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동지>(24회) 2016년 -241- |
열두 번째 시간여행 2016년 1월 19일, 며칠째 한낮 기온마저 영하에 머무는 추위가 이어졌다. 날은 맑아서 옥상 쉼터의 처마에는 길게 자란 고드름이 석양빛에 반짝거렸고 고드름 사이로 보이는 경복궁과 인왕산도 함께 영롱한 빛을 뿜어냈다. 동지는 옥상 쉼터에 앉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했다. 두 분은 어제 오후에 상경하여 인사동에서 한 시간쯤 머문 뒤에 동지와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서 희경과 만나 얘기를 나누다가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들이 매년 한두 번 아들을 보러 상경할 때마다 굳어진 순서였다. 이번은 저녁에 진국만 먼저 음성으로 내려가고 인경은 희경의 집에서 미여스님과 셋이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동지를 포함하여 아무도 상상조차 못 하는 일이지만, 진국과 인경이 상경하는 날이면 희경 못지않게 들떠서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 -242- |
더 있었다. 바로 재희였다. 진국과 인경은 재희가 어렸을 때부터 가장 애틋한 사랑을 주었던 사람들로서,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 중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반추하게 되는 추억의 중심에 두 사람이 존재했다. 재희는 점심시간이 지나고부터 내내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기다리다가 두 사람이 병실에 들어오자 번갈아 끌어안으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진국과 인경은 누워있는 재희의 손을 쓰다듬으며 안타까운 기색을 보였지만 과거에 비해서는 잔잔한 마음을 유지했다. 팔 년째 봐온 모습이며 또한 회복이 어렵다는 걸 은연중에 인정하기 때문일 터였다. 세 사람은 간간이 지난 얘기들을 나누면서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는 안정되고 편안한 대화를 이어갔다. 재희만 들떠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수다를 떨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편안한 얼굴일까? 참 이상도 하지. 재희야, 이렇게 누워있지만 말고 어서 벌떡 일어나야지.” 인경이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죄송해요, 아주머니!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참 예쁘고 똑똑하고, 사랑스런 아이였지.” 진국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알아요. 아저씨께서 절 참 많이 예뻐해 주셨죠. 제 손을 잡고 농장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기를 좋아하셨어요. 아저씨는 제게 농사 -243- |
의 숭고한 정신에 대해서나 자연의 신비한 힘에 대해 얘기해주고 싶어 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자꾸만 동지 오빠에 대해서만 물었었죠. 제 마음은 온통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요. 아저씨, 기억하세요? 언젠가 아저씨가 비닐하우스의 도르래를 수리하시던 날, 동지 오빠가 어떻게 그 신기한 무술을 배우게 되었는지 제가 물었었죠. 그때 아저씨와 나눴던 얘기를 전 다 기억해요.) 재희는 혼자 말을 이어갔다. (아저씨는 그러셨어요. ‘동지에게는 어린아이 적부터 스승님이 한 분 계셨단다. 농장을 관리하며 무극권이란 무예를 수련하시던 분이셨지. 동지가 갓 태어났을 때부터 곁에 계셨는데 그분께서 동지에게 그것을 가르쳤단다.’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목련당 뒤 소나무 사이에서 오빠가 펼치던 환상적인 동작들과 함께 여러 가지 놀라운 오빠의 모습들이 저의 눈까풀 안에서 오버랩되어 나비처럼 날아다녔어요. 뽕나무 사이를 다람쥐처럼 건너뛰거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솔방울을 손으로 툭툭 쳐내는 장면들이죠. 저는 또 물었어요. ‘동지 오빠의 아빠는 왜 안 계세요? 돌아가셨어요?’라고. ‘동지의 아빠는 이곳에 안 계신단다. 아주 오래전에 멀리 떠나셨지. 아마도 이젠 이 세상 분이 아닌 것 같아.’라고 대답하시며 아저씨는 이내 목소리가 촉촉해지셨어요. ‘그럼, 아저씨는 어떤 분이세요?’ 저의 궁금증은 멈출 줄 몰랐었죠. -244- |
‘나? 음···· 나는 동지의 스승님께서 크게 다치신 뒤에 농장을 돌보기 위해 이곳에 왔지. 그리고 난 이 세상에서 동지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란다. 허허허’ 그때 목을 젖히고 웃으시던 아저씨는 금방 또 행복해 보였구요. 웃음을 멈춘 뒤에 아저씨는, ‘재희도 동지 오빠를 무척 좋아하는구나, 그렇지?’하고 속삭이듯 제게 물었었죠. 저는 잠시 밭고랑을 내려다보다가 한 음절로 ‘네’라고만 대답했어요. 그때 갑자기 눈물이 났었거든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 걸 보이지 않으려고 저는 고개를 깊이 숙였지만, 아저씨는 눈치채셨나 봐요. 제가 ‘네’라고 대답하고 고개를 못 들 때 아저씨는 침묵하시며 저에게 시간을 주셨어요. 아저씨는 저 어린아이가 흘리는 눈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궁금하셨겠죠. 그 후 제가 나이 들고 나서 생각했어요. 그날 아저씨가 보시기에, 어린 제가 보인 눈물은, 얼음이 다 풀리지 않은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것만큼이나 잔인한 모습이었을 거예요.) “선생님은 농사지으시기가 힘들지 않으세요, 어느덧 일흔을 넘기셨는데?” 희경이 진국에게 말을 건넸다. “점점 힘들어하세요. 그래서 올해부터는 하우스 동 두 개만 하라고 했어요. 어쩔지 모르지만.” 인경이 대신 대답하며 진국을 쳐다보았다. “여름작물은 더워서 나도 자신 없지만, 그래도 가을배추와 무는 해야지. 김장도 해야 하고.” -245- |
“배추만 조금 심으세요. 벌써 오래전 추억이 되었지만, 전에 우리 모녀가 다닐 때 겨울에 저장 배추로 전 부쳐 먹으면 참 맛있었어요.” 희경이 옛 추억을 소환하고는 밝게 웃었다. “배추전은 동지와 재희도 참 잘 먹었어요. 둘이 앉아서 얼마나 맛나게 먹던지, 먹는 걸 보기만 해도 행복했어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죠.” 인경이 과거의 한 장면을 그려보듯 아련한 눈빛으로 희경을 쳐다보았다. (네, 맞아요. 아주머니가 해주셨던 배추전은 최고였어요. 커피색 개량 한복을 입으시고 전을 부치시던 아주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저는 맛있는 배추전을 매일 먹을 수 있는 오빠가 부러웠어요. 그리고 지금 얘기지만 아주머니와 동지 오빠는 아빠가 안 계셔도 너무나 행복해 보였어요. 아빠 대신 곁에 든든한 진국 아저씨가 계셔서일까요? 진국 아저씨는 나중에 진짜로 아빠가 되시긴 했지만요. 저는 여덟 살 때부터 아빠가 없었거든요. 전 한 때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오해한 적이 있었어요. 생사를 모르는 친구의 부인과 또는 생사를 모르는 남편의 친구와 결혼한 사람으로요. 하지만 엄마의 설명을 듣고 오해가 풀렸어요.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멋진 로맨스를 성공한 분들이에요. 엄마는 아주머니가 동지 오빠의 친엄마가 아니란 사실을 마지못해 얘기했지만, 전 그 사실을 듣고 후회했어요. 차라리 엄마에게 캐묻지 말 것을, 그 사실을 모르는 편이 좋았을 걸, 하고 말이죠. 하지만 이젠 상관없잖아요. -246- |
어쨌거나 저만 알게 되었으니까요. 제가 말하는 건 아무도 듣지 못하니까요.) 인경과 진국은 목련이 지기 시작하던 봄날에 조락헌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동지가 고등학교 일 학년이 되던 해였다. 주례는 농장의 실제 소유주인 박경석 할아버지가 맡았고, 하객은 열 명 남짓 되었다. 박경석 할아버지의 여동생 영숙이 프랑스에서 왔고, 희경이 재희를 데리고 참석했다. 그 밖에도 인경과 진국의 친구들이 서너 명씩 더 있었다. 프랑스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영숙을 빼고는 매년 한 번쯤 조락헌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아저씨라 부르던 진국이 새아버지가 되었을 때 동지는 거부감을 보이기보다 오히려 어머니를 보호해 줄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다. 동지는 그 일을 본래 운명 지어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 인경과 진국은 매우 솔직하고 정중하게 그들의 결혼에 대해 동지와 의논했다. 말은 어머니가 꺼냈다. “동지야, 돌려서 말하지 않을게. 아저씨와 엄마는 부부가 되기를 원한단다. 물론 네가 찬성해야겠지만. 그래서 네 생각을 들어보고 싶구나.” “저도 두 분이 그러시기를 바랐어요. 지금까지도 우린 한 가족이었잖아요.” 동지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동지의 대답을 들은 진국은 말없이 동지의 어깨를 끌어안고 등을 -247- |
토닥이기만 했다. 하지만 진국을 아버지라고 부른 건 동지가 대학에 입학한 뒤였다. 대학 입학식을 한 날 세 식구가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진국은 처음으로 동지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었다. 동지도 얼른 술병을 받아 진국과 어머니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세 사람이 술잔을 마주 댄 후 동지는 ‘이제 앞으로는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창문 밖 어둠을 향해 고개를 돌린 진국의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동지의 말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진국을 바라보던 어머니도 눈물을 찍어냈다. 그때 진국과 어머니의 감격해하던 모습은 동지에게 잊히지 않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열두 번째 시간여행) 희경의 집에서 하룻밤은 보낸 어머니는 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며 전화를 주었다. 진국이 옥상 쉼터에서 길게 자란 고드름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어머니는 음성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뒤 다시 잘 도착했다며 전화를 주었다. -248- |
동지는 옥상 쉼터에서 내려와 좌구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이내 깊은 명상의 세계로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작은 개울을 훌쩍 뛰어넘으면 새로운 경계가 펼쳐진다. 세상의 소리란 소리는 모두 아득히 멀어지고 숨소리까지도 사라진다. 육신마저 움직임의 잔상처럼 공적한 어느 곳에 고요히 떠 있다가 사라지고 나면 하늘과 땅마저 천정과 단전을 관통하여 하나가 되고 마침내 불이 일물로 통하는 문이 열린다. 그날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동지는 팔 년 전의 동지와 재희의 시공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있다. 동지는 자신과 재희가 마지막인 줄도 모른 채 마지막이 된 시점, 서로 시선조차 나누지 못한 채 작별하고 말았던 그 순간을 안타까이 지켜보았다. 재희가 문을 열고 나가는 걸 지켜보던 동지는 그녀를 뒤따라 나가는 대신 고개를 돌려 팔 년 전의 그를 쏘아봤다. 동지는 입술을 사려 물며 다짐한다. 이번엔 꼭 성공해야 한다. 너를 반드시 세종문화회관 앞으로 끌고 가 재희와 만나게 만들어야 한다. 너를 재희 곁에 데려다 놓기만 하면 나는 돌아와도 된다. 넌 실수 없이 재희를 지켜낼 테니까. 동지는 그의 등 뒤로 돌아가 두 팔을 벌려 그의 몸을 꼭 껴안아 본다. 공기조차도 스며들 틈이 없을 만큼 한 몸처럼 밀착하고는 그와 하나가 되겠다는 생각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기대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난 여행에서 시도했었던 방법들을 모두 반복해 봐 -249- |
도 효과는 없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서 어느새 밤 11시가 가깝다. 동지는 그가 잠든 후를 기다리는 편이 옳다고 판단하고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기다리기로 한다. 지난번에도 같은 과정을 겪었지만, 다시 한번 부딪혀 볼 수밖에 없다. 동지는 11시에 침대로 올라가 그의 곁에 나란히 누워 그의 손을 잡고 명상 수련에 들 때처럼 호흡을 가다듬는다. 시간은 가차 없이 11시 15분을 지나갔다. 지난번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광화문광장으로 달려갔었지만, 양쪽 모두에서 허둥대기만 하다가 여행은 끝나고 말았다. 이번엔 결코 자신의 방을 떠나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먹는다. 차츰 그의 호흡이 고르고 잔잔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파동에서 수면으로 들어가는 징후가 감지되고, 동지 역시 드넓은 명상의 바다를 향해 돛을 올린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시공간의 경계를 훌쩍 건넜다. 잠시 후 잠들었던 동지가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마자 누운 그대로 뭔가를 가늠하듯 이삼 초간 주위를 살폈다. 그런 다음 손으로 가슴팍을 만지고 얼굴을 쓰다듬어 보고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시간은 11시 25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에는 뭔가를 각오할 때의 곡선이 그려졌다. 동지는 스탠드 옷걸이에 걸어둔 바지를 낚아채서 입고 셔츠에 팔을 꼈다. 상의 단추를 끼울 틈도 없이 문을 밀치고 나가다가 탁자 위에 놓인 시계를 급히 집어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250- |
쿵쾅쿵쾅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놀란 지선이 가운을 찾아 걸치며 밖으로 나왔을 때, 동지는 이미 인사동길을 맨발로 뛰고 있었다. 작은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동지는 뜸한 행인들 사이를 능숙한 몸놀림으로 피하며 북인사마당을 거쳐 광화문광장을 향해 질주했다. 동상이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줄곧 세종문화회관 옆의 화단을 지켜보았지만 사람의 움직임은 없다. 그렇다면 재희는 아직 동상 밑 지하 시설에 있을 것이었다. 동지가 동상 뒤의 그 포석, 귀퉁이가 손바닥만 하게 깨어져 나간 포석에 발을 딛는 순간 그 우려했던 징후가 오고 말았다. 보이는 모든 존재가 흔들리고 동지는 현실로 떠밀려 돌아와야 했다. 팔 년 전의 동지는 영문도 모른 채 인사동으로 돌아왔었고, 북인사마당에서 지선이 우산을 들고 기다렸다. 그 사실만은 이미 아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팔 년 전 재희가 사고를 당하던 날, 우연히 과거의 몸에 들어가 광화문광장으로 달려갔던 일은 바로 오늘, 1월 19일 밤에 그가 시도한 일이었으며, 그 일은 이미 팔 년 전에 실패로 끝난 사건이었다. 오늘의 시간여행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 그것을 시도한 날이 오자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재연되어 그가 확인하게 된 해프닝에 불과했다. 지난 일들이 점점 명료해졌다. 동지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라며 스스로 다짐했다. 과거의 몸에서 체류하는 시간을 15분만 연장한다면 -251- |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께름칙한 것은 이번 시간여행의 지속시간이 오히려 단축된 점이다. 지난번까지는 재희가 지하 시설에서 나와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았을 뿐 아니라, 재희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오던 사내의 등산모까지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재희가 지하 시설에서 나오기도 전에 시간여행이 끝나고 말았다. 동지는 매번 조금이라도 늘어나던 시간여행의 지속시간이 오히려 줄어든 이유가 뭘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물론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막연하게나마, 팔 년 전의 몸에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동안 시간여행에 필요한 에너지가 고갈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오빠, 지금 오빠가 생각하는 것들은 참 혼란스러워요.) ‘재희야, 이제 많이 남지 않았어. 우린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그 비운의 카드를 치워버려야 해. 도미노의 패 하나를 살짝 돌려놓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아, 오빠. 왠지 불안해요. 전엔 이런 적이 없었는데.) -252- |
더 늦기 전에 보내주렵니다! 희경의 집에서 인경이 하룻밤을 보냈던 날, 희경은 지난 팔 년 동안 그녀가 겪어온 얘기들을 풀어놓았다. 그녀는 말하기가 힘에 부쳐 몇 차례 말을 끊고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지만, 조용한 선율의 피아노 독주곡을 연주하는 사람처럼 건반 위를 꼭꼭 누르듯이 얘기를 이어 나갔다. 두 여인은 눈을 반쯤 감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희경은 한 달 전쯤에 꿈에서 아이들을 본 얘기를 끝으로 긴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더 늦기 전에 보내줘야겠어요. 그렇게라도 해야 그나마·····” 희경이 얘기를 끝내며 결론처럼 한 말이었다. 그 말을 하며 그녀는 명치 끝에 차오르는 울음을 누르기 위해 어금니를 깨물었으나 어쩔 수 없이 입술을 심하게 떨었다. 미여스님과 인경은 희경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그녀에게서 -253- |
시선을 돌려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흐느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세 여자는 서로 끌어안은 채 길게 울었다. 세 여자만 있는 넓은 집은 울기에 편했다. “동지는 알고 있어요?” 인경이 먼저 입을 뗐다. “아직 말을 꺼내지 못했어요. 동지가 제일로 걱정이에요.” “저런, 아직 동지가 모르는구나.” 미여 스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동지가 알면 절대 안 된다고 할 거예요. 팔 년이 짧은 세월인가요. 하루도 안 빠졌을걸요.” 인경이 말을 받았다. “맞아요. 꼭 마누라 병구완하듯 했으니까요. 마누라라도 그렇게는 못 해요.” 희경도 인정했다. “그리고 의사들이 불가사의라고 할 만큼 재희가 저렇게 팔 년을 버티는 것은 동지의 특별한 능력 때문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인경이 말했고 두 사람은 침묵으로 인경의 말에 동의했다. “의사나 병원 측과는 상의가 끝났어?” 미여 스님이 물었다. “응, 원하는 사람은 많겠지. 가능한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하고, 서로 맞는 환자들을 찾아서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한가 봐.” 병원 측에서 장기기증 얘기를 꺼낸 건 지난해 겨울이었다. 의료진에서 회백질 검사를 한 결과 손상된 신경세포가 조금 재생되기는 했지만, 코마를 벗어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희가 사고를 -254- |
당한 직후부터 의사들의 판단은 시종일관 그녀가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쪽이었다. 그런데도 희경이 팔 년 동안이나 숨만 쉬는 딸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동지의 특별한 능력에 대한 기대도 큰 몫을 차지했었다. 그럼에도 또 한편 팔 년이란 시간이 너무 길었으므로 그녀도 차츰 재희의 회복 가능성에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요양병원) 창밖에는 이따금 하나둘 눈발이 흩날렸다. 가루눈도 못 될 크기의 눈발이 날벌레처럼 유리창에 부딪혔다. 병실은 조용하고 따뜻했으나 눈발이 날리는 모양새에서 바깥바람의 세기가 짐작되었다. 날은 틀림없이 추울 것이었다. “동지야!” 희경이 조심스럽게 동지를 불렀다. 이름을 불러놓고는 말을 고르듯 잠시 침묵의 틈을 두었다. “네, 어머니.” 동지가 희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우리 이제 그만하자.” -255- |
“·····” 대답하지 않은 채 희경을 바라만 보았으나 동지는 그녀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를 짐작했다. “며칠 전에 대학병원 담당 의사와 만났어. 처음 듣는 말은 아니지만,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는 거였어.” “·····” 거기까지는 아는 얘기였으므로 동지는 입을 닫은 채 듣고 있었으나 점차 희경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얼굴이 되어 갔다. “장기기증 의사를 타진 받았어. 언젠가 재희와 난 장기기증 희망 등록을 해두었거든.” “그만 하세요, 어머니! 전 포기하지 않습니다!” 동지가 희경의 말을 끊었다. 평소 희경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게 매우 단호한 말투였다. 그런 문제라면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혀두려는 의도가 그의 태도에서 읽혔다. “재희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동지가 나보다 더 간절할까?” “재희가 듣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동지는 급히 재희의 얼굴을 살핀 뒤 인경을 쳐다보았다. 왜 갑자기 재희가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동지는 마음이 다급했다. -256- |
(오빠,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어요. 엄마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오빠도 이젠 나를 잊고 오빠의 길에 전념하셔야 해요. 그리고 우리 엄마를 부탁해요. 엄마에겐 아무도 없잖아요.) “며칠 전에 보호자 동의서에 사인을 했어.” 희경은 담담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깊은 생각 끝에 내린 결정에 따른 결연함이 그녀의 목소리에서 배어 나왔다. 동지가 처음으로 희경에게 ‘과거 수정’이란 말을 꺼냈지만, 그녀는 말로써 대답하거나 어떤 표정도 밖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은 채 침묵했다. 그날 오후, 대학병원 담당 의사를 찾은 동지는 같은 말을 들었다. “안 된 일입니다만, 환자가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팔 년 동안 애써온 희경과 동지를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의사였다. 의사는 동지와 희경의 삶을 찾아주고 싶다고, 그것을 말해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도 했다. “10년 이상 코마 상태였던 사람이 깨어난 사례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런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개별 환자의 상태가 다르다는 점도 아셔야 합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존재했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기적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 기적이란 것도 사실은 과장되거나 자주 왜곡되기도 합니다. 이 환자의 경우는 코마 상태가 아닌 유사 뇌사 상태로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필요한 절차를 거쳐 -257- |
뇌사로 판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재희는 지금 살아있고, 저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 장기기증 문제는 없었던 일로 해주십시오.” “보호자께서 동의를 철회하실 수는 있습니다.” 의사는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동지를 바라보았다. 동지는 요양병원을 찾는 일상은 계속 이어 나갔다. 희경의 결정을 원망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팔 년간 믿음을 거두지 않았었다. 책임을 따지자면 자신에게서 찾아야 했다. 요양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발길이 광화문광장으로 향했다. 세월호 사고의 희생자 분향소 주변은 향냄새가 짙게 깔려있었다. 그날은 마침 세월호 참사 일주기여서 추모객의 행렬이 시청광장으로부터 이순신 장군 동상을 지나 광화문광장의 해치마당 입구까지 이어졌다. 노란 리본을 백 팩과 옷깃에 단 시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시민들은 휴대폰으로 세월호 농성장 곳곳과 추모객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도 하고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떨군 채 묵묵히 서 있기도 했다. 희생자 사진 아래 국화 한 송이를 헌화하고 향을 피운 시민들은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떤 여인은 조문을 마친 뒤 광장을 벗어날 때까지도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분향소 앞에 설치된 유리로 만든 배 안에는 시민들이 접어서 넣은 노란색 종이 -258- |
배가 3분의 2가량 채우는 중이었다. 어린아이 하나가 까치발을 들고 투명한 유리 배 안에 종이배를 밀어 넣는 모습이 보였다. 분향소 옆에 세워 둔 여러 개의 게시판 앞에 시민들이 모여 글을 적고 있었다. ‘일 년 내내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다녔다.’, ‘자다가도 너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데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구나.’, ‘오늘 같은 날은 먹기도 미안해서 아침 식사를 거르고 분향소에 왔다.’ 등의 글들이 보였다. 동지는 지난해 팽목항을 찾았을 때를 떠올리며 게시판 앞에서 매직펜을 집어 몇 자 적었다. ‘얘들아, 미안하다. 부디 고통 없는 세상에서 편히 잠들기를 빈다.’ 아들을 잃은 한 아버지는, 애들이 다 구조됐다고 해서 젖은 옷을 갈아입히려고 팽목항에 갔던 것인데···· 그 기억이 나서 어젯밤에 많이 울었다. 오늘 시민들은 잊지 않고 이렇게 많이 찾아왔는데, 대통령은 모를 것이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다른 게시판에는 최고 권력자에 대한 증오가 마그마처럼 끓어올랐다. ‘아이들이 죽어갈 때 일곱 시간 동안 네년이 뭘 했는지 밝혀라!’, ‘ОО과 호텔에서 뭐 했니?’, ‘프로포폴 맞고 잠에 취했니?’, ‘성형시술 받느라 몰랐니?’, ‘90분 동안 올림머리 하느라 바빴니?’, ‘굿하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니?’, 네년 방에서 나온 비아그라는 누가 먹는 거니?’ 등의 매우 자극적이고 외설스러운 말들이 난무했다. -259- |
세월호 사고가 전해지고 나서 첫 일곱 시간 동안 어떤 조치도 하지 않은 채 침묵했던 대통령이 그 일곱 시간 동안 뭘 했는지는 전 국민의 관심사였다. 청와대에서 납득할 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이에 사태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온갖 루머가 날개를 달고 전국의 하늘을 훨훨 날아다녔다. 세월호가 좌초되었던 그 시간에 여자 대통령은 내연남과 호텔에 있었다는 낯 뜨거운 소문이 먼저 나돌더니, 그 시간에 내실에서 성형수술을 받았다는 소문과 관저 마당에서 굿을 벌였다는 소문이 뒤를 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문은 자꾸만 변신을 거듭했다. 프로포폴 주사를 맞고 취해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거나 올림머리를 하느라 미용실 의자에 앉아있었다는 소문, 비아그라가 그녀 관저에서 나왔다는 소문까지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수많은 유튜버가 시중에 떠도는 루머를 그럴싸하게 편집하여 전파했다. 주류 언론마저도 유튜브를 카피하여 보도하기에 이르자 루머는 더 이상 루머가 아닌 사실로 굳어졌다. 사람들은 떠도는 루머가 딱히 미스터리 일곱 시간 동안에 일어난 일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그녀가 해왔던 일상사로 믿는 분위기였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던 사람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이 한마디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민심의 흐름은 도무지 손 쓸 방도가 없이 밀어닥치는 쓰나미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분향소와 대로 하나 사이의 길 건너편에서는 기십 명의 사람이 -260- |
모여 ‘세월호 농성장 철거’를 외치기도 했다. 어떤 ‘어머니회’에서는 광화문역 7번 출구 앞에서 ‘세월호 농성장 철거’라 쓴 플래카드를 걸어두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세월호의 아픔은 알지만 이렇게 노란 리본이 온 나라를 뒤덮는 게 정상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KT 본사 건물 앞에서는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세월호 선동세력 규탄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광화문 불법 천막 즉각 철거하라!’, ‘세월호 왜곡 선동 즉각 중단하라!’, ‘세월호의 정치적 악용을 규탄한다!’라고 쓴 피켓을 들고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구호를 외쳐댔다. 이처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소수자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빠져있었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뿐이었다. 동지가 세월호 농성 천막 앞을 떠나 인사동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한 노인이 천막들을 차례로 돌아보며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헌팅캡을 쓰고 쥐색 점퍼를 입은 노인은 입성이 깨끗하고, 마른 체격에 자세가 반듯했다. 유가족들과 일일이 악수하거나 어깨를 끌어안는 모습으로 보아 노인은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지체 높은 사람으로 보였다. 몇 사람이 노인 곁을 따라다니며 안내했다. 농성 천막을 모두 돌아본 뒤 노인은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주먹을 불끈 쥐는 포즈를 해 보이고는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혼자 광화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인은 광화문 앞에서 안국동 쪽으로 꺾어 들어가면서 시야에서 사라졌다. -261- |
동지가 일묵서예 현관에 막 도착했을 때 전화 신호음이 울렸다. 희경이 재희의 장기기증 날짜가 5월 25일로 확정되었다는 말을 전했다. 그동안에도 동지는 희경에게 장기기증을 취소해 달라고 여러 차례 하소연했었지만, 희경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 사이에 한국장기조직기증원(KODA)에서는 필요한 절차를 진행하여 기증 일자를 결정한 것이다. 재희를 떠나보낼 날이 39일 남은 셈이었다. 지선이 인사했지만, 동지는 고개를 떨군 채 이층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반쯤 오르던 동지가 지선을 돌아보며 ‘다음 달 25일이랍니다.’ 누구에겐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절박함이 표정에 드러났다. 누구에겐가 말해서 그 사람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얼굴이었다. 25일의 의미를 알아들은 지선은 이층 동지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하지만 동지가 바라는 말을 해줄 수 없는 그녀의 눈은 눈물만 흘러내릴 뿐이었다. 지선은 동지의 앞에서 손을 모으고 앉아 소리 죽여 울었다. 눈을 감은 채 소파에 앉은 동지도 울었다. 수련실에서는 스승의 일을 모르는 세 제자가 수련 준비를 마치고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스승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262- |
첫댓글 극적 전환의 장면으로 빠른 전개가 이루어지는 듯하네요. 재희가 극적으로 회생을 할테지요. 비중 있게 서술되는 세월호 사태와 소설이 필시 적잖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을텐데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항간의 해석과는 다른 의외의 해석이 제시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지 않습니다. 뻔한 내용이라면 굳이 소설의 소재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태극권이란 정신수련을 통하여 타임캡슐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서사가 진행되는 소설기법을 대하니 이또한 기발한 착상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부 독자들은 허구적 진실이 아니라 환상이라고 질책을 했겠지요. 긴박하게 전개되는 시점에 임박했군요. 해암이 소설을 어떻게 전개해 나갈지 자못 흥미를 갖게 됩니다.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인물들의 등장으로 소설가의 머리는 혼란 속에서도 졸가리를 유지하느라고 늘 긴장되겠지요.
실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허구적 인물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꾸며나가는 기법이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만드는 것과 흡사하군요. 총론과 각론을 예리하게 터치하는 기술이 없다면 독자로부터 흥미 유발이 쉽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데....해암은 탁월한 능력을 가졌군요. 스토리 텔링이 아주 흥미로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