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면 당신 나 만나줄 거야? 당연하지. 응석부리는 연인 멘트다. 열손가락도 못 채운 만남이었으나 들이대는 요청에 우정이 깊어진다. 몇 년간 가뭄에 콩 나듯 주고받은 소식에도 정이 쌓였던 모양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당당함과 속과 겉이 같은 표현방법이 부러운 문우다.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소탈한 사람이니 고급 식당 운운할 일도 아니어서 부담도 덜했다. 해가 바뀌고 겨울 햇살이 고른 날 우리 동네 전철역에서 만났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이 없던 그녀는 카드가 찍히지 않는다며 앞에 서 있는 내게 물었다. 내가 그녀를 알아본 티를 냈건만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역원으로 알았단다. 오륙년의 세월이 못 알아보게 했는지, 둥둥 싸맨 겨울여자라서 그랬는지. 한 바탕 웃고 그간의 안부를 몸으로 물었다. 여전한 것 같으나 여전하지 않음을 인정하니 적잖은 나이가 서로를 차분하게 만들어 준 것 같아 더 정겨웠다. 겨울 햇살을 등에 받으며 걸었다. 남쪽 사람이라 추워하지 않을까 염려했으나 팔짱을 끼고 걸으니 좋단다. 영하 9도라는데 체감온도는 그다지 춥지 않았다. 옷을 두툼하게 입어서이기도 했지만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라 체감온도가 올라간 것 같기도 했다. 나만의 쉼터 ‘아름다운 청승’으로 안내를 했다. 인적이 드물어 차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청승을 떨기에 똑참한 곳이다. 가지만 앙상한 회화나무 아래 낡은 벤치에 앉았다. 벤치가 낡아서 잘 어울리는 만남이다. 옅은 바람을 실은 겨울햇살에 일광욕을 즐기듯 오래 앉아 있었다. 가지만 앙상한 나무들을 소개했다. 회화나무가 느린 걸음으로 속잎을 틔우면 홍매화와 산수유가 병풍처럼 둘러서 자목련이 지는 걸 지켜본다고. 풀숲이 무성해지면 자잘한 레이스 진 배롱나무꽃에 장맛비가 뿌려질 때 청승 떨기 좋은 날이라고 말해줬다. 아름다운 청승이겠단다. 그녀는 첫 수필집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을래요?』 제목처럼 내게로 왔다. 우리가 늘 대화 끝머리에 툭 던지는 무책임한 약속 같지만, 그녀는 수필처럼 밥 한번 먹자고 먼 길을 와 주었다. 얼마나 고마운지. 그녀처럼 글과 행동을 같이 하며 살기는 쉽지 않다. 친정에 왔다가 그동안 이모저모로 소원했던 지인들을 찾아보려 한단다. 그 중에 나도 있었다고. 나는 그녀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돌아보게 된다. 그녀의 두 번째 수필집은 <비오는 날 조르바를 만나요>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문학토론을 하려 가는 날 비가 왔단다. 시간이 일러 원두막에 앉아 비 오는 걸 지켜보다가, 빗소리도 비 내리는 모습도 젖는 주변도 아름다워 약속 시간을 넘기고 말았단다. 『조르바』를 토론할 일이 아니라 『조르바』를 즐기려 약속을 깨고 말았다고. 빗속에서 조르바가 켜는 산투리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어서 멋지지 뭔가. 아마도 눈이 오면 닥터 지바고를 만나 사랑을 할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약속을 깨버리고서. 가까운 곳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고기를 구울 집게를 보고 서로 웃었다. 그녀도 나도 서툰 작업이어서다. 우리 동네이기에 의무감으로 내가 집게를 잡았다. 여전히 서툴지만 그녀도 그르려니 한다. 나는 누구를 만나 식사를 할 때마다 집에서도 안 하고 나와서도 안 한다고 선포를 한다고 했더니 그녀도 그래야 되겠단다. 늘 야무져 보였건만 기계치에 길치라고. 닮은 꼴 같아 하이파이브를 했다. 문학을 좋아하고 소탈하게 낭만을 즐길 줄 아니 기계치 길치여도 괜찮지 않겠냐며 위안을 삼았다. 찻집으로 갔다. 겨우 겹치는 추억 몇 가닥이지만 서로의 책 얘기를 하고 문학 활동하는 얘기를 했다. 비슷한 길을 걷는 중이라 소통이 수월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대화가 이어졌다. 어느 날 기차를 타고 자기를 만나러 오란다. 기꺼이 일탈의 꿈 하나에 방점을 찍었다. 그녀가 그랬듯 나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타는 날을 기대한다. 주변의 모든 일상을 접고 오직 그녀를 만나기 위해 하루를 할애할 날을 만들어 보리라. 비 오는 날 그녀의 원두막에서 조르바를 만나고 통기타를 치며 빗소리에 젖어드는 그녀의 노래가 듣고 싶다. 술에 취하지 않아도 문우에 취해 날 저무는 줄 몰랐더니 짧은 해가 저물었다. 서로에게 보여줄 것도 가릴 것도 없이 팔짱만 끼면 되는 참 좋은 문우다. 전철역으로 가며 아름다운 청승에 눈길을 주었다. 꽃들이 피고 수풀이 우거지면 그녀를 다시 초대하고 싶다. 비오는 날이면 산투리를 켜는 조르바를 만나게 해주고 낙엽이 지면 시몬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 그녀와 아름다운 청승을 떨어보기에 걸맞지 아니한가. 이젠 내가 먼저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을래요? 묻는 날을 잡아볼 참이다. 내가 가면 당신 나 만나줄 거냐고 묻지 않아도 될 문우지정이 우물처럼 깊다.
첫댓글 가지만 앙상한 나무들을 소개했다. 회화나무가 느린 걸음으로 속잎을 틔우면 홍매화와 산수유가 병풍처럼 둘러서 자목련이 지는 걸 지켜본다고. 풀숲이 무성해지면 자잘한 레이스 진 배롱나무꽃에 장맛비가 뿌려질 때 청승 떨기 좋은 날이라고 말해줬다. 아름다운 청승이겠단다....술에 취하지 않아도 문우에 취해 날 저무는 줄 몰랐더니 짧은 해가 저물었다.... 비오는 날이면 산투리를 켜는 조르바를 만나게 해주고 낙엽이 지면 시몬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 그녀와 아름다운 청승을 떨어보기에 걸맞지 아니한가. 이젠 내가 먼저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을래요? ... 내가 가면 당신 나 만나줄 거냐고 묻지 않아도 될 문우지정이 우물처럼 깊다. < 아름다운 청승> 본문 부분 발췌
사람에 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수많은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살아갑니다. 적당한 포장 속에 비루함을 감추고 적당히 우아하고 적당히 그렇듯해 보이고 싶은 욕망의 시대에 최숙미 선생님의 문우지정은 아름다운 날 것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조성순선생님의 수고로움 덕분에 저런 문우 한분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
첫댓글 가지만 앙상한 나무들을 소개했다. 회화나무가 느린 걸음으로 속잎을 틔우면 홍매화와 산수유가 병풍처럼 둘러서 자목련이 지는 걸 지켜본다고. 풀숲이 무성해지면 자잘한 레이스 진 배롱나무꽃에 장맛비가 뿌려질 때 청승 떨기 좋은 날이라고 말해줬다. 아름다운 청승이겠단다....술에 취하지 않아도 문우에 취해 날 저무는 줄 몰랐더니 짧은 해가 저물었다.... 비오는 날이면 산투리를 켜는 조르바를 만나게 해주고 낙엽이 지면 시몬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 그녀와 아름다운 청승을 떨어보기에 걸맞지 아니한가.
이젠 내가 먼저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을래요? ... 내가 가면 당신 나 만나줄 거냐고 묻지 않아도 될 문우지정이 우물처럼 깊다.
< 아름다운 청승> 본문 부분 발췌
사람에 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수많은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살아갑니다. 적당한 포장 속에 비루함을 감추고 적당히 우아하고 적당히 그렇듯해 보이고 싶은 욕망의 시대에
최숙미 선생님의 문우지정은 아름다운 날 것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조성순선생님의 수고로움 덕분에 저런 문우 한분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