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시조 작가 연구
김상용(金尙容 ; 1561~1637). 자(字)는 경택(景擇), 호(號)는 선원(仙源). 선조 때 등과하여 승지(承旨)를 지내고 광해군 때에는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 병자호란 때에는 봉림대군 등을 모시고 강화도에 피난했으나, 이듬해 강화가 함락되자 책임을 느끼고 남문에 올라가 자살하였다.
金壽長/1690~?) : 조선 후기의 가객․시조작가. 자 자평(子平). 호 노가재(老歌齋). 숙종 때 병조에서 서리(書吏)를 지냈다. 1746년(영조 22) 《해동가요(海東歌謠)》를 편찬하기 시작하여 55년 제1차 편찬사업을 완료하였고, 63년에는 제2차 편찬사업을 완료하였다. 70년에 이르기까지 개수(改修)를 계속하였는데, 이 속에 자작(自作) 시조 117수를 수록하였다. 가객으로서 김천택(金天澤)과 쌍벽을 이루었으며, 당시 전문적 시조 가창(歌唱) 단체인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을 이끌어온 중추적 인물의 하나였다. 만년에는 서울 화개동(花開洞)에 집을 지어 그 이름을 노가재라 하고 제자들을 모아 가르쳤다. 작품수가 남달리 많은 만큼 인생무상․충효․안빈낙도 등 유가적(儒家的)인 것과 남녀 애정․서민생활․사생활 등 다양한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여러 가집(歌集)에 많은 단평(短評)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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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天澤/?~?) : 조선 후기의 시조작가․가객. 자 백함(伯涵)․이숙(履叔). 호 남파(南波). 평민 출신으로 숙종 때 포교를 지냈다. 창에 뛰어났으며 시조도 잘 지어 《해동가요》에 57수를 남겼고, 1728년(영조 4)에는 시가집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 국문학사상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같은 평민 출신 노가재(老歌齋) 김수장(金壽長)과 함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에 동인(同人)을 결집, 시조에 신풍을 불어넣었다. 그 때까지 시조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학자․문인의 시조가 한정(閑情)을 즉흥적으로 노래한 도학적․관념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시조는 제재를 일상 생활 속에서 찾았고, 그 묘사가 사실적이었으며 해학이 풍부하였다. 후진양성과 시조의 정리․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吉再/1353~1419) : 고려 말․조선 초의 성리학자. 본관 해평(海平). 자 재부(再父). 호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 충절(忠節). 금주지사 (錦州知事) 원진(元璡)의 아들. 구미 출생. 1363년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70년 박분(朴賁)에게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74년 생원시(生員試)에, 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으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 있던 이색(李穡)을 만나기도 하였다. 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金尙容/1561~1637)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 경택(景擇). 호 선원(仙源)․풍계(楓溪). 시호 문충(文忠).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가 되고, 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등용되었으며, 상신(相臣) 정철(鄭徹), 판서 김찬(金瓚)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었다. 병조좌랑(兵曹佐郞)․응교(應敎) 등을 역임하고, 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호남지방을 왕래하였으며, 98년(선조 31)에 승지(承旨)가 되고, 그해 겨울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정주(定州)․상주(尙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광해군 때에 도승지에 올랐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를 거쳐 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있었다. 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노령으로 관직을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32년(인조 10) 우의정에 임명되자 거듭 사양하여 허락받았다. 36년 병자호란 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란하였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그 서체는 이왕체(二王體: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체)를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으며, 시조로 유고(遺稿)에 《오륜가(五倫歌)》(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9편) 등이 있고, 그 밖에도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에 여러 편이 실려 있다. 인천의 충렬사(忠烈祠),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상주(尙州)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안변(安邊)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정주(定州)의 봉명서원(鳳鳴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선원유고(仙源遺稿)》, 저서에 《독례수초(讀禮隨抄)》, 작품으로 글씨에 《숭인전비(崇仁殿碑)의 전액(篆額)》(平壤) 《군수 장인정비(郡守張麟禎碑)의 전액(篆額)》(豊德) 등이 있다.
金尙憲(1570~1652)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 숙도(叔度). 호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어려서 윤근수(尹根壽) 등에게 수학하였고 《소학(小學)》 공부에 힘썼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96년 문과에 급제하여 통례원 인의(引儀)가 되고 이어 예조좌랑․시강원사서(司書)․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제주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진상 조사와 수령들의 근무상황을 점검하라는 임무를 띠고 어사로 파견되었다. 선조 말년에는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모함할 때 같이 연루되어 고산찰방(高山察訪)․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의 외직으로 전보되었다. 광해군 대에도 북인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그다지 뚜렷한 관직을 역임하지는 못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 등이 상소를 올려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을 격렬히 비난하자, 승지로 있으면서 정인홍을 비난하였다. 폐모론(廢母論)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데다 광해군 말년에는 연이어 부모 상을 맞아 물러나 있어야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에 나가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로 임명되었다. 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난 직후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붕당을 타파하고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반정 이후에도 강직한 성격으로 누차 시사를 비판하다가,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하기도 하였다. 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姜弘立)의 관작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李貴)와 의견 충돌을 빚어 다시 낙향하였다. 33년부터 2년 동안은 5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한 언론활동을 벌이다가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였다. 예조판서로 있던 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도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다. 38년 장령 유석(柳碩) 등으로부터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면서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라는 내용의 탄핵을 받았다. 곧 조정에 다시 들어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에 분연히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여 동안을 청에 묶여 있었다. 당시에도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나아가 은거하였다. 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大賢)으로 추대받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수차례 은퇴의 뜻을 밝히면서 효종에게 인재를 기르고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죽은 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61년(현종 2)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야인담록(野人談錄)》 《독례수초(讀禮隨)》 《남사록(南錄)》 등이 있고, 후인들에 의해 문집 《청음집》이 간행되었다.
南怡(1441~1468) :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 의령(宜寧). 시호 충무(忠武). 태종의 외손(外孫). 1457년(세조 3) 약관의 나이로 무과(武科)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가 북관(北關)에서 난을 일으키자 우대장(右大將)으로 이를 토벌,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고 28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68년 예종이 즉위한 후 대궐에서 숙직하던 중 혜성(彗星)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하자, 그에게 항상 질투를 느껴오던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역모를 획책한다고 모함하였다. 또한 남이가 여진토벌(女眞討伐) 때 읊은 시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속의 미평국(未平國)이란 글귀를 미득국(未得國)이라 하였다고 조작한 사실은 유명하다. 즉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왜곡하여, 반역의 뜻이 있다고 모함받아 영의정 강순(康純)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1818년(순조 18) 관작(官爵)이 복구되었다.
李塏/1417~1456) : 조선 전기의 문신.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본관 한산(韓山). 자 청보(淸甫)․백고(伯高). 호 백옥헌(白玉軒). 시호 의열(義烈), 뒤에 충간(忠簡)으로 개시(改諡). 1436년(세종 18) 문과에 급제, 41년 저작랑(著作郞)으로 《명황계감(明皇戒鑑)》의 편찬에 참여하고,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참여했다. 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하고, 56년(세조 2) 직제학(直提學)이 되고, 이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시문(詩文)과 글씨에 능했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대구의 낙빈서원(洛濱書院), 과천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충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의성의 충렬사(忠烈祠) 등에 배향되었다.
李穡(1328~1396) : 고려 말의 문신․학자. 본관 한산(韓山). 자 영숙(潁叔).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고, 48년(충목왕 4) 원(元)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51년(충정왕 3)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 52년(공민왕 1) 전제(田制)개혁․국방강화․교육진흥․불교억제 등 당면정책을 왕에게 건의했다. 53년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지내다가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의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56년 귀국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 등 인사행정을 주관, 정방(政房)을 폐지하였고,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때는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 l등공신이 된 후 좌승선(左承宣)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75년(우왕 l) 우왕의 청으로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했다. 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88년 철령위(鐵嶺衛) 사건에는 화평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長湍)․함창(咸昌) 등지에 유배되었다. 91년(공양왕 3)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다시 여흥(驪興)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죽었다. 문하에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李珥(1536~1584) :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릉 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李廷煥(1604~1671) :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전주(全州). 자 휘원(輝遠). 호 송암(松庵). 1633년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으나, 병자호란 후 벼슬을 단념하고 두문불출하며 시작(詩作)을 하였다. 효행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병자호란을 통분하여 지은 《비가(悲歌)》 10수가 한역시와 함께 유고(遺稿)에 전한다. 저서에 《송암유고》가 있다.
李兆年(1269~1343) :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성주(星州). 자 원로(元老). 호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시호 문열(文烈). 1294년(충렬왕 20) 진사로 문과에 급제, 안남서기(安南書記)가 되고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비서랑(書郞)을 역임하였다. 1306년 비서승(書丞) 때 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충렬왕의 후계로 삼으려 하자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충렬왕을 보필하였으나 이에 연루되어 귀양갔다. 그 후 풀려나와 13년간 고향에서 은거했고, 심양왕(瀋陽王) 고(暠)의 왕위찬탈 음모를 원나라에 상소하였다. 30년 충숙왕 귀국 후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郞)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 수차 원나라에 다녀왔다. 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왕의 음탕함을 간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이듬해 사직, 후에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이 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l수가 전한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 충혜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李稷(1362~1431)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 성주(星州). 자 우정(虞庭). 호 형재(亨齋). 시호 문경(文景). 1377년(우왕 3) 16세로 문과에 급제, 경순부주부(慶順府注簿)에 보직되고 86년 밀직사우부대언(密直司右副代言)을 거쳐 공양왕 때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지냈다. 92년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헌,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지고 93년(태조 2) 도승지․중추원학사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97년 대사헌, 99년(정종 1) 중추원사 겸 서북면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로 왜구의 침입을 막고,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올랐고 삼사좌사(三司左使)․의정부지사(議政府知事)를 지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에 방원(芳遠:太宗)을 도와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이 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대제학을 거쳐 1403년 사평부판사(司平府判事)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1405년 이조판서, 1407년 동북면도순문찰리사․영흥부윤(永興府尹)이 되었다. 12년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진봉되고 14년 우의정에 올라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년 황희(黃喜)와 충녕대군(忠寧大君:世宗)의 세자책봉을 반대하여 성주에 안치되고, 22년(세종 4) 풀려나와 24년 영의정, 26년 좌의정에 전직, 이듬해 사직하였다. 성주의 안봉서원(安峰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 《형재시집(亨齋詩集)》이 있다.
李恒福/1556~1618)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 경주(慶州). 자 자상(子常). 호 백사(白沙)․필운(弼雲)․청화진인(淸化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 고려 말의 명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李德馨)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지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81년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저작(著作)․박사․정언(正言)․수찬(修撰)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랐다. 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로 갔으며,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95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98년 좌의정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9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7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임진왜란시에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상신(宣祖朝相臣)>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李賢輔(1467~1555)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영천(永川). 자 비중(仲). 호 농암(聾巖)․설빈옹(雪翁). 시호 효절(孝節).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의 벼슬과 검열(檢閱)을 거쳐 1504년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서연관(書筵官)의 비행을 공박하여 안동으로 귀양갔다. 1506년 중종반정 후 지평(持平)에 복직, 밀양․안동의 부사, 충주목사를 지냈다. 23년(중종 18) 성주목사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고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42년 호조참판, 이듬해 상호군이 되고 자헌대부에 올랐다. 54년 중추부지사가 되었다. 10장으로 전해지던 어부사(漁父詞)를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하며, 예안(禮安)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농암집》이 있다.
李滉(1501~1570) :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 진보(眞寶).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예안(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李%)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 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28년 진사가 되고 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박사(博士)․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39년 수찬(修撰)․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52년 대사성에 재임, 54년 형조․병조의 참의에 이어 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68년(선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기(氣) 이원(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修正天命圖說․聖學十圖․自省錄․朱書記疑․心經釋疑․宋季之明理學通錄․古鏡重磨方․朱子書節要․理學通錄․啓蒙傳疑․經書釋義․喪禮問答․戊辰封事․退溪書節要․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
孟思誠(1360~1438) : (세종 20) 고려 말 조선 초의 재상. 본관 신창(新昌). 자 자명(自明). 호 고불(古佛)․동포(東浦). 시호 문정(文貞). 온양(溫陽) 출생.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 검열(檢閱)을 거쳐 전의승(典儀丞)․기거사인(起居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원판관(水原判官)․내사사인(內史舍人)․예조정랑(禮曹正郞)․시어사(侍御史)․간의(諫議)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06년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거쳐 이듬해 진전사(進箋使) 시종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이 되었다. 08년 대사헌에 오르자 왕의 허락도 없이 부마 조대림(趙大臨)을 국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한주(韓州)로 유배되었으나, 영상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풀려나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거쳐 16년 판서(判書)로 승진, 호조(戶曹)․공조(工曹)를 거쳐 19년(세종 1)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25년 좌군도총제부판사(左軍都摠制府判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27년 우의정에 올랐다. 29년 궤장(杖)을 하사받고, 이듬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 31년 좌의정이 되고 다시 춘추관영사(春秋館領事)를 겸임,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진(撰進)하고 35년 노령으로 사임하였다. 황회(黃喜)와 함께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고, 성품이 청백검소하여 남루한 행색으로 수령(守令)의 야유를 받았는데, 도망하던 수령이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려 후에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또 청백리로 기록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작품에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있다.
朴仁老(1561~1642)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안동(安東). 시인(詩人). 자 덕옹(德翁). 호 노계(蘆溪)․무하옹(無何翁). 영천(永川) 출생. 승의부위(承議副尉) 석(碩)의 아들. 어려서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났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막하에서 별시위(別侍衛)가 되어 무공을 세우고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성윤문(成允文)의 발탁으로 종군, 98년 왜군(倭軍)이 퇴각하자 사졸(士卒)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가사(歌辭) 《태평사(太平詞)》를 지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선전관을 지내고 이어 조라포수군만호(助羅浦水軍萬戶)로 군비(軍備)를 증강하는 한편 선정(善政)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퇴관 후 고향에 은거하며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념하여 많은 걸작을 남기고, 1630년(인조 8) 노령으로 용양위 부호군(龍A衛副護軍)이 되었다. 도학(道學)과 애국심․자연애(自然愛)를 바탕으로 천재적 창작력을 발휘, 시정(詩情)과 우국(憂國)에 넘치는 작품을 썼으며 장가(長歌)로는 정철(鄭澈)을 계승하여 독특한 시풍(詩風)을 이룩하고 가사문학(歌辭文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영천의 도계향사(道溪鄕祠)에 제향되었다. 문집(文集)에 《노계집(蘆溪集)》, 작품에 《태평사(太平詞)》 《사제곡(莎堤曲)》 《누항사(陋巷詞)》 등이 있다.
朴彭年(1417~1456) : 조선 전기의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 본관 순천. 자 인수(仁). 호 취금헌(醉琴軒). 시호 충정(忠正). 형조판서 중림(中林)의 아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집현전(集賢殿) 학사로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3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54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臣)이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삼문․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김질(金?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체포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도 끝내 거절하고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으며 아버지, 동생 대년(大年), 아들 3형제도 사형당하였다. 그 뒤 과천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洪州)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고, 숙종 때 복권되고 영조때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글씨에 《취금헌천자문(醉琴軒千字文)》이 있다.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朴孝寬(?~?) : 조선 후기의 가객. 자 경화(景華), 호 운애(雲崖). 1876년(고종 13) 제자 안민영(安玟英)과 함께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 그 때까지의 가곡을 총정리하고, 또한 가인(歌人)의 귀감이 될 가론(歌論)을 확립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총애를 받아 그로부터 운애라는 호를 지어 받고, 풍류 남녀들과 더불어 승평계(昇平契)를 만들었다. 시조 13수가 전하며, 문학과 음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의 가곡창은 하준권(河俊權)․하규일(河圭一)을 거쳐 오늘에 전해진다.
卞季良/1369~1430) : 고려 말․조선 초 문신. 본관 밀양. 자 거경(巨卿). 호 춘정(春亭). 시호 문숙(文肅).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의 문인. 1382년(우왕 8) 진사, 이듬해 생원이 되었다. 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典校)․주부(主簿)․진덕박사(進德博士)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 초 천우위우령(千牛衛右領) 중랑장 겸 전의감승(典醫監丞) 의학 교수관(敎授官)이 되었다. 사헌부시사(侍史)․성균관학정(學正)․직예문관(直藝文館)․사재소감(司宰少監) 등을 거쳐, 예문관의 응교(應敎)․직제학 등을 지냈다. 1407년(태종 7)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 예조우참의(右參議), 1409년 예문관제학(提學), 1417년 대제학․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참찬을 역임하고, 26년(세종 8) 판우군(判右軍) 도총제부사(都摠制府事)에 이르렀다. 10여 년간 대제학을 지내는 동안, 외교문서를 거의 도맡아 지어 명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태조실록》 편찬, 《고려사》 개수(改修)에 참여하였고,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문묘․기자묘 비문과 낙천정기(樂天亭記)․헌릉지문(獻陵誌文) 등을 찬(撰)하였다.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하며, 문집에 《춘정집》이 있다. 거창(居昌) 병암서원(屛巖書院)에 배향되었다.
成三問(1418~1456) :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 창녕(昌寧). 자 근보(謹甫)․눌옹(訥翁). 호 매죽헌(梅竹軒). 시호 충문(忠文). 사육신의 한 사람. 1438년(세종 20)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집현전 학사․수찬 등을 역임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42년 박팽년(朴彭年)․신숙주․하위지․이석정(李石亭) 등과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한글의 창제를 위해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신숙주․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 등과 함께 랴오둥[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 음운 연구를 겸하여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46년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케 했다. 55년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예방승지(禮房承旨)로서 아버지 승(勝)․박팽년 등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협의했으나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金?이 성사가 안 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밀고, 이개․하위지․유응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車裂)의 극형을 받았다. 이어 아버지 승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극형에 처해졌고,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 세 동생과, 맹첨(孟詹)․맹년(孟年)․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1676년(숙종 2)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 녹운서원(綠雲書院), 81년 육신묘(六臣墓)가 있는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외에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 의성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의 물계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6신과 함께 제향,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집에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
成渾(1535~1598)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 창녕(昌寧). 자 호원(浩源). 호 우계(牛溪)․묵암(黙庵). 시호 문간(文簡). 좌의정이 추증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 어머니는 파평(坡平) 윤씨. 서울 순화방(順和坊)에서 태어났으며, 1539년 파산(坡山) 우계로 이사하면서 경기도 파주에서 자랐다. 17세에 신여량(申汝樑)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해 진사․생원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백인걸(白人傑)에게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李珥)와 도의지교를 맺었다. 선조 초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동서분당기에는 이이․정철(鄭澈) 등 서인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였다. 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등용되었으며, 이때 북인 최영경(崔永慶)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92년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이 되었으며, 94년 좌참찬으로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이이는 그의 학문을 평가하여 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외손인 윤선거(尹宣擧)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하였으며, 문인으로는 조헌(趙憲)․황신(黃愼)․이귀(李貴)․정엽(鄭曄)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외손인 윤선거, 윤증(尹拯)에게 계승되면서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602년 전일에 기축옥사에 관련된 연유로 삭직되었으나, 23년 인조반정 이후 복관되었다. 좌의정에 추증, 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 《우계집》과 저서에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
松桂烟月翁/?~?) : 조선시대의 가인(歌人). 《고금가곡(古今歌曲)》의 편찬자로 본명 미상. 《고금가곡》의 권말에 갑신춘 송계연월옹(甲申春松桂烟月翁)이란 편찬기와 아울러 이 책에 수록된 노래 속에 숙종(肅宗) 때 가인인 김유기(金裕器)의 작품이 실린 것으로 미루어 1704년(숙종 30) 이후의 인물로 추측될 뿐이다. 《고금가곡》에 자작 시조(時調) 14수가 수록되어 있다.
宋純(1493~1583)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신평(新平). 자 수초(遂初). 호 면앙정(仰亭)․기촌(企村). 시호 숙정(肅定).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급제, 47년(명종 2)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지냈다. 50년 이조참판 때 죄인의 자제를 기용했다는 이기(李) 일파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 구파의 사림(士林)으로 이황(李滉) 등 신진사류(士類)와 대립하였다. 69년(선조 2)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가 치사(致仕)했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로 시조에 뛰어났다. 담양(潭陽)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집에 《기촌집》 《면앙집》이 있고 작품에 《면앙정가(仰亭歌)》가 있다.
安玟英(1816~?) : 조선 후기의 가객. 자 성무(聖武). 호 주옹(周翁). 서얼(庶) 출신. 1876년(고종 13) 스승 박효관(朴孝寬)과 함께 조선 역대시가집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 간행하여 근세 시조문학을 총결산하는 데 공헌하였다. 즉흥적인 서경(敍景)을 잘 읊었는데, 《가곡원류》에 그의 시조 《영매가(곖唆?》 외 26수가 실려 있다. 그 밖의 저서로 《금옥총부(金玉叢部)》 《주옹만필(周翁漫筆)》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