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는 한 시간 남짓 남고산에 있는 몇몇 유적을 둘러봤다. 실제 답사동선과는 달리 불교문화재와 불교문화재가 아닌 것, 둘로 구분하여 정리한다. 먼저 남고산으로 진입하면서 좌측에 있는 충경사(忠景祠 완산구 동서학동 840-19[완산구 남고산성1길 31])라는 사당 앞에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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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경사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이정란의 공적을 기려 세운 사당이다. 내가 앞서 완주에서 묘역에 다녀온, 바로 그 이정란이다. 이정란은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호남으로 밀어닥치자 64세의 나이로 의병을 모아, 소양을 거쳐 진안 쪽으로 공격해오는 왜군을 무찌르는 등 혁혁한 공훈으로 전주부성을 지켰다. 이러한 이정란의 용기와 충정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순조 때 충경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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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경사의 소유, 관리는 문중인 것 같은데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외관이나마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마을 이장이라는 분이 오셔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들르는데 문이 닫혀 있어 아쉽다’고 이야기하신다. 충경사만이 목적은 아니겠지만 남고산의 들목에 있기 때문에 많은 탐방객들이 이 앞을 지나다니므로 개방을 해놓으면 좋은 역사공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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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하는 때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는 차로 남고산성을 거쳐 남고사 마당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남고사까지는 가지 않았고 복원된 남고산성 서문 근처에 주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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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294호 남고산성(南固山城 완산구 동서학동 산 228)은 전주 남쪽에 있는 고덕산과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로 불리는 봉우리를 둘러쌓은 산성이다. 남동쪽으로는 남원, 서남으로는 정읍으로 통하는 교통상의 중요한 곳을 지키고, 북쪽으로는 전주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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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이곳에 고덕산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조선 순조 13년(1813)에 성을 고쳐 쌓고 남고산성이라 했다. 성문은 동·서에 있었으며 각기 3칸, 6칸 규모의 누각형 문이 있었다. 서쪽에 비밀문이 하나 있었으며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포루가 설치되어 있고, 관청, 창고, 화약고, 무기고를 비롯한 각종 건물이 즐비하게 있었다. 지휘소인 장대는 남·북에 각각 설치되었으며, ‘남고사’란 절이 있다. 현재 성의 둘레는 약 5.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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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성벽이 많이 허물어졌다고 하는데 돌아보지는 못했다. 서문 근처에 ‘남고진사적비’가 있는데 산성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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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오르면 만경대(萬景臺)라는 바위 각자 아래 고려충신인 포은 정몽주가 쓴 시가 새겨져 있다. 현장 설명판에 따르면 이 시는 1380년(고려 우왕 6년) 9월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개선장군이 되어 조상의 고향인 전주에 돌아와 오목대에서 종친들을 불러 베푼 환영잔치와 관련이 있다. 이성계는 이 자리에서 장차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울 뜻을 내비쳤고, 이때 종사관으로 같이 갔던 정몽주가 이 광경을 보다가 흥분한 나머지 홀로 말을 타고 이곳 만경대에 올라 비분한 심정을 시로 남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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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경대 인근에서 바라 본 전주 시내]
이 시문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던 것을 영조 22년(1742) 鎭將 김의수가 각자한 것이라고 하는데 마멸이 심한 데다 그늘까지 져서 제대로 담을 수가 없었다. 설명판에 있는 시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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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강두석경횡(千仞崗頭石逕橫) 천길 바위머리 돌길을 돌고 돌아
등림사아불승정(登臨使我不勝情) 나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여
청산은약부여국(靑山隱約夫餘國)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
황엽빈분백제성(黃葉繽粉百濟城) 누른잎이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
구월고풍수객자(九月高風愁客子) 구월의 소슬바람에 나그네 시름 깊은데
백년호기오서생(百年豪氣誤書生) 백년 기상 호탕함이 서생을 그르쳤네
천애일몰부운합(天涯日沒浮雲合) 하늘가 해는 지고 뜬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
교수무유망옥경(矯首無由望玉京) 하염없이 고개 들어 송도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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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년 두번째로 전라도 관찰사에 부임한 이서구가 그해 가을 만경대에 올라 포은 정몽주의 시와 관찰사 권적이 차운한 시를 보고 그 옆 암벽에 새긴 것이다. 역시 설명판에 옮겨진 시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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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의모운횡(高臺徒倚暮雲橫) 높은 누대에 기대어 저녁노을을 보며
초창고신거국정(怊悵孤臣去國情) 외로운 신하는 나라가 망해 감을 슬퍼하네
수첩청산위광야(數疊靑山圍曠野) 청산이 광야를 겹겹이 둘러치고 있고
만가상수옹중성(萬家霜樹擁重城) 집집마다 서리 맞은 나무가 성울 두르고 있네
서풍절력추성지(西風浙瀝秋聲至) 서풍이 비를 뿌리니 가을이 다가오고
낙일창망해기생(落日滄茫海氣生) 수평선에 해가 지니 바다 기운 돋아나네
위시포옹음조지(爲是圃翁吟眺地) 여기는 포은선생이 시를 읊던 곳
천애독자망신경(天涯獨自望神京) 하늘가에서 홀로 서울을 바라보네
徒: 잘못인 것 같다. 글자 모양, 의미 모두 사(徙)에 가까울 것 같다.
昑: 吟의 잘못인 것 같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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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잔치에서 읊었다는 시는 항우와의 천하쟁패에서 승리하고 漢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의 대풍가(大風歌)로 알려진 시다.
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대풍기혜운비양 위가해내혜귀고향 안득맹사혜수사방)
큰 바람 일어나니 구름이 나는구나.
천하에 위세를 떨치며 고향으로 돌아왔도다.
어찌하면 용사를 얻어 천하를 지킬 것인가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시는 유방이 淮南王 鯨布(회남왕 경포)를 치고 돌아올 때, 고향 땅 沛(패)에 들러 고향 사람들과 잔치를 하며 부른 노래이다. 이 시기는 이미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운 뒤 동맹관계였다 반기를 든 경포를 쳐 승리를 거두었을 때다. 즉 아직은 고려왕조가 아직은 명맥을 유지하던 우왕 6년에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기상을 뿜어내며 이 시를 읊기에는 다소 이른 시기였고, 이러한 분위기에 반응해 정몽주가 위의 시를 읊었다는 것 역시 믿기 어렵다. 행간에 숨겨진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그 의미를 짐작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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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登白雲峰(등백운봉)이라는 시가 있다. 이 시를 지은 시기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이때쯤에는 물론 새로운 나라에 대한 강력한 희망을 피력하고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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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 앞에 있는 ‘등백운봉’ 시비]
引手攀蘿上碧峰 一庵高臥白雲中 若將眼界爲吾土 楚越江南豈不容
(인수반라상벽봉 일암고와백운중 약장안계위오토 초월강남기불용)
댕댕이 넝쿨 휘어잡아 푸른 봉우리 오르니,
한 암자 구름 속에 높이 누웠구나.
눈앞에 보이는 지경이 모두 내 땅이 될 양이면,
저 초와 월나라 강남땅도 어이 마다 하리.
다시 아래로 내려와 안쪽으로 이어진 길을 끝까지 가니 문화재자료 제5호 관성묘(關聖廟 완산구 동서학동 611[완산구 남고산성1길 171])에 닿는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주왕묘(周王廟) 혹은 관제묘(關帝廟)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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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성묘는 고종 32년(1895)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김성근과 이신문이 발기하여 세운 것이다. 건물은 장엄하고 짜임새가 있으며 내부의 양쪽 벽면에는 조선 후기 화가인 소정산이 그린 ‘삼국지연의’ 그림이 있고, 기둥에는 유려한 필체로 쓴 법훈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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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설명문 출처: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시작가작품사전, 전국문화유적총람, 한국의 사찰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