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全斗煥, 1931년 1월 18일∼ ) 대통령
전두환 (全斗煥, 1931년 1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완산(完山).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났지만 5세에 대구로 이주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학도병으로 참전하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전방 야전군 장교 시절을 거쳐, 60년대 베트남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그후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보위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 육군 대장 예편 후 정계에 입문했다.
1955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소대장, 교육장교, 육군사관학교 구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와 군내 기수별 친목모임인 하나회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하나회의 리더 중의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쿠데타 당시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하였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 등을 거쳐 1970년 11월부터 1년간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하였다. 1973년에는 1공수특전여단장 재직 중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될 위기를 넘기고 1976년 3월 차지철, 박종규 등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발탁되었다. 동시에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3월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되고, 10.26 사태 후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박정희 암살 사건을 수사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혐의로 체포한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3월에는 최규하, 신현확에게 중앙정보부장직을 요구, 그해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겸직하였으며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진압을 주도했다. 5월 27일에는 국보위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어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9월 장충체육관에서의 간선제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1년 3월 역시 체육관에서의 간접 선거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그해 5월 국풍 81 축제를 개최하여 광주 민주화 운동 1주기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시도했다. 정통성이 매우 부족했던 전두환 정권은 이후 1982년 한국프로야구를 창설하고 야간통행금지 조치를 해제하였으며,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정책을 시도하는 등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유화책을 내세웠다. 컬러 텔레비전 보급, 포르노 영화 장려로 대표되는 3S 정책 또한 이러한 유화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삼청교육대를 창설하여 무고한 시민들의 인권을 유린하였으며,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 또한 지속하였다.
이러한 탄압의 연장선에서 1987년 2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일어난 6월 항쟁에 따라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1987년 6월 29일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대통령 직선제 실시에 따라 후임 노태우 대통령 취임까지 재직하였다. 1988년 13대 국회에서 개최한 5공 청문회에 출두하여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을 '자위권 발동' 이라 진술하여 의원들의 항의를 받았다.
대통령직 퇴임 이후 7년 뒤인 1995년에 구속기소되어 1심에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1심에서는 사형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12월에 사면됐다. 당시 전두환은 특가법 상 뇌물수수죄로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았다. 2013년 9월에 추징금 완납계획을 발표했으나 아직 완납하지 않은 상태이다.
1958년 1월 24일에 아내 이순자와의 결혼식
전두환은 1931년 1월 18일에 경상남도 합천에서 아버지 전상우와 어머니 김점문 사이에서 6남 4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위로 형 열환(1915년생), 규곤(1916년생), 기환(1929년생)과 누나 홍렬(1918년생), 명렬(1922년생), 선학(1925년생)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뒤로도 여동생 점학(1935년생), 남동생 석환(1937년생), 경환(1942년생)이 태어났다.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그의 가계는 몰락한 양반으로 13대조인 전제가 임진 왜란 때 영산현감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권율의 명령을 어겼다며 처형당했고 이후 무관이 몇 명 배출됐지만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한 상태였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였으나 마을 구장을 지낼 만큼 상당한 한문 지식이 있었다. 약간의 의학 지식도 갖추고 있던 그는 정식 진료소를 차릴 수준은 아니었으나 마을 주민들을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이런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다. 그리고 의리가 강해 전두환이 9살이던 1939년에 동네 노름꾼 지인의 보증을 서주느라 문중의 종토(宗土)를 저당잡혔다. 이 종토를 돌려받는 과정에서 합천 읍내 주재소 순사부장의 소환을 받았으나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지냈다.
어머니 김점문은 자녀들 중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강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지나가는 승려를 대접해준 뒤, 그 승려로부터 '어머니의 튀어나온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김점문은 부엌으로 달려가 쇠 집게로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고 한다.
유년기
육사 졸업 후의 전두환
유년기에 전두환은 근처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했다. 5세 되던 해 그의 가정은 합천에서 대구로 이사했다. 이후 전두환은 7세 되던 1937년에 희도소학교에 입학했다. 유년기의 전두환은 학업성적이 우수했지만, 4학년 때 소학교를 휴학해야 했다. 셋방살이를 하면서 10대 초반인 그는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낫토 배달, 약전골목에서 약 배달 같은 일을 하면서 가정의 생계를 부양하기도 했다. 생계와 학업을 병행하느라 그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 전상우는 횡포를 부리는 일본인 순사를 때려 눕히고 절벽으로 떨어뜨린 뒤 만주 지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2년 만에 귀국했다. 일본 순사의 수배를 피해 그의 부모는 만주 지린성 반석현에 숨어 살다가 1년 3개월 만에 귀국했다. 전상우는 만주에서 배운 한의술로 한의원을 개업했으나, 정식으로 배운 한의학이 아니라서 손님들의 발길은 뜸했고,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중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전두환(뒷줄 두 번째)
1941년 4월 다시 가족과 함께 남행열차를 타고 귀국하여 대구로 내려와 바로 희도국민학교에 복학하여 1944년 3월 25일 15세에 졸업하였다. 아버지의 만주 망명 때문에 전두환은 또래들보다 1년 늦게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그해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입학해 5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중학생이 된 전두환은 권투를 시작했고 중학교 권투부 부원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 갈 때마다 어깨에 권투장갑이 매달려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10킬로미터 거리였지만 그는 왕복 20km의 길을 직접 걸어서 통학하였다. 키가 작았던 그는 중학생 당시 별명이 몽땅이었다. 중학교 시절에도 그는 걸어서 통학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학교 동창이던 백순달은 그가 걸어서 다녔다고 하였다. 재학 당시 우수한 성적이었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 그는 자발적으로 저녁마다 목총을 들고 중학교 교사를 돌며 순찰을 했다. 1950년 2월 10일에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두환은 학창시절부터 생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학창시절 내내 전두환의 학업 성적은 우수했지만, 가정 형편이 곤궁하였던 전두환은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학비가 들지 않는 육군종합학교의 갑종장교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형 기환의 군 입대로 인한 부모의 반대로 입학하지 않았고, 중앙로의 병사구 사령부에 붙은 육군사관학교 생도 모집에 응시하였다. 2백명 선발에 2천 4백명이 몰렸는데 기적적으로 합격, 한국군 최초의 육군사관학교 정규 4년제 모집 과정에 합격한 그는 1951년 진해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운동선수로서의 전두환
육사생도 시절의 전두환
육사 생도 시절의 전두환은 교번 152번으로 교육연대 2중대 2구대에 소속되었다. 육사 1학년 여름에 비상이 걸려 M1소총을 들고 완전 군장을 갖추고 24km를 구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체력 “테스트”를 위해서였다. 이 훈련을 이겨내지 못하면 장교의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판정되어 유급 조치를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진해 육군대학에서(마진터널)을 거쳐 창원군 상남을 지나 큰 고개를 넘어 다시 진해로 돌아오는 60리의 구보였다. 몇몇 생도들이 쓰려졌다. 이때 전두환은 한손으로는 한 동료의 옆구리를 잡아 이끌고 또 한손으로는 그의 M1 소총과 (배낭)을 움켜쥐고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는 미담을 퍼트리기도 했다.
성적은 하위였지만 체력이 강하고 운동을 즐기던 전두환은 축구부원이였고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중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축구선수로서 계속 활약했다. 이 전력이 있는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이후 축구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는데, 1983년 5월 K리그 개막 경기에 직접 참관을 비롯하여 박종환 당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불러서 축구국가대표팀의 작전과 선수기용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 전두환이 생도시절에 주최된 전국 대학 축구대회에서 육군사관학교는 당시 골키퍼였던 전두환의 맹활약으로 준결승에 진출했다.
육사 생도 시절
대구공업중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육사에서 동기인 노태우, 정호용 등과 만나 인맥관계를 형성했으며 훗날 이들과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모의하게 된다.
1955년 9월 30일에 전두환은 육사를 11기로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에 임관하였다. 육사 생도 시절 우연히 육사 참모장인 육군 대령 이규동의 관사에 드나들다가 그의 차녀인 이순자를 만났다. 형제들 중 가장 돈이 많았던 그는 형 전기환을 대신해 노부모집에 살았다. 아버지 전상우는 1967년에 사망하였고 어머니 김점문은 1978년에 사망하였다.
임관 초기
1955년 3월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제 25보병사단 소대장에 보임되고, 그해 9월 30일 광주 육군보병학교 초군반(초등군사반)에 입교하였다. 이때 그는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4년 동안의 생도시절에 나는 축구와 권투를 한 탓인지 학과성적이 좀 뒤진편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관들의 기대를 그리 모으지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미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모두 똑같은 대한민국의 육군 소위입니다.'라고 말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가 육사 성적이 좋지 않았으므로 동기들 대부분에게 묵살당했다. 초군반 수료를 마치고 육군 제 21보병사단으로 배속되었다. 1957년에는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교육장교로 전속되고, 그 해 10월 중위로 진급하였다. 그 후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