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볼수 없었던 역사를 바꾼 여인 미실은 필사본인 화랑세기에 처음 등장한 여인으로
예전 사극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고현정이 연기한 미실을 전우회분들께 소개 합니다
신라의 한 시대를 풍미한 미실은 진흥왕 동생과 결혼을 했지만 나중에 진흥왕의 후궁이 돼 아이를 낳으며 진흥왕의 권력을 토대로 자신의 꿈을 펼쳤다. 경주 서악 선도산자락의 진흥왕릉.
사랑이 삶의 전부일 수도 있다. 사랑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고,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리기도 하는 역사적인 일들에서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실감하게 되며 사랑과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신라시대 정복군주 진흥왕의 죽음과 태자 동륜의 이해하기 어려운 죽음에 대한 기록, 진지왕의 폐위, 사다함의 출전 등등 엄청난 일들의 이면에 미실의 사랑이 개입돼 있다면 역사를 다시 꼼꼼하게 공부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미실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까지 3대에 걸쳐 후궁으로 역할을 맡아 신라의 흥망성쇠에 깊숙하게 관여했던 요부이자 여장부 등으로 회자되고 있다.
미실은 진흥왕의 동생 세종과 결혼했지만 남편 이외에도 진흥왕, 진지왕, 화랑 사다함, 설원랑, 동생 미생랑에 이르기까지 7명의 정인을 만들어 8명의 자녀를 출산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권력의 핵심녀로 활약하며 신라의 흥망성쇠에 깊숙이 관여했던 역사 속의 인물 미실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미실이 3명의 왕을 비롯해 7명의 정인을 두며 활약한 무대가 황룡사라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경주의 중심으로 거론되는 황룡사지.
◆미실의 탄생
미실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드러난다. 미실은 제2대 풍월주 미진부와 묘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라 제10대 풍월주 미생랑의 누나이기도 하지만 그의 정인이기도 하다.
미실의 외할머니인 옥진궁주는 칠색조가 자신의 가슴에서 날아 묘도에게 가는 꿈을 꿨다. 옥진궁주는 꿈을 이상하게 여겨 묘도의 방으로 가 보았는데, 이때 미진부와 묘도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옥진은 기뻐하며 두 사람에게 귀한 딸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후 묘도는 미실을 낳았다.
미실의 아버지 미진부는 제2대 풍월주 화랑의 우두머리로 신라의 병권을 거머쥔 막강한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사람이다. 미진부의 아버지는 아시공이며, 아시공의 아버지는 선모라고 부계를 밝히고 있다.
미진부는 법흥왕과 벽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삼엽공주와 아시공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실은 법흥왕의 외증손녀가 되는 것이다. 벽화는 날이군주 파로와 벽아부인의 딸이며, 벽아가 섬신공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위화랑이다. 위화랑은 초대 풍월주이자 소지마립간의 마복자로, 4대 풍월주 이화랑의 아버지이며, 오도공주와의 사이에서 옥진(玉珍)과 금진(金珍) 등의 딸을 낳았다.
진흥왕이 귀족들의 힘을 빼기 위해 정복전쟁을 시작하며 백제의 한강유역을 빼앗고 순수비를 세웠다.
미실의 어머니 묘도부인은 법흥왕의 후궁이다. 묘도부인의 어머니는 같은 법흥왕의 후궁인 옥진궁주로서 위화랑과 오도부인의 장녀이다. 옥진이 7색조가 가슴으로 들어온 꿈을 꾸고 영실과 관계를 가졌으니 이때 생긴 아이가 바로 묘도부인이다.
옥진은 영실과의 사이에서 묘도, 사도, 흥도 등의 세 딸과 아들 노리부를 두었다. 그중 사도는 진흥왕의 비이자 대원신통의 종으로서 진지왕의 어머니이다. 흥도는 기오공과의 사이에서 진지왕의 비이자 김용춘의 어머니인 지도부인을 낳았다.
미실의 외모를 두고 화랑세기는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를 닮았다’고 기록하며 인물이 출중하게 빼어남을 묘사하고 있다.
진흥왕은 나라의 힘을 기르고자 화랑을 육성했다. 미실은 원화가 돼 화랑세력의 우두머리가 되기도 했다. 경주 화랑마을에 전시된 화랑들의 동상.
◆미실 쫓겨나다
미실은 나중에 제5대 풍월주가 된 사다함과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진흥왕의 생모 지소태후가 이사부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세종과 미실을 결혼하게 하며 신라 왕실의 뿌리를 흔들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세종이 미실을 마음에 들어하며 어머니인 지소태후에게 미실과 결혼하게 해줄 것을 졸랐다. 지소태후는 미실이 박영실의 외손녀인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이사부와 상의해 마침내 세종과 미실을 결혼시켰다.
세종의 아내였던 미실은 진골정통이었던 지소태후가 대원신통인 사도왕후를 폐출하려 하자 이 사실을 은밀하게 사도왕후에게 고했다. 사도왕후가 이를 다시 진흥왕에게 고해 지소태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실이 진흥왕을 전쟁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진흥왕은 대가야를 정복해 통일신라의 기반을 마련했다.
지소태후는 미실의 밀고로 일이 틀어진 것을 알고, 미실을 출궁시키고, 법흥왕의 동생 진종의 딸인 융명을 세종의 새로운 배필로 맞아들였다.
미실은 출궁해 있는 동안 사다함이 찾아와 사랑을 고백하자 이를 받아들여 둘은 깊이 사랑하게 됐다.
세종은 미실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앓아 눕기까지 하며 어머니에게 미실을 다시 불러줄 것을 간청했다. 아들을 생각한 지소태후가 사다함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미실을 다시 불러들였다.
사다함은 전쟁터에서 돌아와 미실이 다시 궁으로 들어간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청오가를 부르며 슬퍼했다. 이어 사다함은 친구인 무관랑의 죽음으로 슬퍼하다가 죽었다.
미실은 천주사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고 있었는데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어 아들을 낳아야겠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미실은 태기가 있었고, 하종공을 낳았다. 하종은 사다함을 빼닮아 당시 사람들이 사다함의 아이가 아니냐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진흥왕은 미실의 간계에 의해 43세의 젊은 나이에 흥륜사에서 마지막 여생을 마무리 했다. 흥륜사터로 추정되는 경주공고에 남은 흔적들.
◆미실의 사랑
미실의 사랑은 현대적인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시대적 환경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편하다.
지소태후는 왕태자 동륜이 장성하자 딸 만호를 동륜과 맺어주려 했다. 이때 동륜의 모후이자 미실의 이모인 사도왕후는 미실에게 “네가 태자를 가까이 해 아들을 낳는다면 너를 부인으로 삼아주겠다”고 말하며 동륜과도 정을 통하게 했다.
이때 미실은 진흥왕의 명에 따라 후궁으로 진흥왕을 섬기면서 왕후에 대등한 전주가 됐다.
미실은 또 남편인 세종이 공을 세우도록 하고자 그를 출병시키고, 자신은 그 사이에 세종의 보좌인 설원랑은 물론 자신의 동생 미생랑과도 정을 통하며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진흥왕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미실을 총애하여 원화제도를 29년 만에 부활시키고, 미실을 원화로 삼았다. 미실은 당시 풍월주였던 세종의 권한을 이어받아 낭도를 거느리면서 병권을 손에 넣었다.
진흥왕이 왜적의 침략을 막고자 보강한 명활산성. 기록에 남은 명활산성 작성비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태자 동륜이 진흥왕의 후궁인 보명궁주를 탐하는 현장을 목격한 미실이 날랜 병사를 동원해 동륜을 살해하고, 동륜이 보명궁주를 범하기 위해 담장을 넘다 큰 개에 물려 죽었다고 보고하도록 했다.
진흥왕은 끝내 미실과 동륜의 관계를 밝혀내고 미실의 원화자리를 박탈해 궁 밖으로 몰아냈다. 이에 세종이 다시 풍월주의 지위를 회복했으나 미실이 세종에게 같이 물러나기를 청하니 세종은 설원랑에게 풍월주의 자리를 넘겨주고 궁 밖으로 따라 나섰다.
사도왕후가 진흥왕에게 미실을 용서하기를 청했고, 미실 또한 눈물로 용서를 구하니 진흥왕이 이를 받아들이고 미실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미실이 옥종공을 출산할 때가 되자 진흥왕은 그를 마복자로 삼는다.
미실은 이후 진흥왕이 병에 걸리게 되자, 사도와 함께 국정의 중심으로 등장해 거칠부에게 병권을 맡기고 어려운 일을 해결하게 했다.
이어 미실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인 금륜과 정을 통하면서 왕후가 되기 위한 전략을 추진했다.
진흥왕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보강해 쌓은 남산신성. 남산신성비가 발견돼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진흥왕이 서거하자 사도태후, 거칠부와 함께 손을 써 금륜을 왕위에 오르게 해 25대 진지왕으로 등극하게 했다. 그러나 막상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 왕후의 자리는 미실이 아닌 지도부인에게 돌아가고, 상대등이 된 거칠부가 국정의 전반을 좌지우지하며 안하무인격이 되어 미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이후 진지왕이 여색을 좋아하고 방탕하게 살았으며, 미실을 왕후로 봉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으며 거칠부의 꼭두각시가 됐다. 또 미실을 대하는 태도에도 열기가 식어가자 미실은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미실은 외삼촌이자 태후의 오빠인 노리부와 논의해 진지왕을 폐위했다. 이어 미실은 동륜의 아들 백정과 정을 통하면서 다시 왕후가 되는 전략을 거침없이 추진했다. 미실은 병권을 거머쥐고 있는 노리부와 협력해 먼저 상대등으로 있던 거칠부를 제거했다.
이어 미실과 노리부가 동륜의 아들 백정을 왕에 추대해 제26대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다. 노리부는 바로 스스로 상대등의 지위에 올라 실질적인 신라의 주인으로 등장했다.
이때 진평왕은 13세의 미동이었지만 미실은 40에 이른 여인으로 늙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실은 진평왕의 후궁이 되어 보화공주를 출산했다.
진지왕 폐위 당시 화랑은 문노를 따르는 호국선과 설원랑을 따르는 운상인으로 세력이 나눠 있었다. 문노 등이 진지왕 폐위를 반대할까 우려한 노리부는 호국선과 운상인을 합치고, 미실을 다시 원화로 세웠다.
미실은 세종을 상선, 문노를 아선으로 삼고, 설원랑과 정을 통해 그의 불만을 잠재우며 그를 따르는 세력도 휘하에 뒀다. 또 문노를 풍월주의 지위를 잇도록 해 미실에게 충성을 바치게 해 최고의 실력자로 군림했다.
진평왕 즉위 초반에 미실은 새주가 됐고, 노리부는 상대등에 임명됐다. 진평왕은 보명과 미실을 각각 좌후와 우후에 봉했다. 진평왕 7년인 585년에 미실은 자신의 동생인 미생랑을 제10대 풍월주에 임명하고 그를 정인으로 삼아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하게 움켜잡았다.
백제와 가야세력, 고구려, 왜 등에서 전쟁을 도발해 진평왕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면서도 서서히 중심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진평왕 중반기에 미실은 병세가 나타나자 세종, 설원 등과 함께 영흥사로 들어가 중이 됐다. 미실과 사랑해 보종공을 낳은 설원랑이 미실을 따라 영흥사로 들어와 끝까지 병수발을 들면서 함께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미실은 드라마 보다 더욱 호색한 여인으로 정략결혼한 진흥왕의 동생을 기반으로 당시 절대자이자 시 아주버니인 진흥왕마져 치마폭에 감싸고 권력의 정점에 올랐으며
진흥왕의 아들마져 자신의 미모로 유혹 하여 성밖에서
객사 하게 만들어 나약한 진지왕을 권자에 오르게 하여 정실 왕비로 권력의 정점을 찍으려 했으나
호색한으로 바람기가 다분한 진지왕이 다른 여인을 왕비로 공표하자 패륜적인 사람으로 몰아 부쳐 폐위에 이르게 하여 자신의 말을 잘듣는 진평왕을 내세움으로
권력의 정점을 찍었으나 세월의 흐름속에 나중 승려로서 인생을 마감했다는 설이 있다
이여인의 이야기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오지않는것은 통일 이전 신라의 팽창 전선기의 성스러운 시기에 한여인으로 인해 왕궁의 흔들림을 도저히 적을수 없어 의도적으로 빼지 않았을까 짐작 한다
첫댓글 아주 파란만장 하게 살았군요. 복잡한 역사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