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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9. 묵상글 ( 주님 세례 축일. - 주님의 물귀신 작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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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9. 주님 세례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주님의 물귀신 작전
오늘 주님께서는 세례를 주고 있는 세례자 요한에게 오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시는 주님을 세례자 요한이 알아보고 그럴 수는 없다고,
자기가 오히려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세례를 줄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당연하고 저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가 본당에서 새 영세자에게 세례를 주고 있는데
느닷없이 주님께서 나타나 그 줄에 같이 서 계신다면
저는 기절초풍할 것이고 왜 이러시나 하고 그 뜻을 몰라 당황할 것입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이 세례받으시는 이유랄까 뜻을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심오한 뜻이 있겠으나
오늘 저에게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우리 같이 힘을 합치자는 말씀 같고,
그래서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뜻대로 사는 의로움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두가 그 대열에 참여해야 하는데 세례자 요한도 우리도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세례자 요한에게 “우리”라고 하시며
당신 구원사업의 파트너로 초대하시는데, 이는 대단한 신분 격상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초대하시는데
이 또한 우리를 세례자 요한처럼 여기시는 대단한 신분 격상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능력으로만 구원하신다면 말씀 한마디로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느님은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하셨고,
백인대장의 종을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실 정도로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셨고,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기에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굳이 이 세상에 들어오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
그리고 굳이 요르단강 물에도 들어가시어 우리와 똑같이 세례를 받으시는 겁니다.
이는 마치 물귀신 작전 같기도 합니다.
같이 죽자는 물귀신 작전인데 그러나 나쁜 뜻의 물귀신 작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거룩한 죽음을 같이 죽자는 영적인 물귀신 작전입니다.
사실 세례의 의미가 이것 아닙니까?
죄에 대해서 죽고,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으려고 들지 않으니
당신이 먼저 죽으시며 같이 죽자고 하시는데
오늘 주님의 세례는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이 거룩한 물귀신 작전에 같이 참여하겠습니까?
제가 올해 들어 새로 강의를 준비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프란치스칸 영성 센터에서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한 학기 강의하게 되었고 또 수녀원 연 피정 강의도 맡게 되어
그 강의을 준비해야 합니다.
전에 같으면 매일 강론 올리며 특강 준비도 병행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솔직히 그럴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득이 새 강론을 올리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 대신 전의 강론을 올리는 것이 그나마 안 올리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
지난 강론을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양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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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9. 주님 세례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오늘은 ‘주님세례축일’입니다. 곧 예수님의 ‘두 번째 탄생일’입니다. 신적 생명으로의 탄생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으로서의 탄생인 첫 번째 탄일이 그의 어머니께서 성령을 입은 것을 드러낸다면, 이제 이 두 번째 탄일은 예수님께서 직접 성령을 입은 날입니다. 그러니 오늘이 바로 예수님의 진짜 탄생일인 셈입니다.
우리의 탄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기로 태어났을 때는 부모에게 축복이 내린 것이지만,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축복이 부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새 탄생’이요, 신적 생명으로의 탄생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주님의 종의 첫 번째 노래’입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종’은 “내 마음에 드는 이,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을 공정하게 펴리라.”(이사 42,1)고 하십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주신 일을 선포합니다(사도 10,38).
그리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현장에 무엇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예수님의 세례의 현장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두 가지의 신비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는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셨습니다. 또 하나는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첫 번째 탄생 때는 주님의 천사만 나타났을 뿐이지만, 이제 이 두 번째 탄생 때는 ‘성령’이 나타나시고 ‘성부’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신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창조’ 장면과 연상시켜줍니다. 창조 때 하느님의 영이 물위를 휘돌아 하느님의 전능을 드러내셨듯이, 이제 똑같은 성령께서 요르단 강물 위로 내리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짐을 알려줍니다. 비둘기 형상으로 내린 성령께서는 노아의 홍수 때 푸른 잎사귀를 물어온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물어오고 은총의 때, 곧 죄 사함이 열리고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새로운 탄생인 ‘세례’는 새로운 창조,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가리킵니다(로마 6,4). 그리고 세례를 받은 우리가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생명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생명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2코린 5,17; 로마 8,9). 그러니 이제 우리 안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살고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요! 우리가 성령을 선물로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다니 말입니다(1코린 12,13). 우리가 그리스도의 힘과 성령의 개입으로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다니 말입니다(디도 3,4-5). 이로써, 우리는 주님을 옷 입듯이 입고서(갈라 3,27),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사시게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합일시키십니다. 곧 세례 받은 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사건, 곧 죽음과 부활이 새롭게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콜로 2,12)
한편, 세례 현장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신비로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들려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라는 아버지의 선포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2장에서 이스라엘 왕좌에 오르는 왕에게 적용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 선언은 예수님을 ‘왕’으로 축성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세우시는 당신 나라의 ‘왕’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이로써, ‘새로운 세상’인 당신의 아드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한 또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단지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온 세상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 스스로 이토록 아름다운 구절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고, 당신의 생명을 입었습니다. 성령의 선물로 거룩해지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온갖 의로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신다고 스스로 설명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세례와 함께 자신을 낯추어 우리 죄인과 같이 되셨고, 마치 십자가에서 자신을 낮추시어 “반역자의 하나처럼,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이사 53,11-12)셨듯이, 저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바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의 생일인 것입니다. 축하합니다. 축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주님!
제가 당신 마음 안에서 탄생되었으니. 당신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당신 마음을 옷 입었으니, 당신의 영으로 살게 하소서.
당신 마음을 품었으니, 당신의 향기 품게 하소서.
사랑을 입었으니,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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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9. 주님 세례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이 시간 세례의 의미를 생각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려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태중교우 입니다. 아무 아무에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생활이 바쁘다 보니 하느님도 잊고 지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다시 시작한다고 하시니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사실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 누구에게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세례의 의미를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여러 어려움이 있어도 하루끼니를 몽땅 거르고 지나는 분은 없습니다. 혹 그렇게 한다면 몸의 기운이 떨어져,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신앙의 영양을 섭취하는 기도와 미사를 소홀히 한다면 신앙의 맛을 느낄 수 없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밥맛이 없어도 기운을 차리려면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기도가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를 하여야 그 무미건조함을 극복할 수 있고 더 큰 은총을 알게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복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제대로 해야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셨지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의 틈에 끼여서 세례를 받으셨고 어둠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로 씻는다’, ‘물에 잠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욕망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에 잠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잠겼다가 씻고 다시 나옵니다. 다시 나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깨끗이 정화해 주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 삶을 시작하게 해 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3,27).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6,4). 그리고 그 표징으로 우리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름을 자주 불러 주어야 하고 새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쓰리고를 아십니까?
1. 불러주고(세례명)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께요. ‘당신은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세례명을 불러주십시오.
2. 보아주고, 불렀으면 그 사람을 봐줘야합니다. 얼굴을 보면, 눈을 마주치 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 다. 기쁨도 슬픔도!
3. 잡아주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등을 토닥여 주고, 손을 잡아주고 위로 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 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서로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시길 바랍니 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쓰리고”하니까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육적인 것 에만 마음을 씁니다. 이러한 삶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위로 올라오셨습니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3,17).
이 말씀은 “너는 나의 귀염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결코 예수님께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때 듣게 된, 그리고 듣게 되는 음성입니다.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그런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이 우리를 들어 높여 주시고 사랑해 주시며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의 모범을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침으로써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사는 법을 철저히 배워야합니다. 세례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의 은총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고백했습니다. “마귀를 끊어 버립니까?” “끊어버립니다.”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받기 이전의 삶과 이 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정초를 맞이하면 ‘점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사주팔자를 보러 소위 ‘용하다는 집’을 찾는답니다. 자녀를 이기는 부모 없다고 자녀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면 그런 일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혼사를 위해 길일을 택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가정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면 마음이 흔들려서 주님을 등지는 일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떤 이는 점집에 가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에 묵주기도를 하고 있답니다. 이런 양다리 걸치기는 결코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요, 주님을 배반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기쁨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티토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와 사랑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올바른 일을 했다고 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이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 나게 하시고 새롭게 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티도3,4-5). 구원은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게 될 때 내 삶이 주님의 삶으로 바뀌고, 은총의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오늘 여기서부터 새로 태어나는 삶의 시작이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주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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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9. 주님 세례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어느덧 4년이 되었습니다. 미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사회보장번호(SSN)’가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야 다른 것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운전면허증’이 있습니다. 국내선 비행기를 탈 때도 필요하고, 운전면허증은 신분증의 역할을 하기에 있으면 좋습니다. ‘은행계좌’를 개설합니다. 은행계좌를 통해서 급여를 받기도 하고, 신용카드 결제를 합니다. 미국교회에서 사목하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한국에 속한 교구로부터 ‘사제증명서’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부르클린 교구로부터 사목에 대한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문사의 일도 하지만 다른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언론인으로 등록하여 5년 동안 있을 수 있는 비자를 받았지만 본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들은 30개월만 비자를 받기에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서 한국엘 다녀오기도 합니다.
어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이었습니다. 동방에서 온 3명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 드렸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유대인들만의 구세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세주로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도 고쳐주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도 칭찬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율법학자가 물어보았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유대인인 레위나 사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스라엘을 넘어서 한국까지 전해 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대학은 논문을 통과한 사람에게 학위를 수여합니다. 대학은 학위를 수여할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때로 대학은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합니다.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 추기경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추기경님께 학위를 수여한 대학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교황님께서 신학교에서 미사를 집전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교황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학교 기쁨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오히려 세례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습니다.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단순히 회개를 촉구하고, 영혼을 정화하는 과정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제 세례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그래서 사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가브리엘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는 지난 날 모든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오늘 주님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내가 받은 세례의 축복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세례 받은 신앙인으로 충실히 살도록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하늘의 소리로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 계심을 믿게 하셨나이다. 또한 비둘기 모양으로 성령을 보내시어 주님의 종 그리스도에게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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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9. 주님 세례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연구소에서 실험 참가자들에게 다섯 종류의 초콜릿을 주고 얼마나 맛있는지 평가하도록 했습니다. 한 집단에는 "여기 다음 초콜릿이에요." 라고 말하며 초콜릿을 주었고, 실험 참가자들은 어떤 초콜릿이 마지막 초콜릿인지 모른 대 초콜릿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집단에는 먼저의 집단과 똑같이 말하면서 초콜릿을 주다가, 맨 마지막 초콜릿을 주면서 "여기 마지막 초콜릿이에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먹고 있는 초콜릿이 마지막 초콜릿인 것을 알게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떤 초콜릿이 가장 맛있었는지를 평가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네 번째 초콜릿까지는 두 집단이 비슷하게 맛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다섯 번째 초콜릿에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임을 알고 다섯 번째 초콜릿을 먹은 사람이 훨씬 더 맛있게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초콜릿을 알고 먹은 사람들은 이 실험을 더 재미있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이 주는 힘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이다'라고 생각되면 더 소중하게 느껴지고 재미있게 누려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이렇게 마지막은 우리 삶을 더 의식하게 만들고, 깨어있게 만듭니다. 그리고 특별한 날로 만들어줍니다.
오늘을 삶의 마지막이라 생각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삶이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닌, 마지막으로 보내는 지금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특별한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모범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대충 사는 삶이 아닌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의 편함과 안식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 구원을 위해 고통과 시련도 피하지 않는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맞이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처럼, 요한이 주님이신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반대로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당시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신 예수님은 회개할 필요가 없지요. 그렇다면 왜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요? 우리 모두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한 모범을 당신이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도 세례를 받는데, 피조물인 인간이 세례를 피해야 할까요?
단 한 명도 제외하지 않으려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 3,17)라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며, 우리는 지금을 어떻게 사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더 많이 사랑하고, 더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에 대해 만족하기
신학생 중에서 도중에 그만두는 학생이 많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이런 이유로 그만두겠다고 합니다.
"앞으로 이렇게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신학교는 정해진 일과에 맞춰서 생활합니다. 그런데 이 생활이 신부가 되어서도 바뀌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신부가 되어서도 규칙적으로 성실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똑같이 산다는 것이 고통스러워서 도저히 못 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보이는 삶도 하루하루가 분명 다릅니다. 매일 똑같다는 생각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생각한대로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생각이 그렇게 굳어져 있으니 전혀 다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생활에 대한 만족감이 없으면 똑같은 삶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너무 기쁘고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순간이 내일도 반복할 것이라면서 불행하다고 말할까요? 만족스럽지 않으니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만족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똑같은 삶의 반복을 문제라고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지금을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이 커다란 문제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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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성 예로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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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9. 주님 세례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례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이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주시리라.”(시편29,11ㄴ)
오늘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곡도 가사도 정말 흥겹고 은혜롭습니다. 사실 성탄시기 축일미사시 ‘손상오’곡 화답송 후렴들은 언제 들어도 좋아, 제가 자주 산책중 노래로 바칩니다.
1.“땅끝마다 우리 주의 구원을 모두가 우러러 보았도다.”(성탄 낮미사)
2.“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성가정 축일)
3.“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천주의 모친 대축일)
4.“하느님 만백성이 당신께 조배하리이다.”(주님 공현 대축일)
어제 2023년1월8일 주일에 우리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냈고, 오늘 1월9일에 주님 세례 축일은 지내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난 6일에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를, 그리고 어제 주일인 1월8일에 주님 세례 축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특히 교황님께서는 어제 주님 세례 축일에는 유서깊은 아름다운 시스티나 경당에서 교황청 직원들의 아기들 13명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1년 주님 세례 축일부터 시행되온 참 아름다운 관습입니다. 1787년 독일의 세계적 시성詩聖 괴테가 시스티나 경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를 보고 남긴 말입니다.
“시스티나 경당을 보지 않고서, 한 인간이 어느 정도의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직관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시스티나 경당에 관해 공부하고자 자료를 출력했는데 무려 31쪽의 방대한 분량이니 참 대단히 놀랍습니다. 오늘 공부하는 마음으로 그림과 더불어 읽어보려 합니다. 이날 세례받은 부모들을 향한 프란치스코 강론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그들의 세례 날짜를 가르쳐라. 세례와 더불어 크리스찬 삶으로 재탄생했으니, 이날은 생일과 같다. 이들이 좋은 크리츠찬이 되도록 배우게 하라. 오늘은 여러분의 아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게 될 아름다운 크리스찬 삶의 여정이 시작되는 참 좋은 축일이다. 이들을 세례받도록 한 여러분의 결정에 감사한다.”
흡사 주님 세례 축일이 우리 하나하나의 축일처럼 생각됩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얼마나 일생일대의 획기적 놀라운 은총의 사건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아마 우리의 세례시 듣지 못했을지 몰라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들려온 말씀도 분명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마태3,7)
참으로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들은 과연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삶이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이듯이 우리의 세례 역시 은총의 선물로 평생 이뤄가야할 의로움의 과제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 겸손히 세례를 받으신 주 예수님입니다. 요르단강에서 죄인들과 똑같이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모습이 흡사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강생의 신비의 연장인 듯 싶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친히 요한 세례자에게 겸손히 세례를 받으시는 의로운 모습이 감동스럽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오시다니요?”
예수님의 모습에 당황하는 요한에 대한 주님의 겸손한 반응 자체가 말그대로 의로움의 표현입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새삼 우리 믿는 이들에게 매사 최종의 판단 잣대는 하느님의 의로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예수님의 하느님의 의로움에 맞갖는 처신에 즉시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 오는 것을 예수님은 보셨고 이어 하늘에서 들려오는 하늘 아버지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3,7)
아마 이보다 예수님의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평생 신원 확립에 이보다 결정적인 말씀 체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하느님과 사람이 완전히 하나로 통교됨을 상징하는 놀라운 구원 사건이자,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복된 운명을 예감케 하는 장면입니다.
특히 어제 주님 세례 축일날 삼종기도후 교황님의 강론 말씀에 감동했습니다. 계속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인해 죽은 아이들과 병사들의 어머니들을 결코 잊지 말고 기도해달라는 당부였습니다. 예수 아기를 키운 마리아 성모님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자녀들의 죽음으로 고통받는 또 하나의 성모님들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어머니들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아무리 못나고 악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의 어머니들을 생각하면 이들을 보는 눈도 달라질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어머니들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자녀들이었을 것이고, 바로 이 측은히 여기는 어머니의 마음은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참으로 교황님의 강론 내용이 시의적절했습니다. 중심 주제는 하느님의 의로움이었고 죄인들을 구원하는 자비로 의로움을 요약했으며, 우리가 주님의 자비로움을 본받아 자비로운 사람이 될 때 우리의 의로움도 완성될 것이란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의 삶의 여정은 날로 주님을 닮아 자비로워지는 의로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새삼 이런 의로움의 여정을 통해서 우리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례받았다 하여 자비로운 자녀들이 아니라 평생 자비의 여정의 과제에 충실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의로운 자녀가, 자비로운 자녀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산상설교 참행복 선언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5,6)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바로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를 통해 의로운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대로 예수님 삶의 요약처럼 생각되는 주님의 의로운 종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가 평생 배워 닮아가야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바로 우리 하나하나에 대한 말씀으로 읽으시길 바랍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지치지도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내가 너를 빚어 세상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자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얼마나 자비롭고 섬세하며 온유하고 겸손한, 이웃을 자유롭게 하는 주님의 종의 모습인지요! 이래야 비로소 사랑의 관상가, 사랑의 신비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님은 이렇게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은 주님의 종을 롤모델로 삼았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에게 평생 닮아가야 할 롤모델인 주님의 종,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세례 축일이자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의 축일로 여겨도 무방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로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감으로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의로움을 완성해 갈 것입니다. 아침성무일도시 아름다운 즈카르야 후렴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그리스도 세례를 받으심으로 온 세상이 성화되었니,
그분은 우리 죄를 사해 주시어,
물과 성령으로 우리 모두 깨끗하여 졌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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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9. 주님 세례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마음에 드실까>
마태오 3,13-17 (세례를 받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실까>
세례 받은 이로서
살아가면서
가끔씩이라도
스스로에게 물어야지
참으로 내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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