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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고대 시대의 탐색
다섯 >>>
자기 인식적 탐구에 대한 무관심이나 자기 검열과 반성이라는 증명 과정을 외면해온 삶의 모양새는 자기 기준을 세파(世波)에 얹어 살아가려 함으로써 자력으로 스스로의 길을 갈수 없게 만듭니다. 직업을 가진 직장인들에게 부족한 자기를 되돌아보는 숙고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믿음의 세계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세계에 대한 탐구를 지속함으로써 추상적인 개념의 세계에 대한 의미와 진실을 심층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도 생겨납니다. 그것은 직장인의 범주를 벗어난 시각을 갖게 됨으로써 삶에서 다양한 자신의 시각을 인식할 수 있게 되며 따라서 새로운 인문적 가치를 인생에 도입하는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직업에 몰입할수록 우리는 현실적 삶을 살아감으로써 거기에서의 만족을 통해 삶의 완성적 시각을 갖게 됩니다. 인생에서 세상을 보는 안목이 자신의 완성적 시각으로 가득해집니다. 객관적 마음이 부족한 곳간에서는 외부의 조그마한 변화에도 자신의 안목만을 적용시키려 애씁니다. 자신의 안목이 적용되지 못하는 현실은 결국 대상을 향한 원망만을/ 반발로서의 투쟁만을/ 의식(意識) 있는 민주적 투사로 착각하게 만들어갑니다. 요즘의 세상을 보며 그런 인식적 삶의 변천(變遷)을 생각해봅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각 개인의 숱한 배움을 토대로 할 때에 실천이 가능해지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객관적 텅 빈 마음의 곳간은 자신의 안목에 따른 이념만을 채운 민주투사들의 주의 주장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자신의 결의를 다지며 조용히 스스로 실천해나가는 객관적 의지를 그들에게서는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현실로의 적용이 불가능한 개념으로 주의 주장과 선전선동을 통해 세상을 우상화하려 하고 투쟁의 대열로 내몰려고 애쓰는 시절입니다. 개념은 창조에 필요한 원료가 아니라 작용으로서의 질료로 기능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창조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닌 순수한 개인적 삶의 작용을 통해 간접적으로 우연하게 발생하여왔습니다. 자연에서 수십에서 시작해 천여 마리에 이른 돌고래 떼가 수억 마리에 이르는 정어리 떼를 몰아가듯이 몇 개의 맹목적인 개념(진보/ 민주/ 원칙/ 진리/ 의미 등)으로 시민들의 자연스러운 실천적 정신을 휘저어 여론몰이 하는 것 또한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가장 편리한 구실이라 하겠습니다.
그리스인들의 조각에서 보여주는 것은 영원을 향해 멈추어있는 한순간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운동과 관련한 원반 던지는 사람을 표현한 조각상이 그것을 대표적으로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즉 사람으로서 가장 젊음의 한순간이 거기에 존재합니다. 또한 원반 던지는 운동선수의 전 과정을 한순간으로 정지시켜 표현함으로써 보는 사람에게 나머지 전후(前後) 과정의 운동성을 상상하게 만드는 효과를 생성시켜줍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성취를 어려서부터 나이 먹어 어른의 모습까지 시간상으로 전부다 표현했습니다. 전쟁의 전 과정을 한 장면 한 장면 일일이 나열함으로써 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로의 종합을 상상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런 조각된 부조들의 장면을 눈으로 본 다기보다는 마음속으로 읽어 내려가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판단을 통해 주인공의 시각을 가지도록 인도해갑니다. 그리스인들은 어떤 개념만을 하나로 보여줌으로써 삶을 거기에서 연역적으로 나열(羅列) 하면서 살아가도록 창조성을 부여하고 있다면 로마인들은 여러 사건들을 귀납적으로 나열함으로써 하나의 결과를 상상토록 합니다. 그들은 전쟁의 전 과정을 사실주의적으로 벽면에 부조로 실증적으로 새겨 넣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예술작품들은 어느 한순간이 아닌 전쟁의 전 과정을 서사적으로 나열함으로써 보여 준다는 느낌보다는 자신들이 정확하게 써넣은 부조들을 통해 읽을거리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교역을 통해 축적한 부를 이상주의적이고 추상적인 세계를 향한 노력에 쏟았다고 한다면 로마인들은 전쟁을 통한 승리의 전리품을 자신들의 현실적인 힘의 축적에 쏟았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주의자들의 관심은 당연하게도 삶의 의미와 명예로서의 개인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 이었으나 로마의 현실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속적 권력의 유지와 자신의 부의 우위를 유지하려는 복합적(複合的 catholic)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와 로마 양국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적인 형식(ethos set)입니다. 고전고대에 대한 탐구의 근본은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국의 대표적인 전쟁사를 기록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서 그들의 기본적이고 뚜렷한 기질적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전쟁사 전체를 조망하며 거기에서부터 연역적으로 모든 세부적인 전쟁의 과정을 조망해갑니다. 후자에서 전체적인 조망은 없습니다. 단지 시간상으로 상세하게 모든 부분을 귀납적 방식으로 하나하나 냉정하게 군더더기 없이 서술해 나아갈 뿐입니다.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그 어떤 의미나 의의나 결과 등에 연연해하지 않고 담담하게 기술할 뿐입니다. 철학적인 인간으로서의 지도자와 실증적인 인간으로서의 장군이 페리클레스와 카이사르의 진정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도 똑같이 펼쳐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전자는 하늘에 금덩어리가 있고 세상은 그 부스러기들로 살아간다고 여긴다면 후자는 금 부스러기들이 모아져야지만 하나의 커다란 제국적인 금덩어리의 존재가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로마인들에게 개인의 조각상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며 노인과 어린아이들도 함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현실적 투쟁에서 얻어지는 권력에 모든 것을 예속시켜온 민족이었습니다. 전쟁을 통해 힘을 길러야 했으며 전리품을 공평하게 나누어야 했습니다. 로마의 귀족계층에서 그리스의 조각 작품에 심취해 많은 모방품들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리스 예술의 재현만이 로마의 예술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고유한 예술적 영역을 가치 있게 구현해낸 민족이었습니다. 로마의 진정한 예술은 그들 민족의 기질 속에 내재된 자신들만의 고유한 세계관의 표출로서 절대적 비교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각각의 문화는 각각의 시대에 따라 고유의 가치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전쟁은 그들의 세계관의 실현의 현장이었으며 제국의 팽창이 그들의 운명이었으며 삶은 복합적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인물들은 전신상으로 조각되고 있으나 로마인들에게서는 흉상이나 두상이 많이 조각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술은 이상주의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이며 현실 욕구적(欲求的)이었습니다.
심미적인 가치와 깊은 연민 절망과 절규에서 우러나오는 극한의 독백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러한 비극에서의 고통을 승화시키며 개인의 투철한 도전적 분투와 그에 따른 책임의 완성을 향한 노력은 위대한 삶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제국적(帝國的)인 삶을 향한 로마인들은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실증적으로 보이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로마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순수한 예술로서의 영역이 아니라 삶에서의 실증적 기록의 필요성에 따른 실천적 수단으로서의 예술이 요구되었을 뿐입니다. 그 어떤 기능적인 요구를 동반했습니다. 즉 집안의 벽화로 치장되거나 공중목욕탕의 조각상으로 원거리에서 식수를 끓어올 수로를 만들어내는 용도로서의 기능입니다. 그것은 시민들을 위한 복합적 공간의 치장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신과 같은 시각에서 모든 것은 조정하고 연계 지으며 현실을 이상화하는 심미적 성취의 완성에 노력했다면 로마인들은 장군과 같은 관점에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훈련하며 인생 전체를 사실적으로 주시하며 거기에서 현실적 권력의 완성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학문은 우월하고 감각은 미천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어떤 인간이 가진 수단을 동원한다고 해도 세상의 원리를 알 수는 없습니다. 단지 지성이 눈으로 보이는 뿌연 대상에 대해 초점을 명료하게 맞추는 포커스의 역할로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한다고 하면 감각은 경험의 실천적인 행위를 통해 그 깨달음의 다발들을 몸 안에 새깁니다. 그리스인들이 지성의 우월성에 심취해 세상을 벗어나 진리를 찾아 하늘에서 살아가려 했다면 로마인들은 스스로의 자존감을 높여가기 위해 실증적인 경험을 통해 땅 위에서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도록 매진해 나아갔습니다.
로마인들 또한 인공의 건물을 도시 내에 수없이 많이 지었습니다. 그리스로부터의 영향으로 대리석이 도시를 가득 채웠습니다. 황제들의 묘역이 사후에 지어지기보다는 살아생전에 진시황의 무덤처럼 자신의 묘지를 포룸(Forum)이라는 도시의 복합 광장 몰(mall)로 건축했습니다. 그들 또한 원주 기둥을 건축의 가장 중요한 구축물로 도입했으며 기념비를 원형의 오벨리스크 (方尖塔 Obelisk) 형태로 세워 그 표면에 전쟁의 승리를 서사적으로 시간상으로 나열시켜 부조로 새겨놓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나선 부조의 길이가 190m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전은 그리스의 신전과 달랐습니다. 그리스 신전의 내부에는 신상(神像)만이 놓여있고 모든 사람들은 건물 밖에서 도열했으나 로마의 신전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도열하는 구조였습니다. 로마인들에게는 건물 내부에 넓은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으나 그리스인들에게는 필요한 내부 공간이 넓어질 경우 천정의 하중이 문제가 될 수 있었으며 그런 경우에는 당연히 건물 내부에 기둥을 더 세워서 해결했습니다.
건물 내부 공간의 확보를 위해 로마인들은 더욱더 튼튼한 기둥과 벽면이 요구되었으며 로마네스크 건물이 웅장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건축 재료로서 시멘트를 사용했습니다. 또한 아치(arch) 공법을 도입했으며 그 아치의 응용이라 할 돔을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단순한 예는 건물 내부의 복도 위 천장을 반원형의 아치로 꾸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원통형 궁륭(barrel vault)에서 더 진전된 것이 교차궁륭(groin vault)이었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고딕으로 초기 고딕은 전성기 고딕으로 나아가면서 지중해 유역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알프스 이북의 고딕 성당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세상의 문명은 지중해를 벗어나 알프스 이북으로 향했습니다. 벽면의 아치뿐만이 아니라 천정까지도 사각형의 각각의 베이(4개의 수직 기둥으로서의 사각형)로 구분해 각각에 아치로 세움으로써 수직하중을 줄이려 노력했습니다. 결국 고딕 성당은 내부에 단일하고 통일적인 공간을 만들어냈습니다. 고딕은 지중해 유역의 고전고대의 문명을 벗어나 알프스 이북의 문명을 보여주는 최초의 성당 건축물로 갑자기 역사에(11세기) 등장했습니다. 아치 공법은 수많은 개선문과 콜로세움에 적용되었으며 가장 독창적이고 이상적인 건물은 지금까지도 불가사의한 로마의 판테온 신전(2세기 초) 일 것입니다. 이것은 기술적 혁신이기도 하지만 내부 공간을 확보하려 애쓴 로마인들의 창조적인 건축 원형(原型)이라 할 만 했습니다.
내적으로 충일한 삶의 구가(謳歌)나 외적으로 풍부한 여유로움의 구가나 삶은 선택의 문제이고 어찌 보면 두 영역의 합일에 진정한 삶의 모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인가를 하고 있다면 다른 쪽에서의 결여와 오류 또한 피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완성의 길은 추구의 과정일 뿐이지 결과로 나타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노력하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극복하고 그 죽음으로부터 나의 삶을 구원하는 길에 내 존재를 위치시키고자 할 뿐입니다. 물론 로마 사회는 그리스 예술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적인 유물로서의 예술 양식과 자신들의 표현 도구로서의 예술을 혼동했을 뿐입니다. 이상화된 세계에 대한 표현보다는 실증적이고 사실적 표현에 그들의 감각은 놓여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아직도 착각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도시는 자연을 벗어난 인공의 세계입니다. 거기에서 편안함의 안락을 위안으로 여김으로써 순수 자연으로부터 불어오는 훈풍의 감각을 잊어왔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삶에서는 부침이 있고 시간에 따라 바뀌겠으나 자연에는 항시 변함이 없음에 의해 안정감을 인간에게 주어왔습니다. 도시에서의 삶은 당연히 감각적 온정을 벗어난 법으로서의 규준에 모두는 따르고 순종해야 합니다. 법의 판단에 어긋나지 않는 모든 것에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할 운명에 처해 살아가야 합니다. 법이 잘못 적용되어도 목숨을 내놓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도시에 자연의 온정을 도입하려 함으로써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자연의 세계에서 볼 때에 알량한 인간의 개념으로 잘잘못을 판단하려 드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오만이자 인공의 편안함에 따른 대가(代價)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상대적 비루함입니다.
서구의 모든 사고(思考)는 몸과 마음이라는 두 개의 세계 중 마음을 우선시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적 인식은 몸을 더욱더 중요시해왔습니다. 신체발부 수지 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가 우리의 삶과 운명의 논리였습니다. 몸은 수학적인 규칙으로 제어할 수도 없고 도덕적인 감각적 훈련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 개별적인 욕망의 존재로서 존재합니다. 얼굴 모습이 다르듯이 몸의 감각 또한 모두 다릅니다. 그런 세상을 살아갈 가장 좋은 선택은 삶을 규격화시키지 않고 적당하게 합의하고 조정해 두루뭉술(中間層 intermediate)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구의 이성적인 개념의 적용이나 인문학적인 철학적 사고의 적용은 우리의 삶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혼란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재적 본질에 대한 탐구 자체가 어려운 터전에서 살아왔을 뿐입니다. 탐구해 들어갈수록 거기에서 우리는 혼란만을 발견해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외재적인 지성의 탐구에 몰두해온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텅 빈 마음의 곳간에서 신체에서 모든 가치를 연역해내는 몸을 존중해온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이 우리 삶의 진정한 좋음의 길이기도 합니다.
현대 과학은 인간의 지성이라는 이성의 창고도 결국은 몸으로 구성된 유기체일 뿐이라고 합니다. 뇌의 구조도 유기적 세포들의 구성이었으며 단지 감각으로서의 신경다발들의 활동에 우리의 지성이 존재해있다고 말합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선천적이고 선험적인 인간의 능력입니다. 동물은 본능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태어나서 배움보다는 이미 몸에 새겨진 본능의 활동이 전부입니다. 인간만이 정신의 곳간을 가집니다. 그 물리적 구조는 얼굴의 물리적 구조와 다를 것이 없으며 그것은 선천적인 문제이지 후천적인 능력과는 무관하다고 하겠습니다. 씨도둑은 못한다고 하듯이 얼굴이 아름다운 것이 부모 탓이듯이 공부로서의 지성의 능력 또한 부모 탓이라 하겠습니다. 부모가 똑똑하면 자식에게도 유전되며 못난 얼굴에서 미인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잘났든 못났든 내 얼굴이며 인간의 얼굴이므로 비교와 평가의 대상을 벗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에서의 삶에서의 문제이고 인공의 도시에서의 삶에서는 비교뿐만이 아니라 평가와 함께 운명을 좌우하는 생명현상으로 내재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어쩔 수 없는 그것을 감추고 덮어버리기 위해 우리는 객관적 시각을 갖추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서구의 인문학을 우리가 배우려는 동기는 여기에 있다고 보입니다. 물론 종교적인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지성 또 한 가지고 태어나는 선험적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교와 우월의 가치로서 인간의 능력의 수단으로 평가해오고 운명을 갈라 온 지성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강자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독단이었으며 원시적인 행위로 매도되어야 할지도 모르는 지경에 처해가고 있습니다. 무수한 고시와 수능과 입사를 위한 지식의 연마는 그야말로 이미 정해진 운명을 현실에서 거짓으로 호도하기 위한 인공의 현장이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원시적인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힘센 사람이 우월한 것처럼 지성과 계몽의 관념적인 사회에서 지성의 타고난 본능적 운명을 무시하고 인간의 순수한 노력으로 달성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듯이 우리의 착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인본주의의 거짓이자 합리주의의 기만입니다. 태생적으로 타고난 미인의 얼굴이 본인의 노력이 아니듯이 지성적인 노력의 가치도 타고난 정신의 곳간의 크기에 따라 좌우될 뿐입니다. 미인이 존경의 대상이 아니듯이 지성 또한 존경의 대상이 아닙니다.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고 머슴들의 이익이 아니듯이 지성 또한 강자의 이익으로 힘없는 인간들을 강자에게 굴복시키려는 욕망에서 나온 계몽적인 인공의 올가미였습니다.
지성이나 강자를 바라보는 시각에 앞서 우리는 태생적 조건을 벗어나 죽음을 극복하는 노력을 보여 왔는지를 우선적인 가치로 도입해야 할 시절입니다. 단지 전통적인 양반의 족보만을 내세우며 신분의 우월을 주장할 근거는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실천과정에서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겠으나 삶에서의 결과로서의 충분조건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사 모두가 결과만으로 선악을 판단해왔지 원인의 분석을 통해 냉철하게 직시하려는 마음을 외면하고 등한시함으로써 모두는 강자의 이익에 봉사해온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강자의 세상이고 돈의 세상임을 인공적으로 살아가는 도시사회에서는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시절이기도 합니다.
머슴의 어려움을 주인의 마음으로 외면해온 것입니다. 힘든 일들은 머슴에게 맡기고 자신은 지성의 경이로움으로 사회의 상류층에 올라 유영하며 강자의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인공 세계에서의 삶 자체는 고통이겠으나 태생적 우월을 후천적 노고의 결실로 여김으로써 그들은 무감각하게 고통을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모든 힘든 일들을 머슴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거기에도 시대의 변화에 처해있습니다. 그런 머슴의 역할을 반복적인 능력이 탁월한 기계가 대체함으로써 모두는 무차별적으로 인공의 세상에서조차도 내몰릴 운명에 처해있습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 앞에서 기계가 삶을 점령하기 이전에 인간들끼리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임으로써 기계에 대한 원망의 생각조차 못하게 되어갑니다. 오히려 갈망까지 하게 됩니다. 감각적이고 경험적이며 생동감 있는 느낌으로서의 인간의 삶을 천시해온 서구인들의 논리적 사고(思考) 능력은 기계의 개발이었으며 그것이 현대에서 인공지능의 AI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극복하는 용기 있는 도전정신을 가져보기도 전에 회피의 현장을 태생적 우월 조건을 앞세워 가식적이고 인공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한국전쟁 시기에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모두는 삶과 생명의 보전을 위해 최대한도로 본능을 끌어올려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전한다는 것 자체를 전쟁의 살벌함과 내일의 삶이 보장되지 못하는 공포 속에서 거추장스럽다 못해 매도해버리고 없애버려야 할 개념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학은 개똥철학으로 전락해야만 했고 모든 개념은 분노를 포함하고 원망을 포함한 투쟁의 근원으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잘못된 터전에서 생명을 꽃피우기 위해서 개념은 스스로 변형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서구의 개념은 창조를 향해있으나 우리의 모방으로서 도입된 개념은 자신의 게으름을 감추어주고 정당성을 보여줄 수단이자 재료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투쟁의 요리상에 올라야 할 제사 품목이었습니다.
생명현상은 도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통의 보전에 있었으며 거기에서 인간의 능력은 순종적 삶이 전부였습니다. 목숨과 바꿀만한 보편적 가치를 우리 사회는 가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실적 개선이라는 투쟁을 위해 이념을 사용하기보다는 창조적 개념의 전개를 위해 이념이 사용될 때에 사회는 서서히 변화를 가동할 것이며 모두는 새로운 시각을 부여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굳건한 의지는 태생적 조건만이 아니라 삶의 투철한 고투를 통해서 얻어지는 힘입니다. 운명까지도 담담하게 볼 수 있는 힘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해가는 노력 속에서 얻어집니다. 이것이야말로 태생적 조건을 벗어난 인간의 치열한 노고를 보여주는 고투(苦鬪) 적 삶의 증거물입니다. 운명에 휘둘리는 정도가 아니라 하다못해 언론의 거짓 개념에 놀아나는 세상을 바라보며 개인의 후천적 노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인공의 도시에서 창조적 개념의 도입은 순수학문에 대한 투철한 노고를 통해 서서히 진행됩니다. 게으른 인간에게 개념은 손쉬운 비평의 시각만을 선사해 줌으로써 투쟁의 대열로 내몰아 갑니다. 어쭙잖은 시각으로 세상의 진리를 자신이 보여주겠다면서 잘못된 개념으로 올바른 세상을 갈망합니다.
언론의 사명을 주장하고 민주를 주장한다는 것은 개념의 표절에 빠져 스스로의 집념의 가치에 몰입한 집단에서 나오는 환경오염이며 그들이 활동하는 세상은 미세먼지를 증가시킬 뿐입니다. 이웃 간에 이념의 장벽을 높이 올리고 서로를 경원시하는 마스크를 쓰게 하며 경멸하는 표정을 색안경으로 감추고 살아가게 함으로써 세상을 분노의 홍수로 몰아가는 여론몰이는 개별자들의 삶에 노력 없이 이익만을 취하도록 부추깁니다. 그들의 활동 그 자체가 이웃 간은 격리되고/ 원망의 대상이 되며/ 자신은 세상의 선구자임을 알아달라는 어린아이의 치기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어른이 되면서 점점 더 거짓 진실을 외쳐댈 뿐입니다. 더위와 추위를 이겨낸 삶이 아니라 처음부터 온난한 날씨에서 살려고만 애써온 결과입니다. 개념은 그 적용 방식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넘나듭니다. 개념에 대한 순수한 인식 없이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삶은 거짓 개념들이 휘두르는 투쟁의 소용돌이에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고 휘둘림을 당하게 되는 노예적 삶이 될 뿐입니다. 개념의 신봉자들이야말로 개념 마비에 따른 노예적 삶을 스스로 찾아들어가는 꼴을 보여줍니다. 자신을 벗어나 세상의 개선만을 외침으로서 스스로를 기만적/ 희생적/ 애국자의 반열에 올려놓는 착각을 여실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자신의 개선이 우선임을 개념 중독 증상으로 인하여 벌써 오래전에 이미 잊어버렸습니다. 마비된 심성은 물불을 안 가리고 나아가려고만 합니다. 앞에 절벽이 있어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애원해도 소용없습니다. 보이스 피싱의 피해자들은 친구가 말리고 은행 직원이 말려도 끝까지 마비 증상을 풀지 못하고 결국 돈을 부쳐 주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국민의 태생적 심성이자 기질이며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나를 돌보며 살아오지 못하고 오직 가족을 향해/ 도덕을 향해/ 밖을 향해/ 밖에서 시키는 대로 살아온 텅 빈 마음 환경이 가져온 우리의 운명이었을 뿐입니다. 잘못된 개념에서 나오는 판단은 마치 모기를 잡겠다고 살충제를 뿌려 댐으로써 농약의 독성은 숲속의 무수한 곤충들까지 떼죽음으로 몰아가고 거기에 덧붙여 그것을 먹겠다고 달려드는 새들까지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초가삼간을 태워서라도 빈대를 잡으려 애씁니다. 그들은 모기에 물리는 조그마한 자연의 고통조차도 맹렬하게 거부하며 스스로의 집념의 강함을 외부로 발산해 보여주기 위해 자신들만의 신념으로 세상을 물들이려 할 뿐입니다.
어쩌면 이미 세속적인 식견이나 상황을 넘어 달관(達觀)의 경지에서 오판과 자뻑에 빠져 자충수를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삶이 자신의 개선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세상의 애국을 향해/ 진보를 향해/ 이웃을 향해/ 나아가려 어리석은 인식으로 세상을 올바름으로 개조해 보겠다는 또 다른 만용까지 덧붙임으로써 이중의 오염을 세상을 향해 뿌려대고 있습니다. 투쟁의 결과는 성취보다 퇴보를/ 화합보다 공멸을 보여주겠으나 목표 지상주의에 빠져 성취만을 움켜쥐려 할 뿐입니다. 개념으로 마비된 빨리빨리 사회는 모두를 침묵하게 만듦으로써 현실을 벗어난 황당한 결과 또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오직 주어진 현실의 결과만을 놓고 투쟁을 함으로써 원인에 대한 철저한 분석보다는 투쟁의 이득에 빠져듭니다. 현실을 바꾸면 세상이 좋아진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충수에 무리수에 덜컥 수까지 둠으로써 순수한 투쟁이 아니라 욕망을 갈망하는 거짓의 투쟁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상처를 감싸서 낫게 하기보다는 더욱더 후벼 파서 상처의 원인을 알아보겠다고 나서는 개악(改惡)의 메스 (mes scalpel)를 들이대면서도 세상의 진리를 외쳐댈 뿐입니다. 제도를 바꾸어서 세상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제도권 내부에서 개별자들이 각자의 삶의 도전에서 변화를 감지할 인식능력이 커져갈 뿐입니다. 도전을 회피해온 우리의 운명이자 서구사회의 개념을 잘못 표절한 죄과가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돌팔이 의사들은 돈벌이에 날뛰고 개념의 선무당이 투쟁을 외치며 목소리 큰놈이 아도(後 あと) 치는 사회에서 올가미에 걸린 우리의 마음은 갈팡질팡 혼란만을 보여줄 뿐 그 어느 분야에서도 올바른 판단이 불가능해져가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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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려주신 글 잘 보고갑니다 ..
폰으로 읽었는데 책 한권 읽는 느낌입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
두 줄 읽고 한 줄 까먹어도 끝까지 읽는 습관이 있어서리 ㅋㅋ
맛저하시고 편안한 시간 보내시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