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선교
- 성남용 목사(삼광교회/총신대학교 목회전문대학원 선교학 교수)
교회와 선교라는 제목이 선교를 교회의 여러 기능 중의 하나로 오해할 여지를 준다. 물론 교회가 선교를 시행하지만 선교는 교회의 어떤 기능이 아닌 교회의 본질이다. 선교를 교회의 기능으로 이해하면 선교에 참여하는 것을 교회의 선택으로 여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하는 교회가 그렇게 많지 않고, 선교하는 교회라 하면 좋은 교회로 여길 뿐이다. KWMA의 통계에 의하면 현재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의 비율은 겨우 15%에 불과하다. 선교를 교회의 본질로 인식한다면 그 비율이 훨씬 높아졌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이 열방에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교회를 세우셨으므로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적이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해서 선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교회가 선교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왜(why), 누가(who) 선교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증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어떻게(how), 무슨(what) 선교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행하는 선교가 선교지의 교회를 세우고 건강하게 하는 대신 교회를 파괴하고 병들게 만들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선교는 타문화권의 영혼을 구원하여 교회를 세우며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사역이다. 이 글에서 위의 모든 질문들에 답을 제시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개략적으로 마음에 품고 글을 전개하려 한다. 큰 주제로 교회를 보내시는 삼위 하나님, 하나님의 선교명령을 실천하는 교회와 그 수단으로서의 선교단체, 선교단체화 하는 교회와 교회의 직접 선교참여, 협력선교를 위한 선교단체와 지역교회의 역할 등을 다룬다.
1. 교회를 보내시는 삼위 하나님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이시다. 성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고(갈4:4), 성자 예수님은 보내심을 받으시며 보내시는 분이시다(요20:21). 아버지와 함께 아들은 성령을 보내신다(요3:34, 요14:26).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들을 보내신다(행13:4).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삼위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래서 ‘선교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에 참여할 길이 없다(There is no participa tion in Christ without participation in his mission)는 휘체돔(1980, 17)의 선언은 성경적이다. 그는 또 하나님이 선택하신 선교도구로서의 교회를 설명했다. 교회는 복음이 이방인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증거이며 우리가 복음을 소유했기 때문에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이방인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이 이방선교를 원하시므로 우리가 교회라 하며 교회의 중요성을 역설했다(1980, 108-109). 교회가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다. 1952년 윌링겐 선교대회를 통해서 정립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개념은 서구교회의 과거 식민지형 선교형태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선교에 대한 고백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개념은 교회의 선교를 하나님의 선교 속에 포함시켜 교회를 세워 영혼구원을 목표로 하는 전통적 개념의 선교를 약화시켰다. 물론 이것은 휘체돔이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후에 서구 교회의 자유주의적 선교노선에 회의를 느껴 프랑크푸르트 선언문에 서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최초 선언문에 서명했던 15인의 신학자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개념은 WCC 진영의 선교대회였던 웁살라(1968년)와 방콕 대회(1973년) 등을 거치면서 인간화를 선교의 목표로 세우게 하는 논리적 토대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선교는 인간화의 과제 속에 포함되는 문화적 명령이나 인권개선, 또는 사회악 제거나 정의로운 사회건설이 아니다. 선교는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따라서 화란의 개혁교회 신학자였던 기스버투스 보에티우스(1589-1676)가 오래 전에 주장한 선교의 3중 목적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선교의 목적을 1)이방인들의 회심과 2)교회개척, 그리고 3)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 했다.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 요하네스 바빙크(1985)도 이방인의 개종, 교회의 확장과 설립을 선교의 궁극적 목적 안에 포함시켰다. 최초로 선교학이란 용어를 사용한 독일 할례대학의 선교학자 구스타프 바르넥1834-1910)도 비기독교 세계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복음 전파를 선교로 정의한 바 있다. 물론 선교사역이 교회개척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교사역은 다양한 형태로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역의 목적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교회가 어린이 교육, 의료, 빈곤퇴치, 구제, 사회복지, 신학 교육, 또는 선교사 휴양소 등의 사역을 감당한다고 해도 그 목적은 교회를 건강하게 하며 교회를 세우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영혼구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어떤 행위도 선교라 할 수 없다. 아무리 부요한 사람들이라 해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없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성도들을 통해서 행하시는 모든 행위를 포괄하지는 않는다.
2. 하나님의 선교명령을 실천하는 교회
하나님은 선교 명령을 성도들의 구원 공동체인 교회에 주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공동체이며 선교는 교회의 어느 한 기능이 아닌 교회의 본질이다(Bosch 1991, 15-16). 만약 교회가 선교공동체가 아니었다면 기독교는 한 때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던 한 종파 중의 하나로 그 생명이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선교 공동체로 존재했기 때문에 지금도 세계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 하나님은 교회에 선교명령을 주셨으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를 시행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선교를 시행하는 도구로 교회 이외의 어느 기구도 주신 적이 없다. WCC 진영에서 웁살라 선교대회를 거치며 교회 없는 하나님의 직접선교개념을 확대하려고 했다. 그때 WCC의 선교신학에 반대하는 독일 선교학자들이 1970년 프랑크푸르트 선언문(바이엘하우스 1982, 119)을 통해서 선교가 교회의 책임과 특권임을 확인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온 세계에까지 뻗어가야 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해야 하는 성스러운 특권과 저버릴 수 없는 책임이 있다.”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9:16)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시작한 이들의 선언은 전 세계 복음주의 진영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나님이 회심한 사도 바울을 10년 이상 고향 다소에 머무르게 하신 것은 의미가 있다. 그가 회심한 후에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안디옥교회를 대표한 바나바가 그를 사역의 자리에 불러주기까지 그는 선교사역을 시작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그를 부르셨고 교회를 통해서 사역을 시작하게 하셨다(행13:1-3). 교회가 그를 안수하여 보낼 때까지 하나님은 그를 기다리게 하셨다. 복음에는 세 가지가 포함된다. 복음을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의해 변화되는 곳에서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을 가지고 보내심을 받는 세상이다. 이 셋은 서로에게 속해 있으며 거룩한 복음의 삼각구조를 이룬다. 그래서 이 셋 중에 어느 하나가 빠져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구원을 체험한 성도들은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는다.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아 제자를 삼고 교회를 세워 재생산을 하니 복음이 선교를 포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선교는 교회의 존재목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정의하는 선교는 교회의 선교로서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고, 영혼을 구원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다. 이는 개혁가들의 선교에 대한 이해이기도 했다. 교회는 성령을 의지하고 말씀과 행동으로 전인적인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선교의 적법한 실천자다. 그래서 모든 교회는 선교적 교회다(missional church). 선교적 교회는 예수님이 성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음을 아는 공동체이며, 자신의 상황과 처한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기를 다짐하는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이며,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선교사의 삶을 사는 성도들의 공동체다. 따라서 예수님이 종의 형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것처럼, 교회는 선교적 목적을 실천하기 위하여 세상의 문화와 환경 속으로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3. 교회의 선교를 시행하는 수단으로서의 선교단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룬 예수 공동체다. 그 공동체가 해야 할 것들이 많다. 예배와 교육, 교제와 섬김, 복지와 치유, 전도와 선교를 위한 여러 일들을 감당한다.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교회의 주요기능들이다. 이런 여러 기능들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려면 선교는 언제나 여러 기능 중에서 우선순위가 밀리는 보조기능에 처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의 본질인 선교를 효율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선교적 사역만을 위한 특수공동체, 선교를 위한 소달리티의 도움이 필요하다. 실제로 중세의 교회가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배경에는 수도원운동이 있었다. 수도원은 교회의 선교도구역할을 감당했다. 베네딕트 수도원이나 이그나티우스의 예수회 같은 기관들이 선교 소달리티 역할을 감당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개혁가들이 그런 선교공동체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개혁교회들은 수도원 같은 선교를 위한 소달리티를 갖지 못했다.
윈터(2001)나 교회사학자 라투렛(1978) 등은 바로 그 때문에 개혁교회가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회복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개혁가들의 신학사상이 선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역이 활발하게 시행되지 못한 이유다. 모달리티와 소달리티의 특성에 대해서는 랄프 윈터(2001)가 교회의 이중구조에서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윈터는 교회를 성, 연령, 직분, 능력 등의 구분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모달리티로, 선교단체는 제 2의 결단을 요구하며 목적에 따라 제한을 두는 소달리티로 설명했다. 그리고 교회의 선교를 위한 소달리티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선교를 위한 소달리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윈터 이외에도 많은 선교지도자들이 지적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암 케리가 ‘이방인들의 개종을 위한 수단의 사용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의무에 관한 탐구(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교단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침례교 교단 선교부(BMS)를 세웠고, 그 단체를 통해서 인도선교에 참여했다. 개혁교회의 선교운동을 위한 제2의 개신교 수도원운동인 셈이다. 하지만 케리가 그 수단에 대해 언급하며 선교단체를 세울 때까지 거의 300년 동안 개신교진영에서는 선교를 위한 아무런 도구도 없었다. 케리 이후 많은 교단 선교부들이 일어났고, 또한 사역중심의 믿음 선교회들, CIM이나 SIM같은 소달리티가 활성화되었고, 더불어 선교사역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의 효율적 사역을 감당하는 수단으로서의 소달리티인 선교단체와의 적극적인 협력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4. 선교 단체화하는 교회
교회가 대형화되고, 타문화권의 교회나 교인들과의 접촉이 용이해지면서 선교단체를 통하지 않고 직접 선교에 참여하는 지역교회가 늘어나고 있다. 마치 중간단계 없이 소비자와 생산자가 직접 연결되는 직거래를 연상케 하는 현상이다. 교회를 목회하는 교역자들이나 교인들이 소위 선교지라고 여겨지는 지역을 방문하거나 유학의 목적으로 한국에 온 현지 지도자를 선정하여 현지 선교사로 임명하며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 이런 직접선교 형태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현상이며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더 많다. 그 중의 몇 가지를 지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현지 교단의 지도자들 간에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시킬 수 있다. 2) 현지에 쌀 신자를 양산할 수 있다. 3) 중복 사역을 피하기 어렵다. 4) 현지지도자가 교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것이 아닌 파송한 교회와 지도자의 의향을 살피는 해바라기형이 되게 할 수가 있다. 5)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부요한 외국인을 의지하게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채택이 되었던 네비우스 정책의 실현이 어려워진다. 네비우스(곽안련 1994)는 교회를 부흥하게 하려면 선교사가 조력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현지인을 고용하여 사례비를 지불할 때 따르는 폐해를 역설했다.
선교적 상황은 달라져 있지만 예상되는 결과는 달라질 것이 없다. 또한 교회가 자립하여 교역자를 돌보게 하는 것은 성경적이다(갈6:6). 책임감과 자립정신이 교회를 부흥하게 하기 때문이다. 도움을 받게 되면 점차 외부에 의존하게 되고 희생적 헌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 선교현장의 현실은 결코 밝지 않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교회의 직접참여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현지 지도자들을 고용하여 지원할 때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1) 사역이 안정적으로 계속될 수 있다. 2) 교회개척이 빠르게 증가할 수 있다. 3) 목회자가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다. 4) 목회자의 지속적인 교육이 가능하다. 5) 목회자가 물질적 어려움 없이 가정을 잘 돌볼 수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부분도 적지 않다. 1) 목회자와 성도들 간에 결속력이 약화될 수 있다. 2) 성도들이 목회자의 생활이나 교회의 발전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다. 3) 교회성장이 역동성을 잃고 정체될 수 있다. 4) 목회자가 나태해지고 성장에 대한 동기부여가 약해질 수 있다. 5) 목회를 생계수단이나 노후 대책의 일환으로 여길 수 있다. 6) 지원받지 못하는 사역자들의 질투와 불만이 있을 수 있다. 7) 지원받는 사역자들 간에도 서로 비교하며 상대적 빈곤감을 갖게 할 수 있다. 8) 지원이 중단되면 사역도 중단될 우려가 있다. 9) 목회사역을 물질적 보상을 위한 조건으로 여길 수 있다. 직접선교를 통해 부정적인 결과를 얻은 사례들은 손으로 꼽기가 힘들 정도로 많다. 하나의 예를 들면,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A 교회의 지도자들이 직접 P국의 선교지를 탐방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신실하고 훌륭한 현지인 목회자를 만났다. 그 목회자는 주변사람들이 인정하는 신실한 목회자였다. 선교지를 방문했던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목회자를 자신들의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고 지원을 시작했다. 지원하는 중에 현지의 필요에 따라 큰 예배당 건물도 지어주었다. 그리고 교회가 자립되었다고 여긴 그 파송교회는 지원을 중단하고 교회가 자립하도록 권고했다. 그러자 그 교회를 목회하던 목회자는 그 교회의 2/3 정도를 막아 사립학교를 세웠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자신의 몸값에 대한 사례를 지불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교회에서 사례를 받지 않고 그 학교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가지고 생활을 해야 되기 때문이라 했다. 직접 선교를 시행한 결과 그 파송교회는 신실한 목회자를 변질시키고 지역교회를 사업처로 변하게 한 것이다. 또한 교단들도 선교를 위한 소달리티인 선교회를 직접 조직하여 선교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교단들의 이런 변화는 선교하는 교회를 지원하는 도구로 선교한국에 큰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혼란과 비효율 역시 피할 수 없이 치러야 할 값이다. 현재 선교지는 개척기의 모습이 아니다. 그동안 현대선교가 시행된 200여 년 동안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사역을 해왔고 계속하고 있다. 자연히 유무형의 선교인프라가 많이 축적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들은 새로 구성한 선교회를 통해서 마치 개척기의 선교지처럼 너도 나도 선교지 개척에 참여하고 있다. 그 형태는 모든 사역과 모든 나라를 포함해서 구색을 맞추는 백화점식이다. 중복과 경쟁, 그리고 선교자원의 낭비를 피할 수 없다. 또한 선교지에 외세 의존형 지도자들을 양산하고 교회의 자립을 저해할 수 있다.
5. 교회의 직접 선교 참여
현재 지역교회들이 선교단체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선교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를 지적할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선교단체의 전문성이나 투명성에 대한 교회의 불신 때문이다. 이런 불신이 선교단체를 통한 선교사역의 효율성에 대한 의심을 품게 하고 직접선교에 참여하게 한다. 그 외에 타문화권과의 접촉기회가 넓어져 선교지와의 직접적인 교류가 활발해진 것도 이유가 된다. 물론 직접선교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부정적인 결과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다음은 지역교회가 직접 선교에 참여할 때 예상할 수 있는 긍부정의 요소들이다.
1) 교회가 직접 선교에 참여할 때, 예상되는 긍정적인 결과 (1) 교인들의 선교참여를 높일 수 있다. 동기부여를 하기 쉬워서 선교를 위한 인력동원, 재정확보, 중보기도 등에 교인들의 참여율이 높아질 수 있다. (2) 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세계선교에 책임감을 갖는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다. (3) 교회의 여러 기능이 선교사역과 함께 시너지효과를 일으키며 활성화될 수 있다. (4) 선교교육을 통하여 교회의 선교비전을 적용하기가 더 용이하다. (5) 교회가 선교적 필요에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다.
2) 교회가 선교에 직접 참여할 때, 예상되는 부정적인 결과 (1) 선교현장에 대한 정보의 제한성 때문에 타문화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 있다. (2) 선교현장과의 연계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통합적 선교를 시행하기 어렵다. (3) 선교에 관한 전문성이 부족하여 효율적이거나 능률적인 선교사역을 하기가 어렵다. (4) 교회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선교사의 관리가 쉽지 않다. (5) 조정기관이 없기 때문에 특정한 지역이나 사역에 중복투자가 불가피하고 소외된 지역은 방치되어 갈등을 유발하기 쉽다. 자원의 낭비와 중복, 그리고 편중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6) 시행착오를 피할 수 없다. (7) 선교하는 교회들 간에 정보를 공유하기가 어렵다. (8) 큰 교회만 선교할 수 있다고 여겨 작은 교회들의 참여를 더 어렵게 할 수 있다. (9) 선교사는 협력사역을 하기가 어려워져, 사역의 영역이 축소되거나 단절되기 쉽다. (10)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사역을 진행하기 어려워 사역의 지속성이 손상될 수 있다. (11) 선교사가 사역의 결과에 더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조급해지기 쉽다. (12) 선교사에 대한 장기적 돌봄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13) 선교지의 선교사역이 파송교회의 선교정책에 따라 영향을 받기 쉽다. (14) 선교현지 상황을 무시한 문화이식적 한국교회가 선교지에 세워질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선교현장에 교단이 난립할 수 있다. 1990년에 세계교회의 교단은 2천개가 채 되지 않았지만 현재는 3만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 선교지의 재산권에 대한 처리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다.
6. 교회와 협력선교
앞으로의 선교는 교회와 선교회의 협력과 함께 교회와 교회, 선교회와 선교회의 다양한 형태의 협력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역교회는 선교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교단선교부나 특수 목적을 위해 설립된 선교단체와의 협력이 필요하다. 교단선교부를 포함한 모든 선교단체들은 사역을 특성화하여 전문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문성에 따라 서로 선교사들을 위탁하여 사역하게 하는 선교의 전문형 분업화와 맞춤형 선교를 가능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한 선교단체가 모든 사역을 다 감당하려 하지 말고 특화시켜야 한다. 또한 각 선교단체는 백화점식으로 전 세계에 선교지를 가질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한다. 홀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시행하기에는 지역이 너무 넓고 사역은 다양하다. DMG라는 독일의 한 선교단체는 독자적인 선교지가 없는 선교단체로 유명하다. 그들 선교회에 속한 300여명의 선교사들은 모두 60여개의 선교단체들을 통하여 파송되어 사역하고 있다. DGM의 모토는 사역을 위해 가장 적합한 선교단체들과의 협력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전 세계의 교회가 하나의 교회라는 무형교회에 대한 신학의 고백이며 선교 패러다임의 변화다. 이렇게 되면 선교지의 효율적 관리가 가능하고 협력하는 선교회의 선교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 선교의 목적이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면 그 목표를 가장 효율적으로 성취할 수 있도록 DGM처럼 자신을 녹여 교회를 세우는 협력도 필요하다. 또한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교회와 선교단체들은 자신들의 한계에 대한 현실적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역을 특성화 전문화하여 교회에 기여할 만한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협력의 시너지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7. 선교단체의 역할
선교단체는 교회의 선교과업을 시행하는 수단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존재이유가 교회와의 경쟁이 아닌 교회의 효율적 선교를 돕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특별한 선교적 도구다. 그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선교단체들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1. 전문성(expertise)과 효율성(efficiency)이 있어야 한다. 사역에는 선교단체의 특성을 살려 전문적인 영역을 개발해야 한다. 만약 이런 전문성을 갖지 못하면 소달리티화하는 교회의 선교조직에 도전이나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사역의 방향과 과정, 사역의 내용과 결과가 효율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미전도 종족 입양운동 같은 사역은 지역교회가 홀로 감당할 수 없는 특성이 있어서 선교단체의 도움과 안내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또한 선교사들의 후생과 복지, 은퇴설계에 대한 실재적 조언과 협조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져 교회와 선교사들이 함께 협력하고 싶도록 해야 한다. 선교사에게는 가정과 같이, 교회에는 유모같이 선교적 과업을 시행하는 전문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2. 유연성(flexibility)을 갖추어야 한다. 선교적 환경에 따른 변화와 그에 알맞은 행정조직을 갖추어야 한다. 체제의 유연성을 유지하고(not institution but movement) 선교환경에 맞추어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
3. 투명성(transparency)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대체적으로 투명하게 관리되고 있다. 선교단체는 특수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으므로 교회보다 더 투명하게 재정, 행정, 사역의 내용 등이 교회에게나 선교사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그러면 선교단체가 선교현장을 효과적으로 감독(supervise)한다고 믿어 교회가 협력하기 용이할 것이다.
4. 전략적 목표들(strategic goals)이 있어야 한다.
선교사역, 선교지 교회와 타 선교단체와의 협력문제. 사역을 위한 동원과 집행 등을 장단기의 전략적 목표에 따라 추진해야 한다. 즉흥적이거나 혼란스러운 사역은 교회의 협력을 얻기가 어렵다.
8. 지역교회의 역할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지역교회가 선교에 깨어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그러려면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교회의 본질이 선교라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선교적 인식이 구체화될 수 있도록 케리가 지적했던 선교의 수단들이 지역교회에도 필요하다.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수단으로는 교회의 전 계층이 함께 참여하는 선교위원회가 있다. 선교위원회가 선교하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게 하는데 다음과 같은 도움을 줄 수 있다. 1)선교사 파송과 지원 등을 감당한다. 2)성도들에게 꾸준한 선교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다. 3)선교를 위한 자발적인 선교기도 팀이 구성될 수 있도록 한다. 4)단기선교와 같은 모든 교인들이 참여하는 선교 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시켜 선교에 참여하는 영역을 확대한다. 5)어린이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전교인이 기도와 물질로 선교에 참여하도록 독려한다. 그리고 지역교회가 홀로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데는 많은 한계와 함께 부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전문 선교단체와 협력하도록 힘써야 한다.
9. 글을 마치며
삼위 하나님이 선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개혁주의자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라는 단어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개혁교회들이 사용하기를 꺼려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런 성경적 의미를 담은 용어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상황화(contextualization)라는 용어를 재해석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교라는 용어를 재해석하여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선교하시는 하나님이 세상에 교회를 보내시며 교회를 통해서 선교하게 하신다. 그래서 선교는 교회의 목적이기도 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실천하는 선교의 유일한 도구다. 따라서 보내심을 받은 교회는 하나님의 뜻인 교회를 세워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물론 여러 가지 사역을 시행할 수는 있지만 교회를 세우고 건강하게 하는 목적을 벗어나면 안 된다. 교회가 선교를 효과적으로 시행하는 방법으로 선교단체와의 협력은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현실은 지역교회나 교단들이 선교단체화하고 있다. 자칫 선교지에 혼란과 비효율, 중복과 갈등을 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선교단체를 전문화하고 특성화시켜 교회가 협력하여 효율적 선교가 가능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교회와 선교단체는 경쟁구조가 아닌 보완과 협력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 1998년 유럽의 교회, 선교단체, 신학교 대표들이 1997년 남아프리카 선교대회의 후속으로 함께 모여 한 몸-한 사명(one body- one commission)을 모토로 하여 “교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다”를 외치며 교회 안에 선교단체와 신학교육 기관을 포함시킨 정신으로 함께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 하나님이 교회에게 명하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시급하고 막중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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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 곽안련 (1994).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박용규 김춘섭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바빙크, J.H. (1985). 선교의 성서적기초. 김명혁역, 성광문화사. 바이엘하우스, 피터 (1982). 선교정책원론. 김남식역. 성광문화사. 윈터, 랄프 (2001). 교회의 이중구조. 백인숙역. IVP. 휘체돔, 죠지 (1980). 하나님의 선교. 박근원역. 대한기독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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