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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만부〔龍灣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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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변방의 큰 번진으로 강을 해자 삼아 / 絶塞雄藩江作池
멀리 나라 서쪽 모퉁이에 진영 열었네 / 開營遙鎭國西陲
민가가 물고기 비늘처럼 땅에 깔렸고 / 閭閻撲地魚鱗輯
정자가 짐승 뿔인 양 언덕에 우뚝한데 / 亭壁棲崗獸角危
백마산 높아 칼과 창처럼 늘어섰고 / 白馬山高森劍戟
구룡연 얼어붙어 유리를 깎아 놓은 듯 / 九龍淵凍削琉璃
가장 불쌍한 건 농우에 남은 풍속 있어 / 最憐隴右遺風在
한 곡조 양주사가 건아들을 울리는 거라네 / 一曲凉州泣健兒
용만부(龍灣府) : 평안도 의주(義州)의 별칭이다.
백마산(白馬山) : 의주에 있던 성으로, 병자호란 때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지켰던 곳이다
구룡연(九龍淵) : 의주에 있는 연못 이름이다.
농우(隴右) : 농서(隴西) 지방으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일대이다. 여기서는 의주를 가리킨다.
양주사(凉州詞) : 악부(樂府)의 이름이다. 왕한(王翰)의 《양주사》에 “아름다운 포도주에 야광주 술잔으로, 비파를 마시려고 말 위에서 재촉하네. 모래밭에 취해서 누웠다고 그대여 웃지 말게. 예로부터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간 이 몇이런가.”라고 하였다.
이관명(李觀命, 1661~1733)
청어를 보고 느낌이 일다〔見靑魚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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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동안 양식 준비하여 동에서 왔는데 / 三月聚糧來自東
끝없는 욕심 모두 채우느라 자루 비어 늘어졌네 / 盡輸溪壑槖垂空
차 냄새는 털옷 입은 사람 입에 피어나고 / 茶煙爛熳氊裘吻
백면지로는 취막의 바람 막으며 / 綿紙推排毳幕風
금으로 싼 환약은 더위 먹은 기병을 치료하고 / 金裹藥丸瘳暍騎
은장식 칼집은 못된 아이들 장식품으로 쓰이네 / 銀裝劍鞘飾頑童
좋은 목재들 모두 남방에서 온 것도 놀랐지만 / 已驚楩梓皆從楚
다시 청어까지 몰아왔으니 조물주를 탄식하노라 / 更復驅魚歎化翁
청어는 우리나라 생선으로 이곳에는 본래 없었는데, 십수 년 전부터 이곳에서 많이 잡혔다. 이곳 사람들은 처음에 이름을 알지 못해 조선 물고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지역에는 물미나리가 전연 없는데, 냉정에서만 자란다. 산해관 안팎은 물맛이 나빠 마실 수가 없는데, 냉정의 물은 자못 맑고 차갑다. 매번 사행이 이곳에 이르면 반드시 물가에서 미나리를 뜯어다가 먹는다〔此中絶無水芹獨於冷井有之關內外水味惡不堪食冷井之水頗淸洌每使行到此必臨水採芹而食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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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 길어 하얀 쌀밥 지어 놓고 / 汲泉炊白飯
물가에서 파란 미나리 따 왔지 / 臨水擷靑芹
먼 길 온 나그네 기갈 달래며 / 遠客忘飢渴
머뭇거리다 날 벌써 저물었네 / 踟躕日已曛
냉정(冷井) : 산해관 바깥의 요동 평야 초입에 있는 샘물이다.
정양(晶陽) 신태희(申泰羲, 1800~1850) ]
《북경록》은 1826년 동지사행(冬至使行)에 참여했던 정양 신태희의 사행 기록. 홍대용의 손자인 홍양후(洪良厚,1800~1879) 및 이봉녕(李鳳寧, 1793~1871)과 함께 부사 신재식(申在植, 1770~?)의 자제군관으로 사행에 참여하였다.당시 동지사행의 정사는
홍희준(洪羲俊, 1761~1841)이고 서장관은 정예용(鄭禮容, 1773~1843)이다. 홍희준은 1794년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가는 생부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를 모시고 북경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 무관 신태희의 사행 경험이 오롯이 남아 있다.
북경록 단
산천풍속총록(山川風俗總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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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義州)에서부터 봉황성(鳳凰城)까지는 2참(站)인데, 인가(人家)가 없어서 노숙하였다. 봉황성에서부터 북경까지는 31참이다. 모두 찰원(察院)이 있었지만 지금은 폐해졌다. 봉황성에서부터 요동(遼東)까지는 ‘동팔참(東八站)’이라고 한다.
구련성(九連城)에서부터 봉황성까지는 산천이 맑고 빼어나다. 이따금 들이 펼쳐진 곳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빽빽하여 완연히 사람이 사는 곳 같다. 고려(高麗)의 진강부(鎭江府)가 이곳이다. 봉황성에서부터 낭자산(狼子山)까지는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큰 내를 여러 번 건넌다. 냉정(冷井)을 지나 10여 리를 가면 비로소 요동 들판이 나오고, 700여 리를 가야 구릉(邱陵)이 보이기 시작한다. ‘요동 들판 700리[遼野七百里]’란 명칭은 이에 말미암았다. 실제로는 천산(千山)에서부터 발해(渤海)까지 남북으로 모두 1400여 리이다. 천하의 큰 들판으로 한정할 만한 것을 통틀어 헤아려 보아도, 요동만이 천지의 드넓고 거대한 형세를 얻었다 하겠다. 여기서부터 북경까지는 비록 자잘한 언덕이 있지만, 대저 모두 평야로 다시 높은 고개를 넘지 않는다.
길 위에서 본 가까운 산으로는 구련성의 금석산(金石山), 온정참(溫井站)의 송골산(松鶻山), 봉황성(鳳凰城)의 봉황산, 회령령(會寧嶺)의 회령산, 청석령(靑石嶺)의 청석산, 북진묘(北鎭廟)의 의무려산(醫巫閭山), 십삼산(十三山)의 십삼산, 산해관의 각산(角山), 계주(薊州)의 공동산(崆峒山)과 반룡산(盤龍山)이 있다. 이 열 개의 산은 모두 바위산이다. 먼 산으로는 창려현(昌黎縣)의 문필봉(文筆峯), 배음보(背陰堡)의 천태산(天台山), 노룡진(盧龍鎭)의 수양산(首陽山)이 가장 기이하고 빼어나다. 서북쪽의 장성 일대에도 기이한 봉우리가 많으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물로는 요동의 태자하(太子河), 심양의 혼하(渾河), 금주(錦州)의 대릉하(大凌河)와 소릉하(小凌河), 영평부(永平府)의 청룡하(靑龍河)와 난하(灤河), 풍윤현(豐潤縣)의 환향하(還香河), 계주(薊州)의 어양하(漁陽河), 삼하현(三河縣)의 호타하(滹沱河), 통주(通州)의 백하(白河)가 있다. 이 열 곳의 물에는 모두 배가 있다. 대릉하와 백하가 가장 커서 우리나라의 임진강(臨津江)과 거의 비슷하다. 그 나머지 여덟 개의 물은 모두 금천(金川)의 저탄(猪灘)과 비슷하다.
시사(市肆 시전(市廛))는 북경의 정양문(正陽門 북경 내성의 정남문) 바깥이 가장 성대하고, 고루가(鼓樓街)가 다음이다. 통주(通州)와 심양(瀋陽)은 서로 비슷하고, 산해관(山海關)이 그 다음이며, 금주(錦州)가 그 다음이다. 수레와 말이 모여들고 온갖 재화(財貨)가 가득한데, 이르는 곳마다 한결같다. 사녀(士女)의 꾸밈은 산해관이 낫고, 요양(遼陽)과 영원위(寧遠衛)와 중후소(中後所)와 영평부(永平府)가 그 다음이다. 무령현(撫寧縣)과 옥전현(玉田縣)과 풍윤현(豐潤縣)은 그 다음이다. 시가의 깃발과 간판이 사치스럽고 고우며 성대하고 화려하다. 가는 곳마다 한결같다.
북경성(北京城)은 둘레가 40리로 남쪽 가장자리의 중성(重城 원래 성 밖이나 안에 따로 쌓은 작은 성)은 30리다. 통주성(通州城)은 둘레가 10리이고, 서쪽에 중성이 있는데 5리다. 계주와 영평부의 성은 모두 10리이나 나성(羅城 성 밖으로 겹으로 쌓은 성)이 없다. 금주위성(錦州衛城)은 둘레가 9리이고 동쪽에 나성이 있다. 영원위(寧遠衛)에는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있는데, 둘레가 모두 8리이다. 산해관성(山海關城)은 둘레가 15리이며, 동서의 나성은 아홉 겹이다. 심양에는 내성과 외성이 있는데, 내성은 둘레가 10리이고 외성은 토성으로 둘레가 5리이다. 중우소(中右所)와 중전소(中前所), 중후소(中後所)와 전둔위(前屯衛)의 성 둘레는 금주위성과 서로 엇비슷하다. 무릇 성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높이는 전부 다섯 길[丈] 이상인데, 산해관성이 가장 장대하다. 그 외의 현(縣)과 여러 역(驛)과 보(堡)에도 성이 없는 경우는 없다. 또한 높이가 다섯 길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현의 경우 외성은 모두 흙으로 쌓았고, 모두 십자가루(十字街樓)가 있다. 간혹 처마가 4층으로 된 것도 있는데, 모두 처마가 2층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며 금빛과 초록빛이 공중에 환히 빛난다.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다. 요동 들판에 들어서면서부터 왕래하는 수레와 말이 더 많아지고 모래가 더 고와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그때마다 모래가 날린다. 그 모양이 마치 안개가 낀 것 같아서 뒷사람이 앞 사람을 보지 못할 정도다. 산해관 안쪽[關內]은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레바퀴와 말발굽 사이에서 재처럼 풀풀 일어나니, 얼굴 모양이 잠깐 사이에 바뀌어 동행하는 사람도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다. 수염과 머리카락에 쌓인 것은 털어내도 떨어지지 않고, 입 안에 들어가면 뱉어내도 씻기지가 않는다. 심지어는 열 겹으로 싼 바구니와 겹으로 봉한 병까지 모두 뚫고 들어갈 정도이니 지극히 괴이하다. 시사(市肆)와 인가(人家)에 쌓아둔 기물(器物)들은 닭털 먼지떨이로 쉴 새 없이 털어내도 잠깐 사이에 한 치[寸]나 쌓이고 만다. 그래서 북경, 심양, 산해관, 통주, 중후소 등 여러 곳의 큰 거리에서는 모두 물을 뿌려 먼지를 적신다.
공옥(公屋)과 사옥(私屋)은 대체로 남향이 많다. 집의 제도는 비록 초가라 해도 모두 5량(樑)이며, 들보[樑]의 길이는 20여 척(尺)이다. 큰 집은 모두 7량이나 8량인데, 간혹 13량이나 14량, 15량인 것도 있다. 집은 칸수가 많거나 적거나 간에 모두 일자형(一字形)이라 꺾어서 연결하는 제도는 없다. 전면(前面)의 중앙에 문을 만들고 좌우에 창을 설치했다. 동쪽과 서쪽과 북쪽의 3면에는 모두 담을 쌓고 가운데에 문을 설치하여 남문(南門)과 서로 통하게 하였다. 앞문과 뒷문 사이가 바로 정당(正堂)이고, 정당 좌우에 각각 문을 두었다. 그 문 안쪽은 방이고, 방 안에는 창을 달고 캉[炕]을 만들어 놓았다. 캉은 바로 온돌이다. 높이는 걸터앉을 만하고, 길이는 칸에 따라 넓고 좁음이 한결같지 않다. 너비는 누울 수는 있지만 발을 뻗을 수는 없다. 잠을 잘 때에는 캉의 가장자리에 이른바 ‘등자(凳子 등받이가 없는 걸상)’를 이어놓고 그 위에 베개를 놓아서 편안히 잘 수가 있다. 캉 밖에는 모두 벽돌을 깔았는데, 가난한 자는 간혹 그렇게 하지 못한다. 부엌은 모두 방 가운데 있고 모두 솥을 놓았는데, 객당(客堂 손님을 응접하는 객실)은 그렇지가 않다. 문호(門戶)는 모두 안에서 열고 닫는다. 문지도리는 다 나무를 사용했고, 문고리 외에는 쇠붙이로 장식한 것이 없다.
기와로 지붕을 인 집은 오직 궁전(宮殿)과 공해(公廨 관가의 건물) 및 사관(寺觀 불교 사원인 사찰과 도교 사원인 도관(道觀))에서만 원앙와(鴛鴦瓦 원앙 모양으로 짝을 이룬 암키와와 수키와)와 황와(黃瓦 황금색 기와)와 오색의 유리와(琉璃瓦)를 사용한다. 사가(私家)에서는 사용하지 못하고 단지 앙와(鴦瓦 암키와)만 쓴다. 공후(公侯 공작과 후작)와 부마(駙馬 왕의 사위)의 집은 원앙와가 허용된다. 비록 사가라 할지라도 옥맹(屋甍 대마루)과 첨척(簷脊 용마루)은 모두 벽돌로 쌓고 아로새긴 뒤 붉고 푸른 채색을 더하였다.
벽은 두꺼워 한 자 남짓 되고 벽돌과 석회로 쌓았다. 가난한 사람은 간혹 토배(土坏 흙으로 만든 굽지 않은 기와)로 쌓고 바깥에 유회(油灰 기름과 재 등을 섞어 만든 것)를 발랐다. 기와를 일 때도 모두 유회를 발라서 참새와 쥐가 구멍을 뚫지 못한다. 이르는 곳마다 참새와 쥐가 드물게 보였던 것이 아마도 이것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이른바 헌(軒 추녀)이나 벽장(壁藏 벽에 붙여 만든 장) 같은 것은 가는 곳 어디에도 없었다.
봉황성(鳳凰城)에서부터 주류하(周流河)까지는 초가(草家)가 다수를 차지하고, 주류하에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는 흙집[土屋]이 간간이 있다. 흙집이 나타난 이후부터는 초가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이것은 풀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초가의 지붕 위에는 흙을 발라 비가 새지 않고, 흙 지붕 위에 풀도 자라지 않는다. 간혹 유회(油灰)로 온 지붕을 발라두었으니, 이것은 살림살이가 조금 넉넉한 자이다. 초가를 덮은 띠풀은 엮지 않았고, 다만 다발로 쌓아두었는데, 그 뿌리 쪽이 아래에 있고 두께는 한 자 남짓 되었다.
북경성(北京城) 안 사통팔달의 거리와 후미진 골목의 길 좌우에는 모두 은구(隱溝 땅속에 묻어놓은 하수구)가 있어서 온 성의 처마에서 떨어진 물과 길에 괸 물이 모두 이곳으로 들어가 옥하(玉河)에서 모이고, 대통교(大通橋)를 지나 강으로 들어간다. 성안에는 또 거위와 오리, 양과 돼지 등속을 기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성안에서는 개천이나 도랑이 막히는 경우가 없으며 똥과 오물도 없다. 왕왕 깊은 구덩이에 똥을 쌓아둔 것이 있는데, 이곳은 바로 인가에서 똥을 버리는 곳이다. 가득 차면 밭으로 실어낸다. 오줌통[溺器]은 모양이 오리와 비슷하고 그 입구는 주전자 같이 생겨서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처음 본 사람은 간혹 술그릇인 줄로 오인해서 마시기도 한다. 호인(胡人)도 우리나라의 요강을 얻으면 밥그릇으로 쓴다고 하니 참으로 대비가 된다.
마을이 있으면 반드시 사찰이나 사당이 있는데, 요양(遼陽)과 심양과 산해관 등지에 가장 많다. 북경에 이르면 성 안팎에 있는 사관(寺觀)이 인가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다만 하나의 사찰에 기거하는 승려는 비록 큰 사찰이라 할지라도 수십 명을 넘지 않으며, 도사(道士 도교의 도인(道人))는 더 적다.
집집마다 관제(關帝)의 화상(畫像)을 봉안해 놓고 아침저녁으로 분향하며, 상점도 모두 마찬가지다.
관제묘(關帝廟)에는 반드시 부처를 모시고 절에는 반드시 관제를 모시는데, 승려와 도사 모두 존숭하여 구별 없이 받든다.
만주인[淸人]은 풍채가 크고 넉넉하며 사람됨이 꾸밈이 적다. 꾸밈이 적은 까닭에 바탕이 실한 사람이 많다. 한인(漢人)은 이와 반대이며, 남방 사람은 특히 경박하고 교활하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만주인 또한 중국에 들어온 지 이미 오래되었고 황제 또한 문(文)을 숭상하는 까닭에 이러한 풍속이 조금씩 쇠퇴하였다.
만주인은 모두 한어(漢語)에 능하지만 한인은 만주어를 하지 못한다.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다. 대개 만주어에 능통하지 않으면 마땅히 불편한 점이 있다. 궁궐 안에서나 아문(衙門 관청)에서는 모두 만주어를 사용하고, 주어문서(奏御文書 임금에게 주달하는 문서)를 모두 만주어로 번역하기 때문이다. 여항(閭巷)에서는 만주인이나 한인 모두 한어를 사용한다. 이 때문에 만주인에게서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도 만주어에 능통하지 않은 자가 많다. 황제가 이것을 근심하여 나이가 어리고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를 선발하여 영고탑(寧古塔)으로 보내 만주어를 배우게 한다.
관원(官員)이 행차할 때는 한 명의 기병이 좌석(坐席)을 지니고 앞서 간다. 대개 좌석으로 그 품급(品級)의 높고 낮음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대소의 인원이 황자(皇子 황제의 아들)를 만나면 모두 말에서 내리지만, 각로(閣老 내각의 원로인 재상) 이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한인으로 지위가 높은 자는 가마를 타고, 만주인은 비록 품급이 같더라도 가마를 탈 수 없다. 대개 문관직은 한인에게 맡기고 무관직은 만주인을 쓰는데, 무신(武臣)이 가마를 타지 않기 때문이다.
무릇 상견(相見)하는 예는 읍을 하고 절을 하지 않는다. 경의(敬意)를 나타낼 경우에는 몸을 굽히고, 사례를 표할 경우에는 머리를 조아린다.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손짓을 하고, 만약 서로 친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두 손을 잡고 흔들어 기쁜 뜻을 드러낸다. 여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한인 여인은 모두 분을 바르고, 만주 여인은 간혹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앞서 들으니 “한인 여인은 비록 늙었더라도 모두 분을 바르고 꽃을 꽂는다.”고 했는데, 지금 보니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산해관 밖의 여자가 미인이 더 많다.
남녀의 의복은 사치한 사람과 검약한 사람을 막론하고 그 색은 검은색을 숭상한다. 한인 여인은 간혹 울긋불긋한 바지를 입는다. 남자도 간혹 울긋불긋한 붉은 바지를 입는데, 황색이나 흰색은 전혀 없다. 몽고인은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승려와 속인을 막론하고 안팎으로 입은 것은 모두 순황색(純黃色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황색)이다. 만주인과 한인으로 지위가 높은 자도 붉은 바지를 입지 않는다. 겉치레를 사치스레 하는 자를 제외하고 남자는 모두 다 굵은 베를 사용한다. 비록 북경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여인은 비록 가난해도 모두 비단옷을 입는다. 그래서 만주인과 한인 중에 바야흐로 색실(色室 기생집을 가리키는 듯)에 들어가는 자는 남에게 “비단옷에 취한다.”고들 말한다.
남자는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목이 긴 신[靴]을 신는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부터 수레를 모는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다. 목이 짧은 신[鞋]과 목이 긴 신은 모두 모전(毛氈)과 베를 사용하고, 비단이나 가죽으로 만든 것은 전혀 없다. 미투리[麻鞋 삼이나 노 따위로 짚신처럼 삼은 신]와 짚신 또한 전혀 없다. 봉황성(鳳凰城)과 요동 사이에서는 간혹 가죽 버선[皮襪]을 신는데, 바로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다로기(月吾其 가죽의 털이 안으로 가게 지은 버선의 한 종류)’란 것이다. 비록 두서너 살 먹은 작은 아이라 할지라도 옷을 입고 모자를 쓰며 띠를 두른 것이 어른과 더불어 다름이 없다. 절대로 맨다리를 드러내지 않는다.
만주 여인은 사람을 피하지 않고 한인 여인은 사람을 피한다. 비록 궁벽한 마을의 가난하고 비루한 자라 할지라도 모두 비단옷을 입고 꽃을 꽂으며 분을 바르니 추한 사람이 전혀 없다. 그런데 그 남편을 보면 의복은 해지고 추하며 모습은 흉하고 더러워 그녀의 노비로 보인다.
무릇 크고 작은 사역(事役)은 남자가 그 수고로움을 모두 맡는다. 수레를 몰고 밭을 갈며 땔나무를 지는 것 외에도 물을 나르고 쌀을 찧고 밭에 씨를 뿌리는 것에서부터 옷감을 짜고 옷을 만드는 등의 일에 이르기까지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여자는 문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드물고, 하는 일은 신발 바닥을 깁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촌 아낙네의 경우 간혹 곡식을 까불거나 밥 짓는 일을 하나, 상점에는 오가는 여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인 여인은 처음 태어나면 바로 비단 깁으로 발을 싸서[纏足] 자라지 못하게 한다. 비록 나이를 먹어 몸이 자라도 발은 모두 갓 태어난 아이 같아서 뜻대로 걸을 수가 없다. 마당이라도 드나들려 하면 그때마다 지팡이를 짚어야 하니 애초에 몇 리를 걸어가는 사람은 없다. 이 풍속은 송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잃어버리는 것을 염려한 까닭이다. 만주족 여인은 비록 전족을 하지 않지만, 신발의 높이가 또한 네댓 치나 되는 터라 모두들 마음대로 걷지 못한다.
남자는 어깨에 메지 등에 지지는 않는다. 나무 막대기 하나를 이용하여 양 끝으로 물건을 들어 어깨 사이에 메는데, 이를 일러 ‘편담(扁擔 멜대)’이라 한다. 한 번에 메는 것이 일백 근(斤)보다 무거워서 물을 운반하거나 땔감을 나를 때 모두 이 방법을 사용한다. 먼 길을 가는 자는 그 행구(行具 행장)와 포개(鋪蓋 깔 것과 덮을 것)를 말아서 한 가닥으로 만들어 어깨에 얹고, 진력이 나면 왼쪽으로 옮겼다가 오른쪽으로 옮긴다. 비록 천 리 멀리 가더라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대저 짐은 어깨에 메고 등에는 지지 않는다. 그래서 간혹 짐이 한 쌍이 되지 않으면 돌을 매달아 균형을 맞춘다. 그 질박함을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번번이 이것을 비웃는다.
상복의 제도는 만주인과 한인을 막론하고 모두 역월(易月)의 제도를 쓴다. 상복은 희고 굵은 베로 주의(周衣 두루마기)를 만들어 입고 흰색 모자와 흰색 신발을 착용하는데, 안에는 평소처럼 비단옷을 입는다. 앞서 들으니 한인들은 간혹 삼년상(三年喪)을 지내기도 했다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 않다. 다만 빈소를 마련하지 않았으면 수장(水漿 마실 것)을 입에 넣지 않고, 이미 빈소를 마련하고 나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 일찍이 들으니 만주인은 간혹 화장(火葬)을 한다고 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다. 죽어서 입관(入棺)하는 것은 만주인이나 한인이나 똑같지만, 장사 지내기도 하고 장사 지내지 않기도 한다. 간혹 그 관을 문 앞에 드러내 놓기도 하나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며, 그것이 썩어 문드러져 부서질 지경이 된 뒤에야 옮겨서 작은 언덕 같은 봉분을 만든다.
무릇 성읍(城邑)과 촌락이 번화한 곳의 들판에는 노출된 관이 없다. 간혹 널 바깥에 벽돌을 쌓고 석회로 발랐거나 다만 돌덩어리로 그 위를 눌러서 썩어 부패하게 놔둔 것이 있다. 이것은 장지가 없음에 연유한 것인데, 간혹 객지에서 돌아가지 못한 자도 있고 장사[興販] 차 나왔다가 다른 지방에서 죽은 경우도 있다. 비록 그 자질(子侄)이 와서 보게 되더라도 반드시 매장하는 것은 아니며, 그 가업(家業)을 이어서 재화를 많이 얻은 뒤에야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가 매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죽은 자를 위하여 설욕하는 방법이다.
음식의 제도는 산해관 안쪽은 모두 산대미(山大米)로 밥을 한다. 한 말의 쌀에 두 말의 물을 부어 끓이다가 그 물을 버린다. 이렇게 세 번을 한 뒤에야 비로소 약간의 물을 더해 밥을 지어서 낸다. 그러므로 애초에 찰기가 없어서 그릇 위에 높이 담을 수가 없다. 산해관 밖에서는 모두 촉서(蜀黍 수수)와 양직(梁稷 기장) 등속으로 밥을 짓는데, 또한 대미(大米 쌀)가 없어서다.
아침과 저녁의 식사는 남녀가 한 식탁에 둘러앉아서 각자 작은 그릇에 나눠 먹는다. 한 그릇을 다 비우면 또 한 그릇을 채워서 양껏 먹는다. 손님을 대접할 때는 주인과 손님이 한 식탁을 쓰고, 손님이 몇 사람이 되어도 따로 차리지 않는다. 매번 사람들 앞에는 각각 한 쌍의 젓가락과 하나의 술잔을 두고 심부름꾼이 술병을 가지고 술을 따른다. 마시는 대로 따르고 술잔을 뒤집어 놓은 뒤에야 바로 그친다. 술잔 하나는 겨우 우리나라 사람의 몇 숟갈 정도로, 또한 한 번에 마시지 않고 조금씩 마신다.
평소에 먹는 반찬으로는, 시골집에서는 김치 한 접시뿐이다. 맛이 몹시 짜고 시다. 그래서 간혹 물에 담가 그 독한 기운을 줄인 뒤에 끊어서 먹는다. 부유한 집에서 이른바 잘 차린 것도 ‘돼지고기 계란 볶음[炒猪肉鷄卵]’과 ‘배추 볶음[炒菘]’, ‘구운 김치 탕[灸葅湯]’ 정도이니 대체로 간략하다.
음식은 모두 젓가락을 사용하고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데, 숟가락이 있기는 있다. 사기로 만들고 자루가 짧으며 머리가 깊어, 우리나라의 이른바 ‘사시(砂匙 사기로 만든 숟가락으로 사시(沙匙)라고도 씀)’란 것이 이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수히 사 가지고 온다. 젓가락은 모두 나무로 만들거나 상아로 만들며, 유기로 만든 것은 전혀 없다.
손님을 대접할 때는 또한 차로써 예를 행하는데, 다례(茶禮)를 행하는 것은 주례(酒禮)를 행하는 것과 똑같다. 각각의 사람이 각자의 찻잔을 가지고 마시는 대로 따른다. 차는 반드시 뜨거워야 해서 찻잔에서 조금만 식으면 다호(茶壺 차를 담는 단지) 안에 도로 붓는다. 차를 마실 때는 더욱 더 천천히 마셔야 해서 차 한 잔을 마시는 데 거의 담배를 피우는 시간이 걸린다. 차는 손님을 대접할 때뿐만 아니라 마시지 않는 때가 없다. 동팔참(東八站)처럼 차가 귀한 곳에서는 쌀을 볶아서 대신하는데, 노미차(老米茶)가 이것이다. 【우리나라의 이른바 홍곡차(紅穀茶)이다.】
이른바 ‘유박아(柔薄兒)’는 밀가루로 만드는데, 우리나라의 만두와 비슷하다. 소는 돼지고기에 마늘을 섞어서 만든다. 늘 먹는 음식 중에 가장 맛있는 것이다. 또 밀가루로 둥근 떡을 만드는데 크기는 계란만 하고 돼지기름이나 양기름으로 튀긴다. 가볍고 잘 부서져서 우리나라의 강정(江丁) 유와 비슷하다. 그 가운데 진미는 감가루[柿屑]를 섞어 만든다. 비록 잘 만든 것과 못 만든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같지는 않지만 대개는 모두 이런 유이다. 고물[粉屑]을 바른 것은 전혀 없다.
평소에 먹는 고기로는 거위고기, 오리고기, 염소고기, 양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나귀고기, 말고기 등속이다. 별미로 알려진 것 중에 희귀한 것으로는 개구리고기와 뱀고기가 있다. 촌가(村家)에 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음식점[飮食舖]에서는 반드시 진미에 속한다. 소고기와 개고기는 애초에 먹지 않으니, 우리나라 사람이 만약 소고기 육포를 주면 반드시 ‘먹지 못한다[不會喫]’고 대답하고는 도로 던져버릴 것이다.
담배는 남녀노소 피지 않는 사람이 없다. 손님을 대접할 때 차와 함께 내놓는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담배에 불을 붙여 받들고는 온 좌중에 돌아가며 권하여 감히 마음대로 피우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풍속을 모르는 자는 손을 벌려 받으려 하다가 저들에게 비웃음을 당한다. 담배는 반드시 가늘게 썰고 볕에 쬐어 잘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주머니에 담고는, 피우려 할 때 대나무를 주머니 안에 집어넣어 절로 가득 차게 한다. 애초에 손을 써서 채우지 않는데다 습기까지 없는 까닭에 순식간에 다 타버린다. 또한 계속 피우지는 않고 하루에 피우는 것도 많아야 네댓 대[竹]를 넘지 않는다.
일반적인 촌락에서 마시는 술은 모두 소주(燒酒 쌀이나 수수 등을 쪄서 누룩과 물을 섞어 발효시켜 증류한 술)다. 애초에 우리나라의 청주(淸酒)나 막걸리[濁醪] 같은 것은 없다. 맛은 서관(西關 황해도와 평안도의 통칭으로 서도(西道)라고도 함)의 소주 같은데 마신 뒤에는 속이 불편하다. 석회를 섞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심양에서부터는 귤주(橘酒)가 있는데, 맛이 아주 달고 향기롭다. 산해관 안쪽에서부터는 내국공(內局公)이 있고, 북경에 들어가면 강남춘(江南春)이 있으니 맛이 아주 맑고 향기롭다. 술의 도수가 또한 지나치게 독하지 않아서 슬쩍 취기가 돌 뿐이지 갑작스레 취하는 법이 없다. 한 잔을 기울이면 향기가 온몸에 끼쳐와 하룻밤을 묵어도 바뀌지 않는다. 계주(薊州)와 역주(易州)의 술맛 또한 맑고 강렬하여 우리나라의 계당주(桂糖酒 소주에 계피와 꿀을 넣어 삭힌 술), 이강주(梨薑酒), 백하주(白霞酒)와 같은데 약하게 취하고 쉽게 깬다.
장(醬)은 모두 대두(大豆 메주콩)에 밀[小麥]을 섞어서 만든다. 장맛이 밋밋하고 시큼하여 먹을 수가 없다. 파는 장은 오로지 팥[小豆]을 사용하여 만들어서 맛이 또한 몹시 고약하다.
김치는 모두 갓, 배추, 마늘, 파 등으로 만들어 맛이 아주 짜고 독하다. 영원위(寧遠衛)와 풍윤현(豐潤縣)에는 모두 동치미가 있어, 우리나라와 맛이 같다. 북경 통관(通官 역관)의 집에서도 우리나라의 김치 담는 법을 흉내냈다. 도처에 간혹 갖가지 모양의 과장(瓜醬)이 있는데 맛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
꿩고기 맛은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나았다. 소흑산(小黑山)과 십삼산(十三山)에는 메추라기가 아주 흔하고 맛이 좋다. 대릉하(大陵河)에는 감동젓 맛이 대단히 훌륭한데 값은 너무 싸다.
물고기로는 회잔어(膾殘魚), 궐어(鱖魚 쏘가리), 유어(鰡魚), 중순어(重脣魚 누치), 이어(鯉魚 잉어), 부어(鮒魚 붕어), 저합(苧蛤 모시조개), 죽합(竹蛤 맛조개), 백어(白魚 뱅어), 방어(魴魚) 외 이름을 모르는 것이 아주 많다.
채소로는 마늘, 파, 배추, 갓, 무, 시금치, 상추, 미나리, 씀바귀, 생강, 마가 가장 많고, 모두 집의 채마밭에 심었다. 통원보(通遠堡)는 고사리가 가장 좋다. 그 외에도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식탁은 캉 위에 설치한다. 길이는 세 자에 가깝고, 너비는 길이의 삼분의 일에 못 미치며, 높이는 모두 네댓 치이다. 이것을 일러 ‘끽반교자(喫飯校子)’라 한다. 밥을 차릴 때 뿐 아니라 글씨를 쓸 때에도 사용한다. 캉 아래에 놓는 탁자는 그 높이가 캉과 맞먹는데, 길고 모두 좁다랗다.
등자(凳子)의 제도는 둥근 것도 있고 네모난 것도 있다. 그 높이가 걸터앉기에 적합하고, 밤이 되면 누워서 잔다. 평소 책상다리를 하고 앉거나 무릎을 꿇고 앉는 경우가 전혀 없고 모두 등자에 걸터앉는다.
그릇은 비록 궁벽한 마을과 후미진 거리라 할지라도 모두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를 사용하고,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으면 모두 백자(白磁)이다. 놋그릇은 거의 없다. 집물(什物 살림살이에 쓰이는 온갖 기구) 중에도 구리나 주석으로 만든 것은 없다. 인가(人家)의 술통[酒榼]과 다호(茶壺), 촛대와 향로는 모두 백석(白錫)을 사용한다.
땔감은 모두 수숫대를 쓰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버드나무를 사용한다.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는 쪼개지 않는데, 대개 그 조각까지도 아끼는 것이다.
숯은 모두 석탄(石炭)을 사용하고, 목탄(木炭)도 있다. 석탄은 색이 검고 그 덩어리의 크고 작음이 일정하지 않다. 불을 붙인 뒤에는 비록 한두 달이 지나더라도 꺼지지 않는다. 물을 뿌리면 꺼지지만 다시 불을 붙이면 또한 잘 탄다. 그 가는 가루로 먼지가 된 것은 물에 개어 흙을 섞어서 덩어리를 만든다. 말려서 불을 붙이면 원래의 석탄처럼 불기운이 모두 몹시 맹렬하다. 몇 덩이만 쌓아서 태우면 비록 몇 칸의 캉이라 할지라도 아주 따뜻해진다. 그 연기 냄새는 아주 독해서 처음 맡아본 우리나라 사람들은 두통을 앓는다.
밥을 지을 때는 모두 가마솥을 사용한다. 그 바닥이 평평하여 쉽게 끓는 것을 취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노구솥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물 긷는 그릇은 모두 버드나무를 엮어서 만들어서 가볍고 깨지지 않는다. 또한 우리나라의 동이나 독 같은 종류는 없다.
안구(鞍具 말안장에 딸린 여러 가지 기구)는 구리나 철을 드물게 사용하고, 나귀의 등자(鐙子) 같은 것은 흔히들 부드러운 나무로 만들었다. 대개 구리와 철이 귀하기 때문이다. 언치[韉 말이나 소의 안장이나 길마 밑에 깔아서 그 등을 덮어 주는 방석이나 담요]는 모두 긴 천을 안장 바닥에 두어서 드리우는데, 우리나라처럼 양편(兩片)을 쓴 것은 없다. 가죽도 사용하고 모전(毛氈)도 쓰지만 모전을 이용한 언치가 대부분이다. 대련(帒連 전대)도 모두 무늬 있는 모전으로 만들었고, 가죽으로 만든 것은 전혀 없다. 중화의 사람들이 말을 타는 방법은, 등자와 가슴걸이는 반드시 짧게 하고 모두 다리를 굽혀서 앉는다. 더욱이 말을 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말을 잘 타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 삼거리(三巨里)는 모두 좁다란 가죽에 푸른 수식을 달았고, 각각 적당한 정도로 팽팽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부질없이 겉치장만 요란하게 한 것은 없다.
활은 모두 뿔로 만든다. 안쪽에는 나무를 대고 뒤쪽에는 낙타의 힘줄을 붙인다.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활은 우리나라에 비해 모두 두세 마디가 길어서 삼봉(三峯)의 생기(生氣)가 전혀 없다. 그 과거 제도에 ‘팔력(八力)’, ‘십력(十力)’, ‘십이력(十二力)’ 등의 말이 있으니, 그 중에서도 가장 센 것이 십이력(十二力)이다.
화살은 모두 호목(楛木) 줄기에 황새 깃을 달고, 화살통 하나에 7개를 꽂는다. 몸체의 크기는 거의 우리나라의 철전(鐵箭)만 하고, 깃의 너비는 미전(尾箭)과 같다. 화살촉은 모두 편(片)으로 만드는데, 둥근 것은 없다. 평전(平箭)과 마상전(馬上箭)은 무게가 4전(戔) 정도에 불과하다. 과녁은 모두 삼십 보를 넘는 것이 없고, 말 위에서 맞추는 과녁 또한 모두 10보다. 철전은 댓조각을 맞붙이는데도 3량(兩) 5전에 불과하고, 멀어도 칠십 보를 넘지 않는다.
조총(鳥銃)은 길고 짧은 것이 한결같지 않지만 그 제도는 우리나라와 대동소이하다. 모두 자루가 길고 휘어서 손으로 잡기가 편하게 되어 있다. 서서 쏘는 자가 대부분이다. 서서 쏘는 자는 대개 나는 새도 맞추는 자이다. 쏘아서 그때마다 맞추니, 대저 그 쏘는 방법이 모두 신묘하다.
작두는 칼날이 얇고 날카로워서 한 사람이 손으로 눌러 한 단의 풀을 능히 자를 수 있으니, 우리나라의 발로 밟는 작두보다 낫다. 말[斗]의 모양은 주둥이가 넓고 바닥이 좁다. 그 절반을 구획하여 두 구역으로 만들고 쇳조각으로 경계를 장식하였다. 그래서 비록 수년이 지나도 마모되지 않고 무뎌지지도 않는다.
방아은 둥글고 큰 돌을 땅 위에 놓고 가운데에 나무 기둥 하나를 꽂았다. 또 몇 자쯤 되는 크고 둥근 돌 가운데에 구멍을 내고 나무를 꽂아 활기(活機)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한쪽 끝은 나무 기둥에 매어놓고 다른 한쪽 끝은 가라말[驪 털빛이 온통 검은 말]에 멍에를 매어 굴리는데, 이것을 일러 ‘연자방아[碾]’라 부른다. 집집마다 있어서 오곡(五穀)을 찧어 알곡을 만들었다. 이 외에도 방아가 있어 그 제도가 우리나라와 같고 모두 가라말과 노새로 돌렸다. 반드시 그 눈을 가리니 한 차례 채찍질을 하면 하루 종일 쉬지 않는다.
키[簸]는 ‘풍차(風車)’라 부른다. 나무로 큰 상자를 만들었으니 길이는 4자[尺]나 되고 너비는 그 반이다. 위에는 큰 말[斗]을 설치하여 곡식을 채워두었고, 옆에는 구멍 두 개를 뚫었다. 앞의 구멍은 통하고 뒤의 구멍은 막혀 있다. 안에는 하나의 수레바퀴 같은 것을 설치하였고, 바깥에는 활기(活機)를 만들어 두었다. 한 사람이 그 사이에 앉아서 손으로 돌리면 끊임없이 바람이 나온다. 위쪽의 말에 채워둔 곡식이 차례로 아래로 내려가 첫 번째 구멍으로는 낟알이 나오고 두 번째 구멍으로는 쭉정이가 나오며 앞 구멍으로는 겨가 나와서, 순식간에 몇 섬 남짓 되는 곡식을 다 까불 수가 있다.
수레는 제도가 다양하다. 태평거(太平車)는 문이 옆으로 나 있다. 수레 위에 설치하는 제도는 수레마다 모양이 같다. 농거(農車)는 수레 위에 설치하지 않아서 거름을 가득 싣기에 편하다.
가마에는 팔인교(八人轎)와 사인교(四人轎)로 불리는 것이 있다. 팔인교는 여덟 사람이 메고, 사인교는 네 사람이 멘다. 유리로 만들고 초록빛 모전으로 꾸몄다. 이것은 재상(宰相)이 타는 것으로, 외방(外方)의 목수(牧守 주(州)와 군(郡)의 장관) 또한 이것을 탄다.
과일의 경우, 산사(山査)는 크기가 배만 하고 백에 하나도 좀 먹은 것이 없다. 과육이 많고 맛이 좋다. 사과는 크기가 찻주발만 하고 맛이 아주 달고 상큼하다. 임금(林金 능금)은 크기가 봉산배만 한데 맛이 달고 신 맛이 없다. 수박은 모양이 길쭉하고 노란색이며, 씨는 모두 검은 반점이 있다. 수레에 싣고서 파는데 남녀노소 먹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풍속이 그리 만든 것이다. 포도는 낱알이 크고 맛이 달고도 향기로운데, 자색을 띠는 것이 많다. 이러한 과일들은 비록 봄에 저장해둔 것이지만 그 생생하고 신선함이 완연히 제때에 생산된 것만 같다. 아마도 보관하는 오묘한 방법이 반드시 있을 터이다. 낙화생(落花生 땅콩)은 나무에 꽃이 피었다가 다 떨어진 뒤에 꽃이 떨어진 땅에서 기운을 머금어 열매를 맺는 까닭에 이렇게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모양은 콩 꼬투리와 같고 맛은 아주 고소하고 달콤하다. 사람들이 나무 아래에서 흙을 파서 취해 먹는데, 가격 또한 아주 싸다. 귤과 불수(佛手)와 석류는 대동소이하나 냄새가 향기롭고 맛이 달콤하다. 보통의 화초포(花草舖)에는 모두 이 세 가지의 과일 나무가 있어서 바야흐로 정월에도 꽃을 피워 흐드러진 것을 볼 수 있다. 대개 풍토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용안(龍眼)은 아주 흔하고 맛은 먹을 만하다. 회회국(回回國)의 포도는 색이 푸르고 모양이 작지만 맛이 달고 새콤하다. 우리나라 사람의 두우(痘憂 천연두)에 효과가 있다고 하나,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는 모르겠다. 서양의 참외는 맛이 아주 향기로워 이것을 먹으면 사람의 정신이 맑고 깨끗해진다. 그 껍질 또한 우리나라 사람의 눈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다. 대추와 밤 또한 우리나라에 비해 아주 크다. 대추 가운데 큰 것은 거의 계란만 하다. 과육이 많고 씨가 작으며 맛이 아주 좋다. 그 가운데 검은색에 꿀로 볶은 것이 더 좋다. 유감(乳柑)과 문단(文丹)은 모두 석류와 모양이 같은데, 맛은 더없이 좋다. 매우 귀하여 하나에 가격이 4, 5조(吊)나 된다.
오곡(五穀)은 모두 있다. 수수가 가장 흔하고, 그 다음은 콩, 그 다음은 조, 그리고 다음은 옥속(玉粟)이다. 산해관 안팎에서는 밥을 지을 때 대체로 수수와 한도(旱稻)를 사용한다. 북경에는 또 수도미(水稻米)라는 것이 있다. 흰 빛이 마치 은과 같은데, 밥을 지으면 딱딱해진다. 우리나라의 밥과 같은 것은 없다.
대거(大車)의 경우 멍에를 다는 말이 많게는 간혹 열서너 필에 이르고, 소거(小車)도 간혹 한두 필이다. 수레에는 비록 크고 작은 차이는 있어도 바퀴의 제도는 같다. 그래서 길 가는 수레의 자국은 천하가 모두 같다. 몽고의 수레는 제도가 더욱 가볍고 편리하며 정교하고 오묘하다. 하지만 질박하면서도 짐을 많이 싣는 대거(大車) 같은 것은 없다. 칸처더(看車的 수레를 모는 사람)는 서너 길의 긴 채찍을 잡고 수레 앞에 앉아서는 공중에 휘둘러서 소리를 내어 그 가운데 힘을 내지 않는 놈을 움직이게 하니, 애초에 때리지 않고도 여러 말들이 힘을 고루 내어 수레가 나는 듯이 나아간다. 수레에 멍에를 다는 것으로는 말과 나귀뿐만 아니라 소와 노새와 가라말과 불깐 말 등속을 두루 쓰는데, 모두 뒤섞여 무리를 이루고 있으니 그 또한 기이하다. 또한 독륜거(獨輪車 외바퀴 수레)가 있어 한 사람이 양쪽 어깨에 메고서 밀고 간다. 똥이나 옹기를 실을 때는 모두 이 수레를 사용한다. 실은 짐의 무게는 매번 수백 근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가라말이 하는 일이 가장 고되다. 짐을 싣거나 사람을 태우는 일 외에도, 물을 나르고 연자방아를 돌리고 밭을 갈며 아이를 태우고 타작(打作 곡식의 알을 떨어서 그 알을 거두는 일)하는 일 등 하지 않는 일이 없다. 게다가 채찍과 몽둥이가 매우 크고 채찍질은 더 매섭다.
먼 길을 가는 말은 비록 하루에 수백 리를 가더라도 길에서는 꼴과 콩을 먹이지 않는다. 숙소에 이르러 쉬면서 한두 시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꼴과 콩을 먹이고, 밤이 깊은 뒤에 맑은 물을 마시게 한다. 새벽이 되면 또 꼴과 콩을 먹이며, 물이 있으면 마시게 하고 없으면 그냥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 마시게 한다. 몇 달 동안 잘 길러서 몸이 아주 살찐 말은 비록 먼 길을 가더라도 콩을 먹이지 않는다. 밤마다 다만 긴 꼴 한 단을 주고 맑은 물을 마시게 한다. 먼 길을 걸어 몸이 야위어야 비로소 콩을 먹인다. 소와 말, 노새와 나귀, 가라말과 불깐 말, 낙타 등속을 막론하고 기르는 방법은 똑같다. 말발굽에는 쇠를 부착하지 않고, 나귀는 간혹 쇠를 부착한다. 소는 몸집이 작고 뿔이 길며 굽어서 앞쪽을 향한다. 모양이 우리나라 소와는 같지 않다. 또한 코를 뚫지 않고 다만 뿔에 묶어 제어한다.
밭갈이하는 법은, 산해관 안쪽에서는 농기구가 가볍고 편리하여 간혹 나귀를 이용하거나 사람이 한다. 소로는 전혀 밭을 갈지 않는다. 산해관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대신 밭을 가는 경우는 없다. 요동의 동쪽에는 말과 소에 함께 멍에를 달고, 농기구 또한 우리나라 산골에서 사용한 것과 비슷하다. 고려의 옛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말 중에는 흰 말이 열에 예닐곱을 차지한다. 소는 흰색도 있고 검은색과 회색도 있지만 순황색(純黃色)은 전혀 없다. 낙타는 모두 회색이고 간혹 흰색도 있다. 돼지[猪]는 흰색이 많이 섞여 있고, 닭은 흰색 깃털이 있는 것이 많다. 황적색인 것은 전혀 없다. 육축(六畜 집에서 기르는 대표적인 가축인 소, 말, 돼지, 양, 닭, 개를 말함) 중에 흰색이 많은 것은 그 이치를 알 수가 없다. 개 가운데 큰 것은 망아지만 한데 모양은 파리해도 노루와 사슴을 잘 잡는다. 또 수렵(水獵)하는 개가 있는데, 다리가 길고 모양은 파리하며 털이 가늘고 민둥민둥하다. 강이나 바다에 들어가 물고기를 잘 잡으니 수달과 한 가지다. 한 마리의 가격이 은 오육십 냥에 이른다. 아주 작은 개로 ‘발발(發發)’이라 불리는 것이 사람의 품안에 안겨 있었는데, 낯선 사람을 보면 짖으며 깨문다. 그 생김새가 고양이 같지만 성질이 더 고약하다.
말을 타고 사냥하는 자는 모두 기라(綺羅)와 단전(緞氈) 등의 물건으로 두 가닥의 치마를 만들어 무릎 앞에 붙였다. 간혹 사슴 가죽을 쓰기도 한다. 시속(時俗)에서 ‘불치마(弗侈麻)’라고도 부르니, 의주의 무사가 본떠서 모두 이러한 예를 따른다.
산천풍속총록(山川風俗總錄) : 이 항목은 1712년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북경 유람 기록인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를 바탕으로 기술한 것이다. 동일한 제목 아래 전체 구성과 내용을 대체로 따르되 바뀐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순서도 조정하여 변화를 주었다.
동팔참(東八站) : 보통 압록강 접경 지역인 구련성(九連城)에서 시작해 ‘탕참(湯站)→책문(柵門)→봉황성(鳳凰城)→진동보(鎭東堡) 또는 송참(松站)→진이보(鎭夷堡) 또는 통원보(通遠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甛水站)→요동(遼東)→십리보(十里堡)→심양’에 이르는 지역의 역참을 가리킨다. 동팔참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데, 1712년에 북경에 다녀온 김창업은 봉황성에서 요동까지를 동팔참이라 불렀고, 1798년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서유문(徐有聞)은 책문에서 심양까지를 동팔참이라 불렀다.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를 많이 참고한 신태희는 김창업의 견해를 받아들여 봉황성에서부터 요동까지를 동팔참이라 불렀다.
이따금 …… 이곳이다 : 《북경록(北京錄)》 1826년 11월 27일 기사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각종 사행 기록에는 진강부가 구련성(九連城)의 옛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천(金川)의 저탄(猪灘) : 저탄은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동쪽에 있는 예성강(禮成江) 상류의 명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에 “저탄,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금천은 평산의 속읍으로 ‘강음(江陰)’으로도 불렸다.
고루가(鼓樓街) : 북경 황성(皇城)의 북문인 지안문(地安門)의 북쪽 길과 내성의 북동문인 안정문(安定門)의 서쪽 길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현재 고루대가(鼓樓大街)로 불리는 곳이다.
북경성(北京城)은 …… 30리다 : 북경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고, 내성 안에 차례로 황성(皇城)과 자금성(紫禁城)이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말한 40리의 북경성은 내성을 가리키고, 중성은 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대통교(大通橋) : 북경 외성의 동편 모서리에 위치한 동편문(東便門) 바깥에 있던 다리다. 명나라 때 세웠는데, 통주에서는 서쪽으로 10리쯤 떨어져 있다고 한다. 최덕중(崔德中)의 《연행록(燕行錄》 1713년 1월 14일 기사에 “대통교는 동편문 밖에 있는데, 이것은 바로 조운선이 드나드는 큰 다리이다.[大通橋在東便門外, 此乃漕船出入之大橋.]”라는 기록이 보인다.
영고탑(寧古塔) :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성(寧安縣城)의 청나라 때 지명이다. 누르하치가 만주를 장악할 때 교두보로 삼았던 곳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더하여 요령성(遼寧城)에 위치한 영고탑패륵(寧古塔貝勒)은 누르하치의 선조가 세거(世居)한 곳으로 만주족의 요람과 같은 곳이다. 안정복(安鼎福, 1721~1791)의 《동사강목(東史綱目)》 〈강역연혁고정(疆域沿革考正)〉에 영고탑의 역사지리적 변천과정이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꽃을 꽂는다 : 원문은 ‘잠화(簪花)’로 대화(戴花), 즉 머리에 꽃을 꽂는 것을 말한다. 청나라 조익(趙翼)이 쓴 《해여총고(陔餘叢考)》 〈잠화(簪花)〉에 “지금의 풍속은 오직 부녀만이 꽃을 꽂는데, 옛 사람의 경우에는 꽃을 꽂지 않은 자가 없었다.[今俗惟婦女簪花, 古人則無有不簪花者.]”라는 구절이 보인다.
비단옷 : 원문의 ‘기라(綺羅)’는 비단으로 만든 의복을 가리킬 뿐 아니라 비단옷을 입은 귀부인이나 미인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두 가지의 의미를 중첩하여 중의적 의미로 썼다. 청나라 후방역(侯方域)이 쓴 〈남성시책삼(南省試策三)〉에 “임금이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니 연나라와 조나라의 화장한 미인과 오나라와 월나라의 비단옷 입은 미인은 묻지도 않고 태자의 앞으로 나아갔다.[人主好聲色, 則燕趙之粉黛, 吳越之綺羅, 不問而進太子之前矣.]”라는 구절이 보인다
한인 …… 한다 : 전족(纏足)은 과거 중국에서 유행했던 풍습 가운데 하나로, 여자아이가 태어나 네댓 살이 되면 긴 끈으로 발을 감아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오대(五代)나 북송 무렵에 비롯되어 명나라 때 크게 유행하다가 청나라 말기에 금지령이 내려지고부터 차츰 없어졌다고 한다. 이재흡(李在洽)의 《부연일기(赴燕日記)》 〈주견제사(主見諸事)ㆍ인물(人物)〉에 나오는 기록이 특히 자세하다. 전족의 역사에 대해서는 서경순(徐慶淳)의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를 참고할 만하다
한인들은 …… 했다는데 : 신태희가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산천풍속총록(山川風俗總錄)〉에 나오는 “혹자는 ‘한인은 오히려 삼년제를 쓰고 만주인은 역월제를 쓴다. 만주인은 모두 화장을 하고 한인은 화장을 하지 않는데, 근래에는 한인도 화장을 한다’고 하였다.[或云, 漢人尙用三年之制, 淸人用易月之制. 淸人皆火葬, 漢人不火葬, 而近來亦頗火葬云.]”라는 구절에서 확인한 내용이다.
수장(水漿)을 …… 않고 : 빈(殯)을 마치기 전까지는 상주가 마실 것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보이는 “증자가 자사에게 이르기를, ‘급아. 나는 어버이 상을 당하여 수장을 입에 넣지 않은 것이 이레였다.’라고 하였다.[曾子謂子思曰, 伋. 吾執親之喪也, 水漿不入於口者七日.]”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만주인은 …… 했는데 :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에서 확인한 내용인데, 김창업과 함께 북경을 다녀왔던 최덕중(崔德中)의 《연행록(燕行錄)》 1712년 12월 26일 기사에도 “만주인은 삼월상(三月喪)을 지내며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 화장한 뒤에는 타다 남은 뼈를 수습하여 열 겹의 비단보로 싸고 꽃단지에 담은 다음 옥뚜껑으로 덮고, 다시 비단보로 단지를 싸서 매장한다.[淸人用三月之喪, 飮酒食肉. 火葬後, 收其燼骨, 裹以十襲錦袱, 又盛花甕, 覆以玉蓋, 更以錦袱裹甕, 埋葬.]”라는 구절이 보인다.
죽은 …… 방법 : 양혜왕이 제(齊)나라에 패해 맏아들이 죽고, 진(秦)나라에 패해 7백 리의 땅을 빼앗기고, 초(楚)나라에 패해 모욕을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과인은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한번 설욕하고 싶습니다.[寡人恥之. 願比死者, 一洒之.]”라고 말한 데서 따왔다. 《맹자(孟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보인다.
감가루[柿屑] : 신태희가 많이 참고했던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에는 “그 가운데 진미는 설탕 가루를 섞어서 만든다.[其珍者, 和糖屑而爲之.]”라고 하였고, 그 외 대다수의 사행 기록에도 설탕 가루[糖屑]로 기록되어 있다.
석회를 섞기 때문에 : 누룩을 뭉쳐 덩이를 만들 때 석회를 섞는 것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이재흡(李在洽)의 《부연일기(赴燕日記)》 〈주견제사(主見諸事)ㆍ음식(飮食)〉에 “일찍이 빈 행랑을 두루 돌아보니 누룩이 산더미같이 쌓였고 밀로 만든 누룩을 석회와 섞어서 덩이를 만들었다.[嘗歷觀空廊, 積麴如山, 小麥麴子, 和石灰作片.]”라는 구절이 보인다.
백하주(白霞酒) : ‘방문주(方文酒)’라고도 한다. 술밑에 쌀과 누룩으로 덧술하여 술맛을 진하게 만든 술로, 술빛이 흰 노을과 같다고 하여 백하주라 한다. 고려의 때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치선(治膳)ㆍ양주(釀酒)〉에 그 제조법이 자세히 실려 있다.
김치 : 원문은 ‘침채(沈菜)’로 ‘침저(沈菹)’로도 쓴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주례변실두실변증설(周禮籩實豆實辨證說)〉에 “우리나라에서는 싱거운 저를 ‘담제’라 하고, 짠 저를 ‘함제’라 하며, 젓갈과 나물을 섞어서 담근 저가 ‘교침제’인데, 통칭 ‘침채’라 한다.[我東則淡菹曰淡虀, 醎菹曰醎虀, 雜醢菜沈菹曰交沈虀, 總名曰沈菜.]”라는 구절이 보인다.
동치미 : 원문은 ‘동저(冬葅)’다.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이해응(李海應)의 《계산기정(薊山紀程)》,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燕轅直指)》 등에는 동침저(冬沈葅)로 기록되어 있다.
과장(瓜醬) : 장에 오이를 넣어 만든 장아찌 종류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조리서인 이표(李杓)의 《소문사설(謏聞事說)》에 “동아와 오이와 은행과 수박씨는 모두 장에 담가 반찬을 만들 수 있는데, 일찍이 북경의 인가에서 맛보았다.[取冬瓜黃瓜杏仁西瓜仁, 皆可浸醬爲饌, 曾食於燕京人家.]”라는 기록이 보인다.
감동젓 : 원문은 ‘감동해(甘同醢)’다. 푹 삭힌 곤쟁이젓을 말한다. 곤쟁이는 작은 새우처럼 생긴 갑각류로 주로 바다에서 나는데 민물에서 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시금치 : 원문은 ‘능파(蓤菠)’다.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燕轅直旨)》 〈음식(飮食)〉에 “능파채는 속명이 시금치다.[蓤菠菜, 俗名時根菜.]”라는 구절이 보인다
등자(鐙子) : 말등자나 발걸이로도 부른다. 말을 탔을 때 두 발로 디딜 수 있게 만든 물건으로, 안장에 달아서 말의 양쪽 옆구리로 늘어뜨리게 되어 있다.
삼거리(三巨里) : 보통 ‘세 갈래의 길’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말치레 중 하나인 가슴걸이를 일컫는다. 언덕을 올라갈 때 안장이 뒤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가슴에 둘러매는 끈인데, 이를 화려하게 만든 것을 ‘갖은삼거리’라 부른다.
그 과거 …… 십이력(十二力)이다 : 팔력(八力), 십력(十力), 십이력(十二力)은 활 힘을 나타내는 말이다. 활 힘의 강약은 활 몸의 후박(厚薄)과 아교와 힘줄의 경중(輕重)을 따져 결정하는데, 이덕무(李德懋)의 《앙엽기(盎葉記)》 〈궁전지제(弓箭之制)〉에 “1역(力)에서 3역까지는 힘줄 8냥(兩)과 아교 5냥, 4역에서 6역까지는 힘줄 14냥과 아교 7냥, 7역에서 9역까지는 힘줄 18냥과 아교 9냥, 10역에서 12역까지는 힘줄 1근(斤) 10냥과 아교 10냥, 13역에서 15역까지는 힘줄 2근과 아교 12냥, 16역에서 18역까지는 힘줄 2근 6냥과 아교 14냥이 소요된다.[一力至三力, 用筋八兩膠五兩, 四力至六力, 用筋十四兩膠七兩, 七力至九力, 用筋十八兩膠九兩, 十力至十二力, 用筋一斤十兩膠十兩, 十三力至十五力, 用筋二斤膠十二兩, 十六力至十八力, 用筋二斤六兩膠十四兩.]”라는 기록이 보인다.[주-D059] 철전(鐵箭) : 무쇠로 만든 화살로 육량전(六兩箭), 아량전(亞兩箭), 장전(長箭) 등이 있다.
전(戔) : 무게를 재는 단위인 전(錢)으로 십분(十分)은 일전(一錢)과 같고 십전(十錢)은 일량(一兩)과 같다. 청나라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 〈이전대수(以錢代銖)〉에 “과거의 산법에는 24수(銖)가 1량이다. …… 근래에 산가들이 불편하게 여겨서 그 한 량을 열로 나누고 전이라 이름하였다. 이 글자는 본디 전폐(錢幣)의 전(錢) 자에서 차용한 것이니 수가의 정식 명칭은 아니다.[古算法二十四銖爲兩.……近代算家不便, 乃十分其兩, 而有錢之名. 此字本是借用錢幣之錢, 非數家之正名.]”라는 구절이 보인다.
철전은 …… 않는다 : 철전의 무게가 우리나라에 비해 덜 나가고 날아가는 거리도 짧음을 말한 것이다. 우리나라 철전 중 하나인 육량전(六兩箭)은 호목(楛木), 대나무, 쇠, 힘줄, 깃, 도피(桃皮), 아교 등 7가지를 섞어 만드는데, 살의 무게가 6량(兩)이라 ‘육량전’이라 한다. 이것이 철전의 정식 양수(兩數)인 까닭에 ‘정량(正兩)’이라고 한다. 무과의 초시에서 정량궁(正兩弓)으로 3발을 쏘았는데, 그 거리는 80~100보였다고 한다. 참고로 다른 철전인 아량전(亞兩箭)은 무게가 4량(兩)이고 장전(長箭)은 무게가 1량(兩)이다.
주둥이가 …… 좁다 :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말은 원형이나 사각형인데 반해 중국에서 사용하는 말은 뒤집어진 사다리꼴 모양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산사(山査) : 산사나무의 열매인 산사자(山査子)를 말하는데, ‘아가위’라고도 하고 ‘당구자(棠毬子)’라고도 한다.
봉산배[鳳山梨] : 봉산에서 생산된 배를 통칭하여 이른 말이다. 이옥(李鈺, 1760~1815)의 《백운필(白雲筆)》 〈봉산배(鳳山梨)〉란 글에 “배의 진품으로는 청술레(靑戌來), 황술레(黃戌來), 합술레(合戌來) 등의 명칭이 있는데 봉산에서 생산된 것을 최상으로 친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수레에 …… 것이다 : 수레에 싣고 파는 것은 수박이 아니라 수박씨, 즉 서과자(西瓜子)다. 중국 사람들이 ‘꽈즈’라고 부르며 즐겨 먹는 간식 중 하나로 보통은 해바라기 씨로 만들지만, 수박씨나 호박씨[南瓜子]로도 만든다고 한다.
불수(佛手) : 불수감(佛手柑)을 말한다. 중국 복건성(福建省)과 광동성(廣東省) 등지에서 주로 자라는 상록관목의 과실인데, 선황색으로 겨울에 열매를 맺는다. 모양이 부처의 손가락을 닮아서 ‘불수감’이라 부른다고 한다.
용안(龍眼) : 무환자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이다. 중국 남부, 인도, 동남아시아, 열대 아프리카에 두루 자라는데, 씨의 과육인 용안육(龍眼肉)의 맛이 달아서 식용으로 쓰고 약용으로도 쓴다.
유감(乳柑) : 운향과(芸香科)에 속한 나무로 열매는 밀감과 비슷하고 맛은 약간 시다고 한다.
문단(文丹) : 중국 남부, 동남아시아, 대만 등지에서 자라는 감귤과 비슷한 과일이다. 현재 중국과 대만 등지에서는 ‘원딴(文旦)’이라 불린다.
한도(旱稻) : 여타 사행 기록에는 주로 한도미(旱稻米)로 기록되어 있다. 한도는 가뭄을 이기는 힘이 수도(水稻)보다 강하여 밭과 같은 마른 땅에 주로 심는 벼다. 뿌리가 비교적 잘 발달했으며 잎이 비교적 넓은데, 쌀은 연하고 광택은 적다. ‘육도(陸稻)’로도 불린다. 북위(北魏)의 가사협(賈思勰)이 쓴 《제민요술(齊民要術)》 〈한도(旱稻)〉에 “한도는 하전에 쓰고, 백토가 흑토보다 낫다.[旱稻用下田, 白土勝黑土.]”는 구절이 보인다.
대거(大車) : 평지에서 짐을 싣는 큰 수레를 말한다. 소가 주로 끈 까닭에 ‘우거(牛車)’라고도 했다.
인용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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