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2章 邪皇秘譜의 奇緣
선하령(仙霞嶺)-
절강성(折江省) 남단(南端)을 가르는 험령(險嶺). 실로 선경(仙景)을 방불케 하는 뛰어난 절봉(絶峯)이다. 그러나 산세가 지극히 험하고 거칠어 세인들은 발길을 두지 않는다.
선하령하(仙霞嶺下)엔 온통 풍림(楓林)으로 둘러싸인 분지(盆地)가 있다.
-비금림(秘琴林).
언제부터인가 그곳은 그와 같이 불리워졌다. 그린 듯 아름답고 수려한 비금림은 전설 같은 신비(神秘)를 안고 있다. 또한 알게 모르게 비금림은 절강성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왜냐하면 비금림에 선인(仙人)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 때문이었다. 그 소문은 벌써 천하에 두루 퍼져 있었다.
과연 그것은 사실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비금림 안으로부터 때때로 지극히 신비로운 금음(琴音)이 흘러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비금림이었고 그곳은 신비(神秘), 그 자체였다.
천하의 그 누구도 비금림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타인의 접근은 불허하는 금지(禁地)요, 비금림 가까이 접근하는 자마다 당혹을 금치 못하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일단 발을 들여 놓으면 풍림 사이를 끝없이 빙빙 돌다가 결국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묘한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석양(夕陽).
하늘에는 온통 홍화(紅火)가 물결치듯 타고 있었다. 구름은 연인의 심장처럼 붉고다.
지나던 바람마저 그 심장 위에 쓰러져 흐느끼듯 붉게 물드니 천지는 일제히 찬란한 불의 홍수 속에 파묻혀 장엄한 축제를 연다.
온통 풍림(楓林)으로 둘러싸인 신비의 비금림도 석양의 짙은 여울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띵······띠······딩······띵······
한 줄기 신비로운 금음이 비금림 안에서 흘러나왔다.
아, 천상의 선음(仙音)인가?
신비롭고 오묘한 그 음률은 석양보다 황홀하고 그윽했다. 풍류(風流)를 아는 인물이라면 술이 없어도 단번에 취해버리고 말리라,
비금림 안은 온통 기화이초(奇花異草)가 만발한 초원(草原)이었다. 화려하고 강렬한 화향(花香)이 코 끝을 진동했다.
싱그러운 초목들은 끊임없이 푸른 빛으로 일어선다.
선인이 기거하는 별유천지(別有天地), 천상의 낙원이 바로 이곳에 펼쳐져 있지 않은가?
부드러운 융단처럼 넓게 깔린 초원의 중앙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의 맑은 연못이 있었다.
바닥이 훤히 비춰보이는 옥지(玉池)의 연못물은 투명하도록 맑고 깊었다.
그 바로 앞에 한 채의 아담한 모옥이 그림처럼 세워져 있었다. 정갈한 멋과 운치를 지닌 모옥(茅屋)이었다.
선경(仙景) 속의 별옥(別屋)이라 말해도 가히 손색이 없는 모옥은 금방이라도 환상처럼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같이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연못 옆에는 큰 반석이 있었다. 반석 위에는 한 명의 백삼문사가 단좌한 채 금(琴)을 탄주하고 있었다.
띵! 띵······띠딩······띵······
한 마리 선학(仙鶴)처럼 고고하고 신비로운 자태를 뿜어내는 백삼문사의 모습은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띵······
일순 금음이 끊어졌다.
[휴······]
깊은 고뇌를 지닌 듯 금에서 손을 떼며 망연히 한숨을 내쉬는 백삼문사는 놀랍게도 불과 약관(弱冠)의 미청년이 아닌가?
유달리 새하얀 안색의 그림 같은 미청년은 일견하기에도 유약하기 그지없었다. 바람만 세차게 불어도 휘청 쓰러질 듯했다.
그러나 결코 그는 유약하기만한 범인(凡人)이 아니었다.
미청년의 일신에 은은히 흐르고 있는 범상치 않은 기품을 지혜있는 사람은 알아보리라. 그것은 만인을 압도하는 웅장하고도 묵중한 기운! 바로 제왕지기(帝王之氣)가 아닌가?
그의 용모 또한 천하를 경탄케할 정도였다. 그의 모습은 한 번 보면 영원히 잊지 못할 인상적인 것이었다.
섬세하고도 뚜렷한 윤곽을 띤 얼굴에 조각처럼 수려한 이목구비. 흰 얼굴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먹물같이 짙은 눈썹이 강렬한 느낌을 준다.
깊고 그윽한 혜안(慧眼)은 충격적인 신비를 담고 있었다.
깊이 가라앉아 일점의 동요도 없는 잔잔한 눈빛은 마력(魔力)적인 신비로 영혼을 송두리째 빨아들일 듯했다.
그 뿐인가?
사나이의 높은 기개를 상징하듯 우뚝 솟은 코와 입술은 여인의 그것보다 붉은 주사빛이었다.
실로 완벽한 미를 지닌 신의 예술품을 보는 듯 그의 용모는 신비롭고도 찬란했다.
백의미청년은 깊숙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연못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낮은 탄식성이 흘러나왔다.
[후유······ 학문과 지닌 바 재주가 천지를 뒤덮는다 한들 무엇하랴······]
그는 무슨 일엔가 상심하고 있는 듯 그렇게 뇌까렸다. 그의 준미한 얼굴에는 언뜻 한 줄기 그림자가 스쳤다.
[주상(主上)이신 대형께서 계시니 구주팔황(九州八荒)에 대의(大意)를 펴볼 수도 없는 노릇······]
그는 말 끝을 흐리며 연못 위에 불타듯 숨가쁘게 걸려있는 노을을 응시했다.
깊고 잔잔한 눈빛은 노을의 홍수 속으로 빨려드는 듯했다.
그리고 덧없는 그의 중얼거림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흉금(胸襟)이 하해(河海)를 담을 수 있다 한들 또한 무엇하리······ 미인(美人)의 마음 하나 얻을 수 없으니······]
미인? 백의미청년은 혹시 상사병을 앓고 있단 말인가?
그의 뇌까림에는 노을빛 같은 아픔이 묻어 있었다.
이때였다.
스---윽!
아무런 기척도 없이 백의미청년의 뒤로 한 섬세한 인영이 나타났다. 노을을 등지고 나타난 인영은 궁장차림의 여인이었다.
이십 사오 세 가량 되었을까?
첫눈에 호감을 사게 하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특히 그녀의 두 눈은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아지랑이처럼 잔잔하게 피어오르는 포근한 눈빛 속에는 그윽한 정감이 찰랑찰랑 고여 있었다.
그녀는 한 자루 화려한 패검(覇劍)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일견하여 범상치 않은 보검이었다.
여인은 다소곳이 백의미청년의 뒤에 시립하며 입을 열었다.
[삼야(三爺), 천첩 돌아왔사옵니다.]
그녀는 극히 공손한 음성으로 말하며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백의미청년은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그 자세로 등을 돌리고 앉은 채 담담히 말할 뿐이었다.
[비랑(秘浪), 수고 많았다. 갔던 일은 잘 되었느냐?]
비랑이라 불린 궁장미녀는 자기보다 대여섯 살 아래인 백의미청년에게 극히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예, 부중(府中)을 정리하고 후(后)마마께 인사도 올렸사옵니다.]
[수고했다.]
백의미청년은 그제서야 돌아앉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비랑은 살짝 고개를 떨구었다. 밑으로 내리깐 그녀의 따뜻한 두 눈에는 애틋한 정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백의미청년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래······ 형님께서는 여전하시더냐?]
비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지병이 나아지지는 않으셨으나 더 나빠지지도 않은 상태이셨습니다.]
백의미청년의 미간에 한 줄기 그늘이 드리워졌다.
[흠······ 대형께서 건강하셔야 할텐데······ 이형(二兄)과 제독부(提督府)의 야심이 날로 커지고 있거늘······]
그는 수심어린 표정으로 눈길을 허공으로 돌렸다. 그 모습에 비랑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후마마께서는 삼야께서 돌아오셨으면······]
백의미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나설 때가 아니다. 내가 나서면 혼란만 더욱 가중될 뿐이다. 대형께서도 그것을 아시기에 나를 부르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는 휘적휘적 옷깃을 날리며 풍림 사이를 걸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비랑의 안색이 웬지 쓸쓸하게 변했다.
[또······ 선하령에 오르실 것이옵니까?]
그렇게 묻는 비랑의 눈빛이 문득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백의미청년은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 동안 음식이나 장만해 놓아라. 비랑이 만든 음식이 아니면 식욕이 일지 않는다.]
그 말에 비랑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 빛났다. 그녀의 음성이 그윽하게 변했다.
[다녀 오시옵소서.]
허리를 숙여 백의미청년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하는 비랑은풍림 사이로 멀어지는 백의미청년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 눈빛은 흡사 지아비를 바라보는 아낙의 눈빛과도 같았다.
사해(四海)를 모두 포용할 듯 깊고 그윽했으며 무엇보다도 그것은 뜨거웠다.
백의미청년은 비랑을 뒤로 하고 총총한 걸음으로 풍림 사이를 지났다.
늘 버릇처럼 이 시간이면 산책을 나서는 그였다.
그런데 그가 어찌 꿈엔들 짐작이나 했으랴?
설마 오늘 풍림을 나서는 그 발길이 파천황(破天荒)의 대풍운(大風雲)을 몰고 올 줄이야······
이는 천하제일기재인 그조차 꿈에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울창한 풍림 속에는 한 가지 절세기진(絶世奇陣)이 펼쳐져 있었다.
-팔극겁륜대진(八極劫輪大陣).
오백년 전의 상고기진(上古奇陣)으로 이마제마(以魔制魔)의 오의(奧意)를 지닌 진법은 심성이 착하지 않은 자가 발을 들이는 순간 혼돈 속에 파묻혀 끝내 죽어나가는 무서운 절진이다.
비록 지금은 그 살기(殺氣)를 제거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다섯 손가락을 꼽을 수 있다.
백의미청년은 어느덧 선하령하의 구릉(丘陵)에 이르렀다.
구릉의 허리에 반쯤 걸린 노을이 물결처럼 번지며 세상을 감아올리고 있었다. 그 광경은 실로 황홀했다.
[······]
백의미청년은 한동안 홀린 듯 노을을 응시했다. 죽음보다 강한 연심(戀心)을 품은 여인의 심정이 저렇듯 붉을까?
백의미청년은 준미한 얼굴에 신비한 노을빛이 묻어 일렁였다. 그는 눈길을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흡사 병풍을 세워놓은 듯한 절곡의 입구였다.
그곳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느낌을 금치 못할 정도로 괴이로왔다.
쓰으으으으^^^^
묵운(墨雲). 시커먼 묵운이 먹물같이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수천 마리의 독사떼가 독무 속에 우글거리듯 그 광경은 섬뜩하고 공포스러웠다.
백의미청년은 곡구를 가득 메우며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묵운을 담담히 응시했다.
[묵운천문대진세(墨雲天門大陣勢)······]
그의 입에서는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 그렇다면 절곡의 입구에 진세가 펼쳐져 있단 말인가?
그렇다! 묵운은 인위적인 진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었다.
백의미청년은 당대의 천하제일사(天下第一士)다. 그가 모르는 학문은 천하에 없다.
-묵운천문대진세.
희대의 상고절진(上古絶陣)으로 이미 오래 전에 절전된 것으로 고금오대절진(古今五大絶陣) 중의 하나다. 풍림에 펼쳐진 팔극겁륜대진이 무섭다 하나 묵운천문대진세에 비할 수 없다.
바로 그 절진이 선하령의 구릉 한 절곡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묵운천문대진세 속에는 하나의 비석(碑石)이 세워져 있다.
-들어오라. 천하를 그대에게 쥐어주마!
실로 광오(廣傲)하기 이를 데 없는 글이었다. 그것은 또한 범인이 알아 보지도 못할 갑골문자(甲骨文字)로 새겨져 있었다.
백의미청년은 이미 비석의 글을 많이 보아온 듯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냉소를 터뜨렸다.
[묵운천문대진세 따위의 재주를 아는 자가 어찌 천하를 논하는가?]
그의 신비하고 잔잔한 두 눈에는 기광이 빛났다.
[천하를 얻을 수는 있다. 다만 그렇게 되면 천륜(天倫)을 어기게 되므로 행하지 않을 따름이지.]
아! 나약하게만 보이는 백면서생인 그가 마음만 먹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니^^^^
백의미청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선하령의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선하령의 중턱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돌연 어디선가 폐부를 쥐어짜는 듯 고통스런 신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크······ 책벌레였군······]
[······]
백의미청년은 검미를 꿈틀거렸다. 그는 안색을 굳히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백의미청년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이······ 이놈······ 이리로 오너라!]
예의 그 음성이 다시 그의 귓전을 울렸다.
백의미청년은 흠칫했다. 그 음성이 너무도 괴팍스러웠을 뿐 아니라 사기(邪氣)가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백의미청년은 곧 안색을 가다듬으며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느 분이 장난을 하시오!]
그의 물음이 끝나자마자 벌컥 화를 내는 예의 음성이 더욱 분명하게 그의 뒤쪽에서 들렸다.
[빌어먹을······ 멍청이! 노부가 안 보이느냐······]
(음······)
백의미청년은 눈썹을 꿈틀하며 뒤돌아섰다.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큼직한 하나의 바위가 놓여져 있었다.
한데 보라! 기이한 광경이 아닌가? 바위 속에서 온통 피투성이가 된 사람의 얼굴이 천천히 빠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백의미청년은 굳은 안색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음······ 바위에 숨다니······ 사술(邪術)이로군.]
그는 침중히 신음했다. 바위 속의 괴인은 피투성이 얼굴을 끄덕이며 괴이하게 웃었다.
[클클······ 그렇다. 천형둔신술(天形遁身術)이라는 것이지······]
파팍! 툭······투툭······
괴인은 중얼거리는 사이에 바위 속에서 팔과 다리가 빠져나왔다.
스슥······팍!
그의 몸뚱이까지 완전히 바위 속에서 빠져나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괴인은 지극히 괴악스럽고 요사로운 인상의 노인이었다. 가늘게 쭉 찢어진 뱀눈에서는 시퍼런 살기가 줄기줄기 뻗치고 있었다.
실로 소름끼치는 섬뜩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지독한 중상을 입고 있었다. 그의 복부가 쩍 갈라져 시뻘건 선혈과 끊어진 내장이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실로 그 상태로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크······]
괴노인은 안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리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노인장, 괜찮소이까?]
백의미청년은 급히 다가가 괴노인을 부축했다. 괴노인은 그의 부축을 받으며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네녀석의 손은 참 따뜻하구나······ 노부가 살아온지 백 이십 년만에 처음 사람다운 사람의 손을 대하는구나······]
그는 고통스러운 듯 숨을 가쁘게 내쉬었으나 눈빛만큼은 비수처럼 날카롭고 강렬했다. 백의미청년은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지경으로 살아 있다니······)
그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범인 같았으면 몇 번 죽고도 남았으리라.
그는 황급히 자신의 장포를 찢었다.
찍---우욱!
이어 백의괴인의 복부로 망설임 없이 손을 가져가 상처를 싸매주는 것이 아닌가?
괴노인은 부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크······ 그만 두어라. 노부는······ 반각을 더 못 산다······]
그는 백의미청년의 행동을 저지시키며 눈을 들었다. 천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강렬한 눈빛이었다. 괴노인의 표정이 괴이하게 변했다.
[네녀석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백의미청년은 선뜻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괴노인은 숨이 가쁜 듯 안색이 일그러졌으나 힘을 내어 말했다.
[후일······ 사황녀(邪皇女)라는 아이를 만나면······ 잘 대해다오······]
밑도 끝도 없이 사황녀(邪皇女)란 이름만 내뱉은 괴노인의 말에 백의미청년은 의아한 빛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황녀······ 명심하겠습니다.]
괴노인의 입가에 괴악한 웃음이 떠올랐다.
[고맙다. 그 대가로······ 이것을 주마······]
(웃!)
백의미청년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는 질겁하며 눈을 크게 떴다. 괴노인은 이 순간 놀랍게도 자신의 손을 찢어진 복부 속으로 푹 집어넣는 게 아닌가!
괴노인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채 몇 차례 손을 휘젓더니 복부 속에서 유지로 싼 두툼한 책자를 쑥 끄집어 내었다.
[자, 이것이다······]
괴노인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책자를 대뜸 백의미청년에게 내밀었다.
[이······ 이것이 무엇입니까?]
백의미청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괴노인은 문득 원독의 눈빛을 폭사하며 분노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혈사황(血邪皇)이다······ 그 사황비보(邪皇秘譜)를 노리는 만절사존에게 당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과 비급명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강호 무림인이 있었다면 너무 놀라 눈을 흡뜨며 말문이 막혀 헉헉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백의미청년은 무림(武林)과 무관한 문사(文士)였다.
(혈사황······ 사황비보······ 만절사존······)
그는 의아한 빛을 지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혈사황(血邪皇)!
군마패천록 삼십이위에 올라 있는 절대사황(絶代邪皇).
그는 세외에 나가 있어 무림사에 관여하지 않는 인물이다. 또한 사황전(邪皇殿)의 당대전주다.
-사황비보(邪皇秘譜)!
이는 사종이대주류(邪宗二大主流) 중 하나인 사황일맥(邪皇一脈)의 진산비급이다.
사황비보의 주인인 혈사황조차도 사황비보의 칠할 정도를 깨우쳤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마패천록의 서열 삼십이위에 당당하게 올랐다.
그런 만큼 사황비보의 내력은 가히 가공지경이었다.
괴노인 즉, 혈사황은 다급한 표정으로 당부했다.
[곧······ 이곳을 떠나라······ 마중오절(魔中五絶)이······ 주위에 있을 것이다······]
말을 끝마친 순간 혈사황의 안색이 급격히 시들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는 안간힘을 다해 입을 벌렸다.
[사황녀······ 초초를······ 부탁······]
이어서 툭! 그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꺾어졌다.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츠츠츠츠······
놀랍게도 그의 시신은 눈녹 듯이 주르를 녹아 내리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그의 시신은 한줌 혈수로 화해 흩어졌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백의미청년은 뜻밖의 기변에 흠칫 놀랐다.
(시신이 녹다니······)
그는 한 줌 혈수로 사라진 괴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공에 있어 문외한인 그에게 있어 그것은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는 아연한 표정으로 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였다.
[흐흐흣······]
돌연 소름이 오싹 끼치는 음소가 귓전을 울리는 것이 아닌가?
백의미청년은 흠칫했다.
휘르르! 슥!
허공에서 유령처럼 삼인(三人)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모두 핏물에 흠뻑 젖은 듯한 시뻘건 혈포를 걸치고 있었다.
냉혹하고 잔혹한 살기가 그들의 일신에 칼날처럼 곤두서 있었다.
삼인의 혈포괴인들은 득의의 괴소를 터뜨렸다.
[크크······ 혈사황, 결국 뒈졌군.]
그들은 지면에 얼룩지듯 남아 있는 혈수를 보고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나 돌연 탐욕의 눈빛을 번들거리며 백의미청년을 노려보았다.
그들 중 두 눈이 간혹하게 찢어진 괴인이 선뜻 입을 열었다.
[크흐흐······ 책벌레! 순순히 사황비보를 내놓아라!]
그들은 위협적인 일갈을 터뜨리며 음침하게 웃었다.
쿵! 쿵!
줄기줄기 소름끼치는 살기를 폭사하며 앞으로 다가서는 것이었다. 백의미청년의 검미가 무섭게 꿈틀했다.
[이치를 모르는 친구들이군!]
그는 분노한 듯 음성이 다소 높아졌다.
삼 인의 괴인은 가소롭다는 듯 서로를 마주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크크······ 주둥이만 살았군.]
[흐흐흐······ 어차피 살려두면 시끄러운 일만 일어날 테니······]
[좋다!]
츠츠······ 위---잉!
삼 인의 몸에서는 끔찍하게도 시뻘건 혈강(血罡)이 핏물처럼 번졌다. 전율스런 광경이었다.
백의미청년은 안색이 변했다.
(위험하다······)
그는 위기를 직감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우하하핫······]
돌연 천지를 쩌렁쩌렁 뒤흔드는 엄청난 광소성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우욱······크······]
삼 인의 괴인은 피를 토하며 신형을 비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가공할 굉음이 사위를 뒤흔들었다.
우르르······ 쿠---쿠쿵!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과 함께 허공 일각(一角)을 온통 허물어뜨리며 거대한 묵영(墨影)이 벼락같이 떨어져 내렸다.
삼 인의 혈포괴인들의 안색이 헐쑥하게 질렸다.
[으······ 묵룡대종사(墨龍大宗師)······]
[피······ 피하자!]
그들은 대경실색하며 부르짖었다.
휙---익! 휙!
살기 등등하던 그들은 사색이 되어 다급히 세 방향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들의 민첩한 행동보다 더 빠른 것은 예의 그 가공할 정도로 큰 광소였다.
[후하하하하핫······ 감히 본 종사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선하령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앙천광소(仰天廣笑)였다. 동시 묵영의 전신으로부터 시커먼 구름같은 기운이 피어났다.
쿠쿠---쿵! 콰쾅! 펑!
가공할 대폭발음은 주위 일백 장 방원이 시커먼 묵강(墨罡)에 완전히 파묻혔다. 백의미청년은 그 광경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대단한 위세다······)
그는 해연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케---엑! 큭!]
폐부를 쥐어뜯는 세 마디의 처절한 비명이 잇달아 터졌다. 삼 인은 피를 뿌리며 처참하게 나뒹구는 것이 아닌가?
[흐흐······ 마중오절(魔中五絶)! 네놈들 따위가 만절사존을 등에 업고 날뛰다니······]
고막을 진동시키는 우렁찬 일갈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휙!
한 명의 묵의인(墨衣人)이 장내에 내려섰다.
묵의인은 실로 놀라운 거구였다. 키는 능히 구 척에 달했으며 몸집은 태산을 연상케 할 만큼 거대했다. 장내에 나타나자 눈 앞에 갑자기 산이 하나 생겨난 듯 했다.
그의 인상은 위맹스럽기 그지없었으며 패도적인 기운이 물씬 풍겼다. 석 자나 되는 흑염을 가슴 앞까지 길게 드리웠으며, 성급해 보이는 대추빛 안색에 뇌전(雷電) 같은 호목(虎目)이 강렬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기질은 흡사 관운장(關雲將)을 연상케했다.
특이한 것은 그 뿐 만이 아니였다.
대도(大刀).
그는 한 손에 다섯 자나 되는 시커먼 묵도(墨刀)를 움켜쥐고 있었다.
묵룡대종사(墨龍大宗師).
그는 그렇게 불리워지는 인물이었다.
묵룡대종사는 이글거리는 호목으로 장내를 둘러보았다.
[음······ 혈사황마저 암수를 당하다니······ 만절사존! 그자가 천외육대천(天外六大天)을 모조리 제거할 모양이군······]
그는 침중한 안색으로 무겁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힐끗 백의미청년을 주시했다.
[······]
그는 눈빛이 섬전처럼 번쩍 빛났다.
(선하령에 이런 기재가 있다니······)
그는 경탄과 함께 흥분의 빛을 띄었다. 그는 다소 누그러진 안색으로 백의미청년에게 말을 건냈다.
[아이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백의미청년은 잠시 멈칫거렸으나 곧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소생은 자천기(紫天奇)라 하외다.]
묵룡대종사는 호목을 크게 떴다.
[천하제일사(天下第一士) 자천기가 바로 소형제란 말이냐?]
백의미청년 자천기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생이 바로 자천기가 분명하오.]
[음······]
묵룡대종사는 침음성을 발했다. 강렬하게 이글거리는 그의 호목에 기광(奇光)이 스쳤다.
천하제일사(天下第一士) 자천기(紫天奇)!
그 이름은 벌써 몇 년 전부터 천하를 떨어 울리고 있었다. 어떤 신분의 인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신비, 그 자체였다.
그 신비 속에 어렴풋이 알려진 것은 그가 젊은 문사라는 것이다.
또한 그의 학문은 만박통지(萬博通知)이며 어떤 대석학(大碩學)이라 할 지라도 그와 일각 이상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고 전해졌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자천기는 만류(萬流)에 통달한 당대 제일기재였다.
묵룡대종사는 자천기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아깝다! 무공일도(武功一道)에 들었으면 족히 천하제일이 되었을 기재이건만····)
그의 눈에는 한 가닥 미련과 함께 아쉬운 빛이 어렸다.
바로 그때였다.
[우---우!]
서쪽에서 돌연 섬뜩한 장소성이 터졌다.
[······]
묵룡대종사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는 무섭게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소리나는 곳을 응시했다.
[혈섬마검제(血閃魔劍帝)······ 죽지 못해 안달을 하는군.]
그는 씹어뱉 듯 중얼거렸다.
휙!
그럳자가 돌연 그는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다짜고짜 자천기에게 내던졌다.
[옛다! 기회가 나면 보아라.]
그것은 한 권의 두툼한 비급이었다.
[노······ 노공(老公)······]
자천기는 얼떨결에 비급을 받아들고 무어라 말을 하려했으나 어느새 묵룡대종사의 몸이 마치 한 마리 흑룡(黑龍)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스스슥······
그는 몸을 띄우며 문득 생각난 듯 당부했다.
[선하령 주위에 마중오절이란 극악한 마들이 깔려있다. 일찌감치 선하령을 떠나거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스스스······
그의 신형은 이미 삼백 장 밖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자천기는 그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대단한 경공이다!]
그는 감탄하며 한동안 허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참 후 그는 생각난 듯 수중의 비급을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표지가 마치 먹물에 흠뻑 담갔다가 꺼낸 듯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묵룡경(墨龍經).
표지에는 위맹한 물체로 위와같이 씌어져 있었다.
[묵룡경······]
자천기는 뭔가 범상한 것이 아님을 느끼며 나직이 뇌까렸다.
그는 묵묵히 표지를 들추어 보았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패도적인 기운을 물씬 풍기는 글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일천 년을 멸시 속에 살아왔으면 족하지 않느냐? 이제 몸을 일으킬때다. 흑도천하(黑道天下)가 이 한 권의 무경(巫經)으로 이루어 지리라.
묵룡천신(墨龍天神).
자천기는 기이한 흥분을 느끼며 주얼거렸다.
[묵룡천신······ 그는 어떤 인물일까?]
묵룡천신(墨龍天神)-
그는 이백 년 전의 인물로 흑도(黑道)의 패도고수다. 흑도 사상 최당으로 손꼽히는 거물이다.
그는 흑도의 절기가 정도(正道)나 마도(魔道)의 무공에 결코 뒤지지 않음을 증명해 보였던 강자 중의 강자다.
자천기는 묵룡천신과 묵룡대종사를 연관시켜 보았다. 그들은 거의 흡사한 기질의 소유자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막 다음 장을 넘기려 할 때였다
[클클······ 묵룡천신을 모르다니······ 돌대가리도 어지간한 돌대가리가 아니로군.]
한 소리 걸쭉한 웃음소리가 자천기의 귓전을 울렸다.
[······]
자천기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실로 돈 주고도 못 볼 괴이한 광경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산로(山路) 옆에는 한 그루의 커다란 고목이 있었다. 그 고목의 가지 끝에 한 명의 늙은 거지가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거지의 몰골은 실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입고 있는 옷은 원래 백의(白衣)임이 분명했으나 그것이 백의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빨지 않았는지 덕지덕지 때가 묻어 누렇게 변한 데다가 여기저기 찢기고 헤어져 그나마 성한 구석이 없었다. 또한 그것을 성긴 바늘질로 듬성듬성 기워놓은 형색이라니······
머리는 봉두난발에다 까치둥지처럼 제멋대로 헝클어져 말이 아니었다.
그 뿐인가? 그의 얼굴은 또 얼마나 볼만한 것이랴!
주독이 올라 불그스레한 주먹코에다 볼품없이 두터운 입술과 두 눈은 가늘게 찢어졌는데 취한 듯 거슴츠레 했다.
또한 그는 허리춤에 번들번들 윤이 나는 벽색(碧色)의 죽장(竹杖)을 꽂고 있었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세상에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진풍경은 찾기 드물 것이다.
그를 일견한 순간 자천기의 안색이 변했다.
(음······)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가지 끝에 매달린 거지를 바라보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해괴한 형상의 늙은거지는 손가락보다 가는 나뭇가지에 두 발을 걸고 가볍게 매달려 있지 않은가?
나뭇가지는 손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쉽게 부러질 정도로 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휘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약간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자천기의 예리한 눈빛이 어찌 그것을 놓치겠는가?
그는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곧 그는 안색을 고치고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서는······]
노개(老丐)는 싯누런 이를 드러내며 걸쭉하게 웃었다.
[클클······개존(丐尊)이 본 어르신네다!]
[개존······]
자천기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개존이라 자칭한 노개는 돌연 벌컥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이런 발칙한 돌대가리가 있나! 개황(丐皇)의 사백(師伯)이 되며 개제(丐帝), 개왕(丐王), 개군(丐君), 개후(丐后)의 사백조(師伯祖) 되는 본 존을 모르다니······]
그는 숨도 쉬지않고 단번에 대여섯 개의 이름을 열거한 후 작은 눈을 부라렸다.
자천기는 도리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공! 존(尊)이라고 칭하기에는 노공의 몰골이 다소 지나치다고 생각지 않소?]
그것은 정곡(正鵠)을 찌른 일침(一針)이었다.
[무······ 무엇이라고?]
개존의 형편없는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벌름벌름한 그의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치솟았다.
파팍! 뚝!
그 바람에 그의 다리를 걸고 있던 나뭇가지가 우지끈 부러졌다.
[어쿠······ 거지죽는다!]
꽝!
개존의 머리가 그대로 옆의 바위를 후려쳤다. 그의 머리는 무참히 박살나 버리지 않았을까?
한데 보라! 놀랍게도 그의 머리는 바위를 뚫고 속으로 푹 파묻혀 버린 것이 아닌가?
당황한 쪽은 자천기였다.
[노인장!]
그는 황급히 외치며 개존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개존의 허리를 잡고 거꾸로 힘껏 잡아당겼다. 개존은 엄살을 부리며 짐짓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에구구······ 이놈아! 잘 당겨라. 허리 부러지겠다!]
쑥!
어렵지않게 개존의 머리가 바위 속에서 뽑혀졌다. 개존은 몸을 바로잡기가 무섭게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에익! 네놈의 돌대가리 때문에 머리카락만 빠졌다!]
그는 투덜투덜 거리며 벌집같이 뒤엉킨 머리를 매만졌다. 자천기는 어이없다는 듯 고소를 짓고 말았다.
[소생을 보고 돌대가리(石頭)라 하시면 노공의 머리는 철두(鐵頭)시구료. 바위가 남아나지 않으니······]
그말에 개존은 고개를 갸웃했다.
[철두······철두개존(鐵頭丐尊)······]
그는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 중얼거리더니 손을 이마에 갖다댔다. 그러다가 갑자기 펄쩍 뛸 듯이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으하하······ 좋아, 좋아, 철두개존······ 이 얼마나 고상한 이름이냐?]
그는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탁 치며 기뻐했다. 그 모습에 자천기는 피식 웃고 말았다.
(마치 어린아이 같군······)
그는 실소를 지으며 개존을 바라보았다.
개존(丐尊). 스스로 철두개존이라 개명(改名)한 그는 싯누런 이를 드러낸 채 자천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이어 제멋대로 엉킨 성진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철두개존! 이 아름다운 이름을 짓는데 네놈 돌대가리의 공이 컸다. 상으로 이걸 주마!]
그는 인심쓴다는 표정으로 소매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 속에서 하나의 작은 옥로(玉盧)를 꺼내 자천기의 손에 쥐어주었다.
[노인장, 소생은······]
자천기는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개존은 그가 더 이상 말을 하기도 전에 어깨를 툭 치더니 웃었다.
[클클······ 다시 보자······]
스---윽!
그의 신형은 한 차례 취한 듯 휘청거리더니 곧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
실로 육안으로 쫓지 못할 귀신 같은 신법이었다. 자천기는 이미 수중에 들려있는 작은 옥로를 내려다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천기는 멍한 표정으로 개존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건만 마치 바로 옆에서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는 듯한 개존의 음성이 들려왔다.
[클클······ 자령천로(紫靈天盧)라는 것이다. 큰 쓸모가 있을 것이니······ 잘 간수하도록 해라!]
자천기는 흠칫 놀랬다.
(자령천로······ 이것이······)
그는 경악의 눈으로 옥로를 내려다 보았다.
크기 네 치 정도의 자옥(紫玉)으로 만든 옥로안에는 자색(紫色)을 띤 액체가 찰랑찰랑 고여 있었다. 또한 표면에는 무지개 같은 칠색서기(七色瑞氣)가 신비롭게 감돌았다.
자천기는 가볍게 눈썹을 모았다.
[자령천로라면······ 일천 년 이전의 기보(奇寶)로써 만년자령옥정(萬年紫靈玉精)이 들어있다고 전하거늘······]
실로 그것은 범인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무림지보(武林之寶)였다.
[······]
자천기는 한동안 유심히 자령천로를 바라보았다. 자령천로 안에 들어있는 자색을 띤 액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엔 경이가 가득했다.
(자령천로도 자령천로지만 이 안에 담긴 것은 희세의 영액(靈液) 만년자령옥액이다.)
-만년자령옥정(萬年紫靈玉精).
이는 지심(地心) 일만 장 깊이에서 캐낸 만년지옥(萬年之玉)을 태산만큼 갈아야 겨우 한 홉을 얻는다는 절세기약이다. 그 효과는 실로 무궁무진하다.
인세(人世)에 존재하는 영약(靈藥) 중 최고다. 한 방울만 복용해도 만병이 씻은 듯 치유되며 단번에 백 년의 대공을 얻을 수 있다.
바로 세인들이 꿈에나 그리던 전설의 영약인 것이다.
특히 이를 복용하면 절로 자령신강(紫靈神罡)이 일어나 외력을 반진시켜 몸을 보호해 준다.
자천기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오늘은 실로 기이한 날이군. 생각지도 못한 기연(奇緣)이 줄을 잇다니······]
잇달은 기사(奇事)에 그는 어리둥절함을 금치 못할 뿐이었다.
사실 일생을 통틀어도 이같은 기연을 얻기 힘들 것이다. 범인 같으면 하늘을 날을 듯 기뻐 뛸 것이다. 그러나 자천기는 물욕(物慾)이나 세사(世事)의 형편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몇 번을 까무러치고도 남을 엄청난 기연을 얻고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것이다.
자천기는 한차례 고개를 흔든 후 자령천로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선하령의 정상을 향한 총총한 걸음이었다.
* * *
반각(半刻) 후. 자천기는 마침내 선하령의 정상에 올랐다.
시원한 산풍이 그의 반듯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었다.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은 가히 절경(絶景)이었다.
그린 듯 수려하고 운치있게 펼쳐진 높고 낮은 봉우리. 그것을 화폭(畵幅)처럼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수목(樹木). 절로 탄성이 터져나오는 풍경이었다.
그 광경을 담담히 굽어보고 있는 정상의 자천기는 그야말로 선경을 지배하는 선인(仙人)이 아니겠는가?
자천기는 시선을 돌려 서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다소 지났는데······]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중얼거렸다.
선하령의 서쪽엔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하나의 석봉(石峯)이 있다.
흡사 날카로운 장검(長劍)을 천공을 향해 꽂아 놓은 듯한 형상의 거봉(巨峯)이었다.
-천검봉(天劍峯)!
자천기는 뒷짐을 진 채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오지 않았다니······)
그는 망연한 시선으로 천검봉 정상을 주시했다. 천하제일사 자천기가 기다리는 인물은 누굴까?
이때였다.
스스스······
한줄기 산풍(山風)의 스침과 함께 더할 수 없이 그윽한 방향(芳香)이 자천기의 면전을 스쳤다. 자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어졌다.
(왔다!)
그는 영준한 얼굴에 흥분의 빛을 띠우며 내심 외쳤다.
스스스······
한 조각 구름인가? 향기로운 바람인가?
붉은 낙조(落潮)를 등지고 한 줄기 환영(幻影)이 천검봉 정상으로 둥실 떠올랐다.
멀리서 보기에도 몸집이 왜소했다. 신비로운 홍하(紅霞)를 가득 휘감고 환상처럼 나타난 왜영은 그림처럼 사뿐 천검봉 정상으로 내려섰다.
[······]
그 순간 자천기는 급격히 숨이 멎는 것을 느꼈다.
도취(陶醉). 그것은 죽음보다 강렬한 몰입(沒入)이었으며 완전한 도취였다.
아! 왜영은 바로 여인(女人)이었다.
여인이란 대부분 아름답다. 왜냐하면 여인 그 자체의 구조부터가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녁노을 속에 홀연히 나타난 천검봉 정상의 여인.
천하의 그 어떤 여인도 그녀만큼 아름답지는 못할 것이다. 너무도 아름다워 차라리 처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녀는 타는 듯한 붉은 홍의(紅衣)를 입고 있었다.
뭉클 가슴을 내려앉게 만드는 섬연한 아름다움이 물결처럼 노을 아래 부서진다.
천상선녀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리라.
여인의 주위로 번져 나오는 터질 듯한 아름다움은 저녁노을마저도 숨을 죽이게 만들었다.
[······]
문득 붉게 피어오르는 저녁노을을 사이에 두고 자천기와 여인의 시선이 서로 뒤엉켰다.
천검봉(天劍峰).
선하령(仙霞嶺).
두 산정(山頂)의 남녀는 흡사 석상이 된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서로를 영혼까지 깊숙이 빨아들일 듯 주시하는 눈빛.
자천기는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그대······)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나의 신분······ 나의 명예······ 그 모든 것을 미련없이 버리련만······)
그는 넋을 잃은 듯 천검봉의 미녀를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천기가 이름도 알 수 없는 천검봉의 미녀를 처음 본 것은 일 년 전의 일이었다. 선하령의 비금림으로 은둔한 그는 어느 날 저녁 산책을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무심코 오른 곳이 선하령이었다.
그때 마침 천검봉에 올라 노을을 바라보고 있던 예의 미녀를 발견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자천기는 어떤 급격한 전율(戰慄)같은 것을 느꼈다. 큰 운명(運命)이 그 날로부터 시작되는 듯한 느낌은 자천기의 전신을 사정 없이 사로잡아버리고 말았다.
그 후 일 년의 세월동안 자천기와 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선하령과 천검봉에 올라 서로를 보았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그들은 어김없이 약속이나 한 듯 같은 시각에 나타났다. 그리고 하염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었다.
말 한 마디 오고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덧 두 사람의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정(情)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이제 그들은 하루라도 서로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 또한 운명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자천기의 가슴은 노을보다 짙게 타고 있었다.
[홍하(紅霞)······]
그는 나직이 입 안으로 뇌까렸다.
-홍하(紅霞).
자천기가 저녁노을과 함께 나타나는 미녀에게 붙인 이름이었다.
서로 감정의 끈이 이어지고 있는 두 사람. 아마 노을 속의 미녀 또한 자신의 또 다른 이름 홍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때였다. 미녀 홍하는 허리춤에서 한 자루의 옥소(玉簫)를 꺼냈다. 자천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피리를 불 줄 알았던가?)
그는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홍하가 피리를 든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
빨아들일 듯 서로를 주시하는 두 남녀. 비록 먼 거리였으나 그들은 너무도 똑똑히 서로를 볼 수가 있었다.
홍하는 무엇인가 호소하는 눈빛으로 자천기를 응시했다.
이어 천천히 옥소를 붉디붉은 입술에 갖다 댔다.
삘······리······리!
처절하리 만큼 아름다운 소성(簫聲)이 노을 속에 울려 퍼졌다. 아득하고 먼 환상의 선율처럼······
[헉······]
갑자기 자천기는 신음을 발하며 몸을 휘청했다. 그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천상의 선음같이 소성이 너무도 아름다워서일까?
아니었다.
[다······ 단정가(斷情歌)······ 설마······ 그대는······]
자천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홍하를 주시했다.
밀납같이 창백해진 안색. 그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단정가(斷情歌).
그것은 남녀의 별리(別離)를 의미하는 곡이 아닌가?
삘릴······리······
홍하의 옥소에서는 처절한 소성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졌다. 애닲프고 애닲프다. 이별의 단정가······
주르르······
홍하의 조각 같은 뺨 위로 두 줄기 이슬이 흘러내렸다. 천하제일의 미녀 홍하는 울고 있었다.
[음······]
자천기는 무거운 신음을 발하며 힘없이 선하령 위로 주저앉았다. 주체할 수 없는 심중. 그는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다. 그러나 어찌하리요?
삘······릴······리······리······
님이 부르는 애절한 소성은 그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무수히 꽂히는 것을······
아! 아! 처절하고 애닲은 피리소리는 뚝뚝 눈물처럼 떨어지는 낙조를 휘감고 선하령 전체에 암연하게 울려 퍼졌다.
[흑······]
홍하는 옥소를 떨구며 희디흰 손으로 옥용을 가렸다.
자천기는 그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비수로 산 채의 심장을 도려낸다 한들 이보다 더 고통스러우리요?
[홍하······]
그는 몸부림치듯 고통스럽게 미녀를 불렀다. 꽉 메어 버린 듯한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비감케 했다.
홍하는 물기젖어 애처로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사슴처럼 크고 아름다운 그녀의 두 눈이 이슬로 반짝였다.
[······]
두 남녀의 만 가지 심정이 담긴 시선이 서로 어우러졌다. 영원히 그대로 있고 싶은 듯 그들은 미동도 없이 서로를 주시하기만 했다.
······
노을은 애절한 마음을 그려내듯 더욱 짙게 타올랐다.
선하령과 천검봉. 두 봉우리 사이에는 오열(嗚咽)보다 짙고 막막한 아픔이 가로놓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은 무심하기만 했다. 어느새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 일다경(一茶頃)이 흘렀다.
그것은 찢어지는 고통에 비해 너무도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이윽고 홍하는 사르르 교구를 일으켰다. 힘없이 주저앉았던 자천기도 끌리듯 따라 몸을 일으켰다.
[······]
홍하는 다시 애절하고도 슬픈 눈빛으로 자천기를 응시했다.
촉촉하게 물기젖은 그녀의 눈망울. 그 아련한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잊지 마세요······ 소녀를 잊지 마세요······
[······]
자천기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으로 전신이 무너져 내림을 느꼈다.
스스스······
못내 아쉽고 슬픈 눈빛으로 자천기를 응시하던 홍하는 둥실 교구를 떠올렸다.
[홍하!]
자천기는 숨막힐 듯 다급한 음성으로 크게 외쳤다.
스스스······
그러나 홍하는 한 조각 붉은 구름이 되어 그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한줄기 산풍을 타고 천검봉 저 너머로 아련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환상처럼······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 자천기의 귓가로 아득한 음성이 들려왔다. 촉촉하게 물기젖은 홍하의 음성이었다.
[기랑(奇郞)······ 인연이 다시 이어지기를······]
그 음성은 너무도 아름다워 오히려 처절하도록 서러운 음성이었다.
[홍하······]
자천기는 망연한 시선으로 천검봉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혼이 나간 듯 멍하니 굳어버린 자천기의 신비로운 두 눈에도 문득 물기가 비쳤다.
별리(別離).
지극히 큰 만남을 위한 별리는 두 남녀의 아름다운 영혼을 온통 찢어놓고 이렇게 끝이났다.
타는 듯 붉은 저녁 노을도 점차 어둠 속으로 사그라들고 있었다. 자천기가 환상처럼 사랑한 미녀 홍하처럼 그렇게 무심히 사라지고 있었다.
ㅈ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