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조선을 잠식해 들어오던 일제의 이등박문이 결국 조선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 당시 우리 나라 군인들은 의병을 일으켜 지하로 숨거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머리를 땋거나 상투를 틀었던 당시의 풍습과 달리 서양의 영향을 받아 단발을 한 기독교인들이 일본인들의 스파이로 오해를 받아 곤욕을 치르던 때였습니다. 의병들은 기독교인들과 일본의 스파이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일본의 스파이들도 할 수 있는 것이어서 나중에는 찬송가를 불러 보게 했습니다. 찬송가를 잘 부르면 "기독교인이셨군요!"하며 악수를 청했다고 합니다.
이 찬송가가 불신자들에게도 어찌나 큰 감화를 주었던지 어떤 불교 신자는 찬송가에 매료되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찬송이 없다면 날개 없는 새와 같아서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없을 것입니다. 경건주의파인 모라비안교도의 신앙 본거지 헤른 후트에트에는 악보모양의 공동묘지가 만들어 졌습니다. 육신의 죽음 후에도 하나님께 찬양을 올린다는 뜻일겁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감사할 때나 불평이 나올 때, 그리고 기도마저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 찬양을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내 영혼이 소생되는 체험을 하실 것입니다.
찬송을 통하여 일어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밤중에 찬송을 부를 때에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매인데서 풀려났습니다.(행16:25-26)
찬송가 455장 "주안에 있는 나에게..."는 많은 시련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 찬송가는 에드먼즈 히윗여사가 작사한 것으로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불량 소년들을 도와주고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하루는 그녀가 한 소년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화시키려는데 오히려 소년이 던진 돌에 척추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투병 생활 중 소년을 원망하면서 그녀의 신앙생활은 날로 약해지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병실을 청소하는 한 흑인여인이 콧노래를 부르면서 기뻐하는 것을 보고 "나는 지금 힘들고 괴로운데 당신은 무엇이 좋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지?"라면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흑인여인은 오히려 자신은 괴롭거나 슬플 때 찬송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히윗여사는 그의 말을 듣고 큰 감동을 받은 뒤 회개하였고 그녀에겐 다시 기쁨과 애통의 찬송이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작사된 곡이 바로 찬송가 455장인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우리는 지금 인간적인 근심 걱정을 어디에 두고 괴로워하십니까?
오래 전 영등포시장에 대화재가 났을 때의 일입니다. 마침 그때 신현균 목사님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이라 차를 좀 보내라고 공항에서 집으로 전화를 하니 아내가 영등포 시장의 대 화재 소식을 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얼마전 철도청에 근무하던 남편을 여의고 어린 3남매를 기르며 그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여집사님 생각이 나서 달려가보니 불길이 여집사님의 집쪽으로 맹렬히 옮겨 붙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처참한 광경을 눈앞에 두고 그 여집사님은 고요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미8군의 소방차가 동원되고 장성들도 나왔는데 미군장성 한 명이 "저 여인은 무엇을 하고 있소?"라고 묻자 옆에 있던 신현균 목사가 그 여인은 크리스천인데 자기 집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도 찬송을 부르고 있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감복한 미군장성은 "저 여인의 집을 내가 지어주겠소"라고 하고는 몇만 불을 희사할 뜻을 밝히고 약속대로 신설동에 더 크고 우람한 빌딩을 지어주었습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찬송하는 신앙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반드시 놀라운 역사를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능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찬송하여야 하겠습니다. 찬양은 모든 헌신 가운데 최고이며 믿음의 진정한 증거입니다.(시33:1-3, 시103:1, 시146:2, 시150:1-6)
그러면 찬송을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노래이므로 경건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합니다.(시108:1-3) 하나님 앞에서 찬송을 잘 드리는 것은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시69:30-31) 찬송은 구원받은 우리의 감사, 주의 용서를 받은 감격,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신 그 은혜에 대한 고마움이 성의껏 표시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할 때는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 높여 불러야 합니다. (시145:3) 찬송을 하는 태도가 형식적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찬송을 할 때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몸전체가 조화되어 부르는 정열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그리스도인이 찬송할 수 없는 어려움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찬송드리면 병든 자를 치료하는 역사가 임할 것이요(삼상16:23) 매인 자는 풀어지는 역사가 있을 것이며(행16:25-34) 모든 일에 승리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은 크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시67:3)
어느 장로님은 부부싸움을 한 다음에 부르는 찬송가가 있다고 합니다. 싸움을 하고 화가난 장로님이 밖으로 나가면 사모님은 간절한 목소리로 '어서 돌아오오'를 부릅니다. 그러면 밖에 있는 동안 화가 풀린 남편이 '멀리 멀리 갔더니'를 부르며 문을 두드립니다. 사모님은 곧 '처량하고 곤하여'라고 하면서 문을 열어준다고 합니다. 유머가 있는 이야기이지만 한 가지 배울 점은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 상황에 맞게 찬양을 한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예배와 구역예배 등의 모임을 제외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찬양을 부르는데 드리고 있습니까?
전통적으로 히브리 사람들은 "생명을 주신 창조주께 찬양과 경배와 감사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것이다."라고 여겨 왔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 찬양을 해야 할까요? 찬양의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사43:21, 욥36:24)
세상의 모든 것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꽃은 미와 향기로, 새는 노래로, 풀은 풀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데 그러나 찬양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돼지는 기껏 소리 질러봤자 배고픔이나 화난 소리가 고작이고, 뱀은 기껏 소리를 낸다고 해야 음산하고 소름끼치는 소리만 냄니다. 이밖에 독수리가 노래 부른다는 소리를 들은적이 있습니까? 타조나 칠면조의 노래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큰 새들은 노래하지 않습니다. 큰 동물은 노래하지 않습니다. 카나리아나 종달새, 굴뚝새와 같은 작은 새들이 아름답게 노래를 부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예나 지위로 너무 덩치가 크고, 재물과 학식으로 비대해져 있는 사람은 제 소리를 내기 좋아하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내기 좋아하지 않습니다. 겸손하고 진실된 사람에게서 온유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발견할 수 있고, 찬송이 있습니다.
둘째, 찬양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시66:2, 대하29:28, 엡1:6, 엡1:14, 엡5:19-2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것이라"(시69:30-31)
셋째, 찬송은 모든 창조물과 성도들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시22:26)
성경에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시150:6)등의 '찬양하라'는 단어가 250번 이상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문에 들어서자 사도 바울이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나와 그를 반갑게 맞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는 열심히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위시하여, 한 작은 교회를 2,000명이 넘는 대교회로 성장시켰다는 등의 자기 P.R을 늘어놓았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이 "네, 네, 목사님 잘 압니다. 여기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목사님을 위한 공부는 많이 하셨지만 하나님을 위한 공부는 하시지 않았군요."라고 하였습니다. 목사가 깜짝 놀라 고개를 가우뚱하자, "목사님이 하신 신학공부는 저 세상에서나 필요한 것이지 천국에서는 전혀 필요없습니다. 보십시요. 천국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 말을 들은 목사가 둘러보니 천군천사들이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목사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자 목사님 다시 세상으로 내려 가셔서 이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부를 하고 오십시요"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이 너무 아름다워 내려 오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다 꿈을 깼습니다. 그후 얼마나 열심히 찬송을 불렀는지 교회가 뜨겁게 부흥하더라는 것입니다.
넷째, 찬송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이며,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이 때문입니다.(히13:15, 시33:1-3)
찬양은 곡조있는 기도이며, 영혼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입술은 찬양을 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술은 찬양을 하는데 쓰여져야 하며,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거역하고 입술을 불의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우리의 육신과 영혼은 어두움과 탄식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찬양은 모든 헌신가운데 최고이며 믿음의 진정한 증거입니다.
다섯째, 찬송은 성도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 그리고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출15:2, 시42:5, 시95:2, 시147:1)
여섯째, 찬송을 부르면 기적이 일어나고, 귀신이 떠나가기 때문입니다.
찬송을 통하여 일어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밤중에 찬송을 부를 때에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매인데서 풀려났습니다.(행16:25-26) 그리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악신이 떠나갔습니다.(삼상16:23)
일곱째, 찬송을 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시28:7, 사51:3, 단2:20-23, 롬15:11-13)
찬송은 하나님의 뜻을 깨우쳐 주고, 삶의 힘을 줍니다. 그래서 찬양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표정이 밝으며, 어려운 일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자극을 주어 마침내 믿지 않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찬양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밖에도 수없이 많은 축복들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찬양하십시오. 찬양은 여러분의 삶을 활기차게 해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찬미하십시오. 주님은 매 순간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146:2)
찬양은 감정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소리 높여 강조했다. “여러분은 주님을 찬양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감정에 상관없이 언제나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하고 싶은 감정이 생기지 않을 때도 많을 것입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찬양은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이 우리가 하는 선택입니다.”
그의 말은 정말 옳았다.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기다리지 말라.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멈추어 주님을 찬양하라! 갈등 중에도, 일이 순조롭지 못할 때에도 주님을 찬양하라! 찬양은 당신의 영혼이 기쁨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성경은 바벨론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스 3장). 예루살렘의 폐허 속에서, 성전의 기초만을 다시 건설해 놓고, 그들의 고향을 아직도 적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백성은 입을 모아 말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스 3:11).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상황이 완벽하지 못할 때,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찬양할 수 있다면 정말 훌륭한 일이다. “이것은 내가 바라던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나에게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옮긴글>
[출처] 찬송 관련 예화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