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이 서린 장충단공원
DB중학교를 1957년에 입학하여 DB고를 1963년도(9회)에 졸업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인 6년동안은 장충단공원과 남산은 수시로 찾아가곤 하던 곳이기도 하다.
" 남산에 정기 뻗혀 장충단 위에 희망에 종이 우는 배움의 마을 ~ ~ ~ "
교가(校歌)에서도 DB중고 학생들에게 희망의 종(鐘)을 울려주곤 하던 교훈의 종이 아닌가.
동기들과 동대입구역 6번 출구를 빠져나와 장충단 공원으로 들어서는 순간이다.
6번 출구를 나와 똑바로 400여미터 직진을 하노라면 동국대 정문을 스쳐지난다.
조금 더 계속 걸으면 중구 장충동2가에 앰배서더호텔을 만난다.
요즘은 앰배서더호텔이란 이름이 곳곳에 널려 있다.
바로 맞은 편으로 대로를 건너 자리하고 있는 건물이 바로 DB중고등학교였던 곳이다.
교사(校舍) 건물이 2층으로 지하실도 있다.
지하에서는 학생들이 유도(柔道)를 배우곤 하던 체육관 같은 지하실이다.
6년간의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DB중고를 졸업한 모교이다.
현재는 어느 기업체가 건물도 증축하고 예전 모습은 아니다.
운동장 한켠에는 동굴도 있다. 그곳에는 아마도 시신(屍身)을 모셔 두었던 곳이었나 보다.
어느 날인가 해골도 발견이 되기도 했던 장소이다. 학교가 설립되기전에는 사찰이었던 절간 터이기도 하다.
아마도 일제 쪽발이들의 행태인 모양이 아닌가.
한마디로 절간의 똥통같은 최하류(最下流)의 DB라는 이름의 중고등학교이다.
학교연혁을 들여다 보면 어떨까.
1953년 8월1일에 부산에 있는 JY 중고등학교 분교를 인수 개교를 한다.
1953년 9월 10일 서울 본교 개교를 하고 1954년 3월 10일 DB중학교 제 1회 졸업생을 배출이다.
1954년 4월1일 부산분교를 환도시켜 서울 장충동2가 166번지에서 본교와 통합도 한다.
제대로된 DB중고등학교의 출발점이리다.
1980년도에 서울 강동구 둔촌동으로 이전을 한다.
국가의 정책에 따라 한강 이북의 중고등학교를 한강 이남으로 옮길 때이다.
최하류이던 DB 중고등학교가 유수(有數)한 그룹에 속하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1951년 1.4후퇴로 이북고향인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어수리에서 피난을 남쪽으로 내려온다.
할머님을 홀로 고향에 두시고 떠난 것이다. 부모님과 2남 2녀의 여섯 가족이 충청도 두계라는 곳이다.
낮설고 물설고 하늘도 설은 아는 사람도 없는 타향살이가 아닌가.
남의 빈집에서 아마도 3여년 정도 는 살았을 게다.
대전 성남동 피난민들만의 판잣집 마을로 이사를 온다. 약 서너평 정도의 판잣집이 백여채 정도는 될게다.
어느날 불이 나서 판자촌이 쑥대밭으로 사라진다.
어디로 가야 하나. 무조건 아버님이 서울로 상경이다.
우연인가 기적인가 이북에서 피난 나온 처남을 서울운동장 근처에서 만난 것이다.
" 매부 ~ 서울로 오세요 " 한마디가 서울의 토박이로 되는 순간일 줄이야.
대전의 홍도국민학교를 5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이다.
집도 절도 없는 서울이다. 지금의 중부시장인 그곳이 허허벌판일 때이다.
이곳도 피난민들의 판잣집 촌인 곳이다. 맨 땅에 댓평 정도의 판잣집이다.
가까운 을지로 4가 인현시장 근처의 영희국민학교로 전학이다.
졸업을 하고 중학교 입학시험 1차 2차 모두 낙방이다.
맏아들의 손을 아버님이 잡고 DB중학교 교무실로 들어선다.
입학시험은 커녕 두말없이 입학의 영광(?)을 승낙받은 순간이다.
내 오마니는 을지로5가 버스정류장에서 노점상을 차린다.
자그마한 나무상자에 눈깔사탕 오징어 몇마리 양담배 몇갑 그리고 낱담배도 있다.
여름이면 한말 정도 크기의 유리병에 어름 한덩어리 수박 한쪼각 당원을 넣는다.
아버지는 서울운동장 울타리에 조그마한 판자 가게를 만드신 것이다.
토정비결 책을 팔기도 하고 1년 신수도 봐주시고 이름도 지어주시기도 한다.
맏아들인 내가 중학교 2학년때까지가 아닌가.
월사금을 마련은 고사하고 하루 세끼 보리밥이라도 먹으면 다행인 시절이다.
오늘은 남산(262m)을 가볍게 오르고 종각역 근처의 맛집으로 향할 예정이다.
예전에는 넓은 공간으로 축구도 하며 즐겁게 뛰여놀기도 한 곳이다.
지금은 곳곳에 나무숲이 어우러져 있어 산책하기에 안성마춤인 형태로 바꾸어 놓았다.
나에게는 희망의 종소리가 아니라 슬픔의 순간도 있었으리다.
학교에 월사금(月謝金)을 제대로 납부를 못하던 얼룩진 순간이 가슴을 아리곤 한다.
" 최 @ 남 , 임 # 번, 이 $ 춘 , 주 % 수 등등 ~ ~ ~ 집에 가서 월사금을 갖고 오너라 "
KHK 담임선생님은 월사금을 미납한 학생들을 집으로 쫒아내는 꼴이다.
그 다음 날부터는 월사금을 납입할 때까지 이름을 부르는 것도 생략이다.
한마디로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제자로 인정도 아니하는 꼴이 아니랴.
집으로 가봐야 부모님도 안 계신다. 버스정류장 앞에서 노점을 하고 있으니 어찌 해야 되는가.
어디로 가야 할까. 노점상으로 달려가도 무슨 소용이 있기라도 할 것인가.
가방을 팽개치고 한강 난간에서 사라지고도 싶었을 것이리다. 발부리에 걸리는 애꿎은 돌맹이에 화풀이도 한다.
장충단 공원으로 들어서도 갈 곳이 어드메이던가. 반겨주는 사람은 커녕 세찬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다.
썰렁한 눈보라 바람소리만이 귓등을 때린다.
눈에 젖고 추위에 얼어버린 가녀린 몸이다. 소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뿐이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 아니라 한맺힌 서러움의 통곡의 장소가 아니랴.
피난시절로 제대로된 집도 없다. 판잣집에 여섯식구가 얽히고 설키고 온돌도 이부자리도 없다.
하루 세끼 보리밥이라도 먹기도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다.
졸업한지도 회갑이 지난 세월이 흐른 것이다. 장충단공원을 스쳐지나며 남산으로 가야 하는 순간이다.
세월은 흘러서 사라졌으려마는 애닲은 굴곡의 등불은 꺼짐이 없다.
저기 저쪽 나무 그늘 아래 쪼그리고 앉아 훌쩍이고 있는 여린 학생이 보이고 있다.
까만 교모(校帽)에는 중학교를 나타내는 황금색의 " 中 "자(字)가 달려 있다.
눈을 부비며 자세히 살펴본다. 교복 상의의 가슴에는 " 崔 正 南 "이라는 명찰이 보인다.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 정도의 자그마한 학생인 모습이다. 1958년도 피난 나온지 7년이 흐른 세월이다.
중학교 2학년 그 당시의 바로 내가 아닌가.
" 잠시만 기다려라, 崔正南 학생아 ~ " 대답이 없다. 돌아앉아 울고 있는 게 아닌가.
" 정남아 ~ 배도 고플테니 우선 빵이라도 먹어라 "
우선 생수1병과 두유 1팩도 단팥빵 한개를 등산배낭속에서 꺼내준다.
주머니 지갑속에 있는 은행카드도 지폐도 동전도 몽땅 책가방속에 넣어 주리라.
그때까지 무슨 과목을 어떻게 무엇을 배웠는지 생각도 없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정신이 버떡 든다.
" 하느님 !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월사금 걱정 없도록 장학금도 받을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
집 뒷동산에 올라 보름달을 바라보며 다짐에 다짐을 한다.
1944년도에 이북 고향산천 평안남도에서 태여났으니 노객(老客)의 연세(?)는 몇이련가.
수 많은 세월이 흐른 것이다.
장충단공원으로 들어설 때마다 서러움과 한(恨)이 서린 장충단 공원이 아니랴.
2024년 2월 24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