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十七 章. 마음을 뒤흔드는 합주(合奏)
황용이 그 여자들을 바라다보니 모두 피부가 희고 몸집이 큰 편이며 그 중 어떤
여자는 금발에 벽안이요, 또 어떤 여자들은 코가 오똑하고 눈이 깊이 파인 것이
과연 중원의 여자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구양봉이 손뼉을 세 번 치자 8명의
여자가 악기를 꺼내 불고 치니 나머지 24명이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앞으로 넘어졌다 뒤로 일어났다가 다시 왼쪽, 오른쪽으로 빙글빙글 도는데
몸이 부드럽기 한이 없었다. 춤을 추는 모든 사람들이 앞뒤로 돌며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모양이 긴 뱀이 꿈틀거리는 것과 흡사하다.
황용은 구양공자가 쓰던 금사권(金蛇拳)이 생각나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뚫어지게 자기를 주시하고 있던 구양공자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저 극악무도한
작자에게 금침을 날렸는데도 아버지가 막는 바람에 허탕을 친 것이 분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구양공자를 해치워 버리기만 하면 만사가 해결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제아무리 시집을 가라고 괴롭혀도 시집갈 상대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구양공자는 자기를
향해 웃는 황용을 보자 가슴의 통증까지도 까맣게 잊었다.
이때 흰 옷 입은 여자들의 춤은 더욱 급하게 돌아가고 뱀을 몰던 낭자들은 차라리
눈까지 감고 있었다. 마음이 산란해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황약사는 미소를 머금고
끝까지 지켜보다가 옥퉁소를 입에 대고 몇 번 불어 본다. 춤추던 여자들이 갑자기
놀라 발걸음이 흩어진다. 퉁소 소리가 다시 몇 번 울리자 그들은 그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구양공자는 골탕을 먹은 일이 있기 때문에 일단 춤이
시작되면 퉁소 소리가 맞을 때까지 계속 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춤추는 여자들이 죽어야 멈추게 되는 것이다. 자기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숙부님!]
이렇게 구양봉을 부르자 구양봉이 두 손을 한번 탁 친다. 시녀 하나가 쇠로 만든
비파(箏)를 안고 나왔다. 이때는 구양공자의 마음이 벌써 동요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뱀을 몰던 남자들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광태를 부리고 있었다.
구양봉이 비파의 줄을 몇 번 떵떵하고 퉁겼다. 퉁소 소리 가운데의 부드러운 음이
비파 소리에 눌리는 듯했다. 황약사가 웃으며 입을 연다.
[자, 우리함께 합주를 해봅시다.]
그가 옥퉁소를 입에서 떼는 순간 광란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잠시 행동을 멈췄다.
[빨리 귀를 틀어막아라. 내 황약사와 합께 합주를 하겠다.]
구양봉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모두들 옷깃을 찢어 귀를 틀어막고 다시 머리를 몇
번이나 칭칭 감아 쌌다. 혹시 귀로 소리가 새들어 갈까 해서다.
구양공자와 같이 공력이 대단한 사람까지도 솜으로 두 귀를 틀어막았다.
[아니, 다른 사람이 주악을 울리면 귀를 기울여야지 무엇 때문에 귀를 틀어막고
야단들일까? 나는 그러지 않을 테예요.]
황용이 웃으며 하는 말에 황약사가 호통을 친다.
[아니, 네가 무얼 안다고 까부느냐? 구양봉 아저씨의 비파 솜씨는 천하에
절묘하기로 이름이 나 있다. 네가 무슨 공력이 있다고 야단이냐.]
품에서 비단 수건을 꺼내 둘로 찢어 황용의 귀를 막아 준다. 곽정은 호기심이
동했다. 구양봉의 쇠로 만든 비파의 위력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오히려 몇 발짝
앞으로 나섰다.
[구양형의 뱀은 귀를 막을 수 없지 않소?]
황약사가 구양봉을 향해 이렇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벙어리 하인에게
손짓을 했다. 하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뱀을 몰던 남자들에게 자리를 피하라고 손을
휘둘렀다. 그렇지 않아도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구양봉이
허락하는 눈치를 보이자 급히 뱀떼를 몰고 벙어리 하인이 안내하는 대로 분분히
사라졌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약사형께서 양해하시구료.]
구양봉이 이렇게 말하고 비파줄을 퉁기기 시작했다. 비파의 성조는 원래 처량하고
격한 것인데 구양봉의 쇠로 만든 비파는 더욱 대단했다. 곽정은 악기에 대해 전연
모르지만 이 비파 소리는 한 박자 한 박자가 자기의 가슴과 함께 뛴다는 것을
느꼈다. 비파 소리가 한 번 울릴 때마다 자기의 가슴도 한 번 뛰었다. 소리가
빨라지면 가슴도 함께 빨리 뛰었다. 여간 거북한게 아니다.
(이렇게 계속되다간 가슴이 빠개지고 말겠구나.)
급히 땅바닥에 정좌하고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내공을 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비파 소리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다.
구양봉이 퉁기는 비파 소리와 함께 황약사가 부는 옥퉁소 소리가 어우러져 가락을
뽑았다. 금으로 만든 북을 치는 듯한 소리 속에 은은한 황약사의 퉁소 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곽정의 마음도 흥겨워지고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지만 심신을
가다듬고 듣고 있었다. 황약사와 구양봉은 서로 지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불고
퉁긴다.
황용은 합주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다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다. 아버지는 일어서서 걸어다니며 부는데 발걸음은
팔괘(八卦)의 방위를 찾아 딛고 있었다. 이것은 아버지가 평소 상승의 내공을 익힐
때 취하는 자세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다시 구양봉에게 시선을 돌렸다.
만두 찌는 솥처럼 그의 머리에서 김이 무럭무럭 솟고 있었다. 둘다 결사적인 힘을
다하여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곽정은 대나무 숲속에 숨어 두 사람의 합주를 들으며 생각에 잠긴다. 옥퉁소와
쇠로 만든 비파가 무공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마력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는가? 즉시 심신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조용히 귀를 기울었다. 하나는
부드럽고(柔) 다른 하나는 강(剛)했다. 역시 유(柔)와 강(剛)의 대결이 고수끼리의
대결과 큰 차가 없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옳지! 황도주와 구양봉이 상승의 내공으로 결사적인 대결을 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자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그들의 대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원래 운기(運氣)를 하여 동시에 퉁소와 비파 소리의 유혹을 물리치느라 꽤
힘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제 심신이 안정되어 조용히 쌍방의 승패를 경청할 수
있었다.
구양봉이 처음에는 뇌성 벽력과 같은 위세로 황약사를 압도하고 나섰다. 그러나
옥퉁소 소리는 묘하게도 동서로 피하면서 비파 소리의 허를 이용해 뚫고 들어가곤
했다. 한참 지나자 비파 소리가 서서히 늦어지고 퉁소 소리가 더욱 자지러들었다.
곽정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주백통이 그에게 외라고
했던 두 마디 말이다. <강(剛)은 오래 가지 못하고 유(柔)는 지킬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제 비파 소리가 반격을 하겠구나.)
아니나다를까? 옥퉁소 소리가 맑고 길게 퍼지는 듯하자 비파소리가 떵떵 크게
울리며 위세를 과시했다. 곽정이 그 구결(口訣)을 욀 때 그것이 천하 무술의
경전인 구음진경이란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뿐만아니라 뜻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황약사와 구양봉이 악기를 가지고 서로 무공을 겨루게 됨에
쌍방의 진퇴와 공방이 묘하게도 자기가 늘 외던 구결과 부합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두 악기의 대결을 듣고 평소 몰랐던 이치를 깨우치게 되어 몹시 기뻤다.
여러 차례나 황약사가 승리를 거두는 것같이 들렸다. 퉁소 소리가 자지러지고
꺾어질 때마다 구양봉은 방어를 못 하고 몰렸다. 또한 구양봉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을 알았다. 곽정은 치음에는 서로 겸양을 하기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한 시간 이상 듣는 동안 퉁소 소리와 비파 소리의 공방전을 벌이는
법문(法門)과 주백통이 자기에게 전수해 준 구결을 비교하면서 많은 묘리를 터득한
것이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희열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구결 가운데의 도리로 말한다면 쌍방의 공방 가운데 적지않은 허점과 아쉬움이
있다. 그렇다면 주백통 형님의 무공이 황도주나 구양봉보다 월등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지는 않을 거야. 만약 주백통의 무공이 그들보다 월등하다면 무엇
때문에 15년 동안이나 굴 속에 갇혀 고생을 했단 말인가?)
이 생각 저 생각하는 동안 쌍방의 악기 소리가 더욱 급박해지면서
단병상접(短兵相接),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제 곧 결말이 날 막바지에 도달한
것이다. 혹시 황약사가 지는 것이 아닌가 조바심을 하는데 멀리 해상에서 한바탕
긴 휘파람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황약사와 구양봉이 동시에 놀랐는지 퉁소 소리, 비파 소리가 뚝 멈췄다. 휘파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린다. 누군가가 배를 타고 섬으로 오는 것 같았다.
구양봉이 손을 휘둘러 땅땅 비파를 울린다. 비단을 찢는 듯한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저쪽의 휘파람 소리가 갑자기 높아지며 도전해 오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황약사의 퉁소도 싸움에 휩쓸려 들었다. 어떤 때는 휘파람 소리와 또 어떤 때는
비파 소리와 얽히고 설킨다. 세 가지 화음이 오르락내리락 정신을 차리기 어렵게
들렸다. 곽정이 주백통과 함께 네 사람이 어우러져 싸우는 장난을 한 적이 있었다.
삼국이 서로 엇갈려 혼전을 벌이는 국면이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또 하나의
고수가 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휘파람 소리는 더욱 가까이서 들렸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용이 우는 듯 사자가
울부짖는 듯하더니 다시 새소리처럼 자지러지며 천변 만화하면서 혼전을 벌였다.
곽정은 너무나 재미가 있어 자기도 모르게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좋구나!]
자기가 지른 소리에 자기가 놀랐다. 큰일났구나 싶어 뺑소니를 치려고 하는데
눈앞에 파란 그림자가 번쩍하며 벌써 황약사가 자기 면전에 와 서 있었다, 이때
악기 소리는 멈추고 황약사가 낮은 소리로 호통을 친다.
[이 녀석 따라오너라!]
곽정은 이왕 들킨 일이라 고개를 쳐들고 황약사의 뒤를 따라 대나무 정자로
올라섰다. 황용은 귀를 수건으로 막고 있었기 때문에 곽정이 외치는 환호성을 듣지
못했다. 곽정이 올라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달려들며 두 손을 마주 잡는다.
[곽정 오빠, 종내 오시고 말았군요.......]
채 말도 맺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흘린다. 구양공자는 곽정을 보자마자 못마땅한
눈초리로 쏘아보다가 황용이 반기는 것을 보자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몸을
날리며 주먹을 들어 곽정의 골통을 내리쳤다. 구양공자는 곽정을 우습게 본
셈이다.
[거지같은 녀석이 왜 여기 나타나느냐?]
곽정의 무공은 크게 발전하여 보응(寶應) 유(劉)씨 사당에서 겨룰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살짝 비켜서며 왼손은 신룡파미(神龍擺尾), 오른손은
항룡유회(亢龍有悔)를 폈다. 둘 다 강룡십팔장 가운데의 묘기이다. 이
강룡십팔장의 장법의 오묘함이 천하무학이라 1초(招)도 방어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주백통의 쌍수호박에 의한 1인 2역의 공격임에랴?
구양공자는 그의 왼손이 자기 오른쪽 어깨를 향해 날아옴을 느꼈다. 그것이
강룡십팔장의 솜씨라는 것도 알았다. 피해야지 막다가는 오히려 큰일이 벌어진다.
왼쪽으로 피하는 순간 이쪽의 항룡유회에 결리고 말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가슴의 늑골이 부러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구양공자의 내공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곽정의 장력을 힘으로 막다가는 자기의
심장이 터져 나갈 것을 알고 급히 뒤로 피해 뛰었다. 곽정에게 얻어맞고 자기가
몸을 날리는 바람에 몸이 허공에 떴다. 대나무 위로 떨어지고 다시 그 탄력에 의해
몇 번 깡충거리다 그제야 땅에 내려섰다. 부끄럽고 창피한데다 가슴이 아파 그냥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곽정의 돌발적인 솜씨에 황약사와 구양봉은 경악했고 황용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곽정 자신도 뜻밖이었다. 자기의 무공이 이토록 진전되어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얻어맞은 구양공자가 살수로 반격할까 봐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대비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화가 난 눈초리로 곽정을 쏘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홍노괴! 아주 훌륭한 제자를 두었군 그래.]
이때 황용은 귀를 막고 있던 수건을 풀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야 홍칠공이 온 것을
알았다. 정말 하늘에서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대나무숲 밖으로 뛰어나가며
외친다.
[사부님! 사부님!]
황약사가 오히려 깜짝 놀란다.
(아니, 저 애가 누굴 보구 사부래?)
이때 홍칠공이 등에 큰 호로병을 멘 채 오른손에 죽장을 짚고 왼손에 황용의 손을
잡고 웃으며 나타났다. 황약사는 정말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른다.
[용아! 너 방금 누굴 보구 사부라고 했느냐?]
황용은 오히려 구양공자를 바라다보며 말을 꺼낸다.
[이 못된 사람이 날 괴롭힐 때 만약 홍칠공께서 구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영영
아버지는 이 용이를 보시지 못할 뻔했어요.]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게냐? 얌전한 그 사람이 너를 괴롭히다니?]
[아버지께서 믿지 못하신다면 대가 한번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겠어요.]
황용은 고개를 돌려 구양공자를 바라다본다.
[우선 맹세부터 하세요. 만일 아버지께 대답할 때 추호라도 거짓이 있으면 구양
아저씨의 지팡이에 있는 뱀에 물려 죽을 거라구요.]
황용의 이 말이 떨어지자 구양봉과 구양공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원래
구양봉의 지팡이에 있는 뱀은 10여 년 동안 공을 들여 키운 것이다. 여러 가지
종류의 뱀 가운데 독이 제일 많다는 뱀만 골라 교배를 시켜 만들어 내놓은 괴상한
뱀이다. 구양봉은 평소 수하의 반도를 벌할 때나 아니면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있을 때 지팡이의 이 뱀에 물리게 했다. 한 번 물리기만 하면 전신이 가려워
괴로와하다가 숨을 거둔다. 구양봉이 선심이 일어나 구하려 해도 치료할 약이
없으니 소용이 없는 것이다. 황용은 그의 지팡이에 서리고 있는 괴상한 뱀을 보고
그냥 입에서 나오는대로 한 말인데 공교롭게도 서독 숙질간에 가장 금기로 아는
곳을 찌른 결과가 되었다.
[장차 장인 되실 어른께서 물으시는 말씀에 어디라고 감히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함부로 입을 놀리면 먼저 따귀를 때리겠어요. 자 그럼, 이제 하나하나 물을 테니
똑똑히 대답을 해요. 북경의 조왕부에서 나를 만난 일이 있어요? 없어요?]
구양공자는 늑골이 부러지고 또 가슴에는 황용의 금침을 맞았다. 통증을 참을 수가
없어 결사적인 내공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차라리 말이나 하지 않으면 그런대로
운기(運氣)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두어 마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통증이 더하여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황용이
묻자 입을 벌려 대답할 수는 없고 고개를 끄덕여 시인하고 말았다.
[그때 당신은 사통천, 팽련호, 양자옹, 영지상인 둥과 한패가 되어 나 한 사람을
친 일이 있어요? 없어요?]
구양공자는 자기가 그렇게 유명한 고수들과 한패가 되어 어린 소녀 하나를 치거나
괴롭힐 수 있겠느냐고 반박하고 싶었다.
[내....내가 그들과 한패가 아니라.......]
그러나 가슴이 아파 한마디도 더 할 수가 없었다.
[좋아요. 그럼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묻는 말에 시인하거든 고개를 끄덕이고,
아니면 머리를 흔들어요. 사통천, 팽련호, 양자옹, 영지상인들과 내가 맞선 일은
있어요? 없어요?]
구양공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이 모두 나를 잡으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뒤에 당신이 나섰죠? 안
그래요?]
구양공자는 꼼짝없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여 시인했다.
[그때 나는 조왕부의 대청에서 혼자 외롭게 시달리고 있었는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도 모르고 계셔서 구하러 오시지
않았죠?]
구양공자는 황용의 말이 황약사를 자극하겠다는 저의가 분명 있음을 알기는 했지만
사실이 그랬으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용은 아버지의 손을 끌어 잡았다.
[아버지, 나를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는군요.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이렇게
대하시지는 않았을 텐데.......]
황약사는 그녀가 세상 떠난 애처의 얘기를 꺼내자 코끝이 시큰해져서 손을 뻗어
황용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구양봉이란 위인은 교활하면서도 얕은 꾀가 많았다.
형세가 불리하다고 생각했던지 이런 말을 꺼낸다.
[황소저, 그토록 유명한 무림의 인물들이 황소저를 잡아 놓으려고 했지만 가전의
절세 무예를 지니고 계시므로 꼼짝 못하고 말았죠? 그렇지요?]
황용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황약사는 자기 가문의 무공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구양봉이 황약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약사형, 조카 녀석이 따님의 무예를 본 후 더욱 마음이 기울어 저를 졸라 이렇게
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찾아와 혼사를 논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그랬던가요!]
황약사는 흐뭇하고 만족한 표정이다. 구양봉이 시신을 홍칠공에게 돌린다.
[홍형! 우리 숙질은 도화도의 무공과 인재를 흠모하여 이곳에 왔습니다만 홍형은
왜 오셨습니까? 지난번 내 조카 녀석 명만 짧았더라도 당신의
만천화우척금침(滿天花雨擲金針)의 절기에 그만 목숨을 잃을 뻔했더군요?]
그날 황용이 구양공자를 향해 금침을 던져 위험한 고비에 있을 때 홍칠공이 나서서
그를 구해 준 일이 있었다. 오히려 그 일을 홍칠공이 그랬다고 뒤집어씌우는
말이다. 구양공자가 거짓말로 자기 숙부를 속이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홍칠공은 전연 대수롭지 않다는 듯 껄껄 웃으며 호로병의 마개를 열고 술을
한 모금 마신다. 곽정이 오히려 참지 못하고 나선다.
[홍칠공이 구양공자의 생명을 구해 준건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법이 어디 있어요?]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어디라고 어린 녀석이 말참견을 하느냐?]
황약사가 호통을 치는 바람에 곽정은 당황한다.
[용이, 구양공자가 정소저를 납치한 일을 아버님께 말씀드려요.]
황용은 아버지의 성미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평소 세상의 속된 일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보기를 잘했다. 다른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가 일쑤요, 다른 사람들이 그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옳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 동사(東邪)라는 별명을 듣는지도 모른다.
(구양공자의 못된 행위를 아버지는 오히려 풍류가 있다고 말하실지도 몰라.)
아버지 황약사가 곽정을 째려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양공자를 향해 계속
말을 건다.
[내 할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날 나와 조왕부에서 겨룰 때 두 손을 등뒤에
묶어 놓고 손을 쓰지 않고도 나를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셨죠?]
구양공자가 고개를 끄덕여 시인한다.
[뒤에 내가 홍칠공을 은사로 모시고 보응에서 두 번째 만나 겨루게 되었을 때 또
아버지나 홍칠공에게 배운 어떤 무공을 가지고 덤벼들어도 숙부에게 배운 권법으로
파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치셨죠? 네?]
(그야 자기가 그렇게 주장해서 그랬던 것이지, 내가 그렇게 하자고 했나?)
황용은 머뭇거리는 구양공자의 표정을 살피고 다시 한 번 추궁한다.
[하여튼 그때 그렇게 결정한 후 겨뤘던 건 사실이죠?]
구양공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황용이 다시 자기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린다.
[아버지 보세요. 홍칠공도 깔보고, 아버지도 업신여기는 거 아녜요. 두 분의
무예를 합쳐도 자기 숙부만 못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두 사람이 합세해도 자기
숙부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나는 그런 말 믿지도 않았지만요.]
[어린 게 함부로 그렇게 입을 놀리는 게 아니다. 세상에 무학을 하는 사람치고
동사,서독,남제,북개의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더냐?]
황약사의 입으로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구양공자의 경망함이 못마땅했다.
[홍형, 먼 길에 이렇게 도화도를 찾아 주셨는데 무슨 분부라도 있으신가요?]
[네,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홍칠공이 우스꽝스러운 인물이기는 하지만 위인이 정직하며 악한 것을 원수처럼
미워한다는 사실을 황약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도 내심으로 흠모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혼자 해결하지 누구에게 부탁하는 성미가
아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부탁이 있어 왔다는 말을 듣고 보니 공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가 수십 년을 사귄 사이인데 홍형의 분부시라면 여부 있겠습니까?]
[그렇게 쉽게 대답할 일도 아니오. 일이 꽤 어려울 텐대요.]
[쉬운 일 같으면 홍형이 제게 부탁이나 하시겠습니까?]
황약사가 웃자 홍칠공이 손뼉을 친다.
[그렇지요. 그래야만 지기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대답하신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불 속에 들어가라시면 불 속으로, 물 속에
들어가라시면 물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구양봉이 지팡이를 흔들면서 말참견을 한다.
[황형! 잠깐만, 무슨 일인지 물어나 보시구료.]
홍칠공은 구양봉이 나서는 게 못마땅했다.
[여보 독물(毒物),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니 나설 것 없소. 구경이나 하다가 잔치
술이나 마시구료.]
[잔치 술이라니요?]
[그렇소. 바로 잔치 술이오.]
오른손으로 곽정과 황용을 가리켰다.
[둘 다 내 제자요. 황형께 간구해 성혼을 시키겠다고 이미 약속을 했었다오. 이제
황형도 쾌히 응낙하신게요.]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곽정과 황용은 너무 기뻐 서로 바라다보았고, 구양봉 숙질과
황약사는 깜짝 놀랐다. 구양봉이 먼저 나섰다.
[홍형, 그 말씀은 거두시오. 황형의 따님은 벌써 제 조카와 혼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화도에 온 것이오.]
[황형, 사실이 그런가요?]
홍칠공이 황약사를 향해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홍형께서는 농담의 말씀을 거두어 주시오.]
홍칠공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지는 듯했다.
[누가 농담을 합니까? 딸 하나를 두 집에 시집보내려는 경우야 있을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다시 구양봉을 바라다본다.
[나는 곽씨 가문의 중매자인데 구양씨 댁 중매는 도대체 누구요?]
구양봉은 뜻밖의 질문을 받고 순간적으로 당황한다.
[황형도 나도 응낙을 한 처지에 무슨 중매자가 필요하단 말씀이오?]
[그러나 또 한 사람이 응낙을 안했단 말이오.]
[그래, 그가 누구요?]
[바로 이 늙은 거지 홍칠공이오!]
구양봉은 오늘 피비린내 나는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직감했지만 위인이
음흉하여 내색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었다. 홍칠공은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당신의 조카 품행이 단정치 못한데 어떻게 황약사의 금지옥엽 같은 따님을 아내로
맞겠다는 말이오? 두 분이 억지를 부려 혼사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들 둘이
불화하여 날마다 치고 받으면 그래 어쩔 셈이오?]
이 말을 들은 황약사의 마음이 흩어지는 듯했다. 딸의 눈치를 살피니 곽정을
바라다보는 눈매에 정을 담뿍 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곽정이 어쩐지
못마땅했다.
황약사는 총명한 사람이다. 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며 바둑이며
그림이며 글씨며 못하는 것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사귄 친구는 모두 재사(才士)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의 부인과 딸도 지혜가 남달리 뛰어나 있었다. 그런데
무남독녀 외동딸을 멍청해 보이는 곽정에게 줄 수야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무래도
그것은 곤란한 일이다.
구양공자 옆에 서 있는 곽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비교가 되지 않는다. 완전히 한
마리 봉과 촌닭이다. 구양공자가 백 배는 훌륭해 보이는 것이다. 딸은 아무래도
구양공자에게 시집을 보내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진다. 그러나 홍칠공의
체면도 세워 주어야 하는 것이다.
[여보 구양형, 조카가 부상을 입은 것 같으니 우선 치료나 해주시고 천천히
상의하도록 합시다.]
구양봉은 황약사의 말을 듣고 조카를 손짓해 대나무숲으로 들어갔다. 구양봉이
조카의 금침을 뽑아 주고 부러진 늑골을 붙여준 것이다. 한참 지나 그들이 다시
정자로 돌아왔다. 황약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제 딸아이 몸도 허약하고 까불기만 좋아해 군자의 아내로 부족함이 많습니다.
뜻밖에도 홍형과 구양형이 청혼을 해주시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구양 가문의 청혼을 받아들여 응낙을 했지만 홍형의 분부도
물리치기가 어렵군요. 제가 한번 두 신랑감을 시험해 봤으면 하는데 두 분의
의향이 어떠신지?]
[그럼, 어디 빨리 말씀을 하시구료. 이 늙은 거지 그만 답답해 견딜 수가 없군요.]
황약사는 가볍게 미소를 머금는다.
[제 딸아이 덕이고 용모고 자랑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 욕심은 신랑만은
훌륭한 사람을 구해 주고 싶군요. 구양공자는 구양형의 어진 조카요 곽정은 또한
칠공의 제자이니 인품이야 더 말할게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망설여지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문제를 세 개 내어 두 분을 시험해 본 후
이긴 분에게 제 딸을 드릴까 합니다. 저는 아무 쪽에도 편들지 않을테니 두 분의
의향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 참 묘한 생각이십니다. 그러나 제 조카가 부상을 입었으니 무예로 겨루게
한다면 완쾌한 후에나 가능하겠습니다.]
그러나 홍칠공의 생각은 달랐다.
(이놈의 황노사, 말로는 편들지 않겠다고 하더니 새빨간 거짓말이로구나. 만약
시나 문장으로 겨루게 된다면 곽정은 어림없을텐데...... 제기랄, 저놈의 독물과
한바탕 싸울 수 밖에 없겠구나.)
앙천 대소를 하며 입을 연다.
[우리 모두가 무예를 하는 사람들인데, 그래 무예로 겨루지 않으면 뭘로 하겠다는
말이오? 밥 먹고 똥 싸는 걸로 시합을 하나? 당신 조카는 부상을 입었지만 당신은
멀쩡하니 우리가 대신 한번 겨루어 봅시다.]
구양봉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의 어깨를 후려갈긴다. 구양봉이 어깨를 낮추어
피하고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홍칠공이 죽장을 옆에 있는 대나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소리를 질렸다.
[반격을 하시오!]
말을 끝내자마자 두 손을 들어 순식간에 7초(招)를 공격한다. 전광 석화처럼
날렵한 돌격이었다. 구양봉은 왼쪽으로 막고 오른 쪽으로 피하고 오른손을 땅에
꽂았다. 지팡이가 정자 안에 깔린 벽돌에 박혀 꼿꼿하게 섰다. 순간, 왼손이 벌써
홍칠공을 향해 7초(招)나 반격을 했다. 황약사는 갈채를 보내며 만류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와 더불어 이름을 날리는 무림의 고수가 2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진경을 했는가 보자는 속셈이다. 홍칠공이나 구양봉이 모두 일파의 종주다. 무공은
20년 전에 벌써 극치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화산에서 겨룬 후 더욱 정진을
거듭하여 닦아 온 무공이다. 화산에서 싸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둘은 서로
재빠른 공격과 방어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피차의 허실을 노렸다. 권세(拳勢)와
장영(掌影)이 대나무 잎 사이로 춤을 춘다.
곽정은 옆에서 넋을 잃고 관전을 했다. 쌍방의 공방전이 너무나 묘했기 때문이다.
구음진경에 기재된 것은 원래 천하 무학의 원전이다. 내가 외가(內家外家)는
물론이요, 권법이나 검술의 기본적인 법문(法門)이 모두 경전의 상반부에 수록되어
있었다. 곽정은 외기는 다 욌지만 아직도 미숙했다. 그러나 부지 불식 가운데
식견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이때 두 사람이 모두 상승의 무공으로 대결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동작 하나 하나가 경에 씌어진 법문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둘은 3백여 초(招)를 다퉜다. 홍칠공이나 구양봉이 다 상대의
솜씨에 놀라 서로 내심으로 감탄을 마지않았다. 황약사도 옆에서 관전을 하면서
한숨을 길게 내쉰다.
(내 도화도에서 혼자 불철주야 단련을 했기로, 왕중양이 세상을 떠난 뒤 내 무공이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로구나. 늙은 거지나 독물이 어디서
이런 훌륭한 무공을 익혔을까?)
구양공자나 황용은 각기 다른 생각에 잠긴 채 구경을 하고 있었다. 구양공자는
숙부가, 황용은 홍칠공이 이겨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 둘은 지금 두 사람이
벌이고 있는 대결의 묘미를 알 수는 없었던 것이다. 황용이 어쩌다 시선을
돌리는데 땅바닥에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춤추듯 손발을 놀리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사람이 아닌 곽정이다. 표정도 괴상한 것이 신들린 사람처럼
미쳐 날뛴다. 깜짝 놀라 낮은 소리로 불러 본다.
[곽정 오빠!]
그러나 곽정은 알아듣지 못하고 여전히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차고 있었다. 황용이
이상해서 자세히 관찰하니 그는 홍칠공과 구양봉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때 싸우는 두 사람의 권로가 이미 변하여 공격과 방어가 원만해져 있었다. 한
사람이 한참 동안 응시해 본 뒤에 공격을 했다가 상대가 피하면 땅바닥에 앉아
쉬다가 다시 일어나 공격을 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무인의 대결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사제가 함께 무예 전수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늦고 허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모양은 방금 격돌할 때보다 더욱 심각하고 진지해
보였다. 황용이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 또한 싸우는 두
사람보다 심각한 표정이다. 다만 구양공자만이 황용을 향해 야릇한 눈길을 보이며
부채를 흔들고 있을 뿐이다.
곽정은 계속 자신을 잃은 듯 관전에 열중하다가 탄성을 발했다. 구양공자는 곽정의
그와 같은 태도가 몹시 눈에 거슬렸다.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떠들며 야단이냐?]
[자기가 모른다고 남까지 모르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오히려 황용이 듣고 쏘아붙였다.
[공연히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는 체하니까 그렇지요. 나이도 어린 게 어떻게
숙부님의 신묘한 솜씨를 알겠어요?]
[자신이 모르면 모르는 게지 뭔 그래요?]
둘이 이렇게 입씨름을 하고 있는데도 황약사와 곽정은 귀가 먹었는지 관전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이때 홍칠공과 구양봉의 손발은 더욱 완만해 있었다. 하나는 왼손의 중지로 자기
머리를 퉁기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두 귀를 감싸 쥔 채 땅에 쭈그려 앉아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러다 둘이 동시에 일어나 서며 한 차례 공방전을 편다.
[잘한다 잘해!]
곽정이 갈채를 보내면 그들은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 생각에 잠긴다. 둘의
무공이 이 상태에 도달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각기 각파의 무술치고 그들이
사용해 보지 않은 것이 없다. 제아무리 묘한 재주의 살수를 펴 봐도 피차에 아무런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승부를 가릴 수가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20년 전 대결을 해 본 후 하나는 중원에서, 다른 하나는 서역에 떨어져
있으면서 오랫동안 소식도 없이 지냈다. 이제 다시 대결을 하는 동안 피차의
강점과 허점 금기를 완전히 파악한 것이다. 달빛이 사라지고 아침 해가 동산에
떠오르는 동안 둘은 근 1천여 초(招)를 겨뤘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홍칠공과 구양봉이 각자 지혜를 다 짜내 새로운 무공을 창출해냈고 권법과 장력에
천변 만화의 재주를 다 부려 보았지만 시종일관 우열이 가려지지 않았다. 이 틈에
덕을 본 것은 곽정 한 사람뿐이다. 그는 당대에 무공이 제일 강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면서 한없는 재주를 배웠다. 구양봉이 공격을 하면 홍칠공은 이렇게
방어를 해야겠구나, 오히려 자기 쪽에서 먼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홍칠공의 반격 자세가 자기가 상상했던 것보다 몇십 배 훌륭한 경우도 많았다. 또
홍칠공의 공격에 구양봉의 반격은 어떨까? 조바심을 해 보았지만 구양봉도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황용은 곽정의 이러한 태도를 주시해 보며 이상한 생각을 했다.
(10여 일 만나지 못하는 동안 하늘에라도 올라가 무예를 익혔나?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저렇게도 기뻐하고 감탄해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또 다른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저 오빠가 내 생각을 하다가 미쳐 버린 것이 아닐까?)
곽정에게 쫓아가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이때 곽정은 때마침 구양봉을 흉내내어
몸을 되돌려 세우며 장풍을 날렸다. 보기에는 평범한 1장이었지만 그 속에는
무시무시한 힘이 감춰져 있는 그런 장풍이었다. 황용이 손을 뻗어 곽정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가 그만 정통으로 걸리고 말았다. 몸이 반공을 향해 높직이 올라가
떴다. 곽정이 깜짝 놀라 <아이쿠!> 하는 비명과 함께 몸을 솟구쳐 황용을 얼싸안아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황용은 벌써 허공에서 허리를 꼬며 대나무 정자 지붕 위로
살풋 내려와 섰다. 곽정도 몸을 솟구치다가 왼손으로 정자 지붕의 한쪽 치마를
짚고 지붕 위에 올라섰다.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붕 위에 앉아 관전을 한다.
이때 싸우던 장면도 다시 한 번 변했다. 구양봉이 땅에 엎드려 두 손을 구부려
어깨와 나란히 했다. 마치 한 마리의 청개구리가 먹이를 향해 덮치려는 듯한
자세다. 입으로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를 대고 있었다. 황용이 그 꼴을 보고
웃는다.
[곽정 오빠, 뭘 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겠는걸.]
그러나 주백통이 왕중양이 일양지(一陽指)로 구양봉의 합마공(蛤 功)을
파헤쳤다는 말이 생각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굉장히 무서운 무공인데, 합마공이라구 하는 게야.]
[정말 두꺼비 같군요.]
황용이 재미있다는 듯 손뼉을 친다.
구양공자는 서로 기댄 채 웃고 떠드는 그들을 눈에서 불이 나서 바라다볼 수가
없었다. 당장에 뛰어올라 한 주먹에 곽정을 박살내고 싶었지만 가슴이 따끔거려
기운을 낼 수가 없었다. 오른손에 은으로 만든 북인 암기를 꺼내 들고 슬금슬금
정자 뒤로 돌아가 손을 번쩍 들어 구경에 정신이 팔린 곽정의 등을 향해 던졌다.
이때 홍칠공은 앞뒤로 장풍을 날리며 구양봉의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강룡십팔장과 합마공의 사투가 이제 막 벌어질 참이다.
이 모두 두 사람이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자랑스런 무공이다. 이제 또다시
붙게 되면 이전 죽느냐 사느냐의 결판이 달린 싸움이 되는 것이다. 곽정의 무공
가운데 가장 정통으로 배운 것이 바로 이 강룡십팔장이다. 사부가 이 장법을
쓰기에 그 위풍 당당하고 묘기 백출함에 장탄을 연발하며 관전에 여념이 없으니
뒤에서 날아오는 암기를 의식할 리가 없었다.
황용은 북개와 서독 두 사람이 당세에 최강의 고수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이
생사를 건 마지막 혈투를 벌이려 하는데도 웃고 까불고 있다가 갑자기 정자 밖에서
한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총명한 여자라 금방 구양공자가
뒤에서 무슨 농간을 부리기 위해 없어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등뒤에서 공기를
찢는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암기가 곽정의 등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느꼈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곽정의 등을 감싸안았다.
퍽퍽퍽 연속해서 북으로 된 암기가 황용의 등을 명중시켰다. 황용은 연위갑을
입었기 때문에 맞은 곳이 살짝 아프기만 했지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손을 뒤로
돌려 은으로 만든 북을 잡고 웃었다.
[등이 가려워 긁어 주려고 했군요. 고마와요. 이걸 되돌려 드려야지.]
구양공자는 황용이 던지면 받을 채비를 했다. 그러나 황용은 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 가져가라고 손만 내밀고 있었다. 구양공자는 왼발 끝으로 땅을 찍으며
정자 위로 올라왔다. 경공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사뿐히 날아올라 지붕 모퉁이를
밟고 섰다. 흰 도복 자락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멋진 풍채가 신선을 닮았다.
[경공이 정말 대단하시군요.]
황용이 칭찬을 하며 한 발짝 나서서 은으로 된 북을 내밀었다. 구양공자는 그의
백설 같은 팔목을 보고 불현듯 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순간 눈앞에 금빛이 번쩍
빛났다. 두 번씩이나 골탕을 먹었던 그는 물구나무를 서며 정자 밑으로 내려 뛰며
긴소매를 휘두르자 금침이 우수수 땅바닥에 쏟아져 흩어진다. 황용이 깔깔 웃으며
은으로 된 북을 땅에 꿇어 엎드린 구양봉의 정수리를 향해 힘차게 집어던졌다.
곽정이 놀라 소리를 지른다.
[그건 안 돼.]
허리를 감싸안고 땅으로 뛰어내린다. 채 발끝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우지끈 퉁탕
벽력같은 괴성과 함께 황약사가 놀라 외치는 울부짖음이 들렸다.
[구양 형, 손을 멈추시오.]
그러나 곽정은 천지 개벽을 하는 것 같은 강한 힘이 자기를 향해 날아옴을
직감했다. 혹시 황용이 다치면 어쩌나 싶어 급히 내공을 쓰면서 강룡십팔장
가운데의 전룡재전(見龍在田)의 솜씨를 발휘하여 자기를 향해 엄습하는 힘을
밀어붙였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구양봉의 합마공이 7,8보나 뒤로 밀렸다. 급히
황용을 땅 위에 내려놓고 구양봉의 초술(招術)에 대항할 태세를 취했지만 홍칠공과
황약사가 벌써 쌍방의 면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구양봉이 가뜩이나 큰 키를 똑바로 세웠다.
[아, 이거 부끄러워서..... 그래 소저가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황용은 놀라 새파랗게 질려 있다가 구양봉의 말을 듣고 억지로 웃었다.
[아버님이 여기 계신데 제가 다치겠어요?]
황약사도 걱정스러운지 황용의 손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묻는다.
[그래 몸에 아무 이상이 없느냐? 심호흡을 해 봐라.]
황용이 아버지의 말에 따라 몇 번 심호흡을 해 보았지만 별로 이상한 곳이 없는 것
같아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자 황약사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 눈치다.
[그래, 두 아저씨가 연무(練武)를 하시는데 계집애가 왜 나서느냐? 구양 아저씨의
합마공은 보통의 무공이 아닌데 사정을 보아주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넌
벌써 죽었겠다. 저 정자를 보렴.]
황용이 정자를 보니 반쪽이 무너져 내렸다. 정자 기둥은 원래 천연의
거죽(巨竹)으로 뿌리가 땅속에 깊이 박혀 있던 것인데 그만 그것이 뿌리째 뽑혀
버린 것이다. 장력이 얼마나 세기에 그랬을까? 생각하고 혀를 내두른다.
원래 구양봉의 이 합마공은 순전히 이정제동(以靜制動)하는 것으로 전신에 힘을
축적하고 있다가 적의 공격을 받으면 즉시 폭발 반격하는 것이다. 때마침 그가
전심 전력을 기울여 홍칠공의 공격을 기다려 폭발하려고 줄당겨 놓은 활처럼
대기하고 있는 찰나에 황용이 건드렸던 것이다. 구양봉이 자기를 공격한 상대가
홍칠공이 아닌 황용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깜짝 놀란
나머지 눈앞이 아찔했다. 황약사는 꽃 같은 딸이 이제 자기 손에 죽었나 했다.
황약사가 놀라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순간 우지끈 꽝! 정자가 무너지고 장력이
다시 억센 힘에 부닥쳐 되돌아왔다. 그리고 황용을 구출한 사람이 곽정이라는 것을
알고 또 한 번 놀랐다.
(과연 늙은 거지가 대단한 위인이로구나. 제자도 저렇게 훌륭하게 키워
놓았으니.....)
황약사도 귀운장에서 곽정의 무예를 본 일이 있다.
(저 녀석이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구양봉의 평생 절학인 합마공을 막겠다고
대들다니, 만약 구양봉이 내 체면을 보아 사정을 두지 않았더라면 넌 벌써
묵사발이 되었을 게다.)
그는 곽정의 공력이 귀운장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진보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방금 황용의 생명을 구해 준 것만은 사실이다. 자기 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준 그가 고마와 그에 대한 악감이 상당히 해소되었던
것이다.
(저 녀석이 성격만은 성실하니 내 비록 딸은 주지 못해도 뭔가 상이라도 주어야
하겠다.)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홍칠공이 떠드는 큰소리가 들렸다.
[이 독물(毒物), 정말 지독하군. 우리 승패가 나지 않으니 다시 한 번 겨루어
봅시다.]
[좋소! 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해 보겠소.]
홍칠공이 먼저 몸을 날려 장내로 들어선다. 구양봉이 따라 들어서는데 황약사가
손을 뻗어 가로막는다.
[잠깐만, 두 형께서 벌써 1천여 초나 겨루셨지만 승부가 나지를 않는군요. 오늘 두
분은 도화도의 빈객으로 오셨으니 제가 담근 미주나 드십시다. 화산의
논검(論劍)도 얼마 있지 않으면 그 시기가 도래할 텐데 그때 다시 두 분께서
우열을 가리시게 될 테고, 저와 단황야(段皇爺)도 참가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그만하고 쉬도록 하십시다.]
그러나 둘은 좀처럼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어디 한번 홍칠공의 훌륭한 재주를 구경합시다.]
구양봉의 말에 홍칠공도 지지 않는다.
[해 보겠으면 해 봅시다.]
황약사는 둘이 다시 겨루려고 하자 웃으며 만류한다.
[두 분이 도화도에 오신 것은 원래 무공을 자랑하기 위해서였군요.]
이 말에 홍칠공도 따라 웃는다.
[황형의 나무라심이 마땅한 줄 압니다. 우리가 혼사를 위해서 왔지 다투려고 온
것이 아닌데....]
[제가 원래 세 가지 일로 시험해 보아 신랑감을 고르겠다고 했기 때문이지요.
이기면 사위로 맞을 게고 진다 하더라도 그냥 섭섭하게 되돌아가시게는 안
할랍니다.]
[뭐라구요? 그래 또 따님이 한 분 계신가요?]
홍칠공이 의외라는 듯 묻는다.
[지금이야 없지요. 이제 새로 색시를 맞아 딸을 낳기로 한다해도 늦은 일이고,
허허허. 그러나 제가 변변치는 못하지만 의술(醫術)이며 성상(星相) 등에 대한
재주가 약간 있으니 지는 분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가르쳐 드릴 생각입니다.]
홍칠공은 평소부터 황약사의 그런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만약에 사위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그런 재주를 배운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