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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 향기 스크랩 경주 옥산서원 현판 글씨와 그 외
보일러 추천 0 조회 244 15.04.16 11:46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경주 옥산서원 글씨와 그 외

  - 현판을 중심으로

 

 

역락문(亦樂門): 논어 학이편에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벗이

있어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亦樂을 취한 것이라 한다.

역락문 이름은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이 명명하고 현판 글씨는 한석봉의

글씨이다.

聞風則回 望道而來 不亦樂哉 邦之英才(문풍칙회 망도이래 불역락재 방지영재)

 

화개산을 주산 현무로 삼고 앉은 서원 강당은 흡사 학이 날아갈 듯하다. 

 

동재 민구재

 

민구재(敏求齋): 호고민이구지(好古敏以求之: 어질고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간직하는데

그쳐서는 아무런 의의가 없으며 학문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민첩하게 잠시도 머무름

없이 실천궁행하여 사회에 공헌하는데 있음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에서 민구제(인을 구

함에 있어 민첩해야 한다는 뜻)를 취했다고 한다.

 

서재

 

암수재(闇修齋): 주자자찬 가운데 암연자수(闇然自修)에서 취한 말로 은 숨을 암이고

는 닦을 수이니 이는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나날이 새롭고 밝게 펼쳐져 나감을 뜻하

, 가만히 조용히 스스로 닦는다는 자수(自修)의 의미

 

 

양진재(兩進齋): 양진은 명과 성을 다 갖추어 으로 도덕을 밝히고 으로 의지를 성실

하게 한다는 뜻

擇善惟明 反身惟誠 孰重孰輕 聖賢同行(택선유명 반신유성 숙중숙경 성현동행)

 

 

해립재(偕立齋): 해립(偕立)은 경의해립(敬義偕立)으로 경건한 마음가짐과 신의로서

사물에 대처한다는 것이다.

敬直義方 內外交相 惟操弗忘 天德之光(경직의방 내외교상 유조불망 천덕지광)

경은 바르고 의는 방정하니 안과 밖이 서로 교섭한다. 오직 이것을 붙잡아서 잊지

않으면 천덕이 빛나리라

 

 

구인당(求仁堂)

이곳 옥산서원의 가장 중심이 되는 구인당(求仁堂), 강당은 그 명칭에 있어 회재선생이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남긴 많은 저서 중 대표적 저서인 구인록(求仁錄)에서

유래한 것이다. 선생은 인()의 본체와 실현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많은 노력을 경주 하였는데 이러한 회재선생의 뜻을 안 후학들이 그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붙인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이 구인당의 편액글씨는 조선 전기 4대 서예가 중 한 명인 석봉 한호의 글씨이다.

心德何損 放而曰遠 一念知反卽 此是本(심덕하손 방이왈원 일념지반즉 차시본)

 

현판 상부 첨판에 그려진 룡 - 흡사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는 듯하다.

 

강당에서 바라본 무변루 - 봄 햇살 기운이 가득한 건너 안산이 포근하다.

 

흔히 놓치기 쉬운 생사단 - 향사 때 재물을 검사하는 곳이다.

 

위패를 모시는 사당

 

체인묘(體仁廟): 사람은 로 삼아 성장한다는 뜻

生物之春 在我而仁 體之以身 何不長人(생물지춘 재아이인 체지이신 하불장인)

 

제사를 지낼 때 강당에서 사당으로 이 사다리를 걸치고 재물을 올린다. 

 

흔히 하는 말로 '레드카펫' 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제관들이 이 멍석을 깔고 사당으로 오른다. 

 

 

무변루(無邊樓): 무변은 주염계찬(周廉溪贊) 가운데 풍월무변(風月無邊: 아름다운

자연은 끝이 없다)에서 無邊을 취한 것이라 한다.

처음 문루 이름을 납청루(納淸樓)라 하였으나 노수신이 선생의 유허에 맞지 않다고

무변루로 고쳤다고 한다. 석봉 한호의 글씨이다.

靡欠靡餘 罔終罔初 光歟濟歟 游于太虛(미흠미여 망종망초 광여제여 유우태허)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다, 빛이여 밝음이여 태허에 노닐다

 

 

옥산서원(정면):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기 직전인 54(1839)에 쓴 것이다.

관지(款識)를 보면 만력갑술 사액 후 266년 실화개서 선사(萬曆甲戌 賜額 後 二百六十六

失火改書 宣賜) 명나라 연호 갑술년 선조 7(1574) 사액 후 266년이 되는 기해년

헌종 5(1839) 화재로 소실되고 다시 고쳐 써서 베풀어준 편액이란 뜻이다.

 

 

옥사서원(뒷면): 서원 창건 당시(1572)에 쓴 것으로 아계 이산해의 글씨라고 한다.

관지(款識)를 보면 옛날 현판 글씨를 빼껴 써서 걸었다는 뜻의 舊額摹揭(구액모게)라는

글이 적혀있다.

 

설 1

창건 당시 선조가 사액하고 당시 영의정이던 이산해가 쓴 것이다.  

옥산서원이 화재로 소실되자 현판도 불타버린 줄 알고 선조가 다시 내려주었는데

사실은 원래의 현판을 잘 보관하였기 때문에 사액받은 현판이 두 기가 된것이란다. 

 

설 2

창건 당시 사액 현판이 화재로 소실되자 아마 모조해서 새로 서각한 것 같다.

쉽게 말하면 사본판이라는 의미이다.  '舊額摹揭(구 편액을 모조해서 제작 후 건다)'

라는 의미이리라. 그렇게 되면 이산해의 원본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큰 너럭바위에 이퇴계가 각자한 세심대(洗心臺) 란 글자가 보인다.

정조 땐 여기서 초시를 치렀다고 전해진다.

이 세심대에서 이름이 나와서 이곳은 세심마을이라 불린다.

 

외나무다리 앞에 있는 용추폭포 바위에 퇴계 이황이 새긴 용추(龍湫)

 

옥산서원 하마비

 

 

지금의 옥산서원 진입로와는 전혀 엉뚱하게 자계천 건너 야산 구릉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원래의 위치인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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