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사랑과 영생의 공동체
본 문: 창세기3:1-13
설교일: 2023. 6. 18(주일 낮 예배)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
“무슨 일이 잘 안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책임 전가를 잘하는 우리 인간의 속성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겪는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조상 탓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수치심(부끄러움이지요!), 두려움 그리고 책임전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끼고,
책임을 전가하는 성품이 조상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조상이 누굽니까?
바로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아름답고 풍요한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시고
그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무엇이든지 “네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시고,
단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내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라고 하면 남을 속이고 빼앗고, 도둑질하고, 이런 것들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다 죄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요, 행동일 뿐입니다.
근본적인 죄, 그 죄를 짓고 내가 죄인이 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았다면
죄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랑과 신뢰 곧 믿음의 관계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인이 되는 순간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사랑과 믿음의 관계는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수치심, 두려움이 시작되고
그들은 서로가 죄인이 아니라고 책임전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에게 나타나는 성품 세 가지를 보게 됩니다.
첫째는 수치심입니다.
7절을 보면 그들이 눈이 밝아져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다고 했습니다.
이 행동은 그들에게 수치심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할 때, 수치심이 생깁니다.
따라서 죄는 수치심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숨고 감추지만, 그런다고 수치심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 수치심은 죄를 사함받았을 때만 사라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두려움입니다.
8절 말씀을 보면, 그날 아담과 하와는 바람이 불 때,
하나님이 동산에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난 후에는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셋째는 거짓과 의심과 책임전가입니다.
9-10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 때,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담은 거짓말을 합니다.
지금 아담은 벗은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그 열매를 먹은 일이 두려워서 숨은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지적하십니다.
11절입니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이때 아담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12절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으시고 아담에게 주셨을 때, 아담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 살 중에 살이요, 내 뼈 중에 뼈”라고 사랑고백을 하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와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모든 책임은 하와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아담이 책임전가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를 지은 것은 저 여자 탓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내가 죄인이 된 것은
그 여자를 나와 함께 있도록 하신 하나님 당신 책임입니다.
여러분 ! 책임전가는 이렇게 발전합니다.
내 책임이 아니요, 저 여자 책임이요, 그리고 결국은 저 여자를 주신 하나님 책임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그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죄로 인하여 나타나는 수치심은 언제나 두려움으로 연결되고,
그 다음은 거짓과 의심과 책임전가로 나타납니다.
“나의 죄, 이 수치스런 모습이 드러나면 어떻게 되나?”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거짓과 의심과 책임전가로 연결되고
결국은 사람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그래서 죄인은 자기 성을 쌓고, 마음 문을 꼭꼭 닫아 놓고 삽니다.
그 결과가 바로 하나님과 단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의 결과로 나타난 하나님과 단절된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수치도 두려움도 없으십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죄인이 받는 형벌, 수치스러운 죽임을 당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로 인한 수치심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시고, 예수님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수치심과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던 우리들이
이제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고, 내 안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나와 같이 계시는 분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제 무섭고 두려워 해야 할 심판자가 아니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용납해 주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랑과 믿음의 관계로 회복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우리와 우리 이웃과의 관계에도 확대됩니다.
그리고 그 이웃과의 관계회복은 사랑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하나님도 이렇게 공동체로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나와 이웃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겟세마네로 가시기 전
제자들을 위해서 하신 기도입니다.
11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믿는 사람들도 다 하나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22절에도 보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드린 기도의 목적은
제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요, 믿음의 공동체요, 생명 곧 영생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가 바로 믿음으로 하나가 된 가정 공동체요,
그들이 함께 모이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 사랑과 믿음 그리고 생명의 공동체를 세우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고,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리워 가셨고,
그리고 이제는 다시 오셔서,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믿음과 완전한 영생의 공동체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가정 온 식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
믿음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
천국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