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려는 클라이머들의 신념은 꺽이질 않는다. 산에서의 도전과 모험, 이는 알피니즘 행위의 본질인 무상의 행위에서만 가능한 높이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등반가는 만년설이 있는 곳에 도달하게 되고, 또 정상으로 이어주는 암벽과 얼음통로들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까지 통과할 수 있음을 가능하게 한다.
날씨의 변화로 강한 추위에 수정같이 단단한 얼음으로 변해버린 얼음 통로를 통과해야만 하는 일은 고산등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며, 그 것은 기술적인 부분이 된다. 이 기술적인 부분이 요구됨은 분명 매우 어렵고 위험한 순간들임을 뜻하게 되고, 그 위험을 통과하여 벗어날 수 있는 방편은 오직 고난도의 등반기술과 장비사용들만 해결책이다.
만년설이 없는 우리나라 등반가들의 알피니즘 행위는 피켈을 거머쥐고 눈덮인 얼음 계곡을 찾아 헤매는 산에서의 작은 모험과 도전에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빙벽등반이 고산등반을 위한 부분적인 훈련으로 이용되었던 우리 나라에선 주로 계곡의 폭포가 얼어붙은 빙폭등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알프스나 히말라야를 가기 위한 관문으로 우리 나라의 최대 빙폭인 토왕성을 거론하게 되고, 이 엄청난 크기의 규모인 빙폭에서 우리 나라 빙벽등반기술의 발전과 변화가 빠르게 전개되었다.
우리 나라 초기의 빙벽 등반 기술은 피켈로 얼음을 깎아 발디딤을 만들어 올라가는 소위 '스텝 컷팅'의 기술이었는데, 이 등반기술은 얼음 경사각이 40도 안팎에서 만 가능했다. 그러나 더 어려운 얼음벽, 즉 경사각이 급한 빙벽을 오르려는 등반가들의 노력에 의해서 얼음에 단단하게 고정시킬 수 있는 확보물인 아이스하켄의 개발로 이어졌다.
굳이 얼음을 피켈로 깍지않더래도 손쉽게 두둘겨 박을 수 있는 아이스하켄은 줄사다리를 이용하여 수직빙벽까지도 등반을 가능케 했다. 이런 진보된 등반기술들에 위해서 경이적인 4대 등반기록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 첫 번째 가 1966년에 설악산 잦은 바위골 100폭 초등이고, 두 번째가 1975년에 봉화산 구곡폭포 초등이며, 세 번째가 1976년에 우리 나라 최대 반폭인 설악산 토왕성폭포 하단 초등이고, 네 번째가 1977년에 총 등반거리 360미터의 토왕성 상하단의 초등인 것이다.
요델산악회에 의한 100폭 초등과 어센트산악회에 의한 구곡폭포 초등, 그리고 동국대학교산악부의 토왕성폭포 하단 초등으로 이어지는 등반 흐름은, 13일간 이루어진 크로니산악회의 토왕성폭포 상하단 초등을 가능케 했다. 우리나라 최대의 빙벽인 토왕성폭포의 초등은 근대빙벽등반기술, 즉 인공등반기술의 결정체였다.
인공등반에서의 필수적인 장비는 피켈이나 아이젠이 아닌 빙벽용 하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래서 당시 등반의 성공여부는 아이스하켄에 달려있었다. 이런 아이스하켄들은 외국에서 구입하기도 했고, 구입하기 어려운 외국제품들은 모방해서 자체 제작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많은 양의 아이스하켄을 확보하기엔 시간이 필요했고, 구입의 어려움이 있어 등반계획과 준비하는 과정은, 토왕성등반인 경우 몇 년 전부터 준비를 해야만 가능했다. 이처럼 많은 시간과 장비가 소요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로써는 당연한 일이었다. 토왕성을 초등하기 위해서 투자된 많은 인원과 물량, 그리고 준비기간에 비해 13일이란 등반기간은 결코 긴 시간은 아니었고, 또 그 등반기록은 토왕성이 우리 나라의 최대 빙폭이라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등반기록들이 매년 만들어지는 우리 나라 빙벽 등반 기록 평가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중 토왕성이 초등된지 1년후인 1978년에 상하단을 2일만에 등반을 해낸 윤대표씨가 이끈 악우회의 등반기록은 당시 경이적인 등반기록이였으며, 이 기록은 토왕성을 당일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새로운 과제를 낳게 했다.
기록상으로 1984년에 드디어 청주대학교산악부에 의해 당일 등반이 이루어졌다. 등반소요시간인 6시간15분의 상하단 모두 합친 기록은 토왕성이 초등된지 7년이 지난 후 였다. 그렇다면 하룻만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무엇 이였을까? 아마도 7년간 장비의 변화가 그 것 이었다. 스탭컷팅이나 아이스하켄을 주로 이용해야만 하는 수직 벽에서 인공등반은 아이젠과 픽켈의 기능이 보조장비에 가까웠는데, 그 기능이 주 장비로 사용될 수 있게 변화되었다. 즉, 아이스하켄의 사용을 줄이고, 되도록 피켈과 아이젠만으로 등반이 가능한 자유등반형식의 기능에 맞게 변화된 것이다.
눈이 굳어서 된 연한 얼음에서 사용되는 아이젠의 앞 발톱은 강빙에 잘 박힐 수 있게 변화되었고, 피켈은 수직벽에서 잘 휘두를 수 있고, 또 피크가 얼음에 잘 박힐 수 있도록, 짧은 자루에 밑으로 굽은 피크의 각도로 변화되었다. 아이스하켄 변화의 당연성과 중요성 또한 간과 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핀스큐류, 아이스훅, 바트훅 같은 설 빙벽용으로는 단단한 강빙에서 여간 설치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후 외국에서 개발된 파이프 스크류와 스나그로 인하여, 빙벽등반은 한결 쉽고 안전하게 되었다. 특히 로우사의 스나그는 괄목 할 만한 빙벽장비중에 아이스하켄이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로우사의 빙벽장비의 개발은 획기적이었다. 피켈의 경우 허밍버드와 아이젠의 경우 푸트황은 수직벽의 단단한 얼음에서 그 기능은 아주 우수했다. 신발인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프라스틱 동계 등산화도 한 부분을 차지했다.
1984년, 드디어 토왕성에서 경이적인 등반이 나왔다. 마산 무학산악회의 이태식씨가 토왕성 단독등반에 성공한 것인데, 당시 최고의 찬사를 받은 등반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이듬해인 1985년에 이태식씨는 또다른 토왕성등반의 계획을 안고 등반에 임하다 토왕골 야영장에서 눈사태로 불의 사고를 당하여 사망하게 되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나라 산악계의 크나큰 손실이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으며, 향후 진취적인 빙벽등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했다.
그해 철암산악회의 이종관, 정병모씨에 의해서 5시간55분이라는 최단등반시간을 기록했다. 이들의 이런 경이적인 등반기록은 불과 2주전에 토왕성을 등반했기 때문인데, 한해에 토왕성을 같은 사람이 2회 등반한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85년, 이해에 괄목할 만한 등반중에 하나가 한 여성의 토왕성 완등이었다. 물론 선등은 아니었지만, 의례적으로 빙벽등반은 특히 토왕성은 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청화산악회 소속인 조희덕씨가 남성들에 대한 여성스러움의 대반란으로 우리 나라의 열악한 여성등반력의 인식들을 바꿔놓았고, 앞으로 진취적인 여성 등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토왕성등반의 초점은 남성보다 여성쪽에 기대를 모았다. 즉 여성 선등자의 완등에 대한 기대였다. 또 이해 설악산 다른 곳에서는 설악산의 빙폭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대승폭이 윤대표, 정호진씨에 의해 초등되었다. 이 대승폭은 오버행진 암벽에 거대한 고드름으로 형성되었으며, 또한 남향이라서 얼음이 잘 얼지않는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래서 등반시기를 맞추기가 매우 어렵고 등반 또한 매우 힘들어 재등도 3년 후인 1988년에 정승권(산당회), 정병모(철암산악회)씨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1986년, 철암산악회의 이종관, 정병모씨에 의해서 하루 2회 등반이라는 이색적인 등반이 토왕성에서 이루어 졌는데, 이들에 토왕성 1회 등반시간은 3시간대 였다. 이때부터 국내 최대 빙폭이라는 이유 때문에 토왕성 등반 초기의 초등 경쟁이 이제는 시간 단축이라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경쟁으로 변화되어 우리가 추구하려는 알피니즘과 거리가 먼 분위기로 휩 쌓이는 듯 했다. 토왕성이 초등된지 8년이 지난 후 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천교육대산악부 신동걸씨가 자일없는 단독등반에 성공하게 되고, 또다시 철암산악회 이종관씨가 며칠전 자신이 세웠던 하루 2회 등반과 최단 등반 시간 기록의 경이적인 등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일없는 완전한 단독등반에 성공했다. 그의 등반시간은 2시간대 였는데, 이 기록은 당시로써는 놀랄만한 등반 기록이었다.
1987년에 토왕성은 괄목할 만한 등반이 없었다. 이상 기온으로 얼음질이 절정에 이른 1월말경 때아닌 폭우로 토왕성이 무너져버려 새로운 등반을 계획한 빙벽등반가들을 안타깝게 했던 한해였다.
1988년, 2명이 동시에 단독으로 토왕성을 오르는 이색적인 등반이 있었다. 정승권, 정병모씨에 의해서 이루어진 이 새로운 등반기록은 알피니즘 정신에 입각한 모험적 등반방식의 변화를 찾으려는 이유에서 였다. 이들의 등반소요시간은 2시간대 였다.
1989년, 설악산의 3대 빙폭중에 마지막 하나인 소승폭이 청악산악회에 의해 초등 되었다. 이렇게 남성들의 열띤 등반력과 경쟁은 차가운 얼음을 녹일 수 있는 열기로 이어져, 마침내 토왕성에서 1시간대의 단독등반 완등이 이루어졌다. 산비둘기 산악회 소속인 유학재씨였다.
1990년, 산당회소속 정승권은 우리나라의 3대빙폭인 토왕성, 소승, 대승을 당일에 차례로 단독 등반하려는 이색적인 속공등반의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첫 번째 토왕성등반은 마쳤지만 결국 두 번째인 소승폭에서 위험한 얼음 질로 인하여 실패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 등반은 당시로써 어쩌면 무모하기도 한 엄청난 등반계획이었지만 새로운 등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91년, 드디어 토왕성 여성 선등의 완등자가 나왔다. 청맥산악회 소속인 이현옥씨인데, 그녀는 그 기세를 몰아 다음해인 1992년에 토왕성의 여성 재등자 남난희씨와 함께 여성들만의 완벽한 토왕성등반을 연출해 냈다. 이제 남은 여성등반은 단독등반인데, 당시 남자 빙벽등반가들은 조심스럽게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1992년, 토왕성에서는 이색적인 등반이 이루어졌다. 정승권, 송영주, 박광복씨의 3인조에 의해 이루어진 토왕성 야간 연장등반인데, 이들은 어둠이 시작된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연속 2회 토왕성등반을 했다. 이 야간등반의 당위성의 관건은 더욱 열악한 조건에서의 등반이었다. 이 야간등반은 다음해인 1993년에 정승권에 의해 야간 단독 등반과 하강인 일명 클라이밍다운의 새로운 토왕성등반의 기록으로 이어졌다.
1993년은 우리나라 빙벽등반 수준을 세계에 알리는 해였다. 토왕성표범이라는 별명을 갖은 강희윤씨가 프랑스에서 개최될 동계올림픽 전야제 행사로 열린 빙벽등반 페스티발에서 탁월한 등반력을 보여 주위에 이목을 끌었다. 그는 또한 이해에 토왕성을 1간11분만에 오르는 최단등반시간의 새기록을 수립하여 주의를 놀라게 했다.
1994년, 또 다른 이색적인 등반과 토왕성 최단등반시간의 단독등반이 있었다. 설악산에 대표적인 빙폭인 토왕성, 대승, 소승을 3대 빙폭이라 일컫는데, 여기에 소토왕폭을 하나 더 추가시켜 일명 4대 빙폭이라고 부른다. 이 4대 빙폭을 24시간안에 모두 오르는 등반인데, 김용기씨를 주축으로 한 엠씨산악회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또한 이해에 토왕성을 단독으로 37분만에 오르는 상상할 수 없는 기록이 강희윤씨에 의해서 이루어져 우리나라 빙벽등반력의 수준과 또 앞으로 어떤 등반들이 이루어질지 그 한계를 예측할 수 없게 했다.
1995년, 기다리던 토왕성에 새기록이 나왔다. 여성 단독등반이 그 것인데, 김점숙(현 샤모니 대표)씨가 전년도에 자신이 해낸 토왕성 선등에 여세를 몰아 일구어낸 우리나라 빙벽등반의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이 여성단독등반의 계기로 토왕성의 새로운 기록들의 경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놀랄만한 빙벽등반력과 토왕성등반 기록의 경쟁은 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멈쳤고, 새로운 빙벽등반의 장이 열렸다. 빙벽등반대회와 스포츠믹스등반이 그 것이었다. 빙벽등반도 암벽등반의 등반경기처럼 대회와 스포츠라는 단어가 붙는 스포츠적 등반행위가 부각되었다.
1997년, 설악산 눈꽃 축제행사 일환으로 속초시청 주최 설악산 적십자구조대 주관으로 토왕성빙폭 하단에서 제1회 설악산 빙벽등반대회가 개최되었다. 톱로핑방식의 속도경기로 진행된 경기라서 등반성은 없었지만, 앞으로 새로운 등반 경기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미 미국 등 선진 등산국에서 시작된 스포츠 믹스 등반의 등반루트가 신상만, 최승철, 김형진씨에 의해 개척되었다. 즉 암벽과 빙벽 또는 암벽만을, 피켈과 아이젠 또는 손을 이용해 자유등반으로 오르는 등반 방식으로써, 암벽등반에서의 스포츠클라이밍처럼 볼트나 하켄에 의해 미리 만들어져 있는 루트를 등반하는 것이다.
토왕골에 항사 얼음이 바닥까지 이어지지 않고 중간에서 끊긴 일명 개토왕에 만들어진 루트인데, 얼음과 혼합등반의 난이도 표기인 WI4, M7 으로 등급이 설정되었다. 또한 경기도 북부지역인 가래비 채석장 빙장에 이들이 개척한 2개의 스포츠믹스 루트도 있다. 그러나 이미 우리나라에도 이런 스포츠믹스등반의 개념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고난도 혼합등반이 행해지고 있었다. 예를 든다면 가래비 채석장 빙장에 유학재(한국산악회 등산기술위원)씨가 초등한 혼합등반루트인데, 스포츠믹스등반의 개념이 아닌 거벽등반을 위한 연습루트의 개념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혼합 등반 루트이든, 스포츠믹스 루트이든 간에 모두다 고산 거벽을 향한 전초적 트레이닝 루트라는 데에서 발전적 성향을 갖게 했던 것만은 분명하고도 중요했던 등반 기록들인 것이다.
1998년, 우리 나라 빙벽등반 실력과 수준을 외국에 알리는 즐거움이 있었던 한편, 토왕성에서는 눈사태의 대형 인명사고로 인한 슬픔도 있었다. 미국 TV 채널인 ESPN 스포츠 방송사가 개최한 Winter X-Game의 여러 경기종목 중 빙벽등반대회에서 정승권(정승권등산학교장)은 난이도경기와 속도경기에서 각각 2위를 차지해 한국에 빙벽등반 실력을 과시하며 우리나라 클라이머들을 신나고도 즐겁게도 했지만, 겨울이면 잦은 눈사태로 사고를 당하는 토왕골에서 이 해는 특히나 대형 눈사태가 5명이나 되는 많은 클라이머들에 목숨을 빼앗아가 버렸다. 매년 크고 작은 사고들이 일어나는 토왕성에서 토왕성이 초등된 이래 가장 큰 인명사고와 시신 발굴 작업이었으며, 그들이 대학산악부라는 데에서 우리들의 마음을 무척이나 아프게 했던 한해였다.
1999년, 항상 그랬듯이 여성이 우리나라 빙벽등반 기록의 종결을 짖는 듯, 전해에 이어 또다시 개최된 ESPN의 Winter X-Game 빙벽등반대회에서 김점숙씨가 작년 이 경기에서 못다푼 한을 2위를 함으로써 풀었다. 그리고 미국의 유명한 등반가인 제프로우가 주최한 유레이 빙벽등반 페스티발에서 정승권이 순수 빙벽등반과 스포츠믹스등반경기에서 종합 3위를 차지해 우리나라의 빙벽등반 수준과 실력을 또 한번 과시하기도 했다.
이제 세계빙벽등반의 흐름은 순수빙벽등반과 스포츠믹스등반으로 구분되어지고 있다. 피켈과 아이젠을 사용한다는 점은 같으나, 그 기술은 다르다. 또한 암벽등반이 자유등반에서 스포츠클라이밍으로 또 경기등반으로 변화된 것 처럼, 혼합등반이 스포츠믹스등반으로 또 경쟁적인 경기의 모습으로 변해가지만, 이런 행위와 훈련들의 당위성은 고산의 어려운 거벽을 등반하려는데 필요한 기술들을 연마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