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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9: 38 절하는 자 - 요 9: 40 우리도 맹인인가?
요 9: 38 절하는 자 -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 지라. (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
시각장애인은 예수를 만나 직접 체험하여 이 진리를 깨닫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내가 믿나이다. 여러 말이 필요하지 않다. 아! 하고 한 음절만 토하여도 어머니는 자기 어린이의 상태를 파악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예수께 경배하였다.
1]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kuvrie(퀴리) "주"는 36절에서 부른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36절에서는 일반적인 존경의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자신의 '주'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부르는 것은 여러 군데 뿌리를 두고 있다.
(1)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사람들은 거듭거듭 '마리'('나의 주'를 뜻하는 아람 말)라는 부름말로 그에게 말을 걸었거나 그를 가리켜 '마레'('주'를 뜻하는 아람 말)라고 했을 것이다.
이러한 부름말이나 칭호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썼고, 그리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
* 마 8: 8 -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 눅 9: 61-62 –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 눅 6: 46 -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부활절 이후에는 이 '주'가 '마라나타'라는 기도의 외침에서 부름말로 나온다.
* 고전 16: 22 -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 계 22: 20 -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께서는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정,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나타낸다.
베드로후서 3: 8-10,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전통본문)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원소들]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불타버리리라].”
계 22장에서만 세 번 반복 확인. - 계 22: 7, 12, 20.
① 진실로
재림의 확실성을 나타낸다.
② 속히 오리라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현재 오시고 있는 중이다.
본문은 본 장 내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세 번째 확증이며(7, 12절) 동시에 그 재림의 확증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을 나타낸다.
본서의 마지막에 '내가 속히 오리라'는 그리스도 자신의 재림에 대한 언급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본서의 예언 말씀을 보장함과 동시에 고난과 핍박 속에서 인내하는 구속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를 준다.
③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자주 사용되던 기도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절한 소망을 시사한다(Morris).
이것은 고전 16: 22에 나타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마라나 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 고전 16: 22 -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이 '마라나다'는 아람어 '마라나타'(*)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모든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고백을 나타낸다.
(2) 유대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자.
그리스도인들은 곧바로 숱한 종교 단체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이들은 아주 서로 다른 신들을 자기들의 '주들'('주'는 헬라 말로 '퀴리오스'이다)로 부르고 이 신들이 구원을 베푸시며 함께 하신다는 것을 칭송하면서 예배 드렸다.
이들과 논쟁하는 가운데 '주'라는 칭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이는 것이 또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 고전 8: 5-6 –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3) 결정적으로 중요한 뜻
구약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칠십인 역본)에서 본디 '주'('퀴리오스')라는 칭호로 하나님('여호와)을 가리키던 말씀들이 이제는 하나님이 높이셔서 세계의 심판자로 정하신 '주' 예수님과 관련시켰기 때문이다.
* 욜 2: 32 -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 행 2: 21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 욜 2: 31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 암 5: 18 -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 살전 5: 2 -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 고전 1: 8 -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 사 45: 22-25 – 22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23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 24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25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
* 빌 2: 9-11 –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과감히 한 걸음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몸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취하신 영광이요 이전부터 하나님께 중요했던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려 한 것이다.
* 빌 2: 11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 절하는지라.
절하는지라(proskunevw 프로스퀘네오) "경의를 표하다, 경배하다"인데 나중에 이 단어는 "예배"에 사용되게 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엎드려 절하는 의미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다. 절하였다. 무릎을 꿇었다. 예배했다.
예수가 스스로가 그 사람의 아들임을 그 사람에게 계시하자 시각장애인은 그를 주로 부르고 주에 대한 마땅한 태도는 무릎을 꿇고 예배했다.
예배는 하나님께만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의 신앙이 점점 발전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자기의 눈을 띄운 것으로 선지자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리스도라는 것까지 고백했다. 결정적인 것은 그 사람의 아들임을 스스로 계시했을 때 예수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에게 예배하게 되었다.
예배는 하나님에게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는 신앙적 행위이다. 성경에서 예배의 의미는 매우 광의적인데 본질적 개념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예배의 형식은 원리 면에서가 아니라 형식 면에서 변천해 왔다.
안식일 제정, 가인과 아벨의 제사, 족장의 장막 제사를 거쳐 공적 예배는 성전에서 드렸는데 이것은 영적 예배를 강조하게 되었다.
외적인 예배로 형식화될 때 예수님은 새로운 예배를 지향케 하셨다.
예배는 우상적이거나 미신적 제도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영적 교제이며, 이것은 신앙의 유일한 방편이요 길이다.
초기 예배에는 구약성경을 읽은 후에 사도들의 서신이나 복음서를 낭독했다. 성경 강해에 의해 설교가 중요성을 갖게 되었고, 성찬식과 세례가 첨가되기도 했다.
최근의 기독교회는 말씀주의보다는 의식주의 방면으로 치중되어 가고 있다.
예배의 형식은 개인 예배, 공중 예배, 특별한 예배 등이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기독교회들이 신비주의적 예배 행위가 성행되고 있는데 지나친 성령 주의적 감정주의 예배는 주의해야 한다.
요 9: 39 심판하러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
예수께서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복음을 통해 신자와 불신자, 구원받는 자와 멸망하는 자를 나누신다는 의미이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심판이 된다. 그것은 듣는 사람들을 구원과 멸망, 천국과 지옥의 두 부류로 나누는 점에서 그러하다.
예수께서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주신 것은 영적 시각장애인인 죄인들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을 암시한다.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영적 시각장애인들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영적 시각장애인이 고침을 받는 것과 같다. 우주와 인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삶의 목적도 방법도, 죽음의 이유와 그 후의 세계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던 자들이 구원을 받아 눈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2]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그러나 자신이 영적 시각장애인임을 알지 못하고 본다고 말하는 자들은 영적 시각장애인이 될 것이다.
즉 스스로 인생의 삶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 그래서 돈을 버는 데나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눈이 밝은 자들은 영적인 시각장애인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들은 다 자신들이 죄인임을 보지 못하고 창조자, 섭리자, 심판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주를 알지 못하고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마지막 심판 날을 대비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나면서 시각장애인이 된 자의 눈을 뜨게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고침을 받았던 그 시각장애인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지 못함을 이상히 여겼다.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셨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혜롭게 말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셨고,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죄인들은 그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시각장애인의 심령의 눈도 밝게 해주셨다. 그것이 주께서 하시는 구원의 사역이다. 구원은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구주 예수님을 알고, 인생의 정로(正路)를 알고, 천국과 영생을 아는 것이다.
주께서는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시고 보는 자들은 시각장애인되게 하신다. 영적 시각장애인들은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과 의롭고 선한 길과 천국과 영생을 알아야 한다.
요 9: 40 우리도 맹인인가? -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 있어서 인류를 시각장애인이라고 생각하신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사람의 육안은 표준이 아니다. 우리의 육안은 어떤 짐승의 눈만도 못하다. 예를 들면 매는 여러 십리 밖에 있는 작은 것도 밝히 본다고 한다.
1]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사람의 눈의 표준은 심령의 눈이다. 심령의 눈은 하나님 보기를 목적한다.
심령이 하나님을 보기 전에는 시각장애인임을 면치 못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 렘 17: 9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이다.
* 잠 28: 26 -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인간은 이렇게 시각장애인인데도 자기가 본다고 하며, 불행 가운데 아주 떨어진다.
이 사람들을 예수가 무엇이라 하는가? 39-41절에서 이들은 스스로 본다고 주장함으로 스스로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그들은 참으로 볼 줄 모른다. 왜냐하면 보지 않으려고 스스로 눈을 감아버렸다.
왜 사람들이 예수의 계시에 대해서 못 알아듣는가? 자기들이 빛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이다. 세상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많다.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진리를 겸허하게 열려진 마음으로 추구하지 않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지식을 빛으로 삼아서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그 빛에 의해서 진정한 빛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는 자들이 허다하다.
아마도 요 9장의 바리새인들이다. 요 9장 전체의 이야기를 가장 웅변적으로 신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고전 1: 18절 이하가 될 것이다.
고전 1: 18절 이하에서의 바울과 요 9장과는 같은 진리를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다.
세상의 지혜가 있다는 자들. 곧 헬라 철학자들이나 유대인 서기관, 신학자와 헬라 철학자들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입장으로 신에 대해서나 진리에 대해서 다 안다고 주장한다.
세상을 다 안다.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하나님의 계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였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모세 율법에 의거해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다 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계시를 가지고 왔을 때 거부한 것이다. 그 결과는 스스로 시각장애인이 된다. 고전 1: 18절 이하를 빌리면 이 시각장애인은 미련한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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