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이야기..
아버지 박미암 /
어머니 선보인 /
출생 / 단기 4268년 소화 10년 9월 27일 호적
장녀로 태어남..
출생지 / 평호리 847번지
본 / 밀양 박씨
혼인신고 / 1960년 12월 23일
1935년 9월 17일
1녀 4남 중에 장녀로 태어났다.
초가집이었고... 높은 토방의 작은 방에서 생활.. 친구들이 날마다 찾아와서 놀았다... 바느질.. 솜놔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심..(42에 돌아가심..) 할머니는 4남매를 키우시느라고 갖은 곳에.. 밥(보리밥.. 점심)을 해서.. 시렁에 올려노면... 아버지가 작대기로 내리다가 엎어지기도.. 동생들과 점심 전에 갈라 먹음... 아버지 어머니가 먹을 밥이 없었다.. 어머니의 이야기 증언... 아버지가 큰성이어서 남의 집 일을 하러 가서.. 동생들을 불렀다.. 산에가서 풀을 해다.. 논에다 하던 시절... 들판에다 풀짐을 놔두고 작은 아버지를 대려와서 함께 밥을 먹으셨다.. 나주 작은 아버지... 집에 돈 될만한 물건들을 엿장사에게 주어 엿사먹고 형을 애를 많이 먹였다고 한다... 고모 3살.. 작은 아버지는 정월에 낳고.. 10월에 돌아가셨다... 할머니 이야기... 시제를 지내면 가터 정씨들... 떡을 얻어먹으려 찾아다님.. 남의 시제를 좋아함... 덕례도... 가서 정씨 아니다고 오지마라... 나주 작은 아버지가 “너도 죽어라.. 시제 지내게...” 할머니가 해주심... 할머니가 나도 어려서.. 오두막집.. 할아버지 때 들어가서... 과일 나무 하나 없어서 남의 집에 감을 주우러 다녔다.. 할머니가 “남의 것은 개똥 보듯해라.. 감없는 동지섯달도 산다..” 이런 말을 엊그제 들은 것 같으다... .. 할머니 이야기.. 많이 듣고 할머니 의지하고... 동네 마당 너른 집에서 밤에 강강 수월래를 하고.. 외뙤기..(외 따먹기) 하고.. 지와 밟기.. 놀다 집에 가면... 할머니를 부르고... 엄마의 사랑을 모르고 컸다.. 할머니가 딸인 수남 덕례..집에 들리셔서 안오시면... 가답들..(가터 들)을 내다 보며 기다리다가 울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컸다.. 어머니가 시집살이를 하면서 미워하니.. 할머니를 좋아하였다.. . 아버지..어머니.. 할머니의 입으시는 솜 놓은 저고리.. 나 크면서 어머니는 바느질을 안했다.. 소이집의 어머니가 내사촌 형님.. 거기 가서.. 산 밑에 제일 몬당에 집을 지어놓고 살았다... 육이오 때.. 남자들을 밤에 정치한다고 하는 빨치산들이 데려간다고 하여... 집에서 잠을 못잤다.. 겸백 지서로 자러 다녔다.. 소이 아버지가... 그 형님 한테 바느질을 내가 잘하고 먼저 배웠다.. 동네 친구들 어머니가.. “금남이 본만 봐라.. 금남이 집을 간다고 하면 허락.. 잔 것들까지.... 와서 솜을 바지솜 저고리솜을 다가져와서 작은 방에서 배워서 저녁에 만들고 자고 아침에 갔다.. 다 칭찬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집에 아이들이 많이 왔다..
아버지는 “살림 방으로 동네 새끼들은 다 불러들인다..” 다름질만 해도 “쌀쌀 점잖하게 안걷고 담박질만 친다..” 담박질만 해도 나무라심... 소이집을 그런것을 배우러 다녔다.. 소이 누나.. 행순(형순)이.. 데리려 오면.. 셋이서 자면서... 바느질을 배우고 나를 따라 와서 방으로 가득히 잤다...
5-6씩 오면... 방으로 하나다... 나를 따라서... 나는 데리려 와서 할 수 없이 갔다...
이상은 열네살 쯤의 이야기...
더 어렸을 때는 ...
10살에 늦게 겸백 보통학교 가다... 일본시대... 가이네들을 “모집”해 간다고 하니... 머리를 길게 질면 모집해 갔다.. 그래서.. 아버지가 머리를 잘라 버리고... 집에서 가위로.. 단발...
10살.. 초등학교 입학식... 일본이름... 기무라 긴낭... 木村金南 3월에 입학... 아버지가 데려감... 옷은 그냥 보통.. 가난해서 옷을 못해 입음... 어머니가 저고리와 치마를 만들어 주심...
입학식 기억... 나이 10살... 조영근 선생이 이름이 바꿔다고 하여... “우습네..” 내 이름을 한문으로 썼다.. 아버지가 가르쳐 주심... 이름을 써주심...
학교에서 이름을 쓰라고 함... 걸어서 학교로... 1 2 3 4 산수를 배우고... 국어(요미까다..)를 일본으로 가다카나 히라가나를 배움... 1학년 때는 가다가나로 쉽게 배우고... 2학년 때는 히라가나로... 1학년 때는 추워서 집에서 나무를 가져다 스토브.. 나무난로.. 피우고.. 앉으면... 힘센놈은 앞에... 약한 놈을 뒷전에 섰다.. 항시 여자여서 뒤에 섰다.. 남자들이 앞에 서고.. 남녀의 통합이어서...
2학년 때 구구법... 일본말만 해서.. 조선말을 하면 일주일에 6장 카드... 토요일이면.. 반공일.. 한세이까... 학생들이 모여서.. 선생님 강의를 마당에서 들음... 1-2학년 때는 잘 몰랐다... 카드를 만들어 주면.. 토요일 조사.. 다 뺏기고 없는 놈도 있고... 더 있는 사람도 있다... 없는 사람은 매.. 2개 있으면 2개 맞았다... 별로 안 맞았다... 학교 갔다 오면.. 일해라... 그래도 나는 일본이나 한글이나 어려움이 없이 배웠다... 한글은 5학년 때.. 1년도 못 배웠다...
1학년 막 가서... 정환우.. 선돌식당... 누나가 5살 더 먹음... 그 때 여자는 우아리 가터에서 3사람... 기순이.. 어머니 일찍 죽음... 아버지가 일본에 들어감... 기순이... 나를 데리러 왔다... 시집을 간 뒤에는 행순이가 데리러 옴.. 내가 착실하다고 데리러 왔다...
환우집에서 자면서... 그 또래는 못오게 하고... 논순이... 나만 오라... 배가 고픈 때라... 쌀을 추렴해서 밥을 해 먹거나... 콩을 볶아서 먹음... 누가 가져가기도 했다..
그 집에서 논에 자운영을 많이 했다... 풀을 밤에 베러 가자.. 안가려 해도... 따라만 가자...
오재미 파란색깔로 2개를 내가 만들어서... 모래를 넣었다.. 곡식을 넣으면 소리가 나서 좋은데... 콩을 여면.. 곡식 아깝다 해서.. 헛진한다고 못 만들게.. 몰래 만들었다... 항상 손에 쥐고 다님... 풀씨 베러 가서.. 안간다.. 따라만 가서... 잊어 버리고.. 항상 찾아 봐도 없고.. 항상 마음에 지금까지 박혀 있다.. 안잊어 버리고 있다.. 일하라.. 부모 몰래 만들었다...
3학년 4학년까지... 일본글... 일본 비행기가 적 비행기가 와서 폭격한다고 학교 운동장을 방공호를 삽으로 팠다.. 뙤를 당가에다가 4사람이 뙤를 실어 날랐다.. 운동장 가운데는 콩팥을 심어 들판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학교 논 농사를 짓느라고 모심고 논매고 베고.. 탈곡..
4학년 때.. 운동회.. 옷을 해 입고 오라... 할아버지가 옷을 못해입게 했다.. 학교는 아버지 때문에 다녔는데... 할머니가 “쓸데 없는 딸을 학교에 보낸다..”고 아버지 한데 나무랬다... 아버지는 몰래 한달 월사금을 55전을 내고 다녔다.. 그 때로는 큰돈이다... 4학년 때... 운동회를 안간다고 집에 있었더니.. 아버지가 매를 때릴려고 해서 가답들을 달려 도망해서 학교로 갔다.. 가니.. 늦었다.. 앞으로 걷기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동네 사람한데 도시락을 싸서 보냈다... 그 밥이 눈물이 나서 못 먹었다... 그날 달리기 2등을 해서... 두자리.. 탔다.. 마라톤 선수를 나가서 연필을 탔다... 기억에 박혀 있다.. 학교를 갔다 오니.. 아무말씀도 안하셨다..
4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그 때 태풍이 불었다.. 평난되었다고 말함.. 두 나라 사이가 대동아 전쟁이 평난되었다고 함... 그 뒤로 조선말을 배웠다.. 기억 니은 모음 자음.. 홀소리 닿소리를 배움... 그 해 가을에 쌀을 서되씩을 가져오라... 그 때 없는 사람은 컸다.. 부잣집 아이들도 안갔다.. 세근이 집도... 동네 아이들 6이서 모두 안다녔다.. 그 다음에 가고 싶어도 여러워서 못갔다... 지금도 후회가 된다... 나 혼자라도 갈 것을 못갔다... 나도 산수를 못해서 공부하기가 어려웠다..
삼삼기를 배웠다... 나만 어른들을 따라서 품앗이를 다녔다.. 금남이는 어른 품앗이를 다니는데.. 하고
세근이 어머니한데.. 고잔댁.. 딸이 둘이었다.. 둘다 친구로 지냈다... 그 어머니가 한글을 알아서 가르쳐 주셨다.. 먼저 배웠더니.. 두 딸을 때렸다...
배를 짰다... 크면 짜야 하고... 어머니에게 배웠다... 배 짜기를 배워야 시집을 간다.. 배 못짠 사람은 못산다... 길쌈을 해야 돈도 되고.. 산다... 아무리 부자도 죽만 먹었다.. 3식을 밥해 먹지 못했다... 부자집도 무를 넣어서 하루 한끼씩은 먹었다... 남의 집 살면서 죽을 먹어야... 일꾼들이 불평... 1년에 쌀 5가마가 최고 많았다...
아버지도 강래 씨 집에서 쌀 5가마를 받았다.. 시집와서..
고모부인 (병춘)씨가 제대한지 일년 반 정도 되어 명예제대... 큰 아버지는 노름.. 다 집도 금방 팔았다.. 아무것도 없는 집... 사는 집은 초벽... 그릇도 없고.. 솥단지도 깨진것.. 솥뚜겅도 깨지고... 겨우 막아서 밥을 해 먹음... 좋은 집에 보내려다... 살아 온 것으로 괞찮다고 시집을 왔다.. 제대해서 왔다고...
결혼식.. 아버지.. 흰고무신.. 조끼도 얻어 입고... 가터서 결혼예식... 장에서 옷감을 떠다가 소이 어머니가 만들어 준 옷을 입고... 맞절하고... 집에서 자고 다음 날.. 수남으로 갔다... 가난해서 가마도 못 탔다... 아버지가 데려다 주시고 하룻밤을 자고 가셨다... 그 때 많이 울었다...
작은 아버지는 군입대...
집안 형편.. 말도 못하게 가난... 함진 사람.. 함삯 주시오... 채일을 쳤는데... 그 값... 명주배 옷 값 주라.. 짠값... 바느질 값 주라.. 관대 채일값 주라.. 아버지가 보내고 보냈다... 고모부.. 아버지하고 결정... 어버지를 불러다 결혼해라.. 그렇게 가난 한 줄 모르고 왔다... 고모께서 “이것이 와서 어떻게 살까 하고 3일 저녁을 잠을 못잤다..”
초기 삶이... 농사도 적었고.. 남의 땅.. 쌀 3-4 가마.. 아버지는 일을 잘 못하셨다... 두집 노인들 3으로 인해서 도시로 못 나옴... 아버지가 일을 못하여... 힘들어 하심... 어머니 혼자 거름과 농사를 늦게까지 하셨다..
먼저.. 용석(갑오생)... 아들을 낳았다고... 좋아해서... 금방 족보에 올림... 족보 값을 앞당겨 품삯 논 닷마지를 모심어 주기로 쌀 15되를 받아서 족보 대금을 했다... 감기가 와서... 폐렴이 와서... 득량 덕고개에서 한약을 데려서 먹여도 안듯고.. 예당 병원약으도 안들어서... 남광주로 애기를 업고 차를 타고.. 쌀 대두 한말 값.. 8천원.. 쌀을 쌓서 애기 업고.. 굿머리까지 다름질... 득량에서 열차를 타고... 애기는 뒤에서 힘들어 우는 소리를 냄..애기 고양이 소리...... 광주만 가면 낳을 줄 알았다... 남광주 최병채 집만 가라.. 보성도 안 가봤는데... 열차도 처음 타봤다... 가본 곳.. 고모집.. 학교... 뿐이었다... 남광주에서 내려서 최병집을 찾음... 나무 딸각다리를 건너서... 동짓달이어서... 해가 저물어짐... 애기를 보이니.. 애기가 숨을 잘 못 쉬는 모습... 한약을 주면서 약 달여 먹여라.. 업고 쌀 한되를 들고 딸각다리를 건너서... 오니.. 열차가 지내고 있었다.. 차표를 사서 ... 내리니.. “애기가 죽는단 말이요...” 사람들이 내리라고... 득량에 저녁 밥 먹은 후여서 어둡다... 한 병원을 찾아가보니.. “손 바닥이 하에 져서.. 죽었소..” 죽은 애기를 없고... 등어리에 업은 애기 힘으로 오두제를 넘었다... 동짓달 그믐이어서 그 달을 안넘긴다고 하여... 그 날 밤에 묻었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일.. 돌 지냈다...
1957년... 내가 수남 집에서 태어남..
가난... 힘 잡을 수 없었다... 일다니며.. 나를 데리고 다니심... 아버지가 손을 대면 좋아진다.. 연구 박사가 될 것이다... 보릿고개... 통일벼 나고 좋아짐... 삼을 한 보따라 삼고 있었다... 손님이 찾아와서 길을 물었다... 저녁 밥을 해주고.. 자고 갈 텐데... 상고로 인해서 못 잤다... 닭 두머리 울 때... 낳았다.. 첫 닭울고 조금 있다 울었다...
1959년 남균...
죽을 줄 알았다... 돼지 잡은 데서 협력... 돼지 발목을 젖이 많이 나온다 하여 가져오심... 아직 일주일 되기 전에... 삶아서 주었는데... 물집이 많아 생겨서 피부가 벗겨짐.. 미영이 질어서 살았다... 챙이를 씌워서 물을 뿌림... 이런 굿을 해서... 겨우 살아났다.. 군머리 약방을 가서... 비닐을 깔고... 눕힘... 죽을 뻔 많이 했다...
62년 동호 태어남...
어려워서 길쌈... 임신해서 저녁에 낳을 시간인데.. 저녁까지 삼베 일을 해서 걸어다녔다... 발등이 부어서... 고생... 저녁 식사 바로 뒤에 남.... 8월 20일... 아들만 4을 낳았다고 다들 좋아여김... 며칠 지나서.. 지부 작은 아버지.. 남의 집 운을 타서 아들만 많이 나았다..
남일이.....여름.. 모심고 바쁠 때... 비가 안와서.. 밤새 보리 친다고.. 보리 수확이 없었다... 밤새... 보리 홁고.. 낮에 모심고 ... 저녁 밥 먹고 낳다... 3흘 후에 도로 모심으로 나갔다.. 암적굴.. 논이 적어서 비가 안와서 힘들었다... 지부굴 앞에... 논 벌 때... 감자를 많이 심어 캤다... 용관씨가 좀 쉬시지.. 부끄러 웠다..
동순이 ... 그날... 나락을 안양댁과 다 홇으고 애기 낳으려다 몇 뭇을 못 마쳤다.. 비가 오려 해서 비설겆이 하고 못 다함... 저녁에 식사하고... 낳음... 집에 귀한 딸을 낳았다... 동네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아버지도 좋아해서... 가서 미역도 사고.. 꽃신도 사왔다... 여섯째라서... 애기 낳고 다 좋아하는 말만 들었다..
남화... 낳고.. 동짓달.. 일이 다 끝이 나고.. 쉴 때였다... 일을 나가면.. 어머니 옷을 비고 냄새를 맡고 잠을 잤다.. 일을 따라 다니려 했다..
순화... 암적굴에서 고구마를 캘 때.. 추운 때... 따라 다니려 했다... 암적굴 밭에 기어히 따라다님...
아버지가 일을 적게 해서... 어머니 고생...
남균이와 동호.. 일 많이 시킴...
왕래가 공부 가르친다고 할 때... 부르고 불러다 일을 시킴..
외등.. 남양 양래.... 오디.. 누에 키우느라고 몸서리가 나서... 안 따라 간다...
크게 아프거나 병원에 간 일은 없다...
구완와사로 한방병원에 입원...
보훈 병원에 어깨가 아파서.. 주사.. 이빨하러... 안과 녹내장 제거 때문에... 수술... 중에 심장 관상동맥...
가난하고 일을 해서 힘이 들었다..
교회는 송일조 목사 때... 내가 신학교 다니고.. 소집사가 성탄절에 잔치를 한다고 오라해서... 교회를 다녀라고 하여... 다님...
양잠업... 누에 키우느라고...
산 개간... 누애... 산두.. 5가마.. 송아지 사고... 댓뒤 논을 샀다... 잠 못자고.. 아버지 교통사고 나서.. 보성병원.. 입원... 내가 다니고.. 어머니 다니고.. 집안일...
춘옥이를 얻어서.. 뽕 따고.. 며칠 있음... 큰 방에 덕을 매고... 만추잠.. 애기잠... 밥을 주고 가면서 작은 누애 채반을 잘 못 나서... 등잔불로 인해서... 불.. 남균이가 와서.. 불이 났다고 알려줌... 순화 남화가 잠을 자고 있는데.. 깨워 내 보냄... 물을 뿌려서 불을 껐다...
아버지 퇴원하여 이를 키워서.. 돈을 조금 했다...
누가 모를 심으로 오라고 하여...누애 키우다가... 오전에 꺼내서 일광욕 시킨다... 내 놓음.. 채반도 비를 맞고... 뽕도 안 따놓아서.. 싸움...
살면서 좋았다는 기억... 항상 돈이 없었다.. 얼굴을 못 펴고 살았다..
가난... 저녁이면... 감자... 보리식은 밥... 밭이 멀어서 늦게 오면... 아이들이 잤다.. 밥을 못 먹고 자면... 마음이 아팠다... 굶겨 재웠다 하여 마음이 아팠다..
더 이어지는 이야기... 2009. 7. 2일 채록
- 제주도 여행 / 59세에 갑계원들과 3일 동안 일정으로 갔다. 1월경이라 추웠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항에 도착하였다. 겨울 바다였지만 배안에서 보는 바다는 끝이 없이 넓었다. 그 바다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절반을 차지하는구나 생각을 했다. 도착한 다음 날에 비가 많이 와서 오갈 수 없었다. 산굼부리를 힘겹게 올라가서 제주의 모습을 보았다. 민속촌에 들러서 제주의 옛돼지를 키우는 곳을 보았다. 남자들은 조의 껍질을 빚은 술을 맛있게 먹었다. 동굴을 보았는데 수많은 종유석들이 천정 가득히 달려있었다. 선인장을 그렇게 많이 보기도 신기하였다. 부식들을 준비하여 갔지만 적게 먹었다. 일본말을 몇 번 했더니 일행들이 “일본말 잘하는 사람이다.”고 소문이 났다. 돌아오는 길에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 처음 타 본 비행기라 무서웠다. 땅 아래 보이는 집들이 점같았다.
- 태국 여행을 하다.
65세 태국여행을 하다. 남편과 처음 해외여행이었다. 아침 일찍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점심을 들고 태국행 비행기를 탔다. 저녁 무렵에 도착하였다.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갔다. 호텔에서는 자기 나라의 과일이라 하여 한 바구리씩 고루 담아서 문 앞에 놔두었다. 식수가 좋지 않아서 “함부로 먹지 말라.”고 하여 병에 담은 물들을 방마다 제공하여 마셨다. 아침 식사를 하고 개인 소유라 하여 분재를 심은 곳을 가서 하루 종일 구경을 하였다. 산 같은 정원이었다. 분재는 주로 철쭉이었고 아직 꽃은 피지 않았다. 길들은 아직 아스팔트가 아니어서 불편했다. 포장도로가 하나도 안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70년대 같은 모습이었다. 길에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묘지도 보이지 않았다. 길에서 보는 집들은 아주 높고 좋은 집도 있고 작은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호섬을 가는 동안에 산도 안보이고 들판이 많았다.
밥을 안남미로 지어서 먹기가 불편했다. 우리 밥과 달라서 튀김이 많아 먹기가 힘들었다. 현지 식당들은 기름에 튀김이 많았다. 태국인들은 키크고 몸집이 있는 사람이 드물고 키 큰 사람들이 적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우리와 같은 쌀로 밥을 하고 반찬도 같이 하여 식당에서 점심을 잘 먹을 수 있었다. 큰 새우를 빨갛게 삶아서 놓았기에 맛이 있을 것으로 알고 먼저 먹었더니 심심하고 맛이 없었다. 껍질만 많았고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없었다.
어느 식당에서는 돼지고기를 썰면서 크고 넓은 칼을 공중에 던지고 빙빙돌다 내려오면 받고 다시 던지기를 반복하여 한 참이나 보고 있었다.
바닷가를 지나는데 팝콘을 사야 한다고 했다. 바다에 팝콘을 던지면 고깃떼가 와서 물고 갔다. 많은 고기들이 와서 우물거리며 모여들었다. 그 많은 고기들을 잡아 먹는 곳이 있고, 못 잡는 곳이 있었다. 임금님 집 앞에는 안 잡는 다고 한다.
물 위에 나무를 걸쳐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우리 일행이 탄 배를 보고 나룻배를 타고 금방 따라와서 팝콘을 팔려고 했다. 이 팝콘을 바다에 뿌리면 엄청난 고깃 떼들이 몰려 왔다. 물 위에 사는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임금님 사는 곳이라 하여 쳐다 볼 수 있는 건물이 많았다. 지붕은 금색을 칠하여 돈이 많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집도 있었다. 기억자 집이 있었는데 화장터라고 한다. 안내는 “여자가 많아서 예쁘지 않는 사람은 결혼을 못한다. 자신도 아직 결혼을 못했다.”고 했다. 다 웃었다. 화정터가 있어서 있어서 묘가 없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어느 곳에 묘지가 많이 있는 곳이 있었는데 중국인들이 만들었던 묘라고 했다.
또 돼지와 호랑이는 서로 적인데 서로 작난을 치고 놀고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신기하게 바라보며 손뼉을 치고 놀았다. 연못 가에는 빙둘러 사는 굵은 몽둥이 같은 악어 떼가 두 차도 넘게 길에서 누워있었다.
돼지에게 훈련을 시켜서 글짜를 물고 오게 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에 한호섬에 가서 유람선을 탔다. 야자열매에서 나는 물도 마셨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한국말로 “야자 사~”하고 말했다.
권투를 하는 곳에서는 격렬하고 무섭게 권투를 하고 있었다. 안마하는 곳에도 들렀다. 사람들이 기본으로 들러 본다고 한다. 몸이 큰 사람들은 힘들어 했다. 나같은 사람은 쉽게 생각하고 안마를 해주었다. 별로 좋은 줄을 몰랐다.
태국공항도 우리나라 인천공항 보다는 천장이 낮았지만 컸던 것 같았다.
- 중국여행에 대해서
인천공항에서 2시간 반쯤 날아 상해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심하게 몸수색을 하여 입출국하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상해는 서울같이 넓고 컸다. 밤이라서 전기불이 많이 켜져 있었고 큰 도시의 느낌이었다. 큰 나라여서 적게 타야 70리라고 하였다. 마을도 없고 빈 땅이었다. 집도 우리 보다 못하였다. 뽕나무도 한도 없이 많이 있었다.
한국인 2세라고 하여 친절하게 안내를 하였다. 태국보다 밥먹기가 수월하였다.
산들은 애기 업은 모양, 굴뚝같이 쌓놓은 모습이 있었다. 산만 봐도 구경거리였다. 산에 오르느라고 걸음을 많이 걸어서 고생을 했다. 산길이 멀었었다. 처녀 아이들이 안마를 해준다고 하면서 “천원만 달라.”고 했다. 밤들을 한주먹 담아서 천원이라고 했다. 밤이 노랗게 벌어져 있어 가져왔는데 숙소에서 보니 그 터졌던 밤이 다 오므라져 있었다.
산들은 뽀쪽한 곳이 많아서 구경한 산들이 많았다. 금강산에 갔다 온 사람들은 중국산들이 더 좋다고 했다. 열쇠들도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작은 모자들도 한 개에 천원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한 자전거에 20여명씩 타고 빙빙돌기도 하여 하루 저녁 시간내내 탄복하면서 보았다.
중국간판은 한글은 없이 다 한문뿐이었다. 아는 글들이 하나씩 있었다. 상해(上海)글자가 맨 먼저 보였다.
- 아버지에 대한 생각
남균이가 세 살쩍에 잊을 수 없는 놀랬던 기억 중에 하나는 어느 가을에 나락을 한 덕석 마당에 널었는데 비가 오려고 해서 담아야 했다. 나는 빨래를 한 가득히 해야 하고 바빴다. 잠을 한참 자고 있기에 나락을 담아라고 했더니 일어나 무슨 약을 먹었다. 갑자가 눈동자가 돌아가고 쓰려지셨다. 죽는가 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물을 떠와서 숱가락으로 떠 먹이며 “내가 나락을 괜히 담으라 해서 이 일이 일어났다.” 싶어서 후회가 많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소리만 질렀더니 동네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천천히 눈동자도 돌아오고 몸도 풀려져 갔다. 천천히 정신도 돌아와고 말도 하고 3-4일 걸쳐서 좋아졌다. 득량 고모가 이 소식을 듣고 와서 물오리를 사서 오셨다.
닭도 안잡아 보았는데 남편에게 좋다는 이야기에 털을 뽑고 솥에다 삶았다. 그러는 동안에 내 어깨를 잡고 이러 저리 돌아다니던 둘째가 바지에 불이 당겨서 놀라 껐지만 많이 데였다. 오래 낳지 않고 진물이 오래 났다. 참 힘들어서 낳았지만 흉터가 마음이 아팠다.
- 30대부터 관절염이 많았다. 여름 7-8월에 풀을 해서 발이 아파 내리지를 못하였다. 자구 그렇게 아팠다. 그래서 둘째와 셋째가 고생을 했다. 동호는 “왜 그렇게 나만 불러내느냐?”고 짜증을 냈다.
- 나무가 없어서 힘들었다. 정자 등에서 나무를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어떻게 그 고생을 하면서 살았는지 모른다.
- 남화는 저녁에 자면서 방에 눕혀두고 나오면 어느 새 따라 나왔다. 하루 저녁에 남균이가 마루에서 자고 있었는데 피워 논 모깃불에 떨어져 엄지와 검지 발가락을 데여 오래까지 낳지 않아서 애를 달았다. 지금은 약도 좋아서 빨리 낳는데 진물이 언제까지 나서 힘들었다.
- 나는 할머니가 항상 키웠는데.. 밭에 갔다 오니 화로 불에 엉덩이를 데여서 된장에다 앉혀 놓고 있었다. 화기가 얼른 빠진다 하여 처방하였는데 큰 고생 없이 낳았다.
- 자식들에 대한 생각
- 아쉬운 삶이 있다면...
일을 못해서 힘이 들었다. 먹는 것보다 농사일들이 많아서 힘들었다. 아버지는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점심 후에 길게 잠을 잤다. 일하는 시간이 적어서 어머니가 힘들었다.
- 살아보고 싶은 꿈이 있다면..
우리 조상들은 항상 왜 이렇게 가난했는지... 논과 밭이 적고 불쌍히 살았는지... 지금까지 아침에 늦게 자고 일하지 않고 놀러 다니는 일이 마음이 아프다.. 나를 조금만 도와주었다면 좋았는데 무관심 하셨다.
나는 힘이 있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으로 이겨냈다. 봄에 나물이라도 캐서 냉장고에 보관하고 싶었다.
-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면..
- 양 아버지와 양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일..
어머니가 양아버지 어머니를 모시라고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족보상의 부모일 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작은 아버지 결혼하고... 작은 어머니가 큰 조카라고 하여 색동 저고리와 돌띠를 달아서 만들어 오셨다. 인사 옷이라고 하셨다. 그 때부터 양부모를 모셨다. 집을 팔아서 쌀 세가마를 갖고 들어오셨다. 먹을 양식도 적어 힘들었다. 양 어머니가 항상 흉을 보았기에 갈등이 있었다. 논을 팔아서 득량 딸에서 주었다. 지금까지 작은 아버지와 갈등이 있다. 두 분이 돌아가셨을 때는 영우를 만들어 삼년씩을 지냈다.
- 농사일에 대하여..
홀로 농사일을 많이 하느라고 힘이 들었다. 아버지가 일을 할 수 없는 한계가 많았다.
산을 쌀 6가마에 샀다. 박대통령 때 밀가루 지원으로 개간을 1정을 했다. 주로 아버지가 뚝을 쌓았다. 뽕나무를 심어서 양잠을 많이 했다. 힘들게 일이 많았어도 거기서 나온 돈으로 아이들 학비와 가용을 사용하였다. 논구입도 어머니가 많이 서둘렀다. “소작권이 크다. 우리가 산다.”하여 샀다.
- 고사리 꺾던 이야기들..
5월 초순이면 고사리가 산에 많이 난다.
- 장에 가던 이야기들..
- 집에 대한 이야기들..
- 제일 속상했던 기억들..
- 보람이 있었던 일들..
또 무슨 이야기들이 있을까 ??
첫댓글 아는 이야기도 있고 이해안가는 이야기도 있고..없는집에 시집와서 고생지지리도 하시고 ....
참 나도 집안 일 엄청 많이 했어요 동료들에게 이야길해도 너 몇년생인데 그렇게 일 많이했냐고 물어요 한번은 잊지못할 사건 리어커로 거름네다 급소를 (가슴) 죽을뻔 했어 요 거름을 아버지가 하도 많이 실어서 리어커가 뒤로 꺽어져서 요 아마도 그때 상당한 분을 못쉬어서 중학교때 죽었을지도 몰랐어요 저도 일이라 함 징그러웠어요 진짜루 휴일이면 집에 있기도 싫었으니깐요 정말요.
어머니께서도 힘들게 사셨지만 저 나름대로 한맺혀요 머하러 나두 그렇게 일을 했나싶어요 안한단소리를 해 보질못했으니 참 미련했어요 안해도 때리지는 안했을테고 부모님이
그래.. 우리 남화 순화도..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하고... 가난한 부모와 나를 비롯 못된 오빠들 때문에 크는데 힘들었지.. 오늘까지도 고생이 많고.. 그래 미안해.. 미안해.. 아직 미완성 글이어서 다시 정리하고 또 보충하고.. 해야할 것 같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