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사는 한국인이라면
그의 정치적 입장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모두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삽니다.
국민소득 1만달러에서 10년째 발목잡힌 한국...........
정치불안, 경제불안, 안보불안,사회불안...............
한마디로 한국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이 위기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이 위기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경원교수님의 글을 읽고 스스로 그 해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경원교수님의 글을 모아놓고 다시 읽어보니
글의 내용이 정치,경제, 사회,문화등 다양한 주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되는군요.특히 "일제시대", "건국 이후의 한국현대사","오늘의 정국"을
이해하고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글은 조선닷컴 "시대유감"방에 이경원교수님이 올리신 글을 시간순으로 정리한 것
입니다. <1편>은 2003년도의 글이고 <2편>이후부터는 2004년도의 글입니다.
옛날에 이건희가 한국의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말 때문에 논란이 있었고 또 당시 김영삼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려 전전긍긍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이것도 한국의 현실을 상당이 순화시켜 표현했을 가능성이 많다. 세계 초일류기업들과 사활을 건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그의 위치에서 볼 때 한국의 현실이 이것보다도 훨씬 더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4류 정치 등등에다 3류 대학과 3류 언론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일류대학, 일류언론과 4류정치는 공존하지 않는다. 또 국민의식이 일류이고 기업도 일류인데 정치만 4류일 수도 없다. 정치가 4류이면 다른 분야도 3-4류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그래도 가장 앞서가 있는 분야가 기업과 군이다. 기업은 세계시장에서 직접 경쟁을 하는 위치에 있으니까 그나마 다른 분야보다 조금이라도 앞서 갈 수 밖에 없다. 그렇지 못하면 봄눈처럼 사라지기 때문이다.
군은 한국에서 조직문화가 가장 발달한 집단이다. 역할분담과 상명하복 리더쉽 훈련 등등에서 군 보다 더 잘 훈련된 집단은 없다. 군출신의 대통령들이 민간인 대통령보다 대통령으로서의 성적이 월등히 앞선 것이 결코 우연히 된 것이 아닌 것이다.
지금 노무현때문에 걱정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문제는 노무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를 대통령으로 밀어올린 한국식의 민주주의 자체가 지금 심각한 문제를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이 문제라면 노무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서면 문제는 해결된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들어서더라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 하는데 심각한 의구심을 들기 때문에 지금 한국의 상황이 아주 심각하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노무현을 지지하는 열우당이 한국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 처럼, 그들과 경쟁하는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을 들여다 보아도 한국의 미래를 짊어 질만한 세력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정치권은 전체가 부패했고 애국심도 보이지 않는다. 보기 흉한 이기심과 개인적 탐욕만이 원색적인 모습으로 으르렁 거리고 있을 뿐이다. 어쩌다 한두명 양심적인 모습을 간직한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국가경영을 할만한 능력이 있을까에 또 의문부호가 따라다닌다.
이래저래 정치권을 바라보면 도무지 희망이란 말을 떠 올리기 어렵다. 그런데 정치권의 이런 모습은 정치권 스스로 단독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정치권의 이런 한심한 모습 뒤에는 한심한 대학과 한심한 언론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의 대학들은 오래 전부터 한국이 서서히 2류국가에 머물 수 밖에 없는 교육적 토양을 제공해 왔다. 교육의 효과는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난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나기 시작한 효과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한국의 모습을 바꾸려면 지금부터 시작하면 한세대는 흘러가야 뭔가 가시적인 걸 볼 수 있다.
한국의 지금 이런 모습, 이를테면 적당주의와 무사안일, 애국심은 없고 이기적인 행동만 있는 것, 부패와의 타협, 지연 학연등으로 연결되는 고리문화, 거짓말 하는 것, 무능 등등, 은 적어도 한세대 또는 그 이전부터 만들어진 교육적인 토양의 결과이다.
부패를 예를 들어 말하면 부패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부패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똑 같은 사람이 부패하기도 했다가 안하기도 했다가 하기도 하겠지만 대개는 부패하는 사람은 계속 부패하고 부패하지 않는 사람은 부패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나 가치관은 보통 30세 이전에 다 갖추어진다. 30세 청년시절에 부패한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이런 청년이 기성세대가 되어 가면서 부패하게 되는 건 부패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났고 부패에 무감각한 가치관이 교육을 통해 박혀 버렸기 때문이다.
부패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랐고 부패가 나쁘다는 확실한 가치관 교육을 받고 자란 청년은 나중에 부패한 환경에 접하더라도 부패하지 않는다. 거짓말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박정희가 부패하지 않았던 건 부패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고 부패를 치욕으로 아는 가치관이 청년시절 이전의 교육환경을 통해 박혀 버렸기 때문이다. 이승만도 마찬가지이지만 부패는 고사하고 치부자체에 별로 관심들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의 이런 모습은 그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 그러니까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일본식 교육을 받고 성장한 세대들에게서 드믈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고 식민통치를 자행한 제국주의이긴 하였지만 그 당시에 이미 선진국이었고 교육도 그만큼 앞서 있었다. 거짓말 하지 않고 부패하지 않고 일을 철저하게 처리하고 등등의 습관이나 가치관이 교육을 통해 철저하게 심어졌고 그건 식민지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 였다.
일제시대 일본식 교육을 받고 성장했던 소수의 엘리트들이 한국성장신화를 창조를 선도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박정희 등을 친일파로 공격하거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의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발생한다. 물론 아주 순수하게 애국의 일념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문제는 대한민국의 부실한 교육이 이들의 지적수준을 한심한 수준으로 만들어 버렸고 또 쉽게 부패할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 놓았다는데 있다.
스스로는 애국하는 마음으로 피를 토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역사의 왜곡을 역설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에다가 쉽게 부패하고 말바꾸기와 거짓말도 익숙한 그런 류의 사람이 되어 있는 걸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면서 갈수록 추락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교육이 바뀌지 않으면 특히 대학교육이 바뀌지 않으면 지금 한국이 앓고 있는 질병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런데 교육에서 파생된 문제가 정치권에만 가는 건 아니다. 사회전반에 다 펴져나간다. 행정이 3류이고 기업도 2류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당연한 이야기 이지만 언론도 3류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교육이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그 영향력이 나타난다면 언론은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으로 효과가 타나탄다. 그래서 지금 불법정치자금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한국의 혼란상은 언론이 제 역할을 해 줄 때 제대로 방향을 잡아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언론은 그런 역할을 스스로 철저하게 외면하였다. 아니 자신들의 역할이 뭔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부패집단이라고 매도당하는 정치권에서는 오히려 전모를 밝히자는 말이 나오고 특검을 추진하고 스스로 정치개혁을 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한국 언론은 이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고 방향을 잡아 줄 수 있는 어떠한 자세도 보여주지 못하였다. 그냥 매도의 목소리만 높였을 뿐이다.
그런데 사실 언론은 정치권을 매도하거나 비판할 자격이 없다. 지금와서 언론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언론 스스로 무능을 실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이 다 아는 정치권의 불법자금을 언론만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후 정치자금을 한푼도 안받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 후 신한국당의 운영자금이나 선거비용은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 그런거 언론이 밝혀야 했다. 그래서 진짜로 대통령이 한푼도 안받는가 아니면 미리 받은 걸 어디 숨겨두었다가 몰래몰래 쓰고 있는가 등등을 언론은 당연히 추적해야 하고 또 밝혀내야 했다.
지금 강삼재가 재판을 받고 있는데 언론은 지금와서야 김영삼의 입만 쳐다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금 문제가 된 불법자금도 마찬가지이다. 이것 역시 언론이 진작에 밝혔어야 할 일이다. 정치권의 고해성사 이전에 또 검찰의 수사 이전에 언론이 미리 해야 할 일이었다.
어디서 얼마가 들어왔는가를 밝혀내기는 어려워도 얼마를 지출했는가는 대략적인 범위에서 밝혀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선관위에 신고한 내용과 언론이 짐작하는 대략적인 범위와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가는 당연히 언론이 어느 정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정치자금의 전모를 대략적으로 추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직장인이 사표를 내고 개인사업을 하기 위해 조그마한 사무실 하나를 낸다 해도 무시하기 힘든 돈이 들어간다. 사무실 월세에 전화 책상 팩스 컴퓨터 등등의 사무용품을 갖추고 전화받고 업무처리를 도와줄 직원도 한두명은 있어야 하는데 그정도만 해도 최소 월 일이천만원은 훌쩍 넘기 일쑤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간판만 내걸고 있어도 그 정도의 돈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당의 지구당이라면 조직을 갖추고 활동하는 사람들도 많다. 최소 월 수천은 있어야 지구당이 유지가 된다. 전국조직을 갖춘 정당이라면 이런 지구당이 전국적으로 200여개 까지 된다. 또 서울 한복판에 규모가 있는 중앙당이 있고 여기 상근직원만 수십명에서 수백명씩 된다.
정당의 활동사항을 보면 어느정도의 돈이 있어야 그 정도로 돌아갈 수 있는지 짐작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게다가 선거때가 되면 엄청난 수의 운동원이 동원되고 플랭카드 격문 등등 엄청난 자료들이 살포된다. 돈이 없으면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고 돈이 들어가는 규모에 따라 돌아가는 모습도 차이가 많이 난다.
정치권이 아무리 쉬쉬한다 하더라도 언론은 이렇게 드러나는 모습만 가지고도 정치자금의 전모를 어느 정도까지 추정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걸 국민들 앞에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언론만 제 역할만 제대로 하고 있었어도 정치권이 이 정도로 비참해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이런 본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정치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그들이 한마디씩 하는 말이나 주워서 쟁점화 하는데만 골몰하고 있다.
한국언론의 모습은 좀 심하게 말하면 연예인의 신변잡기나 시중의 카더라식의 말들을 그냥 실어대는 그런 류의 연예잡지나 스포츠신문들과 수준이 비슷하다. 지금 불법자금문제를 둘러싼 한국 언론의 모습은 하루종일 담당검사들을 따라다니면서 그들 입에서 한마디 나오면 그거 그냥 톱으로 싣기에 바쁘고 또 노무현이 무슨 말을 했나 (인맥을 총동원하여) 알아내어서 그냥 쟁점화하기에 바쁘다.
요즘 언론의 이런 모습이 아무리 봐도 지금 어느 연예인이 무얼하나 시시콜콜한 거 가지고 젊은층의 말초적인 관심을 유도하려는 스포츠신문과 똑 같다.
불법자금의 전모를 밝히는 일, 그리고 앞으로 어떡하면 깨끗한 선거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인가 등등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앞에 놓고 지금 언론은 별로 고민의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언론은 불법자금의 전모를 밝히자는 여론을 일으키지도 못했고 방향제시도 없었다.
예를 들면 불법자금에 대한 수사는 기업이 아니라 정당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정당을 먼저 조사해서 자금의 전모와 출처를 먼저 밝히고 돈 준 기업들로 부터 확인하는 순서가 되어야 한다. 돈 준 기업부터 먼저 조사하는 건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또 수사를 하지 않는 기업은 얼마를 주었는지 안주었는지 드러나지가 않는다. 이런 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당연히 언론이 해 주어야 한다.
불법자금도 이를테면 지난 대선으로 국한할 것인가 총선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인가 또 지금 강삼재가 재판을 받고 있으니까 김영삼김대중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인가 등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언론이 주도적으로 유도해야 하지만 한국 언론은 이런 것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니까 전두환은 30만원 밖에 없다고 하고 김영삼은 강삼재가 유죄를 받는 상황까지 왔지만 말안한다고 하고 김대중은 드러내 놓고 재벌수준의 호화생활을 보여주고 있고 또 노무현이 10분의 1이라던지 소도둑과 닭서리와 같은 말들을 계속 던지고 있는 것이다.
한심한 정치에 한심한 언론의 모습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게시일자 : 2004/01/18 18: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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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순형의 대구출마와 최병렬의 선택:
한국은 정치과열의 나라이다. 모든 길은 정치로 통하고 또 모든 관심이 정치로 통한다. 기자, 교수, 연예인, 소설가, 여성계 인사 할 것 없이 이름만 알려졌다 하면 정치에 기웃거리거나 국회의원에 출마하거나 한다. 장차관이나 청와대 수석비서관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직업공무원들까지도 정치계절이 되면 자리를 박차고 출마할 차비를 차린다. 신문기자들이 장관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출마할거냐 말거냐 몇날며칠이고 질문공세를 펼치는 나라이기도 하다. 장관이 하고 있는 업무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들이 없으면서 말이다.
정치가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의 관심거리만은 또 아니다. 보통사람들도 누굴 찍을꺼냐 말거냐를 놓고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하고 패가 갈린다. 지역과 이념에 따라 이쪽 아니면 저쪽이 되어 상대편을 타도하기 위해 사생결단으로 투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이 온통 이런 식으로 정치과열이 되어버린 것이 한국사람들만 유독 정치에 관심을 갖는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한국정치를 바라보면 보는 사람의 흥미를 유발할만한 재미가 넘친다. 별 생각없이 도박을 시작한 사람이 한두푼식 오고가고 하는 것에 자기도 모르게 몰입이 되어 밤을꼬박 새우고 돈을 다 털고서야 가까스로 일어나는 것 처럼, 한국 정치도 관객을 끌수 있는 흥미진진한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원래 승부를 가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흥미를 유발하기 마련이지만 한국정치는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극적인 요소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장면들이 거듭되고 관전자들을 자기도 모르게 몰입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
한국정치가 다른 어떤 스포츠나 드라마나 영화 보다도 훨씬 더 극적인 요소를 많이 갖춘 관객의 흥미를 끄는 모습으로 변형시킨 일등공신을 찾으라면 아마도 김영삼을 꼽아야 할 것이다. 멀리는 40대 기수론부터 시작하여 3당합당과 대권쟁취에 이르기까지 하기 좋은 말로 승부사의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정치가 얼마나 재미있고 극적인 요소들이 많은가를 관객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준 장본인이 바로 김영삼이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는 깜짝쇼와 예측불허의 정책들로 재미를 본 적도 있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나라 살림을 많이 헝클어 버리기도 하였다.
노무현도 정치라는 무대에서 흥행에 성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국민경선이라는 이름으로 제주도에서 시작하여 소위 말하는 노풍을 점화시켜 북상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정몽준과의 극적인 단일화와 또 단일화가 깨진 것 모두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흥행성공작이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는 조순형이 정치라는 무대에 올라 관객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전격적인 대구출마선언이 그것이다. 그런데 조순형의 경우는 이전의 승부사들과는 승부의 성격이 약간 다르다.
김영삼이나 노무현은 불리한 여건에서 도전과 전면적인 승부를 통해 정치적 성장을 거듭하였고 마침내는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목표가 대통령이었고 그러니까 승부를 걸 수 있었다.
그런데 조순형의 경우 그가 승부에서 이긴다면 다음 목표가 무엇인지 그것이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가 5선의 중진이고 원내 제 2당의 대표이지만 대권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어떤지는 아직 드러난 것이 없다.
물론 조순형이 대구에서 살아난다면 강력한 차기주자로 부상할 가능성은 있다. 문제는 지역구도 타파라는 거창한 명분과는 별개로 그가 살아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데 있는 것이다. 좋게 보아 누군가는 시도해야 하는 대의를 위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라 할 수도 있다. 조순형의 스타일로 보아 차기 대권을 염두에 둔 행보라기 보다는 명분을 위해 스스로 장렬하게 전사하는 길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그가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대구지역은 대노무현투쟁을 하고 있는 야당의 텃밭이라는 점이다. 조순형과 민주당은 스스로 야당이라고 하면서 같은 야당의 의석을 잠식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야당이면 공격목표는 당연히 여당이 되어야 한다. 또 민주당으로서는 한나라당 보다는 열우당을 약화시켜야 한다. 한나라당을 죽이는 것이 민주당이 사는 길이 아니고 열우당을 죽이는 것이 민주당이 사는 길이다.
대선에서 승리하고도 당이 둘로 쪼개졌으면 총선을 통해 승부를 갈라야 한다. 조순형이 스스로 장렬하게 전사하는 길을 선택하려 했다면 지역구도 타파를 내세우고 대구에서 출마할 것이 아니라 노무현과 열우당에 대한 심판을 내세우고 전주에서 정동영이와 한판 붙어야 했다.
그게 명분도 서고 또 자신은 전사를 하더라도 적어도 민주당은 살릴 수 있다. 자신이 전주에서 전쟁을 치룬다면 그것이 호남전체에서 민주당이 바람을 일으키고 선전할 수 있는 요인은 충분히 될 수 있다.
그가 대구를 택한 것은 일시적으로 세상의 관심을 유도하고 흥미를 야기시킬 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서울이나 호남에서 민주당에 대한 표로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하는 건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잘났던 못났던간에 정동영이 여당의 대표가 되었고 김대중이 없는 호남에서 앞으로 그가 차기를 도모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호남을 지배하기 시작한다면 이번 총선이 호남지역에서 민주당고전과 열우당선전으로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민주당은 당연히 이런 면을 염두에 두고 경계를 하는 방향으로 선거전략을 세워야 한다. 쉽게 말해 열우당을 호남민국당으로 만들어버려야 민주당이 살 수 있고 그럴려면 정동영이 대권주자감이 못된다는 걸 호남인들에게 (전국의 유권자들이 아니라) 인식시키는 방향으로 선거전을 잡아야 한다.
그러니까 조순형은 대구가 아닌 전주로 가는 것이 백번 옳은 전략이었다. 그러나 어째튼 그는 대구출마를 선언했고 이제 되돌릴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순형의 대구출마로 골치가 아프기는 한나라당이나 대구시민도 마찬가지이다. 노무현을 반대하자면 한나라당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조순형이 정치권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아까운 사람이긴 하지만 노무현을 돕는 쪽을 표를 행사할 수는 없고 그래서 조순형에게 표를 주기가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조순형을 떨어뜨리면 한나라당과 대구는 여전히 지역주의에 안주하는 것으로 비판받을 수 밖에 없다.
조순형으로서야 이기면 강력한 차기주자로 부상할 수도 있고 지더라도 이미 70에 가까운 나이에다 마지막을 지역주의 청산을 위해 산화한 정치인으로 자리매김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나 대구시민들로서는 조순형을 당선시키면 결과적으로 노무현을 돕는 게 되니까 영 내키지 않고 또 떨어트리면 지역주의에 안주하는 것으로 비판받고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본전이 안나오는 장사이다.
여기서 한나라당이 본전장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나온다. 아니 한나라당도 살고 조순형도 살고 민주당도 살리는 길이 나온다.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은 미지수이지만 분명히 길은 있다.
대구에서 조순형을 당선시키는 것이다. 조순형이 민주당간판으로 대구에서 당선이 되도록 한나라당이 협조하는 것이다. 막상 선거가 가까이 다가오면 흥분된 감정 보다는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고 민주당으로서는 조순형의 대구출마가 민주당의 세확장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걸 인식하게 될 것이다.
민주당 전체에 위기의식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를 기다려 최병렬이 조순형에게 손을 내 미는 것이다. 합당은 어렵겠지만 연합공천이나 과거 DJP연합과 같은 형태의 연합을 시도할 수는다. 김대중이 이선으로 물러나고 노무현과 열우당마저도 딴 살림을 차린 지금 남아있는 민주당 사람들의 성향이냐 이념은 한나라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념적 정서적 차이는 노무현 쪽의 사람들과 지금 민주당쪽의 사람들과의 차이가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차이보다 오히려 훨씬 크다.
지금 민주당사람들 이를테면 박상천이나 조순형은 최병렬이나 서청원이 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 박상천과 노무현이 같은 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이라는 우산 아래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김대중이 없는 지금 민주당의 분당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을 수도 있다.
어째튼 최병렬은 조순형을 도와주고 그걸 계기로 해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힘을 합치는 것이다. 그것이 또 지역주의 극복의 획기적인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고 조순형의 대구출마의 명분과도 딱 맞아 떨어진다.
여기에도 물론 걸림돌은 있다. 김대중 시절의 비리나 대북송금문제, 정치자금문제 등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게 그것이다. 김대중의 안위가 보장되지 않으면 민주당은 한나라당을 향해 한걸음도 걸어올 수 없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김대중이 아니고 노무현이다. 그리고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이 참패하고 열우당이 2당 정도로 부상하게 되면 자신감을 얻은 노무현이 자기 생각대로 나라살림을 밀어부칠 가능성도 크다. 자칫하다간 나라가 절단나는 것이 시간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지금 정치권에서 김대중을 다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사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는다 하더라도 김대중을 다룰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3김을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이회창이었다. 그가 다시 전면에 나선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정치권에서 3김을 뛰어넘을 사람은 없다.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영호남의 벽을 허물고 또 노무현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한나라당은 김대중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걸 보장한다면 민주당으로서도 결코 한나라당과의 연합이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다.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조순형을 최병렬이 살릴 수 있다면 극적인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온 한국정치에 또다른 극적인 장면이 연출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더이상 극적인 장면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래서 사람들이 재미를 덜 느끼고 정치에 조금은 무심해 질 수 있는 소위 선진국형 모습으로 가는 첫걸음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정치가 너무 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건 한시바삐 털어버려야 할 후진국형 정치의 모습인건만은 분명하다.
게시일자 : 2004/01/23 18: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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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성장과 고용:
요 아래 김영희님께서 청년실업에 대해 너무나 값진 말씀을 주셨다. 란도님과 토달이님 역시 값진 코멘트를 주셨다. 이 문제에 대한 글을 한번쯤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훌륭하신 분들의 좋은 말씀들이 계셨으니까 여기서는 성장율 3%라는 의미만 한번 새겨보기로 하자.
대한민국의 작년도 경제성장율이 2.9% 그러니까 3%가 안되는 걸로 나타났다. 이 수치는 노무현정부의 존재가치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무도 이걸 지적하지 않는다. 언론에서도 그렇고 전문가들도 그렇고 여야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경제가 3%성장했다는 것은 나라전체의 경제규모가 3% 커졌다는 걸 말한다. 개인가정으로 치면 작년에 수입이 3% 늘어났다는 것 이를테면 전년도에는 1억원을 벌었는데 작년에는 일억 3백만원을 벌었다는 것과 같다.
개인가정에서도 일억원이나 일억3백만원은 별반 차이가 없다. 좀 늘긴했지만 수입이 늘어났다는 걸 피부로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수입은 3백만원이 늘어났는데 가족수가 이를테면 아이가 하나 더 태어났다던지 아니면 아이들이 대학에 가거나 고3이 되어 교육비가 갑자기 확 늘어났다면 생활은 좀 더 궁핍해질 수 있고 피부로 느끼는 수입수준은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느낄 수도 있다.
국민소득이란 것은 쉽게 말하면 나라안에 있는 개개인의 소득들을 다 더한 것의 총합이다. 경제가 3% 성장했다는 건 대한민국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벌어들인 소득의 총합이 3% 늘어났다는 것이다.
보통 가정에서도 아이가 새로 태어나거나 또는 아이가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나 하면서 지출의 규모가 커질 수가 있다. 그런데 나라 전체적으로 보면 인구도 늘어나고 경제활동가능연령층의 인구도 계속 늘어난다. 그러니까 나라전체 경제규모는 항상 조금씩은 증가하게 되어있다.
한국은 아직도 연간 수십만명 규모의 중소도시가 하나씩 생겨난다 할 정도로 인구가 증가하는 나라이다. 경제가 성장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구가 증가하지 않는다 해도 경제는 조금씩은 또 증가하게 되어있다.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해마다 경험이 축적되고 경영의 노하우도 축적되고 등등으로 해서 전년도보다 돈을 더 잘 버는 경우가 많다. 똑 같은 수의 손님들만 상대한다 해도 해가 갈수록 장사기술이 늘어나고 그만큼 돈을 더 번다. 소위 생산성향상이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장사하는 기술도 늘어나지만 재고정리나 품질관리 상품의 특성 등등을 전산화하여 업무의 양을 확 줄이면서 정확성은 또 획기적으로 높이는 식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도 있다. 생산성이란 것이 노동력자체의 교육이나 경험이 증가하여 높아지기도 하지만 첨단기술이나 기계 컴퓨터 등등이 쏟아지면서 증가하기도 한다. 미국이 다른나라들 보다 생산성이 높은 건 첨단기계나 장비등을 이용하는 정도가 앞서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경제개발 초기시절에 두자리수 성장율을 기록할 정도로 높은 성장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생산성의 증가가 급격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산업화에 맞는 인력들이 쏟아져 나오고 새로운 기계나 생산설비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또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계속되고 하면서 생산성이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였고 경제가 급격하게 팽창할 수 있었다.
지금 중국이 높은 성장율을 기록하는 이유도 바로 지난 60-70년대 한국과 같이 생산성의 향상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그런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가 선진국수준이 되면 성장율 몇퍼센트 정도에 머물게 된다. 인구의 증가도 정체되고 또 생산성이란 것이 계속해서 급격하게 증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일본 서부유럽의 성장율이 그냥 0-4% 정도에 머물러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있다. 그래도 미국은 세계각국에서 이민자가 계속 들어오면서 인구도 조금씩이긴 하지만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고 또 끊임없는 생산성의 증가를 도모하고 있는 나라이다. 선진국들 가운데 성장률이 비교적 높게 나타나고 있고 그만큼 다른 나라들과의 격차를 계속 별려나가고 있다.
그런데 아직 한국은 생산성이 선진국수준에 미치는 나라도 아니고 인구도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는 나라이다. 한국의 경제수준으로 봐서는 최소 5-6%대의 성장은 지속시켜야 한다. 성장률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일자리가 증가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은 대전시인지 청주시인지 정도의 도시가 매년 새로 생겨나는 정도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데 성장율이 3%밖에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일자리의 절대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만큼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어지고 실업자가 늘어났다는 말이다.
한국이 전쟁시기를 제외하고 성장률이 낮았던 적을 보면 10.26 이후에 제로포인트대의 성장율인가를 기록한 적이 있었고, 또 IMF 당시에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었다. 전시도 아니고 대내외적으로 특별히 어떤 악재도 없었는데 경제가 3%성장에 머물렀다는 건 대통령이 경제가 성장하는 걸 방해했다는 걸 의미한다. 대통령이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팔장만끼고 구경만 하고 있어도 최소한 3% 보다는 더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문에서 지금 한국경제의 모습을 보고 고용없는 성장이라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지금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이건 지금 한국경제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하기 어렵다.
고용없는 성장은 작년 후반기 미국경제를 보고 일부학자들이 했던 말이다. 성장율이 무려 7%대에 이르는 엄청난 성장을 보였지만 일자리 증가는 미미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경제가 이런 모습을 보인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만 한국은 고용없는 성장의 모습이 아니다.
한국은 심각한 경제의 하락을 경험하고 있고 바로 그것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든 것이다. 고용없는 성장이 되려면 적어도 6-7%대의 성장을 기록하고도 일자리가 늘지 않았다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심각한 경기불황에다 구조적인 경제의 하락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경제를 이런 식으로 몰아간 사람이 바로 대한민국의 집권층이다. 현정부는 미군이 한강이남으로 옮겨가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고 또 대한민국에서 일자리가 줄어들어가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런데 아무도 이걸 지적하지 않는다.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는지 아니면 아예 몰라서 그러고들 있는지 그것이 나는 궁금하다.
게시일자 : 2004/01/24 15:4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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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노무현과 한국경제:
경제가 어렵다고들 야단이다. 신문을 보면 지금이 IMF당시보다 더 어렵다고들 한다. 경제가 어렵다는 건 일자리가 없고 실업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는 말이다. 일자리가 있어야 먹고살수도 있고 또 인간다운 생활도 해 나갈 수가 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어느 정도는 일할 자리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불과 한 세기전만 하더라도 시장경제체제에서는 실업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을 정도였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이유는 시장경제체제는 자체적으로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사람들이 먹고살수 있는 방편을 제공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기본적인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사람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또 잠잘 곳이 있어야 한다. 소비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소비가 있으면 생산이 있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숨쉬고 살아가고 있는 곳이라면 생산과 소비가 계속해서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자연에는 자연의 법칙이 있는 것 처럼 경제도 이런 법칙이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군가는 소비를 하고 있고 또 소비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을 하고 있다.
이 세상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왔고 그래서 소비라는 것이 옛날 처럼 그냥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하는 수준에서 지금은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테레비나 전화는 기본이고 자동차도 있어야 하고 휴대전화도 있어야 한다. 옷을 입어도 세련된 디자인이나 품질이 받쳐주어야 한다. 음식을 먹어도 마찬가지이고 주택도 마찬가지이다.
교육시설도 필요하고 병원도 필요하고 남극에서 지질연구를 하는 것도 필요하고 우주공간에 인공위성을 띠우는 것도 필요한 세상이 되어 있다. 보통사람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분야에서까지 생산과 소비는 계속 확장되어 왔다.
소비가 줄어들면 생산은 자연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생산이 준다는 것은 실업자가 늘어난다는 말이다. 실업이 늘면 소비는 더 줄게 되고 소비가 줄어드니까 생산은 더 줄어들고 실업은 그만큼 더 늘어나고 소비는 또 줄게되고 등등의 악순환이 연속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는 것은 그러니까 생산과 소비 둘이 한꺼번에 줄어들거나 둘 중 어느 하나가 줄어들거나 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소비를 줄이는 것은 소득이 줄기 때문이다. 또 지금 당장 소득이 줄지는 않아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저축을 늘리면서 소비를 줄이기도 한다. 생산자들이 생산을 줄이는 것은 물건을 만들어도 팔릴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세상이 어지러워 투자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어렵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생산을 하려면 먼저 투자계획을 세워야 하고 자금을 끌어와야 하고 설비나 기계들 들어오거나 공장을 새로 건립하거나 해야 하고 또 사람을 새로 고용하기도 해야 한다. 소비자가 백화점에 가서 옷을 한벌 사 입는 것은 그냥 무료해서 구경갔다고 사기도 하고 하지만 그 옷을 만들어 파는 사람은 오래 전부터 여러가지 상황이나 여건을 살펴가면서 나름대로 면밀한 계획을 세우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소비자가 아무 생각없이 충동적으로 살 수 있는 작은 물건이라도 그것이 시장에 나올 때까지는 누군가가 오랫동안 시간과 돈과 노력을 투입해야만 한다. 누군가가 그런 역할을 해 주지 않으면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시장상점의 진열대에 있을 수가 없다.
그러면 왜 노무현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경제가 이렇게 어렵게 되어 가고 있는가? 물건을 만들어 파는 행위, 즉 기업의 생산활동을 급격하게 위축시켰기 때문이다. 생산이 안되니까 실업이 늘고 사람들의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까 소비가 안되고 그러니까 생산은 더 줄고 실업은 더 늘고 등등의 악순환이 연속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이 투자를 하지 않고 새로 들어오는 외국기업들도 없고 지금 한국안에 있는 기업들 조차도 투자계획을 한국이 아닌 중국이나 다른 나라를 찾아나서고 있으니까 한국경제가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왜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게 되었는가? 노무현정부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특히 노무현정부 출범기에 발생한 최태원에 대한 전격적인 구속이 기업들의 불안감과 투자심리를 급격하게 위축시켜 버렸다.
최태원의 구속은 새로 출범하는 정부가 기업들의 군기잡기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했지만 그 당시 한국경제는 사실 또 한번의 파국이 오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얼어붙고 있었다. 정부도 뒤늦게 심각성을 인식하였고 나름대로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동분서주 하였고 최악의 상황은 모면하였지만 경제의 어려움은 극복되기가 어려웠다.
특히 정치권의 불법자금수사가 불거지면서 주요기업들은 다시 바람앞의 등불같은 신세가 되어 권력 앞에 노출되었고 기업들로서는 새로운 투자를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상황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것이다.
새해가 들어서면서 대통령은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대통령이나 집권세력 안에서 경제라는 생명체가 살아서 돌아가는 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일자리를 생겨나게 하려면 기업들이 투자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권력의 요구에 마지 못해 시늉만 하게 하는게 아니라 기업들이 경제에 대한 전망을 보고 스스로 판단해서 투자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 집권세력 안에서 경제의 이런 생리를 아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섯불리 투자하기가 어렵다. 바로 이런 점이 지금 한국 경제를 얼어붙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의 관행화된 불법과 부패는 기업의 그것과 맞물려있다. 불법과 부패는 어쩌면 한국적인 전통이기도 하고 문화이기도 하다. 이것을 뿌리 뽑는 문제를 놓고 지금 권력자는 그냥 시늉만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권력기반강화에만 급급하고 있다.
자연현상만 정직한게 아니고 경제도 대단히 정직하게 흘러간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것 처럼 경제도 전체의 순환을 유기적으로 이해하고 그런 흐름이 원활하게 될 수 있도록 해야만 잘 돌아가게 되어 있다.
물을 꺼꾸러 흘러가게 할 수 없는 것 처럼 경제도 인위적으로 또는 강압적으로 억지로 흐름을 바꿀 수가 없다. 어느 한두사람이 어설픈 지식이나 설익은 정의감이나 의욕 하나만으로 잘 가게 할 수 있는 분야가 절대로 아니다.
장관의 업무내용이 언론의 관심이 되는 게 아니고 장관이 총선에 나오는가 안나오는가 하는 것이 언론의 관심이 되고 있는 그런 분위기에서 경제는 살아날 수가 없다. 노무현대통령과 한국경제의 어려움, 이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게시일자 : 2004/01/31 07: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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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본질을 벗어난 평균화해제논란:
지금 한국사회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혼돈 그 자체이다.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잃어 어디를 향해야 육지가 나올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저마다 이쪽이다 저쪽이다 소리치고 있어서 혼란만 더 부채질 하고 있다.
지금 교육의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교육이란 사람의 인격과 지식을 함양하는 과정이다. 사람을 컴퓨터에 비교한다면 교육은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입력시키는 과정과 같다. 컴퓨터는 입력된 프로그램대로만 기능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람은 컴과는 다르다. 기계는 프로그램이 잘못되었으면 즉석에서 지우고 새로운 걸 입력시키면 된다. 사람은 프로그램이 일단 한번 잘못들어가 버리면 그게 잘 지워지지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지우고 지우고 해야 겨우 지울 수 있을까 말까한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입력시킬 때도 마찬가지이다. 새걸 깔아서 그게 제대로 작동되게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어떤 건 평생동안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본인이나 주변사람을 고생시키는 경우도 많이 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걸 습관적으로 한다. 주변에서 거짓말 하지마라 하지마라 닳도록 말을 하면 한번씩은 하지 않다가도 조금만 방심을 하면 바로 또 거짓말 하는 습관으로 돌아가 버린다.
거짓말 하는 프로그램이 머리 속에 깊이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질서를 지키지 않고 도둑질을 하고 뇌물을 받아먹고 부패하고 이런 게 다 오랬동안 살아오면서 그런 프로그램이 머리 속에 깊이 입력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러기때문에 사람에게 교육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정직하고 부패하지 않고 책임감 있게 맡은 일을 해 나가고 남의 인격을 존중하고 질서나 경우를 지키면서 살아가고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서만 익혀질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어느 시골에 초등학교 가기 전의 아이들이 가는 유치원 같은데를 한 번 가 보자. 한 교실에 20명의 어린 아이들이 있으면 장난감은 10개 정도만 있다. 그래서 열명의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놀면 나머지 열명은 책을 읽거나 하면서 자기차례를 기다린다.
장난감도 자동차도 있고 코끼리도 있고 인형도 있고 그렇다. 자동차를 갖고 놀고 싶으면 그것도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말귀를 못알아듣고 제고집대로 하려고 하는 아이가 있으면 선생이 집중적으로 교육을 시킨다. 그래도 잘 안되면 학부형을 오라고 한다. 선생과 부모가 합동으로 아이가 질서를 지키고 자기차례를 지키고 하는 훈련이 되어가도록 교육을 시켜 나가는 걸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이가 만약에 이런 식으로 해서 통제가 되지 않으면 그건 아주 심각한 문제로 간주된다. 부모와 선생 모두가 긴장된 표정을 풀지 못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부모들은 십중팔구 최근에 한국에서 건너온 젊은 부모들이다. 또 그런 부모의 아이 일 수록 아무 말도 안듣고 제멋대로 하려하기 일쑤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학교에서 문제아로 간주되고 상담실이나 심리치료선생의 도움을 받는 그런 지경까지 가게된다.
중고등학교에 가면 교과서를 선배들로 부터 물려받아 쓰게 하는 곳이 많다. 자기도 깨끗하게 쓰고는 학기가 끝나면 반납한다. 물건을 아끼고 깨끗하게 사용하고 하는 것들 역시 두말 할 것도 없이 다 훌륭한 교육이다.
교육은 오랜 기간동안 반복적 지속적으로 계속 되어질때만이 그 효과가 나타난다. 물건을 아껴쓰는 습관을 길러줄려면 태어나서 부터 대학 졸업때까지 계속 해서 반복적으로 낭비하는 모습이 나올 때 마다 학교에서고 가정에서고 그걸 지적하고 바로잡아주는 교육이 되어져야 한다. 물론 그 아이의 주변 모두가 물건을 아껴쓰는 것을 항상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을 머리 속에 집어넣어 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지식을 깨우쳐 나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다 인격함양이 되고 지적수준을 높여나가는 과정이 된다. 선생이 내 준 숙제를 하고 시험을 보고 점수를 받고 성적을 받고 하는 과정을 통해 꾸준하게 노력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해 나가는 것을 배우게 된다.
기업체에서 좋은 대학 출신을 뽑고 또 학교 때 성적이 좋았던 사람들을 뽑고 하는 것이 그걸로 사람의 성실성 등등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교육은 과정이 중요하다는 개념이 없다. 졸업장 하나만 있으면 그만이다. 물론 경쟁이 치열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졸업을 했으니까 졸업장 하나만으로도 많은 것을 판단할 수는 있다.
문제는 입학은 어려워도 과정이 부실하여 졸업장 하나만 가지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잘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교육의 결과가 바로 지금 한국의 현실이다.
부패하고 거짓말하고 학맥이나 인맥을 형성해서 패거리끼리 해먹고 실력은 도무지 있어 보이지 않고 등등의 모습들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현실 속에 노출된 문제와 혼돈은 사실 교육의 부실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교육과정이 제대로 되어있고 제대로 된 사람들을 만들어서 사회에 배출시켰다면 절대로 지금과 같은 혼란과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잘못된 교육의 정점에 있는 것이 한국의 대학교육이다. 무엇이든지 완벽할 수는 없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게 마련이다. 평균화제도가 야기하는 문제도 물론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시급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 대학교육이다.
문제의 본질은 대학에 있고 대학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절대로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의대 법대로 향하고 서울공대 학생들의 태반이 고시공부를 하고 있고 등등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이런 것도 대학이 정상적인 모습이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선생들이 수업을 제대로 하고 학점관리를 엄격하게 한다면 공대생이 고시공부를 할 수가 없고 만약 그랬다간 졸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시공부 하는 학생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고도 졸업할 수 있는 학교가 문제인 것이다. 학교공부는 그런 식으로 해서 졸업장만 따고 판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니까 지금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서울대학교의 정운찬 총장이 평균화의 문제점을 지적했다고 한다. 물론 그는 알려진 대로 평균화 반대론자이고 그의 말대로 평균화가 야기하는 문제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평균화를 해제하고 과거와 같은 경쟁입시체제로 간다고 해도 대학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평균화해제를 주장하는 선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직도 선생의 일이 무엇이고 교육이 어떤 것인지 알지를 못하고들 있는 것 같다.
서울대학이나 일부유명대학으로서 제기되는 평균화에 대한 불만이란게 입학생들의 학력이 저하되어 정상적인 대학교육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 같은데 그런 것은 사실 정상적인 대학선생의 사고방식이라 할 수가 없다.
대학교 선생은 중고등학교 선생하고는 다르다. 중고등학교는 정해진 교과과정 대로 가르쳐야 하고 그 수준으로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대학은 그런 틀이 없다. 대학교 일학년에게 인수분해만 가르치던지 대학원 수준의 미적분 응용을 가르치던지는 한마디로 선생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선생이 가르치고 싶은 수준이 있으면 그 수준대로 가르치면 된다. 못따라 오는 학생은 스스로 코피가 터지게 공부를 하던가 아니면 말던가 하면 된다. 중고등학교는 가급적이면 낙제를 시키지 않고 학생을 끌고 가야 하지만 대학은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4년제 대학교 정도 들어갈 정도이면 대학교육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학력이 나쁘다고 말하기 어렵다. 미국에서 보면 대학입학시에 인수분해도 모르던 학생이 대학원 정도에서 보면 고급수학을 이용한 논문을 쓰는 수준까지 가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특별히 뛰어난 학생이나 열등한 학생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선생이 교육시키는 데로 가게 되어 있다. 좋은 선생을 만나 열심히 하면 뛰어난 실력자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무능한 사람으로 되어간다.
학생은 코피터지게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실력이 늘고 또 인격도 쌓이게 된다. 하나하나를 깨우쳐나가는 과정 그려면서 학점을 하나하나 얻어나가는 과정 그 과정의 어려움을 한국의 대학에선 모른다. 선생들이 그런 걸 가르치지 않고 학생을 졸업시켜 버린다.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절대적인 한계를 느끼는 경우를 당하기도 하면서 지식만 느는 것이 아니고 인격적으로도 성숙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모르면 지식도 없고 실력도 없으면서 세상물정 모르고 교만만 늘게된다. 교육을 안받는 것 보다 못하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교육이 되어버리면 앞에서 말했던 것 처럼 좀처럼 고쳐지지가 않는다. 지금 일부 386출신 정치인들의 황당한 모습이 바로 이런 교육때문에 그런 것이다.
지금 교육은 많이 잘못되어 있다. 편법과 부정과 부패와 거짓말과 적당주의 등등 지금 한국에 만연한 많은 문제들이 다 교육에서 특히 대학교육에서 배워나온 것들이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수업도 빠지고 했는데도 학점을받으면 그건 일을 대충하고 적당하게 해도 되는 교육을 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체육특기자나 학생회 간부들은 수업한번 안들어오고도 학점받고 졸없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런 것이 바로 편법이고 불법이다. 야구선수 이승엽이가 어디 대학원에 입학했다는 걸 본 적이 있는데 대학도 안가고 바로 프로구단에 입단했던 선수가 어느 새 대학원생까지 될 수 있는게 한국이다.
선생이 학생의 논문을 지도해주고 밥을 얻어먹는 것은 그게 바로 부패이다. 선생이 학생에게 부패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 선생 밑에서 그렇게 배운 학생은 나중에 기성세대가 되면 똑 같이 하게 되어 있다.
평균화해제논의 이전에 대학교육부터 바로 세우는 논의가 있어야 한다.
게시일자 : 2004/01/31 17: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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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정부는 파산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보면 천국같아 보이는 선진국에서도 정치불신은 대단하다. 한국에서는 하나같이 부러운 지도자들이지만 이들 국민들에게는 그래도 불만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정부에게 권력과 돈을 맡기는 것은, 청소년에게 위스키와 자동차키를 주는 것과 같다”고까지 혹평이다. 그런데 이런 말은 지금 한국정부한테 딱 맞는 말이 아닐까 싶다.
권력자가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정부는 절대로 파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가 아무리 어렵고 굶어 죽는 사람이 있고 해도 권력자는 아주 잘먹고 잘 살게 되어있다.
둘 이상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곳에는 생산과 소비가 끊임없이 이루이진다. 설사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누군가는 생산을 하고 있고 또 소비가 있다. 그런데 생산과 소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세금이 있다.
호주머니에 현금을 한푼이라도 넣고 다닌다면 국가가 부과하는 세금이라는 족쇄를 피해갈 사람은 거의 없다. 설사 돈을 한푼도 벌 수 없어서 정부가 제공하는 복지제도에 연명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세금을 조금은 낸다. 하다못해 어디 가서 신발한짝을 사더라도 부가세 같은 것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물건 값이 세금이 얼마라고 따로 명시가 안되어서 의식을 못할 뿐이지만..
여하튼 정부는 이렇게 일반 백성들의 피묻은 돈 코묻은 돈 벼룩의 간보다도 적은 돈 일일이 다 추적해서 그중 일부를 떼어간다. 그래서 자기들은 어느 호화재벌 못지 않게 살아간다.
한국경제에 정말 파국같은 것이 온다면 삼성 같은 기업도 망할 수 있고 이건희가 알거지가 될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여전히 청와대에서 폼나는 요리를 먹으면서 알거지가 동냥해온 돈도 세금을 메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수 있다.
지금 청년실업, 신용불량자, 생활고로 일가족 자살사건 등등이 신문지면을 온통 장식하고 있어도 대통령은 어느 장관을 총선에 내보내나 마나를 놓고 고민하고 있고 장관들 역시 총선에 나갈까 이 자리 그냥 고수할까를 놓고 고민하면서 시간을 죽일 수 있는 것이 다 자기들 하고는 상관없는 사회시스템 때문이다.
청년실업자가 늘던말던 자살자가 속출하던 말던 자기들은 무조건 하고 국민들 호주머니에서 세금을 뗄 수 있고 그 뗀 돈으로 고급 사무실에 직원까지 붙여서 일하도록 해주고 또 날짜만 되면 통장에 월급도 들어온다.
책임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게으르고 낭비벽이 심한 사람 같으면 국민들은 꼬박꼬박 세금내서 그 사람 낭비하도록 허용하는 셈이 된다.
국민들은 죽어나가도 자기 앞에 주어진 예산 마음대로 쓰면서 일은 안하고 총선에 나가 말어만 궁리하고 있어도 그걸 중지시킬 방도가 없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러면 어떨까? 청년실업 0.1% 늘어나고 성장율이 0.1% 떨어질 때마다 대통령장관국회의원 등 선출직과 정무직 공직자들의 월급을 주지 않고 자기들 재산에서 10%씩을 떼어서 국가에 헌납하게 한다. 그리고 생활고로 가족이 동반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들 공직자들의 밥을 열흘간 굶긴다.
그러면 좀 정신들 차리지 않을까?
게시일자 : 2004/02/02 15: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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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친미반미용미숭미:
한국은 지금 혼돈상태이다. 아마도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이 지금 한국의 모습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혼돈의 연속이다. 한국이 왜 이토록 극심한 혼돈과 혼란의 수렁으로 빠져버렸는가?
무엇이 진리인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조국이 무엇인지 그 개념이 잊혀져 버렸고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는가 또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가에 대한 개념이 잡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미감정을 아주 원시적이고 일차원적으로 노출시키는 소위 진보계열의 대표적인 언론사가 그 이름은 또 영어로 되어있다. 반미를 외치고 민족을 강조하면서 이름을 영어로 하는 건 도데체 어떤 발상에서 나온 것인가? 도무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고 있는 것이다.
친미냐 친북이냐 등등을 놓고 야단법석들이지만 답은 아주 간단하다. 조국이란 무엇이고 대한민국이 나의 조국인가 하는 물음과 또 나는 자유와 인권을 최고의 가치로 신봉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만 분명히 알고 있으면 친미나 친북이냐 등등에 대한 혼란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대한민국이 나의 조국인가에 대한 확신도 없고 내가 자유와 인권을 최고의 가치로 신봉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니까 반미도 했다가 친북도 했다가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조국은 개인이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가치존재이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서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 대한민국이 조국인 사람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조국인 사람들은 그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미국이 조국인 사람들은 물론 미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때 바치지 않으면 그는 배신자이고 반역자라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중죄인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러면 어떤 조국이라도 국민은 그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또 남는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명확하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있는 독일에서도 독일국민은 자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했었는가 하는 문제를 보면 답은 금방 나오기 때문이다.
히틀러치하의 독일이라면 목숨을 걸고 그 정권을 전복시키는 투쟁에 나서는 것이 조국을 지키는 일이다. 지금 독일은 자신들의 선조인 히틀러는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인으로 생각하고 그 히틀러에 대해 전면적인 투쟁을 벌였고 결국 히틀러를 사라지게 한, 또 그러기 위해서 자기나라를 점령했던, 외국나라들을 오히려 친구처럼 생각한다.
조국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가치이지만 동시에 그 조국은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 것 그 전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자유와 인권을 지향하지 않는 조국은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 국민이 지켜야 할 조국이 아니다. 조선을 조국의 일부로 생각하고 지켜야 할 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 조국이고 무엇이 지켜야 할 가치인지 그걸 모르기때문에 일어난 혼돈인 것이다.
조국과 역사의 발전방향에 대한 인식의 부재는 필연적으로 자기조국에 대한 반역과 배신이라는 오명을 또 낳게 된다. 쉽게 말하면 북조선을 조국의 일부로 생각하는 건 대한민국에 대한 배신과 반역이다.
자유가 없고 인권이란 개념이 없는 북조선은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니고 투쟁과 타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친미반미용미숭미 등등 온갖 말이 난무하는데 이것 역시 답은 간단히 구할 수 있다. 자유와 인권이라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관에 얼마나 충실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그것이다.
친미냐 반미냐 또는 용미냐 숭미냐 하는 것은 어느 것이 자유와 인권을 더 추구하는 방향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따라 판단하면 된다.
미국은 다른나라이기 때문에 배척해야 하고 북은 같은 민족이니까 가까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위험한 것은 바로 이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보편적인 가치, 즉 자유와 인권의 확대라는 가치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김수환추기경은 바로 이걸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걸 모른다. 그들에게는 조국에 대한 개념도 없고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개념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동서남북에 대한 최소한의 방향감각이나마 어떻게 심어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혼돈에 빠진 지금의 현실을 구할 수 있는 첩경일지도 모른다.
게시일자 : 2004/02/04 17:3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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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야만의 시대: 안상영의 죽음
박정희와 전두환의 차이가 무엇일까? 똑 같이 군출신에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였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철권통치로 국민들의 저항을 받은 독재자이면서도 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왔다는 점에서 둘은 비슷한 면이 많다.
비슷한 면이 많은 둘이지만 국민들의 인식은 많은 차이가 있다. 죽고 없는 박정희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반면에 아직 살아있는 전두환에 대해서는 그런 것이 거의 없다.
박정희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과거 박정희한테 수난을 받았던 사람들도 많이있다.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한 분이 경제학계의 원로급이라 할 수 있는 서강대 김병주교수 같은 분이 아닐까 싶다. 그는 70년대 수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다.
전두환에 대해서는 물가안정과 고도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업적은 인정해 주지만 그것 이상 국민들이나 지식인들이 지지해주는 그 무엇은 별로 없다. 전두환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면에는 후임자들이 지지리도 못해준 측면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경제의 성적표만 놓고 보면 7년 집권한 전두환의 성적표도 박정희에 비해 뒤진다고는 할 수 없다. 80년대 등장한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세력들은 기능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우수하고 효율적이었다.
지금 노무현과 그 측근들이 동서남북 분간을 못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날 갑자기 집권을 한 80년대의 신군부는 마치 오랜 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제식훈련을 하는 식으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나라 경영의 틀을 빈틈없이 잡아나갔다.
오랫동안 준비에 준비를 거듭한 박정희도 정권을 처음 잡았을 때는 시행착오도 많았고 혼선도 많았다. 혁명세력 내부에서 손발이 맞지 않아 장도영이를 제거하고 육사5기들을 제거하고 그 와중에 민정참여불참을 선언했다가 번복하고 김재춘과 김종필의 싸움을 거치고 등등 처음 몇년간은 혼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그런 것 조차도 거의 없었다. 국가경영능력 면에서는 야심만만한 40대 초반의 육사출신의 보안사 대령들이 주축이 되었던 80년대의 신군부가 가장 뛰어났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도 일반인들의 인식은 전두환은 박정희에 비해 그리 강하지가 않다. 박정희의 존재는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이들 한테도 아주 강하게 박혀있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무엇이 둘을 이렇게 차이나게 하는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 하나를 찍으라면 지성과 야만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 신군부는 기능적인 면에서 대단히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지도자가 보여줄 수 있는 내면적 깊이와 고뇌하는 지성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박정희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 즉, 민족을 생각하고 역사 앞에 고뇌하는 모습등등은 80년대의 지도자들에게서는 볼 수가 없었다. 80년대의 전두환과 그 추종세력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그 권력을 이용해서 지극히 물리적인 방법으로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든 모습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그런 것이 무엇인지 아마도 지금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박정희의 이런 모습은 물론 박정희 혼자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박정희를 쏜 김재규도 똑 같은 류의 인간이었다. 누구보다도 체제수호의 전사가 되었어야 할 김재규도 내면에서는 심각한 정신적인 갈등을 격고 있었다.
지금 서 있는 자신의 위치가 시대의 요구에 부합되는 것인가하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나름대로 역사와 민족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10.26은 외부의 저항이 격렬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내부에서 포진하고 있는 이러한 지성의 모습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였다.
데모하는 걸 너무 힘으로만 밀어붙여서 젊은이들의 기를 꺽어서는 안되는데 하는 생각을 숨막히는 유신체제에서 중앙정보부장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야가 격렬하게 대립하면서도 유진산이나 이철승과 같은 정치인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도 지도자들이 이러한 정신적 소양과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도자들의 이러한 모습은 그러나 80년대가 되면서 급격하게 바뀌게 된다. 권력쟁탈의 첫단추가 정승화체포였는데 당시 4성장군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는 체포되자 마자 지하실에 끌려가 계급장없는 허름한 군복으로 갈아입혀져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정신적인 가치와 고뇌하는 지성의 모습을 모르는 야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70년대 대표적인 반체제 지식인이었던 김동길교수가 잡혀가던 모습을 그려보자. 집 앞에 검은색 지프차가 주차되어 있고 일련의 요원들이 김동길을 찾아와서 (아주 정중하게) 말한다. ‘선생님, 저희들은 참으로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선생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참으로 죄송합니다’ 뭐 대충 이런 식의 말을 했다. 태도도 정중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에 대한 예의를 깍듯이 갖추고 있다.
그런데 80년대에는 김재규재판에 소수의견을 낸 몇몇 대법원판사들이 어디론가 잡혀갔다 왔는데 어떤 식으로 가서 어떻게 당하고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사자들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법원판사라면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분들이 아니다. 그런데 신군부가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정승화는 잡혀가서 졸병들에게 고문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또 신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군들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서 고초를 겪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지성은 사라지고 야만이 판을 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80년대에 시작된 한국사회의 야만화는 90년대를 거치면서 더 확대되었고 지금은 더욱 확대된 시대가 되고 말았다. 사회 어디를 보더라도 지금 지성의 모습은 보기가 쉽지 않다. 하룻강아지가 호랑이한테 달려들고 일개 쓰레기가 추기경을 비판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권력을 잡은 일이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가 오래되었고 체면이나 염치란 말이 오히려 사치스러운 세상이 되고 말았다.
안상영 부산시장의 죽음은 이런 야만의 시대가 만들어낸 필연의 산물이다. 40여년 공직에 있었다면 그는 결코 부패한 사람이 아니다. 부패했다면 그런 오랜기간동안을 공직에 있을 수가 없다.
오랜 기간 한길을 걸어왔고 이제 그 길의 종착역이 가까운 시기에 있는, 인구 400만명에 이르는 서울 다음으로 큰 도시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민선시장을 물증도 없이 주었다는 사람의 진술 하나만으로 뇌물을 받은 파렴치범으로 몰아 구속시킨 것 자체가 바로 야만의 산물이다.
설사 뇌물이 건네진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하더라도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하고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40년 공직생활을 한 분에 대해서 국가가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고 예의가 아닐까?
그렇지만 지금 한국은 그런 정신적인 여유가 없다. 내 편이 아니면 인간이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는 야만스러운 생각만이 지도급 인사들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40년 공직도 내편일 경우에는 한없이 찬란한 경력이지만 내편이 아니면 그냥 매도되어야 할 부패인사일 뿐이다. 공직생활이 어떤 것인지 그런 생활 40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확대되어 온 야만의 시대가 이제 종착역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게시일자 : 2004/02/05 17: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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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토달이님:
쿠데타와 혁명이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쿠데타라고 하면 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것 같습니다. 5.16을 놓고 쿠데타라고 하는 것이 지금은 거의 일반화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5.16은 쿠데타가 아닙니다. 박정희는 혁명을 했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거사 직후 바로 왜 무엇때문에 행동에 나섰는가 온 세상을 향해 분명하게 선언을 했고 혁명공약도 세상에 선포를 했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런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세번 뽑아주었습니다. 그 중 두 번은 박정희 때문에 권좌에서 물러났던 윤보선과 정면대결을 해서 이긴 것입니다.
그러면 5.16은 혁명이고 국민들이 그걸 인정해 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학교에서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분명히 배워 놓고도 5.16은 쿠데타라고 합니다. 5.16은 사실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았습니다. 박정희가 폭력적으로 된 것은 3선개헌을 하면서 정치권을 길들이고 또 유신을 하면서 부터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박정희는 등장과정에 무력을 사용하였고 방법이 강압적이었다는 것은 민주주의체제의 한계가 갖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등장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걸핏하면 쿠데타를 하는 후진국형 모델을 보여주었다고 했는데 군인들이 무력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한 것은 박정희가 유일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전두환의 등장과정이 쿠데타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12.12사태를 어떻게 보는가 5.17을 또 어떻게 보는가 등등의 문제가 있습니다만 당시 대통령 최규하가 한번도 전두환등장과정의 불법성과 폭력성을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전두환은 권력의 공백상태에서 그냥 권력이 오는 위치에 서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축구에서 그냥 골대앞에 서 있었는데 우연히 골이 자기 쪽을 날아와 자기 발을 맞고 그냥 골대 안으로 들어가는 상황 그것과 유사합니다.
과정이 좀 폭력적이긴 했지만 불법적인 면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동양의 권위주의적인 정부에 대해 서구의 시각은 비판적인 면이 많았고 카터의 등장은 이런 분위기의 연장이었지만 요즘은 서구의 학자들도 아시아적 가치랄까 동양적인 환경을 이해하는 분위기 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유신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경제적 번영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70년대는 근대화가 본궤도에 오르고 산업구조가 본격적으로 고도화되던 시기입니다. 울산 창원 구미 등지에 대규모 공단이 들어서고 포항제철이 들어서고 산업구조가 중화학공업위주로 본격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박정희가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 시절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3김은 그때 이미 대형 정치인들이었습니다만 그들이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유신은 경제적 번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할 수순이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5.16을 쿠데타라고 하는 것과 같이 민주주의 즉 주민이 직접 대표를 뽑는 그런 체제에 대해 신앙과 같은 가치를 또 부여하고 있습니다.
박정희가 욕을 먹는 것이 그런 걸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걸 오늘날과 같은 수준으로 했다면 그때 이미 경제적 성장은 멈추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시아에서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는 나라들, 홍콩은 영국식민지였으니까 예외로 본다면, 대만 싱가폴 한국 등등이 다 독재정권 하에서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특히 싱가폴과 같은 나라는 구미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선진국 가운데 선진국입니다.
중국이 지금 무섭게 성장하고 있습니다만 중국도 정치적으로는 모택동 시절과 마찬가지로 일당독재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노무현대통령은 총선에 이기기 위해 장관 청와대수석 등등을 다 출마하게 하고 있습니다. 나라 일이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지요.
박정희는 어떻게 했습니까? 박정희는 장관을 동원하는 식의 정치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려 하니까 아예 국회의원 3분의 1을 자기가 그냥 임명해 버렸습니다. 지방의회는 처음부터 아예 없애버렸고 단체장도 자기가 그냥 임명해 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일인당 소득이 몇십달러의 세계 최빈국 수준의 나라를 20년 후에는 일천불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박정희가 유신을 한 것도 또 그것에 저항했던 사람들도 나름대로 시대적 소명에 충실했었습니다. 유신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경제적 번영이 없었고 또 그때 그런 투쟁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이기심과 탐욕과 뻔뻔함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표현되는 더이상 천박할 수가 없는 진흙탕 싸움하고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역사를 생각하고 민족의 먼 장래를 생각하면서 서로의 위치에서 나름대로 소명의식이 투철한 투쟁을 했습니다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모습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나는 그런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두서없는 말이 길어졌군요.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게시일자 : 2004/02/06 13: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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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꼬리가 길어졌습니다:
토달이님:
저는 사전적 의미의 쿠데타와 혁명을 구분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사건에서 쿠데타와 혁명은 (관행적으로) 다르게 쓰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명예혁명 청교도혁명 프랑스대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4.19혁명 등등의 말은 있지만 명예쿠데타, 청교도쿠데타….. 등등의 말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의 정권장악은 또 쿠데타라고 합니다.
나는 정치학이나 역사학에 대한 이론적인 면을 모릅니다. 뭔가 구분하는 기준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 분야 전문가들이 나름대로 기준에 의해 프랑스대혁명이라 명명했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생각할 뿐입니다.
5.16은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군사혁명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쿠데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작의적으로 주관적으로 왔다갔다 할 사안이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박정희가 혁명을 했다고 대내외에 선포를 했고 국민들이 그걸 도저히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는 방법으로 추인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건 혁명입니다.
혁명과 쿠데타가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5.16을 굳이 쿠데타라고 하는 것도 역사왜곡이고 현실왜곡이고 진실의 왜곡입니다. 그런 것이 너무 무의식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것도 지금 한국이 혼란을 겪고 있는 요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님의 말씀대로 차이가 없다고 하면 상관없습니다만….
신군부는 정권을 찬탈할 목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정승화가 싫었고 그를 몰아내려 했었습니다. 정승화와 전두환은 생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없어져야 했었는데 전두환이 이긴 것입니다.
그 과정이 불법이었지 않았나 심증은 갑니다만 그걸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최규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최규하는 어떤 형태로든지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압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후에 전개되는 과정은 전두환이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기 보다는 권력이 전두환을 향해 달려왔다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정승화를 치고 보니까 권력의 중앙에 있었고 자연스럽게 쥐게 된 것입니다만 그것도 어떤 식으로든지 불법이 있었다는 걸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최규하 뿐입니다. 김영삼 시절에 전두환 등에게 유죄를 내렸지만 최규하의 증언없이 다분히 시대상황을 의식한 결과였습니다.
법치라는 말을 하셨는데 사실 어디까지가 법치이고 어디까지가 인치인가 하는 것은 미국에서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대의 역사에 충실했는가 입니다. 지금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면 홍위병이 아니라 더 한 것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대통령의 형이 땅을 좀 사 모으고 했어도 사람들이 용납할 것입니다. 못하기 때문에 용납이 안되는 것입니다.
박정희가 물론 국회의원을 3분의 1을 자신이 임명한 것은 황당한 일이지만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면 지금과 같은 번영의 기틀은 없었습니다. 그때 박정희가 임명했던 유정회의원들이 지금 선거로 당선된 국회의원들 보다 훨씬 깨끗하고 유능했었습니다.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고 하지만 그 후에도 민주주는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에 청와대에서 전현직 대통령들이 모였습니다만 그게 민주주의의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나는 한번씩 부시가 의회에서 연설할 때 카메라에 잡히는 케네디나 힐러리클린턴의 얼굴을 볼 때가 있습니다. 부시와 이들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으로서는 이 두 진영이 다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70년대 박정희와 그 반대편에 있었던 투쟁자들이 그 당시에는 그런 역할을 했었습니다. 박정희도 시대가 요구하는 사람이고 또 당시 민주화운동도 시대가 요구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시대정신이 뭔지 모르는 야만인들이 설치는 세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