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원 시인
1941년 12월 29일 (경남 밀양시) ~ 2007년 2월 2일
동아대학교 법학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2003 제35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부문 외 1건
1982~2002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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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오규원
오규원은 1941년 경남 밀양군 삼랑진읍 용전리에서 6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다.
본명은 규옥(圭沃)이고,
‘규원’은 필명이다. 정미소와 과수원을 소유하고 있던 아버지 덕분에 전형적인 농촌 마을인 고향에서 그는 꽤 유족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초등 학교 시절에 겪은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과 6·25는 그의 삶에 원체험으로 작용한다.
시인은 “나의 유년은 열두 살로 끝”났으며, “나의 유년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도시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털어놓는다.
부산중학교 1학년 때 누이 집에서 기숙하고, 2학년 때 대학생과 고등 학생이던 다른 형제들과 자취 생활을 한 그는 이어 숙부 집에서 얹혀 지낸다.
이 시절 그는 대본 가게와 일본 유학생 출신인 숙부의 장서를 통해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고, 시 비슷한 것을 흉내내기도 한다.
그는 부산중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사범학교에 진학한다.
호적상으로 열여섯 살이 되던 해(그는 호적에 1944년으로 올라 있다.)에 사범 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산 사상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시인은 “터무니없는 어린 나이에 사령장을 들고 국민 학교 교사로 부임을 하러 간 나의 눈에,
다른 어느 것보다 그 학교의 화단에서 처음 본, 화단에 가득했던 달맞이꽃을 신기해 하며,
한참 바라보고서야 현관을 들어설 만큼 병들어 있었다.”고 어느 글에서 밝힌 바 있다.
그는 교장, 교감, 장학사와 부딪치며 학교를 옮겨 다닐 만큼 어린 나이에 시작한 교사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교편을 잡은 다음해 그는 동아대 법학과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한다.
1964년 신춘 문예에 응모했다가 떨어진 오규원은 습작품들을 정리해 『현대문학』에 보낸다.
이를 좋게 읽은 김현승에 의해 그는 1965년에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게 된다.
그는 같은 해 5월 군에 입대해 논산에서 신병 훈련을 마치고 대구군의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중에
초회 추천작인 「겨울 나그네」가 실린 『현대문학』 7월호를 접하게 된다. 1967년 「우계의 시」로
2회 추천을 받은 그는 1968년 10월 「몇 개의 현상」으로 추천 과정을 마치며 “감성과 지성을 갖춘 신인”으로 문단에 나온다.
그는 부산 3육군병원의 수술실, 비뇨기과, 정형외과를 거쳐 진료 원장실에서 의무 행정을 담당한 끝에 1967년에 군에서 제대한다.
1969년 2월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한림출판사’ 편집부에서 근무하며
비로소 생활의 안정을 찾는다.
1971년 오규원은 첫 시집 『분명한 사건』을 펴내는데, 이즈음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이상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분명한 사건』을 쓸 무렵에는 그의 의식은 비교적 순수했어요. 언어에 대한 믿음이 깊었다고나 할까, 혹은 시에 대한 인식이 그랬다고나 할까요. 허나 대상을 명확히 묘사하려고 할 때 언어는 항상 대상의 편이 되어 그로부터 멀어져 갔지요.
결국 그는 자신이 틈입할 수 있는 글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분명한 사건』의 언어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일에 한해서는 그의 편이었지만, 그 자신의 삶을 표백시키고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를 배반하고 있었지요.
오규원, 『길 밖의 세상』(나남, 1987)
1971년 시인은 “서울특별시(特別市) 개봉동(開峰洞)으로 편입되지 못한 /
경기도(京畿道) 시흥군(始興郡) 서면(西面) 광명리(光明里)”로 이사한다.
거주지를 옮기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그는 태평양화학 홍보실로 직장을 옮긴다.
1973년에 들어 그의 두 번째 시집 『순례』가 나온다. 이 시집의 표지는 김승옥이 맡고,
발문은 김현이 쓴다.
이 무렵부터 1975년에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 총서’로 내놓은 『사랑의 기교(技巧)』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것은 언어에 대한 자의식, 바꿔 말해 언어에 대한 집착이다.
그의 언어에 대한 예민한 자의식은, 인간은 끊임없이 세계를 의미화하고 조직화하는 존재인데,
그 방법적 도구가 언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인은 언어를 물고 늘어지며 그 언어와 장난질을 한다.
시인의 초기 시들이 자주 언어 유희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1979년 시인은 한동안 “밥을 벌어먹고 있던” 직장 태평양화학을 그만두고 출판사 ‘문장’을 차린다.
이 출판사를 경영하며 시인은 자신이 사사한 『김춘수 전집』과 『이상 전집』 등을 비롯해 50여 권의 단행본을 펴낸다.
1983년에 들어 시인은 출판사를 그만두고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전임 교수로 자리를 옮긴다.
이 사이 그는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 ·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1981) 등의 시집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다. 이 두 시집은 굳어진 형식 자체를 해체하고 기존의 시적 언어들을 비틀어 써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의 해체 · 재구성의 능기가 발휘된 마당이다.
오규원의 다섯 번째 시집인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에 실린 작품들은 시인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상품 광고 문안, 즉 “상품적 메시지를 그대로 시 속에 옮기는” 관념 해체, 형식 파괴 등을 실험한
시들이다.
그 시편들은 편안하고 아름다운 서정시를 즐기려는 독자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며 의식을 아주
불편하게 만든다. 성급한 사람들은 도대체 이런 게 시라면 세상에 시 아닌 것이 어디 있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마저 읽기도 전에 시집을 집어던질지도 모를 일이다. 상품 광고, 텔레비전의 광고, 영화 광고, 상표, 상품 포장 안내문 등을 그대로 시 속에 옮기는 것을 시인은 “방법적 인용” 또는 “인용적 묘사”라고 말한다. 과연 이런 파격적 시작 행위의 뒤에 숨어 있는 시인의 의도는 무엇일까?
오규원의 시들은 세속 사회의 세속화에 대한 시의 방법적 응전이라는 면에서 더할 수 없이 날카롭고 신랄한 풍자와 야유의 독기를 품고 있다.
왜냐하면 시인의 판단에 따르면 이런 흐름이 우리 삶의 진정성을 훼손하고, 기만하며,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물신적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까닭이다. 바꿔 말해 허구의 욕망을 창출해 행복의 신기루를 보여주고(「MIMI HOUSE」), 암시적인 성적 자극을 통해 상품 광고의 소구력을 드높이기(「롯데 코코아 파이 C. F.」) 때문이다. 이런 시는 모두 비진정한 가치 체계의 지배를 받는 세속 사회에서의 인간의 물질주의적 행복과 욕망의 헛된 추구, 그 허구성과 기만성을 폭로한다.
아울러 이런 시는 물신주의에 대한 분노를 머금은 야유이자, 시와 상품 광고 문안을 등가시(等價視)
함으로써 타락한 세계 앞에서 전투력을 상실한 시 자체의 무력함에 대한 야유까지 겸한다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슈발리에」).
1. 「양쪽 모서리를 / 함께 눌러 주세요」 // 나는 극좌와 극우의 / 양쪽 모서리를 / 함께 꾸욱 누른다 // 2.따르는 곳 / ↓ // 극좌와 극우의 흰 / 고름이 쭈르르 쏟아진다 // 3.빙그레 // ――나는 지금 빙그레 우유 / 200ml 패키지를 들고 있다 / 빙그레 속으로 오월의 라일락이 / 서툴게 떨어진다 // 4.→ //
5.→를 따라 / 한 모서리를 돌면 // 빙그레―가 없다 // 다른 세계이다 // 6.↑ 따르는 곳을 따르지 않고 / 거부한다 // 다른 모서리로 내 다리를 / 내가 놓는 오월의 음지를 / 내가 앉는 의자의 / 모형을 조금씩 더 / 옮긴다······ 이 지상(地上) / 이 지상 오월의 라일락이 / 서툴게 떨어진다
오규원,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문학과지성사, 1987)
빙그레 우유 곽에 나와 있는 안내문을 읽으며 시인은 잠시 장난기 섞인 명상의 세계로 들어선다.
“극좌와 극우의 / 양쪽 모서리를 / 함께 꾸욱” 누르는 시인의 속을 더듬어보면, 그 행위의 결과 “흰
고름”이 쏟아진다는 시인의 상상을 추동하는 것은, 극좌 / 극우의 대립, 그 단선적 흑백 논리에 의한 가치 판단의 병폐와 그 단세포적 의식 구조에 대한 역겨움과 강한 부정 정신이다.
자아바, 자아바 / 쿵(발을 구른다) / 고올라, 자바 / 짝짝(손뼉을 친다) / 아무 놈이나 / 쿵, 짝짝 // 자아바, 자아바 / 쿵(발을 구른다) / 고올라, 자바 / 짝짝(손뼉을 친다) // 여기는 남대문 시장 오후의 / 난장이다 티를 파는 이씨는 / 리어카 위에 올라 육탁(肉鐸)을 친다 / 하루의 햇빛은 쿵 할 때마다 흩어지고 / 짝짝 손뼉에 악마구리처럼 몰려오고 / 여자들은 제각기 두 발로 와서 / 이씨의 가랑이 밑에 허리를 / 구부린다 엘리제 카사미아 캐논 히포 / 아놀드 파마 새미나 마리안느를 / 두 손으로 잡는다 건방진 여자들 / 한 손으로 제 얼굴까지 바싹 끌어당긴다 // 상가의 건물은 금강(金剛)의 영혼으로 / 여자들의 어깨를 짚고 / 여자들은 우뚝 선 이씨 무릎 아래 엎디어 // 자아바, 쿵 / (잡는다) / 고올라, 자바 / 짝짝 / (골라 잡는다) / 고올라, 고올라 / (잽싸게 고른다) / 자바자바 / (끌어 당긴다) // 여기는 서울의 난장이다 / 이씨는 잡히는 대로 티를 / 구석으로 팽개친다 // 자바자바 / 그놈 / 골라 자바 / 그놈
오규원, 「‘자바자바’ 셔츠」,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문학과지성사, 1987)
이 시는 남대문시장에서 티셔츠를 파는 이씨의 호객 행위와 거기에 이끌려 악마구리처럼 몰려든 여자들이 “이씨의 가랭이 밑에 / 허리를 구부”리고, “엘리제 카사미아 캐논 히포 / 아놀드 파마 새미나 마리안느”를 고르는 풍경을 보여준다. 이 난장의 풍경을 통해 시인은 자신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언술하지는 않는다. 시인은 다만 그 풍경을 보여줄 뿐인데, 이는 그의 말대로 “인용적 묘사”다.
“상가의 건물은 금강의 영혼으로 / 여자들의 어깨를 짚고 / 여자들은 우뚝 선 이씨 무릎 아래 엎디어”라는 구절에 암시되어 있듯이 그는 물건의 구매에 정신이 팔린 인간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물신주의의 성전(聖殿)에 모인 광신도들로 희화화하며, 물신 숭배에 사로잡힌 인간들에게 야유를 퍼붓는다. 이 야유와 노골적인 비꼼은 객관적 묘사의 적확성으로 빛난다.
오규원의 작품들은 자본주의적 속성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또 그 속의 모순과 문제들을 날카롭게 제기하는 상품 광고의 방법적 인용 또는 인용적 묘사를 통해 산업 사회에서 발흥한 세속주의의 한 상징인 광고에 의한 대중 조작(또는 마취!)에 강력한 시적 대응을 보여준 사례로 꼽힐 만하다.
1989년 연암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작가 최인훈(왼쪽)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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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 세 권의 시집을 더 펴낸다. 『사랑의 감옥』(1991) ·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 소리』(1994) ·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가 그것이다.
그런데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 소리』에서부터, 자본주의 세속 사회의 속물성과 타락에 대한
역겨움을 풍자와 비판의 언어로 난도질하는 것을 능기로 삼아온 시인은 작은 변화의 낌새를 보여준다.
시집의 제목으로 드러나 있는 “길, 골목, 호텔” 등은 자본주의 세속 사회의 실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도시의 표상물들이다. 시인의 눈길과 관심은 여전히 도시에 머물러 있지만, 한편으로
귀는 ‘강물 소리’를 쫓아간다. 이는 오랫동안 관념적으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던 시인이
인간 중심적 사고의 습성인 자의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발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낌새다.
자의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여주기 시작한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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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강변의 간이 주점 근처에 있었다 / 해가 지고 있었다 / 주점 근처에는 사람들이 서서 각각 있었다 / 한 사내의 머리로 해가 지고 있었다 / 두 손으로 가방을 움켜쥔 여학생이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 젊은 남녀 한 쌍이 지는 해를 손을 잡고 보고 있었다 / 주점의 뒷문으로도 지는 해가 보였다 / 한 사내가 지는 해를 보다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다 / 가방을 고쳐쥐며 여학생이 몸을 한 번 비틀었다 / 젊은 남녀가 잠깐 서로 쳐다보며 아득하게 웃었다 / 나는 옷 밖으로 쑥 나와 있는 내 목덜미를 만졌다 / 한 사내가 좌측에서 주춤주춤 시야 밖으로 나갔다 / 해가 지고 있었다.
이것은 “관념을 통해 관념을 허물기”라는 시인의 오랜 시적 관행으로부터 벗어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인 「지는 해」다. 해질녘의 강변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 시는 오규원 시 세계의 변화를 반영한 작품이다. ‘관념’이란 현상에 대한 인간 중심적인 해석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 시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관념은 없고, 명징하게 드러나 있는 실재에 대한 환유적 묘사만 있다. 「지는 해」는 관념에서 실재로, 도시에서 자연으로, 방법적 해체에서 날(生) 이미지 드러내기로, 그의 관심과 시적 방법이 주목할 만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시인은 1991년께 만성 폐쇄성 폐 질환 진단을 받고 거처를 도시에서 자연과 한결 가까이할 수 있는 지방으로 옮기는데, 어쩌면 이런 환경의 변화와 시 세계의 변화가 맞물려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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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시인[吳圭原]
1941∼2007. 시인· 대학교수
본명은 오규옥(吳圭沃). 경상남도 밀양 삼랑진 출생.
생애 및 활동사항
1941년 경남 밀양 삼랑진에서 출생했고, 부산중학교를 거쳐 1958년부산사범학교에 진학했다. 1961년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부산 사상초등학교 교사로 첫 부임을 했고, 교편을 잡은 다음해인 1962년동아대 법학부에 입학했다.
<내가 좋아 하는 시>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 오규원 -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空想)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 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성인이 아닌 이상 잘사는 삶이 무언지 알기 어렵고, 그걸 알아도 실천하기 어렵다.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무얼 어떻게 잘못 살고 있는지 확실치도 않다.
그런 밤. 계속 잘못 사는 것도 하나의 살길이라고 자기를 속여 잠들고 싶은 밤.
그러나 더 깊이 더 철저히 자기를 심문하며, 오래 뒤척거려야 할 깊은 밤.
<이영광 시인·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 의 한마디>
1964년 5월 시 「겨울나그네」로 『현대문학』 초회 추천을 받았고, 이 지면에서부터 ‘오규원’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7년 「우계의 시」로 2회 추천을 받고, 1968년「몇 개의 현상」으로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했다. 추천자는 김현승 시인이었다.
1969년동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71년 첫 시집 『분명한 사건』을 한림출판사에서 출간했다. 1973년 두 번째 시집 『순례』를 민음사에서 출간하고, 『현대시학』 주간인 전봉건 시인의 권유로 시평을 쓰기 시작해서 잡지와 일간신문의 월평을 쓰기 시작했다.
1975년 『분명한 사건』『순례』 개봉동 시리즈를 포함시킨 시선집 『사랑의 기교』를 민음사에서 출간하고, 1976년 그동안 썼던 시에 관한 산문들을 모은 시론집 『현실과 극기』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1978년 세 번째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1979년 태평양화학을 사직하고 『문장』이라는 출판사를 직접 경영하여 『김춘수전집』 1,2,3권, 『이상전집』 1,2,3권 등 50여권의 단행본을 출간했다.
1981년 네 번째 시집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를 출간하고 1982년 이 시집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에세이집 『한국만화의 현실』을 열화당에서, 『볼펜을 발꾸락에 끼고』를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했다.
1983년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전임교수가 되었다. 시론집 『언어와 삶』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하고, 1985년 시선집 『희망 만들며 살기』를 지식산업사에서 출간했다. 1987년 다섯 번째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를 문학과지성사에서, 문학 선집 『길밖의 세상』을 나남출판사에서 출간했다.
1989년「비디오가게」 외 4편으로 제2회연암문학상을 수상하고 수상작품집 『하늘 아래의 생』을 문학과비평사에서 출간했다. 1990년 이론서 『현대시작법』을, 1991년 여섯 번째 시집 『사랑의 감옥』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1995년 일곱 번째 시집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1999년 여덟 번째 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를 민음사에서 출간하고, 2002년 『오규원시전집』(전2권)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2005년 아홉 번째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와 시론집 『날이미지와 시』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2007년 작고한 후 다음해인 2008년 유고시집 『두두』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초기시에 해당하는 『분명한 사건』(1971), 『순례』(1973)는 관념을 언어로 구상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관념적 의미에 물들지 않은 절대 언어를 지향하며, 시인의 상상과 사유 속에서의 언어를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초기시는 현실적인 시공간보다는 주체의 내면의식과 환상이 결합된 가상세계가 중요한 소재가 된다. 중기시인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는 산업화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는 광고를 시에 도입하는 등 형태적인 실험을 통해 물신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아이러니를 이용하여 억압적인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후기시는 『사랑의 감옥』부터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두두』 까지의 시들이다. 이 시기에 오규원은 날이미지 시론을 전개하며 환유적인 방식에 의거한 시 쓰기를 시도한다. 그것은 현상과 그 이면의 생성과 변화 과정을 읽어내는 주체의 해석이 결합된 것이다. 이처럼 오규원은 언어와 이미지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하여 시 쓰기 방식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와 실험의식을 보여준 시인이다.
상훈과 추모
현대문학상(1982), 연암문학상(1989), 이산문학상(1995),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문화부문 (2003) 수상
오규원 시인 11주기, 강화도 전등사에 잠든 시인을 만나고 오다
버스의 차창은 이산화탄소가 들어간 석회수 처럼 불투명했다. 손으로 창을 문지르면 한적한 도로가 논이 보였다. 서울에서 버스로 2시간 40분, 버스의 규칙적인 진동에 몸을 맞겨 달려간 곳은 강화도의 전등사 였다. 그날은 2월 2일, 오규원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1년이 되는 날이 었다.
오규원 시인은 1965년 현대문학에 시 “겨울 나그네” 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시 “몇 개의 현상” 으로 추천 완료하며 데뷔한 시인이다. 시집 “분명한 사건”, “순례”,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등을 펴냈으며 유고 시집으로는 “두두” 가 있다.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다.
이런 오규원 시인은 지난 2007년 2월 2일, 만성폐기종으로 고생하다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학생인 시절이다. 오규원 시인은 의식을 잃기 직전인 1월 21일 즈음, 간병 중이던 제자 이원 시인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마지막 글귀를 남겼다고 한다. 이때 시인이 쓴 글귀는 다음과 같다.
“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이 짧은 시의 마지막 글귀처럼, 오규원 시인의 장례는 강화도에 위치한 전등사의 한 나무 아래 수목장으로 치러졌다. 종무소 왼편으로 나가 서문 방향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501번 나무가 바로 오규원 시인의 나무이다. 오규원 시인의 제자들은 시인의 기일이 되면 이 나무 앞으로 찾아와 떠나간 시인을 추억하곤 한다.
내가 이 나무를 보러 강화도까지 온 것은 “어쩌면 나 역시 오규원 시인의 제자”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직접 시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문예창작과에서 처음 만난 작법서가 오규원 시인의 저서 “현대시작법” 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이는 수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작법서로 내 곁에 살아 있었다. “오규원” 이라는 세 글자는 나에게 각별하다.
문인이란 결국 작품으로써 박제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죽음 조차도 뛰어 넘을 수 있는 글. 항상 책으로만 만나던 그를 직접 만나야 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나서였다. 집을 멀리 떠나는 자식 처럼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전등사 전경. 사진 = 육준수 기자>
요 며칠 연거푸 비나 눈이 내려 전등사의 흙은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꾹꾹 눌러 밟으며 비탈진 길을 올라갔다. 신발 밑창과 바짓단을 더럽히는 진흙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필자보다도 몇 해는 먼저 무작정 오규원 시인이 있는 전등사에 찾아와, 홀로 성큼성큼 이 산에 오른 이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처럼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오규원 시인의 글을 읽다가,
홀리듯 전등사에 찾아온 이가 분명 있었을 테지.
웃음이 나오면서도 공감이 갔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과거의 누군가가 밟았던 흙이, 이제는 나에게 들러붙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추운 날씨임에도 경내에는 비교적 사람들이 많았다. 현장답사를 온 듯한 초등학생들부터, 금슬 좋아 보이는 노부부, 법복을 입은 스님들도 있었다. 어찌나 날이 추운지 약수터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고, 사람을 잘 따르는 고양이가 종무소를 지키고 있었다. 고양이의 등이나 엉덩이께를 쓰다듬으며 경내를 훑어본 필자는, 종무소 안으로 들어가 오규원 시인 나무로 가는 길을 물었다. 종무소 직원은 지도를 펼쳐 한 점을 짚으며 일러주었다.
501 나무라고 보이시죠, 여기가 오규원 시인 나무에요.
<시집 "사랑의 감옥" 이 매여 있는 오규원 나무. 사진 = 육준수 기자>
종무소의 안내를 받아 발견한 오규원 시인의 나무에는 시집 “사랑의 감옥” 이 매여 있었다. “사랑의 감옥” 은 1991년 문학과 지성사를 통해 출간된 오규원 시인의 시집이다. 또한 “사랑의 감옥” 은 당시 상품화된 언어, 물신화라는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는 평을 들은 시집이다.
시인의 나무 근처에는 소복하게 눈이 쌓여 있었다. 눈밭에는 패턴의 선명하게 보존된 발자국이 남아있어, 이미 선객이 다녀갔음을 알 수 있었다. 오규원 시인의 제자 혹은 친지일 터. “조금만 더 일찍 방문했더라면 그들과 함께 오규원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오규원 시인의 나무는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있었다. 잠든 오규원 시인은 이곳에서 어떤 풍경을 보고 있을까. 나는 나무 옆에 서 전등사를 내려다보았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눈과 앙상한 나뭇가지들 때문인지, 전등사는 온통 고요해보였다.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장식들이나 절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경내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낮게 피어오르는 연기까지도 말이다.
이런 고요함 때문인지 오규원 시인이 남긴 마지막 시 구절이 자꾸 생각났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라니. 이런 고요함이야말로 시인이 원하던 “나무 속” 이 아니었을까. 나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시인이 묻혀있는 나무 앞에 꿇어앉아 누군가에게 이야기 하듯 시 구절을 속삭였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어떤 슬픔에 젖어들은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에게 떠나는 인사를 하고 싶었는지를 모르겠다.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은 겨울이었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편히 누운 오규원 시인의 귓가에 마지막 시구를 속삭이며, 나는 오규원 시인이 자신 앞에 무수하게 놓인 오후들에게서 벗어나 초목과도 같은 평안을 누리고 있을 것이라고 감히 짐작해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규원 시인으로부터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선생께서는 이미, 나무속에 누워 조용한 잠을 청하고 계시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