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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늙기 (노인들의 물러서고 양보하기)
-나이, 그것은 무의미할 수도-
우리나라가 서양의 대부분 국가들과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 중 하나는 연장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심일 것입니다. 물론 작금에 와서 우리 사회도 많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예전에는 나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존경받았던 시대가 있었지요.
그 당시에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기 때문에 이의 없이 따라야 했던 것도 있었지만 제 스스로도 수궁을 했습니다. 인생을 살아 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것인데 그래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그 긴 세월을 이겨냈다는 자체로 충분히 존경을 받을 만하고 연장자에 대한 존경을 받아 마땅하고 이마의 주름살은 인생의 계급장이라고 생각했지요.
연장자에 대한 존경심이 자연스러웠던 시기에는 아이를 낳으면 일부러 나이를 올려 출생신고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야 학교도 일찍 다니고 성숙해진다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입니다. 우리나라, 특히 남자들 사이에는 언쟁이 붙었을 때 논리적으로 달리거나 불리해지면 하는 말이 있지요.
“너 나이가 몇 살이야?”
필자도 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 연장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심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지요. 과연 ‘나이가 성숙과 비례하는 지?’ 하는 것 때문이었어요. 우리는 나이가 들어도 철이 않든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미성숙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가 어려도 성숙한 사람이 있지요.
‘아이 같은 어른, 어른 같은 아이가 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존경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에 이의를 제기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 내가 나이가 들었다 해서 무조건 존경받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에서 이제는 어느 정도 벗어났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도 연장자라는 이유만으로 더 이상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서구 사상과 문화 전체를 뒤집어 놓았고 서구사상의 저변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관, 세계관, 우주관까지도 바꾸어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는 『방법서설』을 쓴 것은 데카르트의 나이 겨우 41세입니다. 인생을 많이 살았다 해서 어느 노인이 41세의 데카르트 생각을 해낼 수 있었을까요.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할 것이 아닙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적은 사람보다 성숙하다거나 지적인 면에서 우월하다는 근거도 부족합니다. 이것은 인생무대에서 나 만의 독선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나이를 앞세워 윽박지르 듯 나이가 힘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없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나잇값을 하라는 말이 있듯이 나이에 맞지않는 미성숙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필자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세상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작금과 같은 시대적 변화에 유연하지 못하면 옛 생각에만 사로 잡혀 있는 당사자만 괴로워집니다.
그러므로 나이 주장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나아가 자신이 불리해졌을 때 나이를 앞세워 억지를 부리는 무모함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윽박지르거나 억지를 부리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정당하며 타당한 주장을 하는 지부터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옳지 않거나 합리성이 없으면 인정하고 물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물러난다고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숙한 연장자로 존경받게 됩니다.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우리나라 축구팀을 4강까지 끌고 간 히딩크 감독은 우리나라 나이에 따른 서열이 선수들 기량을 발휘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분이 선수 사이에 있는 나이 서열을 파괴 한 것이 4강까지 가는데 한몫을 했다는 일화가 있지요.`
세상은 이렇게 변해갑니다. 옛날에 그랫다고 지금도 그대로 적용할 수 는 없는 것이지요. 자신이 길들려진 옛 시대의 문화를 새로운 시대에 적용하려면 분명히 충돌이 일어 날수 있습니다. 나이에 대한 문화적 상대성을 받아드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이에서 물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이를 내세워 그것으로만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이제는 모두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나이라는 형식적 권위보다 나이에 맞는 행동들로 실질권위를 회복해야할 시대입니다.
-형식권위와 실질권위-
우리는 ‘권위적이다’라는 말과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구분해야 합니다. 권위를 세분하면 형식권위와 실질권위로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이 되어 권위적이면 오히려 권위를 잃게되고 권위적이지 않고 겸손하면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됩니다. 나이 자체로는 결코 권위를 가질 수 없지만 나이든 사람의 품위는 권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이 자체를 형식적 권위와 나이다움이 통하는 권위를 실질권위라 칭하고 쉽습니다. 형식이 중요한가 아니면 내용이 중요한가 하는 것을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서 중요성을 우선을 따지기 전에 형식은 내용을 담기 때문에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형식권위와 실질권위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실질권위가 어느 정도 인지를 알아보려면 형식권위를 포기하면 금방 알게 됩니다. 실질권위를 갖고 싶다면 형식권위의 자리를 실질권위에게 양보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며 권위적이라고 하는 것은 실질권위의 적(敵)입니다.
형식은 내용을 담기 때문에 필요한 때에는 형식을 갖추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 신부들은 로만칼라를 합니다. 그 로만칼라는 사제의 형식권위를 지켜줍니다. 하지만 사복을 하고 있어도 사제다운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사제로서의 실질 권위이겠죠. 그래서 사제끼리 하는 말 중에서 “로만 칼라를 하고 할 수 없는 행위는 사복을 입고서도 하지말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제의 실질권위는 행위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사제의 성무집행은 그 자체로만도 사효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제가 행하는 모든 성사는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어서 사제이 인품과 성품에 관계없이 유효하고 사제에 의해 집행되는 성사자체로 실질권한이 있습니다.
말씀과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던 것(마르1,27)은 바로 그 분 자체에서 우러 나오는 실질권위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어떠한 형식 권위도 없었기 때문에 실질권위가 더 잘 드러난 것이 아닐까요. 즉 아버지라는 이름을 갖는 형식권위보다 아버지다움이라는 실질권위, 엄마라는 단어가 갖는 형식권위보다 엄마다움이라는 실질권위, 사제의 복장이 갖는 형식권위보다 사제다움 실질권위 등등 마찬가지로 많은 나이를 갖는 형식권위보다 나이든 사람으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실질권위를 추구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인의 나이에 따른 권위의 부여하는 문화와 제독 있어서 연장자나 노인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시대에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이에 따르는 형식귄위를 내려 놓고 어른다움이라는 실질권위를 찾을 때 노인으로서 존경받게 될 것입니다.
-물러나고 양보하지만 재산은 물려주지 말기-
노인이 되면 젊은이들로부터 무엇이든 양보받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반대로 노인이라도 양보받기 보다는 양보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노인들은 당연히 자리 양보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심한 경우 젊은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소리치고 야단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노인들도 버스요금을 내지만 젊은이들도 똑같은 비용을 내고 버스를 탑니다. 그러므로 노인이나 젊은이나 똑같은 버스이용 권리가 있습니다. 물론 노인은 약자이니 보호해 주는 것이 옳지만 그렇다고 젊은이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길 수는 없습니다.
지하철의 경우 만 65세 이상으로 경로우대증을 가지고 있으면 노인들은 무료로 지하철을 탑니다. 그러면 운행비용은 누가 부담합니까? 지하철 요금 뿐만 아니라 모든 복지혜택에서 노인들에게 지불되는 비용은 누가 부담하고 세금은 누가내는 것입니까? 이런 현실을 감안하여 노인들도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게 나이가 들라하면 양보하고 내려놓고 물려줄 수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노인이 되어도 재산만큼은 예외적으로 자녀들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말아야 돈 잃고 자식 잃는 불행을 초래하지 않습니다. 재산은 마지막까지 지키고 죽을 때에는 사회에 환원하면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혹시 자식들에게는 원망 받을지 모르지만 자식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것입니다.
만약에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에게 문제가있는 것이지 부모의 문제는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키워준 것으로 충분하지요. 자녀도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으면 모든 면에서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야지 부모에 의존하며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인이 되어 잘 살든 못 살든 스스로의 책임이고 자신의 몫이지 부모의 몫은 아닙니다.
그러한 점에서 캐나다 부모들이 교육태도는 지극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분들은 자녀가 대학을 가도 등록금을 비롯하여 생활비까지 모두 부담합니다. 그리고 직장생활하면서 경제력을 갖기 시작해도 재산을 물려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캐나다에서는 아주 대조적입니다.(사실 이것은 캐나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선진국에서 공통된 현상입니다.) 아이들이 커서 대학을 가게 되면 생활비 뿐만 아니라 등록금까지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대학을 가면 긴 방학 동안에 돈을 벌고 학기 중에는 번 돈으로 생활합니다.
등록금도 스스로 벌어서 해결하거나 융자를 내기 때문에 부모에게 손을 빌리지 않습니다. 융자는 졸업 후에 벌어서 갚으면 되기 때문에 부모도 등록금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들은 서로 독립적이고 의존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대체적인 인식입니다. 그래서 캐나다에서는 재산을 자녀에게 넘겨주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슬픈 이야기지만 한 노인이 자식을 감방에 넣고 나서 한탄하는 예를 적습니다. 그 분의 아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들이 아버지를 미국에 불렀다고 합니다. 남편을 미국에 보내고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도 없고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아서 전화를 하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남편과 통화 할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그분이 너무나 궁금하고 걱정이 돼서 미국으로 갔더니 남편은 아들과 함께 있지 않았답니다. 아들에게 아버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먼 곳에 가셨는데 같이 가자고 하더랍니다. 함께 차를 타고 하루 종일 인적이 없는 길을 달리다가 차에서 내려 도시락을 먹으며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아들은 차를 타고 사라졌답니다.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그 분은 인적 없는 외딴 곳에 혼자 버려진 것이지요. 어쩌면 남편도 그렇게 버려졌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사람과 차를 구경조차 못하다가 다행스럽게 차의 불빛을 발견하고 그 차 앞에서 두 팔을 벌려 세웠답니다.
영어는 전혀 못했지만 마침 여권을 가지고 있어 그 차의 운전자에게 여권을 보여주니 그 미국인이 공항으로 태워 주어 천신만고 끝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 분은 왜 아들이 그런 짓을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차지하려고 그랬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답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들은 재산을 차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귀국할 것이니 경찰에 신고해서 아들이 들어오면 체포해 달라고 요청을 했답니다. 만약에 사실이 아니라면 아들이 한국에 들어올 일이 특별히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아들은 한국에 들어왔고 이 모든 것이 사실로 밝혀져서 감옥에 있다고 하면서 울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곱게 늙기' 개념
우리는 누구나 늙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곱게 늙은 사람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바야흐로 고령화시대가 열렸고 늙어감이라는 불가피한 자연의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담론을 우리는 시작할 때입니다. 노인들은 연극으로 치면 인생 무대의 마지막 장에서 마무리가 감동적으로 끝난다면 공연 전체가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사람이 통상적으로 80대에 자연사 한다고 가정했을 때 아직은 죽을 때까지 갈 길이 남아 있는 필자로서는 곱게 늙는 것이 목표이고 그래서 이 책은 독자에게 어떠한 지침을 준다기보다는 필자가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것과 자기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은 분명히 다르므로 알고 있거나 자각하고 있는 것을 실제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자 역시 곱게 늙는 것을 목표로 자신을 향한 채찍의 의미로 서술하였음을 밝힙니다.
필자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함께 곱게 늙기에 동참할 것을 기대해 봅니다. 끝이 좋으면 과정마저도 모두 빛나는 것습니다. 나만의 인생이란 연극에서 모두의 갈채를 받으며 정리하는 일생이 되었으면 합니다.
-열린 마음-
어린이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서로 탐색하거나 따지지 않고 마음을 열수 있기 때문에 쉽게 친구가 됩니다. 그래서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린이들은 피부색이나 인종에도 관계없이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고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으며 일단 친구가 되면 친구와 자신 사이에 너와 나의 구분이 거의 없고 친구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마음은 차츰 닫히고 이에 따라 친구를 사귄다는 것도 쉽지 않게 됩니다. 어릴 때와 달리 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사귀는 것이 조심스러워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될 때까지 서로를 탐색하는 기간도 길어집니다. 이 세상에 내 맘에 드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점점 마음을 닫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지요.
물론 인간관계가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 관계없이 사람은 성숙해질 수 없습니다. 성숙한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 중에 하나는 자기 개방성의 정도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마음이 개방되고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대할 때 누구나 편함을 느낄겁니다. 반대로 마음을 열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들 중에는 미성숙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은 상처를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겠죠. 괜히 마음을 열었다가 상처를 입으면 자기만 손해라는 것이 은연중에 학습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도 완전할 수 없고 부족하고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고 죄 지을 수도 있는 존재지요. 이렇게 내 자신이 성찰할 수 있었던 것도 마음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받아들임-
문이 닫혀 있는 방이라면 그것을 열지 않고서는 그 누구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음이 눈도 마찬가지여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아무도 마음 안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닫으면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 자신 뿐입니다.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기 때문에 문을 열지 않아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가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마음을 열면 내가 세상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세상도 내 마음의 방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현실은 내가 마음을 닫은 상태에서 계속 거부하는 한 받아드릴 수 없는 실재이지만 마음을 열면 비교적 쉽게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나이 들어감을 받아드리기-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월이 가면 싱싱했던 것도 시들기 마련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을이 되고 잎이 떨어져야 새싹이 납니다. 인생도 그런 것이지요. 내가 늙어서 시들어가고 마침내 죽어야 후대 의해서이 세상이 아름답게 꾸며집니다. 기계도 오래 쓰면 녹슬고 고장나면 부속을 갈아주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면 약해지고 병들고 아픈 것이지요.
흰머리가 나는 것은 그런대로 봐줄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해서 몇 오라기남지 않은 듯이 보이면 괴롭습니다. 뿐만 아니라 눈도 침침해지고, 귀도 잘 안들리고, 이도 빠지며 관절의 연골도 다 닳아버려서 아프고, 기억력도 떨어져서 금방 하려고 했던 말이 떠오르지 않고, 도대체 한 두 가지가 아니니 노화 현상을 나열할수록 짜증스럽기 짝이 없겠지요.
만약에 우리가 삶의 현실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인상을 쓰고 다닌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 나이가 되도록 저렇게 속이 좁을까”라고 비난하고 추하게 바라볼지도 모릅니다.
시인 류시화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시를 썼지요. 제가 이해하기에는 인간의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빈 공간을 노래한 듯 합니다.
-부족함을 받아드리기-
고령화되면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가 독립성의 상실입니다.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않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생활에 있어서도 집안 청소 빨래, 취사문제도 젊어서는 쉽게 했던 일들이 혼자서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일로 분류됩니다. 또한 고령화되면 입맛을 잃으니 잘 만들던 음식의 맛도 제대로 내기 어려워집니다.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님의 생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가톨릭대학교 성신대 교정과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주교관에서 말년을 보내셨습니다. 그 주교관에서 추기경님께서는 특수 사목을 하시는 사제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어느날 추기경님께서는 교수 식당에 와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명절 등 주방직원이 출근하지 않을 경우 추기경님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교수 식당에 와서 식사를 하시곤 하셨습니다. 저도 교수 식당에서 추기경님과 함께 식사하면서 장난삼아 여쭤보았습니다. “추기경님 주교관 식당의 음식이 더 맛이 있나요. 교수식당의 맛이 있나요?” 그때 추기경님께서는 저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도 내 나이들 들어 보게,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네. 그냥 살기 위해 집어넣는 거지.”
이 말씀에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고령화 되면서 입맛을 잃게 된다는 것과 그러한 현실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품위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한 인간이 갖가지 이웃 도움이 필요한 이웃, 고통 받는 이웃은 그저 편하게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고 그 결핍을 채워 주려는 선의의 이웃 뜻을 받아 주어야 합니다. 독립성은 중요한 것이지만 ...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다 갖추고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것은 물질적인 것 말고도 내적인 문제도 그렇습니다. 성격이나 기질이 완전하다는 것 그 자체도 모호합니다. 그래서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받아드리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지요. 그럴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도 잘못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 받아드리기-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경험을 하지만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영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할 것같이 살아가지요. 그러다 보니 죽음은 현실로 받아드리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집에서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죽음은 늘 사람들 가까이 있었지만, 요지음은 대부분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죽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 곁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는 날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찾아올 죽음을 마치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요. 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생각해야 지금의 삶에 충실할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내가 낭비했을 지도 모르는 하루는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 간절히 살고 싶었던 하루라 생각하면 지금 나는 뭣을 할 수 있는지 좋은 생각들이 떠오를 겁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곧 죽는 것도 아니고 젊다고 마냥 오랫동안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우리는 언제까지 살게 될지 단 하루도 보장받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예외없이 찾아올 죽음을 평소에도 묵상하고 살아간다면 지금을 보다 성실하게 살수 있게 됩니다. 죽음을 받아드리는 연습을 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경건하고 거룩해 질수 있습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지만 통상적으로 노인들은 죽음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죽음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청년들 보다 죽음을 받아드리실 준비가 더 잘되어 있어서 죽음 앞에서 초연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누구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죽음이지만 받아드림이 더 유익하고 품위 있게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겠지요.
누구나 태어났으면 죽게 되어 있고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세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졌으며 나 역시 예외 없이 이 땅에서 물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열린 마음으로 죽음의 현실을 지금 받아드리면 현재의 삶에 충실해 질수 있고 마침내 그날이 오더라도 두려움이나 미련 없이 죽음을 쉽게 받아드리게 됩니다.
죽음을 미리 받아드리면 우리의 삶은 유한성에서 무한성으로 넘어가게 되지요. 비록 우리는 누구나 유한한 존재이지만 무한성을 상정하고 그 안에 내 자신을 던지면 모든 일에 있어서 연연함이 없이 초연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내 마음은 평화로워지고 표정도 좋아집니다.
-변화의 수용-
나이든 이를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기성세대란 무엇인가요? 필자는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기성세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제 자신이 변화에 유연하기 때문입니다. 기성세대는 변화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여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도하기 보다는 현상유지를 하고 싶어 합니다. 기성세대의 특징 중에 하나이지요.
그래서 과학기술 뿐 만 아니라 사고나 문화, 관습, 사고방식 등 등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변화를 원하지 않으면 소위 말하는 기성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변화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마음이 열려야 기성세대라고 일컫는 진부함에서 자유로워 집니다. 자 역시 처음부터 변화에 유연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화적 상대성-
(“50년 전만 해도 남녀칠세부동석이 당시의 윤리기준)
그런데 누나랑 이렇게 마주 앉아 있어도 무어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때의 잣대로 지금을 단죄할 수 있나요. 마찬가지로 지금은 여성흡연에 대하여 안 된다고 말하지만 50년 후에 아니면 지금의 여성흡연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는 흡연하는 세상이 되면 즉 비교적 너그럽게 용인하는 세상이 되면 그들은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문화의 상대성만을 말한 것입니다.
문화적 상대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많은 노인들이 자신의 문화적 절대성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흔히 문화의 절대성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흔히 어른 들, 특히 노인들 눈에는 젊은이들의 행태가 곱지 않게 보이기도 하지요. 한동안 젊은이들 사이에 힙합 바지가 유행했던 시절에 그 바지를 입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닐 정도로 너나 할 것 없이 입고 다녔습니다.
그때 부모들은 염려와 걱정을 섞어서 이구동성으로 아이들을 비난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 사이에서는 언제라도 문화적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문화를 지키려고 하고 새로운 세대는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만들어 갑니다. 이러한 문화적 충돌을 통해서 인류가 발전하는 겁니다. 이렇게 세상이 변화가 되고 발전하는데 변화가 두려우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에 대해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모든 존재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주장했지요. 예를 들자면 우리가 보는 강물은 똑같은 강물이지만 두 번 다시 똑같은 강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훗날 경험론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과는 반대로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우리 눈에는 모든 것이 변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세상너머에 영구불변하고 부동의 존재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앉는 ‘의자’는 여러 형태가 있고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지만 원래 ‘의자’라는 개념이 있으니 의자가 만들어지고 다양한 의자가 존재하며 세월이 가서 낡고 소멸한다고 하더라도 ‘의자’라는 영구 불변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훗날 합리론으로 이어집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첫째가 꼴지가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이 현실화 될 가능성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오 16장 21절 이하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름까지 고쳐 주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며 베드로에게 천상의 열쇄를 줍니다. 사실 베드로에게 엄청난 권한을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마테오 16장 21절 이하에서는 완전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나라, 너는 나의 걸림돌이다.”라고 호통을 치신 것이죠. 즉 하늘 높게 들려졌다가 바닥까지 내동댕이 처지고 첫째가 꼴찌되는 그러한 상황이 왜 일어났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을 동시에 예고하셨는데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변화를 싫어해도 혹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변화가 내키지 않아도 변화에 유연하고 적응하기 시작하면 비록 고령자라 하더라도 젊은 세대들이 동질감과 친근감을 느낄 수가 많을 겁니다. 사실 젊은이들과 고령자 사이의 이질감으로 친밀감의 간격은 점점커지고 멀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독자가 고령자라면 때로는 “젊은이들이 나이든 사람들과 놀아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울 때가 있지요”라고 말하는 고령자분들이 있지요. 젊은이들과 함게 어울리고 또 젊게 살기를 원한다면 곱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노인 자신의 철저한 변화와 친해져야 한다는 가치관입니다.
출처 : 곱게 늙기/ 송차선 신부 /샘터)를 읽으며(1)
출처 : 곱게 늙기/ 송차선 신부 /샘터
※ 본 저서의 이 글은 내용이 우리가 처한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여 감동적이어서 연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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