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의 죽음과 3ㆍ15 부정선거
낚시꾼은 굉장히 큰 놈이 물린 거라고 생각하고 기분 좋게 낚싯줄을 당기기 시작했으나 얼마 후 물 위에 나타난 것을 보고 그만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몸이 굳어져 버렸다. 더러운 마산항의 수면으로 떠오른 것은 열여섯 살 난 김주열이라는 소년의 시체였던 것이다. ......마산 시민들은 눈앞에 끌어올려진 시신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AP통신, 1960년 5월 2일)
1960년 4월 11일 오전, 실종 28일 만에 마산 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김주열 군의 시신은 눈에서 뒷머리까지 길이 20cm의 미제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이였다. 그가 실종된 것은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 선거가 실시된 3월 15일이었다.
여당인 자유당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ㆍ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을 후보로 내세웠으나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조병옥이 미국에서 위 수술을 받던 중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사망함으로써 관심의 초점은 이기붕과 장면이 대결하는 부통령 선거에 집중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이기붕을 당선시키키 위해 갖가지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경찰과 공무원을 선거운동에 동원하고, 군소 정당 후보들의 입후보 등록서류를 강탈하고, 70억 환이나 되는 선거자금으로 금품을 물쓰듯 뿌려대고 야당인사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가운데 2월 28일 대구에서 전국 학생데모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경북고, 대구고, 대구사대부고 등의 학생 수천 명이 자유당 정권의 횡포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날 민주당 선거유세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이승만 정권은 일요일 등교를 명령했다. 학생들은 이를 규탄하며 거리로 뛰어나와 경찰과 충돌했다. 나중에 이날의 의거를 기념하는 2ㆍ28기념탑이 세워진 대구 명덕로타리에서였다. 이날 이후 부산 동아고, 대전고를 비롯하여 인천, 수원, 마산, 충주, 서울, 포항, 광주 등 전국 각지 중ㆍ고등학생들이 날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공명선거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3월 15일 마침내 정ㆍ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자유당 정권은 정치깡패들을 시켜 투료소를 습격한 후 투표함을 바꿔치기 하거나 무더기표를 집어 넣었다. 곳곳에서 경찰이 야당의 투표 참관인을 폭행하여 쫓아내었고,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유권자들을 3인조, 5인조로 짝지어 투표하게 함으로써 야당을 지지하지 못하게 감시했다. 또 개표를 하면서 야당표에 인주를 묻혀 무효로 만들고, 전기를 끊어 놓고 표를 바꿔치기 하는 등 투ㆍ개표 부정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결과 자유당이 얻은 표가 전체 유권자의 수보다 더 많이 나오자, 개표 결과를 조작하여 이승만, 이기붕이 80%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발표했다.
민주당은 이날 오후 "3ㆍ15선거는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고 마산에서는 제1차 데모가 일어났다. 수천 명의 마산 시민들이 저녁 7시 30분경부터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민주당으로 당선된 후 자유당으로 넘어간 허윤수 의원의 집과 자유당 마산시당본부 등에 돌을 던졌다. 이때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마구 쏘아 16명이 죽고 72명이 다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내무부장관이던 최인규는 이 시위가 공산당이나 민주당의 지령에 의한 것인 양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공산당이 배후를 조종했다고 조작하기 위해 죽은 사람의 호주머니에 불온문서를 넣기도 했다. 그런데 3월 15일 1차 마산봉기 때 행적이 묘연해진 마산상고 1학년 학생 하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주열이다. 그의 시신을 목격한 마산 시민들은 "살인선거 물리치자", "시신을 인도하라"고 외치며 경찰서와 자유당 본부, 자유당 의원의 집, 시장 관사, 서울신문사"등에 돌을 던지고 서류를 불태웠다. 이날 밤 9시 35분 마산경찰서에서 경찰은 수백 발의 총알을 쏘았고 마산은 다시 한 번 피로 물들었다. 두 젊은이가 죽고 수백 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이다.
서울신문은 원래 구한말의 대표적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빼앗아 총독부 기관지로 발간하던 것을 해방 후 서울신문으로 고친 것이다. 그 역사적 오명 만큼이나 해방 후에도 정부 공보처의 지시를 받아 정부 기관지 역할을 했고, 자유당 독재정권을 적극 옹호하다가 4ㆍ19 혁명 때 시위대에 의해 신문사 사옥과 시설이 불타는 수모도 겪었다.
제2차 마산사태는 사흘간 계속되었다. 매일 수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를 행진하면서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이기붕 죽여라", "협잡선거 다시 하라"고 외쳤다. 마산 시내의 각종 행정사무가 완전히 마비되고 상가는 대부분 문을 닫았으며 부산의 학생들이 데모에 참가하기 위해 마산으로 몰려들었다. 초등학교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학교에 등교 중지명령이 내렸고 마산시청의 서류와 기물은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신도성 경남지사는 국회조사단에게 "마산의 2차 데모는 공산당 수법과 흡사하다"고 말했으며, 경찰은 소요 및 공공건물 파괴혐의로 30명을 구속하였다. 4월 15일 이승만은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마산에서 일어난 폭동은 공산당이 들어와 뒤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고 한다. ......몰지각한 사람들이 또 선동하여 난동을 하다가 필경 이러한 불상사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것을 우리가 그냥 둘 수는 없는 것이다. ......난동을 일으켜 결국 공산당에게 좋은 기회를 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 일이 없도록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노력해서 만전을 기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승만 담화문)
이승만 일당 친일파들은 이때도 이렇게 거짓으로 국민을 탄압했다 개자슥들
남쪽 끝 항구도시 마산에서 솟아오른 민주화 투쟁의 불길은 그냥 꺼져 버리지 않았다. 김주열 군의 죽음이라는 한 점 불씨는 들불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 나갔다. 3ㆍ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함성은 소백산맥을 타고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다.
4월 14일 진주시와 진양군의 중ㆍ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다음 날에는 전주의 민주당원과 부산 동래고교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4월 16일 청주공고생 전원이 청주역 광장에서 "불법선거는 무효다", "경찰의 만행을 쳐부수자"고 외쳤으며 17일에는 인천과 진주, 하동, 창녕 등지에서 민주당원들의 데모가 있었다.
불법선거와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기 위해 나선 중ㆍ고등학생들. 4ㆍ19혁명은 4ㆍ19학생의거로도 불린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태는 학생들에 의해서 촉발되었고, 그 중에서도 중고등학생들이 전면에 나섰다.
오빠 언니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
4월 18일은 대학 중에 최초로 궐기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유명한 날이다. 부산의 동래고교, 경남공고, 부산공고, 항도고교생 수천 명과 청주의 청주고교, 청주상고, 청주여고생 3천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가 시위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오후 1시경 4천여 명의 고려대학생들이 학교에 모여 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일제히 스크럼을 짜고 안암교, 종로를 거쳐 아홉 번이나 경찰과 충돌하면서 2시경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민주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를 높이자"는 플래카드를 걸고,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마산사건 책임자를 처단하라",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 말라"고 외치며 연좌농성하였다.
<대학 가운데 최초로 궐기한 고려대 학생들.>
고대 학생들은 7시경 농성을 풀고 학교로 행진해 왔다. 이 때 경찰의 바리케이드 때문에 데모에 합류하지 못했던 수만 명의 시민이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이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 앞을 지날 무렵 그 곳에 잠복해 있던 1백여 명의 정치깡패들이 부삽, 쇠갈퀴, 몽둥이, 벽돌 등을 마구 휘두르면서 습격하였다. 학생들은 학교에 도착하여 교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애국가를 부른 뒤 해산하였다. 이날 고대생을 습격한 정치깡패들은 반공청년단의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는 '동대문 특별단부'라는 이름의 조직폭력배들이였다.
이정재
경기도 이천 출신의 씨름장사인 이정재는 임화수 등과 함께 자유당 시대의 대표적인 정치깡패였다. 그는 동대문 일대를 장악하고 상인들을 갈취하면서, 자유당이 요구하는 각종 집회 방해에 깡패들을 보냈고, 그 대가로 한 때 국회의원 출마를 감행하기도 했다. 4ㆍ19혁명 후 임화수와 함께 사형당했다.
그 다음 날, 4월 민주혁명의 과정에서 가장 치열한 시위와 잔인한 총격, 참혹한 유혈과 죽음으로 얼룩진 날이 4월 19일이다.
긴 칠흑과 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시(斬屍)를 보라! 그것은 가식 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협과 폭력으로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학구의 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서울대학교 선언문)
서울대학생들은 이렇게 선언하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뛰어나갔다. 서울 시내 중심가 일대에서는 각 대학과 중고등학교까지 십만을 헤아리는 학생들이 운집하였다. "이놈저놈 다 글렀다. 국민은 통곡한다", "빼앗긴 민권을 도로 찾자", "썩은 정치 수술하자", 국회 의사당, 중앙청, 경무대, 이기붕의 집, 동대문, 종로와 혜화동 등 곳곳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함성이 터져 올랐다.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총격을 퍼부었다. 오후부터는 학생과 시민이 합세, 백차와 소방차를 탈취하여 차량시위를 벌였고 40여 군데 파출소에 불질렀으며 문교부ㆍ부흥부ㆍ중앙청 등 행정관청을 파괴하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갔다.
부정선거를 외치는 시민과 학생들을 향하여 간첩 조종 운운하며 미친듯이 곤봉을 휘두르는 친일 경찰과 군인들
서울 시내의 거의 모든 중고등학교가 일제히 궐기하는가 하면 부산의 경남공고, 부산상고, 테레사여고, 광주의 대부분의 고등학교, 청주농고, 인천공고, 경북대학교 등 지방도시의 학생, 시민들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날도 경찰 발포로 모두 1백15명이 숨지고 1천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오후 1시를 기해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고 전국에 임시휴교령이 떨어졌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학생에 대한 보복금지를 약속하고 평화적인 시위자는 폭도가 아니라고 말했다. 계엄군은 총을 쏘지 않았고, 송요찬 장군은 숨진 학생의 시신앞에 경의를 표했다. 사태는 일단 수습되는 듯했다. 서울시경은 7백4명의 연행자 중 6백67명을 석방했다. 서울의 시위는 계엄군에 의해 거의 진압되었으나 인천, 수원, 대구, 전주, 이리, 임실, 광주, 군산, 포항 등지에서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국민들의 요구는 4월 19일을 전후하여 "부정선거 다시하라"에서 "이승만 정권 물러나라"로 바뀌었다. 이승만은 이기붕과 자유당에 책임을 돌리기에 급급했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을 사퇴하였다.
서울시내 대학의 교수 2백58명이 25일 서울의대 도서관에 모였다. 이들은 시국선언을 발표한 다음 태극기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민의 열렬한 환영과 박수갈채를 받으며 종로를 거쳐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들과 더불어 이항녕 교수(서울대)가 14개항으로 된 시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그리고 정석해 교수(연세대)의 선창으로 만세삼창을 한 후 해산하였다. 한국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국민들로부터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던 대학교수들의 시위는 국민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교수들은 전국 학생들의 데모가 공산당의 조종이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이라고 했다. 그리고 부정축재자와 3ㆍ15부정선거를 조작한 주모자와 발포 책임자 및 하수인을 처벌하고 정ㆍ부통령 선거를 다시하며,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배격하고 구금 학생을 모두 석방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학생들에게는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였다.
여기에 자극받은 시민들은 오후 7시 반,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을 신호로 세종로에 집결하여 철야시위하면서 임화수, 이정재 등 정치깡패들의 집을 부수고 이기붕의 승용차를 탈취하였다. 이때 이기붕의 집에서 실탄사격을 하여 다시 수십 명이 살해당했다(이기붕의 집은 서대문 적집자병원 옆의 4ㆍ19기념관 자리에 있었다. 후에 그 집을 헐고 4.ㆍ19기념관을 세운 것이다). 계엄사령부는 구속학생 전원을 석방하였으며 미국대사 매카나기는 이승만을 만나, 예정되어 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취소하고 미국이 원조를 중단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뉴욕, 워싱턴,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동경, 오사카 등의 해외 동포들도 이승만 정권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승만 정권은 이제 막다른 골목까지 몰렸다.
분노한 시민들이 끌어내린 이승만 동상.이승만은 서재필이 설립한 독립협회에서 독립운동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을 위해서는 서구 열강, 특히 미국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외교론을 주장했다. 미국에 주저앉은 그는 1919년 3ㆍ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추대되자, 스스로 대통령 행세를 했다. 단재 신채호 등 무장투쟁파가 그를 탄핵하여 불신임한 후에도 그의 행각은 계속되었다. 국내 정치기반이 없던 그는 해방 후에 친일파와 지주 등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묶어 정적들을 제거하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이 되어서 대외적으로는 반일과 반공을 내세웠으나, 친일파 숙청을 거부하였고, 이후 부패와 독쟁의 대명사로 불렸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왔다. 이날 아침 7시부터 3만여 명의 서울시민들이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계엄군의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를 누볐다. 시민대표들은 이승만과 면담하여 퇴진을 요구했다. 시위대는 이기붕의 집을 부수고 파고다공원에 있던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렸다. 또 시민들에게 실탄사격을 하여 수십 명을 살상한 동대문 경찰서를 불태웠다. 부정선거의 원흉중 하나인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의 집도 불길에 휩싸였다. 수송초등학교생들을 중심으로 한 어린이들도 "오빠 언니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라고 호소하며 애절한 데모를 벌였다.
오후 1시, 드디어 대통령의 하야 담화가 전국에 녹음 방송되었다. 학생ㆍ시민ㆍ계엄군이 하나로 어우러져 환호성을 울렸다.
데모 군중을 헤치고 이대통령을 찾은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 4월 26일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가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여 요담 중인 모습이다. 이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 대통령은 사임했다.
이 위대한 민주혁명의 승리에 너나없이 하나가 되어 기뻐했다.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국회는 3ㆍ15 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개헌과 총선거 실시를 내용으로 하는 시국 수습안을 제시하였다. 국립방송은 '해방의 노래'를 방송하며 4월혁명을 힘찬 어조로 찬양하였고, 시인들은 민주혁명의 승리를 노래했으며, 온 나라가 새로운 희망으로 들떳다. 3ㆍ15 부정선거 관련자들과 노동조합의 어용간부, 발포 책임자들이 쫓겨나거나 구속되었다. 온 국민의 원성을 산 이기붕 일가족은 온갖 악행을 일삼아 온 아들 이강석이 쏜 총으로 자살하는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옮겼는데 국민들은 어제의 원한을 잊고 그의 마지막 결단에 박수를 보냈다.
이기붕(1896~1960)
미국 유학 중 이승만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정부 수립 후 서울시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51년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만들어 내부 실력자로 행세했다. 대부분의 부패행각은 그의 손에서 저질러진 것들이다.
석달 후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민주당은 대통령에 윤보선, 총리에 장 면을 선출하여 제2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백86명이 생명을 바치고 6천 명이 피를 흘린 대가였다.
1960년 5월 29일 새벽에 하와이로 망명하는 이승만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4월혁명은 단지 부정선거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3ㆍ15부정선거는 민중의 저항이 폭발한 계기에 불과하였으며 김주열의 죽음은 그 뇌관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중의 불신과 불만은 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일찍이 미국에 머물면서 외교를 통한 독립을 추구하여 미국 정부에 청원서를 넣으며 소일했던 2류 독립운동가였다. 미ㆍ소가 38도선 남북을 각기 점령하고 동서양 진영 사이의 냉전이 시작되자 그는 외교론자답게 냉전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강대국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이용하여 일약 민족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는 친일 지주와 일제에 복무했던 일본군ㆍ관리ㆍ경찰 출신을 주위에 불러모았다. 백범 김 구 선생은 스스로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청했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직이 아니면 임시정부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로 권력 지향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같은 철저한 민족주의자는 이승만의 사대주의적 청원운동을 경멸하면서 임시정부와 모든 관계를 끊었다. 그가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주장했을 때 백범은 "삼팔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분단을 용서할 수 없다며 남북을 오가면서 협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해방이 되면서 달아났던 매국노들은 남한에 반공정부를 세우려는 한 가지 목표에만 집착한 미군정의 정책에 따라 모두 제자리에 돌아왔다. 일본 특별고등계(사상문제 담당) 형사 출신들은 경찰 수뇌부를, 일본군 출신들은 군 지도부를, 친일 관료배들은 행정조직을 점령했고, 천황 숭배에 앞장섰던 교육관료들이 학교를 차지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천황의 충복'임을 자랑하던 자들이 하나같이 '반공투사'라는 허울을 쓰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토지개혁으로 땅을 잃을까 두려움에 떨던 친일 지주들에게도 미군정과 이승만은 구세주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동아시에서 미국의 반공정책을 충실하게 수행할 대리인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승만은 겉으로는 극단적인 반일주의를 내세웠지만, 국회 결의로 친일 매국노들을 처단하기 위해 결성한 '반민족적행위 조사 특별위원회(반민특위)'를 불법적으로 해산시킴으로써 매국노들을 모두 하수인으로 끌어들였다. 비민주적인 군대 규율과 부정부패, 경찰의 상습적인 고문과 인권유린, 국민을 통제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행정조직의 관료주의, 교육기관의 어용성 등 비민주적인 제반 악습은 모두 이같은 과정에서 온존된 일제의 유물인 것이다. 이승만은 매우 호전적인 북진통일론을 주창하면서 "3일이면 평양을 점령한다"고 큰소리를 쳐댔지만 북한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고, 6ㆍ25가 터지자 불과 며칠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었다. 또 "아군이 반격중이니 안심하고 있으라"는 녹음 방송을 되풀이하면서 자기들만 피난한 다음 북한 군대의 추격이 두려워 한강교를 폭파함으로써 수많은 시민들을 빠져 죽게 하고 서울을 아비규환에 빠뜨렸다.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지배하는 군대의 부패는 극에 달하여, 1.ㆍ4후퇴 당시 급조한 국민방위군을 후송하면서까지도 군 예산을 착복함으로써 수천 명의 장정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었다. 아무 죄도 없는 경남 거창의 남녀노소 수백 명을 골짜기에 몰아넣고 학살한 다음 공비소탕 전과로 보고하는가 하면, 진상을 조사하러 내려간 국회의원들에게 인민군 복장을 입은 국군 병사들로 하여금 총격을 가하게 하여 조사를 방해하기까지 했다. '사바사바'가 횡행하여 특권층의 자식들은 마음대로 병역을 기피했으며, 농림부와 은행들의 착복과 부정대출로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가 2백만의 실업자가 거리에 흘러넘쳤고 농민들은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해 부황이 들었다. 국민방위군 사건 한국전쟁이 터지자 남한 정부는 병력 보충을 위해 만 17세부터 40세 미만 장정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전세가 불리하자 51년 1.ㆍ4후퇴 때 이들을 모두 부산으로 이동시켰는데, 고급 장교들이 이들에게 지급 될 식량과 물자를 착복하여 1천여 명 이상이 죽은 사건이다.
4ㆍ19 직후 실시한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진상 재조사 때 발굴한 유골들. 1951년 중공군의 개입으로 1ㆍ4후퇴가 시작된 후, 지리산 일대에 숨어 있던 인민군 패잔병 등의 빨치산(유격대)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에 공비토벌에 나섰던 국군부대가 공비와 내통했다 하여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청장년을 내탄 부락 골짜기에서 136명, 박산 계곡에서 527명을 기관총으로 사살했다. 이 사건이 국회에 보고되고,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자, 경남지구 계엄사령부는 국군 1개 소대를 빨치산으로 가장시켜서 조사단에 총격을 가해 조사를 무산시켰다. 국회의 재조사로 이 사건의 책임자들이 모두 징역형을 받았으나, 이승만의 특별사면으로 모두 풀려났다.뿐만 아니었다. 자유당이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한 개헌안을 국회에 냈다가 1표 차로 부결되자, 이틀 후에 사사오입(반올림)으로 통과된 것으로 선포하는 웃지 못할 희극을 연출하는가 하면, 정부를 비판한 대구매일신문을 어용 깡패들이 습격하자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며 그것을 옹호했다. '백골단', '땃벌떼' 등의 깡패집단을 육성하였고, 허황한 북진통일론에 반대하여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평화통일'안을 내놓은 죽산 조봉암을 북한 간첩으로 몰아 죽이고 진보당을 해산시켜 버렸다. 한편 일본인이 버리고 달아난 토지와 공장, 각종 재산을 그것을 관리하던 한국인 하수인들에게 넘겨주거나, 터무니없이 싼갑에 불하함으로써 권력자들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뇌물을 착복했다.
사사오입 개헌 195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한 자유당은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은 중임 제한에서 예외'라는 조항의 헌법 수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국회 표결 결과 가결 기준인 제적의원 2/3 찬성에 1표가 모자라자, 이것을 소수점 단위로 계산해서 반올림함으로써 통과시킨 것이다.
재판정에 나선 조봉암(1898~1959)
그는 일제 때는 조선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 일제에 검거되어 7년간 감옥에 수감된 후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그러나 1946년 공산당과 갑자기 결별하고 우익으로 급선회하여 1948년 초대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우익의 정치 거물로 성장했다. 하지만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등 이승만에게 도전하자, 1958년 이승만은 그를 북한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켰고 그의 진보당을 해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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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자 대한민국사랑회 회장 |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이 대학을 지키는 일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했지요”
경인여대 설립자로 지난 김대중, 노무현 좌파 정권 시절 정부의 관선이사 투입과 온갖 구실 붙이기로 대학을 송두리째 빼앗길 위기에 처했던 김길자 경인여대 명예총장(교육학 박사). 그는 현재 사단법인 대한민국사랑회를 이끌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건국정신을 널리 알리는 일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지난 7일 광화문 ‘경희궁의 아침’에서 만난 김 회장은 비서도 없이 씩씩하게 일을 해내는 모습이 청년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조용하지만 열정이 넘치는 얘기를 들으며 대한민국의 희망찬 아침을 보는 듯했다.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주중에 두세 번 들른다는 김 회장의 오피스텔 사무실은 단출했다. 사무실 한 쪽에는 정성을 다해 만들어 놓은 ‘건국아버지이승만사랑회’ 목제 현판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그 옆에 ‘대한민국 61세, 건국대통령을 찾읍시다’라는 헤드라인의 이승만 특집판 뉴데일리 타블로이드 신문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또 정면 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흑백사진이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얼른 보기에도 김 회장의 일상(日常)이 이승만 대통령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이 대통령을 깊이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되었습니까?
“2000년 5월 22일 학교(경인여대)가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어요. 교수들과 학생들이 느닷없이 학장실로 들이닥치면서 길고 긴 악몽이 시작되었지요. 학교 밖 좌익세력들의 사주 아래, 내부 불만 교수들이 학교 경영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분규가 아닌 학교 사태를 일으킨 것이었어요. 이 때 학교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며 기도하던 중, ‘내 학교를 빼앗아간 세력들이 대한민국도 빼앗아 가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때부터 애국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국운동을 할 때는 예외 없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키고 정체성을 확고히 하자’라고 외쳤지요. 그렇다면 그 전통성과 정체성의 뿌리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했을 때, 그 뿌리는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깨닫게 되었어요. 그 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지요. 특히 그 분의 미국인 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의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秘話)’를 읽으며 가슴으로 눈물을 흘렸어요.”
이승만 회복이 대한민국 세우기
“이 대통령이 겪은 과정들이 너무나 가슴 아팠고 내 일처럼 공감되었어요. 그래서 매월 개최되는 우남 콜로키움에도 3년을 내리 참석했지요. 알면 알수록 이 대통령의 위대함에 감동했고 이 대통령께서 하신 일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탄생시키고 발전시켰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우리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인물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상징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사실 2007년만 해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우리 국민의 감정적 벽이 너무 두터웠어요. 이에 이승만 박사를 우리의 건국의 아버지로 회복시키는 것이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을 회복하는 운동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대한민국사랑회는 어떤 과정으로 설립되었습니까?
“공교롭게도 건국 60주년을 1년 앞둔 때였어요.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42주기 추모식을 마친 후 이승만 대통령을 바로 알리자는 애국시민들의 뜻을 모아 ‘건국아버지이승만사랑회’를 설립하기로 논의하고 8월 15일에 이화장 통일당에서 창립 예배를 드렸지요. 그 때 ‘대한민국 건국60주년’을 띄워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뉴라이트연대의 젊은 교수들을 만나 민간단체가 주축이 되어 ‘건국60주년 기념사업’을 하자고 제의를 했어요. 이 생각에 동의한 김영호, 신지호, 이인호, 이주영, 정희경 등 40여 명의 준비위원들이 모여 ‘건국 60주년 사업을 민간차원에서 하자’고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했었지요. 나중에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원회에 이 계획이 제출되었고 건국60주년을 정부차원에서 경축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사랑회의 제안으로 기념주화, 기념우표 발행 등이 시행되었지요.
그러나 미군 철수 후 용산에 건국기념공원과 건국기념관을 건설하자는 의견은 실현되지 못했어요. 이 단체가 출범할 때 명칭을 ‘건국아버지이승만사랑회’라고 했더니 벽이 너무 높고 두껍다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좀 더 포괄성을 가진 ‘대한민국사랑회’로 변경하였지요.”
- 앞으로 계획을 소개해 주십시오.
“대한민국사랑회의 가장 큰 목적사업은 ‘건국절’의 제정입니다. 대한민국이 태어난 지 환갑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국민의 65%가 건국일을 모르고 있다니 말이 되겠어요?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지 못한 광복만 거창하게 기념하고 스스로 이루어낸 건국일은 나몰라라 하다니 참으로 이상한 대한민국입니다.
건국절 제정 운동을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전개할 생각입니다. 많은 분들이 호응하고 있습니다. 9월 중순에 1차 모임을 갖기로 했어요. 이와 아울러 건국기념공원, 건국기념관을 건립하고 나아가 이승만 기념관과 이승만 동상 세우기, 우남로 지정 등의 국민운동을 전개하려고 해요. 많이 늦었지만 대한민국의 뿌리를 찾아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패륜국가, 패륜국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지도자라고 생각합니까?
“그 분은 기독교 정신으로 아시아의 최초의 기독교 국가를 세우려는 염원을 가졌던 분이에요. 그 분은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위대한 사상가로서 철저한 반공자유주의자였어요.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기도를 한 분이지요.
대한민국이 그 분의 기독교정신 가운데 태어났다는 생각을 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사명과 책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어요. 심지어 기독교가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하고, 대한민국이 망하면 기독교가 망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과 대한민국은 일심동체라고 생각해요.”
이승만은 예비된 인물
“제가 생각해보니,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탄생시키기 위해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예비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여 철저하게 훈련시켜서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일에 쓰셨다고 생각해요. 배재학당에 입학시켜 기독교교육을 받게 했고 반역죄로 감옥에 가게 하여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했고 그를 통해 월남 이상재 선생을 비롯해 40명을 개종시켰어요. 고종의 밀사로 미국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했고 단기간에 박사학위를 받는 등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시키셨고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나서게 하셨지요. 이 과정에 선교사들과 목사들이 도왔어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YMCA 학감이 돼 전국 순회 전도, 시국강연회를 했어요. 이 때 영향을 받았던 분들이 독립선언을 하신 33인 중에 많이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구한말의 개혁자이며 대단한 웅변가이고 탁월한 외교가이며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대담을 할 때에도 결코 뜻을 굽히지 않는 세계적인 정치지도자였습니다. 또한 서예가, 시인, 사상가, 교육자이기도 합니다.”
-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까.
“이 분이 아니었으면 과연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과장된 말이 아니에요. 이 분의 탁월한 영도력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될 수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해방 후 우리 지식인 사회는 60% 이상이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이었어요. 그대로 놔두면 공산국가가 될 수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막았지요. 소위 남북합작이 공론화되던 시기였는데, 이 대통령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어요. 심지어 미국이 남북합작을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이런 속에서 남한이 독자적 정부를 주장하고 유엔의 인정을 받은 것은 정말 기적이지요. 반대와 거부를 무릅쓰고 그 일을 이승만 대통령이 해낸 것입니다. 종횡무진으로 국제외교력과 정치지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지요. 그래서 앞으로 ‘우남정치외교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해 우남 정신을 이어받은 정치지도자를 배출하는 것이 제 개인의 꿈이기도 합니다.
단군왕검 이래 한반도는 왕의 나라였으며, 백성이 있을 뿐 주권을 가진 국민이 없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건국으로 주권이 국민에게 주어진 주권재민의 자유민주국가가 된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사실 만으로도 이 대통령의 말년의 실정을 상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한 반만년 동안 ‘대륙문명권’에 속해 주변 강대국의 침탈과 박해를 받던 이 한반도를 ‘해양문명권’으로의 대변혁을 통해 오늘의 자유와 번영을 구가하게 했으며 주변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아니 오히려 앞서 갈 수 있도록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으신 분입니다.”
‘우남정치외교대학원’ 설립 꿈
- 오늘날 이 나라가 겪고 있는 이념 혼란은 왜 일어났다고 생각합니까?
“이념 혼란이 왜 왔느냐? 한 마디로 이승만 대통령을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말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대표하는 분이고 상징이지요. 그런데 이런 분을 역사 속에 묻어버렸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의 뿌리를 스스로 잘라냈다는 얘기입니다. 4·19는 1960년 당시는 당연한 애국운동이었으며 민주화 운동이었습니다. 그 나름대로 기여가 컸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볼 때 4·19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을 역사 속에 묻어 버리고 건국이라는 말조차 함께 묻어버린 일이 정말 잘한 일인지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을 버리고 김구 선생을 대신 내세웠어요. 물론 김구 선생은 위대한 애국자요 독립투사이며 민족의 스승이십니다. 그러나 좌편향의 사람들이 이승만을 폄하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김구 선생을 과대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김구 선생은 본인의 뜻과는 달리 좌파의 상징인물이 되고 말았어요. 저 세상에 계신 김구 선생께서 과연 기뻐하실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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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19 50주년 되는 해입니다.
대한민국 1대 대통령 이승만..
4.19 의거와 3.15 부정선거로 그의 행적을 추적해보았습니다.
8.15를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하자는 자랑스런 x박 가카의 진의가 바로 여기
에 있음을 알수 있었습니다.
이 나라를 기독교 공화국으로 만들려는 이승만의 음모..
그걸 이어받고있는 만국민들에 욕을 바가지 잡수시는 우리 가카..
글구 대한민국에 기생해온 친일파와 개독단체 뉴라이트..
그들이 왜 대한민국을 기독교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하는지...
그 진위는 친일행위들을 정당화 시키려고 하는 음모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8월 15일은 분명 우리가 일제에게 해방된 날입니다...
근데 건국절이라고요?......
우리가 건국한지 60년입니까?
반만년이어온 민족과 국가는 버리고 겨우 60년으로 나라 역사를 줄이는 이유가
뭡니까?
저기 두번째 글에 김길자라는 망나니같은년이 하는 말 보세요..
이승만 회복이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입니까?
아니..왜? 이나라를 단군의 자손이 아닌 이승만의 자손이라 하지 그러세요?
참 말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건국절을 만들고자하는 음모인겁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