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문학계는 매우 조용합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이런저런 트러블이 있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모두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소설은 씌어지고 그에 대한 비평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등단을 하고 또 누군가는 상을 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관성에 의한 움직이어서 뭐랄까 새로운 분위기랄까 그런 것은 전혀 없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출판계나 학계는 이런 문단과는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뭔가 변화의 움직임 같은 것이 포착되는데, 그것은 최근 분명해진 이전과 다른 독서경향과 관련이 있다 하겠습니다.
독서가로 자처하시는 분들은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지금 우리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세계문학전집입니다. 최근 학계(당연히 문학관련)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도 ‘세계문학’인데, 물론 이때의 ‘세계문학’은 세계문학전집의 ‘세계문학’과는 조금 다릅니다. 비록 자주 혼돈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중 하나는 세계문학전집의 유행이 없었다면, 학계의 ‘세계문학’ 논의도 지금처럼 활발히 진행되지는 못했을 거라는 점입니다. 그 점에서 이 둘은 다르지만 명확히 구분하여 이야기하기는 힘든 면이 있습니다.
세계문학전집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그것이 정확히 세계문학전집으로 제한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세계문학’에 관한 것도 포함된 것이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도중에 양쪽을 오갈 수밖에 없게 되더라도 가능한 한 ‘세계문학전집’에 이야기를 집중하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1. ‘세계문학전집’이라는 문제
먼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까 고민하다 우연히 회원 수만 10만이 넘는 독서카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와 있더군요. 두 개를 전문으로 인용해 보겠습니다(강조는 인용자).
1) 어제 우연히 홈쇼핑광고를 보고 있었는데요/ 글쎄 민음사에서 나오는 세계문학전집을 싸고 팔고 있더라고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권정도 되잖아요~/ 그걸 1만원으로만 계산해도 200만원인데/ 그걸 1,055,000원에 파는 거예요/ 거의 반값으로 말이죠~~/ 으흐흐~~~~ 사고 싶다 ㅜ,ㅜ/ 그걸 12개월 무이자로 팔던데 한 달에 87,900원꼴이더라고요~/ 아~ 아직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저로서는/ 한 달에 87,900원이나 빠져나가면/ 생활이 어려워지므로/ 그럼의 떡이 되어버렸어요 ㅜ,ㅜ/ 차라리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우울하지 않았을 것을
2) 드디어 샀어요~ 홈쇼핑에서 싸게 팔기에/ 고민도 해보고 이리저리 생각해보고 알아보다가/ 결국!! 12개월 무이자로 샀습니다/ 아 앞으로 돈이 나가겠지만/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보니/ 배가 불러옵니다 ㅋㅋ/ 언제 다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읽으려고요~/ 고전 읽는 여자가 되렵니다^^
이와 비슷한 글은 그 외에도 꽤 많이 있었는데, 아무튼 최근 나름대로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일반독자들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가 세계문학전집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인 것은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조금씩 이야기되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일단 다음과 같은 핵심어들만을 추려놓기로 하지요. 홈쇼핑, 반값, 그림의 떡, 우울, 고전 읽는 여자.
현재 출판계는 ‘세계문학전집’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고무되어 나름대로 덩치를 갖춘 출판사는 너나 할 것 없이 이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민음사 전집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나머지는 이제 막 시작된 터라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기가 이르니까요. 실제 위 일반독자들을 ‘우울하게’ 하는 전집이란 홈쇼핑에서 판매되는 민음사의 전집을 의미합니다(그러므로 당연히 제가 이야기하는 세계문학전집도 민음사의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세계문학전집이라는 문제가 최근 시작된 문제라고 보기 힘듭니다. 대표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제1권이 출간된 것이 1998년이니까 이미 10년 전에 시작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 역시 정확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을 내기 시작했을 때는 거의 화제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문제적 출판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세계문학전집이 출판계에서 화두로 등장한 것일까요? 그것은 정확히 2005년 초 100권이 넘어서던 시기였습니다. 잠깐 신문 기사를 하나 들어 보지요.
국내 세계문학전집 시장이 급팽창하고 있다. 민음사의 성공에 자극받은 대형 출판사들이 잇따라 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문학동네가 5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이달 중순 1차분 20권을 시작으로 ‘세계문학전집’ 발간에 나섰다. 3년 전부터 준비해온 시공사는 내년 8월 ‘시공 세계문학의 숲’을 제목으로 전집 1차분을 내놓는다. 세계문학전집 시장이 1960~70년대 전집 판매 전성기의 영화를 재현할 것인가?
1998년부터 전집 발간에 나선 민음사는 최근 11년 만에 전집 목록 230권을 넘어서며 700만부 판매를 돌파했다. 장은수 민음사 편집인은 “초기 5년은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목록이 100권을 넘어서는 즈음부터 시장의 반응이 확 달라졌다”며 “2006년부터 4년 동안 해마다 100만여부, 100억여원어치씩 판매됐다”고 밝혔다. 이른바 ‘돈 되는 시장’임을 입증한 셈이다.
이 기사를 참조해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기사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이번 세계문학전집 붐이 ‘두 번째’라는 점이고, 둘째는 그 두 번째 부흥 시기가 2005년 즈음이라는 점입니다. 먼저 후자부터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세계문학전집이 처음 출판계에서 일종의 ‘문제’로서 등장한 것은 2004년 12월말 100권짜리 전질(약 50만원)이 겨우 30분 만에 약 1300여 세트(약 6억 5,000여만 원) 가량 팔려나가면서부터입니다. 그리고 3주 후 다시 1000여 세트(약 5억원)가 30분 만에 나갔습니다. 물론, 이것은 홈쇼핑을 통한 것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정부의 주도하에 홈쇼핑이 국내에서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995년으로, 첫해 매출은 35억원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10년도 안 되어 4조원(2004년)이라는 거대한 시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런 새로운 거대유통망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 중의 하나가 바로 전집류 서적이라는 점입니다. 한 기사에 따르면, 다른 상품의 경우 물품이 매진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데, 서적은 역으로 매진이 되지 않는 쪽이 오히려 드물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홈쇼핑에서 전집류 서적이 이처럼 인기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우리는 크게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저렴한 가격입니다. 홈쇼핑 도서는 보통 반값(50%)에 가까운 정가를 설정하는데, 상당수는 거기다 사은품(예를 들어 다른 세트도서나 책장)까지 끼워 넣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유아서적이나 학습서적과 같은 일반출판물과 유통구조가 조금 다른 서적들은 애당초 정가와 실제판가 사이에 큰 차이가 있던 터라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지 모르지만, 버젓이 일반서적으로 유통되는 책이 반값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메리트가 있는 것이기에 독자로서 마다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존재합니다. 첫째는 홈쇼핑 수수료입니다. 기사에 따르면, 판매가의 35~38%수준이라고 합니다. 이는 정가를 기준으로 보통 서점 마진율 30-40%로 풀리는 서점공급가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차이는 매우 미비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서점에서 이루어지는 할인의 경우 그 부담이 서점의 자신들의 이익에서 지불되는 반면에, 홈쇼핑의 경우는 그것을 출판사측에 부담시키고 형태를 띠고 있기에 그 차이는 매우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팔아서 출판사에 남는 게 있는지 의심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염려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정가를 책정할 때 할인까지 고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터넷서점을 통해 ‘할인판매’라는 것이 등장함과 동시에 책값이 대폭인상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일종의 조삼모사인 셈입니다. 때문에 어차피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물으실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낮은 정가의 책을 제값 주고 사든 높은 정가의 책을 그만큼 할인해서 사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분명해진 사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가대로 책을 사는 사람은 바보가 되었고(그래서 네댓 개의 인터넷서점과 역시 네댓 개의 홈쇼핑 위해 수천 개의 서점이 문을 닫았습니다), 판매물량과 광고비를 통해 인터넷과 홈쇼핑의 횡포(상품노출을 빌미로 납품가 조정)를 노출된 중소출판사들은 상대적 독자들과 연결될 확률이 적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어렵네, 어렵네” 하는 출판계에서 소위 메이저출판사들의 덩치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미국이나 현정부 또는 세계화와 같이 크지만 거대하고 추상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내지만, 정작 자신과 관련이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입을 딱 다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소위 생각이 있다는 문학인들도 여러 루트를 통해 MB정부를 비판하지만, 문학계 내부의 모순이나 문제점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거나 대충 넘어갑니다. 원래 그런 것이다, 래도 문학계만큼 깨끗한 곳도 없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도서할인전쟁은 사실상 우리나라 농업계에서의 쌀 수입과 같이 중요한 문제였음에 불구하고, 그것을 문제삼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도서할인문제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즉 대세라면), 쌀 수입도 마찬가지니 원론만 고집하지 말고 차라리 수입하고 외쳐야 했던 게 아닐까요? 노무현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그것이 ‘건전한’ 문학가의 증거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다시 본래의 문제로 돌아가면, 우리는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홈쇼핑에서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는 ‘도서정가제’라는 룰입니다. 홈쇼핑에서 판매되는 전집의 경우 설사 그것이 신간이라고 해도 30% 이상의 할인율이 적용되어 팔리고 있습니다. 예컨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경우는 뒷 번호는 모두 신간임에도 구간과 마찬가지로 파격적인 할인율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행태를 보이는 출판사가 민음사, 창비 등과 같은 한국의 대표적 출판사라는 점입니다. 겉으로는 고상하게 문화를 외치고 사회적 진보를 외치더라도 그것은 모두 ‘출판계 바깥’(사회)에나 해당되는 일일 테니, 결국 장사에는 장사(壯士)없다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런 불법을 저질러도 제재란 경우 솜방망이(과태료 300만원)라는 점입니다.
둘째는 구입자와 독자의 불일치입니다. 홈쇼핑에서 판매되는 전집류는 아무리 할인하더라도 고가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것을 읽을 사람(학생)이 구입하는 경우보다 그것을 읽도록 하는 사람(부모)이 구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애당초 홈쇼핑이라는 것 자체가 가정주부 또는 엄마를 타깃으로 하는 유통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독자와 구입자의 어긋남은 사실 일반적인 서점을 통한 유통구조에서는 많이 보기 힘듭니다. 또 사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일치하는 일반 독자들의 경우는 보통 낱권으로 책을 구입하기 마련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책장에 넣을 책’이 아니라 ‘읽을 책’을 구입하기 때문입니다.
‘전집’이란 ‘다 읽기 위한 대상’이라기보다는 구입자로 하여금 굳이 읽지 않아도, 즉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포만감을 주는 대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마 1970-80년대 에 유행한 방문판매용 전집류가 웬만한 가정에 장식품으로 비치되었던 것과 유사합니다. 물론 지금의 세계문학전집의 성공으로 입시, 특히 논술시험이 이야기되기도 합니다. 언제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시험지문으로 나와서 큰 화제가 된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세계문학을 읽는 것이 실제 논술시험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의문입니다. 어느 정도 구입자를 유혹하는 미끼로서는 작용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여러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문학전집 붐을 단순히 논술교육(입시)과 연결시키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입니다. 입시교육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며, 도대체 오늘날 무엇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세계문학전집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즉 왜 하필이면 다른 것도 아닌 세계문학전집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교양’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양에 대한 욕구’는 학생문화 형성과 더불어 오래 전부터 존재해오던 것이라, 그것(교양충동)은 답변으로서가 아니라 질문으로 다시 던져져야 합니다.
즉 “1960-70년대에도 유행한 세계문학전집이 2000년대에 다시 불고 있다”, “세계문학전집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가 아니라, “왜 1980-1990년대 초반의 독자들은 세계문학(전집)을 찾지 않았는가?”로 말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물음만큼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소 우회하는 과정이 필요하니 다소 여유를 갖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현재 불고 있는 세계문학전집 붐은 ‘교양충동’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인문학 열풍과 사실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사회과학에서 교양으로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교양’을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연스럽게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일단 분명한 한 가지는 교양이란 기본적으로 책(독서)이라는 매개체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아무리 세상경험을 아무리 많이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교양인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양이란 기본적으로 경험보다는 지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양과 지식을 담는 그릇인 책을 파는 출판산업과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교양주의의 생산주체는 항상 출판사이었고, 교양 붐이라는 것도 결국 특정 책이 많이 팔림으로써 생기는 현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소 막연한 이야기일 수 있으니 좀 더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출판문화와 관련하여 볼 때 지금의 교양 붐은 기본적으로 19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불었던 ‘사회과학 붐’(90년대 후반의 프랑스철학 붐까지를 포함)이 사그라진 뒤에 만개한 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변화에 대해 여러 가지 비판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금의 교양 붐이 가지고 있는 출판 상업주의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조정환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80-90년대에 많은 출판사들이 앞 다투어 사회과학서적을 냈던 것은 어떤 사회의식(사명의식) 때문이기보다는 일단은 그런 책이 팔렸기 때문입니다. 즉 어느 쪽이든 출판 상업주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회과학의 시대’와 ‘교양의 시대’를 무작정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순전히 출판산업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두 시대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양쪽 모두 출판사들이 팔리는 책을 지향했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전자의 경우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사업을 한 출판사들이 상당수 있었고, 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과학의 시대’ 때는 메이저와 마이너의 차이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습니다(고려원나 김영사와 같은 몇몇 예외는 있었지만).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지금은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사회과학과 문학출판으로 유명했던 곳 중 일부는 시대의 변화를 잘 포착하여 ‘교양의 시대’인 지금에 이르러서는 두 얼굴을 가진 메이저출판사로서 훌륭히 변신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 한 예를 90년대에, 여전히 많은 출판사들이 ‘사회과학의 시대’(또는 ‘문학의 시대’)에 미련을 가지고 있던 때에 미련 없이 ‘교양의 시대’로 넘어간 창비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비 웹사이트의 올려진 <창비 발자취>에는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강조는 인용자).
90년대에 본사가 연달아 내놓은 소설 동의보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등 대형 베스트셀러들은 창비가 딱딱한 사회과학서나 엄숙한 본격 문학서만을 간행하는 출판사가 아니라, 삶에 향기와 윤기를 더해주는 보배로운 책들을 간행하는 역동적인 출판사임을 새롭게 인식시켜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소설 동의보감이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번역소설과 각종 외국저작들이 범람하는 상황에서 우리 것을 우리 시각으로 소중하게 보듬고 갈무리함으로써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습니다. 특히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깊이 있는 인문교양서도 대중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을 뿐 아니라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대대적으로 불러일으킴으로써 90년대의 중요한 하나의 문화적 경향을 형성하였습니다.
대중소설 소설 동의보감은 1990년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1993년에 1권이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일반인들도 대중한의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강남아줌마들도 문화유산을 답사하며 우리문화의 소중함을 느꼈습니다. 말 그대로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향기와 윤기’가 삶에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이들 책은 90년대 중반이 넘어서면 ‘하나의 문화적 경향’을 형성하게 되는데, 저는 이를 ‘사회과학의 시대’에서 ‘교양의 시대’로의 사실상의 주도권 변경으로 해석합니다.
사실 2001년에 출간되어 말 그대로 ‘교양 붐’을 일으킨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은 이런 분위기가 사전에 조성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약 40만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이후 이와 유사한 책이 우후죽순처럼 출간됩니다. 그렇다면 출판시장에서 이와 같은 교양서적들이 환영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던진 질문에 답하는 대신, 비슷한 질문을 되풀이하는 전형적인 우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왕 질문을 던질 거라면, 차라리 ‘교양’이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교양’이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여러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서 우리는 교양을 일단 책에서 얻는 지식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막연한 이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식에도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대학에서 ‘교양’이란 단어는 전공(지식)의 반대말로 사용됩니다. 즉 대학 1, 2학년생들은 전공과목을 듣기 이전 단계로 교양과정을 이수하는데, 이때의 ‘교양’이란 전문지식이 아닌 수준이 있는 상식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렇다면 전문지식과 상식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즉 전자가 종합적(유기적) 지식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개별적 부분적(파편화된) 지식을 가리킵니다. 바꿔 말해, 전문지식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들의 연관관계(구조)이지만, 상식(교양)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들 자체라 하겠습니다. 실제 슈나비츠의 책은 우리에게 많은 지식(상식)을 알려주어 지적 포만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우리의 관심을 ‘그 이상으로’(그런 지식을 만들어내는 구조로) 이끌지는 않습니다.
아니, 교양에 있어 ‘그리고?’나 ‘왜?’와 같은 지식의 연쇄만큼 당혹스럽고 곤혹스러운 것도 없을지 모릅니다. 비유컨대 교양이란 흘러들어오는 물이 고이는 저수지와 같아서 어느 유명 문학가의 표현처럼 누군가에게 그것을 보이기 위해(대화를 하기 위한 이야기꺼리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90년대 중반부터 이런 교양충동이 2001년 슈나비츠의 저서를 통해 결정적으로 폭발한 것은 당시 지식생태계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역사가들은 2001년을 9.11 테러가 있었던 해로 기억하겠지만, 우리의 논의에서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 위키피디아의 탄생이라 하겠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위키피디아는 일반대중(교양대중)들이 만들어가는 백과사전으로서 항목의 다양성이나 정보의 정확성, 그리고 기술(記述)에서의 균형감각은 적잖게 떨어지지만, 지면제약 없음과 압도적인 정보량과 그리고 신속한 업데이트(더구나 무료)로 인해 약 250년 가깝게(초판은 1768년) 명성을 유지해온 브리태니커백과를 불과 10년도 안 돼 사실상 밀어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즉 위키피디아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인터넷이라는 기술적 발전 때문만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즉 그것은 지식의 ‘집적(集積)욕망’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공간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그러나 인터넷이 보편화된 것은 놀랍게도 불과 10년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접속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일들을 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검색’일 것입니다. 검색이란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알고 싶다’는 욕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지식충동은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접근상의 불편함은 삶과 직접관련이 없는 잉여지식에 대한 접근을 적잖게 방해해온 게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우리는 인터넷이 존재하기 이전의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앎(지식)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들이라는 게 대부분 잉여지식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즉각적으로 충족되는 지식이라는 점에서, 게다가 굳이 자기화할 필요한 없는 지식이라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지식이라기보다는 정보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자칫 지식의 깊이보다 넓이에 대한 충동으로 오해되는 ‘교양충동’이라는 말을 ‘정보충동’으로 바꿔 부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 완성에 관한 공부 (교양에 대하여Ⅰ)
그러나 자신있게 <교양충동=정보충동>이라는 공식을 제시할 수 없다는 데에 교양충동이 가진 복잡성이 있습니다. 즉 정보충동으로서의 교양충동이 비교적 최근에서 강조된 것이라면, 본래적인 의미의 ‘교양충동’이란 다른 곳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이야기지만, ‘교양’에 해당하는 영어단어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culture입니다. culture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문화’라는 번역어를 떠올리지만, 원래는 ‘교양’이라는 의미가 강했습니다. 예컨대, 매슈 아널드의 저서 중에 Culture and Anarchy라는 꽤 유명한 책이 있는데, 여기서 culture가 ‘교양’이라고 번역되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말이 나온 김에, 이 책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요. 왜냐하면 이 책은 교양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는 대표적인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온 시기는 지금의 우리 경우와는 매우 다릅니다. 다시 말해, 아널드는 이 책에서 당대의 교양적 분위기에 대해 다루고 있기보다는 오히려 교양의 없음(=무질서)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교양과 무질서는 매우 논쟁적인 저서로서, 그로 하여금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쓰도록 한 것은 하이드파크사건입니다.
하이드파크사건이란 선거법 개정(노동계급의 정치권 인정)을 둘러싸고 군중소요사건으로서, 간략히 요약하자면, 유권자의 확대를 담은 선거법 개정이 의회에서 부결되자 ‘개혁연대’가 주도하는 노동자들의 시위를 두려워한 정부가 사실상 유일한 대규모 집회장소였던 하이드 파크를 폐쇄하자 일부 시위자들이 공원을 철책을 무너뜨리고 난입하여 소란을 피운 사건을 가리킵니다(곧 군대가 출동했으나 군중은 이미 해산한 뒤였습니다. 그 뒤 다시 하이드 파크에서 집회를 할 수 있도록 요청하나 기각되어 전운이 감돌았지만, 존 스튜어트 밀에 중재로 실내집회로 진행되게 됩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아널드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별강연을 행하는데, 이 강연이 이후 「교양과 그 적들」이라는 제목으로 잡지에 게재되고, 이후 손질이 가해진 후 「단맛과 빛」이라는 제목으로 교양과 무질서의 제1장으로 수록되게 됩니다. 당시 이 글에 대한 평은 꽤 부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엘리트주의자’, ‘초월주의자’라는 비난에서부터 미래의 교양을 내세워 현재의 개혁을 거부하는 사기술이라는 비판까지 다양했습니다.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분명한 사실 중 하나는 적어도 당시의 영국이 무질서를 교양으로서 극복하자는 아널드의 주장이 쉽게 통하는 평온한 시기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교양’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요? 아널드는 우선 교양의 동기를 두 가지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첫째는 사물을 그 자체로 보려고 하는 정신적 욕망, 또는 호기심으로서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고 혼란을 일소하며 세상을 행복하게 곳으로 만들려는 ‘완성에 대한 사랑’으로서입니다. 그리고 첫째는 둘째의 전제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자만을 교양의 전부로 생각하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가 교양을 사실상 ‘완성에 대한 공부’로 정의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즉 교양이란 비록 일단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욕망에서 파생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자신만의 깨달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자기완성을 넘어서 인류의 완성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 자체만 놓고 봤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놓인 맥락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군중소요(무질서)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그가 이런 ‘무질서와 교양’이라는 문제설정을 ‘근대비판’이라는 형태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교양이 완성에 관한 공부라면, 그리고 조화로운 완성, 일반적인 완성에 관한 공부라면 그 완성이 무언가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되는 것에,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내면적 조건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 인류가 실현해야 할 매우 중요한 기능이다. 그리고 이 기능은 우리의 근대세계에서 특히 중요한데, 그것은 이 세계의 전체 문명이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보다 훨씬 더 기계적이고 외적이며, 앞으로 더욱 그런 경향을 띨 것이기 때문이다. (…)
기계장치(machinery)에 대한 신봉은 내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절박한 위험이다. 더구나 그 기계장치는, 혹은 거기에 무슨 유익이라도 있다면 기여하게끔 되어 있는 목적과 아주 불합리할 정도로 맞지 않는 경우에도 신봉되기 일쑤지만, 기계장치에 무슨 가치가 있기나 한 것처럼 신봉하는 경우가 늘 있다. 자유란 기계장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인구는 기계장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철도는 기계장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부는 기계장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심지어는 종교조직들은 기계장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가 눈길을 끄는 것은 당시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가던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입니다. 비판의 근거로는 그리스로마와 같은 ‘조화로운 정신의 상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실 아널드가 최근 20년간의 영국과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 중 어느 쪽이 위대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후자에 손을 들어주는 것도 후자의 시대는 비록 지금처럼 산업이 발달하지는 못했지만 정신적인 노력이 장대하게 펼쳐졌던 시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입장은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칼라일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과 궤를 같이 합니다.
만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 잉글랜드인을 보고 인도와 셰익스피어 둘 중 어느 것을 포기하겠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도야 있든 없든 상관없으나, 셰익스피어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입니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섬나라 잉글랜드는 머지않아 잉글랜드인의 매우 적은 부분만 남게 될 것입니다. 아메리카에서 남아프리카에서 동과 서로 지구의 반대편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상당 부분을 덮을 색슨 국가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지역을 사실상 하나의 나라로 결속시켜, 서로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형제처럼 사귀며 돕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흔히 이해되는 것처럼 이 구절은 단순히 셰익스피어에 대한 영국인들의 문화적 자존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세계 곳곳에 흩어진 식민지를 하나로 통합해주고 조화시켜줄 정신 쪽이 여러 식민지 중 하나에 불과한 인도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칼라일이 셰익스피어를 강조하는 것은 물질문명(기계장치)을 부정(거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가진 자동성(기계성)을 컨트롤하는 것으로서 무엇(아널드식으로 말하면 ‘교양’)을 상정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널드는 바로 이와 같은 컨트롤이 부재한 개인을 속물(Philistine)이라고 부르고 비판하는데, 이는 적어도 그의 눈에 당대의 영국은 ‘속물들로 가득한 사회’로서, 당대의 무질서라는 것도 결국 그런 속물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비쳤다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양이란 기본적으로 정신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육체와 관련된 것에 얽매이는 것은 ‘길들지 않은 자연의 표시’라는 에픽테투스의 말을 언급하며, 교양이란 달리 말하면 ‘길든 자연’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그에 따르면 속물이란 ‘길들지 않은 자연’(자연성, 동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아널드의 논의를 따라갈 때만큼은 다소 어색할지 모르지만 자연과 기계장치를 대립된 것으로서가 봐서는 안 됩니다. 그에게 있어 자연과 기계장치는 사실상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산업주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신의 조정(통제)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산업주의(기계장치)의 희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자유(주의)마저도 기계장치로 보고 있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중간계급이나 민중들이 주장하는 자유주의나 참정권에의 요구가 적어도 그에게는 옳고 그름은 차치하더라도 매우 무질서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혼란을 또 다른 조화를 위한 과정으로서 본 것이 아니라, 조화 자체를 위협하는 자동장치로서 보았던 것입니다.
다른 선의의 친구들은 중간계급 속물주의의 낡은 관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는 새롭고 아직 시험해보지 않은 것이지만 자연스럽게 민중의 발길이 쏠리게 되는 방향으로 이 새 세력을 이끌려고 한다. 그것을 나는 자코뱅주의의 방식이라고 부르겠다. 과거에 대한 격렬한 분노, 대규모로 적용된 추상적 혁신체계, 미래를 위한 하나의 합리적인 사회의 형태를 세밀하게 그린 새로운 원리, 이것들이 자코뱅주의의 방식이다.
아널드는 새로운 변화에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추상적 이념에 대한 탐닉에 기반하여 무질서하게 전개되는 것에 반대할 따름입니다. 구호나 이념을 추종한 나머지 생각(반성)보다 행동이 앞섬으로서 조화를 헤치고 사회적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교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당시 변혁세력들은 자유를 외치지만 실은 자유라는 기계장치에 끌려가고 있을 뿐이며,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자유란 그런 ‘기계장치로서의 자유’를 넘어선 교양(조화에의 의지)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교양은 어떻게 얻을 수가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그는 1) ‘독서’와 2) ‘관찰’, 그리고 3) ‘사고로 이성과 신의 뜻에 도달하려는 노력’에 의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2), 3)은 1)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교양의 속성을 (스위프트에게 빌려온 표현인) 단맛과 빛으로 요약하고, 전자가 아름다움(美)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지혜로움(지식)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명확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문학(예술)에서 지혜로움은 사상(철학)에서 획득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조화란 매개물을 통해 간접적일 될 때만, 또는 멀리서 볼 때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널드의 논의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가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영국이 기계장치에 이끌려 무질서로 말려들어가는 것을 통제할 권위 자체가 부재하다는 것입니다. 즉 당시 영국의 가장 큰 문제는 개개인의 자유는 마음껏 이야기되지만, 정작 그것들을 조정할 공적인 개념은 부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교양의 최고목표로 ‘최상의 자아’를 이야기하며, 이를 국가와 연결시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미슐레는 프랑스는 ‘징병으로 문명화가 된 야만인의 나라’라고 비판했는데, 아널드는 영국인은 개인의 자기의지보다 위에 있는 공적인 의무나 훈련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징병이라는 것에 매우 거부감이 강하고 말하며 도리어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아널드에게 있어 교양이란 개인적 자기의지를 넘어선 질서(조화)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가 훔볼트의 책 정부의 영역과 의무에 대한 당시 영국인들의 오해를 비판하면서 훔볼트가 우선적으로 개인의 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점 또한 강조했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이와 같은 아널드의 주장은 강력한 국가가 성립해 있는 지금의 관점에서는 다소 시대착오적으로 생각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상 지금의 교양문화도 국가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교양의 완성이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아널드식 교양 개념은 우리의 그것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고 하겠습니다(어떻게 보면, 영국은 매우 특수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물론 내재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4. 자기도야 (교양에 대하여 Ⅱ)
아널드가 강조하는 ‘교양’이란 아널드가 만들어낸 것이기보다는 독일에서 건너온 개념입니다(그는 레싱과 훔볼트를 언급합니다). 따라서 ‘교양’하면 culture보다 Bildung을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Bildung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일단 Bildung의 동사 bilden은 ‘(~를) 만들어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들어내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따라서 보통 ‘교양’하면 아널드처럼 무질서에 대항하는 거창한 ‘조화(완성)에의 의지’보다 한 개인에 부가되는 인격이나 품위를 떠올리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양이란 말에 접근할 때, 우선적으로 감안해 하는 것은 거기에 ‘자기도야’, ‘자기인격형성’이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만드는 것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교양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혹자는 ‘교양’의 반대말을 철자 하나만 바꾼 Bindung(유대)이라고 보기도 하는데(예컨대, 알레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의 국민적 기억론 등에서), 그것은 신분과 혈연, 지연으로 얽매어 사실상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없었던 전통사회에서는 ‘교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문제시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양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습니다. 즉 한편으로는 방금 이야기한 자기도야적 성격이 있지만(개인적 성격),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유대를 형성하는 면(공동체적 성격) 또한 있습니다. 즉 교양의식은 혈연이나 지연으로 연결된 사람들보다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더 호감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탄생한 공동체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우선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학생공동체입니다. 사실 교양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근대초기의 학생문화(또는 교육문화)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교양의 가장 훌륭한 소비자들(책을 구입하고 읽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교양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당시의 교육이 가지고 있었던 이중성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근대초기의 상급교육이란 입신출세와 직결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성원 중 일부는 입신출세에 대한 묘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출세를 위해 필요한(실용적인) 공부만 하는 것을 속물로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양에는 ‘평등적’ 입신출세와 배리되는 심리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철학서나 문학서를 읽는 게 입신하는 데 도움이 됐을 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교양에 심취했던 것은 왜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입신출세에 대한 저항감’이라는 것 자체가 소수의 특권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들이 입신출세를 거부했던 것은 굳이 취직을 할 필요가 없었거나,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고학력이라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생활을 보장해주던 시기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교양의식이란 어떻게 보면 스스로를 다른 계층과 구별 지으려는 욕망이자 같은 계층 간의 자발적 유대확립과 관계가 있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런 설명들은 교양충동이 가진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지는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교양’이라는 단어는 당연히 일본에서 건너온 번역어로서, 그 단어의 역사는 여러 면에서 일본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듭니다(사실 식민지시기의 고등교육이란 대부분 일본유학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서 일본의 예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본적 맥락에서 ‘교양’이라고 하면 당장 떠오르는 것이 바로 ‘다이쇼(大正)교양주의’입니다. 메이지말기부터 구제(舊制)고교를 중심으로 인격형성을 위한 교양주의가 유행하여, 소위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의 난해한 철학서나 괴테 등의 문학서가 필독서로 간주되었고, 종합잡지인 개조, 중앙공론에 실린 글들 역시 학생들 사이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철학자 미키 기요시는 당시 일고(一高: 도쿄대 교양학부의 전신)에 재학 중이었는데, 「독서편력」이라는 글에서 그때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의 고등학교시대는 제1차 세계전쟁 시기였다. ‘생각해 보면’이라고 나는 말했는데, 이 경우 이런 표현이 정확하다. 왜냐하면 나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청년기에 그와 같은 대사건을 만났으면서도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면 곧장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전쟁으로부터 거의 직접적인 정신적 영향을 받지 않고 보냈던 것이다. 다만 나만이 아니라 많은 청년들이 그랬던 게 아닌가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러일전쟁 때 전쟁이 일어난 지도 모르고 연구실생활을 계속한 대학자가 있었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
제1차 세계전쟁이라는 대사건을 만났으면서도 우리는 정치에 대해서도 완전히 무관심했다. 혹은 무관심할 수 있었다. 즉 우리를 지배했던 것은 역으로 저 ‘교양’이라는 사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라는 것을 경멸하고 문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반정치적내지 비정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문화주의적 사고방식이었다. 저 ‘교양’이라는 사상은 문학적 ‧ 철학적이었다. 그것은 문학이나 철학을 특별히 중요시하고, 과학이나 기술은 ‘문화’에 속하지 않고 ‘문명’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 가볍게 취급할 수 있었다. 바꿔 말해, 다이쇼시대의 교양사상은 메이지의 계몽사상-후쿠자와 유키치에 의해 대표되는-에 대한 반동으로서 일어났다.
다이쇼교양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자주 언급되는 위 구절들은 기본적으로 교양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반동성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주목할 점은 첫째는 그와 같은 비판적 인식이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응(무자각)에서 도출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런 무자각(교양주의)을 수양(계몽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다이쇼교양주의는 도대체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요? 그것은 국가적 인정투쟁에서 얻은 자신감과 물질적 발전에서 관련이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저는 러일전쟁(1904-1905)이 당시 일본사회(특히 문학)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 논한 적이 있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일본)근대문학을 만든 것은 (러일)전쟁이었다” 사실상 최초의 근대적 장편소설인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는 그와 같은 일본 전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황에서 마치 종군기자의 심정으로 섰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이쇼)교양주의는 바로 이런 전쟁에서의 승리 후(세계사적 인정을 받은 후)에 생긴 국민적 자신감과 경제적 호황이 심리적, 물질적 배경으로서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교양은 전쟁을 무시했지만, 정작 교양은 전쟁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미키 기요시가 한참 독서에 빠져있던 자신의 일고시절을 사후적으로 되돌아보며 깜짝 놀랐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앞서 교양의 특징으로 ‘자기도야’, ‘인격형성’을 문제삼았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런 것들은 후쿠자와 유키치로 대표되는 메이지적 계몽주의에 더 어울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이쇼시기가 ‘교양의 시대’였다면, 메이지는 ‘수양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후자가 전자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교양에 있어 책이란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지만, 수양에는 그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몽사상에서 ‘수양’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어떤 ‘실천’의 전제로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하면 책을 떠난 ‘교양’이란 애당초 상상할 수도 없다 하겠습니다.
5. 근대문학과 교양주의 (‘소세키 문화’에 대하여)
메이지유신 이후 오랫동안 근대문학이 성립하지 못한 것은 아마 지긋이 책상에 앉아있을 수 없을 정도로 사회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구문물과의 ‘평화로운 전쟁’에서 시종 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평화로운 전쟁’이란 소세키의 표현인데, 이에 대해 조금 설명하기로 하지요. 일단 그는 전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물질적 충돌로서의 전쟁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평화로운 전쟁’입니다. 쉽게 말하면 후자는 당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물밀듯이 몰려오던 서양문화(음식, 예절, 학문 등등)와의 문화전쟁을 의미합니다.
한쪽에서는 서양 것이라면 모든 게 좋다는 풍조가 형성되기도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에 대한 반발로서 자국문화가 좋다는 국수주의가 생겨나기도 하는 둥 혼란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세키는 이런 문화전쟁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일단 그는 국수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합니다. 왜냐하면 근대화(서구화)는 오늘날 시대의 추세이기 때문에 이를 거스른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태를 판단하는 데에 있어 서양의 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덧붙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자기 것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위대한 문학작품이 나올리는 만무하다고 말합니다. 결국 흉내 내기에 그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같은 맥락에서 에도시대의 한문학도 지금의 문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부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은 서양을 물론이고 중국과 비교해서도 그들을 뛰어넘은 것은 고사하고 비슷한 수준의 작품도 만들어내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 모두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것을 하면 되지 않는가 하고 묻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만, 예나 지금이나 문화적 영향(시대적 추세)을 거스르는 것은 결코 현명한 태도가 아닙니다. 소세키가 국수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고요. 그렇다면 일본문학은 영원히 중국과 서구의 모방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소세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 러일전쟁이 마무리되어 가던 때에 문제적인 글 「전후 문학계의 추세」를 발표합니다.
이 글을 우리식으로 요약하면, 모방에 그쳤던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중국과 서양(러시아)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동안 있어왔던 중국/서구에 대한 추종이나 저항(복고)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세키는 국가 간의 싸움에서 이겼으니 문학 또한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설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이상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을 피력합니다. 그리고 실제 그의 전망대로 됩니다. 러일전쟁 와중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쓰기 시작한 소세키는 이후 걸작들을 쏟아내며, 일본의 국민작가이자 세계문학가의 반열에 오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러일전쟁이 일본근대문학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아는 일본근대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교양’으로서 성립했다는 것입니다. 실제 다이쇼교양주의를 주도한 인물들 중 상당수는 소세키의 문하생이었고, 소세키의 소설들은 교양인들의 필독서가 됩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아마 당시 일본의 문화인들에게 조선에 대해 물으면 그들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조선이야 있든 없든 상관없으나, 소세키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양주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도사카 준입니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제일 먼저 시마자키 도손 대신에 나쓰메 소세키가 국민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왜인가? 하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스스로 던진 물음에 답하길, 그것은 도손은 소설만 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소세키가 소설가 이외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즉 소세키는 ‘단순히’ 소설가에 그친 것이 아니라, 당대 최고교육기관(도쿄제대)의 영문학 교수를 거친 평론가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본에서 소세키는 뛰어난 소설가라기보다는 당대 최고수준의 문화인으로서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당시만 해도 소설가는 매우 의심스러운(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직업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선 간단한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할 때, 그것이 근대문학에 ‘과도하게 부여된 의미’가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그런 과도한 의미가 어떻게 부여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크게 말하자면, 그것은 근대국가형성에 나름대로 역할을 함으로써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교육을 통해 상상적 공동체를 구축하는데 일조함으로써일 것입니다.
그런데 교육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육기관을 통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론출판을 통한 것입니다. 이 둘은 외견상 명확히 구분되지만, 실은 서로 겹치는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예컨대 ‘아카데미즘’이란 실은 대학 내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저널리즘과의 관계 하에서만 명명되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 둘을 정반대의 것으로 봐서는 곤란합니다.
언뜻 보면, 언론출판은 대학과 대립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문예비평(저널)과 문학연구(학문)를 엄밀하게 구분하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잘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인적구성요소를 확인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오늘날 문예비평가가 거의 대부분이 대학에서 문학연구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언론출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학이 아카데미즘의 온상으로 간주된다면, 그 역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교양주의(문화주의)의 온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는 단순한 문학주의(소설나부랭이)만으로는 결코 국민작가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문학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낮았던 시기, 한 명의 국민작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문학가 (+ 알파)[여기서 알파는 꼭 비평가나 학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독재와 싸운 민주투사여도 상관없습니다]가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하겠습니다. 어쨌든 다시 도사카 준에게 돌아가면, 그런데 그가 소세키를 들어 정작 말하고 싶었던 것은 소세키가 어떻게 국민작가가 되었는가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러한 소세키를 중심으로 형성된 당대의 문화주의(교양주의), 즉 ‘소세키적 문화’였습니다.
오늘날 만연하는 ‘교양’이라는 이 문화의 수재다움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이다. 아쿠타가와적 교양도 이야기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물론 소세키적 교양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즉 오늘날 보통 교양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소세키적 교양이고 ‘소세키 문화’라는 의식에서 유래하는 교양이라는 관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교양은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문화로서, 문화의 비판자로서가 아니라 기성문화의 높은 수준에 오른 자로서 존중된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런 소세키적 ‧ 소세키 문화적 ‧ 교양은 의문시되거나 불신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도사카가 문제삼은 것은 소세키 자체라기보다는 ‘소세키 문화’라는 점입니다(물론, 그것이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습니다만). 쇼와기는 다이쇼교양주의가 출판산업의 형태로 활짝 꽃을 핀 시기입니다. 소위 엔본(円本) 붐이 일고 이에 자극을 받아 그 유명한 이와나미(岩波)문고가 창간되어 문학과 지식의 대중화가 이루어집니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도사카가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출판문화의 융성 속에서 등장한 고급문화(교양문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와나미 문화’입니다(참고로 이와나미서점의 창업자 자신이 일찍이 소세키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사카는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비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입니다. “소설가 이상의 존재로 간주되는 소세키를 우리는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는 단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소세키는 어떠한 존재일까요? 그것은 바로 ‘문화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쉽게 말해, 그는 “소세키는 사상가인가? 문화인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소세키를 둘러싸고 있는 교양주의(문화주의)가 가지는 의미를 추궁하고 있는 셈입니다.
소세키는 사상가가 아니라 오히려 문화인이다. 왜냐하면 사상의 자유라는 것은 새로운 문화를 창설하더라도, 반드시 기성문화의 척도 ‧ 표준을 부여하는 역할까지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상은 신문화를 낳는데, 신문화는 그것이 매우 새로우면 종래의 척도에 따르는 문화인에게 결코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상은 문화의 부정이라는 성질조차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세키의 경우, 그를 중요하게 여기고 큰 존재로 만든 원인은 새로운 사상의 탄생이나 구문화에 대한 반달리즘문화의 창생(蒼生)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 허용된 의미에서의 기성‘문화’의 고(高)수준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상가라기보다는 문화인이다. 그는 문화의 비판자가 아니라 문화의 왕좌(王座)이자, 혹은 문화의 모범이었다. 여기에 소세키의 위대함이 있다. 박학한 사람에서부터 무지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소세키에게 감동하고, 그를 닮아가고자 하는 점은 문화내용의 비판자로서의 그가 아니라, 문화의 형식적인 최고표준으로서의 그이다. 다소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천재로서의 그가 아니라, 수재로서의 그인 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은 소세키로서는 다소 억울하다고 여길 수 있는 부분인데, 하지만 어쨌든 ‘문화인(교양인)’으로서의 면모가 그를 국민작가로 만들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즉 도사카는 ‘국민작가’라는 것 허울 뒤에 숨겨진 교양장치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보수성을 문제삼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교양이란 어디까지나 기존문화의 향유와 관계하는 것으로서, 그로부터 한 단계 올라가 그것을 변혁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 ‘소세키문화’의 대표격인 이와나미서점에서 중요한 마르크스의 명저나 사회주의서적이 번역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사카가 보기에 그것은 해당 서적이 가진 변혁성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도리어 그저 뛰어난 ‘문화재’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덧붙입니다. 그리고 이는 내용에 상관없이 어느 정도 ‘문화적 위용’만 갖추면,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사상으로서 우열(愚劣)등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화재라고 평가되는 것은 기성문화를 그대로 표준화했을 때의 문화재인 것이어서, 무조건으로 기성 부르주아문화의 최고 정화이다. 학구적 실력도 있고 정신적 기품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사상적 비속(卑俗)감을 부여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와나미문화는 기성문화의 최고정화인 아카데미즘과 매우 사이가 좋다고 말합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이와나미문화라는 것 자체가 가진 ‘고급성’은 아카데미즘에 의해 보증되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본 교양문화의 정수로서의 이와나미문화(소세키문화)에 대한 비판은 여러모로 음미할 만한 합니다. 사실 한국의 고급문화(교양주의)라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도사카에게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공평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속해있던 사회주의운동 자체가 어떻게 보면 그와 같은 출판문화산업의 발달과 교양의식의 고양에 기반하여 전개된 것은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6. 교양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제 우리의 상황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교양이란 크게 두 가지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세계문학과 인문서 자체(즉 문학물이나 지식물)와 관련해서이고, 둘째는 그것을 통해 삶에 더해지는 ‘향기와 윤기’와 관련해서입니다. 세계문학을 읽는다는 것이 교양을 풍부하게 해주는 행위로서 인정을 받고, 인문서를 읽는 것이 뭔가 살아가는 데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 이것을 바로 교양주의라고 이름붙일 수 있겠는데, 그런 의미에서 최근 유행하는 ‘공부론’이란 사실 이런 교양주의가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공부론’의 주장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가능합니다. 첫째는 공부란 학생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하는 것이다. 둘째는 공부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때 당연하다는 듯이 제시되는 것이 바로 바로 문학서와 인문서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공부론은 사실상 ‘(인)문학’공부론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즉 이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똑같이 공부를 하더라도 자기개발서, 경제경영서를 읽는 행위는 공부가 아닙니다. 후자 역시 어떤 면에서 삶을 풍요롭게 해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인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그런 실용적인 독서만 하는 사람들은 보통 속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인문학공부를 하면 과연 우리의 삶이 바뀔까요? 삶이 풍요롭고 윤택해질까요? 아니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해, 과연 문학 또는 인문학적인 것이 힘겨운 지금의 삶에서 우리를 구원할까요? 차라리 자기개발서를 읽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낫지 않을까요? 물론 이는 그다지 교양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교양없이’ 이에 답하는 대신에 인문학 열풍과 관련하여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는 인문학 열풍이란 기본적으로 출판산업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인문학을 생산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4년제 대학에는 보통 인문대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르치는 학문을 보통 인문학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인문학이란 아카데미즘과 무관한 것입니다.
다소 이상하게 들리는 이 말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대학의 인문대에서는 분명 인문학에 속하는 것들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전공이라는 것이 있어 서로의 영역을 넘보지 않는 것이 철칙인지라 국문학,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 중문학, 사학, 철학을 가르치는 곳은 있지만 인문학을 가르치는 곳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단 외부의 지원이 필요할 때는 개별 전공을 말하면 상대적으로 대외적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인문학’,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지만, 실상 그것을 외치는 사람들은 인문학과 무관한 개별전공자들에 불과합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할까요? 그다지 우습지는 않지만…. 10여 년 전에 서울대학교에서는 <동서양 고전 필독 200선>이라는 것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발표한 곳이 한국교육의 최정점에 있는 기관인지라 이 목록은 지금까지도 입시교육에서부터 일반적인 독서교육과 출판기획, 그리고 인문학공부의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일단 그 목록을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한국문학(26권)
1.수이전/2.계원필경(최치원)/3.파한집(이인로)/4.역옹패설(이제현)/5.송강가사(정철)/6.열하일기(박지원)/7.다산시선(정약용)/8.구운몽(김만중)/9.홍길동전(허균)/10.남원고사(춘향전)/11.혈의누(이인직)/12.무정(이광수)/13.임꺽정전(홍명희)/14.삼대(염상섭)/15.천변풍경(박태원)/16.고향(이기영)/17.무영탑(현진건)/18.상록수(심훈)/19.탁류(채만식)/20.인간문제(강경애)/21.감자 外(김동인)/22.카인의 후예(황순원)/23.님의 침묵(한용운)/24.김소월 전집/25.정지용 전집/26.윤동주 전집
동양문학(19권)
27.시경/28.산해경/29.도연명시선/30.이백시선/31.두보시선/32.삼국지연의(나관중)/33.수호전(시내암)/34.서유기(오승은)/35.홍루몽(조설근)/36.유림외사(오경재)/37.노잔유기(유악)/38.아Q정전(노신)/39.자야(모순)/40.상자(노사)/41.가(家)(파금)/42.원씨물어(무라사키시키부)/43.도련님(니쓰메 소세키)/44.기탄잘리(타고르)/45.천일야화
서양문학(55권)
46.변신(오비디우스)/47.일리아드·오딧세이(호메로스)/48.오레스테스삼부작(아이스킬로스)/49.오이디푸스왕(소포클레스)/50.메데아(에우리피데스)/51.리시스트라타(아리스토파네스)/52.아에네이스(베르길리우스)/53.신곡(단테)/54.데카메론(복카치오)/55.햄릭,맥배드,리어왕,오셀로(셰익스피어)/56.걸리버 여행기(스위프트)/57.오만과 편견(오스틴)/58.막대한 유산(디킨스)/59.폭풍의 언덕(브론테)/60.테스(하디)/61.젊은 예술가의 초상(조이스)/62.사랑하는 여인들(로렌스)/63.주홍글씨(호오손)/64.여인의 초상(헨리 제임스)/65.허클베리핀의 모험(트웨인)/66.무기여 잘 있거라(헤밍웨이)/67.음향과 분노(포크너)/68.가르강튀아와 팡파크뤼엘(라블레)/69.수상록(몽테뉴)/70.타르튀프(몰리에르)/71.페드르(라신느)/72.고백록(루소)/73.캉디드 外 철학적 꽁트(볼테르)/74.잃어버린 환상(발자크)/75.적과 흑(스탕달)/76.보바리 부인(플로베르)/77.악의 꽃(보들레르)/78.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셸 프루스트)/79.구토(사르트르)/80페스트(카뮈)/81.파우스트(제1부)(괴테)/82.도적들(쉴러)/83.하인리히 폰 오프더딩엔(노발리스)/84.노래의 책(하이네)/85.녹색옷을 입은 하인리히(켈러)/86.마의 산(토마스만)/87.말테의 수기(릴케)/88.수레바퀴 아래서(헤세)/89.성(카프카)/90.세푼짜리 오페라(브레히트)/91.양철북(그라스)/92.돈키호테(세르반테스)/93.백년 동안의 고독(마르께즈)/94.인형의 집, 유령(입센)/95.미스 줄리, 아버지(스트런드 베리)/96.카라마조프 형제들(도스도예프스키)/97.안나카레리나(톨스토이)/98.아버지와 아들(투르게네프)/99어머니(고리키)/100.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단편집)(체호프)
동양철학(32권)
1.대승기신론소(원효)/2.원동성불론(지눌)/3.매월당집(김시습)/4.화담집(서경덕)/5.성학십도(이황)/6.서학집요(이이)/7.선가귀감(휴정)/8.성호사설(이익)/9.일득록(정조)/10.목민심서(정약용)/11.북학의(박제가)/12.의산문답(홍대용)/13.기학(최한기)/14.동경대전(최제우)/15.주역/16.논어(공자)/17.맹자(맹자)/18.대학/19.도덕경(노자)/20.장자(장자)/21.순자(순자)/22.한비자(한비자)/23.바가바드기타/24.중론(용수)/25.법구경/26.육조단경(혜능)/27.근사록(주회)/28.전습록(왕수인)/29.명이대방록(황종희)/30.대동서(강유위)/31.삼민주의(손문)/32.실천론(모택동)
서양철학(30권)
33.국가(플라톤)/34.정치학(아리스토텔레스)/35.의무론(키케로)/36.고백록(아우구스티누스)/37.군주론(마키아벨리)/38.유토피아(토마스모어)/39.신논리학(베이컨)/40.방법서설(데카르트)/41.리바이어던(홉스)/42.정부론(로크)/43.법의 정신(몽테스키외)/44.사회계약론(루소)/45.형이상학서설(칸트)/46.역사철학강의(헤겔)/47.실증철학강의(꽁트)/48.권리를 위한 투쟁(예링)/49.자유론(밀)/50.고대법(메인)/51.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이체)/52.창조적 신화(베르그송)/53.생의 비극적 감정(우나무노)/54.존재의 시간(하이데거)/55.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베버)/56.지각의 현상학(메를로-퐁티)/57.철학적 성찬(비트겐슈타인)/58.진리와 방법(가다머)/59.인식과 관심(하버마스)/60.정의론(롤즈)/61.성과 속(엘리아데)/62.책임의 원리(요나스)
역사(10권)
63.삼국유사(일연)/64.징비록(유성룡)/65.메천야록(황현)/66.한국통사(박은식)/67.조선상고사(신채호)/68.사기열전(사마천)/69.역사(헤로도투스)/70.게르마니아(타키투스)/71.신학문의 원리(비코)/72.중세사회(블로크)/
사회과학(14권)
73.택리지(이중환)/74.국부론(스미스)/75.미국의자본주의(토끄빌)/76.자본론(마르크스)/77.꿈의 해석(프로이트)/78.슬픈 열대(레비-스트로스)/79.옥중수고(그람사)/80.아동지능의 근원(피아제)/81.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슘페터)/82.예종에의 길(하예크)/83.심리학과 종교(융)/84.영국노동계급의 형성(톰슨)/85.자살론(뒤르껭)/86.물질문명과 자본주의(브로델)
자연과학(6권)
87.두 우주 구조에 대한 대화(갈릴레오)/88.프린키피아(뉴톤)/89.종의 기원(다윈)/90.생명이란 무엇인가(슈뢰딩거)/91.부분과 전체(하이젠베르크)/92.과학혁명의 구조(쿤)
기타(7권)
93.전쟁과 평화의 법(그로티우스)/94.범죄와 형벌(베카리아)/95.일반 언어학 강의(소쉬르)/96.시각예술에서의 의미(파노프스키)/97.지식의 고고학(푸코)/98.순수법학(켈젠)/99.인간현상(샤르뎅)/100. 권리를 위한 투쟁(예링)
문학서 100권과 인문서 100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필독서 목록>이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대학초년생 즉 교양과정에 있는 학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록을 들여다보면서 이 목록을 만드는데 협력한 교수들 중에 위 목록 중 최소 절반 이상이라도 읽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짐작컨대 아마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책은 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전공의 책은? 아니 한 전공 내에서도, 예를 들어 국문학 전공 내에서 고전문학 전공자가 현대문학을 전혀 읽지 않는 현실 속에서(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프랑스문학이나 러시아문학을 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물며 사회과학서적이나 자연과학서적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마치 위 200권 정도는 읽어야 교양인(또는 대학인)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인문학이라는 가면을 쓴 아카데미즘의 대표적 위선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그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운운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학에는 인문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예 지원금을 많이 줘서 그것의 분배를 둘러싸고 싸우다 스스로 자멸하도록 하는 편이 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너무 지나친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대학 내 인문대의 위상이란 현실적으로 매우 낮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자유주의니 뭐니 해서 최근에 생긴 현상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근대교육이 성립된 시기부터 존재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넓게 잡아 비실용적인 학문(물론, 문학가들이나 인문학자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다른 어느 학문보다 더 실용적/경제적이라고 주장하지만)을 가리켜 교양이라고 명명했을 때, 그것은 교육체계가 정비되기 시작한 때부터 사실 위태위태했습니다.
말하자면 교양이란 실은 이때(근대국가 성립기에: 인용자) 제도 바깥에 놓여, 실용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자격수여를 허가받지 못한 지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교양이란 제도화된 지식의 여백에 다름 아니었으며, 역설적으로 근대국가에 의해 탄생한 사생아였다. 그때 자연과학과 사회과락의 대부분은 실용성을 인정받고, 국가의 학교교육 안에서 제도화되었지만, 애매한 것은 인문학이었다. (…) 그런데 이런 제도화에 의해 정리되어 성립된 교양을 구하고, 교묘하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한 것도 요람기의 대중사회였다. 그 때문에 유일한 방법이란 바로 지식의 상품화인 시장화였다.
이 글을 쓴 야마자키 마사카즈에 따르면, 교양교육이 비실용적인 것으로 비난을 받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그리고 이에 우리가 덧붙이자면 일본이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영국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문학이란 국민국가를 뒷받침하는 근대교육이라는 ‘기계장치’와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로서 항상 그 존립이 위태로워,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지식의 상품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주장입니다. 어떻게? 그것은 바로 인문학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아우라, 즉 ‘고상한 지식’으로서의 교양을 통해서입니다. 즉 인문학의 비실용성이 시장에서는 도리어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술을 통해 시장에서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어떤 기본덕목이자, ‘조화로운 삶’을 꾸려 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까지 승격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단서를 달아야 합니다. 물론 교양교육이 다른 전문교육에 비해 덜 중요하게 취급되어온 것은 명백하지만, 그것이 가진 이데올로기효과를 국가가 무시해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국민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국가를 국가로서 인지하게 만든 것은 도리어 입신출세주의와는 무관한 어떤 ‘사심없음’(이를 테면, 민족주의나 애국심)을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근대국가의 사생아’라는 표현은 아무리 그 의도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지나친 표현으로서 정작 그 이면을 보지 못하게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소위 ‘대학 내 인문학의 위기’란 근대국가 형성기부터 존재해온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근대국가가 사실상 완성되어 일찍이 그것이 수행한 이데올로기교육의 효용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시기에 발생한 것이라고 봐야 정확할 것입니다.
즉 국가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대학진학률도 별 무리 없이 증가하던 시기, 다시 말해 인문대 전공자들이 졸업 후 일자리를 찾는데 큰 어려움이 없던 시기에는 ‘인문학의 위기’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학진학률이 한계에 도달하고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기는커녕 기존에 있던 일자리마저 사라지는 데에 다가, IMF 구제금융 때 2배나 늘어난 대학원 정원은 이후 말 그대로 고학력 인문대 백수들을 사회에 배출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소위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할 유일한 방법으로 (국가의 지원금 외에) 출판시장으로 진출이 제시되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최근 부는 인문학 붐과 세계문학전집 붐의 비경에는 이와 같은 요인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생계걱정이 없는 교수들이란 어떻게 보면 출판시장과는 다소 거리가 먼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힘들게 고전을 번역하거나 널리 읽히는 저서 한 권을 쓰는 것보다 ‘카운트되는’ 논문 한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는 역으로 생각하면 최근 인문서를 쓰거나 문학서나 인문서 번역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증가는 정확히 이전보다 사회경제적으로 힘든 환경에 처한 연구자들이 많아졌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다카다 리에코는 시니컬하게 ‘교양’의 반대말은 ‘업적’이라고 말합니다. 대학 내에서 교양교육이라는 것도 전부 시간강사들이 맡고 있는 터라, 사실상 교양을 둘러싼 모든 담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대학 바깥에 있는’ 강사 수준의 인재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 역시 업적(학술지 논문쓰기)을 쌓는 데에 관심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렇게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대학에 자리 잡기가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잘 아는 지금, 그들 중 일부는 아예 대학을 떠나 대중과 소통하는 데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업적’이 같은 전문가집단만이 알 수 있는 글쓰기와 관련이 있다면(그리고 없는 살림에 논문게재비까지 내야한다면), ‘교양’은 일반대중도 알 수 있는 글쓰기와 관련이 있다 하겠습니다(그리고 없는 살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런 배경 하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인문서’라고 생각합니다. 즉 인문서란 문학, 역사, 철학, 사회과학 분야의 서적을 통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해당 분야에 관한 책이되 전문서적이 아닌 책, 즉 업적과는 무관한 책, 일반인을 독자로 상정한 책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인문서는 학계의 글쓰기와 달리 엄밀한 학제구분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서적이 얄팍한 호기심만을 부추기는 대중서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인문서는 대중의 교양충동을 충족시켜주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발견하는 것으로서 저자와 독자 간의 ‘소통’이라는 의미에서 때로는 전문서적보다 더 쓰기 힘든 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을 위한 이런 책에 ‘인문서’라는 묘한 타이틀을 붙어 유통되는 곳은 잘은 모르지만 아마 한국과 일본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미디어학자인 하세가와 이치가 「교양, 노스탤지어의 지정학」이라는 글에서 전문가들이 읽는 전문서적도 일반인을 향한 대중계몽서도 아닌 ‘인문서’를 지극히 일본적인 산물로 간주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문서를 인문서답게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 답으로 ‘교양’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을 더 깊게 이해함으로써 삶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인격을 갖추는데 도움이 된다는 어떤 믿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출판시장에서 인문학 붐이란 식품업계나 레저업계의 웰빙 열풍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하겠습니다.
즉 인문서는 독자들을 결코 전문영역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의 입장에서도 그들이 인문서를 읽는 것은 ‘잘(윤택하게)’ 살기 위함이지 본격적으로 학문에 입문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앞서 우리는 교양의 반대말 중 하나로 ‘전문지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꼭 학문적인 의미로 제한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리어 의미로 확장하여 생계를 위한 노동에 필요한 지식(전문성)으로 생각하시는 편이 더 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노동을 위해 필요한 지식이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될 때는 자아(개성)가 최대한 축소될 때입니다. 이는 역으로 생각하면, 실용적인 지식이란 필연적으로 개성의 소모를 불러오고, 그로 인해 아무리 많은 물질적인 해택이 주어진다고 해도 ‘주체의 소외감’은 여전히 남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저 사는 것이 문제라면, 즉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아무도 교양 같은 것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사는 것이 문제가 되면, 어떻게든 이 소외감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때 문제로서 부상하게 된 것이 바로 교양(그리고 그것을 담고 있는 인문서)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교양은 어떻게 소외감으로부터 독자를 회복시킬까요? 그것은 바로 차이화를 통해서입니다. 전근대적 공동체 속의 노동과 달리 근대적 노동은 개개인을 획일화시킴과 동시에 개인들 간의 유대를 약화시켜온 게 사실입니다. 따라서 근대인은 이중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노동에서만 소외된 것이 아니라, 동료들로부터도 소외되었습니다.
그런데 인문서를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무차별 속 자기소외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고, 비슷한 책을 읽은 교양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써 유대감을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들 속에 존재하는 교양충동이란 설사 그것이 정보충동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더라도 거기서 중요한 것은 정보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한 차이라고 보는 편이 보다 정확하다 하겠습니다.
7. 인문학의 종언과 교양의 부흥
여기서 우리는 잠시 노버트 위너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의 수학자이자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로 유명한 그는 주저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1968)에서 기존의 철학이 대상과 관념의 대립 속에서 무언가를 생각해왔는데, 여기에 정보라는 개념의 도입하면 이들 사이의 대립은 무화되고 만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한 예로 개구리가 먹이인 벌레를 바라볼 때는 벌레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벌레의 움직임을 바라본다고 말하고, 이는 개구리가 움직이지 않는 벌레는 벌레로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덧붙입니다. 즉 차이가 존재하지 않으면 개구리에게 있어 벌레라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와 관련하여 그것은 비단 개구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간도 실은 대상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차이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의미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그런 차이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예술이나 문학의 발전은 보통 차별(차이)적 사회구조에 기초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차별이 소멸하면, 자연스럽게 예술/문학도 종언을 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문학이 종언을 고하는 것은 슬프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혹자는 이런 질문을 던질지 모릅니다. 많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차별이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지적입니다. 하지만 가라타니는 지금의 차별(차이)은 이전과 달리 상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지금의 빈곤층은 지난날의 빈곤층의 입장에서 볼 때 사치스러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현상황(차이의 소멸)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그들은 이중으로 빈곤하다고 부가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지금 ‘격차사회’라는 것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이것도 옛날과 같은 차이일 수 없습니다. 그저 상대적인 빈곤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날의 빈곤자들이 보면, 사치스러운 것입니다. 한편 옛날의 빈곤층 또는 피차별계층 안에는 일본의 빈곤문화가 있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풍요로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신빈곤자들은 이중으로 가난합니다. 그들은 문화를 생산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참고로 위 발언은 최근 일본출판시장에서 나타나는 ‘인문서의 위기’(즉 인문서가 팔리지 않는 것)에 대한 발언 중에 나온 것이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현재 일본에서 인문서가 팔리지 않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차별(차이)의 소멸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인문서가 팔리지 않는 현상을 비관하기 보다는 긍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난날 인문서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팔린 것은 경제발전과 대학진학률 증가에 따른 일종의 문화현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인문서가 많이 팔린다는 것이 인문학 발전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팔리는 인문서’란 시대동향에 지나치게 민감한(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대중영합적) 면이 많은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라타니는 사실상 ‘인문학의 종언’을 선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그는 문학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인문학에 대해서도 완전히 기대를 접은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흔히 오해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인문학뿐만 아니라 문학에 대해서도 어떤 기대감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의 기대감은 문학이나 인문학 자체라기보다는 ‘와야 할 개개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즉 앞으로 ‘가능한 문학(인문학)’은 외부의 원조(국가의 지원금)에 의해서가 아니라(그것은 기껏해야 문학/인문학의 좀비화만 가속화시킬 뿐이기 때문에), 아무리 여건이 나쁘더라도 문학(인문학)을 하겠다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제일 간단한 것은 국가의 조성금에 기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에서는 작가를 대학에서 가르치도록 함으로써 원조해왔습니다. 독일에서는 작가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이 대단하다, 부럽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 전통예능이라면 몰라도, 문학을 조성금으로 유지시켜서 과연 어떻게 될까요? 생활은 안 되더라도 나는 문학을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문학은 살아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냥 내버려 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최근 일본에서 엄청나게 증가한 오버닥터(일본식 영어로 대학원을 나오고 대학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를 문제 삼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가라타니는 이에 대해 어떤 처방을 내리고 있을까요? 먼저 그는 이들을 절대로 구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의 대학이 이런 지경에 이른 것 자체가 대내외 지원금(조성금) 때문이라고 성토합니다.
애당초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은 조성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단계에서는 아직 개개인의 문제다, 운이 나쁘다, 능력이 없다, 연줄이 없다는 차원에서 생각되고 있지만, 해결은 구조적으로 무리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어떻게든 학문을 계속하고 싶다면. (…)
지금의 대학시스템에서 학문은 불가능합니다. 근원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성과를 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문’계에게 이것은 치명적입니다. (…) 박사논문 등도 빨리 써서 패스하기 쉬운 것이 세분화된 테마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금방 낡은 게 됩니다. 게다가 애당초 그런 시시한 것을 하기 위해 애써 대학원까지 갈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으로 학문을 하고 싶다면, 자신들이 그 형태를 만들어내면 되지 않을까요? (…) 일단은 내버려 두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구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뭔가가 시작되는 역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일단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데요. 오버닥터의 문제는 사실 일본보다 우리의 경우가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가 일본과 다른 점은 문학/인문학에 대해 막대한(다른 분야와 비교하면 적다고 투덜댈지 모르지만요) 공적 자금이 투입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문학의 경우는 그런 지원을 ‘당연한 권리’로까지 여기지만, 일본에서는 아직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최근 들어 논의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지만요).
그리고 일본의 경우 최근 인문서가 잘 팔리지 않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가라타니가 말하는 인문서와 우리가 말하는 인문서가 조금 다르다는 점입니다. 즉 우리가 말하는 인문서는 어디까지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인문교양서만을 가리킵니다. 사실 우리도 인문학 원전들이 많이 팔린다고 보기 힘듭니다. 사회과학 시대와 비교하면, 거의 팔리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입니다.
가라타니는 차이(차별)가 소멸했기 때문에 인문서가 읽히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한 점은 바로 그 때문에 교양충동을 충족시켜주는 ‘인문서’가 팔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좀 더 설명해보지요. 이전의 문학이나 예술의 목표는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혁명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차별이 사실상 사라진 지금은 무엇이 가능할까요? 가공적인 형태로나마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그것은 당연 혁명과는 무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성질서의 위계화’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가라타니는 신빈곤층은 ‘이중으로’ 가난하여 문화를 만들어낼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했는데, 바로 이런 의미에서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은 그런 빈곤층으로부터 스스로를 차이화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사는 것’에서 ‘잘 사는 것’으로>라는 구호도 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교양으로!>. 앞서 우리는 매슈 아널드의 교양론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언급한 것처럼 그가 전적으로 옹호하는 ‘교양’이란 독일에서 넘어온 개념인데, 흥미로운 것은 그와 같은 독일적 ‘교양’ 개념을 사실상 집대성한 헤겔에게 있어 ‘그것(교양)’은 아널드의 경우와 달리 부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법철학에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교양(도야)은 한편으로는 오로지 외적 상태 즉 퇴폐의 일부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배경에는 전자의 경우 자연상태의 순박함이나 미개민족 풍습의 단순함이라는 이미지(표상)가 있고, 후자의 경우 다양한 욕구, 그것의 만족, 개개의 특수한 생활의 향수(享受)나 쾌적함 등을 절대적 목적으로 간주하는 감각이 있다. 이는 양쪽의 관점 모두 정신의 본성이나 이성의 목적에 무지하다는 증거이다.
헤겔에게 있어 교양이란 일차적으로 ‘직접적인 자기로부터의 이탈’, 또는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가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교양인이란 자신의 특수성을 방기하고 보편적인 원칙에 따르는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따라서 정신현상학에서 교양은 ‘자기소외된 정신’으로서 ‘인륜’이라는 ‘참다운 정신’과 ‘도덕성’이라는 ‘자기를 확신하는 정신’과의 중간적인 또는 과도적인 단계라는 위치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양은 헤겔식 발전도식의 2단계, 즉 대자․반성․본질․외화․분열에 해당하는 부정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그것이 다음단계로 넘어가지 못할 경우(바꿔 말해, 그 자체로 만족하게 될 경우)입니다.
즉 차이를 위해 교양이라는 형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경우, 즉 교양에 대한 페티시에 머물 경우, 그것은 ‘쇠약한 엘리트 취미’나 ‘기교적인 지적 박약’(로버트 솔로몬의 표현)에 그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양으로서의 세계문학전집 붐을 문제삼고 있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입니다.
8. 세계문학전집의 기원
세계문학전집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이야기가 많이 빗나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따라오신 분들은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세계문학전집과 전혀 무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 앞에 놓인 세계문학전집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까지의 논의로 이미 짐작하셨을 테지만, 지금의 세계문학전집 붐에 대한 저의 입장은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정적 입장은 특정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것이자 ‘세계문학전집 붐’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넘어서 ‘세계문학전집이라는 형식’ 자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은 먼저 지적해 두고 싶습니다.
우선 저는 현재 출간되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전체 출간계획이 공개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찾습니다. ‘전집’이란 일종의 폐쇄적 출판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무한정 권수를 늘릴 수 있는 느슨한 형태의 시리즈물과는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세계문학전집과 같은 종합전집은 새로운 자료가 발굴됨으로써 권수가 추가될 수 있는 개인전집과도 또 다릅니다. 즉 세계문학전집은 목록이 짜이는 순간 사실상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목록결정이야말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말이기 합니다.
전체를 몇 권으로 할지, 또 언어별/나라별로 몇 권씩을 배분할지, 그리고 특정 작가에 얼마만큼의 권수나 지면을 분배할지, 또 해당 작가의 작품 중에서 무엇을 넣을지 이리저리 고려해야 점이 매우 많습니다. 특정시기에 발행된 전집은 필연적으로 그 시기의 문학관이 직접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국가별, 작가별 중요도에 변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문학전집의 목록만 보고도 그 시대의 문학관을 역으로 유추하는 게 가능합니다. 즉 목록은 어떤 의미에서 그 시대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연 전체를 총 몇 권으로 기획하고 어떤 작가의 무슨 책을 낼 것이라는 목록(지도)조차 제시할 수 없는 ‘전집’은 말만 전집이지 애당초 전집이라는 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제가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에 대해 가진 가장 큰 불만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이상하게 후발주자들 역시 그 점만큼은 답습하더군요). 물론 자체적으로는 목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공개를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필요(시장사정)에 따라 빼거나 더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여기서 ‘필요에 따라’의 주체는 편집위원이라기보다는 출판사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전집’, 특히 세계문학전집의 완성도는 단순히 번역의 얼마나 좋냐, 얼마나 많이 팔렸느냐, 초역이 얼마나 들어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목록의 정당성(즉 전체적인 모양)에 의해 결정됩니다.
세계문학전집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있어 제가 목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 목록이 단순히 여러 외국문학을 모아놓은 데에 있기 때문이기보다는 (첫째) 우리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근대문학에 대한 절대평가를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둘째) 그런 의미에서 거시적인 시각에서 세계문학(근대문학)을 우리식으로 갈무리하여, 역으로 우리의 문학을 냉정하게 보는 눈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즉 세계문학전집의 편집 또는 목록작성이야말로 사실상 ‘고도의 비평행위’인 셈입니다. 자국문학에 대해 절대평가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 생활을 꾸려가는 한, 평가의 공정성이 생계의 절박함을 이길 리는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우리는 지금의 붐이 60-70년대 제1차 세계문학전집 붐의 반복이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정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이나 을유문화사판 세계문학전집을 보면서 혹시 이런 의문을 가지신 분은 없으신가요? “어떻게 이런 목록을 짤 수 있었을까? 편집위원들은 이런 작품들을 다 읽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정한 것일까?” 저의 판단으로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이유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편집위원 대부분이 일본어에 능통했으며, 그들의 독서편력 또한 전공으로 세밀하게 분화되는 아카데미적 교육과 무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전집들에서 발견되는 일본의 세계문학전집과 유사함은 비판되어야 할 사항이기 이전에 운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식 사유방식은 비단 일본어로 읽느냐 마느냐 일본어로 창작하느냐 마느냐에 의해 전달된다기보다는 일본식 문학관(즉 목록)에 의해 전달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음사/을유문화사판 세계문학전집을 읽고 자라난 세대들은 본의 아니게 일본 쪽 작가들과 똑같은 ‘문학적 세례’를 받았다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아니 이를 좀 더 밀고 나가면, 애당초 ‘세계문학전집’이라는 발상 자체가 특정시기 일본인들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근대문학의 발상지인 유럽에는 ‘세계문학전집’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정전목록이나 고전시리즈는 존재하더라도 말입니다).
세계문학전집이라는 장치가 쇼와 초년에 발명되고, 전집이 전국의 어지간한 가정에 비치되고, 그 집의 아이가 읽고, 그리고 다른 집 아이도 빌려 읽습니다. 도서관의 경우에는 몇 가지 세계문학전집을 구비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 세계문학전집이 없었다면, ‘제1차 전후파’도 ‘제3의 신인’도 오에 겐자부로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결정적인 힘을 끼친 것이 번역물 전집입니다.
저는 일본근대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두 가지 꼽습니다. 첫째는 러일전쟁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잠깐 다룬 것처럼 일본근대문학은 러일전쟁을 통해 사실상 본 궤도에 올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근대문학의 기원을 문제삼는다면 그 이전까지도 올라갈 수 있지만, 헤게모니의 이동(문학적 판단기준의 변화)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러일전쟁 이후를 일본의 근대문학이라고 봐야 합니다. 실제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나쓰메 소세키, 시마자키 도손, 구니키다 돗포, 다야마 가타이 등이 사실상 문학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갑니다.
그리고 이들과 이들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다이쇼교양주의가 꽃을 피웁니다. 즉 방금 언급한 메이지작가들 외에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같은 소위 다이쇼작가들이 많은 활약을 합니다. 그리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원조격인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의 옛절 순례(古寺巡礼)(1919)와 같은 책이 나와 큰 환영을 받습니다. 참고로 다이쇼교양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아쿠타가와와 자국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널리 일깨운 와쓰지 데쓰로는 모두 소세키의 문하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이쇼교양주의의 영향력은 생각만큼 크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소비하는 층(독자)이 여전히 소수의 학생들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독자층이 제한적이었던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책값이었습니다. 당시 책의 가격은 매우 고가여서 일반인들이 쉽게 사서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사회는 커다란 자연재해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관동대지진(1923)이었습니다. 저는 이 지진을 러일전쟁 다음으로 일본근대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으로 생각하는데, 이때 일본은 무려 14만 명의 사상자는 내게 됩니다. 참고로 이는 약 2년에 걸쳐서 행해진 러일전쟁의 사망자수(병사자 포함 약 12만 명)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진은 러일전쟁과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일본에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재건에 막대한 예산이 투여되어 일본경제는 순식간에 활기를 띠게 됩니다(물론, 이런 인위적 경기부양은 이후 커다란 후유증을 가져오지만요). 그런데 이런 굴곡은 출판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지진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어 휘청거리던 출판계는 당시 도산 직전의 개조사(改造社)가 모험적으로 시도한 현대일본문학전집이 대히트함으로써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앞서도 잠깐 언급한 엔본(円本)의 탄생이 바로 이것입니다.
방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메이지/다이쇼시대만 하더라도 책이라는 물건은 일반인들이 쉽게 구해볼 수 있을 만큼 저렴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문학시장이라는 것도 매우 협소했습니다. 초판은 수백 부를 찍는 게 보통이었고, 1,000부가 빨리면 떡을 돌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쇼와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일본의 문학가들은 신문에 글을 쓰지 않는 한 생계를 꾸려가기가 현실적으로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엔본의 등장으로 사태는 일변하게 됩니다. ‘엔본’이란 책의 가격을 권당 1엔으로 함으로써 생긴 명칭인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가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일종의 ‘박리다매 전략’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엔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의 논의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즉 엔본은 우선 출판시장을 엄청나게 확장시켰다는 데에서 큰 의미를 갖지만, 그런 성공이 ‘전집’의 형태였기에 가능했다는 것 역시 놓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즉 개조사의 <현대일본문학전집>은 단행본이 아니라 매달 한 권씩 배본되는 전권예약제(사실상 세트)로 판매되었는데, 이는 전례에 없었던 모험적인 판매방식이었습니다(사실 개조사는 거의 자본금이 없었기 때문에 예약금을 받아 그것을 제작비로 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약자가 23만이나 쇄도하는 대히트를 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에 자극을 받은 다른 출판사들도 앞을 다투어 엔본 전집을 내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소위 엔본 붐이었습니다. 이 시기 출간된 대표적인 전집을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오른쪽 수는 예약자 수입니다).
<현대일본문학전집> 전63권、改造社(1926.12 - 1931) 25만
세계문학전집 전57권、新潮社(1927.3 - 1930) 40만
<세계대사상전집> 전126권、春秋社(1927 - 1933) 10만
<메이지다이쇼문학전집> 전60권、春陽堂(1927.6 - 1932) 15만
<현대대중문학전집> 전40권、平凡社(1927.5 - 1932)
<마르크스 ‧ 엥겔스 전집> 전20권、改造社(1928 - 1930)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당연히 신조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인데, 왜냐하면 이 전집은 사실상 최초의 세계문학전집으로서 앞의 표현을 빌리자면 처음 ‘발명’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에 이의를 제기할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문학전집 이전에도 신조사는 이미 36권짜리 <세계문예전집>(1920-1926)을 내놓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올라가면, 다이쇼초기(1912-1916) 박문관에서 나온 12권짜리 <근대서양문예총서>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록된 작가나 작품, 그리고 선정목록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세계문학전집에 관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은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박문관판 전집의 경우, 가격은 1엔 30전으로 저렴하고 또 수록 작가 역시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 2/3 정도는 오늘날 우리가 세계문학전집에서 만나는 작가로 편성되어 있으나, 수록한 작품을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 죽음의 집의 기록, 톨스토이의 경우 결혼의 행복(원제: 크로이처 소나타) 등 대표작이라고 보기 힘든 작품이 선정되어 있으며, 또 전집이라고 하기에 12권으로는 지나치게 적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조사판 <세계문예전집>은 세계문학전집의 일종의 시험판 같은 것으로서 지금의 입장에서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선정이 한두 가지 눈에 띠지만(예컨대, 발자크에게 1권이 배정된 데 반해, 오늘날 소설가로서는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메레지코프스키에게는 2권이나 배정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오늘날과 비교해도 대체로 무난한 목록이어서(그러나 어디까지나 톨스토이, 졸라, 롤랑, 위고 등 19세기 소설이 대부분입니다), <근대서양문예총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지만, 엔본 붐에 의해 사실상 도중에 중단되어 세계문학전집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최초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가격은 무려 2엔 50전이나 했습니다.
그에 반해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은 1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무려 57권이라는 규모로 완간되었습니다. 이 전집 목록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전 전집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존 전집들이 거의 19세기 소설로만 구성되었던 데 반해, 이 전집은 그 이전 문학까지 넓게 포함하여 사실상 오늘날의 전집과 유사한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1권에서 10권까지의 목록만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1권) 단테의 신곡, 2권)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3권) 셰익스피어의 희곡집, 4권)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5권) 밀튼의 실락원, 6권) 불란서 고전극집, 7권) 스콧의 아이반호, 8권) 루소의 고백록, 9권) 괴테의 파우스트, 10권) 독일 고전극집.
이런 식으로 제1기 38권만 해서 2만 페이지, 120명이나 작가의 걸작을 싣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2기에는 콘라드, 토마스 만, 싱클레어 등 사실상 동시대 작가의 대표작이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전집은 국내에도 많이 유입되어 지금도 헌책방에서 종종 보이는 일어전집 중 하나이며, 그런 점에서 자연스럽게 정음사/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이 가장 많이 벤치마킹한 전집 중 하나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9. ‘세계문학전집’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세계문학전집은 언제 탄생한 것일까요? 그것은 뜻밖에도 일본보다 매우 늦은 60년대입니다(이 ‘늦음’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시기에 세계문학전집이 나왔고, 또 인기를 끌었을까요? 소위 1차 세계문학전집 붐이란 1959년에 정음사와 을유문화사에서 동시에 세계문학전집을 발간하면서 시작되어 1970년대 말까지 이어지는데,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정확히 박정희의 집권시기와 일치합니다. 즉 좋든 싫든 세계문학전집은 한국의 개발독재에 의해 이루어진 고도성장기(그리고 그에 따른 진학률의 증가)와 정확히 포개진다 하겠습니다.
주지하다시피 1961년 5.16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손에 넣은 박정희는 1979년까지 ‘박정희시대’를 이어갑니다. 이는 물론 수많은 반대에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3선 개헌(1969년)하여 장기집권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정치적 노림수만으로는 장기집권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비록 정치상으로는 독재라는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이전과 비교하여 경제나 생활환경이 크게 개선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와 같은 것(개발독재)이 가능했을까요? 이는 그가 집권하던 시기의 대외정책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1964년에 시작되어 약 8년간 총 34만 명에 이르게 되는 베트남파병으로, 이는 소위 ‘월남특수’를 만들어냈고, 다른 하나는 1965년에 조인된 한일협정으로서, 이에 의거해 1966년에서 1975년에 걸쳐 대일청구권자금으로 5억 달러가 도입되었습니다. 둘 다 떳떳한 돈이라 하기 힘들지만, 어찌 됐든 그는 개발독재에 필요한 돈을 어느 정도 확보했고, 이를 기반삼아 국가주도의 중공업화를 시도하는데, 어떤 학자는 박정희가 그와 같은 마인드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일찍이 관동군장교였다는 점에서 찾기도 합니다. 이는 ‘만주체제’를 전후 한국에 이식시켰다는 관점이라 하겠는데, ‘결정적’이라는 면에서 보면 다소 무리가 따르지만,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재고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계문학전집 붐이 경제적 고도성장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솔직히 말해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후적인 평가일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세계문학전집라는 ‘기획’ 자체에 무게중심을 두면, 우리는 도리어 경제적 발전 이전, 즉 4.19혁명과의 관계에 주목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4.19혁명이 가진 의의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위 4.19세대의 등장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실상 전후 한국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4.19세대는 문화계 및 출판계에도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는데, 그 바람은 그들이 일본어를 할 줄 모른다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일본어를 모른다’는 것, 이것이 가진 의미는 우리의 막연한 상상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리고 그것은 앞서 던진 물음(“왜 한국에서는 196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계문학전집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즉 세계문학전집이 일본에 비해 매우 늦게 등장한 것은 거의 모든 지식인(당연히 문학인을 포함하여)들이 일본어에 능통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애써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애당초 수요 자체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런 한국의 일본어 의존에 대해서는 가라타니 고진도 일찍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꽤 오래전이지만, 한국에서 일본어를 입학시험에서 제외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일본어에는 문화적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찍이 몰래 일본어문헌에 의존해왔습니다. 일본인이 쓴 것보다도 일본어로 번역된 외국문헌이 중요했습니다. 무언가를 할 때 일본어를 읽을 수 있다면, 대부분의 문헌이 입수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바로 한글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것을 숨겨왔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한국의 지인이 나에게 말해주었습니다만.
그런데 일본어를 모르는 4.19세대가 등장하여 한국어로 된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수요층이 된 것입니다. 사실 정음사/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은 바로 이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결코 모른 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1차 부흥기의 세계문학전집이 많은 긍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일본판 세계문학전집을 복제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히 목록상의 유사점에 그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우리로서는 말하기 껄끄러운 ‘중역’이라는 문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정음사/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이 전부 일본어중역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작품이 그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는 물론 당대의 현실적 조건에서 감안하면, 불가피한 면이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대학에 외국문학과가 충분히 있었던 것도 아니고, 원전에서 직접 번역할 수 있는 사람도 매우 적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두 전집이 끼친 영향은 이와 같은 문제점과 별개의 문제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4.19세대 외국문학 전공자 중 상당수는 이들 전집 없이는 외국문학을 전공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질 수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60-70년대 세계문학전집은 일본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한계점은 분명 있었지만, 어찌됐든 ‘세계문학’ 그리고 ‘세계문학전집’이라는 관념(형식)을 심는 데에는 훌륭히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것들이 이후 좀 더 발전적인 형태로 나온 70년대 신구문화사판 <현대세계문학전집>, 80년대 중앙일보사판 <오늘의 세계문학>, 벽호(지학사)판 <오늘의 세계문학>, 주우(학원사)판 <세계문학>이 나올 수 있는 훌륭한 토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4.19세대들은 나름대로 을유문화사, 정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이 가진 한계를 감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체적인 선정과 원전번역을 통해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연 극복되었을까요? 다시 말해, 일본어를 모르고(또는 무시하고) 서구어만 공부함으로써(또는 읽고 번역함으로써) 일본의 흔적을 지울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 저의 판단은 반반입니다.
먼저 그들은 정음사/을유문화사판에 들어가지 않았던 지역의 문학(3세계 문학)과 새로운 작가들(동시대 작가들)에 집중함으로써 차별을 꾀했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흔적을 말끔히 씻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전히 ‘세계문학전집’이란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좀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문학어 자체가 일본어의 영향 하에서 탄생했다는 점에서 좋든 싫든 달고 함께 갈 수밖에 없는 면 또한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탈’일본이나 ‘한국적’ 세계문학전집이라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든 80년대 문학전집이 정음사/을유문화사판만큼 성공하지 못한 이유도 실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의 눈에는 그런 전집들이 왠지 세계문학전집‘처럼’ 생각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와 같은 실패가 단순히 기존목록을 부정했기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4.19세대의 주도로 출간된 80년대 전집은 지금 봐도 전공자가 아니라면(그리고 독서의 즐거움 외 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읽기조차 부담스러운 전문적인(전공적인) 작품이 꽤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이 외국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글세대가 사회의 주도권을 잡은 후 생긴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세계문학의 전문화’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 독자도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작품들 위주로 수록하여 어느 정도 일반성을 갖추었던 있었던 세계문학전집을 소수의 전문가나 문학청년들에게나 환영받는 80년대식 세계문학전집으로 대체시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저는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60-70년대 세계문학전집에서는 ‘교양’과 ‘전문지식’ 사이의 간격이 그리 크지 않았다면, 80년대 전집의 경우는 그 간격이 크게 벌어졌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은 대략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후자의 전집에서 엿볼 수 있는 전공 간 장벽의 등장입니다. 이는 물론 한국식 아카데미의 독특함과 관련이 있으며, 정음사/을유문화사판 전집을 읽고 자라난 4.19세대에서는 그나마 그것이 적게 나타나지만(즉 세부보다 전체, 개성보다 조화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들의 제자 세대에 이르게 되면, 전공이 불문학이라면 독일문학을 모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문학의 ‘전문화’는 이후 문학평론계에서 외국문학전공자의 씨가 마르는 현상으로도 나타납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전집 붐을 정음사/을유문화사판 전집의 ‘반복’으로 보는 관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단순히 책이 많이 팔렸고 현재 팔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판매량의 비교에서보다는 목록상의 유사점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하지만 반복은 차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모두를 고려하여 최근의 세계문학전집이 가진 의미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억압된 일본형 세계문학전집의 귀환’으로서이고, 둘째는 (그런 의미에서) 4.19세대가 가졌던 ‘종합적 문화감각의 종언’으로서이며, 셋째는 (4.19세대에 의해 성립된) ‘문학적 전문화’의 고착으로서입니다.
반복이 일종의 형식이라면, 세계문학전집은 형식이고 교양충동은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반복이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면, 제2차 세계문학전집 붐에서 귀환하는 ‘억압된 것’은 방금 언급한 것처럼 ‘목록’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그것(반복)이 억압된 ‘모든 것’의 귀환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쩌면 반복을 통해 (가라타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중으로’ 억압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10. 우리는 벗어날 수 있는가? 세계문학전집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던져 보지요. 지금 독서계에서 환영받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에는 전체를 통괄할 수 있는 시점 같은 것이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요? 예컨대, 정음사/을유문화사판 세계문학전집의 경우 비록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적어도 편집위원들이 목록 전부를 장악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전집에 과연 그런 장악력이 존재할까요? 편집위원을 보면 보통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 러시아문학, 스페인문학, (중문학, 일문학) 1명씩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각자가 맡은 언어권이나 국가의 작품을 선별하는 방식인데, 이런 분업은 효율성이라는 면에서는 적극 권장할 만하지만, 정작 세계문학전집을 편집하는 데 있어서는 최악의 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껏해야 국내대학에 존재하는 외국문학 전공자끼리의 배분 또는 그들이 공부하는 국가들의 문학을 적당히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세계문학전집의 편집위원이란 특정 언어에 능통하고 해당국가의 문학을 조금 더 읽었다고(즉 전공했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닙니다. 목록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시야의 소유자, 다시 말해 전공의 장벽을 ‘대문자 문학’이라는 날개로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는데, 문제는 그런 사람이 매우 드물고 그마저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세계문학전집은 말만 전집이지 앞에서 든 것과 유사한 형식의, 즉 외국문학 전공자들이 모여서 만든 <추천도서> 목록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번 세계문학전집 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출판산업적 의미 정도일지 모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독자들이 세계문학을 통해 얻는 것은 일종의 교양이라 할 때, 1차 부흥기의 경우 그것은 만든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교양의 소유자였고, 또 당시 교양과 전문지식은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었습니다(물론 이는 고급교육기관이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데에도 원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교양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에 불과합니다.
최근 세계문학전집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분업의 자연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그보다 더 심각한 편집위원의 유명무실화가 존재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이번 전집 붐의 표본으로 삼고 있는 민음사판 전집의 경우, 분업적 문학지식을 넘어선 통합적 교양을 갖춘 사람이 두 분이나 참여하고 있으나(김우창, 유종호), 정작 목록을 보면 도저히 그들이 선정한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책들이 더러 눈에 들어옵니다.
삼국유사나 무진기행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까지 목록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는 더 심각한 것은 200권이 넘어선 이 전집의 전체적인 인상, 즉 중구난방이라는 인상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이 전집이 편집위원들에 의해 꾸려지고(통제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편집위원들은 얼굴마담을 하면서 그저 이름만 빌려주는 있는 셈입니다. 마치 기술자격증을 빌려주고 몇 푼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는 전체목록을 공개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겠지만)은 하나입니다. 지금의 세계문학전집은 한국문학이 가진 비평적 역량의 총집결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대학에 기반을 둔 문학적 분업체제와 편집부 중심의 상업주의에 의해 굴러가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90년대 중반부터 강화된 교양에 욕구, 즉 교양충동에 추동된 후, 인문서의 부흥과 인문교양강좌의 성황과 연동하면서 성공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1차 부흥기처럼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까요? 그저 소비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즉 부흥기보다는 침체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000년대 세계문학전집 붐은 역으로 그 이전 시기가 침체기였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서 지적한 것처럼 출간된 종수만 따지면 80년대 쪽이 도리어 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그것들은 독자들의 환영을 받는 데에 철저히 실패했는데, 그것은 도대체 왜일까요? 이와 관련해서 위에서 ‘문학의 전문화’를 문제 삼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원인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60-70년대에 유행하던 세계문학전집이 왜 갑자기 80년대에 힘을 잃게 되었을까요?”
저는 제1차 세계문학전집이 4.19혁명에서 시작되어 박정희체제 동안 붐을 유지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차 부흥기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과 함께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박정희정권의 몰락이 문화적 분위기를 바꿀 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1차 부흥기를 살펴볼 때 당시 새롭게 떠오른 세대에 주목한 것처럼, 이 경우도 그 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세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5.18세대(이런 표현은 4.19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색하지만)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제1차 부흥기가 4.19혁명으로 인해 시작되었다면, 5.18항쟁으로 인해 그것은 사실상 종언을 맞게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4.19혁명의 경우 결론적으로는 미완으로 끝났지만, 한 정권을 무너뜨린 경험은 4.19세대들에게 일종의 자신감을 심어주었다고 하면, 5.18항쟁은 5.18세대들에게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부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민들이 처참히 진압당하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일종의 자책감(죄의식)이었습니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제적 성장이 전두환, 노태우 정권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교양에 대한 거부(저항)’와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를 앞서의 논의와 연결시켜 이야기하면, 5.18세대들은 교양 대신에 수양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개인적 인격의 완성(자기수양)보다는 사회적 대의(정의의 추구)를 앞세운다는 점에서 미키 기요시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교양주의에서 계몽주의로>의 역전을, 도사카 준식으로 말하면 주류문화나 기성질서에 대한 비판적 거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의 대부분은 신분은 대학생이지만 사실상 대학생이기를 포기하는 형태로 대학시절을 보냅니다. 즉 지금의 대학생들처럼 출석과 시험에 연연하는 것은 치사한 짓으로 경멸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이 대학을 사실상 해방구로 만들고 대학을 떠나 공장에 위장취업을 한 것은, 어떻게든 졸업만 하면 취업이 되던 행복한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4.19만큼은 아니지만,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대학에 진학했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선택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대학진학률이 낮았던 시기의 그들은 나름대로 엘리트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5.18세대의 엘리트의식과 4.19세대의 엘리트의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즉 후자가 교양문화의 소비자로서 등장했다면, 전자는 도리어 교양문화를 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물론 역사의 진정한 주체로서 민중(또는 노동자)을 설정하고 그들과 비교해 혹 자신 안에 있을지 모르는 속물의식을 비판하는 것을 일종의 ‘사명’으로서 생각하는 ‘역’엘리트의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문화도 80년대를 풍미하고 90년대 초반까지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이 되면 사태가 일변하여 사실상 5.18세대의 저항문화는 소멸되게 됩니다. 그 과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식민지시절부터 엘리트학생들은 시위문화나 사회여론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국소적이었고 운동의 연속성을 뒷받침할 만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의 장례식을 계기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라는 전국적인 대학생조직이 만들어져 독특한 학생문화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는 1993년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으로 발전적으로 해소되나(출범식에 약 8만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1996년 연세대에서 일어난 폭력시위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이듬해 법원에서 이적단체로 규정됨으로써 사실상 와해의 수순을 밟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대학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학생운동의 부재(소멸)’는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한총련(전대협)이라는 학생조직에 존재했던 시대착오적인 친북성향이나 조직의 경직화, 그리고 시위의 폭력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 변화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은 대학진학률의 엄청난 증가와 더불어 생겨난 엘리트의식의 소멸입니다.
70년대에 25%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는 그래도 35%선을 유지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 급속히 상승한 후(김영삼정부 시절에만 무려 25%나 증가했습니다), 김대중정부 시절에 다시 20%가 증가하여 무려 80%가 대학에 진학하는 거의 오늘날과 같은 수준이 되었습니다(참고로 1990년대에 중후반에 형성된 20-30대 직장여성 중심의 독서풍토가 기본적으로 엘리트 독자의 소멸을 뜻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역으로 교양인구의 증가를 가리킨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시기에 갑자기 대학진학률이 증가한 것일까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종종 주범으로 지목되는 것은 사실상 지금의 교육체계를 만든 5.31 교육개혁(1995년)입니다. 이 교육개혁의 성과에 대해서는 아직 찬반양론이 있지만, 대학 설립이 인가제에서 준칙제로 바뀜으로 신설 대학이 대폭 늘고, 대학정원도 대학자율에 맡겨짐으로써 대학생 수가 급증했다는 점만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즉 약 10년간 사립대 수는 1.5배, 대학생은 2배가량 늘게 되었습니다.
앞서 우리는 대학생운동의 대표격인 한총련이 연세대 폭력시위(1996년)가 있었고, 그 다음해(1997년)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큰 타격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997년은 IMF 구제금융이 결정된 해(12월 3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 이전까지는 정치나 인권이야 어찌 됐든 순탄한 경제적 여건 덕분에 대학시절 대부분을 데모를 하는데 보내더라도 1, 2년 마음잡고 도서관 출입을 하면 별 어려움 없이 취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 이후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사회적 대의를 차치하고 자신의 앞가림하기도 힘들게 되자 대학은 사실상 취업훈련소로 바뀌었고, 출석 따위는 별 신경을 쓰지 않던(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패기는 무모함과 불성실의 증거로 간주되기에 이르렀습니다(대학에서 출석/학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공무원(경찰 포함)과 초중등교사가 인기직업으로 부각되게 됩니다. 당연 엘리트의식 따위는 고리타분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폐기되고, 소시민적 생존(또는 행복)만이 최고의 가치로 등장하게 됩니다. 길거리에서 돌을 던지거나 민족해방(NL)이니 민중민주(PD)니 하는 논쟁으로 밤을 세는 것보다 졸업 후 취업과 가족주의(가족을 지키는 것)가 최우선 가치가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이라는 공동체가 붕괴되는 것은 정말이지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우연일까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바로 그 즈음(1998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합니다. 사실 1998년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해입니다. 즉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여 햇볕정책을 발표한 후 금강산관광이 시작된 해이자, 스타크래프트가 출시된 해이며, 또 한국 최대 인터넷 서점인 YES24가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한 해이기도 합니다. 주지하다시피 김대중 정부의 등장은 민주세력(또는 스스로 좌파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활동을 급속히 위축시켰으며, 스타크래프트의 등장은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PC방이 생기게 만들어 거리를 떠난 대학생들과 취업준비생들로 하여금 날을 새게 만들었고, YES24로 대표되는 인터넷서점은 불과 몇 년도 안 되어 대학 앞 사회과학서점은 물론 대부분의 동네서점(약 3,000개)을 전멸시켰습니다.
그리고 이것들만큼 중요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1998년은 가라타니 고진이 편집하던 잡지비평공간이 한국을 특집으로 삼고 「한국의 비평공간」이라는 대담을 게재한 해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대담은 그 전해에 행해진 것이었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1997년은 문학사적으로 보았을 때, 가라타니 고진이 한국문학과 본격적으로 만난 해이기도 합니다. 가라타니는 그해 6월 한국을 방문하여 6월 24일 김우창과 「한일 비판적 지성의 만남」이라는 제목의 대담을 한 후, 6월 26일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미의 지배」라는 강연을 합니다. 그리고 11월 한국을 다시 방문하여 경주에서 열린 제4차 한일문학심포지엄에 참가한 후, 우카이 사토시(鵜飼哲)와 함께 창비사를 찾아가 백낙청, 최원식과 대담을 합니다(이 대담이 다음해 비평공간에 「한국의 비평공간」이라는 제목으로 실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가라타니가 그 해에 초기부터 꾸준히 참여해온 한일문학심포지엄을 사실상 끝난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입니다(물론, 이 심포지엄은 이후 가라타니가 불참한 상태로 두 번이나 더 열립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요? 이는 애초에 그가 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의외로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일찍이 가라타니가 한국에서 한 첫 발표 때(1993년의 제2차 한일문학심포지엄) 이미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를 제출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물론 그때의 종언이란 어디까지나 일본문학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그가 한국에 관심을 가진 것은 한국문학이 그 종언의 예외였기 때문은 아닐까요?
바꿔 말해, 그가 1997년에 집중적으로 한국문학과 교류한 후 사실상 그에 대한 관심을 접은 것은 한국문학도 거기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어떤 인식’을 얻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인식’을 해명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대신에 1997년을 기준 삼아 연도별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보면, 우리는 주목할 만한 특징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1997년 즈음을 기점으로 하여 국내작가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대신에 외국작가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변화가 비단 몇몇 유명작가(예를 들어 파울로 코엘류나 무라카미 하루키)로 국한되지 않았다는 데에 아마 문제의 심각성이 있을 것입니다. 즉 이때의 외국작가에는 소위 말하는 고전적인 작가도 포함됩니다(예를 들어, 코난 도일, 제인 오스틴, 조지 오웰, 샐린저 등). 그런 의미에서 세계문학전집 붐은 정확히 이런 흐름(한국문학의 위축과 외국문학의 성장) 속에 있다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저는 다른 글에서 2000년대의 일본문학 붐을 4.19혁명 이후의 일본문학 붐의 ‘반복’이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물론 일본문학 붐과 지금의 세계문학전집 붐을 동렬로 놓을 수는 없습니다. 외국작품의 영향력 확대라는 면에서 볼 때 두 붐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만, 전자의 붐은 그보다 더욱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세계문학전집 붐은 ‘한국문학의 영향력 상실’(가라타니 고진 식으로 말하면, ‘근대문학의 종언’)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근대문학이 네이션-스테이트와 밀접한 관련이 보았을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개별 국민(민족)문학은 그 나라의 국경이나 체제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기본적으로 자국의 작가는 외국작가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있다 하겠습니다(한국비평가가 ‘한국문학’비평가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아마 이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1997년 즈음해서 이제 그와 같은 메리트가 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단순히 IMF 구제금융 이후 이루어진 세계화의 결과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분야는 몰라도 문학 분야만큼은 오래 전부터 전면적으로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은 변화의 원인을 외부보다는 내부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점을 놓치면, 세계문학전집 붐을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혼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실은 후자가 가진 허구성을 전자가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부적 변화란 무엇일까요? 앞서 우리는 그것을 교양충동이라는 단어로 요약한 바 있습니다. 교양충동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작동합니다. 하나는 지식축적을 통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교양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입니다. 다시 말해, 핵심독자층이었던 엘리트독자의 소멸(또는 일반화)은 결국 지식을 자신과 타인을 구별시켜주는 ‘차이정보’로 욕망하게 만들었다면, 그와 더불어 생긴 청년문화(또는 대학생문화)의 붕괴는 20-30대 독자들에게 한없이 고독하게 만들어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상상적 공동체를 갈망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교양충동의 등장은 엘리트의식과 공동체의식의 소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세계문학전집 붐과 인문서나 인문학강좌 붐은 사실상 세계문학전집과 인문학의 해체(종언)를 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앞서 저는 1차 세계문학전집 붐이 일본어를 할지 모르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맥락은 다르지만 어떻게 보면 2차 세계문학전집 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2차 세계문학전집 붐은 변혁충동(언어)을 모르는 교양세대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최근 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문학’ 논의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첫째) 괴테가 말하는 ‘세계문학’과는 전혀 무관하고, 둘째) 한국문학의 영향력 상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같은 관료적 발상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라 하겠습니다. “교양의 시대에 과연 문학은 가능할까요?”, “교양(문화적 아이템 축적)과 팝문화에 기대지 않고서도 우리가 지금의 고독과 우울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즉 “우리는 과연 ‘고전 읽는 여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