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의제문과 무오사화(1498) [26회 25번]
정답: ⓵
* 조의제문과 무오사화(1498)
무오사화(1498): 성종 대 영남 사림의 대표적 인물인 김종직이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항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초나라 의제를 추모하는 글. 마치 세조에 의해 죽은 단조을 빗대는 듯이 보임)이,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 4년)에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로 실록에 작성한 것을 유자광, 이극돈의 훈구세력이 문제 삼아 김종직(부관참시), 김일손 등의 사림파를 처형한 사건이다. 그 결과 향사례, 향음주례를 주관하던 사림들의 기구가 혁파되었고, 김종직 문인으로 구성된 영남사림이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⓶ 기축옥사(1589, 정여립 모반 사건 관련 동인에 대한 옥사)의 주역 서인 정철(세자 건저 문제로 몰락)의 처벌을 놓고서 1591년에 강경론인 북인(조식 계열)과 온건론인 남인(이황 계열)으로 분화되었다.
⓷ 기사환국(1689): 남인이 원자(장희빈 소생)를 정함에서 반대한 서인을 몰아내고 집권하였으며, 송시열 등 사사되었으며 중전인 인현왕후가 폐위되었다.
⓸ 경신환국(1680): 유악(기름먹인 장막) 사건을 빌미로(실제는 도체찰사 문제) 서인이 남인(허적, 윤휴 등)을 몰아내고 집권.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서인의 노론(강경론), 소론(온건론) 분화
갑술환국(1694): 인현왕후(서인 옹호) 복위와 장희빈 강등 관련, 남인이 쫓기고 서인(노론과 소론) 재집권
⓹ 기묘사화(1519): 중종 때에 현량과로 진출한 진출한 조광조를 필두로 하는 신진세력들의 급진개혁(훈구파 위훈삭제, 현량과 실시 등)과 관련하여, 남곤, 심정 등의 훈구 세력이 ‘주초위왕’ 모략으로 조광조, 김정 등의 사림이 처형된 사건. 사림에 의해 추진된 소학 실천운동이 향약과 함께 한 때 폐지되었다.
(2) 조의제문과 무오사화(1498) [29회 20번]
정답: ①
* 조의제문과 무오사화(1498)
무오사화(1498): 성종 대 영남 사림의 대표적 인물인 김종직이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항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초나라 의제를 추모하는 글. 마치 세조에 의해 죽은 단조을 빗대는 듯이 보임)이,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 4년)에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로 실록에 작성한 것을 유자광, 이극돈의 훈구세력이 문제 삼아 김종직(부관참시), 김일손 등의 사림파를 처형한 사건이다. 그 결과 향사례, 향음주례를 주관하던 사림들의 기구가 혁파되었고, 김종직 문인으로 구성된 영남 사림이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② 을사사화(1545): 명종 때에 왕위 계승을 놓고 외척인 소윤(윤원형)과 대윤(윤임)간의 권력 싸움과, 양편 모두에 사림이 가담하여 큰 피해를 받았다.
③, ④ 기묘사화(1519): 중종 때에 현량과로 진출한 진출한 조광조를 필두로 하는 신진 사림들이 급진 개혁(훈구파 위훈삭제 등)과 관련하여, 남곤, 심정 등의 훈구 세력이 ‘주초위왕’ 모략으로 조광조, 김정 등의 사림이 처형된 사건. 사림에 의해 추진된 소학 실천운동이 향약과 함께 한 때 폐지되었다.
⑤ 기축옥사(1589, 정여립 모반 사건 관련 동인에 대한 옥사)의 주역 서인 정철(세자 건저 문제로 몰락)의 처벌을 놓고서 1591년에 강경론인 북인(조식 계열)과 온건론인 남인(이황 계열)으로 분화되었다.
(3) 조광조 일파(기묘 사림)의 개혁 주장 [20회 26번]
정답: ③
* 조광조 일파(기묘 사림)의 개혁 주장
소격서 혁파, 천거(현량과), 훈구 공신의 위훈 삭제 주장 등을 통하여 조광조 일파 사림인 것을 알 수 있다.
15세기 중반 이후,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 사족이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을 사림이라 부른다. 이들은 훈구 세력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한 데 비해,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히던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훈구 세력을 견제하였다. 김종직과 그 문인이 성종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전랑과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 세력을 중용하였기 때문에,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성종을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사림 세력의 분방한 언론 활동을 억제하였다. 이에 따라, 두 차례에 걸친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겪으면서 영남 사림의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연산군은 이후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 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은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위훈(僞勳) 삭제, 소격서의 폐지,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기묘사화, 1519).
그 뒤 중종이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하기도 하였으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외척끼리의 권력다툼에 휩쓸려 사림 세력은 또다시 정계에서 밀려났다(을사사화, 1545). 그러나 사림 세력은 서원과 향약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4) 기묘 사림의 대표적 인물 조광조(1482~1519) [26회 27번]
정답: ⓶
* 기묘 사림의 대표적 인물 조광조(1482~1519)
중종 반정(1506) 후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정암 조광조(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사림의 학통이 이어짐)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기묘사화: 1519).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은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위훈(僞勳) 삭제, 소격서의 폐지, 향약의 시행,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⓵, ⓸ 조선 중기 대표적 성리학자인 이황(1501~1570)과 이이(1536~1584)의 사상은 군주의 성학에 대한 입자에도 차이가 있어, 이황의 성학십도에서는 군주 스스로가 성학을 따를 것을 제시한 반면, 이이의 성학집요에서는 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⓷ 송시열(1607~1689): 서인(노론)의 산림 지도자로서 효종 즉위 직후 기축봉사(1649)를 올려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북벌 운동을 주도하였고, 현종 때의 예송 논쟁에서는 신권을 강조하는 상복설(1년, 9개월)을 주장하였다. 남인에 대한 강경한 입장인 노론의 영수였다.
⓹ 조선 창건의 1등 공신인 급진파 사대부 정도전(1342~1398)은 유교적 통치 규범을 성문화하기 위한 법전의 편찬에 힘써 조선경국전(1394)과 경제문감(1395)을 편찬하였고, 민본적 통치 규범을 마련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5) 위훈삭제와 기묘사화 [27회 17번]
정답: ④
* 위훈삭제와 기묘사화
15세기 중반 이후,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 사족이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을 사림이라 부른다.
김종직과 그 문인이 성종 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전랑과 3사의 언관직(언론과 문한 담당)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 세력을 중용하였기 때문에,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성종을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사림 세력의 분방한 언론 활동을 억제하였다. 이에 따라,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초가발단이 되어 발발한 무오사화(1498),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이 원인이 되어 발발한 갑자사화(1504)를 겪으면서 영남 사림의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연산군은 이후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은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위훈(僞勳) 삭제, 소격서의 폐지,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기묘사화, 1519). 그 뒤 중종이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하기도 하였으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외척끼리의 권력다툼에 휩쓸려 사림 세력은 또다시 정계에서 밀려났다(을사사화, 1545). 그러나 사림 세력은 서원과 향약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① 이방원(태종)은 1차 왕자의 난(1398)에서 세자 방석을 후원하며 재상 중심의 정치를 시도하는 정도전을 제거하였다.
② 세조 때(1456)에 단종 복위 운동에 집현전 출신 자들(성상문, 박팽년 등)이 대거 연루되어 처형되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이듬해 처형되었다.
(6) 을사사화(1545) [23회 17번]
정답: ③
* 을사 사화(1545)
조선 중기에 훈구와 사림과의 갈등으로 4차례의 큰 사화(士禍)가 있었다.
무오사화(1498):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초를 제자인 김일손이 실록에 작성한 것을 유자광, 이극돈의 훈구세력이 문제 삼아 김종직(부관참시), 김일손 등의 사림파를 처형한 사건. 그 결과 향사례, 향음주례를 주관하던 사림들의 기구가 혁파되었고, 김종직 문인으로 구성된 영남사림이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갑자사화(1504): 연산군의 모친인 폐비 윤씨 사건을 둘러싸고 궁중파(임사홍, 신수근)가 성종의 유지를 주장해 폐비복위를 반대한 잔존 사림(윤필상, 김굉필, 정여창)과 훈구파 중 부중파(한명회, 정창손) 등을 처형한 사건
기묘사화(1519): 중종 때에 진출한 조광조의 급진개혁(훈구파 위훈삭제, 현량과 실시 등)과 관련하여, 남곤, 심정 등의 훈구 세력이 ‘주초위왕’ 모략으로 조광조, 김정 등의 사림이 처형된 사건. 사림에 의해 추진된 소학 실천운동이 향약과 함께 한 때 폐지되었다.
을사사화(1545): 명종 때에 왕위 계승을 놓고 외척인 소윤(윤원형)과 대윤(윤임)간의 권력 싸움과, 양편 모두에 사림이 가담하여 큰 피해를 받은 사건. 윤임과 정희등, 박광우 등의 사림이 처형당하였다. 이후 낙향한 사림은 학문교육에 몰두하여 서원과 성리학의 발달하였다.
⑤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그 동안 향촌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 오던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은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명종 때 이후 정권에 참여해 온 기성 사림(심의겸 중심)은 척신 정치의 과감한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반면에, 명종 때의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진 사림(김효원 중심)은 원칙에 더욱 철저하여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특히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김효원과 심충겸)와 공론을 둘러싸고두 세력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기성 사림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고,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동인이 형성되었다(1575).
(7) 을사사화(1545) [30회 18번]
정답: ①
* 을사사화(1545)
15세기 중반 이후,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 사족이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을 사림이라 부른다.
김종직과 그 문인이 성종 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전랑과 3사의 언관직(언론과 문한 담당)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그러나 사림을 후원하던 성종 사후 연산군(무오.갑자)과 중종(기묘), 명종(을사) 대에 사림이 훈구 세력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받는 4차례의 큰 사화가 일어났다.
무오사화(1498):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초를 제자인 김일손이 실록에 작성한 것을 유자광, 이극돈의 훈구세력이 문제 삼아 김종직(부관참시), 김일손 등의 사림파를 처형한 사건. 그 결과 향사례, 향음주례를 주관하던 사림들의 기구가 혁파되었고, 김종직 문인으로 구성된 영남사림이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갑자사화(1504): 연산군의 모친인 폐비 윤씨 사건을 둘러싸고 궁중파(임사홍, 신수근)가 성종의 유지를 주장해 폐비복위를 반대한 잔존 사림(윤필상, 김굉필, 정여창)과 훈구파 중 부중파(한명회, 정창손) 등을 처형한 사건
기묘사화(1519): 중종 때에 진출한 조광조의 급진개혁(훈구파 위훈삭제, 현량과 실시 등)과 관련하여, 남곤, 심정 등의 훈구 세력이 ‘주초위왕’ 모략으로 조광조, 김정 등의 사림이 처형된 사건. 사림에 의해 추진된 소학 실천운동이 향약과 함께 한 때 폐지되었다.
을사사화(1545): 명종 때에 왕위 계승을 놓고 외척인 소윤(윤원형)과 대윤(윤임)간의 권력 싸움과, 양편 모두에 사림이 가담하여 큰 피해를 받은 사건. 윤임과 정희등, 박광우 등의 사림이 처형당하였다. 이후 낙향한 사림은 학문교육에 몰두하여 서원과 성리학의 발달하였다.
(8) 동, 서 붕당의 발생(1575) [17회 고급 20번]
정답: ③
* 동, 서 붕당의 발생(1575)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그 동안 향촌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 오던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은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명종 때 이후 정권에 참여해 온 기성 사림은 척신 정치의 과감한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반면에, 명종 때의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진 사림은 원칙에 더욱 철저하여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두 세력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김효원을 비롯한 신진 관료가 중심이 되어 동인이 형성되었고, 심의겸 비롯한 기성관료가 중심이 되어 서인이 형성되었다.
붕당은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김효원과 심충겸)와 공론을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것에서 비롯되었다(1575).
이조 전랑은 삼사의 관리에 대한 인사를 좌우할 수 있었고, 스스로 자기 후임자를 추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인 삼사의 관리들은 언론을 통해 이조 전랑을 지원하였다. 이처럼 언론기관과 이조 전랑은 붕당정치 운영에서 공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 자리를 둘러싸고 붕당 간의 대립이 심해졌다.
동인은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신진 세력이 참여하여 먼저 붕당의 형세를 이루었다. 반면에,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 가담함으로써 비로소 붕당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후 붕당은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에 따라 결집되어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9) 사림의 동.서 분당(1575) [18회 고급 19번]
정답: ①
* 사림의 동.서 분당(1575)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그 동안 향촌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 오던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은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명종 때 이후 정권에 참여해 온 기성 사림은 척신 정치의 과감한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반면에, 명종 때의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진 사림은 원칙에 더욱 철저하여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두 세력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김효원을 비롯한 신진 관료가 중심이 되어 동인이 형성되었고, 심의겸 비롯한 기성관료가 중심이 되어 서인이 형성되었다.
붕당은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김효원과 심충겸)와 공론을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것에서 비롯되었다(1575).
② 중종 반정(1506) 후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1519).
③ 을사사화(1545): 명종 때에 왕위 계승을 놓고 외척인 소윤(윤원형)과 대윤(윤임)간의 권력 싸움과, 양편 모두에 사림이 가담하여 큰 피해를 받았다.
④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정치 집단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 자체도 불안해졌다. 이에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국왕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이 제기되어, 숙종(1674~1720) 때에는 인사 관리를 통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환국 초래), 영조(1724~1776)는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완론 탕평을, 정조(1776~1800)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준론 탕평책을 추진하였다.
⑤ 세도정치기(1800~1863)에는 권력 구조에 고위직만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고, 그 아래의 관리는 언론 활동 같은 정치적 기능을 거의 잃은 채 행정 실무만 맡게 되었다.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 기구로 자리잡았으며, 유력한 가문 출신의 몇몇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