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 유치원 애들한테도 논술을 시켜야 하지 않겠어요? 동화책 읽히고, 느낀 점 쓰게 하고, 논리적인 형식을 좀 갖추어서 말이지….” 경북의 한 유치원 교사에게 어느 장학사가 던진 이야기라고 한다. 원주 상지대에서 열린 전교조 전국참실대회 국어분과 연수에서 이화여고 이형빈 선생님의 강의 중에 들었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심한 일렁임을 느꼈다. 어디선가 읽었던, 19세기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이런 싯귀가 떠오르기도 했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 천국을 온통 분노케 한다. /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혼자 마음속으로 물어보았다. 블레이크 같은 예언자도 아니면서 이 정도 이야기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것은 감정의 오버(?)가 아닌가.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한동안 논술 문제로 온 감각이 팽팽해져 있었다. 학교에서는 논술 보충수업을 하던 중이었고, 우리 학교에서만도 열 명이 훌쩍 넘는 선생님들이 이런저런 논술 연수를 받고 있는 중이었고, 원주 상지대 가기 전에 먼저 서울로 가서 선생하는 친구들을 만났는데 거기서도 또 화제가 논술이었고, 버스 타고 서울 거리를 다니다보니 곳곳에 독서 논술 학원 간판이고, 온 나라가 논술 천지가 돼버린 것 같아서 그것 때문에 화가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유치원 아이들, 그 병아리 같은 꼬맹이들한테도 논술이라는 이름으로 ‘들이대려’ 한다니….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나 싶어서, 속이 울렁거렸던 것 이다.
나는 ‘열 살 미만의 아이들에게 문자를 가르치는 것은 독을 주는 것과 같다’는 독일 발도르프 학교의 원칙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육 관료는 대여섯살 아이들에게도 ‘논술’을 가르칠 생각을 한다. 언젠가 이 바람도 잦아들 것이다. 그러나, 지금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논술 파시즘’이다. 영화 <괴물>에서 괴물이 인간들을 습격할 당시에 무슨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옮겨졌다고 뉴스에서 떠드니깐 순식간에 온 나라가 마스크 천국이 되듯이, “이제 대입은 논술이 관건이란다”하니 온 세상 어른들이 아이들을 논술로 중무장 시키려 한다. 남들 다 하는 것 따라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는 이 땅 사람들, 그 ‘바람’을 타고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유치원 애들한테까지 논술을 시켜야 한다고 지껄이는 교육 관료가 있고….
내가 믿고 기대는 매체들, 이를테면 <한겨레>도 <한겨레21>도 <프레시안>도 논술을 내건다. 좋은 어린이 잡지가 하나 생겨서, 읽을 때마다 흐뭇했던 <고래가 그랬어>도 어느 순간부터 ‘논술’이라는 이름을 걸기 시작했다. 왜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쳐야 하는지 이들 중 아무도 이 사회를 향해 묻지 않았고, 그들 스스로도 물은 바 없다. 네 명 중에 한 명이 1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다는 나라에서, 그나마 읽는 책이라는 게 “성공처세술”이나 “재테크하는 법” 따위고, <마시멜로 이야기>같은 형편없는 물건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나라에서 말이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얼마나 커다란 재앙이 닥치는지 민중운동 진영이 온 힘을 다해 알리고 다녀도 국민 대다수는 아직도 뭐가 뭔지 태무심이고, 좀처럼 사회적 공론은 형성되지 않는 이런 나라에서 독서/논술 바람은 왜 이리 거센지 모르겠다.
2.
몇 년만에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하는 연수에 참여하게 되었다. 국어교사모임이 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회원 자리를 내놓았던 나로선 좀 객쩍은 노릇이었지만, 이 연수에 참여하게 된 것도 무엇보다 ‘논술’ 때문이었다. 국어 선생님들은 이 광풍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이 광풍 속에서 우리 할 일이 무엇인지, 이제는 힘을 모아 뭔가 행동할 때가 아닐까 하는 고민을 나누고 싶었다. 사실, 나는 지난 4~5년간 학교에서 논술을 가르치면서 조금은 속편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 사이 얻은 노하우와 몇 가지 원칙에 따라 남들이야 뭐라든 내 방식대로 아이들을 가르치면 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논술이 급류를 탔다. 2008년 대입부터 논술 비중이 커질 거라는 언론보도가 쏟아져 나온 이후일 것이다. 이제는 정신 차리기 어려울 정도가 돼버려서 도저히 혼자서 독야청청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무엇보다 논술 광풍으로 우리들이 그동안 힘겹게 일구어 온 소중한 것들이 크게 훼손당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해보였다.
<함께 여는 국어 교육> 73호에서도 일곱 분의 국어 선생님들의 글을 모아 논술 특집을 꾸몄다. 대부분 입시 논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이 속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마음들을 엿볼 수 있었다. 지금은 입시 논술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조금 더 발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자명하다고 믿어져온 전제들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아이들이 좋은 책을 많이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좋은 글을 쓰게 하는 것은 과연 ‘좋은’ 일일까?” 하는 질문 말이다.
3.
우리 사회는 ‘텍스트의 독재’가 관철되고 있다. 유치원 때부터 동화책이나 학습지로 시작해서,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정말 수도 없는 시험 문제와 필독서, 참고 도서를 ‘강제’로 ‘반강제’로 섭렵해야 한다. 컴퓨터 게임이나 텔레비전에는 가혹하지만 문자 텍스트들엔 또한 너무나 너그럽다. 뭔가를 읽고 쓰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라 생각하니깐.
사실, 나 또한 다른 국어교사들처럼 꽤 오랜 시간동안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고 글을 쓰게 하는 것을 제일의 가치로 여겨 왔다. 그래서 지필고사나 수행평가 틀 속에 책읽기와 글쓰기를 촘촘히 집어넣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전처럼 책읽기와 글쓰기를 강조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들이 좋은 책을 많이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믿음이 없다. 책읽기와 글쓰기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선생님들이 보는 매체에 이런 소리를 해서 죄스럽지만, 솔직한 내 심정이 이렇다. 물론 나는 ‘책읽기와 글쓰기가 좋은 것’이라는 원론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직, 책읽기와 글쓰기가 소통되는 ‘한국적 맥락’에 대한 가없는 절망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을 빌릴 것도 없이, 맥락은 본질에 선행한다. 다른 의미로 맥락이 곧 본질이다.
책읽기와 글쓰기는 자신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삶의 의미로 귀속되는 근원적으로 ‘사적’(私的)인 행위다. 진정한 교육은 그 개인적인 일이 진정으로 개인적인 의미로 귀속되도록, 다른 의미에서 타락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어야 한다.
나는 독후감이나, 수행평가 서술형 답안지나, 혹은 백일장 심사를 위해 응모된 작품들을 읽는 것이 갈수록 고통스럽다. 대체 이런 글들이 아이들의 삶에서 무슨 의미를 가질까, 하는 상념으로 마음이 어지럽다. 아이들은 이런 류의 책읽기와 글쓰기에 필요한 규범을 이미 체득하고 있다. 멸시와 모멸 속에 살아가는 혼혈인들이 자신들끼리 모였을 때 알아들을 수 없는 난삽한 영어로 대화하면서 tm트레스를 푸는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도 ‘그럴듯한 객관의 언어’로 채색된 책읽기와 글쓰기를 강요하는 어른들을 비웃듯 자신들만의 내밀한 공간에서는 전혀 생뚱맞고 낯선 질(質)의 언어로 소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걱정된다. 이렇게 책읽기와 글쓰기가 온통 ‘공적인 의미’를 가지는 교육과정을 12년이나 따라다닌 아이들의 내면은 어떻게 빚어질까. 이제 논술이 중심에 서서 책읽기와 글쓰기 교육을 이끌어 가게 된다면 그야말로 가관일 것이다. 맨날 ‘첫째, 둘째, 셋째’ 하는 식으로 늘어놓는 습관에서부터 스스로 절실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주렁주렁 널어놓는 것을 당연한 ‘공적 행위’로 여길 것이다. 내밀한 자기 성찰, 극히 개인적인 사색의 공간은 위축될 것이다. 교환가능하지 않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가치들, 이를 테면 ‘가난, 진리, 희생, 우정’과 같은 가치를 위해 제 몸과 마음을 쓰는 일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참여’보다는 ‘관조’가 몸에 밴 ‘세상의 평론가’로 빚어질 것이다. 독서 논술 교육의 창의성이니 변별력이니 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바로 이런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4.
어느 순간부터 ‘양심적이고 역량 있는’ 국어교사들이 ‘삶을 위한 국어교육’을 놓고 ‘말과 글을 위한 국어교육’으로 슬그머니 돌아앉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그리하여 우리가 ‘좋은 책 많이 읽힙시다, 좋은 글 쓰게 합시다, 잘 말하게 합시다’며 내달림으로써 이 땅의 ‘텍스트의 독재’를 부추기진 않았는지, 그래서 ‘논술’이라는 괴물이 출현하는 여건을 조성한 책임은 없는지, 스스로 물어볼 때라고 본다.
지금 이 세상은 ‘말과 글’이 ‘실체’에 선행한다. 이것은 또한 이 세상을 이끄는 지배적인 힘의 논리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이 ‘말과 글’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나 세계의 ‘실체’ 그 자체와 대면하게 된다면 그들의 지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말과 글’로써, 자본과 경쟁력, 세계화 따위의 ‘허상’으로써 이 세계를 지배한다. 독서 논술 광풍도 이 ‘허상의 지배’를 관철시키는 한 방식이 될 것이다.
교육은 결국 ‘삶’이라는 대전제를 위해 봉사한다. 글월 ‘文’자가 원래 ‘무늬’에 그 어원을 두고 있듯, ‘말과 글’은 삶의 실체가 아니라 삶의 무늬일 뿐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삶에서 말과 글의 자리는 물론 조금씩 성장함에 따라 커져가겠지만, 근원적으로 미미한 자리이다. “말과 글을 위한 국어교육”이 아니라, “삶을 위한 국어교육”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를테면, 이런 글은 어떤가.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퍼덕퍼덕 움직이는 세계가 있으니 죽어있는 글자 따위는 눈에 담지 않는다. 책이 그들의 삶에 파고들 여지는 전혀 없으며 그런 까닭에 ‘내 인생을 바꾼 한권의 책’과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강유원《책과 세계》(살림, 2004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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