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의 목자로 불리신 비당 윤치병 목사님!
-2016년 9월 11일 설교 중에서-
채수일 목사(서울 경동교회 담임목사)
제가 그 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6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어떤 행렬’이라는 작품에서였습니다. 신학교를 갓 졸업한 한 젊은 전도사가 전북 금마의 아주 작은 교회의 청빙을 받기 전, 미리 교회 상황을 알아보려고 방문했다가, 너무 열악한 교회 현실과 정신 장애를 가진 아들과 함께 살면서 그 교회를 한 평생 섬겨온 한 늙은 목사를 보고 그냥 서울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목사가 은혜가 없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평생 가난하게 저런 정신 장애 아들과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수군거리는 마을 사람들, 하나 둘 떨어져 나가 이제는 겨우 몇 명 남지 않은 교인들, 예배당 옆에 붙어 있는 쓰러져가는 사택, 이런 교회에서는 목에 풀칠하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에 늙은 목사의 간곡한 부탁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내일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생각하고 잠이 들었는데, 이른 새벽 사고로 목숨을 잃은 정신 장애 아들의 관을 앞세운 장례행렬과 늙은 목사의 통곡 소리에 차마 발을 떼지 못하는 젊은 전도사.
아마 이런 내용의 소설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소설에서 알게 된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후 3년이 지나, 제가 신학대학생이었을 때였습니다. 등단 작가는 신학교 선배이신 백도기(白道基) 목사님(1939- ), 그리고 그 늙은 목사님은 비당(非堂) 윤치병 목사님(1889-1978)이셨습니다.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금마로 내려갔습니다. 금마 복음교회, 작고 낡은 예배당 옆에 사택이 있었습니다. 어둡고 아주 작은 방에서 목사님은 신문지에 붓글씨를 쓰고 계셨습니다. 방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온기 하나 없었습니다. 온통 붓글씨 연습한 신문지 조각들, 종이를 아낀다고 먹을 희미하게 갈아 한번 쓰고, 그 위에 진하게 간 먹으로 다시 쓴 신문지 조각들이 가득 차 있는 방, 한 쪽에는 먹다 남긴 보리밥 한 그릇과 김치가 작은 상 위에 있었습니다. 밥을 만져보니 오래되어 차갑고 딱딱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아빠, 나 물 길어 왔어’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몸은 60대의 노인이었으나, 정신년령은 7살 정도였습니다. 바로 소설 속의 정신 장애아들이었습니다.
‘응, 손님 오셨으니 밖에서 놀다 와라’.
‘알았어’ 하고 아들은 밖으로 나갔습니다.
‘목사님은 일본 유학도 하시고, 당시 흔하지 않은 고등교육을 받으셨으면서도, 왜 이렇게 가장 힘든 교회, 가장 어려운 형편에 있는 교회에서 평생 목회를 하셨는지요. 그리고 그렇게 고생하시면서도 늘 범사감사를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감사할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도대체 감사할 무슨 일이 있다고 그렇게 늘 범사감사, 범사감사 하십니까?’
‘아마 내가 예수 믿지 않았더라면 나는 진작 자살했을 것입니다. 나를 살게 하시고 생에 보람을 느끼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기만 하면 만사는 해결입니다’.
만사는커녕, 단 몇 개의 일도 해결되지 않아, 아니 해결하지 못해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범사감사’를 입에 붙이고 산 사람, 윤치병(尹恥炳) 목사!
1889년 충남 논산 출생, 1909년 지금의 중앙고등학교 전신인 기호학교 본과 1회 입학, 본명은 윤주병(尹柱炳)이었으나, 일제의 강제병탄으로 나라를 빼앗긴 후, 나라 잃은 백성의 수치를 생각하여 스스로 이름을 기둥 주(柱) 대신, 부끄러운 치(恥)로 개명, 1911년 기호학교 수학교사였던 유일선의 권유로 세례를 받음, 일본 고오베 신학교에서 신학수업, 1916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고창군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근무, 8년 만에 교사직 사임하고 다시 일본으로 가서 동경에 있는 영어정측학원에서 수학, 일본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을 목격하고 귀국, 1926년 영주읍 장로교 교회에서 목사 안수, 1929년 영주중앙교회를 설립 시무목사로 그리고 그후 전북 김제 봉월리 교회 시무 중 미 남장로회 선교부와의 의견충돌로 사임하고 복음교회를 창설, 그 후 줄곧 금마 복음교회에서 시무했고, ‘복음과 감사’ 잡지를 창간하여 발행. 1978년 숙환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음. 이것이 인터넷에 알려진 그에 관한 정보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윤 목사님을 보고 자랐고, 1969년 ‘어떤 행렬’로 등단한 백도기 목사님은 그를 ‘거룩한 가난(聖貧)의 목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글씨 솜씨가 알려져 사람들이 그의 글을 얻으려고 오면,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글을 써주셨다고 합니다. 글을 얻은 사람이 제법 큰 돈을 놓고 가면 다음에 오는 가난한 사람에게 덜컥 주셨다고 합니다. 한신대 신학교수셨던 김경재 목사님은 ‘윤 목사님의 서예는 노자의 무위자연의 경지에 이른 일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품의 글씨를 아무나 부탁하면 써주셔서, 빵집이나 푸줏간 간판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자신을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큰 바보였고, 자기는 그 분에 비하면 아주 작은 바보라며.
‘목사님은 선택하기 힘든 상황에서 결단해야 할 때, 어떻게 하셨나요?’
‘저는 언제나 제가 손해 보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사셨으니 물론 사모님께서 평생 고생하셨지요. 충청도 관찰사의 손녀딸로 아씨 소리 들으며 고이 자란 사모님 고생은 더 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평생 한복 차림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그것도 골고루 달아야 한다며 신발을 바꿔 신으시는 분, 볼품없는 중절모에, 시계 줄이 없어 고무줄로 묶어둔 회중시계, 안경테 끝에 구멍을 뚫어 고무줄을 꿰어 마치 수중안경처럼 머리 위로부터 내리 쓴 안경, 뚜껑이 없어진 만년필이 꽂힌 조끼를 입고, 객지에 아들을 둔 과부 할머니를 위해서 십여 년 동안 편지를 대필해 주신 분, 교회 안에서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누님, 형님이라고 호칭하신 분, ‘여우도 굴이 있고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예수님 흉내 낸다며, 낙관을 ‘비당’(非堂)으로 하신 분.
윤 목사님의 전기를 쓰신 백도기 목사님에 의하면 ‘범사 감사’라는 글이 너무 좋아 글을 사겠다고 하니, 윤 목사님은 ‘그럼 붓을 사고 싶은데 이 백 원만 주세요’하셨다고 합니다. 겨우 붓 한 자루 값을 달라고 하신 것이지요.
‘범사 감사’, 한 평생 가난과 궁핍을 벗어난 적이 없었고, 정신장애 아들 때문에 평생을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사셨고, 말년에는 앞을 보지 못하시면서도 ‘범사감사’를 입에 달고 다니신 분, 도무지 감사할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감사할 일이냐고 빈정거리면, ‘그래도 감사’, 무엇이 그렇게 감사하냐고 비아냥거리면, ‘그냥 감사’(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 상태 그대로/ 그런 모양으로 줄곧/ 아무런 대가나 조건 없이 감사)를 중얼거리신 분, 그 분이 비당 윤치병 목사님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