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곡서원(孝谷書院)
소재지 : 상주시 공성면 용신리 324-1
건축주 : 상주 유림
건축시기 : 1685년(숙종 12)
중건시기 : 1968년
☸효곡서원은 1685년(숙종 11)에 우곡 (愚谷) 송량(宋亮)을 배향한 세덕사(世德祠)로 공성면 소곡리에 창건되었다. 본 손들이 선생 한 분을 배향하였으나 지세가 좁고,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이동이 불편하여 1724년 각회산(角回山) 아래로 옮겨 세우고, 서대(西臺) 김충(金冲), 월봉(月峯) 고인계(高仁繼) 두 선생을 추배하여 1735년(영조 11)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80년 각회산 아래에 있던 서원을 현 위치인 용신리 절골로 이건하였다. 1786년 (정조 10)에 일묵재(一黙齋) 김광두(金光斗)를 추배하여 네 분을 모시는 서원이 되었다. 1870년에 훼철되었다. 1931년 일제강점기에 유림의 발의로 상주 관아서 사용하던 건물의 부재를 구입하여 강당을 복원하고, 1968년에 묘우를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우곡(愚谷) 송량(宋亮)의 학문과 사상 = 우곡(愚谷) 송량(宋亮)선생은 1534년(중종 29)에 상주 소곡리(素谷里)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자는 경명(景明)이며 호는 우곡(愚谷)입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기질과 도량이 넘쳐서 주변에서는 ‘원대한 그릇’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도(孝道)하여 향방(鄕邦)의 부러움이 되었습니다.
선생이 어렸을 때는 부친이신 호군공(護軍公)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항간의 잡서(雜書)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였고 더불어 노는 이도 단아(端雅)한 선비가 아니면 바로 나무라는 등 매우 엄하게 자식 교육을 시켰습니다. 더 성장해서는 성운(成運)의 문인이 되어 성리학에 전념하면서 인격 수양에 크게 감화를 받았습니다. 즉, “성대곡선생을 쫒아서 지극한 이론을 널리 듣고는 몸소 충분히 터득하고 마음에 새겨 행하여 거경궁리함으로서 근본의 바탕을 삼았다. 그리하여 혹시라도 나태함이 없었다. 혹 과거에 응시함이 이롭다는 말을 하는 이가 있으면 부군께서 말씀하시기를, ‘명예가 나에게 있어서는 마치 뜬 구름과 같을 뿐 아니라, 나의 허다한 정력을 자질구례한 기예에다 헛되이 소비하여 세상에 자랑함이니 또한 부끄럽지 않은가?” 라고 하셨습니다.
선생은 1566년(명종 21) 불기당(不欺堂) 노기(盧麒)・복재(復齋) 정국성(鄭國成)과 함께 낙사계(洛社契)를 창설하여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조약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는데 힘썼습니다. 이때 선생은 낙사계 서문을 썼는데, 조약 11조를 제정할 때는 스승이신 대곡(大谷) 성운(成運)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그 뒤 1580년(선조 13)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선생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향강(鄕講)을 설치하고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였는데 서애(西厓)선생은 우곡 선생의 정통(精通)함에 감탄하였습니다.
또한 선조(宣祖)가, “재능이 수령이 될 만한 자를 천거하여 국가가 파격적으로 등용하라”는 지시를 했을 때, 비변사에서는 30인을 천거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우곡(愚谷) 송양(宋亮)선생이었습니다.
선생이 48세 되던 1582년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선생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향토민들이 ‘소곡(素谷)’이라는 동네 이름을 ‘효곡(孝谷)’으로 바꾸었으며, 한강(寒岡) 정구(鄭逑)나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등이 조정에 선생을 천거할 때도 효행(孝行)과 학행(學行)이 전제되었습니다. 또한 제자인 부제학 이준(李埈)선생은 만시(輓詩)에서,
“정성깊이 죽은이 섬기기를 산이 섬기기와 같이 하고 첩첩산중에서 옛집을 지키네. 소곡(小谷)이 이제부터 효곡(孝谷)이라 이름하니 고요하게 삶은 본시 신선(神仙)이 사는 것과 같다는 구절이 있으니 이에 사실대로 기록함이라.” 하며 스승의 효성을 극찬하였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초에 왜군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은 선생은 위험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향교에 있는 선성(先聖)의 위판(位版)을 묻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웃마을 사람들이 곡식을 많이 묻고 피난간 사실을 안 굶주린 향민들이 선생에게 물은 즉 ‘곡식의 주인이 없는데 그 곡식을 파내는 것은 크게 불의(不義)함이라. 아사(餓死)의 일은 작고 불의(不義)의 명분(名分)은 크니 깊게 생각지 아니함이 어찌 이렇게 심하리요’ 하니 다들 부끄러워하며 해산하였습니다.
그리고 1592년 선생의 나이 58세 때 김각(金覺)ㆍ이전(李琠)ㆍ이준(李埈)선생 등과 의병을 일으켰을 때 선생은 소모관(召募官)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듬해에 백화산(白華山)으로 피난 중에 왜적의 급습을 받아서 위급한 지경에 빠지자, 아버지를 구하려다가 장자(長子) 이회(以誨), 차자(次子) 이필(以弼)이 순절하였습니다. 또한 선비 노경건(盧景健)에 시집간 딸, 선비 정이괄(鄭而适)에게 시집간 딸들도 시부모께 효하고 남편을 따라 자결하여, 일가(一家)에서 충(忠)・효(孝)・열(烈)이 나온 귀하고 보기 드문 집안으로 향토의 미풍양속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선생은 출세를 위한 과거시험에는 뜻한 바 없이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만 전념하였으나 선생의 학행과 효행 때문에 천거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특히 1593년(선조 26) 정구(鄭逑)선생의 천거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을 때 주변에서는 선생이 고령(高齡)이고 나라가 전쟁 중이기 때문에 부임하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위급한 때를 당하여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음은 곧 자신만 있음이요 군부(君父)는 없음이다.”라고 부임을 강행하였습니다.
선조가 환도 후에 각 능을 봉심케 하니, 대부분 능침(陵寢)의 제사(祭祀)를 폐하고 능재(陵齋)를 지키는 사람이 드물었으나 오직 헌릉만은 하루라도 지키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는 중사순심(中使巡審)의 환고(還告)를 받으신 선조는 ‘심히 가상(嘉尙)하다’면서 선생을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에 천제(薦除)하였습니다.
그 뒤, 선생은 다시 전옥서주부(典獄署主簿)에 천제(遷除)되었으나 노령(老齡)이라는 구실로 사직하고 선영(先塋)곁으로 돌아와 신석(晨夕)으로 성배(省拜)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가묘(家廟)에 고(告)하고 친한 벗의 부음(訃音)이 와도 그렇게 하여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기와 같이 하였습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선생의 효성(孝誠)스러움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나라에서 정려를 내려 효행을 기리고 향토에서는 ≪상산지(商山誌≫에 효자로 입전하였습니다. 또한 노경건에게 시집간 딸이 부군을 따라 순절하였고, 정이괄에게 시집간 딸 역시 피난길에 부군의 부자가 같이 병사하자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남편을 따라 자결하여 수절하니 나라에서는 열부로 정려하고 향토에서는《상산지(商山誌》에 열부로 입전되었습니다.
이러한 선생 일가의 충효(忠孝)에 대해서 허후(許厚)는,
“가정. 교훈 역시 말로 표현하지 않고 바른 도리를 쫒아 효우할 뿐이었다. 선생은 평생 자신을 굽혀서 남의 비위맞춤을 수치로 여기어, 비록 세상에 드러나게 쓰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아감에 예(禮)가 있고 물러남에 의(義)가 있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선생의 집안은 자랑스러운 일가충효열(一家忠孝烈)의 가문이었습니다. 이는 향풍 쇄신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고결한 조선혼(朝鮮魂)을 임난사(壬亂史)에 길이 남기었습니다.
선생은 1594년에 통훈대부(정3품 당하)에 특진되었고, 1598년에는 한성참군이 되었으나 이미 선생의 나이가 65세나 되었기 때문에 모두 사직하고 고향에 효곡정사를 지은 뒤 주자학에 침잠하여 공부하고 후진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김각(金覺)・정경세(鄭經世)・이전(李琠)・이준(李埈)・김광두(金光斗)선생 등과 낙사계(洛社契)를 합계하여 존애원(存愛院)을 창설하는 등 향풍쇄신에 앞장 서셨습니다. 그리고 1606년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설할 때도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선생은 유교의 이념을 몸소 행한 분으로 충효(忠孝)의 표본이라 일컬을 만합니다. 선생이 도남서원 창설에 솔선하였던 배경은, “때는, 큰 난리의 뒤를 당하여 향리에는 선한 풍속이 없고 선비들은 지향해야 할 일에 어두웠다. 이른바 학문한다는 선비들은 다 명예를 구하는 사사로움에 나아가 끝내 공정한 도에 들지 못하였다. 부군께서는 일찍이 이를 걱정한 까닭에 동지 제현과 더불어 오현원(五賢院)을 낙동강 위에 창건하고, 조문으로 된 규정을 정하고 세워 학자로 하여금 귀의할 바가 있게 하고 권장하여 이끌어 보살핌에 있는 힘을 다하니, 사람들이 마음을 다하여 본 받으려 하여 심복치 않는 이가 없었다.” 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선생이 뿌려 놓은 충효사상(忠孝思想)은 문학으로서도 길이 남을 만큼 높았습니다. 1607년 낙사계가 개최한 백수회(白首會)에서 선생이 쓰신 🔹️<존애원백수회추차(存愛院白首會追次)>를 보면,
上洛州南里 상락주의 남쪽 마을에
選期遂盍簪 날 잡아 선비들 다 모였네.
蘭薰同密契 난향 나눈 친밀한 계군이요
竹性戒虛心 죽성은 허탄한 마음을 경계한다네.
流水勤日月 세월은 날(日月)을 아끼라는데
高山閱古今 높은 산은 고금을 열람시키네.
樽前□□□ 술잔앞(以下 落字)
□□老來禁 (落字)늙으막에 금했네. 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유거(幽居)>란 시를 보면,
獨捕搖琴十載遊 혼자 가야금 안고 지낸 지 십년
數椽新築水環丘 몇 칸의 새집을 물 가 언덕에 세웠네.
篇中賢聖言言的 책 속 성현 말씀 말씀마다 적실하고
物外煙霞事事幽 세상 밖 연하엔 일마다 그윽하네.
人間夜久方塘月 한가한 밤 이슥해 연못엔 달이요
門閑山深桂樹秋 집안 조용하고 산 깊은데 계수나무는 가을일세.
存心暇日尋眞處 존심(存心)으로 여가마다 진실처를 찾고
愛賦田園芋栗收 전원에서 읊조리며 토란과 밤을 줍네. 라고, 은자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적었습니다. 그러나 임진란을 겪고 난 뒤 큰 아들이 병화에 순절한 일을 회억하며 지은 🔹️<난후환고거(亂後還故居)>(권(卷)1)을 보면,
古里荒凉烏雀喧 옛 마을 황량한데 새들만 지저귀고
滿庭草鞠寂人痕 뜰 가득 잡초 자라 인적도 적적하네.
吾生未死霜鬢髮 내 죽잖아 터럭은 서리같은데
國事常危㤼夢魂 나랏일 아직도 위태해 꿈 속 혼이 놀라네.
爲父寃兒身後恨 원사한 아들 아비되어 살아 있음 한스러운데
無孫埋土淚先言 손자없는 자식 묻으니 말 앞서 눈물일세.
落花盡日靑山裏 진종일 꽃 지는 푸른 산 속에
獨望蒼天不掩門 외로이 청천을 우러러 문을 닫지 못하네. 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의병으로서 국가 위난에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전후에 황폐한 고향에 돌아와 순절한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통한을 경연(頸聯)에 절절히 풀어 놓았습니다.
이처럼, 선생은 유학자로서 효와 충을 실천한 선비이기도 하지만 문학에서도 설리적인(說理的)인 시문(詩文)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1602년에 조정에서는 선생에게 다시 사포서 별제ㆍ사헌부 감찰의 관직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향토의 존경받는 선비로 학문과 향토 선속(善俗) 회복에 선봉장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7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조선 도학의 정통성을 표방하는 도남서원(道南書院) 창설에 앞장 서셨습니다.
이렇듯 상산선비로서의 임무를 다하신 선생은 1618년 12월 9일에 85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습니다.
저서로는 우곡문집(愚谷文集)4권 2책이 있고 상주의 효곡서원(孝谷書院)에 배향되었습니다. [상주문화원장 김철수]
✳동고 강신(東皐 姜紳)
시대:조선
출생:1543년(중종38)~1615년(광해7)
경력:승지, 강원도관찰사, 경기도관찰사, 좌참찬
유형:인물
관련사건:정여립의 옥사, 임진왜란, 정유재란
직업:문신
성별:남
분야:역사/조선시대사
본관:진주(晉州)
☸개설 =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면경(勉卿), 호는 동고(東皐). 강영숙(姜永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온(姜溫)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강사상(姜士尙)이며, 어머니는 임간(任幹)의 딸이다. 강사안(姜士安)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 1567년(명종 22) 수석으로 진사가 되고, 1577년(선조 10)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89년 문사랑(問事郎)으로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의 처리에 참여하여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진흥군(晉興君)에 봉해졌다.
이조낭관·홍문관직을 역임하고, 1592년 승지·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함경도순찰사를 거쳐, 1594년 도승지, 1596년 서북면순검사(西北面巡檢使)와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와 함께 왜군을 격퇴한 뒤에 1602년 경기도관찰사, 1609년 우참찬, 다음해 좌참찬을 역임했다.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의간(毅簡)이다.
☸진주강씨(晉州姜氏)《성씨의 고향》(중앙일보사, 1989, p 39-40) 씨족(氏族)의 연원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이다. 영양왕 9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5만 군사를 이끌고 요서(遼西)지방에 출정해 공을 세우고, 뒤이어 수(隋) 문제(文帝)의 30만 대군을 임투관(臨渝關) 싸움에서 크게 무찔렀다. 그런데 일반사서 (一般史書)에는 그의 이름이 없어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것을, 단재(丹齋) 신채호 (申采浩)의 사실(史實) 천착의 결과 임투관전투(臨渝關戰鬪)에서는 병마원수 (兵馬元帥)로, 살수대전(薩水大戰) 때는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출진(出陳) 한 기록의 문헌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하고 진주(晋州)를 관향(貫鄕)으로 삼기는 신라 말에 태중대부(太中大夫) 판내의금(判內議今)을 지낸 강진(姜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정순공(正順公)으로 진양후(晋陽侯) 에 봉해진 분이다. 숭인전(崇仁殿) 사운과(四韻科)에 등제(登第), 앞서와 같은 벼슬을 하였는데 그 관직은 당(唐) 나라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둔 뒤 평양(平壤) 지방의 준재(俊才)를 뽑아 임명한 벼슬이라는 것이 통설(通說)이다. 구보별록(舊譜別錄) 계서도(系序圖)를 보면 그는 시조 강이식(姜以式)의 후손 강운기(姜雲紀), 강수손(姜秀孫), 강괘(姜卦), 강극용(姜克庸), 강택인(姜擇仁)에 계대(系代)하고 있다.
진양(晋陽)은 진주(晋州)의 옛 이름이므로 같은 본(本)이면서도 관향(貫鄕)을 진양(晋陽)과 진주(晋州)로 하는 계열이 있다. 따라서 인헌공파(仁憲公派)를 제외한 4파(派)는 관향(貫鄕)을 진주(晋州)로, 인헌공파(仁憲公派)는 (示+令)川을 본관으로 써 왔다.
본관지(本貫地)연혁:진주(晋州)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인데 신라 문무왕이 빼앗아 주(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 때는 거주(居州)를 분할해서 진주총관(晋州摠管)을 설치하였으며 경덕왕 때 강주(康州) 라 개칭하였다.고려조 성종 2년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14년 진주(晋州)라 고쳐 절도사(節度使)를 두었고 현종 때는 안무사(按撫使)로 개칭하였으며 뒤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조선조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진양대도호부(晋陽大都護俯)로 승격시켰는데, 태종 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목(牧)으로 만들었다.주요 성씨로는 강(姜), 정(鄭), 하(河), 유(柳), 임(任), 강(康), 임(林), 주(周)씨 등이 있었다.
파명록(派名錄):박사공파(博士公派), 소감공파(少監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인헌공파(仁憲公派)
주요 세거지(世居地)와 변천:‘계해보(癸亥譜)’에 의하면, 5세 이상의 상계(上系)의 묘영(墓塋)이 관향(貫鄕)인 경남 진주(晋州)와 합천(陜川)의 초계(草溪) 등지에 있으므로, 이들 지역에 일찍이 자리잡고 살았던 것 같다.박사공파(博士公派)를 중심으로 보면, 6세 강창부(姜昌富)의 자손들은 강창부(姜昌富)의 손자인 강손기 (姜孫奇), 강손수(姜孫壽)의 대 이래로 의녕(宜寧)땅에 터를 정하여 많은 자손들이 그곳에서 세거했다고 믿어진다. 그 중 일부는 14세 강헌지(姜獻之)가 의녕(宜寧)에서 밀양(密陽)으로, 12세 강이성(姜以成)이 울주(蔚州)의 언양(彦陽)으로 옮겨갔으므로 이후에 이들 지역에 세거하였던 것 같고, 그밖에 대체로 12 ∼ 14세의 대에 걸쳐 창녕(昌寧)의 영산(靈山), 고영(高靈) 등지로 산거(散居)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5세 강전보(姜畋寶)의 8대손인 강복명(姜復明)의 후계(後系)가 경북 달성(達成)에, 강복진(姜復振)의 후계(後系)는 경남 거창(居昌)에 많이 살았고, 11세 강효정(姜孝貞)의 후계(後系)는 경기도 광주(廣州)에 터를 굳혔다. 4세 강창귀(姜昌貴)의 현손(玄孫) 강종덕 (姜宗德)의 자손들은 초기에 경기도 장단(長湍), 연천(連川) 등지에서 살다가 13세 강신(姜信)의 대에 일부가 충북 제천(堤川)으로 옮겨가 살기 시작하였고, 10세 강거의(姜居義) 이래로 전남 화순(和順)에, 15세 강모노(姜模老) 이래로 경북 울진(蔚珍)의 평해(平海) 등지에 정착한 후손들도 있는 것 같다.그리고 11세 강세운 (姜世雲)이 큰아버지를 따라 평양(平壤)에 갔다가 그곳에 머물러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10세 강거효(姜居孝)의 자손들은 12∼15세에 걸쳐 경북 안동(安東), 영주 (榮州), 강원도 홍천(洪川), 전북 남원(南原)의 운봉(雲峰) 등지에 나뉘어 정착했다고 믿어진다.9세 강자의(姜子儀), 강자보(姜子保)의 후계(後系)는 경북 예천 (醴泉)의 감천(甘泉), 용궁(龍宮) 등지에서 살다가 10세 강계굉(姜繼肱) 후에 일부가 문경(聞慶), 상주(尙州), 함양(咸陽), 보은 (報恩), 금산(錦山), 용인(龍仁), 여주(驪州) 등지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지역에 진주강씨(晋州姜氏)의 세장지지 (世葬之地)가 있기 때문이다.한편 8세 강우덕(姜友德)의 자손들은 진주(晋州)와 경기도 양평(楊平) 등지에서 살다가 11세 강자성(姜自盛)의 후계(後系)가 성종 15년경 평북 창성(昌城)으로 옮겨간 이후 창성(昌城)을 비롯하여 운산(雲山), 강계(江界) 등지에 산거(散居)하였다. 강우덕(姜友德)의 동생인 강진덕(姜進德)의 후계(後系)는 9세의 대에 경남 합천(陜川)과 황해도 연백(延白)에 나뉘어 세거한 것 같다. 그리하여 1930년경에 이르러 진주강씨(晋州姜氏)의 자손들이 번연(蕃衍)하여 전국 각지에 산거(散居) 하게 되었으며 특히 경기도 강화(江華), 전북 순창(淳昌), 전남 여천(麗川), 영광(靈光), 경북 안동(安東), 상주(尙州), 경남 진양(晋陽). 의녕(宜寧). 고성(固城). 사천(泗川). 산청(山淸). 남해(南海). 함양(咸陽). 합천(陜川), 제주도 북제주(北齊州). 남제주(南濟州), 황해도 벽성(碧城). 안악(安岳). 연백(延白), 평남 용강(龍岡). 덕천(德川), 평북 박천(博川). 정천(定川). 창성(昌城). 강계(江界), 함남 정평(定平). 홍원(洪原). 북청(北靑). 이원군(利原郡)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1980년대에는 경남 진주시(晋州市)에 많은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다. 득관유래 : 강씨(姜氏)는 인류 최초의 성씨(姓氏)이며 득성지조(得姓之祖)는 중국의 염재 신농씨(神農氏)이다. 사기(史記)에 그의 이름은 석년(石年)이며 천수(天水:지금의 甘肅省渭三縣)에서 태어나서 강수(姜水 : 지금의 陝西省岐山縣)에서 성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원록(溯源錄 : 연대미상)에는 중국에서 일파(一派)가 동쪽으로 갈리어 조선의 강씨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662~1685사이에 간행된 조선 강문(姜門)의 최초의 족보인 남한보(南漢譜)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석로(碩老)가 쓴 글중에 진주(晋州) 땅에서 큰 강물이 두줄기로 갈리어 하나는 은렬공, 또 하나가 박사공형제의 후예가 되었다고 했고 1937년 간행된 갑산보(甲山譜) 발문(拔文)에는 통일신라 헌강왕(憲康王) 대 정순공(正順公) 진(縉)이 진양후(晋陽侯)로 봉하여 짐으로 인하여 관향(貫鄕)이 진주(晋州)로 되었다고 했다. 진산(晋山), 진양(晋陽)은 다 같은 이름이다.
☸충효열의 고을
강신(姜紳) 불천위 사당(不遷位祠堂)
상주시 신봉동 284-2(3통 회관 옆)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풍판)으로 1635년(인조 13)에 건축된 강신(姜紳, 1543∼1615)의 불천위 사당(不遷位祠堂)이 있다.
본관은 진주(晋州)로, 아버지는 강사안(姜士安)이다. 생부는 우의정 강사상(姜士尙)이며, 생모는 임간(任幹)의 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면경(勉卿), 호는 동고(東皐). 시호는 의간공(毅簡公)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다.
1567년(명종 22) 수석으로 진사가 되고, 1577년(선조 10) 정축(丁丑) 별시(別試)문과에 갑과(甲科) 장원(壯元) 급제하였다. 1589년 문사랑(問事郞)으로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의 처리에 참여하여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진흥군(晉興君)에 봉해졌다.
이조낭관⋅홍문관직을 역임하고, 1592년 승지‧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함경도순찰사를 거쳐, 1594년 도승지, 1596년 서북면순검사(西北面巡檢使)와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와 함께 왜군을 격퇴한 뒤에 1602년 경기도관찰사, 1609년 우참찬, 다음 해 좌참찬을 역임했으며, 기로소에 들었다.
☸시운을 못 얻은 둘째아들 풍운아 강홍립 장군 = 14세 우의정 정정공 사상→
15세 ➁동고 신(紳)→ 16세 ➀홍수 ➁홍립 ③홍적 = 1560년 병조참판 강신(姜紳)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진주(晋州)이고, 자 군신(君信), 호 내촌(耐村)이다. 당대 명문가 출신으로 조부 강사상(姜士尙)의 벼슬은 우의정에 이르렀고, 아버지 강신은 정여립의 역모를 평정하여 평난공신에 책록 되었다.
1589년(선조 22) 진사가 되고, 159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세자 시강원 설서(說書) ·예문관 검열 · 홍문관 ·사헌부 등의 요직을 거쳤다.
1599년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로 재직하면서 여진족을 공략하는 방안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1605년에는 진주사 (陳奏使) 이덕형(李德馨)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608년 보덕(輔德)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우윤, 함경도 병마절도사, 1614년 순검사(巡檢使)를 지내면서 함경도 일대 군비를 점검하였다.
1618년 그의 공적이 인정되어 광해군(光海君)에 의해 진녕군(晋寧君)에 봉해졌는데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다가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잇는 적장자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해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새로 일어난 후금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감지하고 있었고 조정의 내부에서는 원군파병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온 사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다. 강홍립은 외교전략과 중국어에 능통해 적임자로 추천을 받았으며 5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 임명되어 1만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그러나 1619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부차(富車)에서 대패하고, 강홍립은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하여 이루어진 사실을 적진에 통고한 후 군사를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는 현지에서의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광해군의 밀명에 따른 것이었다. 투항한 이듬해인 1620년 후금에 억류된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어 귀국하였으나, 강홍립은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등 10여 명과 함께 계속 억류되었다. 적진에 볼모로 있었지만 밀지를 보내 후금의 상황을 광해군에게 보고하였다.
강홍립이 후금에 억류된 사이 조선에서는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이 일어나 광해군(光海君) 실각하였다. 인조가 등극하였고 대북파 북인(北人)들이 절멸하고 서인(西人)이 정치적 실제로 군림하는 상황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강홍립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군의 선도로 입국하여 강화에서 후금과 조선의 화의(和議)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적지에서 포로로 잡혀 고생한 강홍립을 옹호하는 견해도 있었지만 삼사의 관료들은 그를 후금에 투항한 역신으로 몰았고 모든 관직을 삭탈하였다. 그해 7월 강홍립은 병을 얻어 사망하였고 사후 복관되었다.
✳청죽 성람(聽竹 成覽) = 자: 사열(士悅), = 호: 청죽(聽竹) = 유형: 인물
시대: 조선 = 생졸:1556년(명종11) ~1620(광해12) = 성격: 문신, 학자
성별: 남 = 본관: 창녕(昌寧) = 대표관직: 효릉참봉, 공조좌랑, 무주현감
☸정의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본관은 창녕(昌寧). 초명은 성협(成浹), 자는 사열(士悅), 호는 청죽(聽竹). 성완(成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희주(成希周)이고, 아버지는 감사 성세평(成世平)이며, 어머니는 노공좌(盧公佐)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 일찍부터 성리학에 뜻을 두어 형 성호(成浩)와 함께 남언경(南彦經)에게 수업하여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사사하였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연구에 몰두하였고 의학에도 밝아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였다.
구언령(求言令)이 있을 때마다 수천언으로 진소(陳疏)하였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처가인 상주에 거처하면서 조익(趙翊)·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교유했다. 벼슬은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된 이래 장원·별좌·공조좌랑·무주현감을 역임한 바 있다.
☸청죽유고(聽竹遺稿)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성람(成覽)의 시문 집.2권 1책. 목활자본. 1926년 11대손 극(○)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박성양(朴性陽)의 서문이, 권말에 석중(錫中)·석만(錫晩)·극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권1에 시 12수, 소(疏)·유훈(遺訓)· 지경지남도(持敬指南圖) 각 1편, 권2에 부록으로 묘갈명·묘갈추기(墓碣追記)· 유사·정부인홍씨사적(貞夫人洪氏事蹟) 각 1편, 제문 3편, 만사 19수, 기술잡록(記述雜錄) 14편, 통문 3편, 봉안문 3편, 축문 3편, 사실(事實)·원고서(原稿序)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 「술회계붕당(述懷戒朋黨)」은 점차로 극심해가는 당쟁을 근심하여 모두 사리를 버리고 국익을 위하여 합심하여야 한다고 인심을 풍자하고 충의를 나타낸 것이다. 소의 「인구언논시폐소(因求言論時弊疏)」는 당시 시급하게 고쳐야 할 문제를 진언한 것으로, 사소한 사원(私怨)이 붕당이 되어 국가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것은 선비들의 수치라 지적하고 여론을 종합하여 관민의 뜻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이 급선무라고 설명하면서 백성을 사랑하고 세금을 감면하여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이 곧 인정(仁政) 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소는 당시 붕당의 피해, 이산해(李山海)의 실정 등을 지적한 것이므로 당쟁사 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유훈」에는 위인(爲人)의 방법으로 입지(立志)·행세(行世)·신언(愼言)·처가 (處家) 등의 방법이 언급되어 있다.
인간에게는 효제(孝悌)가 으뜸으로, 말을 삼가는 것을 처세의 기본으로 삼고 처자들의 말을 가슴에 담아두지 않는 것 등이 그 방법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밖에 「지경지남도」는 수신하는 방법을 도시한 것이다.
☸존애원(存愛院) 소 재 지: 상주시 청리면 율리 353번지
소 유 자: 상산 김씨 외 12문중 문화재 지정: 도지정 기념물 제89호
수 량:1동(714m²) 시 대:조선시대(1602년) = 존애원(存愛院)은 임진왜란 뒤에 질병의 퇴치를 상주의 백성들이 자치적으로 해결하고자 설립한 조선 최초의(현재까지) 사설(私設) 의료기관(醫療機關)이다. 선조 32년(1599)에 이 지역에 대표적인 두개의 계(稧)를 합계하여 기해 낙사계로 합사한 13개 문중 24명이 존애당에 모여 향풍쇄신 과 민풍순화, 그리고 특별히 자치적으로 의료행위를 하기로 하였다. 이에 김각(金覺)・송량(宋亮)・성람(成灠)・이전(李㙉)・ 이준(李埈)・강응철(姜應哲)・김광두(金光斗)・정경세(鄭經世) 등의 선비들이 창설하였다. 특히, 우복 정경세의 주도 아래 청죽(聽竹) 성람(成灠)을 주치의(主治醫) 로 모셔와 선조 35년(1602)에 건물을 완성하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의료행위를 시작하게 돠었다. 즉, 약재 보관 창고와 환자 수용 시설인 당우(堂宇)를 차례로 짓고, 향약재는 슬려 등 유수(遊手)들을 모집하여 채집하거나 당재(唐材)는 미포 (米布)로 무역하여 조달하였다. 약국으로서 운영 규약인 원규(院規)도 있었다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존애원이란 이름은 중국 송나라 학자 정자 (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따 왔다. 이는, 1599년에 창설되고, 1602년에 완성되었다. 그후 1811년(순조 110에 중수된 뒤 1886년(고종 23)에 재보수 했다.
존애원은 미증유의 전화(戰禍)를 입고 질병 앞에 무방비 상태였던 상주 백성들의 고통을 스스로 덜어 주기 위해 자생적으로 탄생한 사설의료국(私設醫療局)이었다. 의료시설이 아주 적었던 당시였지만, 존애원은 많은 약재와 시설을 갖춰 주민과 가난한 백성들을 치료해 줌으로서 다른 지방에 비해서 큰 자랑거리였으나, 1782년 (정조 6)에 윤모씨(尹某氏)의 무고(誣告) 로 관련 문서와 책자 등이 사헌부로 압송 되어 유실되고 말았다. 이로써 의료행위는 점차 상실되었다.
그 후 정조의 하문을 받고 초계문신 이동 (李埬)이 1797년(정조 21)에 낙사계의 사실 조사를 아뢰니, 이에 정조대왕도 ‘대계(大稧)’란 칭송을 하면서 자신도 가입의사를 밝히기도 하였다. 이렇듯 존애원은 의료 활동 뿐 만 아니라 지역민의 화합을 위한 각종 행사를 치루기도 했는데, 그 중 1607년부터 1894년까지 287년 동안 백수회(白首會)라는 경로(敬老)잔치 를 개최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로, 이는 1906년까지 한광(韓匡)의 아들이 여기서 관례(冠禮)와 함께 ‘대계백수회’를 가진 바도 있다.
한 마디로, 존애원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던 상주 선비들의 박애정신(博愛精神)에서 탄생한 사설 의료국이기도 하였고, 동시에 향토 사랑을 실천한 낙사계원들의 모임의 역할도 한 곳이다.
당시 존애원 창설에 동참한 13개 문중은 진양 정씨(晋陽鄭氏)・흥양 이씨(興陽李氏)・여산 송씨(礪山宋氏)・영산 김씨(永山金氏)・월성 손씨(月城孫氏)・청주 한씨(淸州韓氏)・상산 김씨(商山金氏)・재령 강씨 (載寧康氏)・단양 우씨(丹陽禹氏)・회산 김씨(檜山金氏)・무송 윤씨(茂松尹氏) ・창녕 성씨(昌寧成氏)・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존애원의 창설로 상주에 있던 두 계(稧)가 기해낙사계로 합사(合社)했으며, 13개 문중의 계원은 24명이었고, 합계(合稧)한 자리가 존애당(存愛堂)이었다.
존애원(存愛院)
☸ 풍양조씨 자녀의 뿌리교육 2011년 8월. 筆者는 풍양조씨 지인의 초청으로 그들의 뿌리교육 현장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삼복더위 속에서 가학을 익히며 변화로운 세상에 슬기롭게 대처해 가는 풍양조씨 가문 자녀들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 한 가문이 35년째 문중 후손에게 예절이나 가문의 역사를 가르쳐 화제다. 명문(名門) 으로 꼽히는 풍양조씨는 1984년부터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가문의 청소년이나 청년을 대상으로 뿌리교육을 시행해 왔다. 연수는 족보를 연구하는 학문인 보학교육, 생활예절교육, 인성교육 등으로 진행된다.
명문임을 자부하는 많은 가문이 있으나 이처럼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뿌리교육을 해 온 사례는 드물다. 지금까지 이 연수를 거쳐간 인원만 1,3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양진당(養眞堂) =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주택. 보물 제1568호. 조선시대 문신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1626년(인조 4)안동 임하 천천동에 있던 처가(妻家) 문중의 99칸 가옥을 옮겨 지은 것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미 풍양조씨 자녀의 뿌리교육은 영남지방에서는 유명한 얘기다. 매년 풍양조씨 후손 50명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여름방학 4박 5일 동안 합숙하며 교육에 앞장서기 올해로 35해째를 맞는다.
장학금을 지급하는 규모도 상당히 많았다. 2011년 당시 180만원/인 이었다. 이는 문중의 재정이 넉넉해야 가능한 일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문의 족친들이 똘똘 뭉쳐 교육현장을 지원하고 협조한다는 점이다.
갈가실 족친들이 종일 교육현장에 머물며 가마솥에 국을 끓이고 밥을 지어 먹이며 학생들과 함께 생활했다. 젊은 청소년들도 어른과 함께 하며 피와 뿌리의 聖스러움을 몸소 배워가고 있었다. 장학금을 지급하는 가문이나 문중은 많다.
그러나 개인적 이기심을 앞세우며 스스로 고생하기를 꺼리는 시대다. 뿌리와 역사의 중요함도 외면당하기 일쑤다. 대부분 한두 자녀로 귀하게만 여기며 최고만을 고집해 온 우리들 기성세대의 불필요했던 의식도 한 몫 했다. 극기 훈련에 가까운 단체생활의 수련활동은 더욱 기피한다.
이로 인해 문중이나 단체에서 필요성은 느끼지만 시행을 꺼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뿌리를 찾는 시간이다.
수백 년에 걸쳐 이어진 선조와의 인연을 헤아려 본다. 그리고 내 몸 속에 선조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도 확인한다.
지도교사는 풍양조씨 출신 선생님들로 구성된다. 보학공부만 하지는 않는다.
요즘 시대에서 경제를 모르고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갈 수가 없다. 교재 역시 가문의 교수나 교육자에 의해 집필되고 수업한다.
문중의 어른들께서 직접 교육장에 나와 지도하신다. 어른들 스스로 이런 교육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뒷바라지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 오작당(悟昨堂) 종손 조정희 翁. = 삼복더위 오후의 나른한 시간이 되면 선조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정자를 찾아 그들이 남긴 숨결을 헤아리기도 한다.
☸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풍양조씨 가문이 부럽다.
'敎育은 百年之大計'라고 했다. 35년이 지난 지금쯤에는 가문에서 예절과 인성을 겸비한 훌륭한 인재가 나타날 때가 됐다.
산업화로 인해 가문을 보존하는 문제에 어려움이 따른다. 현대인들은 자기와 가족으로 자아를 급속히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날이 갈수록 인간의 탐욕은 깊이를 더한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숭조사상과 문중의 향념은 잊은 지 오래다. 우리에게 공동체 붕괴는 인간 사회 전체의 파괴를 야기할 수도 있다. 유구한 문화유산과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풍양조씨 가문 자녀의 뿌리교육 현장을 나오면서 우리 모두에게 작은 화두(話頭) 를 던져본다. 아울러 풍양조씨 가문의 건승을 기원한다.
✳검간(黔澗) 조정(趙靖) = 자: 안중(安中) = 호: 검간(黔澗) = 유형: 인물
시대: 조선 = 생졸:1555(명종10)~1636년(인조14) = 성격: 문신 = 성별: 남
본관: 풍양(豊壤) = 저서(작품): 검간 문집, 진사일록
대표관직(경력): 참봉, 봉상시정 = 세거지 : 낙동면 승곡리(갈가실)
☸ 정의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안중(安中), 호는 검간(黔澗). 조윤영(趙允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희(趙禧)이고, 아버지는 조광헌(趙光憲)이며, 어머니는 홍윤최(洪胤崔)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1596년 왜와의 강화를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1599년 천거로 참봉이 되고,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까지 호가(扈駕)하였고, 그 뒤 벼슬이 봉상시정에 이르렀다. 또한, 정구(鄭逑)와 교유하였으며,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상주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검간문집』과 『진사일록(辰巳日錄)』이 있다.
☸ 조정종가문적(趙靖宗家文籍) 보물 제1004-2호 = 본 문화재는 조선 선조∼인조 때 학자이며 문신이었던 검간(黔澗 )조정(趙靖,1555 ∼1636)의 종손가(宗孫家)에 소장된 고문서와 전적(典籍)이다. 조씨택(趙氏宅) 에는 500년간 전래한 고문서와 전적이 상당수가 있었으나, 고문서는 명종 9년 (1554년)에서 현종11년(1670년) 사이에 작성된 분재문서 7건, 선조 34년(1601년) 에 조정에게 발급된 교지등 교지류 47건, 인조 6년 (1628년)에 조기원(趙基遠)에게 발급된 차정첩 1건 등 3종 55점을, 전적은 조선초기간본인 척약재선생학음집을 비롯하여 필원잡기, 한서등 조선전기간본 7종 7책만을 선별조사 하였다. 고문서 중 명종∼현종 년간에 분재문서는 당시 사회, 경제사 연구에, 선조∼인조 년간에 발급된 교지류는 인사행정제도의 연구에 각각 귀중한 자료이며, 전적은 낙질이 많기는 하나, 조선 전기간본으로 서지학연구의 자료임은 물론, 교육문화사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척약재선생학음집은 희구본이고 전산성법은 유일본으로 그 가치가 더욱 높다. 조정종가문적(趙靖宗家文籍)
☸ 풍양조씨 유물 = 검간(黔澗)종택, 양진당(養眞堂).
이곳은 현재도 풍양조씨 후손들의 교육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보물 1568호)
※ 풍양조씨의 자녀교육에 대해서는 훗날 별도로 안내하기로 한다.
옥류정(玉流亭) 의암고택 =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운평리. 경북 문화재자료 제177호. 조형연公이 운곡 큰집에서 분가하기도 전에 임종을 당하여 7대 조모인 연안이씨가 세운 집이다.
☸ 장천서원 = 장천서원은 검간(黔澗) 조정(趙靖, 1555 ~1636)선생의 불천위 제사를 모시기 위해 1742년에 건립한 경모사(景慕祠)와 1952년 인근에서 이건한 강당으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41호(2002.10.14) 인 추원당(追遠堂)이다.
2007년 12월 지방 유림과 문중에서 옛 지명을 따라 ‘장천서원’으로 그 명(名)을 변경하고, 배향 선현은 만은(晩隱) 조윤녕 (趙允寧, 1484~1536), 검간(黔澗) 조정(趙靖), 가규(可畦) 조익(趙翊, 1556~1613)으로 세분이다.
정성스럽게 쌓은 담장으로 둘려 있는데, 솟을삼문의 숙정문(肅靜門)을 들어서면 강당이다. 전정에 오랜 연륜을 짐작케 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길손을 반기는 가운데 강당인 추원당은 그 현판을 ‘長川書院’으로 걸어 놓았다. 누마루에 정면 5칸, 측면 2.5칸으로 목조 팔작 기와지붕이다.
루(樓)와 같은 느낌을 주는 고상식(高床式) 건물로 양쪽 끝에는 방을, 중앙의 3칸은 마루로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나, 여느 건물과는 다르게 가운데 마루에는 문을 달았다. 가운데 4폭에 팔각형 벌집 모양의 문살은 조금 작으며, 양옆에 3폭의 문살은 조금 크게 해 놓아 자연스럽게 안정감을 주는 배려의 기법을 엿볼 수가 있는데 걸쇠에 걸 수 있다. 전면에 퇴칸을 두고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출입은 좌우로 한다. 퇴칸 아래의 기둥은 석재로 사각기둥이고, 위에는 목재로 원기둥인 것도 특이한 모습이고, 돌로 쌓은 축은 아주 정갈하고 깔끔하다.
동재와 서재는 없으나 강당의 안쪽에 목재 (睦齋)와 경재(敬齋)의 편액을 걸었다. 구조가 크고 안정감이 있어 강당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강당 뒤의 경사진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지나면 정면 3칸, 측면 1,5칸의 묘우인 경모사(景慕祠)이다. 목조 맞배지붕으로 풍판을 달았으며, 가운데 문은 두 폭이고, 양옆에는 외문이다.
제사는 밤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솔불을 올려놓을 수 있는 정료대(庭燎臺) 2기를 볼 수 있다. 묘우 사방의 배롱나무는 그 모양새가 세월의 무게를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대단해 보인다. = 장천서원
✳풍양조씨 자녀의 뿌리교육 2011년 8월. 筆者는 풍양조씨 지인의 초청으로 그들의 뿌리교육 현장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삼복더위 속에서 가학을 익히며 변화로운 세상에 슬기롭게 대처해 가는 풍양조씨 가문 자녀들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 한 가문이 35년째 문중 후손에게 예절이나 가문의 역사를 가르쳐 화제다. 명문(名門) 으로 꼽히는 풍양조씨는 1984년부터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가문의 청소년이나 청년을 대상으로 뿌리교육을 시행해 왔다.
연수는 족보를 연구하는 학문인 보학교육, 생활예절교육, 인성교육 등으로 진행된다. 명문임을 자부하는 많은 가문이 있으나 이처럼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뿌리교육을 해 온 사례는 드물다. 지금까지 이 연수를 거쳐간 인원만 1,3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양진당(養眞堂) =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주택. 보물 제1568호. 조선시대 문신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1626년(인조 4)안동 임하 천천동에 있던 처가(妻家) 문중의 99칸 가옥을 옮겨 지은 것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미 풍양조씨 자녀의 뿌리교육은 영남지방에서는 유명한 얘기다. 매년 풍양조씨 후손 50명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여름방학 4박 5일 동안 합숙하며 교육에 앞장서기 올해로 35해째를 맞는다.
장학금을 지급하는 규모도 상당히 많았다. 2011년 당시 180만원/인 이었다. 이는 문중의 재정이 넉넉해야 가능한 일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문의 족친들이 똘똘 뭉쳐 교육현장을 지원하고 협조한다는 점이다. 갈가실 족친들이 종일 교육현장에 머물며 가마솥에 국을 끓이고 밥을 지어 먹이며 학생들과 함께 생활했다. 젊은 청소년들도 어른과 함께 하며 피와 뿌리의 聖스러움을 몸소 배워가고 있었다. 장학금을 지급하는 가문이나 문중은 많다.
그러나 개인적 이기심을 앞세우며 스스로 고생하기를 꺼리는 시대다. 뿌리와 역사의 중요함도 외면당하기 일쑤다. 대부분 한두 자녀로 귀하게만 여기며 최고만을 고집해 온 우리들 기성세대의 불필요했던 의식도 한 몫 했다. 극기훈련에 가까운 단체생활의 수련활동은 더욱 기피한다.
이로 인해 문중이나 단체에서 필요성은 느끼지만 시행을 꺼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뿌리를 찾는 시간이다.
수백 년에 걸쳐 이어진 선조와의 인연을 헤아려 본다. 그리고 내 몸 속에 선조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도 확인한다.
지도교사는 풍양조씨 출신 선생님들로 구성된다.
보학공부만 하지는 않는다.
요즘 시대에서 경제를 모르고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갈 수가 없다. 교재 역시 가문의 교수나 교육자에 의해 집필되고 수업한다.
문중의 어른들께서 직접 교육장에 나와 지도하신다. 어른들 스스로 이런 교육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뒷바라지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왼쪽은 오작당(悟昨堂) 종손 조정희 翁.
삼복더위 오후의 나른한 시간이 되면 선조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정자를 찾아 그들이 남긴 숨결을 헤아리기도 한다.
☸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 가는 풍양조씨 가문이 부럽다.
'敎育은 百年之大計'라고 했다. 35년이 지난 지금쯤에는 가문에서 예절과 인성을 겸비한 훌륭한 인재가 나타날 때가 됐다.
산업화로 인해 가문을 보존하는 문제에 어려움이 따른다. 현대인들은 자기와 가족으로 자아를 급속히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날이 갈수록 인간의 탐욕은 깊이를 더한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숭조사상과 문중의 향념은 잊은 지 오래다. 우리에게 공동체 붕괴는 인간 사회 전체의 파괴를 야기할 수도 있다. 유구한 문화유산과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풍양조씨 가문 자녀의 뿌리교육 현장을 나오면서 우리 모두에게 작은 화두(話頭) 를 던져본다. 아울러 풍양조씨 가문의 건승을 기원한다.
☸ 풍양조씨의 연혁과 상주에 이거한 사유. = 풍양조씨는 시조인 조맹 이후 전직공 조지란까지 6대가 실전되었다. 그 후 전직공 조지란의 7세손인 대언공 조염휘 (趙炎暉)의 아들 대에서 호군공·회양공 ·금주공 등 3갈래로 나뉘고, 선계를 알 수 없는 평장공 조신혁과 강진을 본관으로 하다가 풍양으로 환관한 상장군공파가 있다. 이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회양공파이다.
풍양조씨는 조맹 이후 고려 후기까지 뚜렷한 인물이 없다. 그러다가 고려말 조운흘(趙云?)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그는 고려말 문신으로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하는 왕을 시종하여 2등 공신에 올랐고, 그 후 전라도·서해도·양광도 등 3도의 안렴사(按廉使·관찰사)를 지냈다. 늙어서는 벼슬을 버리고 상주에 은거했다. 그는 나들이할 때 반드시 소를 타고 다닌 것으로 유명하며, 그가 강릉부사로 재직할 때 경포대에서 강원관찰사였던 박신과 기생 홍장을 엮어주고 지었다는 한시가 유명하다.(후략) 상주에 세거하는 풍양조씨는 호군공파이다.
☸ 검간(黔澗)선생 불천위 자료
☸ 낙선호시(樂善好施) - 선행을 즐기고 베풀기를 좋아하다.
[즐길 락(木/11) 착할 선(口/9) 좋을 호(女/3) 베풀 시(方/5)] 착하고 어진 일을 행하면 모두를 즐겁게 한다. 이런 일을 종교마다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선행이란 타인의 얼굴에 미소를 가져오게 하는 행위’라고 마호메트(Mahome)는 말했다. 부처님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설법한 것을 모은 法句經(법구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주인을 따르듯이(中心念善 卽言卽行 福樂自追 如影隨形/ 중심념선 즉언즉행 복락자추 여영수형).’ 착한 일을 많이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따른다(積善之家 必有餘慶/ 적선지가 필유여경)는 말은 易經(역경)에 나온다. 착한 일을 하기를 즐기고(樂善)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한다면(好施) 더 이상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선 그 자체다. 好施樂善(호시낙선), 好善樂施(호선낙시)라고 순서를 바꿔 써도 뜻이 같다. 털 하나라도 남을 위해서는 뽑지 않는다는 一毛不拔(일모불발), 한 푼의 돈이라도 목숨같이 여기는 一錢如命(일전여명)의 인색한 사람과는 정반대다. 그런데 이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史記(사기)’의 樂書(악서)에서다. 옛날에는 樂經(악경)이 있었는데 전하지 않아 후세인들이 禮記(예기)나 荀子(순자)에서 참조하여 내용을 첨가한 것이라 한다. 禮書(예서), 律書(율서) 등 모두 8개가 있는 書(서)는 정치 사회 과학 등의 각종 제도를 기록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대 중국 정치는 禮(예)와 樂(악)을 기본으로 했고 孔子(공자)도 음악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韶(소)란 舜(순)임금 때의 음악을 듣고는 공자가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을 정도였다.
악서에서 이 성어가 쓰인 것은 옛날 중국 음악의 다섯 가지 소리인 오음 宮商角徵羽(궁상각치우)를 각각 설명하면서 徵音(치음) 부분에 나온다. 부를 徵(징)은 이 때는 음률이름 치. 이 오음은 각각 비장, 폐, 간, 심장, 신장을 진동시켜 마음을 가라앉힌다고 하면서 특히 ‘치음을 들으면 착한 것을 즐기고 베풀기를 좋아하게 된다(聞徵音 使人樂善而好施/ 문치음 사인낙선이호시)’고 했다.
음을 설명하면서 간단히 언급됐지만 이 말만 떼어놓고 보면 그 이상 좋은 말이 없다. 또 그런 사람도 알게 모르게 이 사회에 많다. 고생을 하며 평생 모은 재산을 불우이웃이나 장학기금으로 내놓는 사람이나 내세울 것 없다며 남몰래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그런데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이나 기부금을 엉뚱한 곳에 흥청망청 쓴 사람이 드러나면서 액수가 크게 줄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제도를 튼튼히 하면서 착한 일, 베풀기를 권장해야 할 것이다.
✳창석 이준(蒼石 李埈) 이준(李埈) 글씨 = 〈이준 시〉, 『근묵』, 1623, 행서, 35×42.8㎝,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요수정 (樂水亭)에 황 감사(黃監司)를 방문하여 지은 송별시. = 자: 숙평(叔平), = 호: 창석(蒼石), = 시호: 문간(文簡)
유형: 인물 = 시대: 조선 = 생졸: 1560년 ~ 1635년 = 성격: 문신 = 성별 남
본관: 흥양(興陽:지금의 전라남도 고흥) = 관련사건: 인조반정, 정묘호란
저서(작품) 창석집
대표관직: 형조좌랑, 경상도도사, 형조정랑, 교리, 첨지중추부사
☸정의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조년(兆年)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탁(琢)이고, 아버지는 수인(守仁)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91년(선조 2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가 됐다. 임진왜란 때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했으나 습격을 받아 패했다. 그 뒤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 몇 천 명을 모집해 고모담(姑姆潭)에서 외적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듬 해 경상도도사가 되었으며, 이 때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正邪) 를 밝힌 ≪중흥귀감 中興龜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세력을 키워 많은 사람들을 주변에 모았으나 가담하지 않았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유성룡(柳成龍)이 국정운영의 잘못 등으로 공격을 받을 때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 해 가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防禦使)와 협력해 일하였다. 이어 예조정랑·단양군수 등을 거쳐, 1603년 수찬으로 불려 들어와 형조와 공조의 정랑을 거쳤다.
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교리로 재직중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고, 특히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비난하자 그에 맞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자 다시 교리로 등용되었다.
인조 초년 이귀(李貴) 등 반정공신을 비롯한 서인 집권세력이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를 죽일 때, 은혜로운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철원부사로 밀려났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아 의승군(義勝軍)이라 이름 했으며, 그 뒤 부응교·응교· 집의·전한·사간 등 삼사의 관직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이즈음 집권 서인세력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 하여 선조의 아들인 인성군 공(仁城君珙)을 죽이려 하자 남인으로서 반대의견을 주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했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 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이 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28년 승지가 되고 1634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 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해 많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했으며,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 받아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 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창석의 불천위 = 상주에서는 보통 구이의 제일 위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닭이다. 구이 제일 위에 문어를 올리는 안동과는 다름이 있다. 종부의 말대로 구이 괴는 순서를 따라가면, “구이 젤 밑에 가오리, 명태포, 그라고 인제 적 구운 거 막 차례차례. 그것도 순서 있지. 제일 높은 적은 미나리, 젤 위에 올라가고. 고 다음에는 배추. 첨에는 배추. 배추, 파, 그렇게 올라가.”라고 이야기 한다. 각종 전이 올라간 위에 산적이 놓이는데 여기는 산적이 없다. 제철에 맞는 제물을 올리는 것이 기본이 되므로, 차사 때는 무적은 빠진다.
‘달래’에 고소한 기름 냄새가 퍼지면, 당일날 해야 되는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음식 장만이 끝난다. 젊은 사람들이 없는 제물장만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종부를 비롯한 함께 제물을 장만해 주는 일가친척들 종부와 함께 음식 장만을 거들어 주었던 분으로는 안병숙(여, 72세), 윤사년(여, 78세)씨가 있으며, 모두 달래에 살고 있다. 의 나이도 많다. 옛날보다 제물의 가짓수는 줄었지만, 준비하는 정성은 다름이 없다. 나이 많은 종부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도 지금껏 제사를 줄이지는 않았다.
12시 차사 시간에 맞추어 종가에 도착했다. 이미 차사의 제관들이 모두 정해졌다. 사랑채에서 어른들이 모여 제관분정을 마친 것이다. 종손이 젊은 데다 다른 지역에 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까닭인지 참석을 하지 못하였다. 오늘의 제관은 초헌관에 이정협(李楨協), 아헌관(亞獻官)에 이채하(李采河), 종헌관(終獻官)에 이종욱(李鍾旭), 유식(侑食)에 이정석(李楨碩), 축(祝)에 이종욱(李鍾郁), 집례(執禮)에 이권(李權) 으로 정했다. 사당 문이 열리고, 문 위에 제관분정표가 붙여지고, 제물이 상 위에 올랐다.
문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홀기가 있다. 차사는 홀기에 따라 진행된다. 이태하씨와 제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5월 5일 단오날 서애 류성룡 선생의 불천위에 참석한 것과 창석 이준 선생의 제사의 예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불천위에는 여성도 제사에 참석한다는 점과 월간 종가에서는 유식례를 행하고, 부복만으로 마치는 데 비해 합문의 절차가 있다는 점이다.
창석 집에는 특기할 만한 거는 우리는 갖다가 메밥을 두 그릇을 떠 놓는데, 그 집에는 단설이라. 메밥이 인제 하나 뿐이라. 그런데 그는 왜냐카면 창석 할아버지가 “남자 가는데, 여자 따를 필요가 없다.” 그래서 단설을 하는데, 지금도 보면은 그 집에 메밥이 하나라. 우리는 두 겐대. 현재 화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문중에서 이태하씨와 더불어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며, 역시 한학에 밝은 편이다. 동지 차사에는 할머니까지 모셔 단설이 아닌 복설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덧붙인다. 제보자 : 이채하(남, 75세)
형제간에도 이렇게 제사의 예법은 다르다. 제사의 절차는 유가의 제례 범절 안에서 가가례(家家禮)로 집집마다 그 다름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