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107)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본문 : 눅 17:20-24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신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눅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대부분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마태는 ‘하늘나라’ 즉 ‘天國’을 주로 사용).
그런데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20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질문의 동기를 헤아려봐야 합니다.
오래전부터 유대민족에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들의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단2:44).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질문하였지만,
사실 이 질문은 그 당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질문이며,
모든 유대인이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
페르시아를 거쳐 로마에 이르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그래서 모든 유대인은 빨리 메시아가 나타나서
그들을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워줄 것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제2의 다윗 같은 존재입니다.
과거 다윗 왕 시대에 이루었던 영광스러웠던 이스라엘 왕국처럼,......
그들을 압제하는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유대인만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방식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보다는.....
과연 ‘그 나라가 언제 올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보입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제자의
마지막 질문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행1: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나라’를
이스라엘의 주권 회복으로 협소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도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을까요? <7-8>
7절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7-8).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정치적으로 왕국으로 이스라엘 땅에 국
한하여 오는 현세적인 나라가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끝까지, 모든 민족에게 전해져야 할 구원의 복음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 -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20절b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게’라는 말의 희랍어 원어 ‘파라테레시스’는
‘면밀히 관찰한다’는 뜻입니다. 즉 아무리 ‘주의 깊게 관찰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지금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을 위한 지엽적이고 정치적인 ‘현세적인 나라’가
아님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 눈에 보이는 국가 권력처럼 권력과
군대와 영토와 많은 사람으로 세워지는 세상 나라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정의하여 주십니다.
21절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공간에 위치하는 성격의 나라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정하고 제약된 공간이 아닙니다.
그것이 심지어 선택받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 공간을 초월하며 하나님의
통치가 닿는 곳은 그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 하나님의 통치가 닿는 곳이
곧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눅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안에’라고 번역된 전치사 ‘엔토스’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먼저 개역 성경은 ‘안에’(within you)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디 외적인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 속사람 안에서(within)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바울도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말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내 마음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이해입니다.
그런데 새번역 성경은 ‘가운데’(among you)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바리새인들과 대화하고 있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안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들어왔으며......
점차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점점 확장되어 나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 해석은
결국 같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나라입니다.
‘이미’(already) 시작되었지만 ‘아직’(not yet) 완성된 나라는 아닙니다.
그 나라는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예수님이 시작하셨고,
장차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겨자씨와 같이 지금도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 사람들 마음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여 그 삶을 변화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가운데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계속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의 날을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면 마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나)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지극히 추상적인 나라로만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며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22절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메시아 호칭’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인자의 날’은 예수님께서 장차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심판주로 재림하시는 그날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이미 내 안에서 시작되었지만,
‘때가 이르면’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날이 바로 ‘인자의 날’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은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고 예언하십니다.
분명히 ‘인자의 날’은 올 것인데 너희는(제자들은)
그날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을 ‘단 하루라도 보고 싶어 할 것’이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박해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당하는 박해와 핍박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단 하나였습니다.
‘인자의 날’ 곧, 주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그날을 ‘단 하루라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겠습니까?
어떤 조그마한 이상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재림의 징조’로
성급하게 해석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미리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3절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나와 재림 예수 행세를 하고
다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여도
속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은 마태복음 24장에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올라가셨을 때 제자들이....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24:3)하고 물었습니다.
<마24:4-5절>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절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11절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23-26절>
23절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절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5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절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하는
일들이 환란 때에는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 할 수만 있으면....
누구든 믿는 성도들도 미혹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던 제자들은 속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고 아예 못을 박으신 것입니다.
이는 단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경고처럼....
이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자칭 재림 예수가
등장하여 사람들을 미혹하였습니다.
또 자칭 재림 예수는 아니더라도, 자칭 예언자를 자처하며
주님이 오신 날과 장소를 특정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혹에 많은 사람들이 휩쓸리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1992년 10월 ‘다미 선교회’(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
이장림 목사로 인해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주님의 재림하는 곳이 ‘여기다’, 혹은 ‘저기다’라는 주장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그 말을 쫓아서 가지도 따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는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주장하는 것들은 모두 허튼소리요 속임수입니다.
그런 주장들 속에는 그들의 지극히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야욕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번개가 비침같이>.....
그러면 주님의 재림을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분명한 정답을 주십니다.
24절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번개가 치면 어떻습니까? 예, 온 하늘이 환해집니다.
번개가 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정보가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도 번개가 비침 같을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알아차릴 수 있는 우주적인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계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번개의 발생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만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같이....
그리스도의 재림도 번개와 같이 공개적이고 가시적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처음 오실 때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초림 때에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의 한 여관의 마구간에서 비천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는 종으로서 사람을 섬겼고 사람들의 경멸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또한 사악한 자들의 손에 팔리어 부당한 재판을 받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채찍의 고통을 안은 채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은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번개같이’ 오십니다.
그리고 위엄과 권세 있는 모습으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날이 언제일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적같이 – 살전5:2, 벧후3:10, 계16:15).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주님의 재림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번개가 어느 순간에 칠지 알 수 없듯이.......
그러니까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날이 언제 임하여도 준비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지연되는 재림>
그럼 왜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일까?
제자들은 ‘인자의 날 하루’를 간절히 소망했지만....
주님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인자의 날 하루’를 보지 못하고 순교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하셨고,
그들의 피로 ‘교회의 씨’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순교의 피로 말미암아 수많은 인류가 구원받는 교회의 역사가 열렸습니다.
롬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피를 쏟으며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더라면 ....
오늘날과 같은 교회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재림은 조금 지연되고 있을 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들은 신앙의 선배들처럼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증거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를 들먹이며 주님의 재림 운운하는 허튼소리에 속지 말고...
늘 준비된 자로 살다가 번개같이 임하는
주님을 기쁨으로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맺는 말씀 -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 하나님의 나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는 지금 이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먼저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찬송가 438장>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내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