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의 삶을 통해 표출表出된 향토문학鄕土文學의 질서秩序
- 최일환의 작품집을 중심으로 -
최 재 환
1. 들어가며
아동문학이 문학의 한 부분이듯 동시童詩도 시詩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동시인童詩人도 시인詩人으로 불려 안 될 이유가 없는데도 구태여 동시인보다는 시인으로 불리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상位相의 자리 매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동문학이 아동을 대상으로 문학성을 지닌 예술이기 때문에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라야 무게가 실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아동문학도 인간적인 삶의 표출인대도 관심의 한계에 무게를 싣는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소설가가 동화를 쓰고 시인이 동시를 쓰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시나, 소설의 별도 등단절차를 밟지 않은 아동문학가가 소설을 쓴다거나 시를 쓴다면 어쩐지 뒤가 개운치 않다는 것이다. 또한 출신지出身誌(紙)가 자신의 자리매김에 확실한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이는 생각 나름이다. 그래서 아동문학을 하다가 갑자기 성인문학으로 변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자신의 위상位相은 작품을 통해 스스로가 지켜야 하는 영역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짧은 시간, 좁은 지면 등 극히 제한된 여건에서 한 성공한 문학인의 전 모습을 살펴보기란 쉽지 않다. 허나 그와의 상관관계相關係數가 가깝고도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필자가 모르는 부분이 많아 가장 객관적으로 드러난 부분과 교분이 잦던 시절의 단편斷片만을 대충 살펴 보고자 한다.
한 사람의 작가나 시인을 재조명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매우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작업이다.
게다가 필자는 전문 이야기꾼이 아니어서 자칫 지나진 주관이 오해의 소지가 될 수도 있고 또 잘못 건드리면 영원히 씻지 못할 오명汚名만 남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자료 소장의 한계성 때문에 객관성이 결여될 수도 있어 머뭇거리게 된다.
확실하고 객관적인 자료가 받쳐 주더라도 흡족한 평가를 받지 못하면 아쉬움을 남기게 마련인데 최일환의 경우 100세 시대로 치면 아직은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떴으니 꿈인들 마음껏 펼칠 기회가 있었겠는가.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는 최일환의 10권의 동시집 중 6권, 10권의 시집 중 9권이며 관련되는 몇 편의 논문과 같이 활동하던 당시 지면에 중심으로 발표했던 작품들이 고작이다.
이 중 맨 처음으로 그에게 기증 받았던 두 번째 동시집 ‘꽃씨봉투’와 몇 권의 시집을 중심으로 그의 생전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다.
2. 성장기의 환경
최일환이 타계한지도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1936년 6월 12일 해남군 산이면 대진리(원항리)에서 출생하여 2005년 8월 29일에 유명을 달리 했으니 이승에서 만 69년을 헤맨 셈이다. 그의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본인도 작품집마다 1936년 또는 1939년으로 엇갈리게 기록하고 있어 관심있는 사람들의 그의 실제 나이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던 것도 사실이다.
1930년대 후반 우리 농촌 실정은 자식을 낳으면 잔병치레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랄 뿐 출생신고나 취학 등에는 관심이 적어 등한시하기 마련이었다. 또 이 시기 전쟁이 잦아 성장하면 징용으로 끌려가기 때문에 고의로 출생 신고를 늦추는 경우도 있었고, 일에 쫒기다 보니 밀쳐뒀다가 한꺼번에 신고를 하는 관계로 형제간에 순서가 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므로 호적상 나이보다 실제 나이가 3,4 년, 많게는 5,6 년 차이가 나는 것이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필자의 생각으론 1936년생이 옳을 것 같다.
최일환의 경우 조상들의 교육열이 많았던 듯 호적상 나이가 아닌 실제의 나이 아홉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므로 지극히 정상적이었던 셈이다. 다만 호적상으로는 여섯 살이었으니 좀 빨랐다고나 할까.
그는 목포고등학교에 진학 1956년 졸업 후 서울 남대문 부근에 있었던 서울문리사범대학(현 명지대학교의 전신)에 유학, 문학의 터전을 닦는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 학생들의 인기 잡지였던 「학원」을 통해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이야기들 하고 있으나 같은 시대, 같은 분위기를 업고 말석에서 휩쓸리던 필자로서는 그에 대한 떠오르는 기억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그의 고교시절 목포고등학교에는 「목고木高」라는 교지와「잠룡潛龍」이 있었고, 문학동인지로 「밀꽃」「보리수」가 있어 인문 고등학교로써의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었지만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당시의 자료를 뒤적였으나 최일환이란 이름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당시 목포고등학교에는 최 시인의 한 학년 선배(4회)인 정규남이「학원學園」을 통해 전국 학생문단을 평정했었으며,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80주년 생신을 기리는 헌시 현상모집에 고교생 신분으로 「영원한 별」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여 크나큰 자극을 받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한 학년 후배(6회)로는 최하림, 윤종석, 정일진, 정영래 등 기라성 같은 후보시인들이 칼을 갈고 있었으니 문학에 대한 욕심이 남다른 최 선생이 어찌 구경만 하고 있었겠는가
대학을 졸업 후 고향의 초등학교에 둥지를 틀게 된 최일환은 아이들과 생활을 시작하면서 고교 시절 ,대학 시절에 갈고 닦았던 예술적 재질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으로 필자는 보고 있다.
3. 초기의 작품들
필자와 최일환 사이에는 뒤에 다시 밝히겠지만 몇 가지 유사점 외에 특별한 인간적인 인연은 없다.
1966년, 필자가 해남에 첫 발령 받은지 두 달쯤 되었을까.
교육청이 주최한 해남관내 초등학교 교사 국어과 웤샾이 읍내 서림 공원이라는 곳에서 있었는데 거기에서 처음으로 최일환을 만났었다. 이름은 지상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장학사들과도 가까운 듯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교단의 햇병아리인 나의 눈에는 자유분방한 그의 모습이 퍽 부럽기게 보였었다.
그후, 필자가 해남 황산중에서 신설 목포 청호중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1971년이었고 최일환은 이 무렵 영흥중에 둥지를 틀기 시작하지 않았었나 싶다. 이 무렵부터 소위 최일환의 목포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최일환의 두 번째 동시집 「꽃씨 봉투」가 나온 것은 1973년이었다. 그러니까 동시집「푸른색 웃음이」(배영사)를 상재한 5년 뒤였다. 여기에서 잠시 등단작「선생님이 나를」과 「꽃씨 봉투」표제시를 잠시 함께 보면서 넘어가자.
선생님은 나를
예뻐할까 미워할까
선생님댁 심부름은
나만 시키시고
하기 싫은 수학문제
나만 시키고
어쩌다 답이 틀리면
좌악 입을 물다가
휙 돌아 싱긋 웃고
선생님은 나를
예뻐핳까 미워할까
숙제 않은 날은
나도 함께 벌을 받고,
-63, 아동문학 추천작품 「선생님은 나를」전문
아기 방에 걸어놓은
꽃씨 봉투는
주고 받은
주소 없이
꽃이름 하나뿐
채송화, 봉숭아, 분꽃, 맨드라미.
어느 곳에
가려나
기다리다가
고운 아기
좋아서
꼬박꼬박
잠이 든
고운 우편물.
곱고 작은
씨알들의
노랑, 분홍, 빨강 ,
보라색 고운 꿈에 아기방은
꿈 얘기.
소곤소곤
작은 우체통
창문
밖은
펑펑
흰 눈 날려도
아가는
꽃밭속을
꽃밭 속을
날아다닌
귀여운 나비.
-표제시 「꽃씨 봉투」 전문
누구나 등단시기 작품들의 문학성이 우수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므로 최일환의 초기 작품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기 위해 두 편을 인용했다. 앞의 동시는 1963년 배영사에서 발행한 ‘아동문학’ 6집에 조지훈 선생의 추천을 받은 최일환의 문단 데뷔작이며, 뒤의 작품은 1973년 한 얼문고에서 출간한 그의 두 번째 동시집「꽃씨 봉투」의 표제 시이다.
최일환은 자신의 약력을 밝힐 때마다 ‘63년 아동문학 추천’이란 말 뒤에 ( )속에 ‘조지훈 선’이란 말을 넣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의 중학교 제자였던 전 ‘남도일보’ 김선기 기자는(현재 강진 시문학파 문학관 관장) 당시 상황을 훗날 이렇게 적고 있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그러하듯 최일환도 등단작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여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문단의 사정은 별반 달라진 게 없지만, 1960년대는 유독 중앙 문인과 시골 문인(?)의 차별은 오늘날 보다 더욱 심했다. 최일환은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1963년 ‘아동문학’6집에서 ‘청록파 시인’ 조지훈 선생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온 터라, 그의 자존심은 대단했을 법하다. 당시 조지훈 선생은 심사평에서 “‘선생님은 나를’은 깔끔하고 재치있는 작품이다. 선생님이 나를 사랑하는 지 미워하는 지를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심의 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선생님은 나를 예뻐할까, 미워할까’를 앞뒤에 반복하면서 끄트머리 둘째 연에 놓은 솜씨가 대단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시절 아동문학 작품으로 등단할 수 있는 길은 약간의 어린이 잡지와 4,5개의 신문사에서 연말에 실시하는 신춘문예 당선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해마다 모집하는 것이 아니고 격년제로 모집하는 경우가 많아 실로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이런 기미를 눈치 챈 몇몇 출판사는 고도의 상술을 발휘 홍보용 비정기 간행물을 통해 독자 작품을 문단 등단인양 머리를 굴리게 된다.
뒤에 초등학교 수업 보조자료인 새교실, 교육자료 수업연구 등이 여기에 동조하였었고, 최일환 시인도 그의 작품집에서 아동문학 이후 새교실, 어린이 등의 추천을 받았음을 스스로 털어놓고 있다.
참고로 좀 더 자세히 자료를 밝히자면 ‘63;아동문학(조지훈 선), ’65;어린이 (김요섭 선), ‘67:새교실 (이원수 선),
그리고 ‘68:새한신문 문예현상까지 섭렵하였으니 욕심이 지나쳤을까. 이런 처신은 뽑아준 선자選者는 물론 실시했던 기관에도 큰 결례를 범한다는 사실을 후학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최일환은 때 묻지 않은 시골 선비다. 천생天生 시골 양반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작품들과 언행을 통해 이런 것들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
앞에서 등단 과정에 대한 귀 아픈 이야기를 했지만 이는 최일환의 순수한 선비 정신이 불신시대의 격랑을 해쳐가는 가슴 아픈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를 허물이 아닌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순수하기에 남 앞에서 떳떳할 수 있었으며 자신을 앞세워도 허물이 되지 않았다.
읽을 꺼리가 부족하던 시절, 그는 일과가 끝나면 바로 시내 책방으로 향했고 가판대 앞에 매달려 매달 발행되는 월간지를 뒤적이며 탐독하는 걸 잊지 않았다. 아는 친구나 후배들의 작품을 보면 바로 메모 했다가 소식을 알리고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필자가 ‘75년 ‘소년중앙(중앙일보)’ 동시가 당선 된 것도, ‘76년 ‘시문학’에 추천된 것도 81년 ‘제13회 한정동 아동문학상’에 뽑힌 것도 최일환이 전해 주어 알게 되었었다. 이후 목포문협 활동을 통해 더욱 가까워졌음은 물론, ‘청호문학’ 창립과 전남아동문학가협회 활동으로 붙어 지내다시피 했었다.
이 무렵 그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종상, 신현득, 엄기원, 김완기, 이상현, 김신철, 문삼석, 박종현, 김삼진 등과 교단 문학을 조직, 기염을 토하고 있었고 이를 발판으로 ‘세종아동문학상’ 기대하는 물밑 작업도 한창이었다.
4. 남도 농민문학 선구자
최일환은 문학적 경력으로 볼 때 중앙문단을 기웃거렸음직도 하지만 크게 욕심은 부리지 않았다. 시골에서도 열심히 쓰면 서울에서보다 더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고향인 해남과 목포를 오가면서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천혜의 환경을 서서히 형상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동문학과 성인문학을 넘나들었다. 다시 말하면 동시를 쓰면서 시를 쓰는 신장개업의 새 주인이 된 것이다. 서울로 터전을 옮기지 못하고 목포를 중심으로 활동무대를 다진 그는 지방 문단정치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작품의 질을 걱정하기에 앞서 자리(?)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이 어쩌면 훗날 지우기 어려운 아쉬운 흔적으로 거치적거리기도 했겠지만 그는 특유의 넉살로 받아 넘겨버리는 것이었다.
김선기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었다.
그가 전남문단 발전에 바친 열정은 그리 길지 않았던 삶에서 엿볼 수 있다. 맥이 끊겼던 ‘목포문학’을 1984년 복간한 것을 비롯해 청호동인·목포 시문학회·전남시인협회창립, 전남시문학상 제정 등은 그가 향토문단에 남긴 괄목할만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뿐 만 아니라, 제11회 세종아동문학상을 비롯 제23회 강소천 문학상, 제6회 자유시문학상, 제32회 전남도문화상, 제5회 남농예술상 등의 수상에서 보듯 시인으로서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았음도 확인된다.
특히 그의 마지막 시집이 되어버린 제10시집 ‘떠나가기’(한림 刊)는 먼저 보낸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행간마다 절절히 녹아 읽는 -이들의 가슴을 저며냈다. 40여년간 함께 살던 아내를 떠나 보낸 시인의 마음이야 오죽했겠는가. 그토록 사무치는 그리움을 풀고 아내 곁에 누웠으니, 그에겐 더 없는 행복일수도 있겠다. 이제 그는 가고 없고 앉았던 자리엔 그의 노래가 담겨진 동시집 10권과 시집 10권, 수필집 1권만이 덩그렇게 놓여있다.
-남도일보 2005.9.2
최일환의 첫 시집이랄 수 있는 「부뭇골 뜸북새」를 보면 그는 모든 정신적인 매듭들을 용해, 사랑으로 육화 시키고 이를 시라는 형태를 빌어 방출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는 다름 아닌 시에 있어서의 정신적 본질이며 사랑의 구현 내지는 승화이며 그의 기독교적 구도의 실천 양식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나이 쉰 살 될 때까지
남의 집 머슴으로
농사만 지어 온다네. 해남 양반은-
장가 간 날 쫒겨 와
자식도 없고 글자도 모르고
아는 것은 농사일 뿐
눈만 뜨면 가는 곳은
부뭇골 들판이라네.
...........................
(하략)
-부뭇골 뜸북새 1, 2연
전형적인 농부생활의 단면을 형상화하고 있다. 요즈음이야 머슴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다가오지만 5, 6십 년대까지만 해도 부잣집 농사를 지어 주고 품삯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아예 쥔 집에 기거하면서 식구들과 똑 같이 생활하면서 궂은 일은 도맡아 해결하며 새경을 받는 사람들을 머슴이라고 했다. 남도의 유배권에 들었던 해남도 반상의 신분 구분이 분명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러기에 빌붙어 사는 가난한 민초들의 삶의 모습이 불을 보듯 뻔하지 않는가.
최일환의 이러한 향토정신은 다분히 피해의식으로 갈앉고 있다. 토속적인 내적 아픔을 원망과 원한, 한숨과 한탄 등의 한恨 의식으로 승화시켜 남도적 토착정신으로 감정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새벽부터 등에 업혀
논둑길 밭둑길에서
온 종일 온 종일 시달린 지게
일곱 살부터 지게질 시작해서
등뼈가 굽어진 해남 양반이
지게보다 키가 작은 해남 양반이
무거운 짐 가득 지고
올해만 참자 올해만 참자
지겟다리 딱딱 작대기로 때리면
구구구 꾹꾹 속지 말아라
꾹꾹 구구구 속지 말아라
산비둘기 포르르 울며 날아간다
-「지게」 전문
지게는 우리 농촌의 유일한 운반 수단이었다. 그러기에 그 속에 가난한 농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었다. 요즈음은 경운기나 트럭이 운반을 맡고 있지만 옛날 우리 농촌은 부잣집이라도 농산물을 이동하자면 머슴들이 지게나 소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주인에게 속아 매년 해를 넘기는 머슴들이 지겟다리를 두들기며 내년의 좋은 조건을 기대하는 마음이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행위는 당시 우리 농촌의 참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토록 최일환은 농촌의 피해자로써 또 농민의 대변자로써 작품을 통해 가진 자의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 즉 ‘구구구 꾹꾹’ 비둘기의 의성어를 통해 “속지 말아라‘는 싯구처럼 무엇엔가 속아만 살아 온 농민들의 저주의 대상이 해가 가도 결국 풀리지 않는 저항적 감정을 부추기는 싯구가 그의 시마다 서려 있음을 간과 할 수 없다.
즉 농민의 삶과 애환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독자에게 보다 짙은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진정한 농부이기도 한 것이다.
5. 그리스찬 문학의 구심점
최일환은 기독교인이다. 그는 향리에 원항교회를 세워 장로로써 주일마다 배를 타고 고향 교회에서 종교생활을 했었다.
최일환은 늘 같은 생활을 되풀이 하면서도 과거보다는 현재를 중시하며 바쁘게 서두는 법이 없었다. ‘첫배를 놓치면 다음 배를 타지. 뭐가 그리 바뻐-’ 늘 듣던 이야기다.
가슴 가득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으며 털털하게, 그리고 정겨운 사투리로 좌중의 관심을 끌어 모으며 항상 분위기를 즐겁게 해주는 시인이었다. 맺고 끊음은 약하지만 그건 마음의 여유요 너그러움이었다.
삶의 진실을 중요시한 최 시인은 매사를 앞장서서 몸소 실천하는 부지런을 빼 놓지 않았다.
꼭 그 새벽 네 시쯤이면
불끈 일어난다.
(...........중략)
새벽 그 시간에
이 무서운 힘을 준다는 것
새벽 그 시간에
누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
삼십여 년의 이 버릇을 지키는 것은
아- 한 분 오직 그에게
첫 시간부터 감사하다는 마음
-‘새벽 그 시간에’의 일부
겨울 새벽에
아내와 함께 교회 간다
우산 하나 속에 둘이서 나란히
비는 봄비처럽
꽉 잡은 손이 반짝이고.
-‘봄비’의 1, 5연
앞의 인용 시를 통해 최 시인의 신앙심을 가늠할 수도 있다. 최 시인은 새벽 네 시만 되면 아내나 시계와의 약속이 없는 대도 분명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신이 놀랄 정도로 습관이 몸에 밴 것은 그만큼 믿음이 튼실하게 굳어졌기 때문이다. 항상 절대자에게 감사하고 그 감사하는 마음을 몸으로 실천하는 그의 신앙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것이다.
뒤의 인용시 ‘봄비’의 첫연과 마지막 연이다. 자신이 세운 시골 예배당인지 아니면 도시의 거창한 교회인지는 모르지만 아내와 손잡고 우산 속에서 속삭이며 교회에 가는 광경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시골 내 고향에 주님의 몸된 성전을 세우려 몸부림쳤다. 시골은 분명 하나님의 작품이요, 도시는 인간의 작품이라 스스로 믿고 있는 나는 바닷가 마을의 솔바람 부는 언덕에 흙벽돌 로 조그만 교회당을 세웠다. 도와주는 사람은 철없는 어린이들 몇과 바보스런 청년 몇 명 뿐이었으나 놀랄만큼 하나님의 힘 입어 감격스런 일을 맺은 일이 있었다. 이 시집은 그때의 일을 더듬으며 감사함이 주축을 이룬다.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그 은혜의 감사함 속에서 살아오고 있다. 약하고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 편에 서서 힘을 주시고 강하게 붙잡아 주신 하나님을 어찌 손잡고 나가지 않을 수 있으랴. 시골에 교회를 두고 도시로 탈출한 내 생활에 그 시골 하나님이 내내 살아 움직여 주심을 감사한다.
「시골에서 하나님은」에 실린 최 시인의 머리글이다
힘없는 어린이, 청년들을 독려하면서 흙벽돌을 찍어 예배당을 세우는 모습을 그려 본다. 여의치 않은 환경을 믿음 하나로 극복하면서 땀을 흘리는 과정을 먼 산 보듯 바라만 보는 주민들의 안타까운 모습도 떠 오른다.. 하는 일이 모두 순탄하기만 하다면 거기에 참 신앙이 함께할 수 있겠는가. 최 시인은 갖은 어려움을 끝까지 인내하면서 고향 언덕에 희망을 선사한 참 신앙인이요 시인이다.
6. 나가며
한 두 편의 작품을 들어 한 시인의 전체 모습을 살핀다는 건 처음부터 무리다.
더구나 객관적으로 논의 된 사실이 없고 또 걸맞는 자리매김이 분명치 않는 사안이라면 화두를 끄집어내기가 매우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많은 시간을 두고 하나씩 밝혀 나가야 할 것이고,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도 보다 정확한 검증을 통해 조심스럽게 평가되어야 할 줄 안다.
얼마 전, 인공지능의 승리로 막을 내린 인간과 알파고의 세기의 지능 대결이 전 세계인의 관심속에 열렸었다. 그러나 많은 인류는 승자인 알파고가 아닌 패자인 인간에게 더욱 열렬한 박수를 보냈었다.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도 있을 수 있고, 실패도 있을 수 있다는 가장 평범한 진리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과 여유와 인내와 겸손을 살필 수 있어 더욱 뜻이 깊었지 않았나 싶다.
만약 인간의 승리로 끝나더라면 ‘인간이 만든 기계인데 당연하지! 했었을 것 아닌가? 그렇다고 인간이 만든 자동차나 비행기보다 인간이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인간은 가장 힘들 때 진실이 드러난다고 한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선 그만큼 힘이 든다는 얘기도 된다.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알파고에게 빼앗은 일승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 최일환 시인과 필자 사이에 특별한 인연은 없다.
혹자或者는 필자와 최 시인 사이를 몇 가지 공통점을 들어 오해하는 모양이나 같은 시대에 나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에 학교를 다녔다는 것, 그리고 교단과 문학을 겸업(?)했다는 것, (물론 처음엔 초등계에서 뒤에 중등계로 진출한 것까지) 또 이름의 유사성 때문에 많은 억측을 낳았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같은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혈연관계를 물어오는 이도 많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점 밝혀 둔다.
다만 한 작가의 삶의 궤적軌跡이나 작품의 시비是非를 따지고 가리기에 앞서 뒤 세대를 사는 젊은 문인들의 창작생활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을까하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많은 분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고민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남기며 이야길 접는다.
<참고자료>
..꽃씨봉투, 최일환1973, 한얼문고)
.부뭇골 뜸북새, 최일환(1983, 세종출판사)
.시골에서 하나님은, 최일환1990,종로서적)
.새벽 그 시간에, 최일환(1999, 한림)
.한국현대아동문학사., 이재철(1978, 일지사)
.한국현대아동문학작가,작품론, 이재철 편(1997, 집문당)
.광주 전남 문학변천사1997, 한림)
.목포 100년의 문학(1997, 백년회)
.광주·전남 문학통사(1911, 지역문학인협회)
.남도일보(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