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최후의 보루(堡壘)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역사는 더디다 그러나 진보(進步)한다"
오늘 저는 추도사가 아니라 지난 가을 저 앞에 있는 '노무현대통령기념관'을 개관함으로써 묘역 공사가 14년 만에 완공되었음을 노무현 대통령님께 보고 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14년 전 이날, 부여 시골집에서 잡초를 뽑다가 서거 소식을 접하고, 방송을 통해서 유서에 남긴 글,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 놓으라"는 구절을 대하면서 이때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은 속으로 "유홍준 청장에게 부탁해서..."라고 했을 것만 같았다.
그 즉시 봉하마을로 내려와서 이 일을 맡겠다고 자원을 하고, '작은비석건립위원회'를 조직했다. 우리시대 최고 가는 문화예술인으로 구성했다. 건축가 고 정기용, 승효상, 조경설계 정영선, 역사학자 안병욱, 화가 임옥상, 시인 황지우 등이 실무를 맡았다.
따로 마련된 예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얼마가 들든 경비를 어디서 조달하던 관계없이 우리는 우리 시대의 문화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부끄럼 없는 공간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옛말에 "후대 사람이 오늘을 보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옛날을 보는 것과 똑같다"는 말을 머리에 새기며, 후대인들이 여기에 찾아올 것을 머리 속에 그렸다.
그리하여 김부식이 삼국사기(백제본기구)에서 말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것을 이 묘역의 기본 미학(美學)으로 삼았다.
그리고 우리는 전통을 기초한 현대 묘역으로 조성한다는 생각에서 마하트마 간디, 호치민, 발터 벤야민 등 세계 유명 묘역 30 곳을 검토하였고, 삼국 고려 조선시대 왕릉도 염두에 뒀다. 결론은 고구려 시대 고인돌을 근거해 봉분(封墳)을 너럭바위로 정하고, 무덤 위에는 지관(智冠) 스님이 꾸밈 없는 글씨체로 쓴 '대통령 노무현' 여섯 글자만 새겼다.
무덤 안에는 납골함과 지석(支石), 그리고 참여정부 5년의 기록이 담긴 CD를 봉안했다.
그 안에는 참여정부의 철학도 담았다.
제가 문화재청장으로 부임되고 얼마 안되어 노대통령은 어느날 저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문화재청장도 참여정부의 국정 기본방향은 알아야 한다."면서
"첫째, 정경유착을 뿌리 뽑는다. 기업인 돈도 안 받고 세무 사찰도 안 하겠다.
둘째, 영호남 갈등 해소다.
셋째, 지방분권으로 지방의 힘을 기르겠다."
"저에게 은퇴하면 지방에 가서 좋은 책을 써서 명작의 고향을 만들고, 가능하면 외딴 섬에서 살라"고 했으나 섬으로 귀양은 못 가겠어서 부여로 가서 문화유산을 안내하며 지내고 있다.
"넷째, 특권과 반칙을 뿌리 뽑기 위해서 권력기관 힘을 빼는 건데 이게 제일 어렵다."고 그러셨습니다.
어디까지가 권력기관입니까? 물으니
"검찰청, 경찰청, 국정원, 국세청"
그리시면서 "한마디로 말해서 전화 왔는데 기분 나쁘면 다 권력기관이다." 그러셨습니다.
납골함은 우리시대 최고 도예가 박용숙 백자함,
조각가 안규철의 연꽃문양 석함,
CD보관함은 원로 도예가 김희경의 백자함,
지석은 유명한 고령 오석에 새겼다.
모두 기증 받은 것이다.
시공은 인간문화재 윤태중 석공이 했다.
50m 코르텐강 강판으로 복장을 설치한 것은 왕릉에 준하는 존엄을 보여주는 것이다. 묘역은 전국 도로망의 이미지를 팔도(八道)로 구획하고 그 사이에 종묘월대(宗廟月臺)처럼 박석(薄石)으로 장식했다. 박석은 고창, 해남, 부여, 울산 등 전국 팔도에서 가져오고, 경복궁 광화문 앞 월대를 장식했던 박석의 상징인 강화도 박석과 황해도 해주 박석까지 실어왔다.
이 모두가 지자체 단체장과 석재상으로부터 기증(寄贈)으로 받은 것이다.
문화재청이 권력기관이라 강제(強制)한 것이 아니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에 쓴다고 하니까 모두가 자진(自進)해서 보내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추모 기간에 전국 곳곳의 담벼락과 아스팔트 위를 장식했던 노란 리본의 추도문을 박석에 새기는 것으로 아주 작은 비석을 대신하기로 했다. 박석에 추도사를 새긴 분은 이름과 함께 성금을 내 준 것으로 묘역 공사에 든 모든 공사비를 충당했다.
바르셀로나 싸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ília) 성당은 안토니오 가우디 사옥 입장료로 계속 완성해가기로 유명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묘역은 박석에 추도사를 헌정한 국민 성금으로 이루어졌다는 또 다른 전설적인 기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궁할 때 쓰려고 아직 팔지 않은 박석이 4000장 남아 있다.
'작은비석건립위원회'는 이렇게 임무를 끝냈지만 묘역공사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주변 녹지와 공원, 그리고 대통령기념관을 위하여 '봉하마을공간조성위원회'로 확대해서 계속 일했다. 이때 문재인 대통령도 위원으로 제 밑에서 일했다.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자연생태공원부터 주변 식재된 나무들, 봉하마을 정비사업, 여민관(與民館)을 비롯한 부속 건물 건립, 모두가 지난 10년간 끊임없이 정성스럽게 계획되고, 검토되고, 시공되어 오늘의 노무현대통령묘역이 조성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노무현대통령기념관'이 완공되어 유품과 영상 자료로 노대통령의 삶과 위업을 기리는 공간을 갖게 된 것이다. 기념관 준공과 함께 지난 가을 봉하마을공간조성위원회가 해체되었다.
저는 이 묘역공사에 우리나라의 최고 가는 전문가들이 수없이 봉하마을을 내려와 논의했던 그 헌신적인 봉사와 예술가들의 흔쾌한 기증, 그리고 국민 성금으로 이루어졌음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께 보고 드리는 것이 그분들의 노고에 값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저는 참여정부에서 4년간 문화재청장으로 일했고 사후 14년간을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지내다 이제 비로소 18년 만에 청장에서 해임된 기분을 갖고 있다.
묘역 조성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노무현 대통령 어록(語錄)을 새기는 일이었습니다. 글씨는 노 대통령의 학교 선배이기도 한 신영복 선생에게 위촉(委囑)해 놓았지만 어떤 구절을 새길까 고민 고민하고 대통령의 저서를 모두 찾아 읽다가 노무현 대통령께서 국민들에게 한없이 바라는 마음이 담긴 이 글을 새겼다.
"민주주의 최후(最後)의 보루(堡壘)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組織)된 힘입니다"
촛불혁명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지금 우리는
"역사는 더디다 그러나 진보(進步)한다"는 노무현 대통령 말씀을 새기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님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어 감사합니다...
* 코르텐강(Corten Rusty Steel) 녹슨 철판 느낌의 안정녹安定綠 내후성耐朽性 강판鋼板,
출처,
https://youtu.be/U7u5qLLc9_A
첫댓글
인간 노무현은 인간 박정희처럼 앞으로
보기 힘들겁니다!
욕도 많이 먹는
조기숙교수가 노무현정신이 무엇인가
하는데 민주당 강성 지지자나 온건 지지자
조금씩 말이 다르더군요!
진정한 후계자를 자처하는데
用美를 이해하는게 달라요.
참모들조차 당시 다들 딴 소리 했다는 겁니다.
저는
집단적 광기를 봤습니다.
우리들에게
과분한 분입니다!
누가 후계자입니까!
잘 묘역 꾸미셨어요.
노무현만한 사람이 없네요.
그 글귀 저도 봤어요.
감동이요 아니요.
저걸 어떻게 이해할까
나는 어떻게 저 글을 이해하고 있나
자문했습니다.
더디 가겠다 싶었어요.
아무도 인간 노무현 못따라갑니다.
그럼 더디 갈수밖에요.
계승자 없습니다!
봉하마을을 두번 갔었는데 한번은 부엉이바위 아래 시든 꽃다발 옆에 앉아
기억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생애를 떠올려 보면서..
다시한번 요즘의 모습을 가보고 싶습니다.
달변에다 목청도 시원한 유홍준 청장도 간간이 목이 결리고 떨리는 것 같습니다.
사람사는 세상을 여는 굳은 의지와 신념속에 살다간 노무현,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75세시니 앞으로 5년이 활발히 활동할 마지막 시기입니다.
사실 그동안 낸 책으로도 충분합니다.
서울대 미학과가지곤 부족하지요, 홍대로 가서 미술사학, 성대가서 미술철학박사
받고 영남대 교수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마침 운입니다. 문화재청장을 하셔서 업적이 있으면 됐습니다.
120세는 대부분의 분들은 허락이 안됩니다.
가시기전에 미술철학 외국번역을 다시해야 하는데
지금 이사장 자리있을때 예산 주고 미술철학 번역 작업
맡겨야 하는게(지금 번역이 제대로 안된거 많습니다)
그게 이분의 남은 소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말하면 그냥 아실거에요!
미술철학박사 학위 따면서 힘드셨을 겁니다
미술철학도 번역오류 많습니다.
그래서 담론의 장이 형성 안됩니다
서울대 철학과는 노령세대는 돈만 있으면 들어갔고요
미학과를 저평가하시는군요. 그래도 거기 출신들이 한시대를 주름잡기도..다만 한사람 누항(陋巷)의 장똘뱅이처럼 시속(時俗)에 변한 자도 있고.. 유교수도 한 시대의 앞에 서 있었던 일을 긍지로 아는 것이 뚜렷하게 보이네요. ^^
이보님이 솔직하게 쓰셨습니다.
제가 후세대라고 미학과를 저평가한다고요.
유교수도 뛰어난 분인데 그분을 앞세워 말씀하시는건
역으로 이런 논리가 성립합니다.
왜 홍대로 성대로 갔느냐, 미학과로 충분한데! 이런 무례가 어디있나요!
실력이 없어서냐 하고 물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미학과에서는 가르치지 않는다면 제말이 맞고
실력이 없어서라고 하면 유교수를 모독하는 말을 하는게 됩니다.
서울대 미학과에서 가르치는 것이 유교수에겐 충분하지 않았다 해도 그건
학과 특성상이라고 볼수도 있는데 낮춰 본다고 하시면
과분류가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제 요지는
업적은 업적이고 번역오류는 오류입니다.
당시 업적과 미술철학 번역오류는 무관합니다.
정리해야 합니다.
미술계나 문학계를 제가 모른다고 보신거 같습니다.
곽말약의 변절도 아는데~ 전 등잔이 아닙니다.
등잔밑이 어둡다는 이 경우에는 해당이 안됩니다.
ㅅㅅㅇ 사건은 몇 심까지 갔습니까!
저희 60년대에는 미학과라는게 뭔 공부를 하는지도 몰랐고 이마 서울대 배지가 그리워 선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국사학과등 지원미달 학과도 있었거든요.
유교수는 메일로 몇번 대화한 적이 있는데 박식을 가장하지 않는 솔직함과 상대의 말이나 주장을 겸허히 수용하는
금도(襟度)가 있었습니다.
저는 조금 후세대지만 60년대의 입시풍토나 학과별 수준에 대해
약간 알고 있습니다.
언급하신 내용과 제 인식이 크게 차이나지는 않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어찌 알았냐 의문이 있으실 수 있지만 개인적 소스를 통해 알았죠.
서울대 출신 동창에게도 얘기했습니다.
이 세대에게서도 이같은 저항이 있는데 도제관계나 다름없는
사회에서 敢, 不敢입니다.
유홍준교수는 많은 업적을 이뤘죠
전문지식을 쉽게 대중에게 전달한 공을 제일로 봅니다.
그분은 현학적인 어투나 지나치게 교양을 드러내려 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먼 분입니다.
사실 노무현정신과 상당히 일치하는 분입니다!
여담으로 유홍준 교수의 낙양의 지가를 올린 명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편 남도답사일번지>를 읽고
크게 감동하여 몇권을 구입, 모임의 학생들에게 나눠준 적도 있고 또 메일로 보낸 독후감에 책의 월남사지를
지나며라는 대목중 '어느해 여름 돌담위에 핀 능소화는얼마나 예뻐던지..' 를 상기시키며 '능소화의 아름다움은
보면서 어찌 돌담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하는가..'라고 지적했더니 수년후 문화재청장이된 뒤 전국의 아름다운
전통돌담을 열군데인가 선정 문화재로 지정을 하더군요.
당시 웹상에 <돌담 단상斷想>이란 글을 쓰며 각도의 돌담의 특색을 설명하는 글과 돌담에 얽힌 선조의 시를
소개하는 글을 쓴 적도 있었는데 아마 돌담의 문화재 지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나름 추측해 봅니다, ^^
잘 하셨네요!
그게 이 나라가 한발씩 나가는 것 아닐까요!
사람마다 다르니 제 생각인데
어느분야든 제발 뭐 대단한 업적이나 내 놓으려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뭐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한가요
인류구제 한 사람 보셨어요!
곽말약 보니 어떤가요!
부럽다면 제 정신 아니죠. 지 자식 죽어도 잘못 가르쳤다고 반성문을 안쓰나
강청 아부시를 쓰질 않나
뭐 저도 별거없습니다.
내가 종사한 분야에서 성실히 일했으면 됐어요
제가 쓴 글이 다 누구 이야기입니까
인간이야기잖아요!
누가 누굴 선도하고 가르치고 내가 좀 낫고
친절한 금자씨 영화대사 기억 안나세요
저 포함입니다
너나 잘하세요!
이 소리가 나이가 팔십이 돼도 나는 잘하고만 있는데 저넘님때문에!
이걸 뭐라 합니까!
곽말약은 그 지식 정신 어디다 팔았습니까!
지 목숨 구하려고 팔았습니다.
잘못됐다는 건 노령세대 일반관점이고요
전 인간이 저럴 수 있구나
나는 되도록 안 그래야지 합니다
그럼 제가 안그럴까요 그럴까요!
또 그럽니다^^
역사의 공동왜곡자, 협조자요 나만 억울하다는 존재요
저 사상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교조주의자들이
우립니다.
남탓이 인간특기(안배워도 잘하는)고 자기합리화가 아예 본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