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뜻에 어긋나지 않게 난 열심히 공부했다. 자연히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이화여대쯤은 무난히 합격할 수 있는 성적이었다. 적어도 2학년 1학기까지는 그랬다.
2학기부터 나도 모르게 공부와 멀어져가게 됐다. 돌이켜보면 이른바 사춘기라는 것이 뒤늦게 찾아 왔던 듯싶다.
하교길이면 남학생(대학생 포함)이 뒤를 졸졸 따라오는 날이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다.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었다. 스트레스도 엄청 받았다. 성적이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4등, 6등, 18등...
한번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성적은 좀처럼 회복될 줄 몰랐다. 속상했다. 닥치는 대로 꾸역구역 먹어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대식증으로 고생했다던데 나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체중은 음식섭취량과 정비례했다. 60kg이 훌쩍 넘어섰다. 얼굴살에 코가 파묻힐 정도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또래에 비해 키가 큰 편이었던 나는 좀 조숙한 편이었다. 명동에 구두사러 나갔을 때(중학생이었음) 남자 대학생이 추근추근 거리기도 하였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였나. 게다가 내 옆엔 어머니까지 계셨는데...
서문여고 2학년2학기, 3학년1,2학기를 보냈다. 대학입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명문대는 꿈도 못 꿀만큼 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화려했던 나의 과거성적에 미련을 두고 계셨다. 당연히 재수할 것을 요구했다. 싫었다. 그 지긋지긋한 교과서, 참고서와 다시 한번 씨름해야 한다니...
몰래 인하공전 항공운항과에 입학원서를 넣었고, 37대1이라는 경쟁을 뚫고 마침내 합격했다.
과(科)자체가 이미 미래의 내 직업을 예고하고 있었다. 스튜어디스! 그때만 해도 미스코리아는 나와 무관한 단어였다.
서문여고시절 난 언제나 '학교대표'였다. 전교에서 한 명 뽑아 내보내는 교외행사에는 무조건 내가 선발되곤 했다. 새마을연수원 연수도 내가 들어갔고, 신사임당 교육도 내가 나가 받았다. 하다못해 크리스마스 연극을 할 때면 주인공격인 예수역까지 내 차지가 됐다.
당시 KBS TV에서 원종배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청소년 프로그램에도 내가 서문여고 얼굴로 출연했다.
얼굴 팔리는 일이라면 예외 없이 내가 나서게 되다 보니 주위에서 이러쿵저러쿵 말들도 많았다.
"이승연이가 교감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무슨 소리야 교장선생님이 빽이라던데?"
기가 막혔다. 하기야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던데, 하물며 남 잘되는 꼴을 어찌 곱게 봐줄리 있겠는가.
어쨌든 이런저런 학교 밖 일에 자주 모습을 비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존재가 여기저기 알려지게 됐고 수업이 끝나고 나오면 한껏 멋을 낸 낯모르는 남학생들이 날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화려하다면 화려할 여고생활이었지만 나라고 입시지옥을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도시락2개 싸 가지고 밤 아홉시 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그 이후엔 독서실에서 책과 씨름하고....
물론 고3 초기엔 새벽녘까지 대입준비에 매달렸다. 꽃피고 새우는 5월이 왔다. 내 마음도 날씨 따라 차츰차츰 들뜨기 시작했다.
학교에 남아 자율학습 한다고 거짓말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옷에 떡볶이 국물 흘려가며 수다 떨다가 어머니가 날 데리러 오는 밤 9시쯤 학교로 슬쩍 들어가는 나날들이 계속됐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던가? 그날 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거리를 쏘다니다가 학교로 돌아가야 할 시간을 놓쳐버렸다. 어머니는 교문앞에서 하염없이 날 기다리고 서있었고.
현장을 들키긴 했지만 그리 큰 꾸중은 듣지 않았다. 거짓말을 않는 내 성격 덕이었다.
"너 어디 가서 뭐했어?"
사실 그대로 좔좔 말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어머니는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 그래서 혼내줘야 한다는 것도 잊은 듯 내 얘기 속에 빠져들었다.
지금도 어머니는 이따금씩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때 이미 네가 말(言)로 먹고 살 줄 알았다."
난 지금 탤런트 겸 MC겸 DJ이니까 그 말이 일리도 있는 것 같다.
매일 학교에서 얼굴을 마주 대하면서도 뭐 따로 할말이 있었는지 그 친구는 그날 밤 내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연탄가스 중독으로 그날 새벽 세상을 떠났다.
믿기지 않았다. 짝 잃은 기러기, 이 빠진 동그라미... 수험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졸립고 힘들 때마다 "대학가서 신나게 놀아보자"며 서로에게 용기를 주었던 기억들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안보이면 잊어진다던가. 친구의 죽음에서 맛본 슬픔이 무디어질 무렵 학력고사를 치렀고, 예상대로 시원찮은 점수를 따냈다.
점수 나쁘다고 전기대학 원서접수 안 할수는 없는 일. 그래서 원서마감 직전까지 끈질기게 초(秒)단위 눈치작전을 벌였다.
그 결과 제1지망 학과로 적어낸 곳이 외국어대 영어과. 물론(?) 낙방이었다. 후기대학도 자신이 없었다. 부모뜻과 무관하게 인하공전 항공운항과에 합격했다. 부모는 "곱게 다녀라. 졸업하면 시집부터 가고"라며 체념했다.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통학생활이 시작됐다. 예쁘고 늘씬한 친구들과 새로 사귀었다. 고3시절 독서실 가서 공부는 안하고 친구들만 만들었을 만큼 사람 사귀기를 즐겼던 나였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 '환경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나 역시 과분위기에 적응해갔다. 좀 야하고 사치스러운 분위기였다.
영어시간에 외국인 교수는 내 얼굴만 쳐다보며 강의했다. 내가 영어를 꽤 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친구들의 반응은 그게 아니었다.
입들을 삐죽 내밀며 교수와의 '썸씽'운운하며 입방아를 쪄댔다. '맘대로 해라. 이미 중고교때 그런 소리 질리도록 많이 들었으니까."
항공운항과는 2년제였지만 강의 강도는 4년제 학과 못지않았다. 뒤늦게 공부에 발동이 걸려 장학금을 타기도 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때 진작 그럴 것이지"라며 대견스러움과 아쉬운 감정을 동시에 드러냈다.
인하공전 항공운항과 시절 장학금을 타기는 했지만, 항상 공부만 파고드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장학금 받았다고 자만하다가 다음 학기엔 F학점을 따내며(?) 간신히 낙제를 면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호되게 야단치고 나면 그다음 학기엔 또 장학금을 타내고... 그렇게 대학 2년은 흘러갔다.
그 흔한 서클활동(요즘엔 동아리라고 하던가)도 전혀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항공운항과라는 과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까짓거 서클 안 들면 그만이지...'
대학시절 차츰 '멋'에 신경 쓰게 됐다. 친구들의 옷과 머리모양 그리고 액세서리를 유심히 훔쳐보며 그대로 흉내냈다. 집에서는 날로 세련돼 가는 내 외모를 지켜보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세련미라고 여겼던 것이 어른들 눈에 '치기 어린 야함'으로 비쳤던 듯 싶다.
대학입학후 아버지가 수원에 전자제품 공장을 차렸다. 우리집도 안산의 예술인아파트로 옮겼다. 아버지공장과 인하공전의 중간 지점에 있는 우리집 덕에 학교 다니기는 훨씬 수월해졌다.
우리집 앞엔 이른 아침마다 남학생들이 우글거렸다. 나를 학교까지 에스코트하기 위해서였다. 그 중에선 날 바래다주느라 자신의 아침수업을 빼먹기까지 하는 서울의 대학생도 있었다.
어머니는 "쟤들 부모 맘이야 어떨지 모르겠다만 과히 기분 나쁘진 않구나"며 흐뭇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스튜어디스가 되고 미스코리아가 되고 또 연예인으로 정신없이 바빠지면서 그 친구와 조금씩 멀어지게 됐다.
지금 꾸준히 사귀는 남자는 없다. 동트기 전에 나가 별보고 귀가하는 생활이 매일 반복되다보니 솔직히 애인 만들 틈도 없다.
대학시절 내가 살던 안산 예술인아파트에는 남녀대학생들로 이뤄진 청년회 모임이 있었다. 1학년생은 나뿐이었고 멤버들은 고학년이었다.
지금도 그때 그 선배언니들과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낸다. 청년회 회원 중엔 스타도 있었다.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신혜수 언니가 바로 '우리들의 스타'였다.
당시만 해도 내가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을 거라곤 꿈도 못 꿨던 때라 혜수언니 라는 존재는 부러움 그 자체였다.
항공운항과는 이른바 특수학과였다. 일단 키 크고 튼튼하면 입학이 가능했지만 강의내용과 학사일정은 무척 타이트했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비행기가 '교통사고'당한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해라) 따라서 일반 대학보다 훨씬 까다로운 커리큘럼을 달게 받아들여야 했다.
고등학생보다 수업이 더 늦게 끝나 축 늘어진 어깨로 버스에 몸을 싣는 나날들이 2년간 이어졌다.
졸업과 동시에 KAL 스튜어디스 자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리고 있었다기보다 내가 찾아 나섰다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항공사 입사는 교수추천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면에서 난 행운아였다. 교수님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니까.
KAL 입사시험 과정은 아주 오밀조밀했다. 대학입학할 때도 강당에서 검정미니스커트에 흰색 반팔 블라우스 입고 워킹 하는, 마치 모델선발대회와 같은 관문을 통과해야 했지만, KAL 입사시험은 대입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피 말리는 순간순간 이었다. 샅샅이 신체검사도 했고 종합검진도 받았다.
일단 예비 스튜어디스가 되고 나서 한숨 돌린 것도 잠깐. 6개월간의 하드트레이닝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서비스와 관련된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혔다. 영어와 일어로 하는 기내 안내방송시험을 치러 자격증도 따냈다. 퍼스트 클래스 승객들을 위해 조리법도 배웠다. 일반석과는 달리 1등석에는 기내에서 직접 요리한 음식이 제공됐기 때문이다.
기내 요리강습 기간만 해도 10개월이었으나 단 6개월만에 그 과정을 끝낼 수 있었다. "넌 빨리 비행기 타야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차별대우' 덕이었다.
입사 6개월만에 국제선 스튜어디스가 됐다. 비행초기엔 다리가 팅팅 붓고 시차적응에 애를 먹기도 했다.
기압관계로 쉽게 만취해버린 승객들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답답한데 비행기 창문 안열어준다고 노발대발하는 할머니를 진정시키는 일도 있었다.
그와 같은 돌발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난 배운 대로 행동했다. 예의를 갖추되 단호하게 그리고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으며.
그 덕에 난 1천 5백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KAL의 '스마일 퀸'으로 뽑힐 수 있었다.
난 집에서 '마리아'라고 불린다.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를 받았었다. 철들기 전부터 혜화동 성당, 잠원 성당등 교구성당에 꼬박꼬박 다녔다. 하지만 스튜어디스가 되고부터 이른바 '나이롱 크리스천'이 되고 말았다. 일요일날 국내에 있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 외국에 나가면, 거리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현지에서 5일정도 머무르곤 했다. 하와이 가서는 와이키키 해변을 거닐고 스위스에서는 스키 타가며 이국의 정취에 푸욱 젖었다. 외국에서는 개인행동이 금지됐다. 동료들은 "혼자 나다니면 북한으로 납치된다"며 꼭꼭 떼지어(?) 움직였다.
남들 못 가본 데도 많이 가봤다. 옛 소련 상공도 날았고 중국의 거대한 평야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서울올림픽 이후 국제관계가 해빙분위기 일변도였기에 겁나거나 위험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부모와 동생에게 선물도 자주 사다줬다. 부모 선물이라야 마땅한 것도 없었고 값도 부담스러웠기에 기념품 정도로 생략하고 동생에게는 롤러스케이트, 스케이트보드, 라켓등을 한아름씩 안기곤 했다.
내것은? 물론 챙겼다. 동료들은 50만~60만원씩 줘가며 손바닥만한 유명상표 핸드백을 거침없이 골랐지만, 난 돈도 아까웠고 그런 것 살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이태원 가면 똑같은것 9천원만 주면 사는데 뭘~'. 그렇게 아낀 돈으로 개구리 인형만 줄기차게 사 모았다. 울음주머니 부풀린 개구리, 왕관 쓴 개구리, 발랑 누워 배에 바람 잔뜩 넣은 개구리, 개구리 모양의 컵, 끝에 개구리 달린 연필... 개구리, 개구리 하다보니 개골개골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의 특수성은 완벽한 신체조건을 요구했다. 언젠가 사랑니 하나 뽑았다가 1주일간 집에서 여유만만하게 뒹굴뒹굴한적이 있다. 상처 아물기전에 비행기를 타면 피가 멎지를 않는다나? 힘들다 싶으면 어디 몸 한구석에 이상이라도 생기기를 바라기도 했다. 2년여의 스튜어디스 생활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참가를 계기로 종지부를 찍게 됐다. 92년초였다.
KAL에서는 무척 아쉬워했다. "떨어지면 다시 와라." 얼핏 악담처럼 들리는 그 말 한마디를 난 지금도 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스스로 사표 내고 떠난 직원을 맘 바뀌면 다시 오라고 하는 직장이 어디 있겠는가. 특혜도 이만저만한 특혜가 아니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다. 내 경우가 거기 딱 적용된다.
KAL 스튜어디스들 중에는 새리 미용실 단골이 많았다. 외국 문물에 접할 기회가 많다보니 자신들도 모르게 눈이 높아졌기 때문인 듯하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선배언니들 따라 한번 두번 머리 만지러 다니다가 결국 새리 미용실만 이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난 그곳 원장님에게 '찍혔다'. 김훈숙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나갈 것을 권했다. 처음엔 '설마 내가?'라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지만 한번 두번 참가권유를 받다보니 최면에 걸려들게 됐다. '그래, 난 미스코리아감이야'.
참가 결심을 굳힌 순간 사직서를 냈다. 이리저리 심사숙고하다간 스튜어디스라는 썩 괜찮은 전문직을 포기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일단 미스코리아 출전을 선언했지만 뭐하나 준비해 놓은 것이 없었다. 남들은 1년전부터 때 빼고 광내가며 외모를 만들어간다고 하던데... 두렵고 불안했다.
게다가 어머니마저 일본 친척집에 가 계셨다. 하기야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참가원서를 내기는 했지만(대학입학때도 부모 몰래 항공운항과를 택했었음).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회는 불과 2개월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사촌언니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언니는 기꺼이 내 뒷바라지를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첩첩산중이었다. 옷은 어디서 구하나? 돈도 없는데 이브닝드레스다 뭐다 그 값비싼 의상들을 무슨 수로 사 입을 것인가. 모 유명디자이너의 옷을 많이 입어야 좋은 점수를 딴다는 소문도 있던데...
암중모색을 거듭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어둠 속에 서광이 비쳤다. 새리 미용실 김훈숙 선생님이 무조건 지원을 약속한 것이다.
그림자처럼 딸들 곁을 떠나지 않은 채 옷매무새를 고쳐주고, 콩콩콩 화장도 다시 매만져주며 조금이라도 더 예뻐보이게 만들려고 애쓰는 미스코리아 후보어머니들의 정성을 김선생님이 내게 대신 베푸셨다.
그분 덕에 온갖 서러움을 잊을 수 있었고 '나는 외토리가 아니다'라는 든든함도 가지게 됐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다. 경쟁이 과해지면 전쟁이 된다. 미스코리아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은 그분이 무한정 공급한다.
나는 투지만 불태우면 된다. 그런 각오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날을 맞이했다. 결전의 날이었다.(이거 너무 살벌했나?)
흔히들 미스코리아로 뽑히는 순간 "어느 어느 미용실 누구누구에게 감사한다"고 수상소감을 밝히는 것을 비아냥거리곤 하지만, 그런 답변이 안나온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듯한 느낌이다.
나는 미스코리아가 됨으로써 김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됐다. 하지만 신세, 은혜 갚는 일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각종 잡지에 의상모델로 사진이 실릴 때면 난 꼭 새리 미용실로부터 '헤어스타일'협찬을 받는다. 그래야만 그곳 이름이 내 사진 밑에 활자로 명기되기 때문이다.
톱디자이너 한분이 10여 차례나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패션쇼 모델로 무대에 서줄 것을 부탁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분 옷 한번 입어보는 게 소원인 사람도 많으니까.
하지만 그분의 요구를 정중히 사양했다. 머리를 자신이 지정하는 곳에서 만지라고 했고, 그 미용실은 새리가 아니라는 점이 모델 거부 사유였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날 난 솔직히 진(眞)이 될 줄 알았다.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등지에서 다른 후보들과 합숙하며 교육받을 때 뭐든지 1등은 내차지 였기 때문이다. 무슨 '심사'만 있다하면 난 항상 10점 만점에 10점이었다.
92미스코리아 미(美)라는 사실이 두고두고 억울하고 아쉽기만 하다.
미스코리아 참가를 계기로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됐다. 본래 난 동갑내기보다는 언니들과 친한 편이다. 동료들과는 달리 언니들은 날 '씹지'않는다는 게 좋아서이다.
동갑내기 친구들 중에선 KBS작가로 일하고 있는 김윤정과 가수 김태우씨, 코디네이터인 윤미성이 고교동창생들로 절친한 사이이다.
선배 미스코리아들 중에서는 오현경씨, 고현정씨와 가깝게 지낸다. 나이는 내가 많지만 미스코리아 쪽으로는 그분들이 선배인 탓에 우리는 말을 높인다.
나나 그들이나 이름 끝에 '씨(氏)'자 붙여가며 예의를 갖추고 있다.
얼마전 내가 졸도했다는 사실이 日刊스포츠에 기사화된 후 고현정씨가 안부전화를 걸어와 진심으로 걱정해줬다. 참 고마웠다.
92년 5월21일 밤. 미스코리아선발대회 본선무대에서 김동건 아나운서가 내게 물었다.
"장래 희망이 뭡니까?"
"방송MC로 활동하고 싶어요."
사실 MC는 어머니의 희망사항이었다. 어머니는 방송진행자라는 직업이 무척 멋지게 보였다고 한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어머니는 정철 영어카세트 한보따리를 사 갖고 왔다.
"얘, 너 MC되려면 영어회화도 잘해야 할 것 아니야?"
그 이후 난 MC의 꿈을 키웠고 의식적으로 말을 정확히 하려고 애써왔다. 그 결과 친구들로부터 "말솜씨가 청산유수"라는 평가를 받게 됐고.
미스코리아 인터뷰에서 MC가 되고싶다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내게 리포터자리가 굴러 들어왔다.
MBC TV <특종! TV연예>의 '연예게시판' 진행자로서였다. 당시 <특종! TV연예>담당 송창의 프로듀서가 리포터할 뜻 없냐고 물어왔을 때 내심 쾌재를 불렀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로소이다.'
92년 6월부터 '연예게시판' 코너를 진행했다. 돌이켜보면 너무 겁 없이 방송에 뛰어들었다는 후회도 없잖다. 그저 신나서 멋모르고 덤벼댔지만 지금은 MC라는 타이틀이 날이 갈수록 두렵고 무겁게 느껴진다.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를 진행하면서도 아쉬운 점이 많다.
'단순히 가수이름 과 노래제목이나 소개하는 MC가 되기는 싫은데...'
공부 더 해야겠다는 마음은 굴뚝같지만 밥 먹을 때와 화장실 갈 때 빼고는 글 한 줄 읽을 짬이 없다는 게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다.
다행히 MBC FM <이승연의 FM데이트> 를 두 시즌동안 맡고 있다는 것이 MC수업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얼굴 안 보여주고 목소리로만 감정을 표현하다보니 억양조절이 저절로 이뤄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음악지식도 차츰 쌓여지는 듯하고.
청춘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에 캐스팅 되기 전까지 연기경험은 전무했다. MC가 될때도 그랬다. '뭐든지 몸으로 부딪치면 안 되는 일이 없겠구나'라는 다소 위태로운 생각을 아직까진 흔들림 없이 유지하고 있다.
오는 22일이면 아침드라마 <나팔꽃>촬영이 모두 끝난다. 23일부터는 생활에 여유가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잠자는 시간이 늘어날는지의 여부는 좀 더 두고 봐야 될 것 같다. 영화출연 제의가 자꾸자꾸 들어오고 있고, 서울시경에서는 명예경찰로 추대할 테니 각종 캠페인에 참가해줄 것을 요구해 왔다.
물론 영화나 명예경찰이나 빡빡한 스케줄을 핑계로 일단 거절했다.
연예인이기에 앞서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아, 졸립다.
그저께는 밤 열두시반에 귀가했다가 5분 후 다시 집을 나섰다. " 생방송 끝내고 곧바로 <나팔꽃> 녹화스튜디오로 내려 오라"는 말을 깜빡 잊고 '룰루루~ 빨리 가서 자야지' 라며 집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결국 녹화 끝내고 잠자리에 든 시간은 새벽4시.
어제는 비교적 이른 시간인 새벽2시에 몸을 뉠 수 있었다. 국민학교 다니는 동생 승호의 깨어있는 얼굴을 본적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다.
그저 쉬고싶을 따름이다. 재충전 시간을 전혀 갖지 못하다보니 너무 날림으로, 값싸게 연기하는 듯한 자괴감에 빠져들곤 한다. 내 연기도 불만스럽다. 대본분석하고 의상체크 할 기본적인 여유조차 없으니... 안타깝다.
친구 만난다는 것은 꿈도 못 꾼다, 다행히 내 진짜 친구들은 1년 넘게 얼굴 한번 마주하지 못하고 전화로만 근황을 주고받아도 항상 내게 '우정'의 실체를 확인하게 만들어 준다. 고맙다.
4개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것은 분명 스스로의 욕심 때문은 아니었다. 새로운 경험 쌓는다는 기분으로 선뜻 응했다가 너무도 무거운 짐을 버거워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지금의 나이다.
프로패셔널들이 즐비한 전쟁터에 물통 하나 달랑 들고 이리저리 신나게 깡충거리는 철부지같아 두렵다. 언제 총 맞을지도 모르면서...
신문. 잡지 인터뷰에도 불성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해 죄송스럽다. 허구헌날 새벽에 들어오고, 방송국에선 대본 외고 리허설 하느라 정신없는 나를 지켜본 기자들은 아예 장시간 인터뷰할 생각조차 않는다.
"2~3분만 얘기합시다. 사진 한 장 찍고 나머진 나중에 전화로 합시다."
그분들도 사무적인 인터뷰보다는 대화과정 중 내게서 느끼는 그 어떤 무엇이 있을 텐데, 그걸 감지할 시간을 내주지 못해서 유감이다.
하지만 어지간하면 어린이잡지와는 최소한 1시간 이상 얘기하려 애쓴다. 애들을 너무 좋아하니까. 지금도 새로 나온 만화책만큼은 놓치지 않고 챙겨본다. 때로는 키득키득 웃어가며, 영원히 동심속에서 살아갈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난 아직도 자신이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실감 못할 때가 많다. 나 <토토즐>에 초대되는 스타들을 보며 "와, TV에 나오는 사람이다!"라며 기뻐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진행하는 방송에 초대됐던 분들은 언제나 반갑다. 상대가 남자건 여자건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전화도 가끔씩 하고 만나면 즐겁게 얘기를 나눈다. 그러다보니 아니땐 굴뚝에 연기가 잘도 난다. "이승연이 누구누구와 친하다지?" "아니야 아무개 아무개 하고 그렇고 그렇다던데?"(기막혀).
요즘 난 이른바 '아드레날린 중독현상'이란 걸 즐기고 있다.
생방송 시작 전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긴장감속에 오돌오돌 떨다가 방송이 진행되면서 그런 심리상태에서 쾌감을 맛보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방송이 끝나면 무너져내릴 듯한 허무함이 엄습하고...
사실 난 사정사정해서 방송프로그램에 캐스팅 된 적이 없다. 강자에 강하고 약자에 약한 성격 때문이다.
방송국에서도 높은 분들보다는 현장에서 함께 뛰는 분들과 허물없이 지낸다. MBC 수위아저씨들 중 날 모르는 분은 없다.
방송생활 1년 남짓만에 난 무척 강해졌다. 옛날처럼 눈물 흘리는 일도 좀처럼 없다. 그게 싫다. 패배자가 되기 싫다. 지고싶지 않아 순간 순간 발끈하는 오기를 부리는 나 자신이 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포장되거나 코팅된 이미지는 원치 않는다. '튀지'않더라도 "이승연 걔 인간이 됐더라"는 얘길 듣고 싶다.
언젠가는 결혼도 할거다. 편안하고 자기일 똑 부러지게 하면서도 내게는 '마냥GO'인 남자라면 OK. '이 사람이다'란 확신만 생기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할 자신이 있다. 밥해주고 빨래해 주며 오로지 남편만 보고 살아갈 각오이다. 그런 생활이 체질상 딱 맞는 것도 같다.
하지만 아직까지 결혼이란 단어는 윤곽조차 잡히지 않은 채 흐릿하기만 하다. 여유가 없다. 벌여놓은 일이 너무 많다.
10월엔 미스 영 인터내셔널 선발대회에도 참가해야 하는데 준비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다. 보여줄 것도 없을 듯하다. 이러다가 국제적인 망신 당하는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얘기를 줄여야겠다. 나의 오늘이 있게끔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한다. 방송에 데뷔시켜준 송창의 프로듀서, 내겐 '친정'같은 분이다. 의 진현숙 프로듀서와는 가장 속 깊은 얘기를 주고받는다. 내 이름 앞에 탤런트라는 타이틀을 얹게 해준 최윤석 프로듀서, 신인에 불과한 내 스케줄에 맞춰 불편함을 감수한 <나팔꽃>의 강병문 프로듀서와 출연진 여러분들, 이병훈 국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잘난척이 너무 심하군요..자기 입으로 어떻게 이런 글을 썼을까요? 제가 서문여고나와서 선생님 들로 부터 이승연애기 많이 들었는데 첨에 공부잘하다 성적 떨어진거라고 자기가 말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론 공부 정말 못했다고 하던데...(외대 영어과)지원이야 누구나 하죠..아예 서울대 넣었다고 하지...
그 당시는 얼굴만 예쁘면 그 학교는 들어가기 쉬웠다고 하더라고요..지금과 다르게 고등학교 시절 항상 일일 호프집에 얼굴마담이나 하고 그래서 정학 당할뻔 하고 그랬다던데 이야기가 많이 다른거 같네요..학교에서 인정 받았었나? 예전에 얼굴 정말 예뻤던건 인정하지만 이젠 얼굴도 성형 으로 이상하고 하는 짓은
대필했다면.....그 여자는..더..심하고 거칠게 말한게 되는건가..? 그나마 다듬은것일 테니까여...에혀~...뉴스보니, 로이터통신이나, 싱가폴등, 국제적 통신사들이 자세히 보도하고, 인터넷게시판Top에 올라와 있다는데..정말 국제적 망신이네여..좋아할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일거라는...씁쓸..............
저도 서문여고 나왔는데... 선배로써 이숭연씨 정말 존경했었거던요? 승먼 출신 연예인이고... 솔직하고 머리에 든거 많은 줄 알았눈데... 완젼 잘못 생각한거 였군요! 정말 이승연씨가 쓴거라면... 실망 대실망입니다. 나라팔아 돈벌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안그래도......
어이가 없습니다. 이승연씨를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닌것 같습니다 한 프로그램에서 얼굴에 주름으로 가득하신 할머니가 서럽게 우시는 모습하나만으로 그 분들께 크나큰 죄를 지은것 같습니다 그분들을 이해시킨다는데 가서 할머니들께 뜯기지는 않을지.......
첫댓글 아..진짜 이쁜거 하나로 굉장한 특혜를 받으며 살았군요~
정말 겸손이라고는 눈을씻고 찾아봐도없군요!!!!!!!!저렇게 혼자잘난사람이 어떻게 승무원이됐을까.예쁜얼굴에 걸맞는 마음가짐이 필요할거같네요,휴..
그러게욤...완전히 이뻐서...머든 척척 이네욤...
예전에 이글 읽고서 '역시 이쁘면다 되는구나..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요즘 하는 짓거리봐서는..쯧쯧..얼굴 백번 이뻐봤자 뭐하겠어요 인간이 되야지..이승연 정신좀 차리지..
이런말하긴 뭣하지만 이승연씨때문에 대한항공 이미지까지 안좋아지는것 같네요. 사람은 역시 행동을 조심해야될것 같네요. 좀 겸손할 줄 도 알아야되구요... 얼굴은 이쁜지 모르겠는데요...
예전에야 청순하고 이뻤지만..요즘은 보톡스를 하도 맞아대서 얼굴이 맞은 사람처럼 퉁퉁 부어있더군요..이런 얘기 하면 잡혀가나..?
예쁘구..똑똑하구..다 좋은데...현재의 이승연씨를 보면 별로 부럽진 않더라구요.^^
그야말로 화려하게 살았네여.. 만약에 미스코리아가 안돼고 계속 승무원을 해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여.. 쯧쯧;;
위조 운전면허증 적발됐던 얘기가 빠져있어서 아쉽군요.. ㅡ_ㅡ;;
무슨 영화에나 나올법한 스토리네요...정말 이승연씨 본인이 쓰신건지...저런 마음가짐이 오늘같은 사회적인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킨듯하군요~연예 티비 프로 보니깐, 어서 써 준 각본데로 얘기하는건지는 몰겠지만, 말은 참 잘하더군요~
이승연 70킬로 넘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왠 60킬로.. 그키에 그 몸무게면 정상적이죠.. 예전 사진 본적있는데.. 정말.. 저 화려한 과거는 상상이 않되는군요.. 상당히 허구적인~~
너무 거만하네요.. 친구가 있는게 신기해요
이쁜거 넘 부러워...근데 그 미모가 사람을 망쳐놓은 듯한.....^^;; 역시 정도껏 이쁜게 좋은거라는 생각이..^^;;
정말 예쁜거 하나로 먹고 살아온것 같네요. 아웅~ 노력해서 열심히 살았는데..쩝! 그래도 서른 여섯에 누드찍고... 전엔가 샤워하는 몰칸지 발견되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그냥 평범하게 사는 내 삶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정말 잘난척이 너무 심하군요..자기 입으로 어떻게 이런 글을 썼을까요? 제가 서문여고나와서 선생님 들로 부터 이승연애기 많이 들었는데 첨에 공부잘하다 성적 떨어진거라고 자기가 말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론 공부 정말 못했다고 하던데...(외대 영어과)지원이야 누구나 하죠..아예 서울대 넣었다고 하지...
그 당시는 얼굴만 예쁘면 그 학교는 들어가기 쉬웠다고 하더라고요..지금과 다르게 고등학교 시절 항상 일일 호프집에 얼굴마담이나 하고 그래서 정학 당할뻔 하고 그랬다던데 이야기가 많이 다른거 같네요..학교에서 인정 받았었나? 예전에 얼굴 정말 예뻤던건 인정하지만 이젠 얼굴도 성형 으로 이상하고 하는 짓은
이거 정말 이승연이 쓴글이에여.? 럴수 럴수~! 이럴수가.. 미친거아니에여? 미치지않고서야 이런글은.. (말이 좀 심했나.. 넘 화가나네여.. 거만함과 잘난체만.. 저런 사람이 2년동안 승뭔생활했다는게.. 화나네여.. 이뿌면단가~!)
에버에프터님 나드 서문여고 나왔는뎅...님 언제 졸업이어요?? 저드 선생님들이 이승연 원래 공부 못했었다는 얘기 하는거 들었는데...근데 고등학교때는 순하구 착했대요...근데 방송타니까 좀 달라졌다 그러던뎅...저 이승연이랑 같은동네 살아서 디게 마니 봤는데 서점같은데나 슈퍼같은데 와서 다른사람들 좀 무시하는
태도 마니 봤어요...맨날 쫄바지만 입고...암튼...울 학교 선배지만 씁쓸하네요...
읽기가 싫으네여.. 참내.. 다섯줄이상 못읽겠네여.. 남들보다 예쁜 외모 타고 태어났음 혼자 이쁘다고 생각하고 말든가 왜 항상 물의를일으키고 욕을만들어 먹는지..
에고..얼굴이쁜걸루치면..이승연씨보다이쁘신분이 더많답니다^^..승뭔이란직업은..우선..남을배려해주는마음이 바탕이되어야할텐데..어쩜.이런분이 대한항공승무원이셨는지..참..모르겠습니다..맘을 곱게쓰셔야져.세상자기잘난맛에사는건..맞긴한데.이건아니라고 봅니다..지나친 "잘난"이네요.그러다가.최근일터트리셨죵?^^
도대체 어떤말이진실인지...저번에 기가 인하에18:1로 붙엇다고 해놓고..그리고 고등학교때따라다닌남자하나도 없었다고 해놓고...어떤말이 맞는지..그키에 60키로였던 사진이 떠도는 그사진인지..말도 안돼!!
자기가 쓴거 맞나요? 아닌거 같애...
진짜 웃기네여~ 글 읽고 나니 허탈하고 괜히 읽은 느낌~ 참내~
푸하하하하하~~~ㅋㅋㅋㅋㅋ...오홋~~~ 님들 죄성.. 넘 어이가 없어서...ㅡㅡ;; 점입가경입니다요..정말 댄한공 이미지 나빠지겠어요...
저거 대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들었어요.. 뭐 본인이 그렇게 말을 한것도 있겠지만 잘 포장해서 언론에 공개되는 거죠.......
대필했다면.....그 여자는..더..심하고 거칠게 말한게 되는건가..? 그나마 다듬은것일 테니까여...에혀~...뉴스보니, 로이터통신이나, 싱가폴등, 국제적 통신사들이 자세히 보도하고, 인터넷게시판Top에 올라와 있다는데..정말 국제적 망신이네여..좋아할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일거라는...씁쓸..............
그래 잘났다 잘났어...그런 맘으로 어케 승객께 서비스 했는지...본인의 글이아니라 믿고 싶네욤~^^~우린 착하고 겸손한 승뭔되용~^^~!
전 그냥 읽으면서 부럽다~~란 생각만 했는데^^* 리플을 읽어보니까 많이들 흥분하셨군요... 제 성격 탓인지 이런 사람도 있구나~~싶네요^^*
정말 본인이 쓴글이라면 실망감.. 얼굴 하나로 인생 날로 먹고 살았던것 같음.. 겸손함이란 찾아볼수 없는..
진짜 겸손이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눈꼽 만큼도 없네... 세상에 ㅡㅡ;;; 저런 사람이 어떻게 승무원이 되고 미스코리아가 되었을까?? 세상말세다 말세!!
승뭔출신 옌예인 이라서 좀 이뻐해 줄라 했는데.....참 정신상태 썩어빠졌네!!!!!!!!넥끼!!!!!이젠 이승연 연예인활동도 끝났네~~~누드활동 그것도 접는다고 대표이산가?가는 머리삭발하고.....너도 머리깎고 산으로 들어가거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저도 서문여고 나왔는데... 선배로써 이숭연씨 정말 존경했었거던요? 승먼 출신 연예인이고... 솔직하고 머리에 든거 많은 줄 알았눈데... 완젼 잘못 생각한거 였군요! 정말 이승연씨가 쓴거라면... 실망 대실망입니다. 나라팔아 돈벌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안그래도......
어이가 없습니다. 이승연씨를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닌것 같습니다 한 프로그램에서 얼굴에 주름으로 가득하신 할머니가 서럽게 우시는 모습하나만으로 그 분들께 크나큰 죄를 지은것 같습니다 그분들을 이해시킨다는데 가서 할머니들께 뜯기지는 않을지.......
일단 이 글은 100% 대필인데, 우스운 건 이승연은 이 글 읽어보지도 않았을 거란거... 글고 승무원이든 의사든 교사든 무슨 직업이든 이런 마인드 소유자는 참 많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