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암집 제8권 / 시(詩)○재필록(載筆錄)
〔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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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년(1754, 영조30) 정월에 북평사(北評事)로서 임금님께 하직하고 북관(北關)으로 달려갔다. 회령(會寧)에서 증광 감시(增廣監試)를 관장하고, 부령(富寧)에서는 동당시(東堂試)를 관장하였다. 이어 육진(六鎭)을 두루 순시하면서 서수라(西水羅)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발길을 돌렸다. 경성(鏡城)에 머문 지 열흘 만에 옥서(玉署)에 임명하는 소지(召旨)를 받들고 5월에 도성으로 돌아왔다. 이번 행차가 무릇 6000여 리였는데, 길을 따라가며 지은 시가 비록 태사(太史)가 채집하는 풍요(風謠)에 채워지기에는 부족할지라도, 서검(書劍)의 감개(感慨)와 관방(關防)에 대한 의견 또한 한두 가지 취할 만한 것이 없지 않기에 마침내 ‘재필록(載筆錄)’이라 이름을 붙였다.
육진(六鎭) : 세종 때 여진족(女眞族)이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김종서(金宗瑞)를 시켜서 두만강 가에 설치한 여섯 진으로, 경원(慶源), 경흥(慶興), 부령(富寧), 온성(穩城), 종성(鍾城), 회령(會寧)이다.
서수라(西水羅) : 지금의 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으로, 두만강 하구 남서쪽에 있는 항구이다. 우리나라 최동북단(最東北端)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이므로 보(堡)를 쌓아 권관(權管)을 두었다. 김창협(金昌協)의 시 〈서수라〉의 주석에 “경흥(慶興) 남쪽 60리 지점에 있는데, 지세가 외지고 바닷속으로 곧장 뻗어 있다. 육진의 막다른 곳이다.” 라고 하였다.
옥서(玉署)에 …… 받들고 : 옥서는 홍문관의 별칭이다. 번암이 북평사로 외지에 있던 1754년(영조30) 2월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承政院日記》
태사(太史)가 채집하는 풍요(風謠) : 주(周)나라 이전에는 채시관(采詩官)을 각지에 파견하여 민요를 채집하게 하고 이를 풍토(風土)와 민정(民情)을 살피는 근거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풍요이다. 《시경(詩經)》의 15국풍(國風)이 대표적인 풍요라고 할 수 있다. 태사는 사관(史官)을 가리키는데, 여러 가지 전적(典籍)과 풍속 등을 살펴 역사를 편찬하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서검(書劍)의 감개(感慨) : 서검은 문인이 칼을 잡고 종군(從軍)하는 것을 의미한다. 번암이 문신(文臣)으로서 무관직에 임명되어 변경(邊境)으로 파견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북평사는 함경도 병영(兵營)에 파견된 문신으로, 명망이 있는 인사가 파견되었는데, 병사(兵使)에 소속되어 첨사(僉使)나 만호(萬戶) 등이 군졸들을 침학(侵虐)하는 것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大典會通 兵典》
관방(關防) : 관문을 세워 수비하는 변방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함경도의 육진을 가리킨다.
재필록(載筆錄)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사관은 붓을 싣고 간다. [史載筆]”라고 하여, 사관이 문구(文具)를 휴대하고 국사(國事)를 기록하는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원 도중에 눈보라를 만나 말 위에서 읊다〔高原道中遇風雪 馬上有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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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웃고 군장 차리니 살쩍 아직 쌩쌩하고 / 一笑戎裝鬢未殘
해마다 왕명을 받드니 말타기도 익숙하다 / 年年王事慣征鞍
하늘과 연이은 사막에는 저물녘 눈 내리고 / 天連沙漠暮還雪
땅은 바다와 가까워서 봄인데도 차가워라 / 地迫滄溟春亦寒
삭풍이 불어와 깃발 끝에서 돌아 나아가고 / 朔吹嘯從旗尾轉
봉수대는 어둠에 묻혀 꿈결에 보는 듯하네 / 烽臺黯似夢中看
객수 속에 남에서 오는 기러기 소리 홀연 들으니 / 覊愁忽聽南歸鴈
혹시 고향 편지 떨구어 부모님 안부 전하려는지 / 倘許鄕書報萬安
원산가 [Wonsan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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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의 수려한 풍광이 용산과 비슷하여라 / 元山佳麗似龍山
길가 수많은 집에 버들이 한가히 늘어졌네 / 夾路千家垂柳閒
울 밖에서 노 젓는 소리가 저물녘 들리더니 / 籬外櫓聲乘薄暮
어선들이 큰 바다 한가득 항구로 돌아오네 / 捕魚船匝大洋還
두 번째〔其二〕
마을 앞 큰 바다는 영남으로 통하거니 / 村前瀛海嶺南通
쌀 실은 돛배에 부는 바람 모두 다 순풍일레 / 載米雲帆盡順風
흉년이면 임금님 은혜로 널리 서로 구제하니 / 荒歲君恩交濟廣
번화함이 오래도록 옛 시절과 다름없어라 / 繁華長與舊時同
세 번째〔其三〕
푸른 바닷빛은 우거진 평원으로 이어지고 / 蒼蒼海色際平蕪
십 리에 펼쳐진 인가는 도읍처럼 모였는데 / 十里人煙聚似都
하고많은 집 문 앞에 늘어선 버드나무에는 / 多少門前楊柳樹
대상인이 타고 온 제주마가 매여 있네 / 豪商來繫濟州駒
네 번째〔其四〕
물고기 잡는 이익은 관북이 으뜸이요 / 魚族利爲關北最
면화 실은 짐바리는 영남에서 많이 오네 / 綿花駄自嶠南多
때를 살펴 사 두었다 때에 따라 파노라니 / 乘時買取隨時賣
이익의 절반이 원산 부호가에 떨어지네 / 半是元山留富家
용산(龍山) : 서울의 용산을 가리킨다. 번암의 서울 집이 용산에 있었다
흉년이면 …… 구제하니 : 1737년(영조13)에 처음으로 함경도 덕원(德源) 원산(元山)에 교제창(交濟倉)을 설치하여 강원도와 경상도의 기근(饑饉)을 구제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교제창은 이후에 더 증설되어 1742년에는 함흥(咸興)과 이원(利原)에 설치되었고, 정조(正祖) 때에 이르러 북관(北關)의 각 읍에도 설치되었다. 《萬機要覽 財用6 諸倉》
북청 도중에〔北靑道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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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수가 흘러 사방으로 물결쳐 내려가니 / 隴水流離波四下
애절한 물소리가 철석강장도 끊을 듯하네 / 可能嗚咽斷剛腸
거센 바람 불어와 쌓인 눈을 연기처럼 흩날리고 / 急風挑雪似煙起
하늘 높이 길가 버들은 바다를 길게 가리고 섰네 / 行柳拂天遮海長
달은 밝고 밝은데 나그네는 집 돌아가는 꿈을 꾸고 / 客夢還家月皎皎
구름 아득히 흐르는데 검가 부르며 변방을 나서네 / 劍歌出塞雲茫茫
시중께서 세상을 떠난 뒤로 삼한이 미약해지니 / 侍中一去三韓弱
황극전 높은 곳에다 폐백 바치느라 바쁘구나 / 皇極殿高皮幣忙
농수(隴水) : 농수는 섬서성(陝西省) 농현(隴縣) 서북쪽에 있는 농산(隴山)에서 발원하는 물인데, 이 지역은 중국 서쪽 변경의 요해처이므로 흔히 변경 지방에 있는 하천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주-D
북청 도중에〔北靑道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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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수가 흘러 사방으로 물결쳐 내려가니 / 隴水流離波四下
애절한 물소리가 철석강장도 끊을 듯하네 / 可能嗚咽斷剛腸
거센 바람 불어와 쌓인 눈을 연기처럼 흩날리고 / 急風挑雪似煙起
하늘 높이 길가 버들은 바다를 길게 가리고 섰네 / 行柳拂天遮海長
달은 밝고 밝은데 나그네는 집 돌아가는 꿈을 꾸고 / 客夢還家月皎皎
구름 아득히 흐르는데 검가 부르며 변방을 나서네 / 劍歌出塞雲茫茫
시중께서 세상을 떠난 뒤로 삼한이 미약해지니 / 侍中一去三韓弱
황극전 높은 곳에다 폐백 바치느라 바쁘구나 / 皇極殿高皮幣忙
농수(隴水) : 농수는 섬서성(陝西省) 농현(隴縣) 서북쪽에 있는 농산(隴山)에서 발원하는 물인데, 이 지역은 중국 서쪽 변경의 요해처이므로 흔히 변경 지방에 있는 하천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시중(侍中)께서 …… 미약해지니 : 시중은 고려 중기 때의 문신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윤관(尹瓘, ?~1111)을 가리킨다. 1107년(예종2)에 17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 동북 지방에 출진(出鎭)하여 여진을 평정하고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공험진(公嶮鎭), 숭녕(崇寧), 통태(通泰), 진양(眞陽)의 9성을 쌓았다. 윤관의 사후에는 국위를 떨치지 못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황극전(皇極殿) : 명나라 궁궐의 전각(殿閣) 이름으로, 본명은 봉천전(奉天殿)이다. 여기서는 청나라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북청군은 산지가 많은 지형이나, 해안가를 따라서 좁은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다
부령에서 시험이 끝나 무산으로 향하다〔富寧試罷 向茂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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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판은 아득하고 농판의 나무 푸르른데 / 隴坂悠悠隴樹蒼
농두에서 말에게 물 먹이며 석양을 마주하였네 / 隴頭飮馬對斜陽
김공이 육진을 개척했던 공적 어찌 그리 위대한가 / 金公拓鎭功何壯
남상이 변방을 열었던 뜻이 또한 유장하도다 / 南相開邊意亦長
만 리에서 부는 바람은 영고탑을 진동하고 / 萬里風連靈塔動
천년 동안 쌓인 눈은 백두산을 누르누나 / 千年雪壓白頭荒
홀로 수고롭다고 감히 병든 몸을 핑계 대랴 / 賢勞敢說微軀病
칼 고리 손에 쥐고서 고향 생각을 말아야지 / 莫把刀環念故鄕
농판(隴坂) : 본래 섬서성(陝西省) 농현(隴縣) 서북쪽에 있는 산인 농산(隴山)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변경의 산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농두(隴頭) 또는 농수(隴首)라고도 한다.
김공(金公) : 조선 초기의 문신 김종서(金宗瑞, 1383~1453)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이다. 도총제(都摠制)를 지낸 김추(金錘)의 아들이다. 1405년(태종5)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 지평(持平), 집의(執義), 우부대언(右副代言) 등을 지냈다. 1433년(세종15)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가 되어 육진(六鎭)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하면서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켰고 북방의 경계와 수비를 7년 동안 맡았다. 좌의정으로 있던 1453년(단종1) 수양대군에 의하여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살해되어 계유정난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남상(南相) : 조선 전기의 무신 남이(南怡, 1441~1468)를 가리킨다.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1457년(세조3)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1467년 함경도 일대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대장으로서 난을 평정하여 적개 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이어 건주위(建州衛)의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할 때에 큰 공을 세워 공조 판서에 오르고 병조 판서가 되었다. 역모를 꾀한다는 유자광(柳子光)의 모함 때문에 처형당하였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영고탑(靈古塔) : 지명(地名)이다. 지금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송화강(松花江) 부근으로, 청나라의 발상지이다. 다른 이름으로 영고탑(寧古塔), 영고특(寧古特), 영고대(寧古臺) 등이 있다.
칼 고리 …… 말아야지 :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참겠다는 말이다. ‘칼 고리[刀環]’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비유한 것으로, 칼에 달린 고리인 환(環)이 돌아간다는 뜻인 환(還)과 음이 같으므로 취해서 쓴 것이다.
무산〔茂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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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을 찌르는 만 그루 나무 쭉쭉 뻗은 길 / 參霄萬木路脩脩
하늘 끝닿은 변방 영토 바깥의 고을 / 天盡輿圖以外州
달팽이 같은 골짝 집은 밭이랑을 나눠 섰고 / 峽屋似蝸分壠畒
관아는 사슴들과 숲 언덕을 함께 가졌네 / 官居與鹿共林丘
봄 강은 옛 그대로 나루까지 얼었는데 / 春江依舊氷連渡
맑은 날 무단히 부는 바람은 누대를 흔드누나 / 晴日無端風震樓
태평성대라 고기 먹는 자들 많기도 하건마는 / 聖代昇平多肉食
완항과 허항을 버려둔 실책이 가장 근심스러워라 / 緩虛遺策最堪愁
골짜기의 풍속은 자신들의 밭두둑에다 오두막을 지어 경작에 편리하도록 하므로 세 번째 구절에서 언급한 것이다. 완항(緩項)과 허항(虛項) 두 재〔嶺〕에 갑산(甲山)과 북청(北靑) 등지로 곧바로 통하는 길이 있으나, 산이 깊고 험준해서 살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수백 리 사이에 진보(鎭堡)를 설치하지 않아 버린 곳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낙구(落句)에 언급한 것이다.
고기 먹는 자들 : 지위가 높고 녹을 많이 받는 관리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10년 조에 “고기를 먹는 자들은 안목이 좁고 낮아서 원대한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肉食者鄙, 未能遠謀.]”라는 말이 나온다.
완항(緩項)과 허항(虛項) : 완항령(緩項嶺)과 허항령(虛項嶺)을 가리킨다. 완항령은 허항령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허항령은 지금의 양강도 삼지연군에 있는 고개로, 백두산과 북포태산의 사이에 있으며, 높이는 1401미터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지리전고(地理典故)〉에는 “백두산이 북쪽으로 뻗친 한 줄기가 두 강을 끼고 영고탑(寧古塔)이 되고, 남쪽으로 뻗어 나간 한 줄기가 조선 산맥의 맨 첫째가 된다. 산꼭대기에 있는 큰 못[池]으로부터 분수령이 되어 남쪽으로 내려간 것은 연지소봉(燕脂小峯), 백산(白山)이 되고 허항령, 보다회산(寶多會山), 완항령, 설령(雪嶺)이 된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쳐서 장백산이 되고, 한 줄기는 북쪽으로 달려 경성, 부령(富寧)을 지나 두만강을 끼고 동쪽으로 뻗어 경흥에서 그친다. 설령으로부터 남쪽으로 달려서 두리산(豆里山), 참두령(斬頭嶺)이 되며, 서쪽으로 꺾여 남쪽으로 가서 황토령(黃土嶺), 천수령(天守嶺), 조가령(趙可嶺), 후치령(厚致嶺)이 되고, 북쪽으로 꺾여 태백산이 되며, 그 중간에 뻗친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내려와서 함흥부가 된다.”라고 하였다.
영소당가〔永嘯堂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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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여진 족속이 살던 옛 소굴을 보지 못하였나 / 君不見女眞種落舊巢穴
백두산의 아래 큰 바다 삭막한 곳에 / 白山之下滄海瑟
우람한 말에 큰 활 들고 무력을 과시하며 / 高馬大弓誇力勢
우리 변경을 노략질하여 소굴로 삼았다네 / 攘我邊鄙作甌脫
강한 그놈들을 치는 일로 걸핏하면 소란 일고 / 撞搪倔强動成訌
조석으로 투항 배반 반복하니 섬멸키 어려웠네 / 朝降夕叛難劓滅
우리 영릉께서 신무하시어 / 恭惟英陵神且武
군대를 정돈하여 출동케 하시니 / 命將出師整部伍
군중의 대장이 누구이던가 / 借問軍中大將誰
김종서 공의 용맹이 고금에 으뜸이라 / 金公宗瑞勇冠古
여진이 투항하여 성덕에 귀순하니 / 女眞面縛歸聖德
요기가 제거되어 상서로운 해가 솟았네 / 掃除氛祲懸瑞旭
성대한 종성이라 절도사의 고을 / 磊落鍾城節度府
변경 오랑캐에게 위엄을 보이고자 / 要以威重示邊土
화려한 관사를 우뚝하게 건립하니 / 特起華館鬱穹崇
하늘같이 높은 좌탑이 가운데 차지했네 / 如天坐榻當其中
좌탑 뒤의 병풍에는 일월이 그려져 있고 / 榻後屛風畫日月
금권자 두른 참모들은 곰처럼 벌여 있었네 / 金圈將佐羅羆熊
만 마리 소를 구워 큰 쟁반에 쌓아 두고 / 萬牛作炙堆大盤
날마다 잔치 여니 의기가 웅장했지 / 日日開宴意氣雄
비단 적상포를 입고 편안히 앉아 / 赤霜錦袍坐晏如
먼 창공을 나는 화살을 웃으며 바라보았지 / 笑看飛鏃來遠空
여진은 무릎으로 기며 감히 못 쳐다보았거니 / 女眞膝行莫敢視
엄숙한 음성 우렁차서 화산 숭산과 나란했네 / 威聲赫赫齊華嵩
지금 공이 떠나신 지 삼백 년인데 / 秖今公死三百歲
여진은 떠나가서 중원의 황제가 되었네 / 女眞去作中原帝
해마다 폐백 올리는 걸 상책으로 삼으니 / 皮幣年年作上策
절도부엔 할 일 없어 그저 즐길 뿐이로다 / 節度無事但歡樂
나 역시 청유막으로 붓을 싣고 와서 / 我亦靑油載筆至
금 투구를 마지못해 서생 갓으로 바꾸었네 / 金兜强換書生幘
인재 키우느라 왕왕 백전을 개최하고 / 育才往往開白戰
무예 견주려고 때로 과녁 준비 명하노라 / 較藝時時命粉鵠
거나한 술자리에 기생이 가무를 올리거니 / 酒闌靑蛾獻歌舞
화당의 등불에는 무지갯빛 성대하네 / 華堂燭樹虹光矗
태평성대의 행락이 비록 즐겁다 하나 / 太平遨遊雖云樂
변경을 개척한 고인 업적을 생각지 않을쏘냐 / 得不慨念古人開邊績
아아 고인은 변경을 개척하였는데 / 嗚呼古人開邊
지금 사람들은 방비도 못 하거니 / 今人不綢繆
영소당이 흐린 비 오는 저녁에 쓸려 갈까 두렵구나 / 吾恐永嘯堂漂陰雨夕
영소당(永嘯堂) : 종성(鍾城)에 있던 관북 절도사(關北節度使) 행영(行營)의 대청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 김종서(金宗瑞)가 창건한 건물이라고 한다. 김종서(金宗瑞, 1383~1453)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이다. 도총제(都摠制)를 지낸 김추(金錘)의 아들이다. 1405년(태종5)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 지평(持平), 집의(執義), 우부대언(右副代言) 등을 지냈다. 1433년(세종15)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가 되어 육진(六鎭)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하면서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켰고 북방의 경계와 수비를 7년 동안 맡았다. 좌의정으로 있던 1453년(단종1) 수양대군에 의하여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살해되어 계유정난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영릉(英陵) : 조선 세종(世宗)의 능호이다.
적상포(赤霜袍) : 전설상 신선들이 입는다는 긴 도포이다.
청유막(靑油幕) : 장군의 막사이다. 청유라는 기름을 발랐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주-D005] 백전(白戰) :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영주 태수(潁州太守)로 있을 때에 빈객들과 시를 지으면서 처음 시도했던 것으로서, 눈[雪]에 대한 시를 지을 경우 눈과 관련이 있는 옥(玉), 월(月), 이(梨), 매(梅), 서(絮), 학(鶴), 아(鵝), 은(銀), 무(舞), 백(白) 등과 같은 어휘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다
지금 …… 두렵구나 : 지금 사람들이 외세의 침입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 〈치효(鴟鴞)〉에 “하늘에서 아직 장맛비가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다가 출입구를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면, 지금 너희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혹시라도 감히 우리 새들을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女下民, 或敢侮予?]” 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봄이 끝났는데도 무산 이북에는 빙설이 한창이었다. 부령을 지나며 길가에 꽃이 핀 것을 문득 보고 말 위에서 느낀 바를 읊었다. 이날은 바로 나의 생일이었다〔春盡 而茂山以北氷雪崢嶸 過富寧 忽見路傍花發 馬上感吟 是日卽余初度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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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은 희고 느릅은 말라 삭기에 움츠리니 / 草白楡枯朔氣嚬
육주에는 봄 다하도록 봄이 아니로다 / 六州春盡不成春
두견화는 홀연 어느 산의 빛을 보내는가 / 鵑花忽送何山色
말 머리에서 고향 사람을 상봉한 듯하여라 / 馬首如逢故國人
화이(華夷)의 풍기가 정녕 자별함을 알겠거니 / 夷夏定知風氣別
번화한 시절 이미 늦어 서울서 보던 풍경이네 / 繁華已晩洛城看
왕명 받든 여정이라 칼머리 생각 않건마는 / 王程不作刀頭念
생일이라 부모님 그리워서 마음이 상하누나 / 生日思親欲損神
나의 생일이었다 : 번암의 생일은 4월 6일이다.
육주(六州) : 세종 때 여진족(女眞族)이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김종서(金宗瑞)를 시켜서 두만강 가에 설치한 여섯 진으로, 경원(慶源), 경흥(慶興), 부령(富寧), 온성(穩城), 종성(鍾城), 회령(會寧)이다.
번화한 …… 풍경이네 : 번암이 서울을 떠날 때 보았던 봄 풍경을 부령에서는 4월에야 비로소 보게 된 것을 표현한 구절이다.
칼머리 생각 않건마는 :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칼머리[刀頭]는 칼머리에 달린 고리를 지칭한 것으로, 환(還) 자의 은어(隱語)로 쓰여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경성에서 등석을 맞이하여 통판을 이끌고 수성루에 올라 풍경을 조망하다가 이몽서를 생각하다〔鏡城遇燈夕 携通判登眺壽星樓 仍憶李夢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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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울대는 방초가 용성에 가득한데 / 迢迢芳草滿龍城
가절의 행락 속에 서울을 그리노라 / 佳節歡娛憶帝京
만 리 밖에서 등불 다는 풍속을 함께하니 / 萬里燈竿同習俗
이경 밤에 모래벌판이 비로소 밝아지네 / 二更沙磧始文明
불빛 속에 화각은 막 갠 하늘로 날아오르고 / 光中畫閣翔新霽
하늘 너머 수많은 별들은 태평 세상 비추누나 / 空外繁星照太平
서글퍼라 수주에는 병 많은 객이 있어 / 惆悵愁州多病客
그 역시 나와 함께 고향 그리는 마음일레 / 也應偕我望鄕情
등석(燈夕) : 일반적으로 정월 보름날 밤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사월 초파일을 말한다.
통판(通判) : 판관(判官)의 별칭이다.
수성루(壽星樓) : 경성(鏡城)에 있는 누대이다.
이몽서(李夢瑞) : 이헌경(李獻慶, 1719~1791)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몽서, 호는 간옹(艮翁), 초명은 성경(星慶)이다. 참판 이제화(李齊華)의 아들이다. 1743년(영조19) 문과에 합격하고, 정언, 지평, 수찬, 대사간 등의 관직을 역임한 뒤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집으로 《간옹집(艮翁集)》이 전한다. 번암과 문과에 같이 합격하였다.
용성(龍城) : 본래 경성(鏡城)과 부령(富寧) 사이에 있는 성(城)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경성의 별칭으로 쓰였다.
수주(愁州)에는 …… 있어 : 종성에 머물고 있는 이헌경을 가리킨다. 수주는 종성의 옛 이름이다.
마운령〔磨雲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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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허리에 못 미처 인적 벌써 끊어지고 / 未到峯腰已絶塵
태양은 굽이돌아 산봉우리 피해 가네 / 羲車迂轉避嶙峋
울창한 숲 속엔 정녕 천년설이 쌓였누나 / 陰森定有千年雪
구불구불 십 리 만에 사람 다시 마주쳤네 / 屈折還逢十里人
이 모두가 홍몽이요 인간세가 아닐진대 / 摠是鴻濛非世界
그 누가 붕새 깃을 나의 몸에 꽂았는고 / 誰令鵬翮揷吾身
하늘 끝 쌓인 기운이 잔뜩 음산해지더니 / 乾端積氣多成曀
바닷빛이 자욱하여 도무지 분명치 않네 / 海色紛綸苦未眞
마운령(磨雲嶺) :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과 단천군 부귀면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해발 416미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단천군(端川郡) 조에 “본군 남쪽 37리에 있다. 옛날에는 두을외대령(豆乙外大領)이라 일컬었다.”라고 하였다.
이 모두가 …… 꽂았는고 : 홍몽(鴻濛)은 우주가 형성되기 이전의 혼돈 상태를 뜻한다. 태고의 풍광을 간직한 마운령을 넘으며 날개 달린 신선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을 표현한 말이다.
▷ 해발 416미터 산에 천년설이 싸이는가?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하다
낙민루〔樂民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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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난 누각 형세 한바탕 푸르르고 / 名樓面勢一蒼然
누대 아래 수양버들엔 일만 가옥 연기 / 樓下垂楊萬戶煙
다리 위 먼 사람은 그림 속으로 통하는 듯 / 橋迥人如通畫裏
들판 너머 둥근 하늘 어디에서 그치는가 / 野圓天欲了何邊
번화한 북쪽 길엔 배와 수레 모여들고 / 繁華北路舟車會
성대한 남양에는 해와 달이 걸렸구나 / 蔥鬱南陽日月懸
강한의 풍류 계승할 자 그 누구인가 / 江漢風流誰繼者
떨어지는 꽃 앞에 외로운 객 앉아 있네 / 客來孤坐落花前
낙민루(樂民樓) : 함흥(咸興)에 있는 누각 이름으로, 선조(宣祖) 때 낙서(洛西) 장만(張晩, 1566~1629)이 세웠다. 신흠(申欽, 1566~1628)이 지은 〈낙민루기(樂民樓記)〉에 “함흥 성 남쪽에 예부터 낙민정(樂民亭)이 있었는데, 난리 통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공이 그 터를 넓혀 면모를 일신하고 아래에는 포루(砲樓)를, 위에는 연각(燕閣)을 각각 마련하였다.……누대 아래 다리가 있는데, 이름이 만세교(萬歲橋)이다. 뭇 시냇물이 그곳을 돌아 흘러 다리 아래에 펑퍼짐하게 고였는데, 사방이 5리쯤 되는 규모로 파도가 넘실대어 바라다보면 마치 큰물과도 같다. 그 다리 밖에는 들이 있는데, 평평한 평야가 멀리 이어져 있으며 한쪽 면은 바다에 닿아 있어 아무리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들 밖으로 산이 있는데, 모두가 북쪽에서 달려온 산들로서 험준하고 장엄한 게 하늘에 닿을 듯 치솟아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象村稿 卷22 樂民樓記, 韓國文集叢刊 72輯》
성대한 …… 걸렸구나 : 함흥이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선조가 살았던 고장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남양(南陽)은 후한(後漢)을 건국한 광무제(光武帝)의 고향이다. 후한 광무제의 가향(家鄕)인 남양 용릉(舂陵)의 지형을 술사(術士)인 소백아(蘇伯阿)가 살펴보고는 “상서로운 기운이 성대하게 일어난다.[佳氣哉! 鬱鬱蔥蔥然.]”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1 光武帝紀》
강한(江漢)의 풍류 : 강한은 중국 장강(長江)과 한수(漢水)의 부근 지역인 무창(武昌)을 가리킨다. 진(晉) 대의 재상 유량(庾亮)이 일찍이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어 무창에 있을 때 장강 가에 누각을 세우고 이를 남루(南樓)라 하였는데, 어느 가을날 밤에 달이 막 떠오르고 천기(天氣)가 아주 쾌청하자, 유량이 남루에 올라가서 그의 좌리(佐吏)인 은호(殷浩), 왕호지(王胡之) 등과 함께 시를 읊조리며 고상한 풍류를 만끽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73 庾亮列傳》
병산 관아로 달려가다 숭선 도중에 시를 읊다〔赴屛衙 崇善道中有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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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천 리를 행역하다 / 于役六千里
반년 만에 돌아가네 / 半年今始歸
푸른 산은 들 밖에서 끊어지고 / 靑山野外斷
외로운 주점은 빗속에 희미하네 / 孤店雨中微
벼슬살이에 단공의 계책 떠올리고 / 宦跡檀公策
고향 생각에 노래자 옷 입어 보네 / 鄕心萊子衣
백성을 걱정하며 밤잠을 설치나니 / 民憂夜失寐
가을 기장이 온전히 여물지 않았어라 / 秋黍未全肥
병산 …… 읊다 : 병산은 곧 비안(比安)으로, 번암의 부친 채응일(蔡膺一)이 1750년(영조26)부터 1754년 당시까지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숭선(崇善)은 조선 시대 숭선참(崇善站)이 있던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숭선 마을 인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는 번암이 북평사의 임무를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와 복명한 뒤 교리(校理)로 재직하고 있다가 7월경에 근친(覲親)을 위해 비안으로 내려가며 지은 것으로 보인다.
벼슬살이에 …… 떠올리고 : 단공(檀公)은 유송(劉宋) 때의 장군 단도제(檀道濟)로, 지략(智略)이 뛰어나서 고조(高祖)를 따라 북벌(北伐)할 때에 누차 공을 세웠다. 그가 만든 서른여섯 계책 중 마지막 계책인 삼십육계(三十六計)는 전세가 불리하면 달아나는 계책이다. 《南史 卷45 王敬則列傳》 이 구절은 벼슬자리에서 떠나고 싶은 심정을 표현한 말인 듯하다.
고향 …… 보네 :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말이다. 춘추 시대 초나라의 은사(隱士)인 노래자(老萊子)가 칠십의 나이에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피웠다는 고사가 있다.
번암집 제10권 / 시(詩)
대흥산성 노래〔大興山城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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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높은 대흥산 하늘에 닿을 듯한데 / 大興山高高接天
한나절을 오르고 올라 마침내 정상에 섰네 / 半日登登始登巓
많은 꿩들 춤추며 날아 산맥을 가르고 / 百雉翔舞裂山脈
둘러싼 구름 노을은 연이어 흐르네 / 包絡雲霞勢連延
명릉 시대 유 장군이 / 明陵之世柳將軍
손수 삽을 들고 사졸들의 앞장을 섰지 / 操鍤身爲士卒先
높이 나는 새조차 넘으려다 도로 떨어지는 곳 / 高鳥欲過還自墮
망루 가에서 별을 딸 수도 있을 듯하네 / 可以摘星樓櫓邊
하늘가 뭇 봉우리 모두 작은 주름이요 / 天端衆峯皆小皺
넓디넓은 먼 바다는 어찌 그리 푸른가 / 一泓遠海何蒼然
옛사람들 축성할 때 참으로 고심하였으리 / 古人築斯良苦心
내 와서 둘러보니 형세가 완벽하네 / 我來周覽體勢全
그 안은 천만 병사 수용할 만하고 / 其中可容千萬甲
서쪽 고을 연합하여 물자 조달도 가능하네 / 轉輸況有西郡聯
만 골짜기 시내는 늘 우렛소리를 내고 / 萬壑川奔常吼雷
천 그루 노목은 나이조차 알 수 없네 / 千章木老不知年
박연폭포 거센 물살과 만나는 곳이라 / 朴淵汹沸水會處
성가퀴엔 왕왕 용의 기운 서려 있네 / 粉堞往往龍氣纏
절 문이 높게 열려 우뚝하게 이웃하니 / 寺門高開欝相接
상방의 승려가 수백 수천에 가깝네 / 上方僧指幾百千
땔감과 물 넉넉하고 이처럼 험준하며 / 薪饒水積險如此
샛길은 몰래 청석령과 이어졌네 / 間路暗與靑石連
나라에서 성을 지킬 적임자를 보낸다면 / 國之守城如得人
치우가 있다 한들 어찌 감히 나서랴 / 縱有蚩尤那敢前
송경의 옥백과 자녀들이 / 松京玉帛與子女
시내를 막아 주는 제방처럼 다급할 때 의지할 수 있네 / 緩急恃如防制川
중군이 고건을 멘 채 길가에서 맞는데 / 中軍櫜鞬迎道左
너희는 병법서를 읽을 수 있느냐 / 汝輩能讀兵將編
시험 삼아 포수에게 대포를 쏘아 보게 하니 / 試令砲人放大砲
암벽 머리 메아리가 종이도 뚫을 듯하네 / 巖額應聲如紙穿
애석한 건, 이곳이 길목을 차단하는 요충이 아니라서 / 但恨地非當路塞
오랑캐 기마가 연기처럼 빠져나갈까 염려되네 / 恐敎胡騎走如煙
만약 한양이 포위되어 위급해지면 / 若使漢陽被圍急
이 성이 금성탕지처럼 견고한들 무슨 소용이리 / 此城安用金湯堅
대흥산성(大興山城) : 개성시 박연리에 있는 산성으로, 천마산(天磨山 762m), 성거산(聖居山) 등의 험준한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고려 때 축조되었다가 허물어진 것을, 1676년(숙종2)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다시 쌓았다. 성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한 줄기 시냇물이 박연폭포(朴淵瀑布)를 이룬다.
명릉(明陵) :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으로, 여기서는 숙종을 가리킨다.
유 장군(柳將軍) : 유혁연(柳赫然, 1616~1680)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회이(晦爾), 호는 야당(野堂)이다.
치우(蚩尤) : 황제(黃帝) 때의 제후(諸侯) 이름으로, 병란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상서(尙書)》 공안국(孔安國)의 전(傳)에서는 옛 구려국(九黎國)의 임금이라고 하였고, 《예기》 정현(鄭玄)의 주(注)에서는 삼묘(三苗)라고 하였으며, 응소(應邵)는 옛날의 천자(天子)라고 하여 그 설이 서로 다르다.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치우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황제가 제후들에게서 군사를 징발하여 치우와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하였는데, 탁록은 지금의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옛 지명이다.
번암집 제12권 / 시(詩)○관서록(關西錄)
강주를 출발하며 〈발진주〉 시의 운자를 사용하다〔發江州用發秦州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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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람은 몸이 편안하길 좋아하나 / 今人愛身逸
고인은 변방의 대책을 중시하였네 / 古人重邊謀
늙고 병든 몸 억지로 변방으로 나오니 / 衰病強出塞
이 나라 영토가 강주에서 끝이 나네 / 疆域盡江州
주민은 농사를 생업으로 삼는데 / 居民業畊鑿
건장한 아이는 방추에 지치네 / 健兒罷防秋
강의 근원은 큰 못에서 발원하니 / 江源大澤發
그 빛이 참으로 그윽하기도 하네 / 其色正幽幽
사군은 폐해져서 다스려지지 않는데 / 四郡廢不治
신령스러운 아삼(椏蔘)이 거친 들판에서 생산되네 / 靈椏産荒疇
이 물건은 귀신이 숨겨 둔 것인데 / 此物鬼神秘
집집마다 가혹한 할당에 괴로워하네 / 家家困誅求
다행스러운 건 나라에 근심거리가 없어 / 所幸國無恐
변경까지 수레와 배 통하는 걸세 / 關塞通車舟
처음에는 나랏일에 급급하였는데 / 始因急王事
마침내 대단한 유람을 실컷 하였네 / 遂得窮壯遊
오랑캐 산에는 흰 안개가 걸쳐 있고 / 胡山橫白霧
검푸르게 짙은 숲 속 나무들이 빽빽하네 / 慘慘林木稠
미인이 술잔을 따라 올리지만 / 美人進叵羅
변경의 근심은 해소할 길이 없네 / 未可解邊憂
한여름에도 기후가 이상하여 / 朱夏氣候異
얼음과 눈 눈부신 빛은 사라지지 않네 / 氷雪爛不收
주전에 정해진 일정이 있는지라 / 廚傳有程期
빗속에서도 머물러 있기 어렵네 / 天雨亦難留
우뚝하게 솟은 세검정 위에서 / 岧兀洗劍亭
자꾸만 멍하니 돌아보게 되네 / 惘然屢回頭
군악 울리며 번갈아 맞이하고 전송하니 / 笳角遞迎送
위수가 수레 앞에서 흘러가네 / 渭水車前流
산속 샛길이 저처럼 험하고 / 山蹊險如此
바위 형세는 천고에 떠 있는 듯하네 / 石勢千古浮
길이 생각하노니, 삼한의 강역에 / 永言三韓域
상서로운 기운이 영원히 가득하기를 / 休氣鬱悠悠
방추(防秋) : 외침을 방어하는 것이다. 옛날 중국 서북쪽의 유목 민족들은 왕왕 가을이 되어 말이 살찔 때가 되면 남침을 하였는데, 그것을 막기 위해 가을과 겨울 초기에는 병사를 2배로 하여 엄중하게 수비하는 것을 방추라고 하였다. 《舊唐書 陸贄列傳》 《詩經 小雅 采薇 朱子註》
아삼(椏蔘) : 평안북도 강계에서 나는 특산 인삼으로,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였으며, 주로 쪄서 말리는 숙삼(熟蔘)의 형태로 유통하였다.
주전(廚傳) : 주(廚)는 음식점인 주포(廚鋪)이고 전(傳)은 역마를 내주는 역전(驛傳)으로, 지방을 오가는 관원에게 경유하는 역참(驛站)에서 음식과 역마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세검정(洗劍亭) : 정자 이름으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갑진년(1664, 현종5) 8월 5일에 세검정에 오르다[甲辰仲秋初五日登洗劍亭]〉라는 시의 자주(自註)에 “인차외(仁遮外) 보루(堡壘)의 동쪽에 바위가 우뚝 서 있는데, 구름의 파도 속에 반쯤 들어가 있는 모습이 지주(砥柱)를 연상케 한다. 민간에서는 이 바위를 오지암(烏知巖)이라고 부른다. 만호(萬戶) 경가행(景可行)이 이 바위 위에 작은 정자를 짓고는 나에게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기에 내가 ‘세검’이라고 명명하였다.”라고 하였다. 《孤山遺稿 卷1》
위수(渭水) : 평안북도 영변 지역의 옛 지명이다.
아이진 초산에 있다. 에서 〈철당협〉 시의 운자를 사용하다〔阿耳鎭 在楚山 用鐵堂峽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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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한 절벽이 사방에서 둘러싸니 / 傑壁四環拱
그 위로는 나는 새조차 끊어졌네 / 其上飛鳥絶
그림을 새긴 듯 정상에는 구름이 떠 있고 / 刻畫浮雲頂
견고한 성은 백금을 녹인 듯하네 / 堅城鎔白鐵
큰 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있어서 / 大江束成襟
화이의 지맥이 그로 인해 나뉘었네 / 華夷地脈裂
백성들의 힘으로 가는 길을 내느라 / 民力刱線路
사월에 얼어 있는 눈을 깎아 내네 / 四月斲氷雪
변경의 요새가 비로소 생기니 / 關防始有得
성을 순시하며 얼굴이 밝아지네 / 徇譙我顔悅
수항루를 이고 있는 저 표암은 / 標巖戴受降
만고토록 서서 꺾이지 않으리라 / 萬古立不折
병사와 식량을 넉넉하게만 한다면 / 但使兵食足
흉적을 멸하는 일 무에 그리 어려우랴 / 何有攙搶滅
소매 속의 〈손오전〉을 읽고 있자니 / 袖中孫吳傳
몸속의 피가 오래도록 뜨거워지네 / 腔血長時熱
수항루 아이에 있다. 에서 〈법경사〉 시의 운자를 사용하다〔受降樓 在阿耳 用法鏡寺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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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 장의 바위를 깎자면 / 斲此萬丈巖
귀신의 솜씨로도 정말 고생 많았으리 / 鬼斧良亦苦
동건강이 그 아래를 물고 있으니 / 童巾嚙其根
드넓은 기세는 영원토록 흐르리라 / 灝氣流終古
외로운 정자 홀로 정상에 서 있으니 / 孤亭特據頂
구름과 안개가 날아드는 곳이네 / 雲霏所翔聚
올라갈 때 내 머리카락이 곤두서니 / 登陟凜我髮
어제의 밤비로 돌층계가 미끄러워서라네 / 磴滑前宵雨
푸른 하늘이 요동의 들판을 덮었는데 / 靑天蓋遼野
바람과 물이 가렸다 드러냈다 하네 / 風水互呑吐
굽어보니 온통 아스라한데 / 俯視一茫然
오랑캐 산을 어찌 셀 수 있으랴 / 胡山那得數
사냥 불은 낮에도 꺼지지 않으니 / 獵火晝不息
오랑캐 기마가 매우 분주하네 / 胡騎太旁午
어떻게 하면 마음속 울분을 씻고 / 何以洗碨磊
평상에 앉아 봄 술을 마시리오 / 據床春酒取
마랑동 창주 건너편 벼랑에 있다. 에서 〈비선각〉 시의 운자를 사용하다〔馬郞洞 在昌洲隔岸 用飛仙閣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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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칸은 뜻이 커서 / 淸汗意想大
구정을 하나의 털처럼 여겼네 / 九鼎視一毫
마랑동의 길은 달빛이 캄캄할 때였는데 / 月黑馬郞道
군대의 기율은 한밤중에도 견고하였네 / 師律中夜牢
하늘이 또 압록강을 얼게 만드니 / 天又鴨江氷
밟아 대도 작은 물결조차 일지 않네 / 蹴踏無纖濤
만 마리의 말이 귀신처럼 빠르니 / 萬馬如鬼速
질풍같이 달려도 시끄러운 소리 없네 / 肅肅無喧號
사흘 만에 서울 도성까지 다다랐으나 / 三日薄京都
남한산성은 광활하고도 높았네 / 南漢空復高
그러나 용렬한 방어사가 / 區區防禦使
견고하게 만들려고 노력이나 했으랴 / 補牢無乃勞
변방의 그물은 부디 소홀히 하지 말지니 / 邊網愼勿疎
창귀는 도망친 죄수들 중에 있었네 / 倀鬼在逋逃
유독 장군의 비석이 남아 있어 / 獨有將軍碑
시원스레 우리들을 일깨워 주네 / 磊落起吾曹
비선각(飛仙閣) : 당나라 두보의 시이다.
청(淸)나라 칸 : 청나라의 태종을 가리킨다. 병자년(1636)인 인조 14년 12월 1일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군 2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구정(九鼎) : 하(夏)나라 우(禹) 임금이 구주(九州)의 쇠를 거두어 만들었다는 솥이다. 후세에는 천하, 국가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인식되었는데, 여기서는 중국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창귀(倀鬼) :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혼(魂)으로,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호랑이가 먹이를 사냥하러 다닐 때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한다. 못된 짓을 하는 데 앞장서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호란 때 청나라 군대의 길 안내자 역할을 했던 정명수(鄭命壽), 한윤(韓潤)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봉현 의주에 있다. 에서 당나라 시인의 운자를 사용하다〔蜂峴 在義州 用唐人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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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 여섯 군의 성을 두루 다녀 보니 / 歷遍沿河六郡城
이천 리 노정에 온통 해당화가 만발했네 / 棠花開盡二千程
함께 흘러온 압록강은 언제나 다하랴 / 同來鴨水何時了
끝없는 기쁨이 의주에서 모처럼 생겨나네 / 失喜龍灣特地生
대장군을 맞이하며 쇠북이 울리는데 / 迎接元戎金鼓振
옆쪽의 위도에는 오색구름이 선명하네 / 橫臨威島彩雲明
오랑캐들이 자꾸 오늘 밤 꿈을 깨우리니 / 胡兒易警今宵夢
사막 북쪽에서 먼저 큰 사냥 소리 들려오네 / 漠北先飛大獵聲
번암집 제13권 / 시(詩)○함인록 상(含忍錄上)
박제가의 시에 차운하다〔次朴齊家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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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성이 북방 들판에 펼쳐지니 / 灣府城臨朔野開
백두산 천 리를 큰 강이 감도네 / 白山千里大江廻
대궐에서 평안하단 소식을 전하러 / 玉樓高處平安報
삼 일 동안 먼지 날리며 파발마가 도착했네 / 三日紅塵撥騎來
압록강을 건너며. 부윤이 조장을 설치하고, 강가로 전별하러 나왔다. 즉석에서 앞의 시에 차운하여 주다〔渡鴨綠江府尹設祖帳出餞江頭卽席次前韻以贈〕 4월 12일 임인. 맑음. 강을 건너 금석산(金石山)에서 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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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닿을 듯 조장이 성 곁에 펼쳐지니 / 連雲祖帳傍城開
사막의 거센 바람이 종일토록 휘감아 도네 / 磧外長風盡日廻
신하는 동분서주하여 험지를 가리지 않으니 / 臣子東西無險易
강물이 설산에서 오는 것을 웃으며 보네 / 笑看江勢雪山來
조장(祖帳) : 먼길 가는 사람을 전별하기 위해 교외의 길가에 설치하는 장막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런 술자리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구요동의 백탑에서〔舊遼東白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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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형세는 어디에서 솟은 것인가 / 塔勢從何湧
십 리 밖에서도 우뚝하게 보이네 / 十里見突兀
지축이 참으로 힘이 있어 / 地軸儘有力
이 탑을 싣고도 세월을 견뎠네 / 載此安歲月
아스라한 저 하늘 속으로 / 茫然一氣外
조금의 굴곡 없이 곧게 솟았네 / 直起無暫屈
층마다 각각 처마를 둘렀고 / 層層各回簷
풍경이 빽빽하게 마주하였네 / 金鐸森相向
팔면에 정교하게 그림을 새겼으니 / 八面巧刻畫
천억이나 되는 여래상이라네 / 千億如來像
성난 독수리가 날아올라 보지만 / 怒鵰翻身起
반쯤 가서도 여전히 다 못 올랐네 / 及半還仰望
울지가 이곳을 처음 만들어 / 尉遲能肇此
웅장하게 넓은 요동 벌판을 누르고 섰네 / 雄鎭遼野曠
명나라 말기에 해체하여 중수를 하니 / 明季解重修
원수가 자못 힘을 쏟았다네 / 袁帥頗力量
물건이 오래되면 반드시 신령함이 있으니 / 物久必有神
마음이 슬퍼지지 않을 수 있으랴 / 能不意悽愴
주나라의 아홉 개 솥처럼 / 不及周九鼎
날아가 사수에 장사 지낼 일은 없으리 / 飛向泗水葬
울지(尉遲) : 처음 백탑을 건축했다고 전해지는 울지공(尉遲恭)을 가리킨다. 당(唐)나라 선양(善陽) 사람으로, 자는 경덕(敬德)이다. 수(隋)나라 말에 당나라에 귀화하였고, 진왕(秦王) 때 등용되어 우부참군(右府參軍)으로 큰 공을 세웠으며, 고구려를 침략한 적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원수(袁帥) : 명나라 말기의 장수인 원숭환(袁崇煥)을 가리키는 듯하다.
주(周)나라의 …… 없으리 :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 52년에 서주(西周)를 공격하여 보물인 아홉 개의 솥을 탈취하였는데, 하나는 도중에 사수(泗水)에 빠져 버렸다고 한다. 그 뒤에 진 시황(秦始皇)이 사수의 주정(周鼎)을 꺼내려고 1000인을 동원해서 물속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史記 秦始皇本紀, 封禪書》
큰 바람에 대황기보로 들어가 부사, 서장관과 더불어 길가의 불감에서 기숙하였다. 밤에 긴 노래를 지어서 번민을 풀다〔大風投大黃旗堡與副使書狀寄宿路傍佛龕夜草長歌遣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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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아침 동안 요동의 들판을 보고 / 三朝見遼野
삼일 저녁 동안 요동의 들판을 보네 / 三暮見遼野
요동 들판은 언제나 끝날 것인가 / 遼野何時盡
힘들도다, 삼한의 늙은 사신은 / 艱哉三韓老使者
천지의 구멍이 이곳에서 크니 / 天地之竅此爲大
풍백이 노하는 권병을 잡았네 / 風伯吼怒權柄把
형세는 마치 거록 아래의 강한 초나라가 / 勢如強楚鉅鹿下
함성을 한번 지르자 만마가 내달리는 것과 같네 / 呼聲一振騰萬馬
천지가 캄캄하여 열렸다 닫혔다 하니 / 乾坤黯淡開復合
해가 움직여 햇무리가 살짝 붉어지네 / 日車轉動暈微赭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발해의 파도를 솟구치게 하여 / 直恐簸捲渤海濤
동으로 서로 중국을 공격하는 것이네 / 無東無西豗中夏
천 장 먼지 일어 파편이 날리는 듯하고 / 千尋塵起學屑颺
만곡의 어두운 모래바람은 비가 오는 듯하네 / 萬斛沙冥如雨灑
사신 수레 문을 닫지만 어찌 버티랴 / 輶軒閉戶那得拒
틈마다 날아들어 분분하게 쏟아 대네 / 隙隙飛入紛相瀉
옷 위에 한 자나 쌓인 건 둘째치고 / 衣上無論厚一尺
두발을 끈적이게 하고 발이 잠기게 하네 / 或黏頭髮或屯髁
길가의 수양버들 천만 그루는 / 夾路楊柳千萬株
가지끼리 어지러이 마구 때려 대네 / 枝枝歷亂不勝打
행인들 가까이 모여 서로의 몸을 막아 주고 / 行旅隔手還遁形
새와 짐승 들은 숨죽인 채 모두 벙어리가 되었네 / 鳥獸屛息皆成啞
노부가 안 다녀 본 곳 없는데 / 老夫非無四方役
이런 바람은 본 적이 드물다네 / 風頭如此見曾寡
마부가 고삐 잡고 세 번 탄식을 하니 / 僕夫攬轡三歎息
산천이 흐릿하여 상하를 구분하기 어렵네 / 川原澒洞迷上下
구르고 넘어지며 눈을 더욱 뜰 수가 없으니 / 十顚九仆眼益眯
초저녁에 소경처럼 촌사를 찾아가네 / 薄暮盲進尋村舍
촌사는 퇴락하여 머무를 수 없는데 / 村舍離披不可住
곁에 기와를 인 작은 불감이 있네 / 傍有小龕覆以瓦
이불 안고 일단 금선에서 묵는데 / 携衾且就金仙宿
붓을 잡고 나직이 읊자니 외로운 촛불이 다 닳아 가네 / 把筆微吟孤燭灺
불감(佛龕) : 부처를 모신 작은 암자를 가리킨다.
천지의 구멍 : 바람의 근원을 말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남곽자기(南郭子綦)가 안성자유(顔成子游)에게 묻기를 “자네는 인뢰(人籟)는 들었더라도 지뢰는 못 들었을 것이요, 지뢰(地籟)는 들었더라도 천뢰(天籟)는 아직 못 들었을 것이다.……대저 대지가 기운을 불어내는 것을 바람이라 하는데, 이것이 일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었다 하면 오만 구멍이 성난 듯이 부르짖는데, 그대는 유독 그 윙윙대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는가?”라고 하였다. 인뢰는 사람이 울리는 소리로 악기의 소리이고, 지뢰는 대지가 일으키는 소리로 바람 소리이고, 천뢰는 인뢰와 지뢰의 근본이 되는 대자연의 소리이다.
거록(鉅鹿) …… 초(楚)나라 : 거록은 초나라 항우(項羽)가 진(秦)나라 군대를 대파한 곳으로,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평향현(平鄕縣)에 있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제후가 군대를 이끌고 거록을 구하기 위해 내려온 자들이 10여 보루(堡壘)나 있었지만 감히 군대를 풀어 출전하지 못하다가, 급기야 초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공격하자 제장이 모두 성벽 위에서 구경하였다.[諸侯軍救鉅鹿下者, 十餘壁, 莫敢縱兵, 及楚擊秦, 諸將皆從壁上觀.]”라는 말이 나온다.
도중에 또 큰 바람을 만나다〔路中又遇大風〕 계해(5월 4일). 큰 바람이 붊. 동관역(東關驛)에서 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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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바람도 심히 지루하더니 / 昨日之風太支離
오늘의 바람은 또 어째서인가 / 今日之風又何爲
압록강 건너온 뒤 스무 날 동안 / 鴨水以北二十日
날마다 괴로이 바람에게 희롱당했네 / 日日苦爲風所欺
발해가 십 리도 안 되는 앞에 있으니 / 渤海在前無十里
어찌 바람이 이렇지 않을 수 있으랴 / 安得風來不如此
천천히 가려 하면 내 눈을 뜰 수 없고 / 欲徐我眼眯
빨리 가려 하면 내 말이 넘어지네 / 欲疾我馬顚
사방 모래바람에 말은 어둠 속을 걷는 셈이라 / 我馬冥行沙四起
채찍질해도 나아가지 않으니 또한 가련하네 / 鞭之不前亦可憐
어찌하면 저 하늘의 고니가 되어 / 那由化爲冥冥鵠
몸에 날개 달고 푸른 하늘을 날아 볼까 / 身揷羽翼橫靑天
고려보〔高麗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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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모습이 분명하게 조선과 같으니 / 村容的的是朝鮮
울타리 밖에는 푸른 모를 논에다 심었네 / 籬外靑秧揷水田
근본을 잊은 우민(愚民)들을 탓할 것이 있으랴 / 忘本蚩氓何足較
수레를 멈추고 절로 생각에 잠기게 되네 / 停車吾自一依然
고려보의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신을 만날 때면 술과 음식을 차려서 수행하는 사람들을 대접했다. 근래에 수행하는 무리들이 모욕을 주고 토색질을 하는 것을 괴롭게 여겨 모두 자신들은 고려족이 아니라고 칭하였다. 불러서 물어보니 과연 그러하였으므로, 한 차례 쓴웃음을 지었다.
십삼산〔十三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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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길이 갈 때처럼 힘들지 않은 것은 / 來時不似去時艱
여름 끝에 바람이 좀 시원해진 때문일 터 / 朱夏涼風灑客顔
이곳은 긴 노정의 반이 되는 지점이라 / 此地恰爲中半路
오늘 아침 십삼산에 도착한 걸 기뻐했지 / 今朝喜到十三山
들판 가득 기장과 접시꽃이 보루 덮고 / 郊平黍薥迷秦壘
해가 지자 사막 먼지 관문을 덮었어라 / 日落沙塵失漢關
관례대로 글을 써서 역마를 재촉하고 / 隨例發書催馹騎
사람을 나는 듯이 용만으로 가게 하네 / 敎人飛走渡龍灣
함인록(含忍錄) : 1778년(정조2) 청(淸)나라 황제가 동지사(冬至使) 주문(奏文)의 구절을 문제 삼자, 번암은 이를 해명하기 위해 사은 겸 진주 정사(謝恩兼陳奏正使)로서 북경에 파견되었다. 3월 17일 출발하여 5월 15일 북경에 당도하였고, 임무를 마치고 6월 16일 귀국길에 올라 7월 2일 복명(復命)하였다. 이때 왕복하는 사이에 지은 시 236수를 날짜별로 묶은 것이 〈함인록〉이다. 상권(上卷)에는 한양을 출발하여 북경에 도착하여 머무는 기간 동안의 작품이, 하권(下卷)에는 북경을 출발하여 조선으로 돌아와 복명하기까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함인(含忍)’이란 송(宋)나라가 금(金)과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었을 때 주희(朱熹)가 한 말로, “원통함을 머금고 애통함을 누른 채 어쩔 수 없이 때를 기다린다.[含怨忍痛迫不得已]”라는 뜻이다. 《晦庵集 卷24 與陳侍郞書》
관례대로 …… 하네 : 국경이 가까워짐에 따라 사행에 관한 소식을 압록강 건너편 의주(義州)로 보내어 조정에 보고하게 하였다는 말이다. 용만(龍灣)은 평안도 의주의 별칭이다.
곳곳의 평원에는 목축하는 가축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수가 거의 수천에 이르니 또한 장관이라고 할 만하다〔處處平原牧畜成群其蹄殆可以萬千數亦盛觀也〕 경신(윤6월 2일). 맑음. 소흑산(小黑山)에서 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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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의 물과 풀이 목지로 적합하니 / 平原水草綠相宜
양과 말과 소와 나귀 풀을 뜯게 풀어놓네 / 羊馬牛驢任所之
모일 때는 흰 구름이 잠깐 사이 합쳐지듯 / 屯處陣雲俄合沓
흩어질 땐 문채 있는 비단 문득 펄럭이듯 / 散來文錦忽離披
저녁 무렵 채찍 들고 휘파람을 한번 불면 / 鞭頭一嘯乘將暮
일천 마리 무리지어 저절로 모여드네 / 彀裏千群會不期
죽은 뒤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전사 되면 / 盡化有生爲戰士
군율을 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으련만 / 更敎師律及無知
일판문은 진창으로 악명이 높아 여태까지 우리나라 사신들이 낭패를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은 진창이 마르고 길이 평평하여 노정이 순탄하므로 기쁨을 시에 드러내다〔一板門以泥濘名前後我使至者未始不狼狽今泥乾路平行李萬順喜見于詩〕 신유(윤6월 3일). 맑음. 백기보(白旗堡)에서 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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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 같은 달빛 아래 맑은 경치 스치는데 / 白道如波霽景翻
경쾌하게 말달리니 자국조차 남지 않네 / 輕蹄飛度不成痕
수레 앞의 노복들이 서로서로 축하하니 / 車前徒御爭相賀
일판문의 온갖 위험 사라졌기 때문이네 / 百險全消一板門
백기보에서 벽화를 읊다〔白旗堡詠壁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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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머리에 가벼운 옷 모든 면이 새로운데 / 高髻輕衫百態新
뜰 앞에는 백두구(白荳蔲)가 봄기운을 머금었네 / 階前荳蔻嫰含春
안타깝게 그 당시 명나라의 제도가 / 可憐當日中華制
깊은 규방 여인들의 복식에만 남았구나 / 都在深閨楚楚身
청나라 법제에 부인들에게만 중국의 의복 제도를 허용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치도탄〔治道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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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제가 능 행차를 가을로 정해 두어 / 淸帝謁陵秋以期
자그마치 석 달이나 길 닦는 데 동원되어 / 治道直從三月爲
젊은이건 늙은이건 삼태기와 호미 들고 / 少者持鋤老者畚
비 오듯이 땀을 뚝뚝 흘리면서 일을 하네 / 揮汗却如雨淋漓
사람들이 통행하는 탄탄대로 버려두고 / 捨却行旅九軌道
논과 밭을 곧게 갈라 그 사이로 길을 내되 / 直割田疇開通逵
중간은 조금 넓고 양쪽 가는 조금 좁게 / 中央差闊兩畔殺
세 길을 가지런히 직선으로 조성하네 / 三路有條無逶迤
수레로 다른 곳의 흙 실어다 위에 덮고 / 車輸客土潤色之
나귀로 굴대 굴려 단단하게 다지니 / 驢曳碌碡磨以治
연경에서 심양까지 이천 리나 되는데도 / 燕京去瀋二千里
곧게 뻗은 도로가 진나라 때와 같네 / 直道無減嬴秦時
비가 와서 무너지면 다시 길을 정비하니 / 天雨輒壞壞復除
이 일은 아무래도 옳지 않다 생각되네 / 此擧竊恐非事宜
심양부가 동원령을 너무 일찍 내렸기에 / 瀋府之令太云豫
관내는 편하지만 관외에선 탄식하네 / 關內晏如關外咨
날개 펼친 새와 같은 행궁을 따로 짓고 / 別起行殿學飛翬
다리를 만들어서 돌사자를 설치하니 / 更修橋梁蹲石獅
동원된 농민들이 농사지을 틈이 없어 / 農民未暇西疇事
서직은 못 자라고 남가새만 무성하네 / 黍稷不生生蒺藜
예전에 청나라는 간편함을 숭상하여 / 昔聞胡制尙簡便
백성들이 왕이 와도 몰랐다고 들었는데 / 萬乘雖至民不知
지금 와서 목격한 건 들은 말과 다르니 / 今者目擊異耳聞
국운이 쇠한 것을 미루어 알겠구나 / 衰運可以三隅推
나의 말은 틀림없이 직접 와서 본 것인바 / 我言端知驗在邇
민속을 채집하여 우선 시를 지어 보네 / 爲備採風聊作詩
밤에 앉아서 서장관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다〔夜坐待書狀行至〕 갑자(윤6월 6일). 맑음. 십리보(十里堡)에서 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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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를 탔지마는 / 我乘轎
그댄 수레 타고 오니 / 君乘車
교는 말에 싣는 거라 건널 수가 있었으나 / 轎載馬尙可渡
수레는 진창 속에 빠졌으니 어찌하랴 / 車轂陷泥將何如
요동 들은 쟁반 같아 물이 빠질 길이 없어 / 遼野如盤水不洩
조금만 비가 와도 곳곳이 다 웅덩이네 / 小雨處處皆成瀦
나는 이미 촌 여관에 도착하여 쉬고 나서 / 我馬已尋村店歇
밥을 먹고 옷을 벗고 두 다리를 폈건마는 / 飯罷解衣舒兩膝
가느다란 상현달이 넘어가려 하는데도 / 上弦微月沒不遲
밤 깊도록 그대는 오지를 않는구려 / 君不來兮夜何其
그대 오길 기다리니 어찌 멀리 있으랴만 / 待君來豈其遠
들판을 빙 도느라 굶주릴 게 걱정이네 / 但念中野倭遲載渴
유주의 노래〔幽州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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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其二〕
가죽신에 짧은 상의 모두가 군장이요 / 輕靴短服摠軍裝
땋은 머리 한 가닥이 뒤통수에 달렸어라 / 辮髮單條頂後揚
적적한 유생의 관 어디에 쓰겠는가 / 寂寂儒冠安用是
만나는 사람마다 무령왕을 얘기하네 / 逢人每說武靈王
세 번째〔其三〕
준마를 채찍질해 골짜기를 벗어나니 / 駿馬鳴鞭出狹斜
어디보다 번화한 심양성의 시가지네 / 瀋陽城市最繁華
붉은 모자 꾸미는 데 아낌없이 돈을 들여 / 天銀不惜紅兜飾
귀한 실을 사서 붙여 남들에게 과시하네 / 自買珍絲向客誇
여섯 번째〔其六〕
천금으로 말을 사고 백금으로 개를 사니 / 千金買馬百金獒
세상에 이 정도로 호사하는 이 없을 터 / 人世無如此事豪
토끼 노루 끝까지 추격하여 피 마시며 / 窮逐兔獐仍飮血
누린내가 몸에 배도 상관하지 않도다 / 不關身上染腥臊
여덟 번째〔其八〕
조선의 변방 장수 모두가 애송이라 / 朝鮮邊帥摠嬰孩
붉은 모자 눈에 띄면 사색이 되곤 하네 / 乍見紅兜色死灰
폐사군에 들어가서 인삼을 몰래 캐선 / 採得人蔘廢四郡
배를 타고 취해서 압록강을 건너오네 / 乘舟醉過鴨江回
적적한 …… 얘기하네 : 무령왕(武靈王)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 왕이다. 북방 민족의 복식을 채택하고 백성들에게 말타기와 활쏘기를 가르쳐 주변 지역을 복속시켜 기세를 크게 떨쳤다. 《史記 趙世家》 여기서는 사람들이 유학은 도외시하고 모두 무력과 용맹만을 숭상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폐사군(廢四郡) : 세종 때 압록강 상류 지역에 설치했던 여연(閭延),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의 네 군이다. 세종은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 네 군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켰지만, 지속적인 방비가 어렵다는 이유로 1455년(단종3)과 1459년(세조5) 두 차례에 걸쳐 폐지를 결정하였다. 이후 오랫동안 ‘폐사군’이라 불리며 주민들의 거주가 금지되었다.
저녁 무렵 요동의 여관에 도착하다〔暮抵遼東店〕 을축(윤6월 7일). 맑음. 요동촌(遼東村)에서 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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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끝나고 밝은 강에 석양빛이 퍼지는데 / 野盡河明夕照開
요동성 성 밖에서 쇠뿔 피리 재촉하네 / 遼東城外角聲催
구름 보고 산 가까이 왔다는 걸 알았더니 / 雲容漸覺蒼山近
마을보다 하얀 탑이 눈에 먼저 들어오네 / 村勢先知白塔來
말이 지쳐 낭자에서 묵을 계획 틀어지고 / 馬倦判違狼子宿
하늘 멀어 고향 집의 서신 받지 못하누나 / 天長不許雁書回
조선에 변방 신하 있다고 말할쏜가 / 吾東可說邊臣在
폐군의 목재를 다 제창으로 실어 가니 / 帝廠恭輸廢郡材
처음에는 낭자하(狼子河)에서 묵으려 하였는데 계획이 어긋났으므로 제5구에서 언급하였다. 청나라 황제가 직접 목창(木廠)을 설치하였는데, 그 일을 맡은 자가 멋대로 우리나라 폐사군(廢四郡)의 목재를 베어 요동의 강변에다 쌓아 두었다가 한창 뗏목을 만들어 연경으로 운송하였기 때문에 제7구와 제8구에서 언급하였다.
번암집 제33권 / 서(序)
백두산을 유람하러 가는 진택 신문초 광하 를 전송하며 지은 서문〔送震澤申文初 光河 遊白頭山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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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今上) 7년(1783, 정조7) 여름에 진택(震澤) 신문초(申文初)가 말 한 마리와 종 하나를 거느리고 호서(湖西)에서 경사(京師)로 들어와 며칠 머무르다가 북쪽 변경 수천 리로 나간다. 그의 뜻은 백두산 꼭대기에 있다. 듣자니, 백두산은 오랑캐와 중화(中華)의 경계에 걸쳐 있는데, 그 높은 봉우리는 하늘 끝까지 치솟았고 5월에야 얼음이 비로소 녹으며 7, 8월이면 많은 눈이 내린다. 그런 까닭에 초목이 번성하지 못하고 짐승도 살지 않는데, 더구나 사람의 자취이겠는가. 정상에는 큰 못이 있어 비록 천하의 기이한 경치라 불리지만, 깊고 시꺼먼 물이 일렁이며 끓어오르니 혼령도 두려워서 감히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사람이 이르면 문득 뇌우(雷雨)가 일어나 사람을 몰아 끌어내거나 고함쳐 쫓아내듯이 한다. 나는 문초의 유람이 허명(虛名)을 좇은 나머지 실질적인 얻음이 없을까 걱정스럽다. 비록 그렇지만 문초는 문장을 짓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근본을 탐색하여 근원에 다다르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으니, 이번 유람을 통해 문초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번암집 제34권 / 기(記)
현경정에 대한 기문〔懸鏡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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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今上) 6년(1782, 정조6) 봄 1월에 내가 대사마(大司馬)로 있다가 군소(群小)들의 무함에 걸려 창졸간에 도성 문을 나섰는데, 갈 곳이 없었다. 마포(麻浦)의 김생(金生)이 자신이 사는 하목정(霞鶩亭)을 소제(掃除)하고서 나를 맞이하였으니, 매우 후의를 베풀어 준 것이었다. 하목정은 화령(花嶺)의 이마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화령의 형세를 헤아려 보면 정자는 5분의 4지점을 점유한 것이다. 앞면이 확 트이고 조망이 상쾌한 것으로 말하자면 마포의 수천 가호 가운데 거의 최고의 지위를 양보하지 않을 듯하다. 나는 기쁘고 마음에 흡족하여 곤경을 겪으며 사방을 떠도는 고통을 알지 못하였다. 정자의 이름은 비록 왕자안(王子安)의 글에서 나왔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의의를 찾아볼 수 없기에 나는 마침내 ‘현경정(懸鏡亭)’이라고 편액을 고쳤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풀이하였다.
“정자의 이름이 이러한 것도 있군요. 정자의 언덕을 감싸고 흘러가는 물이 밤섬[栗島]을 만나면, 밤섬의 기슭이 살짝 물살을 막습니다. 물은 조금 둘러서 오른쪽으로 흐르니, 마치 싫어서 피하는 것 같지요. 얼마 흘러가지 않아 잠애(蠶崖)가 사납게 그 머리를 치켜들고는 돌연 달려들어 물살을 희롱하니, 마치 흘러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합니다. 물은 부득이 굽어 다시 왼쪽으로 흘러갑니다. 그 장애를 탈출한 뒤에 치달려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지요. 이 정자에서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형세는 거의 멀리 10리까지 미칩니다. 매번 바람이 고요하고 파도가 잔잔할 때면 상선(商船)과 어선(漁船)이 종횡으로 오르내리는데, 그 그림자가 역력히 거꾸로 비치니, 마치 사물의 미추(美醜)가 거울을 마주해 달아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만어정에 대한 기문〔晩漁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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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우(老友) 권중범(權仲範)이 하루는 종남산(終南山) 집을 떠나 처자식을 이끌고 마포(麻浦) 강가로 나가 살면서 ‘만어정(晩漁亭)’이라고 정자의 편액을 내걸고 그대로 자신의 호로 삼았다. 때때로 도성에 들어와 나를 방문하여 만어정의 정취를 잔뜩 설명하였는데, 꽤나 만족하는 기색이 있었다.
금상(今上) 6년(1782, 정조6) 봄에 내가 마포로 달아나 집을 빌려 살았는데, 이른바 만어정이라는 정자가 수십 보를 옮기면 바로 닿는 거리에 있으므로 내가 한두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정자의 지세(地勢)는 움푹하지 않고 볼록해서 조망하기에 적당한 위치에 있다. 앞에는 와우산(臥牛山)이 얼굴을 편 채 안쪽을 향해 있는데, 마치 완전히 정자를 위해 감싸 안고 있는 모양새이다. 일만 채 기와집이 빽빽이 땅에 붙어서 강가에서부터 들판까지 이어져 있고, 아침 안개와 저녁 노을 속에 혹은 가까이로 혹은 멀리로 긴 강 한 줄기가 서쪽을 가로지르며, 어선과 상선은 제방의 버드나무와 물가의 여뀌 사이에서 은은한 그림자를 비치며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한다. 이 정자가 빼어난 경치를 지닌 것이 본래 이미 많았다.
도강록(渡江錄) 6월 24일 신미(辛未)에 시작하여 7월 9일 을유(乙酉)에 그쳤다.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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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강록 서(渡江錄序)
무엇 때문에 ‘후삼경자(後三庚子)’라는 말을 이 글 첫 머리에 썼을까. 행정(行程)과 음(陰)ㆍ청(晴)을 적으면서 해를 표준 삼고 따라서 달수와 날짜를 밝힌 것이다. 무엇 때문에 ‘후’란 말을 썼을까. 숭정(崇禎) 기원(紀元)의 뒤를 말함이다. 무엇 때문에 ‘삼경자’라 하였을까. 숭정 기원 뒤 세 돌을 맞이한 경자년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숭정’을 바로 쓰지 않았을까. 장차 강을 건너려니 이를 잠깐 피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를 피했을까. 강을 건너면 곧 청인(淸人)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가 모두 청의 연호(年號)를 썼으매 감히 숭정을 일컫지 못함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대로 ‘숭정’을 쓰고 있을까. 황명(皇明)은 중화인데 우리나라가 애초에 승인을 받은 상국인 까닭이다. 숭정 17년에 의종 열황제(毅宗烈皇帝)가 나라를 위하여 죽은 뒤 명이 망한 지 벌써 1백 30여 년이 경과되었거늘 어째서 지금까지 숭정의 연호를 쓰고 있을까. 청이 들어와 중국을 차지한 뒤에 선왕의 제도가 변해서 오랑캐가 되었으되 우리 동녘 수천 리는 강을 경계로 나라를 이룩하여 홀로 선왕의 제도를 지켰으니, 이는 명의 황실이 아직도 압록강 동쪽에 존재함을 말함이다. 우리의 힘이 비록 저 오랑캐를 쳐 몰아내고 중원(中原)을 숙청하여, 선왕의 옛 것을 광복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사람마다 모두 숭정의 연호(年號)라도 높여 중국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숭정 156년 계묘에 열상외사(洌上外史)는 쓰다. ‘후삼경자(後三庚子)’는 곧 우리 성상(聖上 정조(正祖)) 4년(1780) 청 건륭(淸乾隆) 45년 이다.
6월 24일 신미(辛未)
아침에 보슬비가 온종일 뿌리다 말다 하다.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30리를 가서 구련성(九連城)에서 한둔하다. 밤에 소나기가 퍼붓더니 이내 개다.
앞서 용만(龍灣)의주관(義州館) 에서 묵은 지 열흘 동안에 방물(方物 선물용 지방 산물)도 다 들어왔고 떠날 날짜가 매우 촉박하였는데, 장마가 져서 두 강물이 몹시 불었다. 그동안 쾌청한 지도 벌써 나흘이나 되었는데, 물살은 더욱 거세어 나무와 돌이 함께 굴러 내리며, 탁류가 하늘과 맞닿았다. 이는 대체로 압록강의 발원(發源)이 먼 까닭이다. 《당서(唐書)》를 상고해 보면,
“고려(高麗)의 마자수(馬訾水)는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그 물빛이 마치 오리머리처럼 푸르르매 ‘압록강’이라 불렀다.”
하였으니, 백산은 곧 장백산(長白山)을 말함이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이를 ‘불함산(不咸山)’이라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白頭山)’이라 일컫는다. 백두산은 모든 강이 발원되는 곳인데, 그 서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곧 압록강이다. 또 《황여고(皇輿考)》에는,
“천하에 큰 물 셋이 있으니, 황하(黃河)와 장강(長江)과 압록강이다.”
하였고, 《양산묵담(兩山墨談)》 진정(陳霆)이 지었다. 에는,
“회수(淮水) 이북은 북조(北條 북쪽 가닥)라 일컬어서 모든 물이황하로 모여들므로 강으로 이름지은 것이 없는데, 다만 북으로 고려에 있는 것을 압록강이라 부른다.”
하였으니, 대체 이 강은 천하에 큰 물로서 그 발원하는 곳이 시방 한창 가무는지 장마인지 천 리 밖에서 예측하기 어려웠으나, 이제 이 강물이 이렇듯 넘쳐흐름을 보아 저 백두산의 장마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하물며 이곳은 예사의 나루가 아님에랴. 그럼에도 마침 한창 장마철이어서 나룻가 배 대는 곳은 찾을 수도 없거니와, 중류(中流)의 모래톱마저 흔적 없어서 사공이 조금만 실수한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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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어떤 사람이,
“이 성이 곧 안시성(安市城)이다.”
라고 한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鳳凰)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수(隋)ㆍ당(唐)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으로 고쳤다.”
는 전설이 자못 그럴싸하기도 하다. 또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이 당 태종(唐太宗)의 눈을 쏘아 맞히매, 태종이 성 아래서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示威)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제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킴을 가상(嘉賞)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연경에 가는 그 아우 노가재(老稼齋) 창업(昌業)에게 보낸 시(詩)에,
천추에 크신 담략 우리의 양만춘님 / 千秋大膽楊萬春
용 수염 범 눈동자 한 살에 떨어졌네 / 箭射虬髯落眸子
라 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에는,
주머니 속 미물이라 하잘것이 없다더니 / 爲是囊中一物爾
검은 꽃이 흰 날개에 떨어질 줄 어이 알랴 / 那知玄花落白羽
라 하였으니, ‘검은 꽃’은 눈을 말함이요, ‘흰 날개’는 화살을 말함이다. 이 두 노인이 읊은 시는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대개 당 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 하찮은 탄알만 한 작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창황히 군사를 돌이켰다 함은 그 사실에 의심되는 바 없지 않거늘, 김부식(金富軾)은 다만 옛 글에 그의 성명이 전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겼을 뿐이다. 대개 부식이 《삼국사(三國史)》를 지을 때에 다만 중국의 사서에서 한번 골라 베껴 내어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또 유공권(柳公權 당의 학자요 서예가)의 소설(小說)을 끌어 와서 당 태종이 포위되었던 사실을 입증까지 했다. 그러나 《당서(唐書)》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아마 그들이 중국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 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더운 것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않았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라고 한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 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므로,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이름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 봉천부(奉天府)에 있다)의 동북 70리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가 3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肅愼)ㆍ예(穢)ㆍ맥(貊) 등 동이(東彝)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라(烏剌)ㆍ영고탑(寧古塔)ㆍ후춘(後春)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 사군(漢四郡)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 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分排)하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 위치의 앞으로 나감과 뒤로 물리는 것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女眞)에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아느냐 하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나 낙랑(樂浪)은 있으나, 진번(眞蕃)과 임둔(臨芚)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한 소제(漢昭帝)의 시원(始元) 5년(B.C. 82)에 사군을 합하여 2부(府)로 하고, 원봉(元鳳) 원년(B.C. 76)에 다시 2부를 2군(郡)으로 고쳤다. 현도 세 고을 중에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있고, 낙랑스물다섯 고을 중에 조선현(朝鮮縣)이 있으며, 요동 열여덟 고을 중에 안시현(安市縣)이 있다. 다만 진번은 장안(長安)에서 7천 리, 임둔은 장안에서 6천 1백 리에 있다. 이는 김윤(金崙 조선 세조(世祖) 때의 학자)의 이른바,
“우리나라 지경 안에서 이 고을들은 찾을 수 없으니, 틀림없이 지금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진번ㆍ임둔은 한말(漢末)에 바로 부여(扶餘)ㆍ읍루(挹婁)ㆍ옥저(沃沮)에 들어간 것이니,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것이 혹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혹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며, 혹 변하여 발해(渤海)가 되고, 혹 변하여 여진(女眞)으로 된 것이다. 발해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日本)의 성무왕(聖武王)에게 보낸 글월 중에,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옛풍속을 물려받았다.”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포괄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본디 우리 강토 안에 있었음은 더욱 명확하다.
그런데 한대(漢代)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딘지 일정하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 표준을 삼아서 이러쿵저러쿵 패수의 자리를 찾는다. 이는 다름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은 무릇 요동 이쪽의 강을 죄다 ‘패수’라 하였으므로, 그 이수가 서로 맞지 않아 사실이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조선과 고구려의 지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에는 패수를 요동에 가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패수가 일정해져야만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져야만 고금의 사실이 부합될 것이다. 그렇다면 봉황성을 틀림없는 평양이라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만일 기씨(箕氏)ㆍ위씨(衛氏)ㆍ고씨(高氏)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이 역시 하나의 평양이리라 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서》 배구전(裴矩傳)에,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를 봉하였더니, 한(漢)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고죽국이란 지금 영평부(永平府)에 있으며, 또 광녕현(廣寧縣)에는 전에 기자묘(箕子墓)가 있어서 우관(冔冠 은(殷)의 갓 이름)을 쓴 소상(塑像)을 앉혔더니, 명(明)의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때 병화(兵火)에 불탔다 하며, 광녕현을 어떤 이들은 ‘평양’이라 부르며, 《금사(金史)》와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광녕ㆍ함평(咸平)은 모두 기자의 봉지(封地)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영평(永平)ㆍ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일 것이요, 《요사(遼史 원(元)의 탁극탁이 씀)》에,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도 또한 하나의 평양일 것이다. 나는,
“기씨(箕氏)가 애초에 영평ㆍ광녕의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燕)의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기어 땅 2천 리를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아가니, 이는 마치 중국의 진(晉)ㆍ송(宋)이 남으로 옮겨감과 같았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 하였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패수도 역시 이와 같다. 고구려의 지경이 때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을 터인즉, ‘패수’란 이름도 따라 옮김이 마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에 주(州)ㆍ군(郡)의 이름이 서로 바뀜과 같다. 그런데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이는 대동강을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며, 평양과 함경(咸鏡)의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 하며, 요양으로 평양을 삼는 이는 헌우낙수(蓒芋濼水)를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고,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이다.” 한다. 그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 하는 이는 자기네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함이다.
당(唐)의 의봉(儀鳳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2년(677)에 고구려의 항복한 임금 고장(高藏)고구려 보장왕(寶藏王) 을 요동주(遼東州)도독(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을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서 이를 통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고씨(高氏)의 강토가 요동에 있던 것을 당이 비록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니지 못하고 고씨에게 도로 돌려주었은즉, 평양은 본시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이곳에다 잠시 빌려 씀으로 말미암아 패수와 함께 수시로 들쭉날쭉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의 낙랑군 관아(官衙)가 평양에 있었다 하나 이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요, 곧 요동의 평양을 말함이다. 그 뒤 승국(勝國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발해의 일경(一境)이 모두 거란(契丹)에 들어갔으나, 겨우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의 경계를 삼가 지켜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마저 버리고도 돌보지 않으니, 하물며 그 밖에야 한 발자국인들 돌아보았겠는가. 고려는 비록 안으로 삼국(三國)을 합병하였으나, 그의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하였는데,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ㆍ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패수요, 이것은 평양이오.” 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벌써 말할 수 없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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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요동기(舊遼東記)
요동의 구성(舊城)은 한(漢)의 양평(襄平)ㆍ요양(遼陽) 두 현(縣) 지역에 있었다. 진(秦)이 요동이라 칭하였고, 그 뒤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에 편입되었다가, 한 말년에 공손도(公孫度)가 웅거한 바 되었으며, 수(隋)ㆍ당(唐)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였고, 거란(契丹)은 이곳을 남경(南京)이라 하였으며, 금(金)은 동경(東京)이라 하였고, 원(元)은 행성(行省 원대의 지방 행정 구역)을 두었으며, 명(明)은 정료위(定遼衛)를 두었더니, 지금은 요양주(遼陽州)로 승격되었다.
20리 떨어진 곳에 성을 옮겨서 신요양(新遼陽)이라 하였으므로, 이 성은 폐하여 구요동(舊遼東)이라고 부른다. 성의 둘레는 20리-----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관제묘를 나와 5마장도 채 못 가서 하얀 빛깔의 탑(塔)이 보인다. 이 탑은 8각 13층에 높이는 70길[仞]이라 한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당(唐)의 울지경덕(蔚遲敬德)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러 왔을 때에 쌓은 것이다.”
한다. 혹은 이르기를,
“선인(仙人) 정령위(丁令威)가 학을 타고 요동으로 돌아와 본즉, 성곽과 인민이 이미 바뀌었으므로 슬피 울며 노래 부르니, 이것이 곧 그가 머물렀던 화표주(華表柱)다.”
한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말이다. 요양성 밖에 있으니 성에서 10리도 못 되는 곳이고, 또 그리 높고 크지도 않다. 그저 백탑이라 함은 우리나라 조례(皁隷)들이 아무렇게나 부르기 쉽게 지은 이름이다.
요동은 왼편에 창해(滄海)를 끼고 앞으로는 벌판이 열려서 아무런 거칠 것 없이 천 리가 아득하게 틔었는데, 이제 백탑이 그 벌판의 3분의 1을 차지하였다. 탑 꼭대기에는 구리북 세 개가 놓였고, 층마다 처마 네 귀퉁이에 풍경을 달았는데, 그 크기가 물들통만 하고, 바람이 일 때마다 풍경이 울어서 그 소리가 멀리 요동벌에 울린다.
성경잡지(盛京雜識) 7월 10일 병술(丙戌)에 시작하여 14일 경인(庚寅)에 마쳤다. 모두 5일 동안이다.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3백 27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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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은 본시 우리나라 땅이다. 혹은 이르기를,
“한(漢)이 4군을 두었을 때에는 이곳이 낙랑의 군청[治所]이더니 원위(元魏)ㆍ수(隋)ㆍ당(唐) 때 고구려에 속했다.”
한다. 지금은 성경이라 일컫는다. 봉천 부윤(奉天府尹)이 백성을 다스리고 봉천 장군(奉天將軍)부도통(副都統)이 팔기(八旗)를 통할하며, 또한 승덕지현(承德知縣)이 있는데, 각부(各部)를 설치하고 좌이아문(佐貳衙門)을 두었다. 문 맞은편에 조장(照墻)이 있고 문 앞마다 옻칠한 나무를 어긋매끼로 세워서 난간을 만들었다. 장군부(將軍府) 앞에는 큰 패루(牌樓) 한 채가 서 있다. 길에서 그 지붕의 알록달록한 유리 기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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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로후집 권2 / 시○연경잡영(燕京雜詠)
책문(柵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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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과 버들 한들한들 마을을 둘렀는데 / 梧柳依依洞府迴
샘물 달고 땅 비옥해 더욱 아름답구나 / 泉甘壤沃更嘉哉
태평성대 회복할 계책 이룰 수 있다면 / 聖代若成恢復策
한번 가서 못 오는 일도 진정으로 감당하겠네 / 眞堪趙老送燈㙜
【自註】압록강에서부터 책문까지 산과 물이 빙 둘러싸고 있는데, 그 속에 인가가 붙어 있는 듯하다. 대개 신라와 고구려의 옛 터전이다.
벽로집 발문(跋文) [유만공(柳晩恭)] [DCI]ITKC_BT_1541A_0060_000_0010_2019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지난해에 나는 금강산을 유람하며 일만 이천 봉이 하늘가에 빽빽하게 늘어선 모습을 훑어보았다. 내친 김에 동쪽으로 푸른 바다에 임하여 또 구름 파도와 안개 물결이 끝없이 넘실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작고 용렬한 눈으로 한번 보고 돌아오니 꿈에 신선세계에서 논 것 같아서 그 진경(眞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사람들 중에 금강산이 어떠하냐고 묻는 이가 있으면 곧 한마디 말로 대답하겠다. “매우 기이하고 수려합니다.” 동해가 어떠하냐고 묻는 이가 있으면 한마디 말로 대답하겠다. “망망하고 드넓습니다.” 무릇 금강산은 천하의 이름난 산이고 동해는 천하의 큰물이니 천하 사람들 중 한번 보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으나, 조선 사람들 중에도 구경한 이가 많지 않다. 그런데 조선 사람이 또 한번 구경하기를 원하는 것으로는 연경(燕京)이 있을 뿐이니, 오악(五嶽)과 삼도(三都)가 제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형세를 달리 논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연경을 유람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묻자, 한마디 말로 대답했다. “장엄하고 화려합니다.” 장엄하고 화려한 것은 그 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본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곳은 이미 천자가 도읍으로 삼은 곳이어서 성곽과 궁전, 정원과 지대(池臺 못과 누대)가 그 장엄함에 어울린다. 그곳은 이미 서민들이 모이는 곳이어서 살림집과 시내 상점, 여러 가지 물건과 보물, 노리개는 그 화려함에 어울린다.
만약에 도읍을 정한 곳이라면 어느 땅인들 그렇지 않을까 마는 장관으로 말하자면 어찌 금강산과 동해가 자연 속에서 이루어져서 천하무적이 된 것과 같겠는가. 하물며 연나라사람(燕人)이 그 땅을 도읍으로 삼고 있는 곳은 곧 옛날 사막이었던 들판이고, 그 주인은 현재 만주인이니, 어떻게 전대(前代) 황도(皇都)의 문물제도(文物制度)와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연경으로 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를 지은 적이 있다. “이번 행차는 4천 리의 여정에 차지 않을 테니, 1만 리를 가는 대장부의 정에 흡족하지 못하리라. 조선 사람이 중국을 보았다고 허투로 말을 하나, 중국을 보지 못하고 북경만 본 것이네.” 그러나 조선 사람으로 북경을 본 사람은 드물고, 보고서 능히 이해해서 기록한 자도 드물다. 이것은 달리는 말 위에서 산을 본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진면목을 모르고 표주박으로 물을 퍼서 바다를 재어서는 물가를 엿볼 수 없다. 지금 연파(蓮波) 김진수(金進洙)는 한번 연도(燕都)에 들어가서 그 귀와 눈으로 접촉한 것은 두루 수집하여 시에 넣어 그 참다운 경지를 모두 읊어내지 않은 것이 없으니 잘 유람하고 잘 진술한 사람이라고 이를 수 있다. 만약 연파(蓮坡)가 주(周), 한(漢), 당(唐), 송(宋)나라 때 태어나서, 위수(渭水), 낙수(洛水)와 한수(漢水), 변수(汴水)의 도읍을 유람했다면, 그의 해박하고 유려한 문장의 필치가 어떻게 장형(張衡)과 좌사(左思)의 무리로 하여금 여러 도읍에 대한 부(賦)를 오로지 아름답게 짓도록 내버려 두었겠는가. 그런데 연파가 이 시편에 의미를 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 중에 이 시편을 본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연파는 강개(慷慨)한 선비로써 중국을 관광한 후, 흠모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어 이렇게 찬미하는 말을 쓰게 된 것이오.” 이에 내가 대답했다. “아니오. 연파는 소중화(小中華) 조선 사람으로 옛날의 사막 땅을 밟고 지금 만주 사람들을 만나 슬퍼하는 마음을 내어 이처럼 탄식하고 애석히 여기는 말을 쓰게 된 것이오. 다만 조선 사람에게는 전할 수 있을지언정, 북경 사람에게는 보여서는 안 될 것이오.” 연파가 나의 이 말에 대해 뭐라고 이를지 아직 모르겠다.
정사년 9월 간송생(澗松生) 유만공(柳晩恭)은 땀을 흘리면서 평한다.
유만공(柳晩恭) : 1793~1869.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호는 간송거사(澗松居士) 자는 정보(定甫)이다. 《세시풍요(歲時風謠)》를 남겼다.
인용 한국 고전 종합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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