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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부천 전국시낭송대회 (본선지정시1번~70번)
순번 | 시 인 | 제 목 | 순번 | 시 인 | 제 목 |
1 | 고경숙 | Ruta(루타) 40 | 36 | 서금숙 | 젊은 날의 후황 |
2 | 고경숙 | 골목에서 울다 | 37 | 서금숙 | 대갈 |
3 | 고경숙 | 고양이와 집사와 봄 | 38 | 서금숙 | 신자유주의 빵집 |
4 | 곽동희 | 꽃사월에는 | 39 | 안선희 | 연필꽃 |
5 | 곽동희 | 수렴 | 40 | 안선희 | 인연 |
6 | 곽동희 | 모두가 모두에게 | 41 | 안선희 | 붉은 나팔꽃 |
7 | 곽욱열 | 말 없는 당신 | 42 | 양성수 | 관계론 |
8 | 곽욱열 | 백령도 | 43 | 양성수 | 파랑새를 찾아서 |
9 | 곽욱열 | 인동초 | 44 | 양성수 | 비우라니요 |
10 | 김무하 | 청라항에서 | 45 | 유미애 | 손톱달 |
11 | 김무하 | 겨울 편지 속으로 | 46 | 유미애 | 말뚝 |
12 | 김명숙 | 강물, 둑에 이르다 | 47 | 유미애 | 고강동의 태양 |
13 | 김명숙 | 그해 5월, 나는 광주에 없었다 | 48 | 윤보영 | 이름만 들어도 좋은 당신 |
14 | 김명숙 | 고래의 꿈 | 49 | 이오장 | 진달래 편지 |
15 | 김명환 | 피나클랜드의 봄 | 50 | 이오장 | 명자꽃 |
16 | 김명환 | 그녀는 지금 홍콩 가는 중 | 51 | 이오장 | 누가 물레방아를 거세했는가 |
17 | 김명환 | 송년서설 | 52 | 이안 | 아버지 |
18 | 김승동 | 벚꽃 지는 날에 | 53 | 이안 | 봄눈꽃 |
19 | 김승둥 | 참 그리운 저녁 | 54 | 이안 | 그렇겠지 |
20 | 김승동 | 어딘가에서 올지도 모를 | 55 | 이재학 | 벚꽃 엔딩 |
21 | 김해빈 | 대야호수 | 56 | 이재학 | 나는 정말 멀리 날아가고 싶다 |
22 | 김해빈 | 농다리, 롱다리 | 57 | 이재학 | 이제는 장독대에 앉아 |
23 | 김해빈 | 강변 랩소디 | 58 | 이종헌 | 개구리 우는 밤 |
24 | 문신진 | 서러운 강 | 59 | 이종헌 | 안개 |
25 | 문신진 | 바다의 침묵 | 60 | 이종헌 | 진관사 |
26 | 문신진 | 소금쟁이 | 61 | 정명숙 | 아버지의 빈자리 |
27 | 박수호 | 생애 목표 | 62 | 최유식 | 섣달그믐 |
28 | 박수호 | 얼룩 | 63 | 최유식 | 고향 |
29 | 박수호 | 우리가 사는 도시의 외로움에 관한 보고 | 64 | 최유식 | 겨울밤 |
30 | 박용섭 | 돌배나무 | 65 | 홍서영 | 단풍의 질곡 |
31 | 박용섭 | 카스발 | 66 | 홍서영 | 꽃 |
32 | 박용섭 | 다시 불을 댕긴다 | 67 | 홍서영 | 내 마음의 플랫폼 |
33 | 박희주 | 보고 듣고 느껴 말을 하니 | 68 | 홍영수 | 당신으로 넘치는 삶 |
34 | 박희주 | 수밀도원(水蜜桃園)의 밤 | 69 | 홍영수 | 몽돌 |
35 | 박희주 | 아담아, 어디 있느냐 | 70 | 홍영수 |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
1. Ruta(루타) 40* / 고경숙
식탁 모서리에서
병뚜껑처럼 대각선으로 굴러가는 당신,
내 이마와 콧잔등, 인중과 입술산도 타고 간다
창백한 8월은 중립지대
잃을 것이 많은 순서대로
주머니 무거운 순서대로
사람들은 구르다 멈추는데
주머니가 가벼운 당신은
멀리 아주 멀리 데굴데굴, 간다
지구 반대편 알파카 털을 삼아내는
소읍까지 원색적으로,
길을 위해 만들어진 작은 마을
이정표 없이도 바람이 등을 미는 그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는 말도 안 되는 말
멋있지 않았지만 묻어두었다
당신은 너무 먼 덩굴성 식물
바닥에 붙어
한없이 구르며 손을 뻗는 잠식, 겁 없다
용기는 어떻게 얻나요
주머니를 뒤져보아요
을음 가득한 아사도 한 덩이
무딘 나이프와 포크를 쥔 채,
당신의 현재는 저 이국의 도로 한가운데
허름한 숙소에 적힌 이름은 용기
세상 밖으로 난 길을 여전히 구르지
매일 추방되고 매일 밀입국하는 당신의 흔적 따라
서늘하게 늙는 나는 선인장
여름밤인데 어금니 딱딱 부딪치며 춥지
무한증식 되는 슬픈 용기지, 당신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긴 국도. 5200km
2. 골목에서 울다 / 고경숙
돌아보지 않아도 슬픔의 최전선이다
시장통 외진 골목을 걸어가며 우는 뒷모습은,
셔터에 밀려 버려진 가게 문짝들
드럼통과 생선 상자들로 굴곡진 벽
기댈 곳도 잡을 곳도 없다
바닥에 낙엽 한 장 굴러와 쌓일 형편도 아닌 그곳,
앞만 보고 걷다가 하수도 배관에 걸리고 마는 골목,
그곳은 이미 여러 번 고꾸라져 본 이들과
기댈 곳 없어 주저앉던 이들이 지나는 길,
늘어진 전선들이 노을 속에 엉켜있는 저녁
울며 걷는 사람에게 길은 길이 아닐 때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보아온 골목은
어쭙잖게 훈계나 위로를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그가
슬픔을 밟고 지나가도록, 견디어주도록,
그리고, 다 지나간 다음
뒹구는 생선 상자를 제자리에 쌓고
여전히 골목의 끝이 큰길에서 보이지 않게
외진 길로 돌아앉아 있는 것,
구부러진 시장통 골목은 막다른 이가 찾아가는
시장통의 공소(公所), 슬픔의 최전선이다
3.고양이와 집사와 봄 / 고경숙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봄입니까?
고양이는 대답 대신 눈을 지긋이 감고 꼬리를 흔듭니다
남자는 일어섰습니다 예식장에도 들어가 보고 초등학교 열린 교문으로 들어가
운동장을 거닐어보기도 했습니다 느티나무 가지에 파랗게 싹이 나오는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찾아나섰습니다 점심상 차려놓은 지가 언젠데 안온다고 ‘솔’ 톤으로
약간 격앙 됐습니다 미나리무침과 쭈꾸미숙회입니다 꽃무늬 앞치마를 펄럭이며
동네를 뛰어다닙니다
마을버스 정류장 앞에서 우체부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아저씨는 잘 만났다고 오
토바이를 세우고 우편물을 건넵니다 시집입니다
우체부가 지나가고,
여자가 집에 들어가고,
남자가 대문을 괴어놓고,
그 틈으로 고양이가 들어갑니다
고양이는 마당을 사뿐히 건너 부엌으로 갑니다
부뚜막에 천천히 자리를 잡습니다
부엌문 너머 낮술 얼큰한 남자에게 고양이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봄입니까?
남자는 대답 대신 눈을 지긋이 감고 발가락을 까딱댑니다
4. 꽃사월에는 / 곽동희
아름드리 벚꽃 후드득 지고 나면 누구나 가져가도 좋을 날 길지 않은 밤도둑도 오롯이 지쳐 사월의 뜨거운 꽃비 아쉬워라, 발자국마다 흐드러지게 소금 꽃 피운 듯이 간밤에 마음을 훔쳐 가도 되는 건지 연달아 화들짝 필 텐데 어쩌자고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꽃송이 숨 멎을 만큼 휘몰아치며 가슴 한복판이 뚫려질 듯 달려오고 있어 붉은 자목련 그윽하게 바라보면 느리게 내려앉는 꽃잎의 숭고함에 고개 숙이는 데 좋아라, 눈길 끄는 연둣빛 향연 다정스레 속삭여주는 짙푸른 잎들의 자라남 나부끼는 자체로 기쁨을 주는 거 새잎 돋아날 하염없는 기다림 같이 아무것도 하지 말고 다소곳이 그냥, 말없이 거닐며 망연히 바라봐도 좋을 것을, 우리 꽃사월에는 온몸으로 맡겨 봐도 괜찮을 것을 |
5. 수렴(收斂) / 곽동희
한올
두올, 세 올
그윽한 빚음의 물결
매만져주며 다가온다
갈색에서 검정
부석부석 갈라지기까지
새치 집질 땐 하늘이 노랬다
고급진 비누 향기
윤기 모아
손마디가 주는 리듬과
비벼가는 움직임은
집중과 빗질
예쁨과 멋짐으로 가는 길에
거두어들인다
삼백예순다섯 날 중에
지쳐 쓰러지는 날 빼고
결 고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는데
장 항아리 감칠맛은 온데간데없이
설마는 비껴가지 않고
여전히 희끗희끗
내게 오지는 않을 거라며
당돌하게 생머리를 고집했으니 뭐,
조금씩 누그러지기로
질끈 눈 감아
웨이브도 주고 염색도 하여
촤, 르, 르 흔들려도 괜찮은
인생 이 막이 펼쳐질 순한 여정,
오래도록 빗질하고
아름다움으로 서 있는 것으로 수렴할 수 있으면,
6.모두가 모두에게 / 곽동희 누구에게도 희생을 강요하지 말고 편하게 제 길 찾아가라 말해주세요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행복한 웃음 짓고 아름답게 살아요 굴곡진 삶은 펴 나가면 되는 거 때로 눈물 흘리고 아파하더라도 부모들의 아이로 태어나고 자라주고 기쁨을 주었던 사랑을 잊으면 안 돼요 어버이는 자식에게 자식은 어버이에게 셈이 없는 겁니다 자 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더군요 남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가슴앓이 선한 눈빛이면 고맙고, 참으로 감사한 노릇 생글생글 더없이 반가운 겁니다 쓴소리 매운 소리 어른들이 남겨 주신 지혜 담긴 큰 그릇은 두루 쓸 데가 많아 새겨들어서 나쁠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
7. 말 없는 당신 / 곽욱열
솔슬한 바람이 나의 작은 창을 두드립니다
살다 보면 가던 길도 멈추고 서서
이길 저길, 한번 돌아볼 만도 한데
당신은 신호등 불빛만 보이는가 봅니다
꽃비가 내리는 날엔
한 번쯤 동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눈 내리는 날엔 발자국 나란히 새겨 볼만도 한데
당신은 어이 홀로 우산만 받치고 가려 합니까
햇살 쏟아지는 무더운 여름날엔
정자나무 그늘에 앉아 사색하며
매아미 울음소리에 한고비 넘겨도 좋으련만
땀에 흠뻑 젖은 수레만 끌고 가려 합니까
타향도 오래 살면 병주지정(幷州之情)이련만
정든 산천, 옛 동무들 가슴에 서리고
노을만 바라보는 당신은 어찌 그리움을 버리셨단 말입니까
술잔을 부딪치는 한 모금 사랑에도 뜨거운 가슴이거늘
달맞이 애틋한 정을 어이 잊고 지냈단 말입니까
석양에 그림자 딛고, 날빛에 웃음 필 날 얼마나 있을까요
오로지 외길만 가는 인생
이젠 뒤돌아보고 조용히 당신의 목소리 들려주세요
말 없는 당신이여!
**병주지정(幷州之情): 오래 살아서 고향처럼 정든 타향. 제2의 고향.
8. 백령도 / 곽욱열
연안부두 뱃고동 소리에 갈매기떼 길을 열어
꼬박 네 시간 물길 따라 육백리 길
푸른 파도를 헤쳐나가면
서해의 늠연한 파수(把守)
하얀 따오기가 날개를 펼친다
금모래 은모래 추억어린 명사십리 사곶이
훨훨 벅찬 가슴을 열고
짙푸른 눈빛, 해금강 두무진은
억년의 숨결에 염원을 절규하는구나
신명의 손으로 빚은 오색 찬란한 콩돌
해안은 하이얀 물보라로 쩔은 갈피를 쓸어내린다
공양미 삼백석에 효원(孝源)어린 인당수는
쪽빛처럼 푸르르고
환생(還生)의 연봉바위는
은애(恩愛)의 깊음에 눈물범벅이라…
아버지 청이가 왔어요 청이가!
어화둥둥 내 사랑, 굽이굽이 서린 한을 날려 보낸다
선창에 부는 바람 풍년을 노래하니
해당화 피는 마을 더욱 붉어지고
선녀와 청년 사공의 애틋한 연정이
낙조에 어리어 환상의 실루엣이다
물새떼 날아오르고
물범이 자맥질하는 천혜의 고원(故園)
아름다운 그곳에 서서 시혼(詩魂)의 불꽃을 피우며
메밀꽃 향기를 마신다
9. 인동초(忍冬草) / 곽욱열
보릿고개 빈 부뚜막의 하루는
서산을 넘지 못하고
초가삼간 굴뚝엔 모락모락 연기 피어올라도
봉천다랑 논배미 수심은 깊어만 갑니다
가을 수수밭 두렁에 아가 울어 보채고
목화송이 하얗게 눈꽃처럼 피워내도
힘겨운 세간살이
동지섣달 다듬이 소리
설빔은 차려지고
문동(文童)의 글 읽는 소리에
별빛은 초롱초롱 반짝입니다
삼동에 모진 풍파와 고독을 삭이며
새봄을 안고 도는 푸르른 인동초
하얀 꽃향기 속에 노란 꽃
붉어져가는 정은 당신의
깊은 모성이요 그리움입니다
숱한 바람의 고초를 감내한 고결한 모습은
새 빛의 환희요, 자애로운 대지의 한 떨기 금은화입니다
어머니!
당신을 사모(思慕)합니다
나의 영원한 사랑이여
10. 정라항에서 / 김무하
뱃고동 소리 탈탈탈 들리고
물길이 갈라지는 파동에
다다미 바닥 배를 깔고 자는 아침 잠을 깼다
어부들 밤새운 고기잡이에서 돌아와
아침을 열고 내리는 오고 가는 말들,
노가리 배를 따는 아낙네들 걸판지게 싸우며
일일 품삯에 밥그릇 부딪치는 온갖 소리가 들려 온다
갈매기 떼 요란한 울음은 만선을 알리고
통통거리는 오징어 배는
이른 시간 부서지는 햇살과 함께
힘차게 항구로 들어섰다
팔딱거리는 오징어 몇 마리는
오랜 기다림에 지친 아낙의 허기를 달래고
내장은 시원한 탕거리가 되고 젓갈이 되고
오징어 삶은 물은 붉고 달큼한 삶이 된다
시린 바람은 드럼통에 피어나는 장작불을
노가리 굽는 내와 함께 부지런히 항구에 실어 날랐다
집과 집 사이 줄에 걸려 꾸들꾸들
겨울바람에 바닷물을 털어내는 노가리 떼
삼척 오십천 끝자락 정라진 항은
비릿한 냄새도 정박한 배 밑에 깔린 바다도
여인네의 치맛자락 같다
11. 겨울 편지 속으로 / 김무하
나에게 삭막한 겨울이 오면
그 사람이 전하던 깨알 같은 말을 생각합니다
잎새 떨군 나뭇가지처럼 환히 내어 비치는 마음
밤새 내린 하얀 눈 위로 톡톡 박혀
우리가 마주 보는 하늘에 편지를 띄웁니다
여기는 시베리아 바람이 붑니다
모래 기슭에 쌓인 눈이 바람에 흩어져 눈보라 같습니다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 그대를 생각하니 보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겨울바람이 사납다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불꽃처럼 뜨거운 저 등대의 눈으로
그대가 좋아하는 바다를 지키고 서 있겠습니다
그곳 철암은 눈이 많이 쌓였겠지요
밤새 맑은 창을 열어 준 첫눈처럼
그 사람 깨알 같은 말을 작은 미닫이 서랍속에
넣어 두고 싶습니다
12. 강물, 둑에 이르다 / 김명숙
비 오는 강에 갔습니다
강물이
가뭄에 줄어든 강폭을 점차 넓히며
허연 전갱이를 드러내놓고 있던 강둑을 향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쩌 억 쩍 갈라진 강바닥은 이내 피돌기가 돌고
목숨을 부지한 몇몇의 게들이
제 구멍 드나들며 부산을 떱니다
생기가 돈 풀잎들이 바람에 모로 눕다 다시 일어나고
술렁대는 갯벌을 다독이며
모든 것을 품어 안기 시작한 강은
불어난 몸을 몇 번 뒤척이다가
강둑을 향해 나아갑니다
둑도 물이 그리웠던 모양입니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물이 둑에 닿자
반가운 듯 찰랑찰랑 소리를 내는
물의 긴 허리를 감싸 안습니다
그런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나도 그 사람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13. 그해 5월, 나는 광주에 없었다 / 김명숙
땅덩어리가 큰 것도 아니요
남북한 반 토막으로 나뉘어져 있는 나라에서
나는 그해 5월, 광주에 없었다
학업을 위해 어린 나이에
산업체 부설학교가 있는 마산에 있었다
광주에선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던 그 시각에
나는 기숙사 TV에서 나오는 가요
〈못 찾겠다 꾀꼬리〉를 흥겹게 따라 불렀고
언제나처럼 밀린 숙제를 했다
광주를 제외하곤 대체로 평화로웠고
민주화운동의 폭동 소식은 깜깜이었다
계엄군에 맞선 학생들과 시민들이 금남로에 나와
피투성이와 죽음으로 자유를 맞바꿀 때
나는 못 찾겠다 꾀꼬리 언제나 술래가 되어
기숙사 방에 기대앉아
얘들아, 애들아, 만 자꾸 부르고 있었다
자유는 꽁꽁 숨어버려
보이지도 찾아지지도 않아
꿈 찾아 헤매는 술래가 되어 있었다
세상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안개 속
아직도 술래인 나는
못 찾겠다 꾀꼬리만 연속 부르는
숨바꼭질만 하고 있다
14. 고래의 꿈 / 김명숙
영등포역 지하도엔
바다로 갈 꿈을 꾸며 사는 고래가 있다.
바람이 코를 벌름거리며 들락거리는
형광불빛 새어나오는 지하도에
찢어진 옷가지로 지느러미를 감춘 채
집채만 한 큰 등을 구부리고 잠들어 있는 사내
잠들어 있는 사이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오로지 바다로 나아갈 꿈을 꾸며
무리들의 음파에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반쯤 감은 두 눈과 귀를 열어두고 잠들어 있다
가끔씩 적막을 깨고 몰아쉬는 숨소리가
당장이라도 바다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깨어진 꿈의 조각을 얼기설기 잇대고
그는 지금 바다의 어디쯤 헤엄쳐 가고 있을까
윤기 나는 지느러미로 힘껏 물살을 가르고 있는지
코끝이 벌게질 때까지 참았던 숨을 힘껏 내쉬며
몸을 뒤척여 깊은 바닷속으로 자꾸만 미끄러져 들어간다.
15. 피나클랜드의 봄 / 김명환
피나클랜드에 오면 사람들은
꽃으로 활짝 피어난다
봄의 절정과 만나러 가는 길
꽃들은 끼리끼리 햇살에 노닐고
산정 밑 바위 절벽, 두루미 한 마리
피나클랜드를 등지고 선 채
저 너머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별천지라도 찾은 걸까
먹이는 찾지 않고
깃털도 털지 않고
날갯짓마저 없이
절벽 아래 세상 유유히 관조하고 있다
피나클랜드의 경계에 선 두루미 한 마리
힐링도 고독도 초월한 세상 음미하고 있는데
까치발 딛고 짧은 목 길게 늘여 본다
두루미처럼 나도
16. 그녀는 지금 홍콩 가는 중 / 김명환
홍콩 간다는 말의 기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지금 홍콩 간다
비행기 못 타는 남편 홀로 두고
우아하게 하늘을 날고 있다
이 장관을 못 보는 이, 참 불쌍도 하지
국적기 아래 어디에도 세계지도에
그어놓은 경계선은 찾을 수 없다
새하얀 구름 밭이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마저 덮어버릴 즈음
구름 밭 이랑 속으로 파고드는 햇살 한 자락
그녀의 눈썹 속으로 파고드는 단잠 한 자락
자기야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어
남자의 포효가 고막을 아프게 뚫고 온다
창밖에서 우주복을 입은 남자가
사지를 버둥치며 어둠 속으로 하강한다
그를 따라 지상으로 낙하하는 별똥별
백치처럼 입을 벌리고 숨을 내쉬며
그녀는 그와 하강의 고통을 나눈다
온몸이 떨린다
고막 속으로 통증이 별똥처럼 쏟아진다
그녀는 번개처럼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앗 귓속에서 샤라락 무언가 빠져나간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트가
고개 길게 빼고 그녀를 마중한다
한 가닥 남아 있던 경계마저 다 풀고
그녀는 느낌표로 떠 있는 그 섬에 안긴다
17. 송년서설(送年瑞雪) / 김명환
우리가 강촌에 도착할 무렵
계묘년 한 해도 꼬리만 남겨놓고
반갑게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차장을 때리고 낙하하던 눈송이들은
세상 아름다움이나 추함까지 살풋
다 덮어놓고 바람 따라 떠나갔다
한 해 동안 기뻤던 일도 감사하며 덮고
분노나 미움, 잘잘못까지 시시콜콜
따지지 말고 덮자 덮어두거라
단단히 일러놓고 길 떠난 한 무리 서설
-얻음은 그때를 만난 것이요,
잃음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 ⃰
삶이나 죽음도 만남과 헤어짐도
담담하게 순리려니 넙죽 받들 거라
이미 강촌에 내려앉은 서설들이 속삭인다
우리는 한 해의 짐을 풀어놓고
한 해의 과오나 회한마저 풀어놓고
캠프파이어 대열을 뚫고 들어갔다
모닥불 옆에 이글거리는 화두
아듀 2023 해피 2024
18.벚꽃 지는 날에 / 김승동
가끔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고
그래서 더 알 수 없는 눈물이
푸른 하늘에 글썽일 때가 있다
살아간다는 것이
바람으로 벽을 세우는 만큼이나
무의미하고
물결은 늘 내 알량한 의지의 바깥으로만
흘러간다는 것을 알 때가 있다
세상이 너무 커서
세상 밖에서 살 때가 있다
기차표를 사듯 날마다
손을 내밀고 거스름돈을 받고
계산을 하고 살아가지만
오늘도 저 큰 세상 안에서
바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나는 없다
누구를 향한 그리움마저도 없이
텅 빈 오늘
짧은 속눈썹에 어리는 물기는
아마 저 벚나무 아래 쏟아지는
눈부시게 하얀 꽃잎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9. 참 그리운 저녁 / 김승동
차가운 바람이
주머니 속의 빈손을 만지작거리는 날
어깨에 걸린 가을옷이
더욱 헐렁해지는 저녁입니다
몇 마리의 쥐포와
소주 한 잔이 생각나고
친구의 희끗한 머리칼이
보고 싶습니다
술잔은 나무탁자 위에 있어야 좋겠고
창가에는
김 오르는 국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낮은 천장 아래로 일력이 펄럭이고
헌 라디오의 칙칙거리는 잡음 사이로
간간이 노랫소리 흘렀으면 좋겠습니다
나무젓가락이 떨어진 바닥으로는
태엽 풀린 시계 마냥 멎어진
내 젊은 시절의 사랑도
아직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손이 시려도 마음보다 따뜻한 바람
벽돌담 밑으로 스며드는
참 그리운 저녁입니다
20. 어딘가에서 올지도 모를 / 김승동
누군가가 몹시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옥빛 하늘에 빠진
바람결처럼
누군가를 지독히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조금씩 붉어져 가는 잎새나
어쩌다 가을에 홀로 핀
장미같이
부끄러움도 잊고 싶을 때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날아든 당혹한 고백을
사랑했었다는 지금은 완료된
과거분사로라도
내 가당찮은 희망을
그려보고 싶을 때가 있다
문 열면 가슴이 저린 날
문 닫은 우체국 소인이 찍힌
투두둑
봉투 뜯는 소리를 듣고 싶을 때가 있다
21. 대야호수 / 김해빈
하우고개 넘어온 꽃비가 4월의 자취를 더듬습니다
타들어 가는 가뭄 속 단비는
갈라진 땅의 지문을 엄밀히 기억할 테지요
대야동 낙지마당 식당 초입엔
비 맞으며 범람을 즐기는 작은 호수가 있습니다
이름표 달고 있는 ‘대야호수’는
얕은 수심에 박새 한 마리 머물만한 작은 호수입니다
대야교를 건너온 빗방울은 더욱더 바빠지고
식당엔 낙지의 매운맛을 즐기려는 입들의 소란뿐
소외된 목마름은 더욱 짙어만 갑니다
처마 밑에 놓인 고무대야에 빗방울 떨어지고
세숫대야에도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금세 그렁그렁 차올라 출렁이다 넘칩니다
대야의 빗물로 어머니는 분주해집니다
세수하고 빨래하고 아버지 흰 고무신도 닦아 놓습니다
비 그치고 햇살 따가운 날 길어지면
남겨두었던 빗물을 텃밭 채소에 뿌려주며
물을 씨간장처럼 아껴 살림하셨습니다
그렇게 가쁘게 살아온 어머니
보릿고개 거뜬히 넘기며
마른 대야에 서둘러 빗물 가득 채우고
들리지 않는 인기척에 눈과 귀를 세울 것입니다
허기로 메말랐던 그릇마다 성찬이 차고 넘치지만
육십오 계단 하우고개 가뿐히 넘어선 나는
훤히 들여다보이는 충돌의 깊이 알아채지 못합니다
22. 농다리, 롱다리 / 김해빈
꽃향기 하늘에 퍼지는 날
짧은 다리 그녀
세금천 농다리에 물 적시러 간다
물고기 비늘 같은 돌다리 사이사이 빠져나가는
물의 아우성 들으며
두려움에 엉켜 돌의 층계 앞에 선 사람들
롱다리 그녀가
돌다리 들어서며 말캉말캉한 말을 한다
‘나 다리가 떨려서 못 가겠어, 물에 빠지며 어떡행~’
남자가 말한다
‘괜찮아~ 내가 건져줄게, 나 해병대 출신이야!’
오금이 저린 긴 다리 그녀의 손을 꼭 잡고
해병대 남자가
28청춘 붉은 다리 건너 물귀신 잡으러 간다
롯다리밟기하며 신선이 지나갔을까
살고개 성황당이 지켜주었을까
다리는 돌의 뿌리 잡고 단단한 등 내어준다
초롱길 지나 초평호에 들어선 롱다리 그녀
연두빛 세상 하늘다리 찍고
저주파로 울어대는 물의 층계 따라
지네 등을 밟으며 살금살금 건너온다
남자 손 놓친 다리 짧은 그녀
롱다리 걸음 제치며 물먹은 하루가 후들거릴 뿐
지네가 꿈틀거려도
그녀 곁에는 해병대 출신 남자가 없다
23. 강변 랩소디 / 김해빈
주변을 맴돌던 소리 쓸어온 바람이
강기슭에 창포꽃 살랑살랑 피워 놓고
메꽃 웃음 번져가는 언덕을 넘는다
관능적인 소리 질러대다 후드득 달아나는 장끼
시치미 떼고 있을 때, 누가 보았나
땅에 머리 처박고 꽁지만 치켜든 꼴이
분명 사랑놀이에 빠져있었겠다
민망함에 웃음 터져버린 취객 까마귀
걸걸한 목청으로 육자배기 한 곡조 뽑아 젖힌다
다시 청갈대가 일렁이자
곳곳에서 개개비가 부산을 떨고
그 주변을 맴돌던 뻐꾸기 울어대자
금계국도 소리 타고 생글생글 미소 짓는다
소식 없이 찾아와 후드득
머리를 때리며 한소끔 지나가는 소나기에
자동차 과속 경적이
행주대교 위로 날카롭게 튕겨 오른다
열댓발 귀를 키우며 호들갑 떠는 청춘남녀
강아지를 꼭 끌어안는다
그들이 내뱉는 한숨, 안도의 공간으로
멀리서 포물선 그으며 들려오는 아이 웃음소리
내년 이맘때면, 또 얼마나
터져 나오는 새 호흡으로 곳곳이 시끄러울지
기척이 쌓이는 강변의 오후
소리를 앞세운 바람이 어디에서 달려왔는지
강물이 살랑살랑 잔물결로 일렁인다
24. 서러운 강 / 문신진
강에 그리움 흐르거든
강이 아니라고 하여라
강에 추억이 흐르거든
강이 아니라고 하여라
꽃잎을 싣고 흐르거나
낙엽을 싣고 흐르거나
배를 뒤집은 참붕어 흘러가도 아니라고 하여가
수백 번을 흘러간들 누가 눈여겨 보더냐
강둑에 나앉은
노처녀 노총각 접어 띄운 종이배
기웃기웃 흐르거든
그때는 강이라 말하여가
강에는 거룻배가 있어야 하고
기쁨을 실은 배가 없거든
슬픔 실은 배라도 흘러가야야 한다
섬진강 하구
전마선에 엎드려 사연을 낚야 올리는 홀애비
열 손가락 힘겹게 재첩 함지박 들어 올리는 과부
멍든 마음 강물에 풀어지거든
그때는 서러운 강이라 불러도 좋다
시비를 걸어올 그것들은 이미 바다로 흘러가 버리고
꺼억꺼억 목메인 울음만 어두운 강을 지키지 않더냐
25. 바다의 침묵 / 문신진
바다는 입을 다물고 누워 있다
바다의 침묵에 대해 누구도 묻지 않는다
하루 두 번 밀물과 썰물이 반복된다는 사실 말고는
우리는 수천 년 동안 바다가
입을 열어 말하기를 갈망해 왔다
바다가 전해줄지도 모를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쉴새 없이 바다를 찾았던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집착하고 매달리는 까닭은
바다의 입술을 통해서 생명의 소리를 듣고자 한다
꿈속에서 꿈을 꾸어온 사람들은
마음에 빗장을 지르고 귀와 눈을 감은 채
밤새 뒤척이며 앓는 바다의 소리를 그리워 한다
모래밭에 찢겨지는 수 없는 상처 보지 못하고
별들을 품어 안는 상상만 하고 있을 뿐
가슴 속 응어리를 말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오늘도 해변의 암벽에 제 몸을 부수고 있는 것이다
26. 소금쟁이 / 문신진
7월의 태양이 연못에 빠질 때마다
소금쟁이는 가슴을 비틀고 있었어요
저 영감탱이를 몰아내고 왕이 되리라
민들레 홀씨 눈처럼 내려앉던 어제 오후
신경통에 삐걱거리는 다리를 끌던 영감을
꼴사나운 개부들 틈에 쓸어 넣고 만세를 불렀지
물방개 풍뎅이 연꽃 위의 무당벌레까지
나의 등극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것 같았어
무덤덤한 버들가지 빼고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움츠린 각시들을 모아놓고
허풍을 쳐대며 오만스럽게 그들 주위 맴돌았지
내가 너희들의 지아비이니라
연못에 주저앉은 구름 조각을 밟으며
구름처럼 번성할 내 후손들을 생각했지
아들이 아들을 낳고, 손자가 손자를 또 볼 때까지…
27. 생애 목표 / 박수호
내 생애 목표는, 일을 끝내고 창밖으로
눈길을 주다가 창 가득한 가을을 보며
나마저 잊어버리는 일입니다. 퇴근길에
무심했던 들풀을 한참 동안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는 일입니다. 해질녘 길을
달리다가도 차 세우고 노을을 바라보면서
어둠에 잠겨보는 일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둠에 잠겨버린 내가 서 있던 자리를
뒤돌아보는 일입니다. 식구들이 식탁에
모여 저녁을 먹는 일입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조기를 뼈 발라서 밥 위에 얹어
주는 일입니다. 아이들에게는 그들이
만나는 세상에 대한 느낌을 물어보는
일이며 별 쓸모없는 일이지만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걱정해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을 주워 책상 한가운데 반듯하게
놓아보는 일입니다. 내 생애 목표는 이런
일들을 해보는 것입니다.
28. 얼룩 / 박수호
집에 가던 길
길모퉁이에서
바람에 떠밀리고 있던 광고지
와이셔츠 목 때, 커피, 김치 얼룩……
어떤 얼룩이든! 물 없이 간편하게 문질러서
얼룩 완벽 제거
어떤 얼룩이든 완벽 제거한다는 말에
바지 소매 끝에 진 얼룩을 지워보고 싶었다
사실 그것보다는
한 시대를 건너는 동안 내 안에 묻어 있는
얼룩들을 생각하였다.
주변을 둘러보고는
그 광고지를 허리 숙여 주워들고
한 시대의 모퉁이를 돌아들었다
29. 우리가 사는 도시의 외로움에 관한 보고 / 박수호
커튼을 걷어내고 바라보면
도시는 폐선처럼 정박해 있고
밤을 새운 불빛 몇 개
젖은 눈시울 깜박거리곤 했습니다
이 도시에는 자주 짙은 안개가 출몰하여
집이며 길들을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리고
몇 시간이고 사람들을
안개 속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불쑥불쑥 사람들이 나타나
가끔씩 서로를 확인하지만
쓸쓸히 헤어졌습니다. 아무 인사도 없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안개만이
마당이며 마루며 대문으로
꾸역꾸역 밀려들고
바람은 겹겹이 드러눕고 있었습니다
살갗을 적시며 기어오르는 안개가 쓰라렸습니다.
누구라도 붙들고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떨어져 누운 나뭇잎에서
이 도시의 외로움을 환희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며칠 전 이 도시에서 발행하는 신문에
자식이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기사가 보도되었지만
사람들은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시 전체에 하얀 안개만이
두텁고 무겁게 덮여 있었습니다.
밤을 새워 쓴 엽서를 부쳐도
주소불명으로 되돌아오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알아볼 사람도 아는 사람도 없는
외로운 섬이었습니다.
팽팽했던 꿈은 나날이 가벼워져도
기댈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나이 서른 넘기고 마흔에 들어서는
마른안주에 소주를 들며
일간신문 오늘의 운세를 보며
하찮은 소문에 귀 기울이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기다리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뿌옇게 안개가루 뿌리는 가로등 아래
부유浮游하는 물고기처럼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다가
안개에 묻히는 일뿐이었습니다.
사람 냄새 뭉클하도록 그립지만
지독한 안개 늪이었습니다.
침묵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지나가는 바람일 뿐
철저히 남이 되어 있었습니다.
30. 돌배나무 / 박용섭
샘솟듯 기억들이 자꾸만 피어나는 날
속 눈물 삭혀도 더욱 보고 싶어진다.
해뜨기 전 감자 몇 개 막장 한 종지 지게뿔에 걸고
화전밭 돌배나무 가꾸던 어린 시절
산국화보다 짙은 돌배 대소쿠리에 쪄서
식솔들 허기 달래주던 아버지
자식들 배불리 먹이겠다고
꼬깃꼬깃 모아두었던 농자금
신품종 묘목 심으시고 긴 숨 내쉬시던,
삶의 무게 단내나도록 내려놓지 못했다
이제 새집 지었는데도
편히 밥 한술 맛있게 들지 못하고
객지 생활하는 자식들 걱정할까 봐
아픈 내색 하지 않던 이른 봄
문득 초라해진 뒷모습 보고
울컥 마음이 얼어버린 그때
상악암 앓고 계신 것을 알았다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 업고 새집 뜨락
배 밭을 둘러보았다
가벼워진 몸으로 일러주듯
얘 야 올해는 배가 많이 달리겠지 라고
눈으로 말씀하실 때 등이 저려왔다
그 해 잘 영근 신품종 배 못 보고 우리 곁을 떠난
아버지, 그 목소리 들을 수 없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뵙지 못한 죄 미어지는 기일
잘 익은 배 아버지를 보듯 진설하고
술잔 올리고 절하는 그 모습을
신품종 배나무가 바라보고 있다
탐스럽게 열매 달고서 까치가 먹고도 남겠다.
31. 카스발 / 박용섭
당신의 역사 이야기를 좀 더 세밀하게 할 거야
둥글게 말아 쥔 짱짱한 초록빛
날염기에 꽃무늬 날실거릴 때
흐물거리는 낮은 포복으로 어림없는 일이었지
파도 열차를 타고 닐슨 야드 빅벤에 도착한 밤은
멀미처럼 출렁댔다
만지면 까 실한 이 느낌 언제쯤 보들보들해질까
만질 수 없었던 고압의 온도,
문을 걸어 잠근 채
펌프질 밭은 젖 무르게 몰랑몰랑한 질긴 어둠에
내 이름은 어떤 털의 종류일까? 순록, 산양, 범,
안료, 풀물에 실꾸리 느릴 긴 꿈 틈새 벌릴 수 있을까
묵직한 무게감,
분사 노줄 순환으로 해산의 신음 내지르며
포옹하는 열병에 순해진 모직 사랑
유체 흐름 분수대처럼 쏴댔지
나는 물신 두들겨 맞고 한 가지색 고집을 버렸다
색이 변하기 전 내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그곳
추위 속에 잠들기 위해 깃발 세우던 솜털
천성적으로 자비를 모르는 당신의 기억
한 올 찢겨도 웃음을 사소하게 버리며
팽창 탱크처럼 고압을 퍼댔지
좀 더 악의에 기울인 추종자처럼
호락호락 생을 내주지 않을 것 같은 탈색
만지고 싶어 하는 충동 표정에 도착할 수 있을까
염료 통속에 버무려진 통합된 실오라기
스카발 원단
32. 다시 불을 댕긴다 / 박용섭
찢겨져 나가 버린 나의 과거 한 폐이지
그 빈 곳 채워 넣는 나날
용접연기는 못 배운 나를 괴롭혔다
매일 목 열리는 도라지 가루 달고 살면서
도청당한 삶의 비밀 그렇게
저녁이면 술을 벗 삼아
끈적한 삶을 붙들고
술잔의 수위로는 삭히지 못할
범람하는 가난의 정보에 대한 야유의 무서운 함성
냉기의 시간 불우한 날의 뺨 후려치던 거친 손바닥
책갈피 그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타향의 길을
몇 번의 죽을 고비 넘기면서
용접 불빛 잉태시킨 옥동자 같은 뼈대가 서고
시간이 흐르고 걱정이 담뿍 넘쳐흐른 뒤
그들은 나에게 별을 노래해 주면
오늘 희망의 용접봉에 다시 불을 당긴다
울음 뒤 웃음처럼 그렇게 뿌리에서 퍼 올린 새싹 들
무성한 비명이 부딪치는 희망에 기대어
태풍처럼 가난을 흔드는 그 침묵
바람의 천만 마디 그 말에 귀 기울여
외치는 그 곁에 깜짝 놀라 기쁜 소리 외쳤다
숲을 지나 바람에 묻어온 새들의 노랫소리
하나의 화음으로 돌아오기까지
새의 길인 숲 그 허공을 아파해야 하리
융합은 불덩이 시키는 지구를 타지 않게 두드린다
나의 생이 아름답게 솟아오기를.
33. 보고 듣고 느껴 말을 하니 / 박희주
도저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
어찌하여 하늘을 하늘이라 하고 사람을 사람이라 부르며
땅을 땅이라 부르게 되었을까
우두커니 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바다란 말이 출렁거리고
노을이란 이름엔 가슴까지 뭉클하더라
바람 불어 흔들리는 나무와 풀잎
구름이 해를 감추고 달빛이 어둠을 달래며
반짝이는 별에는 꿈을 심어본다
봄날에 이슬 머금은 꽃봉오리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생긋해진 온누리에 새의 노래 나비의 춤 펄떡대는 송아지
여름 벼락의 섬뜩함에 비가 쏟아지고
뿌리는 알곡을 살찌우네
다 거두어간 들녘엔 하얀 서리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애처로워라
알량해진 버드나무 우수수 떨고
졸아든 여울이 부끄러웠는지 겨우내 얼어붙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린이 젊은이, 늙은이란 어울리는 이름이 붙은 때는
바위는 바위 같고 짐승은 짐승 같아
보고 듣고 느껴 소리 내어 태어난 말들
아, 그런 속 깊은 말들을 나는 쉽게 주절거리는데
내가 서러워서 피눈물을 흘리며 물부짖는 이여
묏자락에 서려 있는 자욱한 안개가 비록 아름답게 보이지만
바쁜 길 가는 나그네의 발길은 휘청거리나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서슬 퍼런 사람들이야 진저리를 치든 말든
말짱한 허우대를 위하여 죽기 살기로 아등바등
물과 불, 낮과 밤,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은
가도 가도 잡히지 않는 무지개처럼 아리송하기만
뜻을 가진 말들이여
말이 일을 만들어내나, 일이 말을 만들어내나
보고 듣고 느껴 말을 하니, 그 옛날 아득한 옛날부터
쉽게 만들어진 말은 결코 없을 것이니
사랑이란 말을 만들었던 이
그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을까?
34. 수밀도원(水蜜桃園)의 밤 / 박희주
배 터질 듯 배 터질 듯
어둠 살라먹은 달빛이
복숭아밭에 질펀지게 흐르는 밤
참을 수 없는 미향의 솟구침으로
어쩔 줄을 몰라
내가 나를 몰라 네가 너를 몰라
살금살금 울타리를 넘는 두 그림자
바람도 불지 않는
풀벌레 울음만 반짝이는 정적
나무엔 부끄러움도 모르고 복숭아들이 주르르
쏟아질 듯 쏟아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
설레는 침몰이 보이는가
취하여 휘청거리며
셀 수 없는 별빛의 세례를 등짝에 받으며
아늑하고도 깊은 곳으로 스르르 떼밀려
하나는 무릎을 꿇었다
또 하나는 달뜬 땅에서 치밀어오르는 속삭임에
홍조 가득 황홀하여라
달빛 받으며 받아먹으며
소스라치는 잔가지들
아, 아
뒤척이던 과수원지기의 선잠은
온몸에 와닿는 울림으로 파장으로
단잠이 되어 달아, 달아
수밀도원에 땀이 촉촉이 흐르고
자지러진 복숭아 땅에 떨어져 이윽고 골짝 물소리 스며들 때
지쳐버린 달은 어둠을 토해내고
서산 너머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35. 아담아, 어디 있느냐 / 박희주
몸이 그리워하는 것들
분수도 모르고 참아내지 못하여
가야 될 길 가지 못하는
아담아, 부끄럽구나
너는 어디에 있느냐
게으르고 한눈팔아
몸을 위했던 짧은 순간이
언제까지나 옥죄일 것인지
알지나 못했더라면
꾀이는 것들을 원망하지 말아라
네가 다가선 것이거늘
벼랑에 다다라서야 네가 너를 포기함은
너로 벅차던 기쁨 참척(慘慽)케 되나니
숨으려 하지 말아라
너는 어디에 있느냐
이 세상 만물 모두 빛을 그리워하나니
경쟁은 아름다운 역사
더 나은 종자를 위하여 시간을 경주하거늘
가당찮게도 요나의 표적을 간구하는가
너, 어디에 있느냐
나는 알지 못하겠노라
제발 흔들리지 마
뼈를 깎는 참회록은 길이 남을 수 있나니
제발 주저하지 마
빛 가운데로 나아오라
너를 던져 너를 불살라
너의 우리를 감격케 하라
36. 젊은 날의 후황* /서금숙
문을 쓱 밀고 들어온 청년
유리문을 연습 삼아 닦아주면 안 되겠냐고 했지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겨우내 쌓인 먼지가 짠해 보이는데
그냥 내버려두었지
처음엔 책임을 전가하는 것 같아 거절했었지
유리에 때를 없애주겠다는 간절함에 수락을 하고 말았지
칼로 스티커 자국을 긁어내고 워셔액을 뿌려
출입구 쪽 창문을 말끔하게 닦아낸
처음 솜씨에
내 맘까지 말끔해졌어
그런데, 투명한 뿔로 손님을 세게 들이받아
‘앗! 유리조심’이라고 써 놨지
날개를 달고 쓱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 청년은
가게 전체를 투명하게 해주러 다시 오겠다고 했지
내가 갈망했던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유리를 닦으려는 그의 행복을 기원했지만
난 후황을 쳐주지는 못했고 처진 빵을 나눠줬지
유리창은 아무리 깨끗이 닦여도
금방 먼지가 앉더군
유리를 특정을 짓는 것들
닦는 사람에 의해 결정된 순간이야
난 더 이상 유리창을 깨끗이 닦기가 싫어졌어
유리 안에서 굳어버리긴 싫거든
깨끗한 물에 물고기가 살지 못하듯
투명한 유리창은 어항이고 난 죽어가는 물고기가 된 거야
숨어 있는 것들의 초상권을 지켜주면
유리를 박탈당한 느낌이 들지 않거든
썩은 내장을 전부 도려 내놓은 죽은 생선에게
넉넉하게 값을 쳐주는 후황을 여태껏 본 적 없어 *넉넉하게 받는 봉급
37. 대갈大喝 -윤두서의 자화상 /서금숙
모자의 윗부분과
몸통도 귀도 그리지 않았다
자화상 눈빛에 빨려들어
처음과 끝이 없는 길 위에 서 본다
대갈 없고 이놈 저놈 할 공명 없다
들을 귀 없고 올라갈 산도 없다
털끝 하나까지 세워놓은 얼굴만 응시한다
형님이 죽고, 아내가 죽고, 친구가 죽고
죽었으되 죽지 못한 세상 만남아
붓을 들어 세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혼돈의 굴레 속 얼굴이다
호랑이 눈을 집어넣고
눈썹 날개를 그려 넣고
터럭 하나 죽이지 못한
올곧음을 수염에 달았다
결심은 살아났다
불새 한 마리 타올랐다
이제까지 보지 못한 하나뿐인
질긴 목숨
댕강댕강 목숨이 운다
하나뿐인 운명이 운다
심금을 울린다
목마름은 더 큰 목마름으로 터져 나온다
댕강댕강 잘려나간 슬픔이 가슴을 울린다
잘린 얼굴
두서없이 살아난 목숨 아래
차가운 눈빛에서 너를 본다
한 사내의 대갈에
한 울 안에 가득한 전쟁 지진 홍수 화마는
쥐 죽은 호령도 못한다
38. 신자유주의* 빵집 /서금숙
스불재**를 넘어 그 빵집에 암행을 갔다 아내는 고개를 수그린 채 오후를 쟀고 여덟 평이던 그 빵집에 포도시 앉아 손님 기다리다 호젓한 책 읽기를 좋아했다
마주 본 개인 빵집은 사정거리 안에 있으니 그 빵집과 팽팽한 접전이었다 아내는 어깨에 까치가 똥을 지리던 날 그 빵집을 인수해 사장이 됐다 IMF 위기가 닥쳐와 빵집은 1년도 못가 결국 본사와 통신이 두절.
그 빵집은 낡은 간판만 교체하였다. 빵 모자 눌러쓴 네 살배기 아들이 토실하게 익어가는 놀이터에 부도난 회사에서 밀려난 그도 불시착했다
그 빵집은 점점 공허한 흉곽처럼 보였으므로, 사사로운 개인 빵집이라는 깃발을 꽂았다 그렇게 홀로서기의 심판은 부엉이처럼 야행도 일삼았다 판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 빵집 부근에 임대 쪽지가 나붙은 빵집들이 늘어났다
신세대가 대빵 좋아하는 체인으로 다시 자유로운 사상과 사조는 형틀에 매어, 갈고리 못을 박았다 살기 위해 블링블링한 사각의 빵틀 속으로 더 납작하게 기어들어 갔다 젊은 속살이 다 타들어 간 인생 황혼은 마술이 걸렸다 그의 몸에 칭칭 감긴 쇠사슬은 질기고 단단했다
*그 빵집 동네에서 태어나 다 자란 대학생이 '신자유주의'라는 주제로 빵집 아저씨를 취재한 탐방기는 S대학 잡지에 일면 톱으로 실려있다.
**스불재는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라는 신조어임.
39. 연필 꽃 / 안선희
나는 항상 기다려주지 않는
어른들이 원망스러웠다
또래보다 느린 나를 꾸짖고
재촉하는 어른이 미웠다
스물세 살에 처음으로
교탁에 빈 화병을 놓자
아홉 살 어린이들이 몰려와
연필로 꽃을 그려 꽂았다
교탁에서 화병을 바라보며
머리 세는 줄도 모르고
어린이들이 연필 꽃을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또래보다 느린 아이도
꾸짖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팔월의 햇살이 뜨겁던 날
화병의 꽃들이 저마다의
빛깔로 씨앗을 떨구던 날
서른세 해 만에 교탁을 떠났다
돌아온 내 집 식탁에서
낡은 화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느리게 그렸던
연필 꽃향기를 머금은 채
40. 인연 / 안선희
짧은 만남으로 내 곁에 머물렀기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이 작은 세상 어디서든
다시 만날 인연인 줄 알았어요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고
언제부턴가
당신이 생각나면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우리는 다시 만났지만
인사도 나누지 못하였어요
상심한 내 가슴은 빗장을 열고
당신을 멀리멀리 날려 보냈지요
사막 같은 세상 힘들어
그리움도 잊고 살다가
우연히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바로 등 뒤에서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로
사랑의 인사를 건네는 당신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하고 있음을 깨닫자
행복의 빛깔이
내 삶을 물들입니다
좋은 사람
당신이 또다시
나를 울게 합니다
41. 붉은 나팔꽃 / 안선희
새벽이슬 내리자
나팔꽃 넝쿨이 울타리를
단단하게 감아올라간다
우리의 사랑도 저렇듯
단단한 줄 알았건만
종이처럼 구겨진 옛이야기
아직 새살에는 딱쟁이도 앉지 않았다
뜨거운 미움으로도 씻어내지 못한
그림자 되새김질하다
길모퉁이에서 마주하던 날
피고 또 피어오르는 나팔꽃은 왜 그다지도 너그러울까
하늘을 찌르던 미움도
소리없이 스러졌다
사랑은 서로의 흉터를 보듬으며
시나브로 여물어 가는 것
새벽이슬 머금고 피워 올린
붉은 나팔꽃처럼
42. 관계론 / 양성수
살다보면
이래저래 얽히고 설킨 인연과 인과의 관계로 생기는 처세의 수 싸움
눈치 보고
코치보고
저울질하다 보면
계산은 계산을 낳고
그 끄트머리에 남는 것은 시커멓게 때 묻은 치부책뿐
저울에 무게 달고
계산기 두드리는 대신
본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자
마음의 갈등 생길 때는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보다 불리한 선택이 현명하고 편한하다
그 손해는 훗날 선한 마일리지로 차곡히 쌓일 것이니
혹여 그대에게 태풍의 힘 있거든
그 힘 태풍눈에 가두고
깃털 하나 날리지 마라
떼에 이르기 전에는
그대가 힘을 쓰면 폭풍우 일고
바람이 일면 나뭇가지 꺾이고
무수한 이파리들 흩날릴 테니
태풍이 태풍이라 말하지 않을 때
산새들은 나뭇가지 노닐고
이파리들 비단 바람결에 춤을 춘다
43. 파랑새를 찾아서 / 양성수
모두가 행복 행복하기에 그를 찾아 길 나섰다
긴 긴 세월
흙먼지 폴폴거리는 세상을 걷고 걸어도
대문짝만 한 유리문 밀쳐 들어가도 만날 수 없어
다시 되오는 길
그 멀고 먼 길에서 찾았네 행복의 비밀을
애써
-가지려 말고
-이기려 말며
-삶을 인정하고 세상을 인정하며
-부정에서 긍정을 부정 찾는 지혜와
-아니다 싶을 때는 포기할 줄도 아는 것이 그 비법
빛이 있어 그림자 생기니
빛은 빛대로
그림자는 그림자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아,
그 안에 자유로움 있음이니
원초적 본능이 타산적 이성을 밀쳐내
자신에게 마저 자유로울 때 이르러서야 만나는 진정한 자유
자유의 여백에는 여유와 평온함 그리고 소소한 즐거움이
즐거우면 웃게 되고
웃는 이 행복할 테니
웃자
웃고 웃자
그저 웃자
때로는 쓴웃음 일지라도
44. 비우라니요 / 양성수
힘을 빼면 몸이 가벼워지고
몸이 가벼워지면 힘이 생기느니
그런데 그게 쉽지 않느니
비우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가벼워지면 맑은 기운으로 채워지느니
그런데 그게 쉽지 않느니
버린다는 것은 굳이 필요치 않기 때문
비우는 것처럼 어렵지도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어
너무도 쉽고 쉬운 일
세상
바보들아
힘도 버리고
마음도 버려라
지금 버릴 게 없다면
언제든 버릴 준비라도 해두면
텅 빈 충만함이 마음을 온유케 하리니
가진 것을 버리는 순간 자유를 얻게 되고
자유는 곧 날개 돋아 구름 위를 날으리
무심타 무심타 마라
태초부터 세상은 비워져 있었으며
네 것 내 것은 애당초 아무것도 없었느니
45. 손톱달 / 유미애
그믐밤
손톱을 깎는다
하모니카 불던 저녁엔
누군가 향낭을 빠져나가고
이른 아침 내 손톱은 붉게 피어있었다
쇄골이 드러난 달은
내가 한쪽 허리에 품고 살던 당신의 옛 이름
당신이 흘리고 간 머리칼이
친친, 국화 베개를 감았을 때
빛을 쓸어 담듯 자루 가득
손톱 조각을 모았다
꽃의 몸 어디엔가 조용조용
무언가 자라고 있어
작약 뿌리를 먹고 눈 먼 뱀이 달을 향해 울고
새들은 또 한세상을 부수며 날아갔다
당신을 생각하지 않아도 물컹
꽃냄새가 묻어나는 새로 보름
푸른 뱀의 눈물자국이 사방으로 번져갈 때
국화도 작약도 잠든 화단
당신의 허물 위에 앉아
하모니카 분다
더 이상 아프지 말자고, 톡톡
움푹 깎여나간
달을 본다
46. 말뚝 / 유미애
거미는 식사 전 먼저
제 먹이에 말뚝을 박는다 하네
60년 전 이순녀의 몸에 말뚝이 박힌 순간
그는 태어났네
광부였던 아비의 말뚝을 따라 밖으로 나온 그는
사는 날까지 말뚝을 쳤네
염소를 키우고 마늘밭을 가꾸던
그의 말뚝 박기는 어디든 거침이 없어서
서너 명의 여자에게 같은 말뚝을 친 적도 있네
주인을 두고 자리다툼을 하던 한 여자는
저수지의 두꺼비처럼 떠올랐네
뱃속에는 그의 망치질을 증명하는
핏덩이가 자라고 있었네
가끔은 잘못 박힌 말뚝이 꽃을 피우기도 하네
이정표를 따라 가다 길을 잃었을 때
사는 일은
말뚝과 말뚝의 소통일 거란 생각을 했네
땅 밑에는 말뚝의 뿌리들이
발가락을 부비고 있을 것이네
두근두근 몰래 박는
제 것이라 공표하는
길을 잃지 말라 응원하는
우린 모두 말뚝 숭배자일지 모르네
실한 뿌리를 내리지 못해 옮겨 다니는 것일 뿐
평생 말뚝 박기를 업으로 삼았던 그는
지상에 말뚝 하나로 남았네
볕 좋은 오후, 그의 후손이 이장 터를 파고 있네
사후에도 그는
이곳저곳에 말뚝을 박는 모양이네
47. 고강동의 태양 / 유미애
푸르고 붉은 지붕들 태양연립 은하슈퍼
바람 돌아가는 모퉁이 금성여관 턱밑에는
노인이 걸어둔 전구가 있다
560번지 사람들은 그 아래서
부고장이나 밀린 고지서 등을 읽는다
바람 속에 한숨 넣어주며
비행기들이 낮게 나는 하늘 한 쪽
새들과 같은 방을 쓰는 노인을 보고 개가 짖는다
저 울음을 따라 흘러가고 오던 빛들
그을린 얼굴의 해가 천장으로 숨어들면
잠시 벗어놓은 어깨의 푸른 멍울이
별 대신 뜨는 이곳, 02호
지하방에 서식하는 내가 어둠을 퍼올릴 때도
전구는 얼어붙은 길을 풀어내고 있었다
떠나 있던 새들이 빈방으로 모여든다
일성전기 전깃줄에 감긴 사십 년 시간을 지나
일렁거리는 눈물등(燈) 앞세우고
노인은 70년 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새들이 찍어놓은 발자국들이 뒤를 따랐다
손에 든 부고장에는
지상에 없는 주소가 적혀있다
누군가 그리우면
사람들은 달은 두고, 금성여관
턱 밑에 달랑거리는 전구를 바라본다
48. 이름만 들어도 좋은 당신 / 윤보영
이제야 알았습니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고
의식도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억 만 리 외국에 나와서
당신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당신이 있어서 내가 있고
당신으로 인해 내가 행복했다는 사실!
혼자 있어보고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내 행복을 위해 준 선물이었고
흔들리는 나뭇잎과 부는 바람,
흐린 하늘까지도 당신의 일부였습니다.
낯선 땅 담장에 핀 무궁화 꽃은
감동으로 다가왔고
나와 비슷한 사람만 봐도
따뜻한 정이 느껴졌습니다.
대한민국!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는
해외동포의 얘기처럼
당신의 존재를 알게 된 지금은
내 가슴에도 감동이 일고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좋은 당신
사랑합니다.
대한민국 당신을 사랑합니다.
49. 진달래 편지 / 이오장
햇살 아래서는
꽃에 말 걸지 않기를
원미산 진달래 언덕에서 편지를 쓴다
송이송이 꽃숭어리에
옴짝달싹 못 하는 말을 귀에 담으려
바짝 다가서서 엿들은 속삭임
무슨 뜻인지 몰라 새기다가
훌쩍 지나가는 바람이 전해주는 그 말
그냥 갔으니 깨우지 말란다
첫사랑이 그랬다
천만번 물음에 대답 없다가
언제 묻기나 했었냐는 푸념에
지나는 구름을 갈기갈기 찢었었다
그만큼의 향기 어디서 찾을까
꽃마다 찾아다니다
찢긴 구름 꿰매지 못한 방황
끝내 멈춘 자리에 개나리가 피었다
향기 물든 그림자에 겹친 그림자
발자국으로 세워 마주한 진달래꽃
눈에 비친 화려함 멀어지고
귓속에 담긴 목소리 받아 쓴 편지
꽃그림자에 앉아 소리 내어 읽는다
50. 명자꽃 / 이오장
시인의 밥그릇을 치운다는 소식에
명자꽃이 피었다
모과를 닮아
남자들 대화에 끼지 못한 명자
명자꽃을 좋아했던 시인은
명자를 승용차에 싣고 다녔다
잎 없이 피어난 빨간 꽃은
가지 사이에 수줍음 감췄다가
볼이 통통한 열매를 맺고
울타리집 명자 시집가던 날
장독대 뒤에 떨어졌다
명자가 그리워 뒤뜰을 서성이던 시인
뒹구는 명자 주워들고 흘린 눈물
마른 감나무 잎을 적셨는데
그렇게 시를 썼는데
다시 명자꽃이 피었는데
상에 놓일 밥그릇이
영정사진 앞에 놓였다
새봄을 알리는 붉은 꽃
울타리에 불길 솟구치는 날
가버린 풋사랑 명자는 아직 모를 거다
51. 누가 물레방아를 거세했는가 / 이오장
공이와 확이 만나 방아가 되고
둘이 합해 곡식을 찧는데
공이는 하늘 오르려 구름만 보고
확은 금맥 찾아 땅속에 들어갔으니
무엇으로 방아를 찧어
입속에 친 거미줄 걷을까
세상 인구는 80억이 넘는다는데
우리는 점차 줄어 5천3백만
인구밀도 줄이려 그랬다는 핑계
입 밖에 내지 마라
비행기는 제힘으로 하늘 날고
모습 감춘 잠수함은 스스로 바다를 가른다
동채방아 세울 계곡 파헤치고
밀채방아 엮을 개울 막았으니
만나려는 염원 꿈에서 푼다
거리에 세워 웃음거리 만들고
보리싹 돋은 공원에 놀이터 벌렸으니
어느 꿈에 만나 얼굴 그리고
어느 자리에서 만나 손잡을까
골목마다 울리던 어린아이 울음
물레방아 돌린 물 따라 흘러간 뒤에
콘크리트 바닥을 달리는 자동차
뒷자리에 앉았을 보석들이 보이지 않는다
52. 아버지 / 이 안
시린 하늘 떼 지어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
붉은 노을 한 겹 내릴 때면 갈 곳을 못 찾아 헤매고
대문턱에 앉아 이때를 기다리던 아이
키보다 긴 잠자리채 들고나와
깍지 발 들고 휘적이다 헛디뎌
언덕 아래로 "데구루루 쾅~~~"
"어떤 새끼고 공장 부서지겠네"
무서운 아저씨에게 겁먹은 아이
아픔도 잊고 멱살 잡혀 대롱거리며 무서워 우는데
짙은 노을 속에서
까만 망토 입고 나타난 슈퍼맨
우는 아이 구하고 "괜찮아~ 괜찮아~~"
엉덩이 "툭툭"치시며 안심시키는 미소
슈퍼맨의 한 팔엔 아이, 다른 한 손엔 노을 아래 흰 봉지
봉지 속 삐죽이 나온 파래 가루 묻은, 하얀 생강 묻은
양과자는 아이가 울먹임을 멈춘 이유
슈퍼맨의 흐뭇함, 아이의 달콤함
어느새 붉은 노을 촘촘히 내린 아현동 산꼭대기
반백 년 지나 오늘 서 본 그곳
아파트 떡 버티고 있고,
국민학교 뒷길도 왜 이리 좁았는지...
아이가 오르던 비슷한 수많은 계단의 흔적...
내리막길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오늘 이 말하고 싶었다
"아들 아빠랑 고추잠자리 보러 가지 않을래?"
53. 봄눈꽃 / 이 안
온통 하얗던
길 위에서 난 그대와 눈 맞았소
순간 내린 함박눈이 눈에 떨어져
본의 아닌 신호를 하게 되니
그게 큐피트의 화살이 되었소
그러나 세월 흘러
삶에 지치니, 사랑도 의리가 되고…
거울 속 이제 초라한 한 늙은 얼굴을 대하니
삶이란 이런 건가? 원망하다
시간을 멈추고 마음 그릇을 비우기 위한
정리의 시간을 갖게 되었소
그러다 빛 좋던 날 잠이 들었소
함박눈 오던 그때,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
時分秒針을 되돌려 놓고 龍頭를 빼 시간을 멈추곤
그대에게 連通을 띄우겠소
"王의 庭園,
곧 흐드러지게 필
벚꽃나무 아래로 와주시오"
그대가 오는 동안
내게 주어졌던 삶의 답안지… 이제 연필을 내려놓고,
答이라 써 내려갔던 글자들 고무지우개로 모두 지워
"후~~~" 불어 버리곤
함박 웃음 짖는 그대와 봄눈꽃 내리는 하얀 여백의
정원을 거닐며 살고 싶소
그대와 마주 서서 이제 龍頭를 누르면
우리 앞엔 함박눈과 함께 벚꽃이 떨어지게 되오
남실바람 불어 우수수 내리는 봄눈꽃 아래서
나는 "하하하" 웃을 테니, 그대는 '호호호' 웃으시오
그리고, 열여덟 소년처럼 수줍게 말하고 싶소
"그댄 참 볼수록 예쁘오"
나는 이제 다신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소
54. 그렇겠지 / 이 안
비를 피해
백빈마을 어귀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와
따뜻한 커피를 시키니
받침 그릇 위에 티스푼과
나란히 놓여 있는 황설탕 한 조각
"툭 ~"
커피잔에 밀어 놓고 젖지 않았더니
쓴 커피 거의 다 마실 즈음
바닥 커피에서 느껴지는 달콤함…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넘겨보는 내 머릿속 책장 기억들…
넘겨지는 순간순간 따뜻함이 많은 걸로 봐선
나도 누군가에겐 참 따뜻했었고,
지금까지 존재해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흐뭇해하는데
순간 펼쳐지는 지난 수년간
악몽 같았던 기억들에 온몸이 아파오는데…
마치 조금 전 마신 쓴 커피 같았다
그러다 문득,
내 인생도 힘들고, 어려운 일 많이 겪어왔으니
이젠 조금 전 마신 바닥 커피처럼 곧 달콤해지겠지?
55. 벚꽃 엔딩 / 이재학
벚꽃처럼 죽을 수 있다면
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벚꽃처럼 죽을 수 있다면
나 죽음을 목 놓아 기다리리
벚꽃이 피고
벚꽃이 만개하는 날이면
땅은 하늘이 되고
하늘은 땅이 되어
세상의 기운을 끌어 모으는
벚꽃을 내 가슴에 품으리
그리고 잊지 않으리
바람을 타고 끝 간 곳까지
가는 무한 자유를
벚꽃처럼 죽을 수 있다면
나 죽음을 사랑하리
정말로 사랑하리
56. 나는 정말 멀리 날아가고 싶다 / 이재학
나의 꿈은 물수제비돌
나는 큰 바위였다
덩치가 커서 움직임도 둔했다
그래서 나를 작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 시간이 백만 년은 걸리지 않았을까
나에게는 긴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목표가 있었으니까
어느덧 내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나는 작은 돌 사이에 있게 되었다
작은 돌들은 나와 비슷한 세월을 이겨낸
친구들이었다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꿈이 있다면 시간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물수제비 돌이 되기 위한 마지막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물에서 잘 날 수 있도록 몸을 매끄럽게
다듬는 것이었다
그 시간은 아주 짧았다
겨우 수천 년에 불과했으니까
내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매일 느낄 수
있는 시절이었다
나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오늘 나는 선택을 받았다
나는 정말 멀리 날아가고 싶다
57. 이제는 장독대에 앉아 / 이재학
앨범을 보다
장독대에서 어머니가 간장을
뜨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사진 속 간장항아리는
반짝반짝 윤이 납니다
틈만 나면 장독대의 항아리에
마른걸레질을 하시던 할머니 어머니의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마당에서 놀다 여우비라도 오면
부리나케 장독대로 달려가
된장독 간장독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항아리뚜껑을 닫고 할머니에게
칭찬받을 생각에 씨익 웃던
내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가을이면 장독대에 고사를 지내고
우리 집 식구들의 양식이 있는 곳이라며
장독대를 끔찍이 여기던 할머니 어머니의 마음을
내 머리에도 서리가 내리니
알게 됩니다
이제는 장독대에 앉아
마른걸레질을 하러 오시는
할머니 어머니를 반갑게 맞이하고 싶은데
할머니도 어머니도 고향에 안계십니다
58. 개구리 우는 밤 / 이종헌
아내는 할인을 많이 해준다는 시간을 골라 마트에 가고
밤마다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는 아이들의 귀가는 늦다
아무리 돈이 궁해도 그렇지
한 시간에 겨우 몇천 원 받는 알바 해서 뭐하냐고
그 시간에 차라리 공부나 하라고 윽박질러도 보지만
하고 싶은 건 많고 돈은 없으니
아이들은 코피를 쏟으면서도 일을 멈추지 않는다
‘차라리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는 게 낫지…’
여기저기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며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어린 고양이는 알아들었는지 말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멀뚱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한다
나는 내가 한 말이 꼭
어렸을 적 내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닮았다는 생각에
갑자기 너털웃음을 지었다
텔레비전 속 어는 산골 마을에선지 한바탕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모깃불 피워놓고 평상 위에 둘러앉아 감자 먹던 시절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개구리 울음소리 요란했다
오랜만에 개구리 우는 밤이다
59. 안개 / 이종헌
밤새 고향집 뜰을 거닐다
쫓기듯 일상으로 돌아온 아침
몽환(夢幻)의 여운인 양
안개가 자욱하다
그날도 오늘처럼
안개가 자욱했었다
당신께서 위독하시다는 전화에
밤새 고속도로를 달려갔을 때
뿌연 안개는
고향집 처마를 에워싸고
워리는 컹컹
숨이 넘어갈 듯 자지러지게
어둠을 짖어대고 있었다
할머니가 떠나셨던
바로 그 자리
희미한 백열등 아래
숨 가쁘게 똑딱이던 괘종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시던 당신
어머니의 퀭한 눈꺼풀 위로
실낱처럼 가벼운 졸음이 스쳐 갈 때
아버지는
벽에 걸린 낡은 사진틀 속을 걸어 나와
홀로 새벽안개 속으로 떠나셨다
오늘처럼 자욱한 안개 속으로
60. 진관사 / 이종헌
아무리 쓸어도
티끌 하나 없을 것 같은 절집 마당에
가을이 깊어갑니다
인생은 한바탕의 꿈이라 하니
새소리 바람 소리 나뭇잎 소리가 다
소중한 인연입니다
집착하지 말고
그저 허허로운 바람으로 살라고
대웅전 뜨락의 보리수는
텅 빈 가슴을 열어 보입니다
나가원 섬돌 위에 놓인
흰 고무신 한 켤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터벅터벅 산길로 향합니다
발아래 계곡에는
떨어져 내린 단풍잎과 흐르는 물
그 속에서 익어가는 열매들이
또, 한세상을 이루었습니다
서산에 해 지고
동정각 범종소리 향로봉 골짜기에
울려 퍼질 때쯤이면
내 얼굴도 어느덧
저녁노을 따라 붉게 물들겠지요
61. 아버지의 빈자리 / 정명숙
-아버지 기일에 붙여
아버지 봄 동산에 꽃이 피었습니다
오늘은 아버지 생신날
고향하늘을 향해 눈을 뜨면 뜰수록
소매 자락이 흠뿍 젖고 맙니다.
언제나 뒷짐 지시고 말수가 적으셨던 아버지
어쩌다가 잔칫집 다녀오는 날이면
목청 높여 즐겨 부르시던
밀양 아리랑 노랫가락이
아버지보다 앞서 집 안으로 들려왔습니다
이런 날 아버지의 노래를 불러봅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야윈 몸으로 병실에 누워
눈 깜빡이며 자식들을 기다리시던 아버지
이승을 떠나시던 날
밤하늘의 별빛은 유난히도 반짝이었습니다
어쩌다가 꿈속에서 아버지의 환한 미소를 마주한 날에는
오래도록 허공을 바라보기만 합니다.
이젠 날이 지날수록
아버지의 빈 자리가 자꾸만 넓고 깊어만 갑니다.
62. 섣달그믐 / 최유식
섣달그믐 설풍에 문풍지가 운다.
서낭당 고갯마루 된바람 안고
쌀 팔아 설빔 마련하신 아버지 돌아오신다.
그믐밤 추위에 멍멍이도 나뭇간 속에 몸을 떨고
가끔 어둠을 향해 앓는 소리한다.
돌아올 지아비 밥주발 아랫목에 묻어 놓고
저녁 불 담은 화로에서 청국장은 보글거린다.
까물거리는 호롱불을 벗 삼아 지아비 옷 지으시고
대청에는 떡 썰고 만두 빚는 볼 발갛게 물들인 누이들
아이는 내의를 벗어 이 잡기 열중이다.
덜컹이는 대문 소리에 귀 기우리다
봉창 유리에 눈을 대고 밖을 바라보면
새해맞이 함박눈이 바람 타고 날린다.
이윽고
서설이 내려 내년은 풍년 들겄네
눈 덮인 중절모 털며 들어서는
지아비 목소리에 방문 열고 마중한다.
새끼줄에 묶인 고등어 한 손 돼지고기 두어 근
까만 운동화 한 켤레 시린 손에 들려있다.
청국장에 담긴 지어미 정성 방안에 그윽하고
추위 뚫고 온 지아비 위해 따끈하게 데운 막걸리 향이
목구멍을 간즈린다.
밖에는 함박눈이 어둠을 수놓고
방안에 돋아놓은 호롱불이 환하다
63. 고향 / 최유식
소나기 몰아치던 여름날
비릿한 비바람이 앞산을 물안개로 가린다.
미루나무 길 따라
소년은 허둥지둥 황소를 몰고 뛴다
번쩍이는 벼락에 놀란 황소가
다급하게 집안으로 뛰어들어
큰 눈을 껌벅이며 긴 혀로 소년의 얼굴을 핥는다.
포도알처럼 익어가는 추억이 영글던 고향
마음을 심고 살며 웃음 짓던 정겨운 얼굴들
소나기가 거두어간 사랑마루에
코끝을 간질거리는 부추 전 기름 내음
천둥소리 들으며 막걸리 나누던
사람 사는 맛이 넘치던 고향
사랑을 쏟고 살지 못하는
소나기 내리는 도시에서
미루나무 선 마을길도
빗속을 뛰던 황소도 마냥 그립다
64. 겨울밤/ 최유식
아랫목 묻은 밥주발에 엄니 정성 잠들었다
화롯불에 얹은 찌게는 엄니 사랑 담고
보글보글 끓고 있다.
시린 윗목에서
까물거리는 호롱불 벗 삼아 옷 지으시다
귀가 늦은 아들 걱정에 마음이 앞서
바람결 대문 소리에 귀 쫑긋 세우신다.
엄동설한에 식을세라 묻은 밥주발에
엄니 눈물자국 흘러 있다
이윽고
함박눈 머리에 이고 들어온 아들에게
내민 밥상에는 아들의 하루 이야기와
엄니 웃음이 사락사락 쌓여간다.
흔들리던 호롱불이 허리를 고추 세우니
방안이 환하다.
65. 꽃 / 홍서영
꽃은 심연의 몸부림이다
마디 마디 성장한 새잎들
여린 가지에 새초롬히 피어나
저마다 푸른 옷을 입고 떠난다
촉촉한 물빛과 찰찰한 물보라
해보며 푸른 빛 실루엣
쏟아지는 햇살도 받는다
별들이 어둠에 있듯이
고목이 세월에 있듯이
태양을 바라보는 영혼은
낮과 밤을 태우며 잠이 든다
칙칙한 가슴
지워지는 시절
바람에도 해닮아 피어
오색 빛깔로 적셔진다
꽃은 그리운 일탈이다
어디로 향하는가
어느 곳에 이르려나
경쾌하고 홀가분하도록 춤추며
보란 듯 작열하며 허물을 벗는다
그렇다, 누구의 잘못도 탓도 아닌
허허로운 풋풋한 성장인 줄 안다
가슴 둘둘 말은 심호흡에 흩어져 버린다
아픔을 견디는 힘겨운 참바라기이다
66. 내 마음의 플랫폼 / 홍서영
마음이 술렁일 때 한 번씩
어둠에 나가 물보라를 보고
나이테를 세어본다
어둑해진 바다에 적막이
뚝 뚝 ! 떨어져 흐르니 물결은
은빛 실루엣을 입고 있다
바다가 출렁이고 왔다가
물보라치며 혼비백산하여도
눈 한번 감았다 뜨니
모래밭은 촉촉해진다
바다는 두드릴수록 거세지고
모래밭에 왔다가 무거운 몸 누이네
그런 걸 보면서 부둥켜 안았어
밀물과 썰물의 아름다운 배려인 것을
부끄러운 포옹은 아니라 한다
서로를 알아가면서 긴 몸살을 앓는
그리움이 더 장엄하다는 것을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세상의 짐을 같이 나누는 것이고
작은 생명의 불씨로 살면서
숨 쉬고 내쉴 때 함께 있는 것이다
파도가 일 때마다
바닷가 모래 위에 별이 뜨고
두드리고 두드려보아야 안다는 것
꽃무늬 물결은 넋이요 그리움이다
하늘이 비를 기다리며 바다를 품듯
하루가 간다, 그렇게 너에게로
67. 단풍의 질곡 / 홍서영
거울엔 은빛가루
눈망울 환하게 비쳐줘
숨죽이고
열정 다해 붉게 터트려
가을은 물들고
꿈도 물들고 있다
넓적한 손 맞춰보니
손은 쭈글쭈글한데
네 잎은 새살처럼 곱구나
모진 시간 견디고
당당하게 핀 단풍잎아
나도 너처럼 세상 밖에 나와
푸른빛 버려 붉은빛 취하고 싶다
바람에 물들이고 비에 술렁이다
단풍은 발그스레 물들어가는데
나는 어느 나무에 피어날까
견디어낸 고통 어디서 쉬어갈까
가을 뜨락에 수북이 모여든다
낙엽처럼 뒹굴다 짓밟혀 으깨져 어딘가로
단풍의 질곡에도 웃을 수 있는
기다림 마중하고 있다
68. 당신으로 넘치는 삶 / 홍영수
꿈속, 바스락거림이 적막한 귓전에 들린다.
설움과 보고픔에 지친 나에게
아스라이 보일 듯 말 듯 오신 어머니
나는 느낍니다.
방황의 마음을 다잡아 주신 침묵의 언어를
사루어 더더욱 따스한 손가락 마디마디의 정을
나의 심장에 찍힌 발자국의 의미를.
고울 사 고운 치맛자락 다소 곳 여미고
굽은 등 더욱 굽으시며
말 잊은 듯 정지문을 여신 무표정의 어머니
나는 마십니다.
첫새벽 장독대에 올린 기도의 정화수를
여명의 햇귀로 씻는 새벽녘 쌀뜨물을
가마솥 부뚜막에 흘러내린 뜨거운 밥물을.
어둠 속에서도 빛난 눈빛으로
순간의 나를 깨우고
일순간 흔적을 감추신 어머니
나는 기다립니다.
그리움이 곪아 터져 사모의 꽃을 피우는 순간을
나의 꿈이 어머니의 눈망울에 맺혀 빛나는 시간을
살아감이 당신 속에 있고
당신으로 넘치는 나의 삶을.
69. 몽돌 / 홍영수
햇살에 걸린 은빛 파도로
돌무늬에 시간의 눈금을 새기면서
얼마나 구도의 길을 걸었기에
손금 지워진 어부처럼
지문마저 지워져 반질거릴까.
낮게 임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깻돌, 콩돌, 몽돌이 되어
알몸 맨살 버무리며
철썩이는 파도의 물무늬로 미끈거릴까.
평생 누워 참선하면서
바닷소리 공양에 귀 기울이며
얼마나 잘 익은 득음을 했기에
수평선 너머 태풍을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무한 고통의 탯줄을 끊은
저 작은 생명력, 그 앞에선
파도마저 차마 소리 죽여 왔다 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잘 마모되어 간다는 것.
얼마나 더 마모되어야
내 안에 몽돌 하나 키울 수 있을까
70.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 홍영수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부르튼 피부의 대들보를 안고 누웠다가
아흔 굽잇길을 돌아 검은 그림자가 되었다는 것을,
누구의 관심과 눈길 없이
이승의 삶을 해체하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오두막 같은 한 여인이 그녀였다는 것을,
늘그막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이목구비를 지우고
헐거운 짐이 무거운 짐이 될까, 걱정하다가
생의 앞편으로 이어갈 끈을 놓아버렸다는 것을,
베갯잇 적시는 몇 방울의 고독을 삼키면서
사립문 여는 소리는 차마 닫지 못하고
검은 천사에 둘러싸인 주검이 그녀였다는 것을,
이젠, 휑한 방 안의 공기마저 납작 엎드린 곳에
그동안 방치된 자투리의 삶이 압류된 채
다문 입에 못다 한 말들이 시체처럼 붙어있는
초점 잃은 눈동자의 여체가 그녀였다는 것을,
그녀가 켜 놓은 촛불에는 빛이 있었으나
꺼진 뒤의 촛농 속에는 그녀가 있었다는 것을,
떠나기 전에는 혼자였던 그녀가
떠난 뒤에는 누군가의 전부였다는 것을,
깨물어 아픈 손가락들은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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