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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정월보름날(上元) /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ysoo 추천 0 조회 81 13.02.23 09: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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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에서 정월보름(上元) 부분만 발췌하엿습니다.

()부분 한자에 훈음을 넣었습니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조선 순조 때 김매순(金邁淳:1776 1840)이 한양(漢陽)의 연중행사와 민속을 기록한 것으로 그의 문집《대산집(臺山集)》에 수록되어 있다. 열양은 한양(서울)을 가리키며 절기별로 세시풍속을 기록했다.

열양은 당시의 한양을 가리킨다. 한양의 세시풍속 약 80항이 월별로 구분되어 있어 한국 중부 지방의 풍속을 잘 나타내고 있다.

 

 

보름날(上元)

 

찹쌀을 대강 쪄서 만든 밥에 기름과 꿀과 진장을 넣어 비비고 씨 뺀 대추 살과 깐 밤을 잘게 썰어 쌀 양에 맞게 고루 넣고 다시 은은한 불에 쪄서 제사상에 올리고 손님에게 대접하며 동네 이웃이 서로 나눈다. 이것을 약밥[藥飯]이라고 한다.
【우리 관습에 꿀을 약으로 쓰므로 꿀밥을 약밥이라고 하고 꿀과자를 약과라고 한다.】

 

세속에 전하기를 신라 소지왕이 까마귀 말을 듣고 금갑(琴匣)을 쏘아 화를 면한 이적이 있어 감사의 뜻으로 까마귀밥으로 만든 것이 약밥이고 이것이 우리 고유의 풍속이 되었다고 한다. 역관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우리 사신들이 연경에 가서 보름을 쇠게 되면 반드시 요리사에게 이 음식을 만들게 하는데, 연경 귀인(貴人)들
이 이것을 맛보면 반색을 하며 다른 음식을 다 마다할 정도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지만 그 방법을 전하여도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까마귀 설은 매우 황당한 이야기지만 중국에는 이것이 없으므로 우리 고유의 풍속이라는 설은 무고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근자에 본 책 중에 당나라 위거원(韋巨源)이 쓴 식보(食譜)145)라는 책에 ‘유화명주(油畵明珠)’라는 글이 있어 그 주석을 보니 “보름 때 먹는 유반(油飯)은 약밥 재료 모두를 간략히 말한 것이니 앞으로는 유반이라고 해야 한다.

그렸다고 한 것은 붉은 옻칠이 섞인 것처럼 보이고 명주같다고 한 것은 매끈하고 고운 빛깔이 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것은 곧 약밥을 뜻하므로 중국의 문물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며 신라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은 호사가들이 멋대로 이 고사에다 억지로 붙인 것이다. 그러면 중국에는 옛날에 있었는데 지금은 왜 없는가.
그것은 마치 주나라와 노나라 예제는 없어졌지만 담(?)나라에 그것이 관기(官紀)로 남았고 하(河)와 낙(洛)의 음악과 학문은 사라졌지만 민(?)에서 유학이 일어난 것과 같다. 문물이 본시 이런 것인데 어찌 약밥뿐이겠는가.

 

이날 날이 밝아올 때 술을 한잔 마시는데, 이것을 귀밝이술[明耳酒명이주]이라 하고 밤세 톨 깨무는 것을 부스럼 깬다[咬瘡果]고 한다.

또 이른 새벽에 정화수 한 그릇 길어오는 것을 용알뜨기[撈龍子노용자]라고 한다. 정결한 종이에 흰밥을 싸서 강물에 던지는 것을 어부심[魚鳧施]이라고 한다.

부녀자나 아동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친한 사람을 만나면 급히 부른다. 그 사람이 응답하면 곧 “내 더위 사라.”고 한다. 불러도 지나가고 응하지 않으면 팔지 못한 것이다.

10월 초부터 남자아이들은 연날리기를 하고 여자아이들은 나무로 만든 작은 호로(葫蘆) 3개를 차고 다닌다.

 

이듬해 정월 보름밤이 되면 가지고 놀던 연은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 차고 다니던 호로는 길에 버리는데 엽전 1전씩 매단다. 이를 방액(防厄), 즉 액막이한다고 한다.

여항의 소민들은 점쟁이[日者일자]에게 명수(命數)를 물어 흉성(凶星)이 든 해라는 점이 나오면 제웅[芻人추인]을 만들고 뱃속에 엽전을 넣어 길가에 버린다. 그러면 이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제웅을 치고 부수어 엽전을 빼간다. 이를 대액(代厄), 즉 액땜이라고 한다.

 

145) 위거원(韋巨源)은 중국 당나라 때 인물로 음식에 관한 해설서인 식보(食譜) 를 썼다. 여기서 유화명주(油畵明珠)의 유화는 약밥이 번지르르한 모양을, 명주는 그 색을 표현한 것이다.

 

 

보름날 밤에 열두 다리를 걸어서 건너면 열두 달 액을 모두 없앨 수 있다고 하여 재상과 귀인으로부터 여항 백성들까지 늙거나 병든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리밟기를 하러 나온다. 가마나 말을 타고 오기도 하고, 지팡이도 짚고 나막신을 끌고 나오기도 하여 거리가 사람들로 꽉 찬다. 악기와 술병이 사람들이 모인 곳마다 벌려있다. 일 년 중에 도읍이 구경꾼들로 성황을 이루는 날은 오직 보름밤과 사월 초파일로 이 두 날만은 매번 임금의 명으로 통금을 해지한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볏짚을 만들고 쌀 주머니를 다는데, 위는 뾰쪽하게 하고 아래는 넓게 하여 장대에 묶어 마당 가운데에 세운다. 이것을 화적간(禾積竿), 즉 볏가릿대라고 한다. 이것은 2월 초하루에 장대를 눕혀 매단 쌀을 꺼내 떡을 해 먹는다.

농가에서는 초저녁에 홰를 만들어 불을 붙인 다음 무리를 지어 동쪽을 향해 달리는데, 이것을 달맞이[迎月영월]라고 한다. 달이 위로 뜨면 그 둘레의 색을 보고 그해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 점을 친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150)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정월보름 농가에선 언제나 달뜨기를 기다린다.

북쪽 가까이 뜨면 산골에 풍년들고 남쪽으로 기울면 해변 곡식이 잘 익는다.

달이 붉으면 가물까 걱정이고 흰색이면 홍수가 날까 두렵다.

알맞게 황색이어야 대풍년이 들 것이로다.”

농민들은 수수깡을 세로로 가운데를 갈라 한쪽 편에 작은 구멍 열두 개를 뚫고 그 구멍마다 콩 한 알씩 박아 넣어 열두 달을 나누어 표시한다. 다른 한 쪽도 같은 간격으로 열두 구멍을 파서 둘을 합친 다음 봉해서 물속에 넣어 하룻밤을 재운 후 꺼내 열어보아 콩이 얼마나 불었는가에 따라 그달이 비가 많을 것인지 가물 것인지 점치는데, 이것을 달불음[潤月윤월]이라고 한다.

시정 소년들은 빈 공터에 모여 조를 나누고 진을 친 다음 돌을 던져 승부를 내는데, 이것을 편싸움[邊戰변전]이라고 한다. 진행 도중에 머리가 깨지고 눈을 다쳐도 동정하는 일이 없다. 속설에 이기는 편의 방위에서 풍년이 든다고 한다.

 

향촌의 부잣집에서는 잡곡밥을 지어놓고 품을 팔아 어렵게 사는 이웃 사람들을 불러 한 그릇씩 먹인다. 부잣집이 많은 동네에서는 하루에 여러 그릇을 먹게 된다.
속담에 “밥 아홉 그릇 먹고 땔감 아홉 짐 한다.”고 하는데, 밥을 배불리 먹어 기력이 강해졌다는 말이다.

이날 김에다 취나물 등속과 밥을 싸서 많이 먹으면 좋다고 하는데, 이를 복쌈[縛?]이라고 하며 역시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 있다.

보름에 인가에서는 개를 굶기는데 이날 먹이면 개 몸에 파리가 들끓는다는 속설 때문이다. 속담에 명절을 굶고 넘어가는 사람을 비웃어 “개 보름 쇠듯 한다.”고 한다.

 

150) 차천로(1556~1615)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난우(蘭?)·귤실(橘室)·청묘거사(淸妙居士)다. 조선 선조 때 문장가로 저서에 오산집(五山集) 이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정조 때의 학자 홍석모가 한국의 열두 달 행사와 그 풍속을 설명한 책이다. 모두 22항목으로 되어 한국 민속의 유래를 고증을 통해 자세하게 밝혀 놓고 있다.

 

 

보름날(上元)

 

이 날은 찰밥을 짓는데, 대추?밤?기름?꿀?간장 등을 섞어 다시 쪄서 잣과 버무린 것을 약밥[藥飯]이라고 하여 보름날의 좋은 음식으로 여기며 이것으로 제사를 지낸다. 대개 이것은 신라의 풍속이다. 내 생각에는 신라 때 서울인 경주의 지리와 풍속을 적은 책 동경잡기(東京雜記) 350)에 신라 소지왕 10년 정월 15일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을 때 까마귀가 날아와 왕을 일깨워주어 그 덕에 왕이 화를 면하게 된 일이 있었으므로 우리나라 풍속에 보름날을 까마귀 제사날로 삼아 찰밥을 만들어 까마귀에게 제사지냄으로써 그 은혜를 보답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지금 풍속에 찰밥이 시절음식으로 된 것이다.

 

시골 사람들은 보름 하루 전날에 짚을 군대깃발인 둑기[纛旗] 모양으로 묶고 그 안에 벼?기장?피?조의 이삭을 넣어 싸고 목화를 그 장대 끝에 매달아 집 곁에 세우고 새끼를 사방으로 벌려 고정시킨다. 이것을 벼 낟가리[禾積]라고 하며 이것으로 풍년을 기원한다.

 

산골 풍속에는 가지가 많은 나무를 외양간 뒤에 세우고 곡식 이삭과 목화를 걸어두면 아이들이 새벽에 일어나 해가 뜰 때까지 나무 주위를 돌면서 노래를 부르며 풍년을 기원한다. 조선시대 옛 행사 중에는 시경(詩經) ?빈풍(?風)? 칠월(七月)351)에 나오는 내용인 경작하고 수확하는 형상을 본 따 정월 보름날 대궐 안에서 좌우로 나누어 승부를 겨루었다. 이것도 아마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항간에 볏가릿대[禾竿화간]를 세우는 일도 바로 이와 같은 행사의 일종인 것이다.

 

350) 동경잡기 는 경상도 경주부(慶州府)의 지지(地誌)다. 작자미상으로 전해오던 동경지(東京誌) 를 1669년 민주면(閔周冕) 등이 향중인사와 함께 편집, 보완하여 동경잡기(東京雜記) 라고 개칭, 간행하였다. 이후 1711년 첨보(添補)하여 재간하였다.

351) 시경 ?빈풍?은 8권에 있으며 7월편은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천시(天時)를 따라 민사(民事)가 주어진다는 내용이다.

 

 

남녀의 나이가 사람의 운수를 맡고 있다는 나후직성(羅?直星)352)을 만나면 풀로 만든 허수아비인 추령(芻靈)을 만든다. 이것을 방언으로 제웅[處容처용]이라고 한다. 제웅의 머리통에 동전을 집어넣고 보름날 하루 전, 즉 14일 초저녁에 길에다 버려 액막이를 한다. 이때 아이들은 두루 집집마다 몰려다니면서 문밖에서 제웅을 달라고 외치고 그것을 얻게 되면 즉시 머리통을 파헤쳐 다투어 돈을 꺼낸 다음 제웅을 길바닥에 끌고 다니면서 두들기는데, 이것을 제웅치기놀이[打芻戱타추희]라고 한다.

처용이란 말은 신라 헌강왕 때 동해 바다 용왕의 아들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장악원(掌樂院)의 향악부(鄕樂部)에서 하는 처용무(處容舞)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추령을 제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처용이란 말에서 빌은 듯하다. 세속에서는 점쟁이 말을 믿어 나이가 일월직성(日月直星)을 만난 사람은 종이로 해와 달 모양을 만들어 나무막대기에 끼워 지붕 용마루에 꽂아 두었다가 달이 뜰 때 횃불을 밝혀 그 것을 맞이한다. 나이가 수직성(水直星)을 만난 사람은 종이에 밥을 싸서 밤중에 우물 속에 던져 액막이를 한다. 세속에서는 처용직성을 가장 꺼린다.

 

남녀 어린이들은 겨울부터 작은 나무 조롱박 세 개를 차고 다닌다. 그 빛깔은 푸른 색?붉은 색?누런 색 등으로 모양은 마치 콩알 같은데, 이것에다 비단실로 수를 달아 차고 다니다가 보름 전날 밤중에 몰래 길에다 버린다. 이것 역시 액막이가 된다고 한다.

 

정월 보름 전에 붉은 팥죽을 쑤어 먹는다. 내 생각에는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마을 풍속에 정월 보름날 문에 제사를 지내는데 먼저 버들가지를 문에 꽂은 후 팥죽에 숟가락을 꽂아 놓고 제사지낸다."고 하였는데, 지금 풍속에 팥죽을 차리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서울 도성의 북문을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하는데 문은 항상 닫아두고 사용하지 않는다. 그곳은 물과 계곡이 무척 맑고 그윽하여 보름 전에 여염집 부녀들이 이곳에서 세 번 놀고 가면 액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꼭두새벽에 종각 네거리에서 흙을 파다가 집 네 귀퉁이에 뿌려 묻거나 부뚜막에 바르는데, 부자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353)

 

352) 나후직성(羅?直星)이란 제웅직성이라고도 하며 나이에 따라 그 해의 운수를 맡아보는 아홉 직성, 즉 일요(日曜), 월요(月曜), 화요(火曜), 수요(水曜), 목요(木曜), 금요(金曜), 토요(土曜), 나후(羅?), 계도(計都)의 구요(九曜) 중 하나다. 이중 나후와 계도의 운행이 다른 것들과 역행하여 교차의 정도가 심하면 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각기 1주에 18년이 걸리며 개인에게는 9년마다 한 번 씩 이 직성에 걸리는데 남자는 10세 때, 여자는 11세 때 처음 든다고 한다.

353) 이것은 재력가들이 밟고 다니는 시전거리 흙을 옮겨옴으로써 재복도 함께 옮겨지기를 바라는 주술적인 뜻이 담겨있다.

 

보름날 이른 아침에 날밤?호두?은행?잣?무 등을 깨물면서, “일 년 열두 달 동안 아무 탈 없이 평안하고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고 축원한다. 이를 부럼 깨물기[嚼癤작절]라고 한다. 혹자는 이것이 이를 튼튼히 하기 위한 방법이라고도 한다.

평안도 의주(義州) 지방 풍속에 어린 남녀들이 이른 아침에 엿을 깨무는데 이를 이빨겨루기[齒較치교]라고 한다. 청주(淸酒)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하는데 이 술을 귀밝이술[?聾酒유농주]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송나라 사람 섭정규(葉廷珪)356)가 쓴 해록쇄사(海錄碎事) 에 “사일(社日)357)에 귓병을 낫게 하는 치롱술을 마신다.”고 하였는데, 지금 풍속에는 이를 보름날이라 한다.

 

박?오이?버섯 등 각종 채소 말린 것과 콩, 호박 및 순무 등 각종 무를 저장해 둔 것을 묵은 나물[陳菜진채]이라고 하며, 이 날 반드시 이 나물들을 만들어 먹는다. 오이꼭지?가지껍질?무잎 등도 모두 버리지 않고 말려 두었다가 삶아서 먹는데, 이렇게 하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채소 잎이나 김으로 밥을 싸서 먹는데 이것을 복쌈[福?복과]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에 “인일(人日)에 일곱 가지 채소로 국을 끓인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지금 풍속에는 정월 보름날로 옮겨졌으며 또한 시경 ?패풍(?風)?에 “좋은 채소를 모아 저장하는 것은 겨울철에 먹을 채소가 없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358) 라는 뜻과 통하는 것이다.

이 날 오곡밥을 지어먹고 또 서로 나누어 먹는다. 영남 지방의 풍속이 또한 이러하다. 종일 이 오곡밥을 먹는데, 이는 제삿밥을 서로 나누어 먹던 옛 풍습을 답습한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보면 갑자기 상대방을 불러보고 상대방이 대답을 하면 곧 “내 더위 사라.”고 하는데, 이것을 더위팔기[賣暑매서]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더위를 팔면 그 해에는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온갖 방법을 다 써서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아 이것 때문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서로 즐겁게 놀게 된다. 내 생각에는 송나라 사람 석호(石湖) 범성대(范成大)의 ?매치애(賣癡?)?라는 시에 “섣달 그믐날 밤이 늦도록 사람들이 자지 않고 …… 나의 어리석고 못생긴 점을 사가라고 남을 부른다.“고 하였고,359) 또 생각건대 육방옹(陸放翁)의 ?세수서사시(歲首書事詩)?에 “정원에서 주사위 놀고 떠들며 새해맞이가 한창인데 춘곤(春困) 파는 아이들은 새벽같이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그 시의 주석에 “입춘날 새벽에 서로 불러 춘곤을 판다.”고 한 것을 볼 때, 지금 풍속인 정월 보름날의 더위팔기도 이런 종류인 것 같다.

 

357) 사일(社日)은 입춘이 지난 뒤 다섯 번째 오는 무일(戊日)이다.
358) 이것은 시경(詩經) 권2 ?패풍(?風)? 곡풍(谷風)에 나오는 내용으로, 본문에는 “御冬之旨畜”으로 나와 있으나 원문은 “我有旨畜 亦以御冬”이다.
359) 범성대(范成大)의 자는 치능(致能), 호는 석호거사(石湖居士)다. 석호집(石湖集) , 남비록(攬?錄) 등의 저서가 있다. ?매치애사(賣癡?詞)?는 더위를 팔 듯 멍청함을 사가라는 당시의 풍속을 읊은 시다. 매치애(賣癡?)란 “너의 어리석음과 못생김을 팔아라(賣汝癡賣汝?)”란 뜻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오(吳)나라에 못생긴 사

 

 

 

봄이 올 때마다 봄을 타느라 얼굴빛이 검어지고 야위는 아이는 미리 정월 보름날 남의 집 밥을 백 군데에서 빌어다가 절구를 타고 개와 마주앉아 개에게 한 술 먹이고 자기도 한 술 번갈아 먹으면 다시는 그런 병을 앓지 않는다고 한다.

이 날은 개에게 밥을 먹이지 않는다. 개에게 밥을 먹이면 파리가 많이 끓어 야위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속담에 우스갯소리로 굶는 것을 “개 보름 쇠듯 한다.”고 한다.

 

과일나무의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두면 과일이 많이 열리는데 이것을 과일나무 시집보내기[嫁樹가수]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명나라 사람 서광계(徐光啓)360)가 쓴 농정전서(農政全書) 361)에 오얏나무에만 이 방법을 쓴다고 하였고, 또한 유종본(兪宗本)은 종수서(種樹書) 362) ?종과(種果)? 항목에 대한 세부 설명에서

오얏나무 시집 보내는 시기는 정월 초하루 또는 보름이라고 하였으며, 또 진호(陳淏)의 화력신재(花曆新栽) 363)에 오얏나무를 시집보내는 방법으로 섣달 그믐날 오경(五更)에 장대로 오얏나무 가지를 두들기면 결실이 많다고 하고, 또 석류나무를 시집보내는 방법은 설날에 돌멩이를 갈라진 가지 사이에 얹어두면 열매가 크게 열리며 혹 섣달 그믐날 밤에 해도 좋다고 하였는데, 과일나무 시집보내기는 섣달 그믐밤, 설날, 그리고 정월 보름날 중 아무 때나 좋으며, 지금의 우리 풍속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360) 서광계(徐光啓)는 중국 명나라 때의 학자로 자는 자선(子先), 호는 현호(玄扈)다. 마테오릿치로부터 천체에 관한 지식을 배웠으며 역법에 정통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 1639년에 간행된 농정전서(農政全書) 가 있는데, 이 책에 실린 수리시설에 관한 지식은 조선 정조 때 화성 경영에 적용된 바 있다.
361) 농정전서 는 1639년에 간행된 서광계의 저서로 전 60권이다. 한나라 이후로 발달해 온 농가의 설을 총괄하고 수력학과 지리학을 참조한 중국 최고의 농정서(農政書)다.
362) 유종본(兪宗本)은 당나라 사람으로 종수서(種樹書) 를 지었다. 그의 생몰년이나 출신지 등은 미상이다.
363) 화력신재(花曆新栽) 는 중국 청대에 주요 화훼식물을 소개한 책이다. 작자 진호(陳淏)는 절강(浙江) 항현(杭縣) 사람으로 자호는 서호화은옹(西湖花隱翁)이다. 1612년에 태어났으며 70세가 넘은 나이에 책을 냈다. 화력신재 는 그의 전서(全書) 6권 중 1권으로 월별로 꽃의 종류를 소개하였다.

 

 

 

아이들이 집안식구대로 “○○○ △△生 身厄消滅(신액소멸)”(○○○은 성명, △△은 干支(간지), 즉 누구의 몸에 있는 액운이 소멸되라는 뜻)이라는 문귀를 연 등에 써서 연이 날아 가는 데까지 띄우다가 해질 무렵에 액을 멀리 보낸다는 의미로 연줄을 끊어 날라가게 놓아버린다.

 

연을 만드는 방법은 대나무 살에 종이를 발라 마치 키 모양처럼 만든 다음 오색으로 칠하면 된다. 연 바탕에는 다양한 종류의 무늬를 넣는데 그 무늬에 따라 바둑판 무늬를 넣은 기반연(?斑鳶), 이마 부분에 검은 칠을 한 묵액연(墨額鳶), 접시처럼 둥근 모양의 쟁반연(錚盤鳶), 방패 모양의 방혁연(方革鳶), 고양이 눈을 그린 묘안연(猫眼鳶), 까치날개 모양의 작령연(鵲翎鳶), 물고기비늘 모양의 어린연(魚鱗鳶), 용꼬리 모양의 용미연(龍尾鳶) 등으로 연 이름을 붙인다. 또 얼레[絲車]를 만들어 연줄을 붙들어 맨 다음 공중에 띄워 바람 부는 대로 날리며 노는 것을 연날리기[風錚]라고 한다. 중국에서 만드는 연의 모양은 기이하고 정교하다.

 

중국 사람들은 연날리기를 겨울에 시작하여 늦봄까지 즐긴다. 우리나라에서도 겨울부터 연날리기를 시작하지만 정월 보름까지만 한다. 연은 직접 만들지만 시장에서 사기도 한다. 고려 말에 최영(崔瑩) 장군이 탐라(제주도)를 정벌할 때 연을 이용하여 사방이 절벽인 섬에 상륙했다는 전설이 있어 이때 연날리기가 시작된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계속 행하고 있다.

 

연줄을 만들 때는 실을 겹친 다음 아교를 먹여 흰말의 말총같이 말쑥하게 한다. 혹은 노랗게 치잣물을 들이기도 한다. 연이 정처 없이 이리저리 날다 보면 다른 연과 서로 교차하여 어느 한 쪽 연줄이 끊어지게 되는데 남의 연줄을 많이 끊을수록 더 통쾌하게 여긴다. 바람을 타고 윙윙 소리를 내는 연줄이 남의 연줄을 잘 끊는다. 심지어는 남의 연줄을 잘 끊을 수 있고 반대로 자기 것은 잘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사금파리 가루나 구리 가루를 연줄에 바르기도 한다. 그러나 연줄에다 교차시키는 방법이 능숙한 가에 따라 승부가 좌우된다.

서울의 젊은이들 중에는 연싸움 잘하기로 유명한 자들이 있어 가끔 부잣집이나 지체가 높은 집에서 이들을 초대하여 연 날리는 재주를 구경한다. 매년 정월 보름 한 이틀 동안은 수표교(手標橋)364) 개울 위 아래로 연싸움을 구경 온 사람들이 담을 쌓은 듯이 빽빽이 늘어선다.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끊어진 연줄을 쫓아 하늘만 쳐다보고 물결처럼 분주히 달리다 보면 담장을 뛰어 넘고 지붕 위를 마구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기세를 막을 수 없으며 이를 보고 겁을 내고 놀래는 사람들도 많다. 보름날이 지나면 다시는 연을 날리지 않는다.

 

364) 수표교(手標橋)는 조선 세종 23년(1441)에 물의 깊이를 재는 수표(手標)가 서울 중심부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청개천의 마전교(馬廛橋) 서쪽(현재의 청계천 2가)에 세워진 후 수표와 관련하여 붙여진 돌로 만든 다리 이름이다. 1959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현 위치인 장충동 장충공원 입구로 옮겼다.

 

 

댓가지에 풀로 오색 종이를 붙이는데 종이 모양은 모가 지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고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여 일정하지 않다. 자루를 그 한 가운데에 꽂아 이를 아이들이 들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거슬러서 달리면 종이가 돌아간다. 이것의 이름을 바람개비[回回兒]라고 한다. 시장에서도 많이 판다.

 

아이들이 한 가닥 풋솜 실로 거위의 털을 붙들어 매어 바람에 날리는 것을 꼬꼬매[姑姑妹]라고 한다. 이 말은 몽고어로 봉황이란 뜻이다.

연을 띄우다 남은 연줄에 돌멩이를 붙들어 매고 서로 걸어서 세게 잡아당기는 놀이도 한다. 줄이 끊어지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

 

땅을 파서 구멍을 만들어 놓고 어른이나 아이들이 편을 갈라 동전을 던져 그 구멍을 맞힌 다음 그 중의 하나를 정하여 큰 동전을 던져 맞춘 사람이 돈을 갖고 이긴다. 만일 잘못 맞추었거나 맞추지 못한 사람은 지는 것이다. 정월 보름날에 이 놀이가 더욱 성하다. 아이들은 혹 사금파리를 동전으로 삼아 이와 같은 놀이를 한다.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달맞이[迎月영월]라고 하며 남보다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재수가 있다고 한다. 나아가 달빛으로 한 해의 기후 상태를 예측하는데, 달빛이 붉으면 그 해에 가뭄이 들 징조이고 희면 비가 많이 올 징조라고 한다. 또 달이 뜰 때의 모양, 크기, 출렁거림, 뜨는 위치의 높고 낮음 등을 보고 점을 치기도 한다. 달의 윤곽과 네 방향의 두께를 보고 각각 그 방향에 해당하는 지방의 일년 농사를 점치기도 하는데, 그 둘레가 두터우면 풍년이 들고 엷으면 흉년이 들 징조라고 하며 이러한 예측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날은 순라(巡邏)370)를 맡고 있는 군문(軍門)에서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한다. 내 생각에는 당나라 사람 위술(韋述)371)이 쓴 서도잡기(西都雜記) 에 “정월 보름날 밤에 의금부에서 황제의 명을 받아 보름날 전후로 각 하루씩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하였는데 이것을 방야(放夜)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 제도도 이를 본 뜬 것이다.

 

370) 순라란 도둑이나 화재 등을 경계하기 위해 밤에 통행금지 시간을 정하고 궁중과 도성 둘레를 순시하는 것을 말한다.

371) 위술은 중국 당나라 때 사람으로 국사(國史)를 40년간 관장하고 20년간 사관(史官)을 맡았다.

 

 

이 날 밤 서울 장안의 주민들은 신분이나 남녀 구분 없이 모두 몰려 나와 열운가(閱雲街)372)의 종각(鍾閣)에서 저녁 종소리를 들은 후 흩어져 여러 곳의 다리로 가서 왕래하는데 밤이 새도록 행렬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것을 다리밟기[踏橋]라고 한다. 혹 어떤 이는 말하기를 교(橋)와 각(脚)이 우리나라 뜻 새김으로 발음이 같기 때문에 속담에 다리[橋]를 밟으면 일 년 내내 다리병[脚疾각질]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다리밟기는 주로 대?소광통교373) 및 수표교에서 가장 성했으며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은 퉁소를 불고 북을 쳐 일대가 굉장히 소란하였다. 옹락영이록(雍洛靈異錄)374)에 “당나라 조정에서는 정월 보름날 밤에 한하여 삼경(三更), 즉 자정 전후의 늦은 밤에도 통행을 허락하였기 때문에 남녀가 모두 거리에 나와 수레와 말로 거리가 막힐 정도였다.”고 했다.

 

육계굉(陸啓?)의 북경세화기(北京歲華記) 375)에는 “정월 보름날 밤 부녀자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다리로 달려간다.”고 했다. 또 명나라 사람 우혁정(于奕正)이 쓴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 376)에는 “정월 보름날 밤에 부녀자들이 서로 이끌고 나와 돌아다니면서 질병을 없앤다고 하는데 이것을 백병쫓기[走百病]라고 한다.”고 했다.

 

심방(沈榜)의 완서잡기(宛署雜記) 377)에는 “정월 16일 밤에 부녀자들이 떼를 지어 놀았으며 대개 다리가 있는 곳에서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리를 건너갔는데, 이것을 ‘액을 건넜다[度厄].’고 한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 다리밟기 풍속의 유래다. 조선 선조 때의 학자 이수광(李?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 378)에는 “정월 보름날 밤 다리밟기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풍속인데 매우 성행하여 남녀들이 길거리를 메워 밤새도록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법관이 이를 금지하고 체포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 풍속에는 부녀자들이 다시는 다리밟기하는 일이 없어졌다.

 

372) 운종가로 현 보신각이 있는 곳에서부터 종로 3가까지의 길을 말한다.
373) 대소 광통교는 대광통교(大廣通橋)와 소광통교(小廣通橋)로 현재 서울의 광교 부근 청계천에 설치된 다리가 대광통교이고 아래로 을지로 쪽에 설치된 다리가 소광통교다.
374) 옹주(雍州)와 낙주(洛州)에서 일어났던 영이(靈異)한 일들을 기록한 책으로 옹주와 낙주를 포함한 9개 대주(大州)의 일들이 10권으로 된 영이록(靈異錄) 에 들어있다.
375) 북경세화기 는 중국 청대에 우씨(尤氏)가 서문을 쓴 예문지(藝文志) 안에 수록되어 있으나 작자와 출처
는 미상이다.
376) 제경경물략 은 유동(劉?)과 우혁정(于奕正)이 편찬하였다. 유동은 명나라 마성(麻城) 사람으로 장관을 지냈다. 우혁정은 명나라 완평(宛平) 사람으로 초명은 계로(繼魯), 자는 사직(司直)이다. 효심과 우애가 있어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형제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시골에 거하면서 종일 독서하고 시 짓고 명산을 유람하였다. 남긴 책으로는 금석지(金石志) ,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 등이 있다.
377) 심방(沈榜)은 중국 명나라 때 사람이다. 완서잡기 는 20권으로 된 책이다.
378) 지봉유설 은 이수광의 학문세계가 집약된 저술로서 20권 10책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주로 고서와 고문에서 뽑은 기사일문집(奇事逸聞集)이면서 유서(類書)의 성격을 지닌다. 수록된 주요 내용은 총 25 분야다. 이수광(李?光, 1563~1628)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문학자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이다.

 

 

삼문(三門)379) 밖의 주민들과 아현(阿峴) 주민들이 떼를 이루어 편을 가른 다음 몽둥이를 들거나 돌을 던지며 고함을 치면서 달려들어 만리동 고개 위에서 접전하는 모양을 하는데, 이것을 편싸움[邊戰변전]이라고 하며 변두리로 도망가는 편이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속설에 삼문 밖 편이 이기면 경기 일대에 풍년이 들고 아현 편이 이기면 팔도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용산과 마포에 사는 불량소년들 중에는 패를 지어 와서 아현 편을 돕는다. 바야흐로 싸움이 한창 심해지면 고함소리가 땅을 흔들 정도가 되며 머리를 싸매고 서로 공격하는데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져 피를 보고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다가 죽거나 상처가 나도 후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명을 보상하는 법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돌이 무서워 피하고 금지시켜야 하는 관에서 특별히 이를 금하는 조치를 취하지만 고질적인 악습이 되어 제대로 고쳐지지 않는다.

 

성안의 아이들도 이를 본받아 종각 거리나 지금의 종로 3가에 있던 비파정(琵琶亭) 부근에서 편싸움을 하였고 성 밖에서는 만리현과 우수현(雨水峴)380)에서 주로 편싸움을 하였다. 경상도 안동 지방의 풍속 중에는 매년 정월 16일에 주민들이 읍내 복판을 흐르는 시내를 경계로 삼아 좌우로 나뉘어 서로 돌팔매질하며 싸워 승부를 결정했다.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풍속에도 정월 보름날 돌팔매질하는 놀이가 있다. 내 생각에는 당서(唐書) ?고려전(高麗傳)?381)에 “매년 정초에 군중들이 패수(浿水) 가로 모여 노는데 물과 돌을 서로 끼얹고 던지며 밀고 밀리기를 두세 번 하다가 그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우리의 돌팔매싸움[石戰] 풍속이 시작되었다.

 

379) 여기서 삼문은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및 그 중간의 소의문(昭義門, 서소문)을 말한다.
380) 우수현(雨水峴)은 현재의 남대문 밖 도동 부근이다.
381) 신당서(新唐書) 는 전체 225권으로 송나라 구양수(歐陽修), 송기(宋祁) 등이 편찬한 것이다. 이중 권210 열전(列傳) 145에 ?고려전(高麗傳)?이 있다.

 

이 날 온 집안에 밤새도록 기름불을 켜 놓는데 마치 섣달 그믐날 밤 수세(守歲)하는 것과 같다.

장님을 보름날 전부터 불러다가 안택경(安宅經) 을 읽히며 밤을 지새운다. 이는액을 막고 복을 빌기 위한 것이며 정월 안에 이러한 일을 다 한다.

 

한 자가 되는 나무를 뜰 가운데다 세워놓고 자정에 그 나무에 비치는 달빛 그림자의 길이로써 그 해에 풍년이 들것인가 흉년이 들것인가를 점친다. 그 그림자 길이가 여덟 치면 바람과 비가 성하고, 일곱 치나 여섯 치면 모두 길하며, 다섯 치면 불길하고, 네 치면 수해와 병충해가 있으며, 세 치면 곡식이 여물지 않는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이 법은 중국 전한 때의 사람인 동방삭(東方朔)382)에게서 나온 것이고, 또 생각건대 진호(陳淏)의 화력신재(花曆新栽) 에 “정월 보름날 밤에 한 길이 되는 장대를 세워놓고 자정에 생긴 달그림자를 보아 6~7자가 되면 풍년이 들고, 8~9자면 수해가 나며, 3~5자면 반드시 가뭄이 든다.”고 했으므로, 보름날 밤 그림자를 재는 것이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밤중에 재를 주발에 담아 지붕 위에 올려놓는데, 이것은 어떠한 곡식 씨가 하늘로부터 떨어지는가를 보기 위해서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그 주발 안에 떨어진 곡식 씨를 보고 그 해 어떤 곡식이 풍작이 될 지를 점친다.

 

382) 동박삭(東方朔)은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사람으로 자는 만천(曼?)이고 시중(侍中) 벼슬에 올랐다가 장수하였다는 이야기로 전해지는 ‘삼천갑자 동방삭’의 주인공이다.

 

 

꼭두새벽에 첫닭이 몇 번 우는 지 세어보아 열 번 이상 울면 그 해 풍년이 든다고 점치는데, 이것은 시골에서 볼 수 있는 풍속이다.

 

황해도와 평안도 풍속에 정월 보름 전날 밤 닭이 울 때를 기다려 집집마다 표주박을 들고 앞다투어 정화수를 길어오는데 이를 용알건지기[撈龍卵노용란]라고 한다. 물을 맨 먼저 긷는 사람이 그 해 농사를 제일 잘 짓는다고 한다. 또 콩 열 두 개에다 각각 열 두 달을 표시하여 수수깡 속에다 넣고 묶어 우물 속에 빠뜨린다. 이것은 달

 

불이[月滋월자]라고 하는 것으로 이튿날인 보름날 새벽에 그것을 꺼내 보아 콩이 물에 불어있는 정도에 따라 해당하는 달에 홍수 피해가 있을 지 가뭄 피해가 있을 지를 점쳐 보는데 예측이 잘 맞는다고 한다. 또 동네의 홋수만큼의 콩을 골라 그 각 콩에다 호주를 구별할 수 있게 표시를 해놓고 짚으로 묶어 우물에 빠뜨린다. 이것은 집불이[戶滋]라고 하는데 다음날 아침 꺼내어 콩이 불은 상태를 보고 해당하는 콩의 집이 그 해에 풍년이 들어 잘 살 수 있을 지를 점쳐 본다.

 

충청도 풍속에는 횃불싸움[炬戰거전]이 있다. 또 편을 둘로 갈라 마주서서 동아줄을 서로 잡아당기게 하여 상대에게 끌려가지 않고 끌어당겨 이긴 편이 그 해 풍년이 든다고 점치는데 이는 곧 옛날의 결하희(?河戱)387)와 같은 것이다. 경기지방에도 이러한 풍속이 있으며 중들도 이러한 놀이를 한다.

 

강원도 산간지방 풍속 중에는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일제히 온갖 새 이름을 부르면서 새 쫓는 시늉을 하는데 여기에도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춘천 지방 풍속에 수레싸움[車戰거전]이 있다. 외바퀴 수레를 만들어 이것을 동리별로 편을 나누어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서로 싸우는 것으로, 승패의 결과로써 그 해의 일을 점치는 바 패하여 쫓기는 편이 흉하다. 가평 지방 풍속에도 이러한 것이 있다.

 

영남 지방 풍속에 칡으로 하는 줄다리기[葛戰갈전]가 있다. 칡으로 동아줄을 만드는데 굵기가 크게는 40~50줌 된다. 이것을 편을 갈라 서로 당겨 승부를 결정짓는데 이를 점풍(占豊), 즉 풍년을 점친다고 한다.

안동 지방 풍속에는 동네 여자들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밤에 떼를 지어 성밖으로 나간다. 이들은 물고기를 꿰어놓은 모양으로 줄을 서서 엎드려 가는데, 뒷사람이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서로 끊임없이 잇대어 나간다. 그리고는 어린 계집아이 한 명을 엎드린 여자들의 등위로 걸어가게 하고 좌우에서는 그 아이를 부축하는데, 서로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그 위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마치 다리밟기를 하는 것 같다.

위에 있는 어린 계집아이가 “이것이 무슨 다리지.” 하고 선창(先唱)하면 엎드려 있는 여자들이 “청계산 놋다리[銅橋동교]지.”라고 화답한다. 큰길을 따라 혹은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밤이 샌 뒤에야 그친다.

 

풍기 지방 풍속에 정월 보름날 고을의 수리(首吏)가 검은 소를 거꾸로 타고 거문고를 안고 동헌에 들어가 원님에게 절을 한 다음 일산(日傘)을 받쳐 들고 나오는데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으나 필시 복을 비는 행사의 하나일 것이다.

 

387) 결하희(?河戱)란 줄다리기를 말한다. 결하는 중국 창주(滄州) 남피현(南皮縣)에 있는 하천 이름이다.

 

 

 

기타 정월 행사(月內)

 

관의 인가를 받은 상설점포인 시전(市廛)들은 설날 이후의 휴업을 마치고 좋은 날을 택하여 새해 첫 가게문을 여는데 반드시 털짐승과 관련된 날[毛蟲日]에 연다.
그 이유는 짐승들의 솜털같이 장사가 잘 되라는 상징적인 뜻을 취했기 때문이며, 그 중에서도 범날[寅日]을 최고로 여긴다.

 

성균관인 태학(太學)과 서울 동?서?남?북의 사학(四學)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는 유생[居齋儒生]들은 식당에 밥 먹으러 갈 때마다 출석부에 기록하는데 이것을 ?식당도기(食堂到記)?라고 한다. 이 출석부를 회수하여 그것에 기록된 수가 규정에 이른 유생들을 대상으로 임금이 친히 과거를 보인다. 시험과목은 경전을 소리 내어 외우는 강(講)과 주어진 주제에 대해 작문을 하는 제술(製述)로서, 강 시험은 삼경(三經)388) 중 하나를 외우게 하고 제술 시험은 명절 때 여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한다. 강과 제술에서 장원을 한 자에게는 모두 급제(及第)를 내리는데 이때의 과거를 춘도기과(春到記科)라고 하며 가을철에도 이렇게 하는데 이 과거를 추도기과(秋到記科)라고 한다.

 

경주 지방 풍속에 정월의 첫 쥐날, 첫 용날, 첫 말날, 첫 돼지날 등의 날에는 온갖 일을 꺼리고 삼가며 감히 함부로 움직이거나 만들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 날들을 신일(愼日), 즉 조심하는 날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개 그 기원을 보면 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488) 정월 보름에 까마귀?쥐?용?말?돼지 등이 이상한 조짐을 보여 왕이 금갑(琴匣), 즉 거문고를 넣어두는 갑 속에 숨어 궁녀와 간통하는 중을 죽여 화를 면했으므로 나라 백성들이 위의 날들을 신일이라고 한데서 나온 것이다. 속담에 달도(??)라는 말은 슬프고 근심스러워 금하여 꺼린다는 뜻이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달도가(??歌)가 있다.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참조.】

 

388) 삼경(三經)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이다.

 

 

16일은 시골 풍속에 대부분 활동하지 아니하고 나무로 만든 물건을 집안에 들이지 않는 등 기일(忌日)로 여긴다. 이것도 아마 경주 지방의 옛날 풍습을 답습한 듯하다.

 

24일은 해마다 날씨가 흐리고 음산하다. 이는 임진왜란 때 왜병에게 서울이 함락된 이후 명나라 군사가 왜병을 격파하고 그 승세를 타서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왜적들을 압박하자 이들이 놀라 밤중에 도망하면서 불을 지르고 노략질과 살육을 하는 등 만행을 감행하여 온 성안의 누구도 화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날이
되면 원한에 찬 기운으로 인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8일을 잘못 발음하여 패일(敗日)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팔(八)과 패(敗)의 중국 발음이 ‘배’로 같기 때문이다. 이 날 남자들은 외출하지 않아 민속에서는 기일(忌日)로 여긴다. 내 생각에는 고려시대 풍속에 매월 8일에 부녀들이 성 안팎으로 나가 놀기 때문에 남자들이 집에 있으면서 나가지 못했던 것인데 이 풍속이 잘못 전해져 지금은 남자들이 나가서는 안 되는 날로 여기게 된 것 같다.

상현일(上弦日)과 하현일(下弦日)을 조금[潮減日]이라고 한다. 매달 인가에서 꺼리거나 궂은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이 날이 지나고 나서 서로 내왕하며 꺼리는 일이 있는 사람과도 이 날을 지나서야 만난다.

 

5일?14일?23일을 삼패일(三敗日)이라고 한다. 매달 이 날에는 모든 일을 꺼려서 감히 행동하지 않고 밖에 나가는 것도 안 되는 것으로 안다. 이는 고려시대 이래로 풍속에 이 세 날을 임금이 사용하는 날로 삼았으므로 신하와 백성들이 이 날을 사용하지 않고 기일로 삼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므로 본래가 패일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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