리 결혼 10주년이란 걸 알렸다. 엎드려 절받기식의 이벤트였지만 그래도 막상 받아보니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그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편은 5분 뒤에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결국 나도 기념일 문구를 포크로 긁어 먹어버렸다. 우아한 결혼기념일 식사는 한 시간 반 만에 끝났다. 나는 자정을 맞은 신데렐라처럼 급히 식당을 나왔다. 포크로 긁어 없어진 결혼기념일 글자처럼 모처럼 차려입었던 내 모습도 사라졌다.
나는 미리 준비해 간 운동화로 갈아신고 뛰다 걷기를 반복하며 아이들을 하교시키러 학교에 갔다. 남편은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에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하이힐을 몇 시간 신었다고 발목이 시큰거리고 허리도 뻐근했다. 굽 높은 신발도 몸의 적응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단 하루의 점심 식사를 위해 며칠 전부터 옷을 골라놓고 준비했던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젠 그토록 포기할 수 없었던 하이힐에 대한 집념도 내려놓았다. 과거의 나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겉모습을 중시하며 살았지만, 엄마가 된 후엔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의 안전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엄마이기 때문이었다.
학교 앞에서 만난 두 아들은 치마 정장을 입은 나를 보고 의아해하며 “엄마, 오늘 다른 엄마 같아. 매일 이렇게 입고 와”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그저 웃어넘기고 형제의 가방을 양쪽 어깨에 멘 뒤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함께 아리랑 고개를 뚜벅뚜벅 올라갔다. 그래도 예전에 사원증을 목에 걸고 테헤란로를 또각또각 걸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미련 없이 육아에 전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그 하이힐을 다시 신을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간직하고 싶다. 신발장 속 하이힐 한 켤레는 언젠가 다시 복직하겠다는 내 마음속 희망 한 가닥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저도 한때는 9센티 하이힐 신고
음주가무하다가 뜀박질하며 집에 가곤 했네요.
신발장에서 주인의 화양연화를 기억하며
언젠가 다시 올 날을 기다리고
있는 나의 하이힐도 꺼내볼까
문득 생각합니다.
삼남매의 엄마로서 또 작가로서 활기차게 살고 있는 안 작가님 대단합니다.
다시 하이힐을 신고 테헤란로든 레드카펫이든 당당하게 걸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합니다.
응원합니다.
“엄마, 오늘 다른 엄마 같아. 매일 이렇게 입고 와”ㅎㅎ
아이들에게 멋진 엄마의 모습이 비쳤군요.
신발장 속의 하이힐은 작가님의 존재 이유이자 삶의 동력이기도 하군요.
재미도 있고 의미도 가득한 수필입니다.
배람합니다.
반나절의 하이힐 착용이 깊은 삶의 진면목을 되돌아 보게 하네요. 경력의 단절이라는 의미를 세아이의 엄마로 치환해도 되려는지? 그러고 보니 저도 현직 때의 양복을 다 버렸네요...
하이힐이 호강했네요.
안작가의 젊음이 부러운 1인입니다.
하이힐 신고 뛴다는 게 참 신기해요.
지난 시상식 때 하이힐 신고 오셨나요? 7월부터는 운동화 신고 오세요 ^^
하이힐과의 삶,
참 멋진 수필에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
ㅎㅎ 감사합니다. 그 하이힐은 못 버리겠어서 아직도 신발장 속에 있습니다 ㅎㅎ 지난 시상식 때는 9cm 말고 5cm 신고 갔습니다 ㅋㅋ 이제 9cm 겁나서 못 신어요~^^
소망이 간절하면 언젠가 이루어지는 날이 있겠지요.
안 작가님의 하이힐을 응원합니다.
배견하고 갑니다. 하이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