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인상적인 영화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 '위플래쉬'다. 폭언과 학대 속에 좌절과 성취를 동시에 안겨주는 스승의 격한 교육방식은 득음(得音)을 갈망하는 제자의 집착을 끌어내며 최고의 드러머로 이끌어낸다.
전남 완도항에서 '퀸청산호'를 타고 청산도로 향하면서 뜬금없이 위플래쉬가 떠올랐다. 30년전 상영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때문이다. 청산도와 '영화 서편제'는 거의 동의어다. 청산도는 이 영화 때문에 새로 태어났다. 영화는 청산도에서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이청준의 단편 연작소설을 영화화한 서편제는 득음을 위해 자식의 눈까지 멀게 한 아버지의 소리에 대한 집념과 애환이 담겨있다. '위플래시'의 한국판이다. 득음의 경지에 올라서는 과정은 비정하고 비극적이다. 서편제에서 5분간 롱테이크로 찍은 유봉과 두 남매가 어느 시골길에서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춤추는 모습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그 시골길에는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청산도다. 서편제는 한국 영화사상 첫 100만 명을 돌파했다. 지금은 1,000만명을 동원하는 영화도 있지만 개봉관이 많지 않았던 1993년 당시에는 놀라운 기록이었다. 영화는 단박에 섬의 눈부신 풍광이 관객들의 뇌리에 꽂혔다. 그리고 섬의 운명을 바꾸었다. 스토리텔링의 힘을 보여준다.
서편제는 애절한 영화지만 풍광은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어울린다. 사람들의 심금을 올리는 한(恨)과 슬픈 정서가 담긴 소재가 섬의 매혹적인 풍경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었다.
완도에서 50분만에 도착한 청산도는 작다. 여의도 면적의 10배에 불과하다. 선착장은 답답할 만큼 협소하다. 그 작은 섬에 전국 각지에서 사람이 몰려 봄 성수기엔 미리 예매하지 않으면 여객선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그렇다고 하루 만에 청산도를 걸어서 돌아보기란 불가능 하다. 2010년 마라톤 풀코스와 똑같은 100리(42.195㎞)에 걸쳐 총 11코스가 열렸다. 2박3일은 걸어야 될 거리다.
청산도 슬로길은 섬 주민들이 다니던 길로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절로 발걸음이 느려진다하여 '슬로길'이라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노인이 대부분인 섬 사람들이 '슬로길'이라고 불렀다고 보기엔 작위적인 느낌이 난다. 하지만 길을 걸어보면 작명은 제대로 했다.
속도 경쟁에 과부하가 걸리는 현대인들에게 느림을 추구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누구든 한번쯤은 찾아가고 싶을 것이다. '느림은 행복이다'라는 이 섬의 슬로건은 도시인들의 마음을 정확히 포착했다.
청산도 가는 길은 멀다. 서울에서 자정에 출발한 버스를 타고 오전 5시 무렵 완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전 7시에 출발하는 여객선으로 1시간 바닷길을 달려 청산도에 도착했다. 허락된 청산도 체류시간은 7시간.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한 발자국이라도 더 걸어야겠고 배시간은 정해져 있어 마음이 급했다. 배 출발시간에 맞춰 걷기 위해 기존 코스는 무시했다.
대신 항구에서 출발해 무료 셔틀을 이용해 우물 삼거리로 이동해 범바위-장기미해변-매봉산-원통리까지 도보 이동을 하고 차량을 이용해 서편재 촬영지로 이동해 주변을 돌아보고 도청항에서 다시 배를 탔다. 대체로 완만해 걷기가 편했지만 매봉산 오르기는 다소 거친 숨을 내쉬어야 했다.
첫 방문지로 청산도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는 범바위 전망대를 찾았다. 먼 옛날, 신선에게서 십장생에 들어갈 동물들을 소집하라는 명을 받은 범이 자신이 그 명단에 없다는 사실에 삐쳐서 사슴을 죽였다. 그래서 신선의 노여움을 샀고, 그 범이 바위로 변한 곳이 바로 범바위다.
자연 상태에서 음이온이 가장 많이 방출된다는 이곳의 이름은 범(호랑이)+유(有)+다(多)라고 한다. 그 이름을 붙인 그 노력이 참 가상하다. 이곳 범바위 부근에는 자철석이 많아 자력 작용이 활발해 실제로 나침반들이 엉뚱한 곳을 가리킨다. 그야말로 ‘자기장을 뿜어내는 신비의 섬 청산도’인데 근육의 적절한 이완과 수축을 유도하고 뇌의 특정 회로를 제어해 행복한 마음이 들도록 만든단다.
범바위에서 장기미해변으로 내려선 후 청산도 명품2길을 통해 매봉산을 돌아 원통리까지 다소 지루하게 걸었다. 그리고 서편재 영화 촬영지의 유채밭단지로 이동을 했다. 우선 청산진성을 멀리서 눈으로만 바라보고 1코스로 들어섰다.
길을 내려가다 보니 회랑포 초입의 노란 유채꽃밭이 펼쳐진 언덕에 낮은 돌담이 양쪽으로 길게 진입로를 낸 낡은 오두막집이 바다를 향해 자리를 잡았다. 뒤편에는 초록 보리밭이 산뜻했다. 이런 절경에 어찌 이런 집이 있을까 싶어 가까이 가보니 드라마 '피노키오'세트장이었다.
그 집 마루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길을 나섰다. 바다를 바라보며 걷다보면 어느 쪽을 바라봐도 비경(秘境)이다. 다만 황톳길을 없애고 포장을 해놓은 것은 몹시 아쉽다. 차가 다닐 수 없는 길에 왜 포장을 해놓았을까 궁금했다.
배에서 내릴 때 포구(浦口)에 그렇게 많던 관광객들이 슬로길에선 거의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세트장 몇 곳에서 인증샷을 찍은 뒤 돌아가는 관광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먼 길을 달려 관광만 하기엔 너무 아쉬운 곳이 청산도다.
사람들이 몰려오면 가장 우려되는 것이 난개발이다. 완도군과 지역주민들에겐 과제다. 청산도는 과연 오래도록 '청정지역'으로 남아 도시인들에게 '삶의 쉼표'가 될 수 있을까.
[완도항 아침 풍경과 여객터미널 주변]
[완도에서 청산도 이동]
[우물 삼거리 정류장에서 범바위까지 걷기]
[범바위에서 장기미 해변까지 걷기]
[장기미 해변에서 매봉산을 지나 원통리까지 청산도 명품 2길 걷기]
[영화 서편제및 봄의 왈츠 촬영지의 유채단지]
[선착장인 도청항 가기 그리고 완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