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란 무엇인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이치를 가리키는 종교용어-
원래는 ‘인생의 여로’라는 길의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거기에 추상적인 의미가 첨가되어
인간의 행위에 꼭 따라야 할 기준과 원칙 등의 의미로 변질되어 갔다.
특히, 동양의 여러 종교에서는 이 도를 매우 중요한 가치기준으로 여겼기 때문에
철학·문학·사상·예술·문화 등 동양의 여러 정신적·물질적인 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이 도는 시대와 장소, 그리고 인물에 따라 각각 상이하게 설명되어 왔다.
유교에서는 특히 도의 도덕적 면을 강조하여 일종의 생활규범
인간의 가치기준 등의 핵심 규범으로 이해하였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중심으로 하는 원시유교에서부터 주자학(朱子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항상 이 도의 기준은 윤리적 측면에서 논구(論究)되어 왔다.
노장사상(老莊思想)에서의 도는 종교의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어 우주만유의 본체이면서
형태 지을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실재(實在)로서의 도를 주창하였다.
인생의 모든 행위와 자연계의 섭리는 모두 도 아님이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얼마나 그 도에 가까우냐로 됨됨이를 따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불교의 경우 진리(Dharma) 자체를 도라고 보았다.
특히, 사제(四諦)·팔정도(八正道) 등에서 설명하는 도(道, Marg)는
‘올바름’·‘당위(當爲)’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들 세 종교에서 도는 각각 다른 면을 강조하지만, 공통되는 점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도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다.
즉, 사람이 이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현실의 피상적인 차별이나 변화를 떠나서
절대불변의 입장에서 참다운 자유를 얻게 된다고 본 점이다.
따라서, 동양문화의 바탕은 이 도를 시발과 종착역으로 삼았고, 인위적인
기교보다는 자연 섭리에 따르는 무위자연적(無爲自然的)인 삶을 존경했으며
그와 같은 삶의 여로를 통한 진리 증득(證得)이 값진 일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동양종교와 도1. 도교도가(道家)의 철학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노장적 철학(老莊的哲學) 위에 신선사상(神仙思想)과 통속적 민간신앙까지 첨가시켜
종교로서 등장하는 것은 송나라 때의 일이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는 특히 큰 세력을 얻어 유교·불교 등과 함께
동양의 정신적 지주로 등장하였다.
도교에서의 도는 다분히 유신론적(有神論的)인 종교사상에 기반을 둔다.
도는 우주와 만유일체의 근원이며, 피상적인 언설(言說)이나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뜻에서 도는 무(無)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유(有)를 창조하기 때문에 허무로서의 무는 아니다.
도는 하나[一]를 생성한다. 그 하나에서 다시 둘[二]이 생기고, 둘은 셋[三]을 만든다.
이 셋에서부터 만물이 생성된다고 설명한다.도교에서의 삼은
삼원(三元)→삼기(三氣)→삼재(三才)로 변하여 만물을 만든다고 본다.
이 삼은 나중에 천상삼계(天上三界)라고 하여 도교의 신앙대상이 되었다.
삼계의 첫째는 태상노군천사태청경(太上老君天師太淸境),
둘째는 구선상청경(九仙上淸境),
셋째는 구진옥청경(九眞玉淸境) 등이며, 이 세 하늘에 각각 신선이 산다고 설명한다.
이 세 하늘의 주신(主神)은 삼청(三淸)이다.
첫번째의 태상노군천사태청경은 빈곤과 죽음이 없는 영원의 이상세계이고
두번째의 구선상청경은 현실 지상계로서 색욕(色欲)과 빈곤, 죽음 등이 뒤따르는
고통의 현실세계이고, 세번째의 구진옥청경은 즐거움이 없는
암흑과 괴로움의 지하세계를 상징한다.
따라서, 도교의 목적은 천상의 세계에 태어나서 안락(安樂)을 얻는 것이다.
천상세계에 태어나는 첩경이 바로 도를 깨달아서 도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인간은 원래 도에서 비롯된 존재이지만 후천적인 나약과 인위적인 행위 때문에
도에서 점차 멀어지게 된 존재이다.
따라서, 무위청정(無爲淸淨)한 삶을 영위함으로써 도에 귀일(歸一)할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천지와 더불어 장생(長生)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요컨대, 도교의 도는 만유의 근원이다.
그러나 형체 지을 수 없고 인격화할 수 없는 ‘무엇’이다.
도를 회복하여 가진 삶은 가장 이상적인 삶이며, 어떠한 인위적 가치덕목도
도를 방해하는 유위(有爲)의 작용일 따름이다.
그 도교의 수도자들을 도사(道士)라고 부르며, 도를 얻기 위한
비술(祕術)을 신선술이라고 부른다.
2. 유교공자는 천도(天道)에 대해서 강력한 주장을 편 바 있다.
즉, 인도(人道)는 천명(天命)에 따르는 것이며, 천도는 인도를 이끄는 진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논어』에서는 그 인도를 다시 세분하여
왕의 길(王之道)
군자의 길(君子之道),
아버지의 길(父之道) 등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그와 같은 여러 도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인(仁)이었다.
인이란 개인적으로 보면 자아의 완성이지만, 외면적으로 말하면 사회 구제이다.
공자가 말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뜻도 바로 그것으로서
모든 인간은 도를 회복함으로써 인생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 할 이상적인 도의 방법은 덕(德)의 실천이다.
덕이란 도의 현현체(顯現體)일 뿐 아니라, 가장 두드러진 작용의 하나이다.
이 덕은 소극적으로 해석하면 인륜(人倫)의 실천 또는 불륜(不倫)을 극복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도움을 가져다 주는
실천행이 될 수 있으며, 앞서 말한 인격도야와 사회 구제가 가능해질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덕은 도의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즉, 도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실재적으로 확립시키고 있으며, 도의 개념과
여러 덕목의 본질적 의미가 일치되고 있다.
그러므로 유교의 도는 윤리적 표현이 된다. 모든 인간본성을 뒷받침하는 근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인간답다고 하는 의미는 곧 도를 얼마나
실천하느냐 하는 점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가 비록 현실적 현현체라고는 하나, 그 구체적 방법수단이 되는 덕목은
사람과 시대에 따라 각각 특수성을 가지고 제창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후대의 유가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타당성이 있는 근본원리인
도와 특수성에 대한 자각과 실천적 노력으로 그 교리체계를 확립시켰다.
『논어』에서 말한 예·충·효·인·신·성(誠) 등의 덕목은 바로
도의 행동화일 뿐 아니라 도의 실천방법이기도 하다.
요컨대, 유교에서는 천명이요
인간의 본성인 선과 인의(仁義) 등의 덕목을 실천하는 길이
바로 도의 실현이라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인간도덕으로서의 인도를 밟고 행하는 것이 그대로 천도의 실현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유교의 도는 바로 인간본질의 실현이면서 윤리규범이요
요체가 될 수 있다는 기준이 마련된다.
바로 이 점에서 유교와 도교의 도에 대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노장에서는 오히려 인륜의 입장을 버리고, 현상의 밑바닥에 잠재되어 있는
자연의 도와 합일(合一)하는 것을 이상으로 내세운다.
세계의 진리는 이곳에 있고, 현상은 이 도의 발현으로써만 의의를 찾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그런 뜻에서 유교의 도는 도교의 그것보다 좀더 인격적이며 실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불교불교에서는 여덟 가지의 도를 말한다. 즉,
인간고(人間苦)를 소멸하는 길을 팔정도라고 설명하였다.
그 여덟 가지의 도는 올바른 생각[正見], 올바른 사유[正思],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업[正業], 올바른 생활수단[正命],
올바른 신념[正念],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마음가짐[正定]이다.
이 여덟 가지의 도에 의해서만 인간은 열반(涅槃)이라는
이상적 경지를 체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여덟 가지의 도는 종교적 행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실천의 의미도 가진다.
이 여덟 가지를 요약해서 계(戒)·정(定)·혜(慧)라고 한다.
이것을 근본불교에서는 삼학(三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초기불교에서
가장 근원적인 실천수행의 방편이었다.
즉, 인간고를 내면적인 원인으로 파악하여 탐(貪)·진(瞋)·치(癡)의 삼독(三毒)이라고 부르고
그 고의 소멸은 삼학의 수행으로서만 가능하다고 석가모니는 역설하였다.
삼학 중 계는 윤리적 생활태도를 가리킨다.
산 목숨을 죽임, 도둑질·이성관계·거짓말·음주 등의 다섯 가지
나쁜 일을 범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정이란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수련방법을 가리킨다.
즉, 외부지향적인 번뇌의 고삐를 잡아 궁극적 자아의 실현을 도모하는 공부방법이다.
혜는 구체적으로 반야지(般若智)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물의 현상 속에 감추어진 진실, 세계와 인생의 실상(實相)을 바로보는 안목이다.
이 삼학의 수련이야말로 삼독을 파기하고 열반을 얻게 하는 첩경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도는 진리 자체라는 뜻과 함께 도덕적 행위규범이 되기도 한다.
서양의 종교학자 루돌프(Rudolf,O.)는 이 불교의 도는 성스러움이라는
종교적 신성에 대한 불교적 표현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불교의 도는 올바름으로 나타나며, 그 올바름이 인간행위의 주체여야 한다는
불교적 주장이 동양사상의 형성에 지대하게 공헌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요컨대, 불교의 도는 인생의 당위이자 수행의 핵심적 덕목이다.
특히, 선불교(禪佛敎)에서는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열반이라는
궁극적 경지를 도로써 설명하기도 하였다.「증도가 證道歌」와 같은 선시(禪詩)는
그 대표적 실례로서 열반을 얻은 부처의 경지를 도인(道人)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도인의 경지를 ‘배움이 끊어지고 함이 없는(絶學無爲)’ 등으로 묘사하여
다분히 노장적 분위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즉, 동양의 세 종교에서는 이와 같이 각각 다른 입장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서로
혼융(混融)되어 이 도의 사상을 실천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삼교융합의로서의 도도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걸어야 할 길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타당한 가치이기 때문에 삶의 방식은 또한 도 아님이 없다.
따라서, 도에는 ‘간다[行]’, ‘행한다’라는 본질적 의미가 내포된다.
이러한 면에서 도는 삼교융합의 특성을 지닌다.
유가의 도는 규범·인륜 등의 뜻이 있고, 도가의 경우 우주만물의 근원
즉 절대성을 지닌 개념이며, 불교의 경우 올바른 삶의 길로서 제시되었다.
삼교에서 공통되는 원리는 인간이 무엇을 행하기 위한 기술방법이 되는 도리라는 뜻이다.
표현방법은 세 종교가 각각 다르지만, 인간의 도리라는 관점에서
이 세 종교는 그 궤도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도리는 물론 진실성 있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각자가 서로의 입장을 고수하는 태도가 아니라 타협과 여지가 있는 공간이 바로 도리이다.
유교에서는 ‘선한 본성’이 되며, 도교에서는 ‘무위자연’이 된다.
이들은 각각 도를 자신의 입장에서 발전시켜 나가지만, 사상으로는
도가 동양정신의 중핵(中核)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인간사의 모든 현상을 이 도에 걸맞는지 아닌지의 여부로 판별한다.
바둑을 두는 일은 기도(碁道)가 되고 차를 마시는 일은 다도(茶道)가 된다.
심지어는 상대를 베는 검술을 검도(劍道)라고 한다.
즉, 인간의 도리를 따르는 모든 행위의 원천을 도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 나라와 같이 시대별 종교성향이 뚜렷한 경우 도의 본질적 작용이
삼교융합의 예로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단군신화(檀君神話)라든지 화랑(花郎) 등의 기본 범주는 바로
이 도라는 개념의 실천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도사상1. 전개1.1. 홍익인간과 도:단군조선의 시조였던
환웅(桓雄)의 개국이념은 홍익인간이다.
그때의 홍익은 ‘널리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길’로서 이것이 한국적 도의 효시가 된다.
이념적으로 보면 홍익인간은 화합과 번영의 이상적 실천덕목이다.
즉, 모든 인간의 생명이 존중되고 모든 이익이 균형 있게 분배될 때 사람들은 다투어
상경상애(相敬相愛)·상부상조(相扶相助)의 일체감을 가지고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홍익인간의 이념은 이타행(利他行)이며 상대주의적 인간관이다.
어떤 타율적인 인과율(因果律)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 남을 사랑하고 남을 위하여
희생한다는 숭고한 이념적 이상의 제시이다.
단군신화가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점은 논의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홍익인간의 이상은 신화의 상징을 대변하는 민족정신의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홍익인간은 한국적 도의 출발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도덕생활과 인륜생활의 규범이 펼쳐지는 근원이다.
1.2. 한울님의 도: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경천(敬天)과 조상숭배의 습속을 지니고 있었다.
또, 그것이 인간의 도라고 설명되었다.
또, 불교나 유교와 같은 철학적 종교가 들어 오기 이전부터 내세에 대한
소박한 관념을 품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현세의 유덕(有德)한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지하의 음계(陰界)에 대한 두려움은 악의 유혹을 물리치는 이념의 근거가 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 ‘한울님’을 인격화하기보다는 초월적 내재자(內在者)로서 이해하였다.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이 그 실증이 된다.
한울님에 대한 외경(畏敬)은 곧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며 그것은 동시에 모든
인간을 향한 끝없는 자비의 실천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하늘에 대한 관념은 바로 이 한울님과 그에 관한 도로서 나타난 것이다.
1.3. 화랑과 도: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은 화랑의 연원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시사를 주고 있다.
그 첫머리는 “우리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國有玄妙之道)…….”라고 시작하고 있다.
이어서 최치원은 그 도는 유교와 도교, 그리고 불교를 융합한 도로서
신라의 화랑이 있다고 서술하였다.
최치원에 의하면 화랑은 충효를 윤리근본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유교의 영향이며
또 무위자연을 섭생(攝生)의 도로 삼았는데 그것은 도교의 영향이며
모든 선을 받드는 일을 미덕으로 삼았는데 그것은 불교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였다.
화랑도를 도로서 파악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원광(圓光)에 의하여
제시된 세속오계(世俗五戒)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곧 유·불·도 삼교 융합의 도, 인간 당위의 도가 제시된다.
그때의 도는 바로 화랑의 정신적 지주이자 신라사회의 윤리적 근거였다고 볼 수 있다.
1.4. 가족의 도:우리 나라 고대사회의 기본조직은 혈연 집단이었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고대 한국인은 부계(父系)의 통솔 아래
집약적 농경생활을 영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족의 구성원은 부모를 정점으로 형제자매의 혈연으로 유지된다.
그때 부부·부자·형제·자매 관계 등의 인간관계가 문제된다.
물론, 후대의 가족도(家族道)는 철저히 유교적으로 윤색되었지만 초기에는
단순한 평형관계로 유지되었다고 짐작된다.『위지 魏志』에는 마한의 풍속을
말하면서 “모든 식구가 한지붕 밑에 모여 살며, 장유남녀의 구별이 없다
(其戶在上擧家其在中 無長幼男女之別).”고 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가족도가 우애의 인륜으로 뭉쳐 있음을 시사한다.
1.5. 조상숭배의 도:조상을 숭배하는 습속은 애가심(愛家心)과
효순심(孝順心)에서 비롯된다.
즉, 선조에게서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그 유업을 계승하여
가문의 번영과 자손의 안태(安泰)를 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도이다.
이와 같은 사고 경향은 영혼불멸설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선조들의 영혼은 멸하지 않고 자손들을 명호(冥護)한다는 소박한
감정의 표출이 바로 제사의례이다.『위지』에는 동옥저인들이 부조(父祖)가
좋아하던 식미(食米)를 질그릇에 담아 항상 공양을 드렸다고 하였다.
즉, 부모를 공양하는 것은 살아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일 뿐더러 선조의
노여움을 사지 않고 후손들에게 사복(賜福)하는 첩경임을 믿는 반증이 된다.
특히, 삼국시대 초기부터 이 조상숭배는 인륜의 으뜸가는 도로서 제시되었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은(기원전 24) 그의 친어머니인 부여의 유화(柳花)를 위하여
신묘(神廟)를 세웠으며,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기원전 18) 친아버지를 위하여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으며, 신라 제2대왕인 남해차차웅은(기원 6)
신라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시조묘를 세웠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조상숭배는 이미 삼국시대 초기부터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영혼불멸설이나 애니미즘적(animism的) 원시종교의 영향을 받아
가장 주목받을 만한 한국적 도의 하나로서 이어져 오게 된다.
1.6. 효의 도:효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지켜야 할 도덕률(道德律)이다.
공자는 『예기 禮記』에서 고대 한국인들의 효의 덕행에 대하여
“동이인(東夷人)인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은 거상(居喪)을 잘하여
3일을 불태(不怠)하고, 3개월을 불해(不懈)하고 3년간이나
부모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적어도 3세기 이전에 이미 삼국에서는 다투어
이 효행의 미덕을 표창하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4세기 이후 불교와 유교가 도입되면서 이 효의 윤리는
지배적 인간의 도로서 우리 조상들의 삶을 지배하였다.
1.7. 충의 도:삼국시대 이전의 충의 개념은 후대에서 말하는
번쇄적 특징은 갖추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즉, 사회정치체제 자체가 절대적 군주체제가 아니었으니만큼
서로간의 인의와 상층구조에 대한 외경심리로 상징되었을 것이다.
그때의 충은 경(敬)이며, 마음을 다함이다.
가정에서는 웃어른을 공경하고, 촌락이나 부족의 일에 온 정성을 다하고
사회적으로는 웃어른을 잘 섬기고 받드는 일이었다.
군장(君長)에게 절대 복종을 강조하는 충효관은 역시 중앙집권의
틀을 갖추는 삼국시대 중기 이후라고 보아야 한다.
삼국이 정립되면서 군신 간에는 현격한 계층질서가 생겨나게 된다.
한편, 중국에서 충군존왕사상(忠君尊王思想)이 도입되면서
삼국에서는 충군의 윤리가 성립된다.
지리적으로 보아 가장 빨리 충의 개념을 정립한 나라는 고구려였다.
그러나 신라는 뒤늦게 받아 들인 충효관을 사회질서 정립의 기치로서
확립시킨 특이한 예이다. 원광의 세속오계 가운데 ‘사군이충(事君以忠)’이라는
덕목이 제일 먼저 열거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즉, 고대 전제왕권의 확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기준을
이 충의 도에서 찾은 신라적 전개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특징우리 나라에 도교의 경전이 최초로 수입된 것은 삼국시대 초기의 일이다.
고구려에서는 624년(영류왕 7) 당나라 고조(高祖)가 보낸 도사(道士)가 노자를
강론하였고 643년(보장왕 2) 노자의 『도덕경』이 전래되었다.
또, 신라의 화랑 김인문(金仁問)의 본전(本傳)에서는 그가 젊었을 때
노장(老莊)의 전적들을 섭렵하였다고 하였다.
즉, 삼국시대 이래 도가사상은 지도자의 인격함양과 학인들의 덕성을
도야하는 소임의 한 부분을 맡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이후 고려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도가사상은 비록 사상의 주류로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지배적 종교이건 그 근저에 깔린 사상으로서 맥을 이어왔다.
도가사상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가장 근본 원인은 고대 한국인들이
도교수용에 적합한 토착적인 문화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고유의 산악숭배신앙, 신선설(神仙說) 및 그것과 연관이 있는
각종 방술(方術)이 민간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청학집 靑鶴集』 등
우리 나라의 선가서(仙家書)에 의하면, 단군왕검의 할아버지 환인은
동방 선파(仙派)의 조종(祖宗)이었다.
그 도맥은 환웅-단군-문박씨(文朴氏)-영랑(永郎) 등으로 계승, 유지되었다고 하였다.
또, 그 책에서는 환인을 진인(眞人)이라고 하였다.
그가 명유(明由)에게서 수업을 받았고, 명유는 또 광성자(廣成子)에게서
수업을 받았다고 하여, 우리 나라의 도맥을 중국과 연결시키고 있다.
중국의 도서(道書)에 따르면 황제(黃帝)는 광성자에게서 수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세의 가필일 가능성이 높으나, 요컨대 한국 선도파가 당시의
문화관념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실증이 된다.
또 하나 특징은 삼국시대에 자주 언급되는, 천지와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습속이다.
이것을 도교에서는 재초(齋醮)라고 한다.
삼신산(三神山)은 진시황(秦始皇)을 현혹시키려 하였던 방사(方士)의 혹설이라고
이해되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태백산(太白山)이 곧 삼신산이다.
즉, 환인·환웅·왕검은 삼신 또는 삼성(三聖)이라고 불리는데, 이 삼신으로 말미암아
건립된 신시(神市)가 바로 태백산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설은 태백산 외에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이 바로 그것이라는 주장에까지 이르게 된다.
또, 삼신산과 관련된 설화로는 우리 나라의 남부에 중국의 방사가 왔다는 기록이다.
즉, 진시황이 해중(海中)의 삼신산을 찾아서 방사 서복(徐福)·한종(韓終) 등을
파견하였는데 그들은 불로초(不老草)를 끝내 구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린다.
서복은 일본으로 갔고, 한종은 우리 나라의 남부지방에 들어와 마한을 세우고
그 임금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몇몇 기사는 역사적 사실의 진위여부보다는
한국적 도가사상의 전개라는 관점에서 흥미롭다.
이능화(李能和)는 진시황 때의 방사 노생(盧生)과 창해역사(滄海力士)를 시켜
진시황을 쫓은 장량(張良) 등은 모두 우리 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장량 또한 방사였다면, 그가 우리 나라와 관련이 없는 한 그 역사(力士)를
벗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고 반문하였다.
장량은 한나라 고조가 육국(六國)을 세우려 할 때 젓가락을 빌려서
성패의 수를 점치고, 곧 그 일을 말린다.
그런데 점을 치는 행위는 곧 방사의 술수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장량이 처음 황석공(黃石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뒤에는 선인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기를 원하였다 하였는데, 그것은 곧 신선방술을 다루는 일이며
그 연원이 바로 우리 나라에서 비롯되었으리라는 주장이다.
또한, 진시황 때 방사였던 노생이 바다에 갔다가 진시황에게 괴이한 지도를 바쳤는데
그 뒤에는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호이다(亡秦者胡也).”라고 쓰여 있었다.
진시황은 이를 두려워하여 북으로는 만리장성을 쌓아서 호족의 침입을 막고
맏아들 부소(扶蘇)를 시켜 북방에서 몽군(蒙軍)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부소가 자살하자 할 수 없이 호해(胡亥)를 태자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제2대 황제였다.
그의 이름 때문에 앞의 예언이 적중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고선(古仙)의 굴택(窟宅)일 뿐 아니라 도참(圖讖)이나
점성(占星)도 매우 일찍부터 발달하였고, 예(濊)나라에서는 별자리를 보고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예지하였으며, 그 소문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는 것이다.
즉, 도참이나 점성은 선가의 부대적인 학문으로서 노생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그 방술을 배워 진나라의 멸망을 미리 알린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전설과 우화를 이능화는 한국관과 관련시켜 해석하고 이해하였다.
즉, 도교에서 신선으로 숭앙되는 황제가 우리 나라 땅에서 수도하였다는 고증을 시도하였다.
『장자』 재유편(在宥篇)에 황제가 공동산(空同山)에 가서
광성자에게 도를 물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를 그대로 인용한
「음부경삼황옥결서 陰符經三皇玉訣序」에도 역시 같은 내용이 부연되어 있다.
이능화는 이 공동산이 우리 나라 땅에 있다는 것을 논증한 바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노력들은 실증적으로 명백하게 제시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여러 산들과 결부시켜 이 신선방술이 나왔다는 점은
우리 나라가 이 도가사상의 연원이었으리라는 점을 충분히 시사해 주는 일이다.
요컨대, 우리 나라의 도가사상은 철저히 신선사상·산악숭배신앙 등과
맥락을 같이하면서 발전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단학(丹學)과 도교리의 연구와 득도장생(得道長生)을 위한 수련 중심의
도교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신봉되어 내려왔다.
흔히, 사서(史書)에서 도류(道流)라고 부르는 이들은
도교의식을 집행하는 등의 책무에만 충실하였다.
그들은 불교나 유교처럼 종교집단을 형성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민간의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에는 전혀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다.
즉, 우리 나라에서는 교단적인 도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에 민간인, 특히 수련을 통한 선인(仙人)의 경지에 대한 존경이 싹트게 되었다.
수련 중심의 도교가 우리 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신라 때로
당시의 당나라 유학생들 가운데 장생의 비결을 공부한 이들이 있었고
이들의 귀국이 바로 우리 나라에 전래된 효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