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4)
1부 최후의 24시간
④ 가버린 목소리 .
조선일보
입력 1997.10.22. 17:59
## 1부 최후의 24시간
④ 가버린 목소리 ##.
청와대 내 헬기장에서 세 대의 청색 UH-1H가 이륙한 것은 이날 오전 10시30분쯤이었다. 3호기에는 보도진, 2호기에는 수석비서관들과 경호실 수행팀이 탔다. 대통령이 탄 공군 1호기는 승무원을 포함하여 정원이 13명이었다. 앞의 네 자리는 조종사, 부조종사, 정비사, 공군연락관 차지였다. 그 뒷자리에 박대통령이 앉았다. 대통령 좌석에는 쌍안경과 큰 지도가 놓여 있었다. 이 지도에는 주요시설, 공장, 공단, 공사장이 표시돼 있었다. 경호실 소속 상황실에서는 이 지도에 새로운 정보사항을 늘 유지하여 대통령이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대통령은 누구보다 공중시찰을 많이 하여 지리에 밝았다. 전에 없던 시설물 같은 것이 보이면 궁금해 하였다. 그럴 때는 수행과장이 지상으로 긴급 무전 연락을 취해 상황을 파악, 보고해야 했다.
이날 대통령 옆자리에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의 주무장관인 이희일 농수산부장관이 앉았다. 그 뒤로는 김계원, 차지철,서석준 경제수석비서관 및 천병득 수행과장과 오세림계장이 경호원으로 자리잡았다.
기내에서 박 대통령은 이 장관에게 전날 확정된 추곡매입가 결정에따른 농민들의 반응을 물었다. 추곡매입가 결정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경제기획원에서는 전년대비 10%선의 인상을, 농수산부에선 20%이상
의 인상을 주장하여 좀체로 결말이 나지 않았다. 신현확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와 이 농수산부장관이 대통령앞에서도 합의를 보지 못하자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인상률 22%로 결정했다.
'박 대통령이 농민들에게 주는 보너스'라고 표현된 선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통령은 이날 무척 기분이 좋았다. 농촌 시찰에 나서면 언제나 신이 나는 사람이었다.
비행중에 박 대통령은 쌍안경으로 지상을 두루 살폈다. 반월공단위를 지날 때는 자신이 펼쳐보던 지도와 일일이 대조하기도 했다. 아산화력발전소 공사장에서 굴뚝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가리키며 "이곳은 공장 입지가 좋은 곳"이라고 설명도 했다. 김계원 실장은 대만 대사로 오래 근무하여 국내 사정에 어두웠다. 박 대통령은 김 실장에게 그동안의 업적을 자랑하듯 지상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경지정리가 잘 돼있고 막 추수가 끝난 농촌지역은 평화로웠다.
헬기가 당진 예산 상공을 지날 때 김실장은 대통령에게 말을 건넸다. "각하, 초가집이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저기에는 남아있지 않습니까?"
"우선 큰 길가부터 하고 있소.".
대통령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대통령 일행을 태운 세 대의 헬기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인 당진군 신평면 운정리에 도착한 것은 오전11시2분이었다. 헬기는 새로 닦인 포장도로 위에 착륙했다.헬기에서 내린 대통령은 도열한 현지주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자 활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답례를 했다. 넓은 공터에 설치된 단상까지 약 50여m를 걸어가 단상위로 올라섰다. 관계 공무원들과 근로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행사장 앞줄에는 마을 노인들이 한복을 입고 참석했다. 대통령은 방조제 건설 유공자 표창을 한 뒤 약 8분간에 걸친 치사
를 낭독했다.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국토개발이 국력의 원천"이며 "오는 83년부터는 홍수와 가뭄이 없는 농촌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목소리가 예전같지 않았다.
이희일 장관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쇳소리 나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아니고 그날은 힘이 좀 빠진 듯했어요. 나이를 드신 때문인가 하고 생각했지요"라고 했다. 경호실 수행계장 오세림은 "목감기때문에 저런가"하고 생각했다고 한다.당시 수행과장 천병득은 "그날 바람이 세게 불었는데 바람소리를 제거하기 위해 방송국에서 오디오 시스템을 조작한 때문이 아닐까"라고 했다.
박수 속에 치사를 마친 박 대통령은 단상에서 내려와 테이프 절단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참석자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그날 맨앞줄에 참석한 노인들 가운데는 갓을 쓴 이들도 보였다. 대통령은 동행하던 측근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고을의 원로 어른이 어디 계신가. 이런 경사에 같이 모셔야겠지. 가서 모시고 오게.".
천병득 수행과장은 즉시 무전으로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 장우익 충남지사도 부하 공무원들에게 재촉했다. 이들이 마을 이장을 통해 원로를 찾는사이 대통령은 노인들이 서있는 곳에 다가가 "연세가 제일 높으신 분은 나오셔서 저와 함께 테이프를 끊으시지요"라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테이프 절단식장은 방조제 입구에 마련되어 있었다. 대통령은 가위를 받아 이희일 장관 등 관계 공무원들과 함께 테이프를 자르기 위해 줄을 섰다.
그동안 신정리에 사는 이길순(당시 83세) 노인이 그날 참석한 사람들 중 가장 연로한 사람임이 밝혀졌다.
하얀 턱수염에 돋보기를 끼고 새마을 모자를 쓴 한복차림의 이 노인은 몸둘 바를 몰라하며 대통령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대통령보다 작은 체구의 이 노인은 주위에서 급히 마련해준 흰장갑과 가위를 받아 들었다. 대통령은 한 손으로 이 노인이 자를 오색 테이프의 한 허리를 들고 미소를 머금은채 잠시 기다렸다.
긴장한 이 노인의 오색 테이프는 좀처럼 잘려지지 않았다. 대통령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가위질을 도와 주었다. 주위에서 박수가 터졌다. 대통령은 자리를 뜨지 않고 잠시 이 노인의 등을 어루만지며 "올 농사는 잘 지으셨겠지요. 댁내도 모두 편하시고"라고 안부를 물었다.박대통령은 "버튼도 같이 누르시죠"하며 이 노인을 끌었다.
박 대통령은 배수갑문을 여는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눌러도 쾅 하는 폭발음이 잘 들리지 않았고,삽교호의 막혔던 물이 갑문을 통해서 황해로 쏴 빠져나가는 장면도 둑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은 옆에 있던 이희일 장관에게 "어디야, 어디야?"라고 물으면서 두리번거렸다. 이순간을 잡은 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사진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배수갑문이 열린 삽교천 방조제 위를 걸어가 갑문 사이로 물이 빠지는 것을 구경했다. 그리고 이희일 장관과 함께 승용차로 3천360m의 방조제 위를 달렸다. 이 장관은 방조제 도로 옆에 자란 잔디가 몇달 전에 씨를 뿌렸던 미국산 '켄터키 블루'라고 설명했다.
건너편 아산군 쪽에 도착한 박 대통령은 담수비를 제막하였다. 물개 세 마리가 하늘을 향해 서있는 모양이었다. 비를 감싼 흰 천이 세찬 바람에 휘감겨 있어 박 대통령이 줄을 잡아당겨도 벗겨지지 않았다. 급기야 수행 경호원들이 비 위로 올라가 천을 벗겨내려야 했다. .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5)
조선일보
입력 1997.10.2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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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최후의 24시간
⑤ 사신 ##.
박정희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담수비 제막을 마친 뒤 주위의 평야에 야적된 볏단을 바라보더니 수행한 관계자들과 출입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물이 괸 논은 십자형으로 나무를 세우고 벼를 다발로 묶어 그 위에 걸쳐 말리면 습기가 완전히 제거되어서 벼이삭도 잘 건조됩니다.".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던 공군 1호 헬기에 오른 대통령은 헬기가 이륙준비를 하는 동안 먼 들판을 응시하였다.
기체가 떠오르기 직전에 그는 좀 떨어진 곳에 모여 있던 출입기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비공식 행사가 기다리고 있는 당진을 향해 출발한 시각이 11시40분 경이었다.
박 대통령이 삽교천 행사장을 둘러보던 그 시각, 김성진문공부장관은 두 시간째 꼬불거리는 시골길을 달려서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김장관은 하루 전날 도고호텔로 내려와 있었다.
10월26일 오전에 김 장관은 삽교천 행사장을 들르지 않은 채 느지막이 승용차편으로 새로 건립된 KBS 대북방송 중계소로 향했다.
예전 같으면 먼저 열리는 행사장에 장관이 참석했다가 대통령을 모시고 자신의 소관 행사장으로 와야 했다. 차지철의 경호실은 대통령과의 과잉접촉을 근절한다는 이유로 이 관례를 바꾸어 주무장관은 자신의 행사장에서 대통령을 기다려야 했다.
건평 5백평 남짓한 2층 건물에 안테나 두 개가 솟아오른 자그마한 중계소는 아주 후미진 곳에 세워져 있었다.
이 곳은 중앙정보부가 관할하고 있었으므로 아침에 김재규가 대통령 전용기에 동승할 뜻을 비쳤던 것이다.
김 장관이 중계소에 상주할 직원들과 함께 건물을 먼저 둘러보는 동안 맑은 가을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왕모래 섞인먼지바람을 일으키며 공군 1호기와 2호기가 중계소 앞뜰에 착륙했다.
2호기에서 내린 경호원들이 경호 배치를 한 후 1호기에서 박 대통령이 내려오고 차지철이 그 뒤를 따라 내려왔다.
대통령을 모시고 행사장으로 간 김 장관은 대통령과 함께 중계소 현관 앞에서 준공과 개관을 축하하는 테이프를 잘랐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몇 가지 시설들을 설명한 뒤 미리 준비해 둔 방으로 안내했다. 시멘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방에 들어선 박 대통령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 순간 김 장관은 흠칫 놀랐다.
"그토록 또렷하던 대통령의 날카로운 눈빛이 간데 없었어요. 나를 바라보던 눈빛은 퀭하니 안광이 비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얼굴에는 윤기도 없고 대통령 특유의 긴장감도 없었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 장관, 나 물 한 잔 주어." 대통령의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작은 행사를 마치고 대통령이 이렇게 기진맥진한 채 물을 청하는 모습에 김성진 장관은 목이 메였다고 했다. 냉수를 받아 든 대통령은 단숨에 꿀꺽꿀꺽 다 들이켰다.
그리고는 어깨의 힘을 쭈욱 빼더니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며 묵묵히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때까지 박 대통령을 만 9년 동안 모셔왔던 김성진으로서는 처음보는 광경에 애가 탔다. 김 장관은 불안해졌다.
'어디가 편찮으신가? 아니면 삽교천 행사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언짢은 일이 있었나?' 그렇다고 대통령에게 함부로 물어볼 수도 없었다.
잠시 후 대통령은 밖으로 나가 예정된 기념식수를 한 뒤 헬리콥터로 향했다. 경호실로부터 헬기에 동승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던 김장관은 대통령의 뒤를 따라 가다가 헬기 문밖에까지 전송하게 되었다.
헬기에 올라탔던 박 대통령은 김 장관을 보더니 "왜 안타나"라고 했다. 행사 후 KBS직원들과 동네 유지들을 모시고 점심을 같이 하기로 되어 있었던 김 장관은 대통령의 채근에 헬기로 뛰어 올랐다.
먼지를 일으키며 1호기가 이륙하고 2호기가 이륙을 시도했으나 엔진고장을 일으켜 주저앉고 말았다. 약 30분 동안 2호기는 KBS중계소앞뜰에서 긴급 수리를 해야 했다. 먼저 이륙한 1호기는 한 시간 전에 행사를 치렀던 삽교천 방조제부근 상공으로 비행했다.
그동안 대통령은 아무말 없이 무슨 생각에 골몰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아래를 내려다 보며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옆에앉은 김 장관이 귀를 기울여도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서 계속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김 장관에게 얼굴을 돌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하면 안되지," "……?" 말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김 장관이 머뭇거리자 박 대통령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또다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도고호텔 앞마당에 공군 1호기가 착륙한 것은 12시40분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바람-소음이 휘말려 올랐다.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사슴 사육장에서는 헬기 소리에 놀란 새끼밴 사슴 한 마리가 머리를 벽에 들이 받고 죽었다. 잇단 사고들은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도고호텔 2층 회의실에서는 오찬이 있었다.
좌석배치는 몹시 관료적인 인상을 풍겼다. 대통령의 좌석은 맨끝에 독상 차림으로 마련되어 외딴 섬처럼 느껴지게 되어 있었다. 그 좌우로 길다란 탁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대통령과의 오찬석상에서 비서관들은 예의를 깍뜻하게 차리면서도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데 지혜를 모으곤 했다. 웃음도 있었고 농담과 재담이 넘치곤 했다.
이날 '마지막 오찬석상'에 참석한 김성진 장관은 '딱딱하게 말라버린 가랑잎 같은 존재들만이 대통령을 저 멀리 쳐다보면서 밥술만 뜨는 참으로 한심하고 송구스러운 점심'으로 기억했다. 농담은 대통령이 주로 했다.
대통령은 "김원기 장관이 뜻밖에 준공식장에 나타나 이상하게 생각했어"라고 말했다.
김 장관이 "당진이 제 고향입니다"라고 말하자 대통령은 "그렇군"
이라고 가볍게 받으면서 농담조로 이런 말도 했다.
"이희일 장관이 청와대에 있을 때는 쌀값을 높게 책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니 농수산부 장관이 되자 추곡수매가를 올리자고 하는데 입장이바뀌면 모두 그렇게 되는 건가.".
박 대통령은 또 7일 전에 있었던 싱가포르 이광요 수상과의 대화내용을 소개했다. "이 수상이 그러는데, 공산당과의 싸움에서는 내가 죽든지 적을 죽이든지 하는 두 길밖에 없다는 거야. 어중간한 방법으로는 안된다는 거야." [계속]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6)
조선일보
입력 1997.10.24. 16:30
## 1부 최후의 24시간
⑥ 청와대의 오후 ##.
대통령이 탄 공군1호기가 도고 호텔을 이륙한 것은 오후1시50분쯤이었다. 박정희는 기장에게 아산만 상공으로 가도록 지시했다. 현충사 상공을 한번 돌게 하였다.
그는 현충사 근방에서 행사가 있으면 이곳에 들러 충무공(이순신)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곤 했다.
박정희가 이순신에 대하여 동병상련을 느꼈던 대목은 당대의 평가를 기대하지 않고 역사의 짐을 고독하게 지고가야 했던 사람들의 허전함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서울상공에 와서도 한 바퀴 돌도록 했다.
박정희는 가끔 "국토개발 현장을 시찰하면 꼭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애."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한반도란 화폭에다가 가장 큰 밑그림을 그린 인물로 기록될 박정희는 6·25동란의 폐허 위에서 불사조처럼 솟아나 그의 시대에 세계적 대도시가 된 콘크리트의 정글을 대견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강남과 강북을 잇는 다리들을 가리키면서 "다리가 참 많군."이라고 새삼 감탄하기도 했다.
1979년10월26일 오후 2시30분쯤, 대통령이 탄 헬기는 청와대에 내렸다. 수석비서관들을 태운 2호기가 먼저 도착하여 착륙장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은 이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내렸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본관1층 대통령 집무실까지 수행한 김계원비서실장, 차지철경호실장, 천병득수행과장에게 대통령은 "수고했으니 쉬어."라고 했다.
화창한 가을날에 농촌 지역을 한 바퀴 돌고 와서 그는 기분전환이 된 것 같았다.
열흘 전에 터졌던 부마사태와 아직도 골치를 썩이고 있는 김영삼총재의 의원직 제명 뒤 신민당 사태도 잠시 잊을 수있었다. 도시에서 짜증난 것을 농촌에서 상당히 푼 셈이었다. 오전에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온 날의 오후에는 청와대에 머무는 것이 대통령의 습관이었다.
차지철 실장도 대통령의 이런 습관을 익히 알고있어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부하들에게 "수고했어,쉬어."라고 했다.
오후4시쯤, 이재전경호실차장은 실장실에서 차지철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인터폰이 울렸다. 짧은 대화끝에 전화기를 놓은 차 실장은 부관에게 "정보부장을 대."고 했다.
김재규부장에게 짤막한 통보를 한 뒤에 그는 천병득과장과 경호원들을 불러 경호준비를 시켰다.
차 실장은 "오늘은 좀 쉬시지…."라고 중얼거리면서 좀 짜증스러운표정을 지었다.
만62세의 건강한 홀아비 박정희는 이날의 농촌나들이로 고양된 기분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청와대 안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직원들이 다 퇴근하면 절간처럼 적막해지는 본관. 오후6시에 그가 2층 내실로 물러나면 거기에는 너무 넓은 침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은 '방울이'란 이름을 가진 스피츠와 가려움을 긁어줄 효자손. 그는 청와대의 마지막 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오후 3시를 조금 지나서 박정희는 집무실 문을 열고 나 왔다. 이광형 부관이 보니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깨춤을 추듯 몸을 흔들흔들했다.
벌떡 일어선 이광형 이혜란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지으면서 '신경쓰지 말고 일이나 계속해'라는 시늉을 했다.
오후5시를 조금 넘어 대통령은 임방현대변인에게 인터폰을 걸었다.
"연두기자 회견은 어떻게 되어가나."
"이미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참 잘 했어. 아주 잘 했어.".
대통령은 계속 기분이 좋아 있었다.
10월26일 오후4시10분쯤 남산 정보부장실에 있던 김재규는 차지철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저녁 6시에 각하를 모시고 대행사가 있습니다.".
대행사라고하면 대통령 이외에 정보부장, 대통령 비서실장, 경호실장까지 포함되는 만찬이다.
4시10분경 궁정동 정보부 시설의 본관에 있는 부장 의전 비서 윤병서 사무실에 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가 와 있었다.
이리로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이 전화를 걸어왔다. 박선호가 받으니 정인형은 '대행사가 있다'고 했다. '심부름을 할 여자 두 명을 준비해달라'는 당부도 함께 했다. 정 처장은 박선호와는 해병대 제16기 간부후보생 동기였다. 형제처럼 친했다.
박 과장이 이날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이 만찬의 시중을 들 두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그는 가수 심수봉과 하루 전에 만나서 보아둔 영화배우 지망생 신재순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신양은 오후5시20분까지 플라자 호텔 커피 숍에서, 심수봉양은 오후5시30분에 뉴내자 호텔커피 숍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박선호로부터 행사준비지시를 받은 식당 책임자 남효주사무관은 주방장 김일선과 이정오를 불러 지시를 전달했다.
식당 전용차 코티나 운전사 김용남에게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원당읍 양조장으로 가서 막걸리 석 되를 사오라고 시켰다. 대통령은 요사이 들어서는 양주를 주로 많이 마셨지만 언제 막걸리를 시킬지 몰라 준비를 시킨 것이다.
김재규는 남산의 부장실을 출발하여 오후4시20분쯤에 궁정동에 도착했다.
정보부장 수행비서관인 육사18기 출신의 현역대령 박흥주가 부장승용차의 앞자리에 타고서 수행했다. 부장 차가 궁정동 본관에 당도하니
박선호가 기다리고 있다가 차를 내리는 부장에게 귓속말로 무어라고 보고를 했다.
박 대령은 '아, 오늘 행사가 있구나'하고 직감했다.
박 대령은 부장의 서류 가방을 들고 윤병서 비서와 함께 2층 부장집무실로 따라올라갔다. 박흥주 대령은 오후 3시경에 부장이 이발을 할 수 있도록 이발사를 불러두었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김재규는 "오늘 각하께서 일찍 오시면 곤란하니 내일 이발을 하도록 하지"라고 했다.
박 대령은 이발사를 돌려보냈다.
오후4시40분경 김재규는 1층 윤병서의전 비서의 방에 있던박 대령을 인터폰으로 찾았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대"라고 지시하는 말을 곁에서 들은 윤 비서가 재빨리 일반전화로 정승화총장실에 전화를 걸었다.
윤 비서는 다시 인터폰으로 부장에게 "육군총장님 전화 나왔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날 정 총장은 육군본부 집무실에 있었다.
오전에 라디오를 통해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실황중계를 듣고나서 저녁으로 잡혀 있었던 전2군사령관 김종수중장 송별연을 취소한 뒤에 퇴근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 중장은 2군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 수산청장으로 간지 며칠되지 않았었다. 정 총장은 삽교천 준공식 중계를 듣고 비로소 대통령이 지방에 내려갔음을 알았다.
대통령의 일정을 알려주지 않은 경호실장이 마뜩찮게 생각되었다. 정 총장은 '대통령도 안계신데 송별파티를 열기도 뭣하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행사를 연기시킨 것이었다. 수석부관 황원탁대령이 방으로 들어왔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전화를 걸었습니다.".
정 총장은 수화기를 들었다. [계속]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7)
1부 최후의 24시간
조선일보
입력 1997.10.25. 17:29
## 1부 최후의 24시간##
## ⑦살의의 탄생 ##.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전화기를 드니 김재규의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셨습니까, 정 총장. 오늘 저녁 뭐 바쁜 일 있습니까?"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저도 별일이 없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 저녁이나 같이 하면서 조용히 시국이야기나 합시다."
"그렇게 합시다.".
"궁정동… 전에 한번 와보셨지요… 알겠지요?"
"압니다.".
정승화 장군은 근 한 달 전에 김재규가 식사를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을때 선약이 있어 거절한 적이 있었다. 이날도 김종수 장군 송별연을 취소하지 않았더라면 김재규와의 자리는 성사될 수가 없었다.
정 장군은 "그때 김재규의 목소리는 정중하고 평상 그대로였다"고 기억하면서 "나는 지금도 김재규가 나와 먼저 저녁 약속을 했고 그 직후에 대통령과 만찬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
10·26사건의 미스터리 중 하나는 김재규가 정 총장에게 전화를 건 시각이 대통령과의 만찬이 있다는 연락을 경호실장으로부터 받은 뒤인가 그 전인가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과의 만찬이 있다는 연락을 받은뒤에 정승화 총장과 겹치기 약속을 했다면 이는 김재규의 살의가 발동한 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쟁점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자료를 기자는 이번 취재에서 발견했다. 1979년10월29일 윤병서 의전비서가 합수부에서 쓴 자필진술서는 자신이 4시40분(즉 대통령과 만찬이 있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30분쯤 뒤)에 총장실로 전화를 걸어 김 부장에게 연결시켜주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화는 두 사람의 운명 뿐 아니라 이 나라의 진로를 바꾸어 놓는 중대한 인연을 만든다. 이 전화는 10·26에서 12·12사건으로 이어지는 드라마의 무대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날 밤 무대의 한 조연이 된 정보부 김정섭 제2차장보는 점심때 조선비료 김덕엽 사장의 셋째 아들 결혼식장에 갔다가 감사원 엄병길 감사위원과 재무부 조충훈 차관을 만나 신라호텔 일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국내 정치담당인 그는 남산 사무실로 돌아 와서는 석간신문과 상황보고서를 훑어보았다. 오후 3시30분쯤 부장실에서 '보고할 것이 있으면 지금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김 차장보는 부장에게 "정운갑 신민당 총재권한 대행이 자기 체제를 발족시키겠다는 발표를 했고 일본인 관광객이 한국인 접대부를 찔러죽였다"는 보고를 했다.
오후4시쯤 부장실을 나온 그는 4시30분에 시청 건너편에 있는 프레지던트 호텔내 정보부 전용사무실 1720호실로 갔다. 이 방에서 신민당 김 모 의원과 만나 당내 사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오후 5시쯤 보좌관 박영학이 들어와 "김 부장이 전화를 해달랍니다"
고 했다. 김 차장보는 대화를 중단하고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저녁6시30분까지 궁정동 사무실까지 오시오.".
부장은 일방적으로 말하고는 이쪽의 이야기도 듣지 않고 끊어버렸다.
김 차장보는 호텔 방에서 김 의원과 이야기를 마친 뒤 오후 5시에 다시 궁정동 부장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윤병서 비서가 받았다. 김차장보는 부장이 아까 전화로 저녁에 궁정동으로 오라는 것은 거기로 와서 업무보고를 하라는 뜻인 줄 알고는 "오늘 저녁에 친구들과 선약이 있으니 지금 전화로 부장께 보고를 하겠다"고 했다. 김부장에게 전화가 연결이 되었다. 김정섭 차장보는 신민당 김 의원과 나눈 대화를 설명하고 신민당 정운갑 대행 체제에 대한 전망을 보고했다. 그러고는 "이상입니다"고 끝내려고 했더니 김 부장은 또 "저녁 6시30분까지 이리로 오시오"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놓아버리는것이었다.
궁정동 정보부 시설의 본관 2층에는 부장용 침실이 있었다. 그때 간치료를 받고 있었던 김 부장은 오후에는 여기서 한 시간쯤 낮잠을 자는 경우가 잦았다. 이날 정총장에게 전화를 건 뒤에 이 침실에서 한일에 대하여 김재규는 1979년11월8일에 작성한 자필진술조서에서
이렇게 썼다.
[금고에 보관하고 있던 32(밀리)구경 독일제 소형 권총을 꺼냈다. 실탄도 꺼내어 탄창에다가 일곱 발을 넣고 권총에 끼워 장전 점검을 해보았더니 이상이 없었다. 한 발을 장전하여 격발만 하면 발사될 수 있도록 해두었다. 이 총을 언제라도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 상단 선반에 꽂혀 있는 '국제정보자료책' 뒤편에 숨겨두었다.].
이 권총의 내력은 오래이다. 김재규가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있었던 1960년 총장이던 이성가장군으로부터 선물받은 것이었다. 김재규는 전역한 뒤 이 권총과 45구경 권총 두 자루를 주소지를 관할하는 서울 성북경찰서에 맡겨 두었다. 정보부장으로 취임한 이후인 1977년에 경찰로부터 수령하여 금고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장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이 1층 사무실에서 부장 친척들의 여권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오후 5시쯤 윤 비서가 2층에서 내려오더니 "부장님이 조끼와 줄무늬 있는 양복을 보내라고 하신다"라고 했다.
박 대령은 부장공관으로 연락을 취했다. 이 바지에 특징이 하나 있었다. 라이터를 넣는 호주머니 속의 호주머니를 유달리 크게 만든 양복이었다. 작은 권총이 들어갈 정도였다. 한 20분을 지나서 다시 인터폰을 받으니 부장이었다.
"좀 올라와."
"오늘 손님이 오시는데 식사 3인분을 준비해주게. 저녁 6시30분에 손님들이 올 걸세.".
오후 5시를 지나서 오늘 대행사의 관리책임자 박선호 의전과장은 직접 차를 운전하여 프라자 호텔 커피 숍에서 신재순을 만나 태우고 내자 호텔로 왔다. 당시 23세이던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3학년 신재순은 광고모델로 일한 적도 있었다. 그 이틀 전 오후 약수동에 있는 '대하'라는 살롱의 마담 숙경언니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 다음날 서교동에 있는 언니 집에 가서 만난 사람이 박선호였다. 박과장은 이 자리에서 신양을 면접한 뒤에 내일, 즉 26일 오후 5시에 프라자호텔 커피 숍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박 과장이 예기치 않은 대통령과의 만찬에 대비하여 미리 약속을 해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박,신 두 사람은 내자 호텔 커피 숍에서 심수봉이 나타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약속시각보다 한 30분이 넘어 심양이 나타났다. 기타가 고장이 나서 늦었다는 것이었다.
무좀으로 고생하던 박흥주 대령은 오후에 좀 시간이 나자 부장경호차를 타고 광화문 에스콰이어 양화점에 가서 검은 색 구두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이 구두는 이날 밤 곡절을 거치게 된다.( 계속 )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
1부 최후의 24시간
⑧ 정치공작 .
조선일보
입력 1997.10.26. 15:37
##1부 최후의 24시간
⑧ 정치공작 ##.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에 다녀온뒤 사무실에서 유정회 최영희 총무와 한담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 군 선배인 최 총무는 저녁을 하자고 김 실장에게 연락했으나 대통령이 갑자기 부르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아 그 약속을 오늘로 미룬 채 미리 사무실에와 있었던 것이다. 김 실장은 "각하께서 또 찾으실지 모르니 다섯시까지 조금 더 기다려봅시다"고 했다. 오후 4시30분쯤 경호실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오늘 각하를 모시고 저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시까지 정보부장한테 가십시오.".
김 실장은 전화기를 놓고는 최영희 총무에게 웃으면서 "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라고 했다.
김계원 실장에게는 지난 해 12월 취임한 이후 이번 만찬이 네번째였다. 경호실장으로부터 오라는 연락이 없으면 갈 수 없는 자리였다.
김 실장이 마지막으로 궁정동에 간 것은 그 두달 전에 이 궁정동 나동 만찬장을 수리한 뒤였다. 김재규가 안내를 하면서 식탁 밑으로 푹패여다리를 놓게 되어있는 부분을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발바닥이 닿는 바닥에 용수철 장치가 되어 있어 촉감이 좋았다. 박정희는 그 속으로 상체의 반쯤을 넣어보면서 "여기에 숨어도 되겠군"이라고 했다.
김계원 실장이 궁정동 본관에 도착한 것은 5시20분쯤. 정보부측의 안내 없이는 비서실장조차 나동 만찬장엘 갈 수가 없어 본관으로 먼저 들어가야 했다. 실장 혼자 본관 1층으로 들어오자 회의실로 그를 안내 한 윤병서 비서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자고 있던 부장을 깨웠다. 잠시 후 김재규는 2층에서 내려와 김계원이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로 들어왔다.
김재규가 말문을 열었다.
"오늘 무슨 일입니까?"
"모르겠소. 오늘 행사도 다녀오시고 해서 쉬실 줄 알았는데."
"저는 오늘 만찬이 없을 줄 알고 정승화 총장과 저녁약속을 해두었는데….".
김재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김계원 실장이 꺼낸 다음 말은 김재규의 분통을 터뜨릴 만한 것이었다.
"헛 수고 많이 했소. 신민당 공작은 공화당이 다 망쳐놓았소. 중정은 수고만 하고…."
"사표를 일괄반환한다는 말이 이틀만 늦게 나왔어도 되는데…. 할 수 없지요. 이제부터는 정대행이 출범하면 하나씩 부쳐주어야지요.".
그해 10월초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에 항의하여 신민당의원들이 일괄 제출한 의원직 사퇴서에 대해 그 이틀 전 공화당이 이 사퇴서를 한꺼번에 반환하겠다고 발표한 것을 두고 나누는 대화였다.
정보부에서는 신민당 당직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당직에서 사퇴하게 한 다음, 법원의 판결에 의해서 이미 총재직무가 정지된 김영삼으로부터 당권을 빼앗아 정운갑 총재권한대행에게 넘기는 공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런 공작의 압력용으로 신민당 의원들이 제출한 사퇴서를 선별하여 수리하겠다는 설을 퍼뜨리고 있었는데 공화당이 "다 반환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정보부에 협조할 듯한 의원들도 강경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이 무렵 김재규가 신민당에서 김영삼 세력을 거세하기 위한 공작을 지휘하면서 상당한 고뇌를 하고 있었음을 엿보게 하는 목격담이 많다.
당시 정보부 외사국장 조성구가 10·26사건 뒤에 합수본부에서 진술한 내용.
[지난 22일 정오 무렵, 외사국 직원의 해외출장계획서에 결재를 받기 위해서 부장 비서실로 갔습니다. 안에서 김정섭제2차장보가 부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차장보가 들어간지 한 시간이나 되어서 나오는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부장실로 들어갔더니 부장은 얼굴을 책상에 파묻고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부하직원의 출장지에 프랑스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부장은 화를 내더니 "프랑스에는 김형욱이 실종사건으로 시끄러운데 왜 여기에 출장을 보내는가. 싱가포르나 대만으로 변경해"라고 했습니다. 결재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사무실을 나오는데 차장보는 그때까지 정신나간 사람처럼 비서실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10월23일 오전 11시30분 남산 부장실에서 국내문제로 각 국장이 참석하여 회의를 하는데 김재규는 "어제 각하로부터 부마사태와 관련하여 정보부의 정보활동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꾸중과 기합을 단단히 받았다"고 전달했다. 대통령은 "학원내의 정보망 활용을 어떻게하였기에 사전에 징후를 포착하지 못했나. 정보부는 뭘 했나?"라고 힐책했다고 전언했다. 김 부장은 "망을 다시 수습하여 정보활동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10월24일 오후 김재규는 신민당 원내총무 황낙주 의원을 궁정동 사무실로 초대하여 4시간 동안 원내총무직에서 자진사퇴하라고 설득하고 협박했다.
"난국 수습을 위해서는 김영삼 총재는 일선에서 물러나야 하고 황총무도 사퇴해주어야겠어요. 김 총재는 나와 같은 피가 섞인 일가가 아닙니까. 내가 그분이 망할 일을 하겠습니까. 황 총무도 사퇴하시면 진해여상의 확장사업도 도와드리겠어요. 2-3년 뒤에는 롤백할 수 있도
록 밀어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내가 황 총무와 친하다고 해도 웃분께서 지시하시면 감옥에 안보낼 수가 없습니다. 황 총무에 대한 비위 사실조사는 다 되어 있습니다.".
황낙주는 "김 부장과 나의 생각은 하늘과 지하실 만큼이나 크다. 차라리 서대문형무소로 가겠다"며 거절했다는 것이다.
10월24일 이후락 공화당의원은 같은 울산 출신인 최형우 의원을 만나서 신민당 당기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권했다. 정보부장의 의사라는 것도 전했다. 최형우는 거절했다. 다음날 오전10시쯤 이후락은 남산 부장실로 김재규를 찾아가서 어제 일을 설명했다.
10월25일 오전 정보부 제2차장실에서 간부회의를 하는데 국내정치 담당 김정섭 제2차장보가 부장의 전화를 받았다. 통화를 끝낸 뒤에 그는 다시 전화기를 들더니 공화당 박준규 의장서리를 불러냈다.
"무슨 일을 그렇게 합니까. 인심은 공화당에서 다 써버리고 우리 보고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부장님이 언짢게 생각하고 있으니 알아서 하십시오.".
김정섭 2차장보는 불쑥 "요사이는 정보부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드는 통에 죽겠단 말이야"라고 중얼거렸다. 외사국은 한 나흘 전부터 주한미국대사관의 동향보고와 부마사태에 대한 미국측의 평가에 관련된 중요보고서들을 부장에게 올리고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면 그 대부분의 보고서를 부장이 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성구 외사국장은 '부장이 무슨 일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감을 가졌다.
[계속]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9)
1부 최후의 24시간
⑨ 울분 .
조선일보
입력 1997.10.27. 14:22
## 1부 최후의 24시간
⑨ 울분 ##.
김재규는 전날(25일) 오전 대통령에게 보고 차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비서실장실을 들렀다. 그는 김 실장에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각하께서 부산사태에 신민당이 개입했다고 하시는데 아무리 찾아도 증거가 안나오니 큰 일입니다. 이런 문제는 차지철이가 각하에게 그릇된 정보를 보고하여 일어난 것인데…. 그 새끼를 그냥 없애버려야겠는데…. 이 놈을 어떻게 하지요? 내가 꼭 없애버리겠습니다.".
김 실장은 김부장이 또 대통령에게 질책을 당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알았어, 알았어"라면서 달래어 보냈다.
김재규는 남산 사무실로 돌아와서 오전 11시40분에 소회의를 소집했다. 국내담당인 전재덕 제2차장, 김정섭 제2차장보, 현홍주 기정국장을 불렀다.
그날 오후로 예정된 대통령 주재 부마사태대책회의에서 현홍주 국장이 보고할 내용을 검토했다. 김재규는 현 국장이 종합한 보고서를 읽어보더니 몇 가지 수정을 지시했다.
공화당 유정회 등 여권이 신민당을 대할 때 의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라는 취지의 자구 수정지시였다.
25일 오후 2시 청와대 소접견실에서 안보회의가 열렸다. 대통령과 안보관계 장관들 및 청와대 참모들이 참석했다. 현 국장이 부마사태의 원인을 분석하여 보고하는 내용중에서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이란 이야기가 나오니까 대통령은 "정부의 실정보다는 김영삼의 조종이 더 큰 이유다"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은 보고를 다 듣고는 이런 요지의 지시를 했다.
"부산 마산 사태의 원인은 첫째 정보활동의 미흡, 둘째는 시위를 초동단계에서 진압하는 데 실패한 점, 셋째는 일선 공무원들의 부조리로 인한 민심의 이반이다. 야당이 현재처럼 기고만장한 데는 여당의 책임이 크다. 우리나라에서 데모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박정희는 미군이 우리의 국방을 맡아주고 있다는 생각을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한 시위에 따른 안보상의 불안에 대해서는 책임있게 판단하지 않고 마구 행동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자주국방을 하지 못하면 진정한 독립국가도, 책임 있는 국민도 될 수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당시 부산지역 계엄사 합동수사본부가 부산시민 1백 명을 상대로 이번 시위사태의 원인을 조사한 자료가 있다.
가장 큰 시민들의 불만은 김영삼 의원직 제명(13%)이었고, 물가폭등과 부가가치세에 대한 불만이 두번째였다(12%). 이어서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11%), 정책에 대한 불만(11%), 정부 자체에 대한 불신(10%), 언론탄압(9%) 차례였다.
박정희 유신정권 전반에 대한 불만이 시민들 사이에서도 확산되어있었던 것이다.
부마사태에서는 파출소가 습격을 받고 진압차량들이 불타기는 했으나 사망자는 없었다.
이 사태의 심각성은 상인과 봉급생활자 같은 중산층이 학생들편에 서서 응원도 하고 가담도 했다는 점이었다. 4·19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산층이 학생편을 들고나오면 정변이 생긴다는 하나의 공식이 있다. 부산 현지 시찰을 한 김재규는 '이것은 민란이다'라고 파악했는데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본 셈이다.
박 대통령은 이 사태를 계기로 정부 요직을 개편하여 국정을 쇄신하려고 마음을 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무렵 김계원 비서실장도 천거할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정보부 외사국 조성구 국장은 26일 점심을 아세아건업 이건사장과 함께 했다. 이 사장의 회사에는 김계원 실장의 장남이 전무로, 동생이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어 그의 정보는 가치가 있었다. 이 사장은 조 국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정보부장과 경호실장 사이가 나빠 비서실장이 중간에서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합니다. 김 부장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이 최악의 상태에 있는데 아마도 11월 초순에는 정보부장이 경질될 거라고 합니다. 후임에는 김치열 법무장관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이건 사장의 이 정보는 상당히 정확했다. 예컨대 김치열 장관은 23, 24일 양일간 대통령에게 불려가서 시국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정보부장으로 임명하겠다는 시사도 받았었다.
정보부장의 경호원인 안전과 안전3조 요원 홍성수의 합수부 진술에 따르면 김재규 부장은 부마사태가 터지고 신민당 와해공작이 진행되고 있는 격동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즈음 일찍 집에 돌아오는 편이었다.
10월17일 화요일은 오후 4시40분 귀가, 20일에는 밤 9시40분 귀가, 22일에는 저녁 8시30분 귀가, 23일에는 오후 5시40분 귀가, 25일엔 저녁 8시쯤 귀가. 이것은 김 부장의 건강이 격무를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날 김재규의 심리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9년 10월28일에 그가 합수부 수사관 앞에서 자필로 쓴 1차 진술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1차 진술조서는 그가 대통령을 쏴 죽인 뒤 이틀만에 쓴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개발하기 전의 비교적 순수한 상태의 고백이란 장점이 있다.
동시에 가혹한 고문이 가해진 뒤에 쓰여지는 진술서일 경우에는 수사관의 의지가 많이 반영된다.
[정국이 시끄러워지고 야당의 활동이 적극화됨에 따른 본인의 수습안이 실패를 반복함에 따라서 사실상 무능력한 것이 노출되었습니다. 본인및 형제 등의 이권 개입으로 인하여 각하로부터 직접적인 경고 내지는 친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사사건건 업무에 관하여 월권행위를 자행하고 있었으며, 군 후배이고 연하자인 그로부터 오만불손한, 개인적인 수모를 수차에 걸쳐 당하였습니다. 또한 각하가 차 실장을 편애하는 데 대하여도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최근 중요 보직자의 인사를 단행할 예정이었는데 거기에 본인이 포함될 것이라는데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본인도 정권을 잡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현재 정계인물 중 최적의 대통령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부산 마산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태는 학생들의 소요라기보다는 민간인의 소요로서 민란이라 판단하여 지금이 각하를 제거할 적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본인은 중앙정보부의 막강한 권한과 조직을 갖고 있었으므로 사후수습이 가능하
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직에 있는 중요인사들과 군지휘관들도 본인의 영향력을 받고 동조할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김재규의 진술과 증언에서 제1의 동기인 '차지철에 의한 수모'가 빠지고 여기에는 없던 민주회복이 제1의 동기로 등장한다.
26일 오후 궁정동 정보부 시설 본관 1층 응접실에서 김계원 실장과 잡담하면서 김재규는 또 다시 전날과 같은 불평을 했다.
"각하의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부산지구의 데모를 신민당이 조종했는지를 아무리 조사해도 남민전과의 관련성은 포착이 되는데 신민당이 조종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아서 죽을 지경입니다." [계속]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0)
조선일보
입력 1997.10.28 13:59
1부 최후의 24시간
오만불손 .
대통령을 측근에서 모시고 있었던 김계원, 김재규, 차지철 이세 군인 출신 인사들은 박 대통령과 키가 거의 같았다(1백64cm내외). 곧 궁정동에 모이게 될 이 네 사람은 유신정권의 핵심이었다.
유신정권의 정치조직인 공화당과 유정회, 그리고 군부는 이들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었다. 이들은 박정희라는 항성을 최근접거리에서 돌고 있는 세위성이었다. 이 세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가 만든 덫에 걸려든 것이 이 날의 박정희였다. 권력 핵심부의 균형을 잡고 조화를 도모해야 할 사람은 김계원이었지만 차지철을 미워하는 데는 김재규와 완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김재규 정보부장은 김계원 비서실장을 선배로 깎듯이 예우하면서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는 사이였다. 김재규가 진해 육군 대학 부총장으로 재임했던 1960년 당시 김계원 소장이 총장으로 부임하면서 두 사람은 인연을 맺었다. 그 무렵 마산에서 회식을 마친 뒤 돌아가던 김재규의 지프가 절벽 아래로 굴렀다. 마침 뒤따라가던 김계원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 중상을 당한 김재규를 업고 올라와 병원으로 옮겨 목숨을 구해준 일도 있었다. 김계원은 육군참모총장을 끝으로 군에서 물러난 뒤에 정보부장을 잠시 지낸 다음 대만 주재 대사를 오래했다. 그는 1978년 12월의 10대 국회선거를 앞두고 김재규에게 부탁하여 고향인 영주에서 공화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김재규는 그런 그를 대통령에게 비서실장으로 천거했던 것이다.
김계원이 1979년 11월10일에 합수부에서 쓴 제3차 진술서는 차실장에 대한 인간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나는 비서실장으로 부임한 후 차지철의 사무실로 가서 인사를 했는데 이에 대하여 답례인사도 오지도 않았습니다. 한번도 본인의 사무실로 찾아온 적이 없었습니다. 차실장은 각하께 보고하러 본관에 와서 1층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도 내가 있는 2층 사무실로 올라오면 될 것을 꼭 1층 대기실로 나를 불러내려 용건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8월경 일본의 후쿠다 전 수상이 방한하여 각하를 모시고 백두진 국회의장, 차지철 경호실장,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뉴관악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나서 샤워장에 들어갔습니다.
백 의장이 맨 먼저 샤워장에 들어갔는데 빨리 나오지 않자 차실장은 샤워장 문을 두드리면서 "빨리 나와요 빨리. 뭘 하는 거요"라고 하면서 "이 늙은 이가 무얼 우물 우물 하는가. 늙으면죽어야 한다"고 독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연장자에 대한 태도가 무례할 뿐만 아니라 항상 각하를 경호한다는 입장을 내세워서 자리나 차량운행 순서에서 자기가 먼저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각하를 모시고 정부종합청사에 갈 때 각하, 총리, 관계장관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차실장은 자리가 좁다는 이유를 대면서 본인보고는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라고 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차지철은 간혹 각하가 출근하기 전에 대통령 집무실에 와서 기다리다가 먼저 들어가 결재를 받고 나오는 바람에 내가 상당히 기다렸다가 결재를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본인이나 장관들이 결재를 받으러 기다리고 있는데 차실장이 각하 집무실 입구 경호원에게 지시하여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 뒤 자기가 와서 먼저 결재를 받는 바람에 장관들이 차 실장이 결재를 받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차지철은 경호실 정보처로 하여금 정치 및 시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각하에게 보고하는데 어떤 사태가 야기되었을 때는 정보부장이 보고차 오기 전에 먼저 보고하여 정보부장이 뒤늦은 보고를 하도록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차지철은 연장자인 본인이나 장관 국회의장 군 선배에게도 님자를 붙이는 법이 없고 오만불손하였습니다. 각하가 방문하는 호텔이나 골프장의 사장들이 각하를 영접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인사하러 나오면 차
실장은 들어가라고 제지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자기 업무도 아닌 정치공작에까지 간여하고 육군참모총장 이세호대장을 주1-2회 정도 자신의 사무실로 부르는가 하면 군내의 주요지휘관들과 장성들을 불러다가 돈도 주고 식사도 같이 하고 하는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치열 법무장관이 군인들과 접촉하는 차 실장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의 핵심에서는 항상 최고 권력자의 귀와 눈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다른 요인보다도 먼저 정보를 올려서 그 권력자의 선입견을 차지하는 것이 이런 권력 게임의 요령이다. 차지철 실장은 권력자의 그림자라는 위치를 이런게임에 활용하고 있었으니 항상 비서실장과 정보부장은 한 발 뒤처지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가부장적 예의범절에 익숙하여 서열을 무시하는 행동을 미워하도록 교육받았다. 특히 군대사회에서는 이 서열의식이 엄청 강하고 예민하다.
그런데 육군대위 출신인 차지철은 육군대장 출신의 비서실장과 육군중장출신의 정보부장, 그것도 나이가 훨씬 많은 두 사람
을 마치 하급자 다루듯이 하고 있었다. 나름대로는 정의감이 있고 울컥하는 성격인 김재규가 입버릇처럼 했다는 "저 자식을 해치우겠습니다"라고 한 말은 그의 가슴속에서 쌓여가고 있었던 증오심의 온도상승을 뜻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받는 모욕과 그의 월권에 대해서 대통령과 담판을 한다든지 정보부의 막강한 정보수집능력을 이용하여 그를 견제한다든지 하는 식의 대응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만한 논리와 배짱이 없는대신에 속으로는 울분만 소리없이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고향 후배이자 육사동기생이고 자신의 비호 아래에서 커온 김재규가 만만해서 그랬는지 여러사람들 앞에서 김재규의 무능을 나무라곤 했다. 이를 본 대통령측근들은 김재규보다 차지철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왜 박정희가 차지철의 월권적 행동과 오만불손한 언동을 방치하고 부추기기까지 했느냐 하는 것이 의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육영수 여사가 죽은 후 일어난 그의 인간적 변모에서 해답을 찾으려한다. 권력을 관리하는 자세가 옛날처럼 엄정하거나 날카롭지가 않고 인간적이고 무디어졌다는 것이다. 아내라는 정신적 안식처이자 견제장치가 사라지니 박정희는 허무적, 감상적으로 변하고 권력의 정상이 겪어야 하는 고독에다가 홀아비로서의 외로움까지 감내해야 했다. 그는 인정과 비정을 잘 조화시켜 권력을 잘 관리해온 사람이었지만 말년에는 점차 긴장감을 잃고 있었다.
비서실장 자리를 제의받았을 때 김계원이 고사하니까 박정희는 "실장 일을 안해도 돼. 나 하고 말동무만 하면 돼"라고 했을 정도였다.
차지철의 오만방자, 김계원의 조정력 부족에 덧붙여서 김재규는 간질환으로 환자와 다름없는 상태에 있었다. 김재규는 오후에는 궁정동에서 몇 시간씩 취침을 해야 건강이 유지될 정도였다.
심할 때는 이동복을 특보로 임명하여 부장이 읽고 결재해야 할업무를 대행시키기도 했다. 1979년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민주화세력의 정치적 도전은 정보부장의 업무를 과중시켰지만 김재규는 이런 난세를 헤치고 갈 만한 머리와 건강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