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트레일
자연보존 위해 하루 200명만 입장… 4000m 高山을 꿈 꾸듯 걷다
남미 대륙 잉카 트레일(Trail) 시작 전날 밤의 일기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하루 200명으로 인원을 제한하는 마추픽추 트레킹. 1000년 전부터 잉카 문명의 전사들이 밟아 다진 역사의 길이다. 3박 4일을 길에서 먹고 자며 잉카의 유적을 따라가다 보면, 세계적 불가사의 마추픽추(Machu Picchu)가 마지막 날 등장한다. 전 세계 트레커들의 꿈이자 잃어버린 공중도시를 찾아가는 길. 가슴 벅찬 일정이지만 고산병(高山病)이 걱정이다. 특히 2일 차에는 하루 1100m의 고도 차를 극복해야 한다. 내 심장이 버텨낼 수 있을까. 5년 동안 내 발에 꼭 맞게 길든 낡은 운동화 한 켤레에 의지해 볼밖에."
- 잉카 트레킹 3일째 되는 저녁. 야영지였던 해발 3600m의 푸유파타 마르카는 전에 없던 풍광을 잠시 허락했다. 구름에 둘러싸인 안데스가 저 아래 있다.
- 푸유파타 마르카는 구름 위의 도시라는 뜻. 왼쪽 사진은 머리 위까지 오는 배낭을 메고 돌계단을 오르는 포터들.
마추픽추는 전 세계 여행자의 꿈이었지만, 이 비밀의 공중 도시에 접근하는 통로는 세속화된 지 오래였다. 가장 인접한 도시인 아과스칼리엔테스(AguasCalientes)까지 기차를 타고 들어간 뒤, 전용 셔틀버스를 타고 30분쯤 올라가는 방법이다. '잉카 트레일'은 이 현대의 통로를 거부한다. 자신의 발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잉카 시대로 돌아가, 그들이 건설한 하늘 도시의 유적을 만나며, 아찔한 높이와 경사의 안데스 산맥을 온몸으로 따라 걷는 것이다.
- 마추픽추 전경
- 잉카 트레일 고도 변화
죽기 전에 꼭 한번 해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로 꼽히지만, 모두가 이 소망을 실현할 수는 없다. 페루 정부가 이 길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 하루 입장객을 200명 이하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름 성수기 중 원하는 날짜에 이 길을 걷기 위해서는 6개월 이전에 신청하고 허락을 기다려야 한다. 또 개인적으로 갈 수도 없다. 히말라야 트레킹처럼, 정부 허가를 받은 현지 여행사에서 전문 가이드, 포터와 함께 팀을 꾸려 출발해야 한다. 현지 포터가 야영을 위한 텐트와 식사를 책임지고 여행자는 자신의 짐을 담은 배낭을 메고 출발하는 식이다. '잉카 트레일'이 국내 매체에 소개되는 일은 처음. 3박 4일 체험기를 싣는다.
▶잉카 트레일 C2~3면에 계속
공중 도시로 내딛는 걸음마다 비밀스러운 숨결이 느껴진다
잉카 트레일
Day 1. 성스러운 계곡에서…'천사의 트럼펫'을 따라
해발 2600m의 작은 마을 피사쿠초에서 걷기를 시작한다. 이 마을의 다른 지명은 KM 82.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에서 철도로 82㎞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낭만이라고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실용적 작명. 승용차와 기차로 갈 수 있는 도로는 여기가 마지막이다.
첫날 예정한 12㎞는 고산(高山)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당신을 배려하는 초보자 코스. 해발고도는 500m가 상승해 3100m까지 올라갔지만, 이미 이틀 동안 머물렀던 쿠스코 도시의 해발고도가 3300m였다. 온순한 페루의 알파카처럼, 심장은 아직 통제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편안하고 순탄한 길이다. 정복과 극복에 의미를 두는 남성 클라이머가 흔히 놓치는 대목이 있다. 잉카 트레일의 길이 얼마나 변화무쌍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빚어내는지. 사막으로 시작한 길은, 구름 속 숲(Cloud Forest)을 지나 마침내 아마존으로 들어가는 아열대 정글을 이끌어낸다. 북반구 아시아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꽃과 새를 안데스에서 만난다.
-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잉카 유적으로 꼽히는 사야크 마르 카. 왼쪽으로 난 돌계단 98개를 오르면 봉우리 정상에 있다. 해발 3600m. 산 끝에 놓인 형상을 빗대‘닭 볏’으로도 불린다. 태양의 신전과 주거지, 그리고 돌로 만든 수로를 갖췄다. 캐논 EOS M2 18-55㎜ 렌즈.
남미의 등뼈로 불리는 안데스는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산악이 아니다. 완만하고 아기자기하게 오르는 한반도의 산이 아니라 느닷없이 솟아오른 거대한 벽. 게다가 순간적 힘으로 바벨을 들어 올린 운동선수의 힘줄과 핏줄을 보는 듯하다. 팽창한 모세혈관 같은 안데스의 발기. 우리가 첫날 걸은 길의 이름은 성스러운 계곡(Sacred Valley)이었다.
Tip 1 첫날 12㎞ 이동. 이날 야영지는 와이야밤바(Wayllabamba). 해발 3100m. 송이 볶음밥과 고산병에 좋다는 코카 차로 저녁 식사. 저녁 5시 30분 일몰. 무난한 코스.
Day 2. 내 이름은 알레한드로, 아들 넷을 뒀습니다
텐트를 두들기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다. 마추픽추의 11월은 우기, 여름 겨울 뒤바뀐 남미의 장마다. 고산의 아침은 빨리 온다. 새벽 5시면 모든 것이 환한 세상. 다행히 비가 멈췄다. 이번 등반을 책임진 가이드 에드가는 팀 전원을 불러 모았다. 11명의 현지 포터와 요리사도 전원 참석. 에드가는 "우리는 나흘 동안 한 가족"이라며 "가족은 서로 인사를 나눠야 한다"고 군인처럼 말했다.
- 산꼭대기의 소금 염전, 마라스.
두 번째 사내가 나섰다. "내 이름은 윌프레드. 나이는 마흔이오. 이 일 한 지 10년 됐소. 같은 마을에서 왔소. 자식은 다섯 명을 낳았고, 농사를 짓소."
인사법은 한결같았다. 간결했고, 그래서 강력했다. 포터들은 과장 약간 보태서 거의 날아다녔다. 고무 대충 잘라 만들었다는 '깔까 슬리퍼'를 신고, 키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우리보다 훨씬 뒤에 출발해서, 늘 역전에 성공했다.
게다가 이날은 무려 1100m의 높이를 극복해야 하는 잉카 트레일 최대의 난코스. 정점인 해발 4200m 지점은 '죽은 여인의 통로'라는 악명을 지니고 있다. 산을 넘다가 여자가 죽었다는 뜻은 아니고, 돌아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고개를 돌렸던 잉카의 공주가 돌이 되고 길이 되어 안데스의 다리가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다.
- 산소탱크 메고 등반하는 텍사스 여인.
- 잉카의 배꼽으로 불리는 도시 쿠스코.
Tip 2 둘째 날 12㎞ 이동. 이날 야영지는 파카이마유(Paqaymayu). 해발 3500m. 최고 4200m까지 올랐다가 다시 하산. 일정 중 최대 난코스. 고산병까지는 아니었지만 심장이 적응하기까지 힘들었음. 로모 살타도(소고기 찹스테이크와 볶음밥)와 코카차로 식사.
Day 3. 별은 어떻게 둥근 원을그리며 회전하는가
11월의 안데스를 깨우는 두 가지 소리가 있다. 하나는 텐트를 때리는 빗소리, 또 하나는 벌새(Hummingbird)의 노래. 새벽 4시 20분쯤이면 어김없이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새인지 나비인지 모를 소박한 체구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또 하나의 생명이 있다. 잉카의 말로 와캉키. 학계의 공식 명칭은 마르데발리아 메치아나(Masdevailia Vechiana). 다섯 번 들어도 절대 외울 수 없을 것 같은 이 학명보다, 에드가가 불러주는 이름이 더 눈부시다. 'You will cry'. 실제로 와캉키의 꽃잎에는 두 방울의 눈물이 맺혀 있다. 늘 머금고 있다는 이슬이다.
- 마추픽추, 잉카 트레일 지도
잉카의 전령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귀족의 아들, 그것도 18~22세의 장자(長子) 중에서 힘과 지략이 뛰어났던 이만 가능했던 것.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잉카의 왕께서 생선이 먹고 싶다고 하면 차스키는 멀리 바닷가에서 릴레이로 실어 날랐다. 한 사람이 몇 킬로미터 구간을 전속력으로 주파한 뒤 바통을 넘기는 식이다. 가장 가까운 바닷가에서 수도 쿠스코까지는 약 600㎞. 그런데도 만 하루면 신선한 생선이 왕의 밥상에 올랐다고 한다.
- 눈물 두 방울의 의미를 지닌 꽃 와캉키.
- 페루의 물회격인 세비체.
Tip 3 셋째 날 10㎞ 이동. 이날 야영지는 퓨유파타 마르카(Phuyupata marca). 해발 3600m. 최고 3950m와 최고 3670m인 두 개의 고점을 통과해야 하는 난코스. 가장 잘 보존된 잉카 유적지로 꼽히는 사야크 마르카(Sayac marka)를 통과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쌓아올린 제단과 목욕탕, 전망대 등을 만날 수 있다. 알파카와 라마 무리도 조우가 가능하다. 자연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코스.
Day 4. 새벽 4시 기상., 폭우 속 마추픽추
- 마추픽추 유적
잉카의 신은 오직 30분만의 별을 허락했다. 나머지 시간을 지배한 것은 비. 첫날부터 심상찮았던 우기의 안데스는 밤새 비를 퍼부었다. 극강의 방수를 자랑하는 'Waterproof' 텐트였지만, 10시간 내내 쏟아진 비를 이겨낼 힘은 없었다. 새벽 4시, 잠시 가늘어진 비를 그나마 감사히 여기며 일어났다. 이마의 LED 램프에 의지해 쪼그리고 앉아 컵라면을 먹는다. 마지막 날을 위해 아껴둔 특식이다. 문득 새벽 인력시장의 풍경이 포개졌다.
- 해발 4000m에서 굽어본 안데스.
- 페루 고산지대에 사는 라마
4시 30분, 여명 전에 출발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넷째 날은 계속해서 내려가는 길. 잉카의 돌계단은 작은 시냇물로 변해 있었다. 판초 안으로 완벽하게 숨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이런 비에는 대책이 없다. 신발까지, 속옷까지 흠뻑 젖는다. 육체보다 걱정인 것은, 과연 마추픽추가 제 모습을 허락해줄지다. 세상은 구름의 바다. 핏줄 솟은 안데스도, 아마존의 정글도, 비와 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여섯 시간을 내리 걸어 인티 푼쿠에 도착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태양의 문. 현지에서는 '오 마이 갓(Oh my God)'이라 부르는 수직 50여개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느닷없이 나타난다. 그 문 앞에서 숨을 멈췄다. 문 뒤편으로는 구름의 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계인데, 문 앞쪽으로는 비밀의 공중 도시가 단속적(斷續的)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발 2400m의 수수께끼 하늘 도시. 구름은 잉카 최후의 요새를 품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맥과 다리가 함께 풀렸다. 케추아어 마추픽추를 우리말로 하면 오래된 봉우리. 기차와 버스로 이곳까지 올라왔다면, 지금 같은 마음이 과연 들 수 있을까. 몸은 천근만근 무거운데 마음은 믿을 수 없게도 봉우리 위로 솟구쳤다.
Tip 4 넷째 날 9㎞ 이동. 마추픽추는 해발 2400m. 1200m를 줄곧 내려가는 가파른 내리막이다. 잉카 트레일의 정수를 보여주는 돌계단 길. 하루 종일 지독하게 내렸던 비 때문에 이날은 마추픽추에 도착하자마자 아래 마을로 후퇴. 다음 날 다시 올랐다. 3박 4일 걸렸던 마추픽추를 셔틀버스 30분 만에 도착했다. 날씨는 전날 비, 이날은 쾌청. 하지만 마음은 반대였다. 작렬하는 안데스의 태양을 묵묵히 견디며 꼼꼼하게 마추픽추를 살폈다. 활자를 남기지 않은 잉카는 말이 없다. 정들었던 낡은 운동화를 신전에 바쳤다.
'잉카 트레킹'에서 배운 것
- 어수웅
- 문화부 차장
- E-mail : jan10@chosun.com
- 문화부 기자가 되고 싶어 1995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문..
- 어수웅 문화부 차장
'남미의 등뼈'로 불리는 판아메리카나 고속도로를 달리며 지붕 없는 집을 종종 목격했다. 말 그대로 천장 없는 방이었다. 아무리 건조한 날씨라지만 이래서야 사람이 사는 집이라 할 수 있을까. 놀라운 것은 최저 생계비로 살고 있다는 이들이 지붕 없는 남루한 방에서도 최신 LED TV와 하이엔드 오디오를 즐긴다는 사실이었다.
페루를 '황금 의자에 앉아 구걸하는 걸인(乞人)'으로 비유하는 표현이 있다. 금·은·구리가 풍성한 자연자원 대국 페루와 그 풍성함이 빚어낸 역설에 대한 비판이다. 3박4일을 함께 걸은 페루 청년 에드가는 이 비유를 불편해했다. 해안 지방에 일부 그런 현실이 있기는 하지만 산악 지형에 사는 페루 사람들은 근면하다는 반박이었다. 일곱 살 딸 하나를 둔 서른두 살의 근면한 가장은 관광객의 짐을 들어주는 포터에서 시작해 외국인 전문 가이드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젊은이다. 잉카 원주민 언어인 케추아어만 겨우 익힌 뒤 포터 인생이 대부분인 이 동네 현실에서 그는 5개국 언어를 구사했다. 케추아어와 스페인어는 물론 영어와 이탈리아어·포르투갈어도 자유자재였다. 물론 돈을 내고 정식 교육기관에서 배운 언어는 아니었다. 바텐더로 일하는 술집에 손님으로 찾아온 미국인에게 영어를 배우고 대신 스페인어를 가르쳐주는 식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 젊은 아빠는 일곱 살 딸에게는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다시 한국으로 고개를 돌린다. 최근 치과 의사인 친구의 한숨과 푸념을 들은 적이 있다.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젊은 직원들이 자신보다 더 자주 스마트폰을 교체하더라는 것이다. 월급도 몇 푼 안 되는데 최신 폰 출시 소식만 들으면 갈아 치운다고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한소리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이 월급으로는 어차피 아무리 모아봐야 집도 못 사고 차도 못 살 형편인데 그나마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스마트폰이라도 바꾸겠다는 대꾸였다.
페루와 한국을 동렬에 놓고 비유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사다리가 줄어든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 청년들의 좌절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남 탓, 구조 탓만 하면서 인생을 낭비할 수는 없지 않을까. 같은 땅에서도 누구는 천장 없는 방에서 하루살이 삶을, 다른 누구는 5개 국어를 마스터하며 지구 반대편에서 온 관광객을 감동시킨다. 좋아하면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며, 잘하게 되면 분명히 사회가 당신을 원한다. 에드가와 함께 걸으면서 몸으로 깨달은 교훈, 어쩔 수 없이 해답은 내 안에 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잉카, 외계인이 없다고 제발 날 설득해줘!
저는 지금 잉카 문명의 수도였던 해발 3399m의 공중 도시, 페루의 쿠스코(Cusco·사진)에 와 있습니다. 쿠스코는 잉카의 언어였던 케추아어로 '배꼽'이란 뜻이죠. 남아메리카 서쪽 등뼈인 안데스산맥 전역에 걸쳐 있던 잉카 문명의 핵심 도시입니다.
후세의 연구에 의하면 잉카문명에는 바퀴와 철이 없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따라옵니다. 이 지역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거대한 돌을 어떻게 가져왔으며, 비록 가져왔다 하더라도 철분 하나 없는 장비로 어찌 이 암석을 능수능란하게 다듬느냐는 겁니다. 비행기를 타고 봐야 그 형태가 뭔지를 알 수 있다는 거대한 나스카 라인도 마찬가지. "외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발 나를 설득해줘"라는 탄식이 나오는 이유일 겁니다.
그렇다면 외계인이 이룩한 문명이라고 손쉽게 자포자기해야 하는 걸까요. 아시다시피 잉카 문명에는 활자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기록은 존재하지 않고, 추정만 가능할 뿐이죠. 그러니 온갖 설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페루의 젊은 친구들은 외계인 가설을 단호히 부정하더군요. 쿠스코에서 태어나, 쿠스코에서 학교를 다니고, 쿠스코에서 일을 하고 있는 30대 청년 윌리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마다 신과 외계인이 한 일이라고 말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쉽겠냐고 말이죠. 비록 문자는 남기지 못했지만, 잉카에는 구전으로 지혜와 경험을 남기는 어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록이 없기 때문에 쉽지는 않지만, 그들의 지혜와 경륜을 바탕으로 현세의 인간들은 잉카의 신비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거죠. 아무리 어려운 난제라고 하더라도, 외계인보다는 인간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을 시점이면, 저는 귀국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겁니다. 다음번 지면에서는 페루에서의 도전을 자세히 신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얼마전 꽃보다 청춘이란 프로그램을 TV를 통해 봤지만 페루 잉카 꼭 한번 가보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