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진산 팔공산(갓바위)
- 위 치 : 대구광역시 동구, 경북 경산시 와촌면
- 높 이 : 1,193m (관봉 850m)
<단체기념사진>
Ⅰ. 개황(槪況)
1. 일 시 : 2015. 6. 4. 06:00 ~
2. 나 들 목 : 갓바위주차장/팔공산자동차극장주차장
3. 참석인원 : 19 명
4. 등산코스 : 갓바위주차장-관암사-관봉(갓바위)-바른재-팔공산자동차극장주차장
5. 교통정보
- 빠른 길 찾기 정보
▶ 검 색 지 : KBS춘천방송총국 ➠ 갓바위주차장
▶ 거리 및 소요시간 : 다음지도 297,4km/3시간38분, Map 297,5km/3시간40분, Mappy 311,4km/3시간23분, 올레내비 298,7km/3시간20분
- 다녀온 길 : 중앙고속도로 가산IC-경북대로-동명사거리-파군재삼거리-갓바위로-갓바위주차장(하차)/팔공산자동차극장주차장(승차)
- 동원차량 : 강원 70바 1720 김 현 자
6. 날씨상항
◆ 오늘의 날씨
- 2015년 06월 01일 월요일 06:00 발표 경상남북도 지방 기상전망은 고기압의 영향을 받는 전반에는 대체로 맑겠으나, 후반부터는 고기압의 가장자리에 들어 가끔 구름 많겠다고 전망하였다. 기온은 평년(최저기온: 13~18도, 최고기온: 22~29도)보다 조금 높겠고 강수량은 평년(2~7mm)보다 적겠다고 하였다. 오늘은 서해상에서 동진하는 고기압의 영향을 받다가 점차 그 가장자리에 들겠으며 전국이 대체로 맑다가 늦은 오후부터 점차 구름 많아지겠다고 예보하였으므로 산행환경에 관한한 이상 없음 이었다.
7. 활동상황
○ 06:00 --- KBS춘천방송국 앞 출발(치악휴게소 경유)
○ 09:31 --- 갓바위주차장 도착
○ 09:42 --- 단체기념사진촬영 및 일정안내
○ 09:45 --- 들머리진입
○ 10:08 --- 관암사
○ 10:28 --- 용주암입구 안부, 정자각
○ 10:30 --- 용덕사입구
○ 10:49 --- 관봉석조여래좌상(갓바위)
○ 11:25 --- 문화탐방팀 관봉 하산
○ 11:53 --- 노적봉
○ 12:13 --- 구조신고처 21지점 정심식사
○ 13:01 --- 은해사갈림길
○ 13:06 --- 헬기장
○ 13:33 --- 바른재갈림길
○ 13:54 --- 대구올레반환점
○ 14:07 --- 폐가옥. 임도
○ 14:16 --- 대웅전, 봉황문 갈림길
○ 14:24 --- 동화사
○ 14:36 --- 통일대불
○ 14:45 --- 봉황문
○ 14:50 --- 매표소
○ 15:30 --- 동화사주차장
○ 15:40 --- 하산행사
○ 16:17 --- 팔공산자동차극장주차장 출발
○ 18:07 --- 군위IC진입
○ 20:45 --- 하이마트 도착(와촌, 호수카부분정비화장실, 안동, 제천임시휴게소경유)
Ⅱ. 오늘 다녀온 지역 살펴보기
<팔공산자연공원안내도>
1. 지역유래 및 특성
- 여기서는 관봉석조여래좌상이 소재한 경산시 와촌면에 대해 살펴본다. 와촌면은 고려 충목왕 때 영양군(현 영천군)에 속하였으나 영양군의 개편으로 하주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신령군 남면을 합하여 와촌면이 되었다. 현재 면소재지 덕촌리를 비롯하여 14개 리가 있다. 총면적 47.9㎢ 이며 팔공산 남동부 지역의 심장부로서 북서부의 인봉(870) · 관봉(730)이 솟아 있다. 동서로 뻗은 두 개의 평행한 산맥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며 중간을 금호강의 지류인 청통천이 관류하여 쉬염들, 구만리들 등의 비교적 넓은 평야를 형성하고 하류에서는 금호평야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교통은 경산시 · 하양읍에서 와촌면을 거쳐 영천시 청통면에 이르는 919호 도로와 동강에서 능성고개를 넘어 대구광역시와 연결하는 지방도 901호선이 개설되어 있다. 동쪽은 영천시 금호읍에 접하고 서쪽은 대구광역시 공산동, 남쪽은 하양읍 및 진량읍, 북쪽은 영천시 청통면과 경계하고 있으며 중요 사적으로는 신라 신문왕 10년에 세운 불굴사와 경내의 3층 석탑 및 신라 소지왕 13년에 극달대사가 세운 선본사가 있고 이 선본사에서 관장하고 있는 관봉석조여래좌상(속칭 갓바위) 등의 명승고적이 있다.
2. 팔공산 개요
- 팔공산은 1980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팔공산은 비슬산과 더불어 대구의 진산이다. 이 지역에서는 북팔공, 남비슬로 불릴정도로 이름이 높다. 팔공산은 삼국시대부터 공산 중악(中岳).부악(父岳) 등으로 불린 영남 지역의 명산(名山)이다. '중악'이나 '공산'의 명칭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등의 기록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공산'은 현재의 팔공산을 칭하는 것이고, '중악'이라는 것은 신라 오악(五岳)의 하나로 불리던 명칭이었다. 삼국사기」권32. <제사지(祭祀志)>에 기록된 삼산(三山)과 오악(五岳)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산악을 신격화하여 호국신군으로 받드는 산악숭배사상으로서 삼산 오악을 두었는데, 이를 대사와 중사로 표현하여 국가 최상의 제전으로 삼았다. 곧 신라의 대사삼산(大祀三山)과 중사오악(中祀五岳)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시에 확장되는 신라세력을 상징하는 신라 최고의 호국성신(護國聖神)이었던 것이다. 신라 오악이라는 것은 동쪽 토함산(동악), 서쪽 계룡산(서악), 남쪽 지리산(남악), 북쪽 태백산(북악) 그리고 중앙의 공산(중악)을 지칭한다. 이는 곧 팔공산이 통일신라의 중심지적 위치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팔공산은 신라 호국성신인 오악의 하나로서 신라의 상징적인 존재로 국가차원에서 숭배되어 온 영산(靈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령스러운 땅에 불교가 수용되면서부터는 자연히 신라불교의 성지로서 자리매김 되었으며,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원찰지(圓刹地)로서 원찰 조성과 원탑(願塔)조성 등 융성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이 흐름은 고려시대에서도 계속되어 고려의 초조대장경(初彫大裝經)이 부인사(符仁寺)에 봉안되고, 유가종(瑜伽宗)의 거봉인 홍진국사 혜영(弘眞國師 惠永). 자정국사 자안(慈靜國師 子安)은 동화사(桐華寺) 주지로서 전국의 불교를 관장하는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어 이 땅의 불교를 호령하였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도 은해사(銀海寺)가 인종태실수보사찰(仁宗胎室守譜寺刹)로, 파계사(把溪寺)가 영조(英祖)의 장수를 비는 원찰로서 조선 왕실의 보호를 받는 등 팔공산의 법등은 계속 밝혀져 왔다. 이 같은 전통으로 이곳에는 현재도 수십 개소의 사찰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불교문화의 꽃을 피우고 있다. 팔공산의 불국(佛國)은 영산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방 세력의 거점 지였기 때문에 신라. 고려. 조선 등 왕조를 달리하면서도 계속 왕실의 호위를 받을 수 있었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각 왕조의 중심적 불교문화가 지속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듯 지방 호족 적이면서도 중앙왕실적 불국으로서의 팔공산의 불교사(佛敎史)는 군위 삼존석불을 비롯하여, 동화사 .은해사 등 도처에 남겨진 불적과 현존하는 사찰들에서 그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맥을 이어온 불교의 역사와 함께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남겨져 있는 이 같은 불적들을 보노라면, 마치 이곳에 불교의 모든 사상 형태들이 포함된 듯이 보인다. 아미타신앙, 미륵신앙, 밀교신앙 등이 시대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전개되었으며, 그러한 사상에 따른 불교예술도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그래서 시간성을 배제하고 본다면 팔공산은 모든 불교신앙이 집약된 듯한 느낌을 갖는다.
인기명산 34위
-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은 산세가 수려하고 갓바위, 동화사 등 볼만 한곳도 많아 특정 계절에 치우치지 않고 사계절 두루 도시민의 휴식처로 인기가 있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 비로봉(毘盧峰)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16km에 걸친 능선 경관이 아름다우며 대도시 근교에서는 가장 높은 산으로 도시민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도립공원으로 지정(1980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 동화사(桐華寺), 은해사(銀海寺), 부인사(符仁寺), 송림사(松林寺), 관암사(冠岩寺) 등 불교문화의 성지로 유명하다
3. 탐방코스 살펴보기
팔공산자연공원탐방코스 안내는 아래 탐방코스안내도 내용으로 갈음한다.
탐방코스안내도 삽입
Ⅲ. 오늘일정 중 주요볼거리 살펴보기
- 오늘일정 중 주요볼거리 편은 등. 하산 길에 경유했던 관본사, 관봉석조여래좌상(갓바위), 동화사와 더불어 관봉석조여래좌상을 관리하고 있는 선본사를 선정하였다. 산을 즐기면서 우리 모두님들께서 발길한 곳의 역사, 지리, 문화 등을 함께 더듬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관련 자료를 모아 정리하였다. 이 부분은 뜻있는 분들께서 머물다 가는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관암사 대웅전>
- 관암사(冠巖寺)에는 천년의 고요가 살아 숨을 쉰다. 치성으로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을 꼭 들어준다는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에게 가는 길에, 관암사는 모든 중생들의 작은 안식처로 그 험난한 세월을 이겨내고 잔잔한 여운을 이어가고 있다. 관암사는 신라시대 창건한 고찰이나,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폐사가 되어 누가 언제 창건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재 관암사는 태고종 총무원장을 지낸 백암(栢巖)스님이 재창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관봉(冠峰)의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 있는 갓바위 아래에 자리하여 관암(冠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절대 진리의 힘은 그 어떤 고난에서도 빛을 뿜어내어 잠시 잠자고 있던 관암사 부처님을 깨울 수 있었다. 신라불교의 성지 팔공산 동쪽 기슭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팔공산 능선 안에 자리한 관암사의 무지개 다리 해탈교(解脫橋)를 지나면, 산신각에서 몸을 태워 피워내는 해탈향이 번뇌망상을 씻어준다. 절벽에 우뚝 솟은 범종의 법음은 팔공산 골짜기를 지나 속세에 울려 퍼지고, 중정에는 영산 팔공산에 샘솟는 감로수(甘露水)가 극락세계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준다. 관암사를 오르는 오솔길은 팔공산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만끽할 수 있어 산사로 가는 마음을 더욱 여유롭게 해 준다. 개울의 물 흐르는 소리와 벚나무, 오동나무, 단풍나무, 산목련 등의 향기로 삼림욕을 하다보면 관암사에 이르게 된다.
<선본사 전경>
- 선본사는 경북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587번지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이다. 491년(소지왕 13)에 극달(極達)이 창건하였으며, 1641년(인조 19)에 수청(秀廳)이 중창하였다. 그 뒤 1766년(영조 41)기성(箕城)이 중건하였으며, 1820년(순조 20)운암(雲巖)이 중수하였다. 1877년(고종 14)낙허(樂虛)와 월인(月印)이 각각 중수하였고, 1957년에도 중수가 있었다. 1985년 극락전을 중창하고 산신각·선방을 지었으며, 1990년에는 칠성각을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31호인 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을 비롯하여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15호인 3층 석탑, 석등대석(石燈臺石) 등이 있다. 이 중 ‘갓바위 부처’라고도 불리는 약사여래좌상은 원광의 제자 의현(義玄)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하여 638년(선덕여왕 7)에 이 여래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지성껏 빌면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지며, 영험이 많다는 갓바위 부처를 예불하기 위하여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음력 그믐날부터 새달 초이레까지는 하루 2,000명의 신도들이 참배한다. 자연석을 갓 모양으로 머리에 이고 있는 이 불상은 오랫동안 대구광역시 직인동의 태고종 사찰 관암사(冠巖寺)와 권리권을 둘러싸고 법정 시비를 벌인 결과 1971년 1월에 권리권을 확정 받았다. 또 삼층석탑은 약사여래좌상과 선본사 사이의 산릉선 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후기의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선본사 안에는 요사채 옆에 연화대석 및 석등대석이 있는데, 이들 또한 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관봉석조여래좌상(갓바위)>
- 경북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산42번지에 위치한 관봉석조여래좌상(갓바위)는 1965. 9. 1 보물431호로 지정되었다. 일명 갓바위 라고 불리는 관봉석조여래좌상은 와촌면 대한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1시간 반 정도, 갓바위주차장에서 1시간정도 올라가면 팔공산의 남봉인 관봉 해발 850m 지점에 이른다. 화강암석에 단독원각상으로 조각된 통일신라시대 9세기의 석불좌상이다. 머리는 소발(素髮)로 육(肉)계가 뚜렷하며 상호(相好)는 둥글고 풍만하다. 결가부좌한 불상의 두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파악되며, 통견(通肩)한 법의는 유려한 의문(衣紋)으로 두 팔을 거쳐 양 무릎을 덮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미간에는 큼직한 백호(白毫)가 있다. 머리 위에는 두께 15㎝의 평평한 자연석 1매를 갓 모양으로 다듬어서 육계 위에 올려놓았는데 후대의 것으로 판단된다. 좌불(坐佛)높이가 6m이다. 험준한 팔공산 관봉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벽을 배경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의현대사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팔공산 서북의 준령을 따라 북서쪽에 인봉, 노적봉과 같은 험준한 석군들이 팔공산 일대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 정상에 총 높이 약 6m의 좌불을 화강암 1석으로 원각하여 조각해 두었는데, 단형의 대좌도 동일석이고 신부의 의문이 좌대석 전면을 덮어 이른바 상현좌를 이루고 있다. 갓 모양의 자연판석을 올려놓은 머리는 육계가 뚜렷한 소발이며 두 손 모양은 석굴암 등 8~9세기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항마촉지인과 유사한데 왼손에 작은 약호를 든 것으로 미루어 약사 여래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근엄한 얼굴, 거대한 체구에 밀착되어 흐르는 통견의 유려한 옷 주름선이 선각화되어 상현좌를 이루었으니 긴장감과 탄력성이 다소 배제된 점에서 9세기의 거대한 불상군을 대표하는 걸작의 하나로 생각된다. 결가부좌한 불상의 두 손은 항마촉지인으로 파악되며, 통견한 법의는 유려한 의문으로 두 팔을 거쳐 양 무릎을 덮었으며 가슴 앞에는 군의의 띠매듭이 보인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머리는 체발하였고 육계는 작은 편이다. 미간에 큼직한 백호가 있으며 미안이 수려하고 두 볼이 풍미하여 굳게 다문 입술과 길게 늘어진 양쪽 귀로 안용이 존엄하다. 머리 위에는 두께 15cm의 평평한 자연석 1매를 갓 모양으로 다듬어서 육계 위에 올려놓았는데 3변형이다. 하면에는 원좌를 음각하여 육계와 맞게 하였으며 상면 중앙에는 같은 식의 원좌를 양각하고 그 주변에 화판을 조각하였으나 마멸이 심하다. 아마도 <갓바위>라는 속명이 여기에서 유래 된 것이 아니가 짐작된다. 이것은 불상 조성 당시의 것이 아니며 불상과 석질은 같은데 그 조각 수법이나 전체 균형 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 후대에 올려놓은 듯하다. 존용의 수려함이나 동체의 정미함에 비하여 하부의 의습이 섬약함을 느끼게 하나, 이 상의 여러 조형과 조각의 기법으로 보아 신라 중기 이후의 우수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상호와 전체가 완전한 불상이나 오른쪽 무릎의 측면 일부가 약간 떨어졌고 또 하부의 여러 곳에 약간의 균열이 있다. 선본사(禪本寺)에서 관리하고 있다.
<동화사 대웅전>
- 동화사는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35번지)에 위치한다. 동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493년(소지왕 15) 극달(極達)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하였다. 그 뒤 832년(흥덕왕 7) 왕사 심지(心地)가 중창하였는데, 그 때가 겨울철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였으므로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율사 진표(眞表)로부터 영심(永深)에게 전하였던 불간자(佛簡子)를 심지가 다시 받은 뒤, 이 팔공산에 와서 불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이룩하니 곧 동화사 참당(籤堂) 북쪽의 우물이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라 제41대 흥덕왕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심지는 중악(中岳:팔공산)에서 수도하던 중, 속리산 길상사(吉祥寺)에서 영심이 그의 스승 진표로부터 계법(戒法)을 전해받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때가 늦어 당(堂)에 올라가서 참례할 수 없었으므로 땅에 엎드려서 참례하였다. 법회 7일 만에 진눈깨비가 심하게 내렸는데 심지의 둘레 10자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신기하게 여겨 당으로 안내하였다. 여기서 그는 열심히 수도하여 영심으로부터 법통을 계승하는 간자를 받았다. 그 뒤 팔공산으로 돌아와 산꼭대기에서 간자를 날려 떨어진 곳에 절을 짓고 간자를 모셔 동화사의 개조(開祖)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극달의 창건연대인 493년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의 시기이므로 공인되기 전에 법상종(法相宗)의 성격을 띤 유가사라는 사명(寺名)이 붙여졌을 까닭이 없다는 이유로 심지가 창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많다. 창건 뒤 934년 선사 영조(靈照)가 중창하였고, 1190년(명종 20)지눌(知訥:普照國師)이 중창하였으며, 1298년(충렬왕 24) 국사 홍진(弘眞)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606년(선조 39)유정(惟政)이 중창을 하였고, 1677년(숙종 3)상숭(尙崇)이 중건하였으며, 1732년(영조 8)관허(冠虛)·운구(雲丘)·낙빈(洛濱)·청월(晴月) 등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영조 때의 중창시에 세워진 건물로서 대웅전을 비롯하여 연경전(蓮經殿)·천태각(天台閣)·영산전(靈山殿)·봉서루(鳳棲樓)·심검당(尋劍堂)·칠성각·산신각·응향각(凝香閣)·강생원(降生院)·원음각(圓音閣)·천안문(天安門) 등이 있다. 또한 부속암자로는 금당암(金堂庵)·비로암(毘盧庵)·내원암(內院庵)·부도암(浮屠庵)·양진암(養眞庵)·염불암(念佛庵)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은 1606년학인(學人)이 건립한 것을 1677년상언(尙彦)이 중수하고, 1727년천순·홍재·의회가 중수하였다. 이곳에 모셔놓은 삼존불상은 1728년에 왕준(王峻)이 만들었고, 후불탱화는 1620년(광해군 12)에 의현(義玄)이 그린 것을 1688년에 다시 고친 것이며, 이 밖에도 삼장탱화(三藏幀畵)·제석탱화(帝釋幀畵) 등이 있다. 또한 대웅전 천장의 극락조(極樂鳥)는 일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금당암은 건평 50평으로 공사비 4,900만원을 들여서 1974년 5월에 해체하여 1976년 10월에 준공하였다. 극락전(極樂殿)을 법당으로 삼고 있는 이 암자에는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 극락전 앞뜰에는 보물 제248호로 지정된 동화사금당암 삼층석탑 2기가 동쪽과 서쪽에 있다. 두 탑이 모두 고준하고 경쾌한 감을 주며, 옥개석 네 귀에 풍경이 달려 있는 등 예술적 가치가 크다. 동화사사적비문에는 이 석탑이 863년(경문왕 3)에 건립되었으며, 불사리(佛舍利) 7과가 봉안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동화사의 지정문화재로는 보물 제244호인 동화사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제247호인 동화사비로암삼층석탑, 보물 제243호인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 보물 제254호인 동화사당간지주, 보물 제601호인 달성도학동석조부도,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호인 팔공산마애약사여래좌상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동화사 입구에 있는 마애불좌상은 입구 주차장의 바른쪽에 있는 큰 암벽에 새겨진 불상이다. 이 불상은 상당히 높은 곳에 조각되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바위가 튀어나와서 불상을 보호하고 있다. 섬세한 수법과 부드러운 감각, 자비로운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구름무늬의 대좌는 표현이 지극히 사실적이다. 신라 흥덕왕 때 심지가 조각한 것으로 전한다. 또한 비로전의 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하였던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구비한 불상으로서 이것 역시 심지의 작품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 이 절에서 동남쪽으로 약 7㎞ 거리의 관봉(冠峰)에는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이 불상은 638년에 원광(圓光)의 수제자인 의현이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조성하였다. 세련된 이목구비와 자비로운 얼굴이 잘 조화를 이룬 격조높은 불상으로서 머리에 커다란 갓을 썼다 하여 갓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불상에 불공을 하고 소원을 빌면 효험이 많다고 하여 참배객들이 언제나 끊이지 않는다. 특히 아들을 낳기 위한 아녀자들의 참배와 병을 낫게 하려는 참배객이 많다. 불상의 전체높이는 4m에 달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미륵보살이 진표에게 주었고 영심을 거쳐 심지에게 전해졌다는 《패엽경 貝葉經》이 전해지고 있고, 고려의 예종이 이 《패엽경》을 빌려보다가 일부를 잃어버리자 송나라에서 전해온 부처님 어금니 1개를 대신 보냈다는 불아(佛牙), 당나라에서 만든 요령(搖鈴), 유정이 영남도총섭으로 있을 때 사용하였던 영남도총섭 인장(印章), 그 밖에 유정이 사용하였던 금강저(金剛杵)·소라고동·관수대(灌水臺)·별향로(別香爐)·구룡대(九龍臺) 등이 있다. 이 절은 한때 유정이 영남도총섭으로서 승군(僧軍)을 지휘하였던 곳이며, 서사원(徐思遠)이 격문을 지어 많은 의병들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등 호국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민족항일기의 31본산 시대에는 55개의 사찰을 거느렸던 대본산이었으나, 현재에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청도군·칠곡군·성주군의 4개군의 사암(寺庵)을 관장하고 있다. 절의 주위에는 무심봉(無心峰)의 흰 구름, 제천단(祭天壇)의 소낙비, 적석성(積石城)의 맑은 달, 백리령(白里嶺)의 쌓인 눈, 금병장(金塀莊)의 단풍잎, 부도암의 폭포, 약사봉(藥師峰)의 새벽별, 동화사의 종소리 등 공산팔경(公山八景)이 있으며, 약수암 앞 수숫골과 폭포골 사이에는 구세약수(救世藥水)가 있다.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맑고 찬 이 약수는 간장병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통일약사여래대불은 동화사의 남쪽 산자락에 1만여 평의 대도량大道場)을 조성하고, 좌대(座臺) 높이 13m를 포함하여 30m 높이의 석볼이다. 2,000t에 달하는 불상과 3,000t 무게의 좌대석은 전북 익산(益山)의 황등석(黃橙石)을 썼으며, 108명의 석공들이 약 7개월 동안 만들었다. 각계 전문가들의 고증·조언을 거쳐 조성되어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도량에 오르는 계단은 108개로 하여 백팔번뇌를 상징하였고, 석볼 맞은쪽에는 약사여래 대불을 지킬 통일대불전이 조성되었다. 지하 2층, 지상 3층, 연건평 1,200평의 규모이다. 1992년 11월 27일 대불의 점안식(點眼式)이 있었다 <자료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의 산하, 한국의 산천, 관할 지방자치단체>
Ⅳ. 오늘의 수다
<팔공산하>
- 팔공산이란 이름은 한자로 여덟 八자 공변(사가 없이 공편함)될 公자를 쓴다. 언 듯 보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름의 유래를 찾아본즉 후삼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927년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이곳 팔공산 지역에서 맞서 싸우다 왕건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신숭겸 장군이 왕건과 옷을 바꿔 입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 싸움이 공산전투이다. 팔공산에 있는 파군(罷軍)재는 왕건 군이 견훤 군에게 패배한 곳이다. 신숭겸 장군의 유적지인 표충단도 이 근처에 있다. 공산전투에서 그의 충복 8명이 전사하자 왕건이 그들을 추모하는 뜻에서 팔공산이라 명명했다는 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또한 오늘 일정 중 경유지인 팔공산의 남봉인 관봉에 평풍처럼 둘러쳐진 암벽을 배경으로 조성된 단독 원각상인 갓바위의 이름에 대해 살펴본다. 본래의 이름은 관봉석조여래좌상이지만 갓바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갓바위라는 이름은 이불상의 머리에 자연판 석으로 된 갓을 쓰고 있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갓바위는 누구에게나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속설을 간직하고 있다. 갓바위 부처님에게 정성껏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준다는 영험 많은 부처로 알려져 있어 연250만 명의 관광객과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매년 9~10월 단풍으로 곱게 물들 무렵 팔공산 자락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소원기원제, 법회, 다채로운 민속놀이, 산사음악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갓바위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아무쪼록 오늘 동행하신 모든 분들께서 각자의 소망을 빌고 그 소망을 이뤄보시라는 뜻에서 동화사지구를 뒤로 하고 갓바위지구를 우선하여 선정하였다.
- 요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때문에 나라 안팎이 시끌벅적하다. 내 탓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네 탓이다. 손가락 끝이 나를 향하지 아니하고 모두가 남을 지칭하면서 저잘 났다고 떠들어 대는 통에 TV화면을 켜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은 코로나바이러스(Coronavirus) 감염으로 인한 중증급성호흡기 질환을 이르는 말이다. 최근 중동지역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주로 감염환자가 발생하여 MERS란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중동호흡기증후군 코로나바이러스는 과거 사람에게서는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로 알려졌었는데 이 바이러스가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난국을 맞이하면서 모두를 공포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하였다. 오랜만에 호재를 만난 듯 매스컴에서 호들갑을 떨어대는 바람에 TV 화면을 켜는 것 자체가 겁이 날 정도이었다. 이런 와중에 정기산행일정을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을 작용하였다. 참석인원 20명 선을 넘기지 못한 궁색한 처지를 맞이하여 차제에 MERS를 핑계 삼아 정기산행일정 취소를 염두에 두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동안 모두와 맺은 소중한 인연과 신청하신 분들의 성원과 기대를 결코 저버릴 수 없다는 모두산악회의 굳은 신념의 발로와 더불어 이를 실천에 옮기고자하는 의지를 재천명하는 차원에서 GO!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 악재는 MERS의 공포뿐만이 아니다. 요즘 강릉을 비롯한 우리도 영동권에 최악의 가뭄이 이어지고 있다. 물 부족으로 농작물 생육이 부진한 것은 물론 파종마저 제때 이뤄지지 못하면서 본격적인 영농 철을 맞은 농민들의 가슴이 새카맣게 타 들어가고 있다. 기상청 집계 결과, 5월 강릉의 강수량은 6.2㎜로 평년 89.1㎜의 7%에 불과하고,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누적 강수량이 52.5㎜로 평년199.2㎜의 26%에 불과한 기록적인 가뭄이 이어지고 있다. 1973년 이후 42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맞아 애타는 농심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와중에 배낭 달랑 메고 산천경개(山川景槪)구경 다닌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세인의 눈총을 받아 마땅한 행동거지일 지어다. 라는 생각에 이르자 다 접어치우고 농촌 봉사활동이라도 추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렇지만 그도 마음뿐 실천에 옮길 엄두도 못 내고 주저앉고 말았다. 다만 하루속히 단비가 내려 주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오늘 갓바위 소망은 알량스럽게도 “불타는 대지에 비를 내려주소서!” 로 지향하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두 가지도 소망도 아니고 한 가지 소망이라는 점에서 개인의 소망을 떠나 모두를 위한 소망을 염원해보기로 하였다. 아무튼 오전에 몇 방울의 빗님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효험이 있기는 있네! 라면서 위안을 삼기도 하였다.
- 빠른 길 찾기 정보에 따라 목적지 도착 예정시간을 09:40분경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딱 맞아 떨어졌다. 딱 맞아 떨어졌다기 보다는 10여분 상당 앞당기는 바람에 여유롭게 일상을 열 수 있었다. 갓바위주차장은 시내버스주차장과 공용이었다. 산행일정을 짜면서 갓바위주차장을 들머리로 잡을 경우 문화재관람료를 절감할 수 있다는 점과 산행에 부담을 갖으시는 분들께서 갓바위까지 편도 2km/1시간 구간을 병행코스로 잡고 부담 없이 소화할 수 있다는 점이 나들목 선정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오늘은 우리 카페를 통하여 예고한 대로 기본코스(산행 팀 13명) 외에 갓바위주차장 – 관암사 – 관봉까지 편도 2km / 1시간 구간 병행코스(문화탐방 팀 6명)로 팀이 나뉘었다. 문화탐방팀은 관봉적조여래좌상(갓바위)까지 올라갔다가 갓바위주차장까지 원점회귀 해야 하기 때문에 갓바위주차장에 버스가 일정시간 대기하고 있다가 동화사주차장으로 다시 이동해야하는 번거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그 바람에 장거리 운행 후 한 자리에서 푹 쉬어야 할 기사님께서 제대로 쉬시지도 못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무박일정이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삼기는 하였지만 죄송스런 마음 금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동화사주차장을 들머리로 나들목을 바꾸는 데에는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문화재관람료가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 주차장을 벗어나면서 팔공산자연공원안내도가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 지점에서 오늘 일정 운영에 대한 보충설명을 마치고 들머리에 들었다. 들머리에서 100여m 올라가면서 관암사로 올라가는 길 오른편 계곡건너로 탐방로가 나 있었지만 상류 특정지점에서 합류할 것으로 판단하고 관암사까지 도로를 이용하였다. 어차피 관암사는 경유할 요량이었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관암사 구간 1,1km 어간은 요소요소에 쉼터와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팔공산자연공원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 관암사 경내를 대충 둘러 보고난 후 합장한 채 탑 주위를 맴돌면서 주문을 외고 있는 중생 중 곱게 연세가 드신 중생 한 분에게 접근하여 어설프게 합장하고 정중히 배꼽인사를 올리고 나니 어인 영문이냐는 듯 빤히 처다 보시면서 발걸음을 멈추시는 것이었다. 다짜고짜 갓바위 가는 길이 어디냐고 퉁명스런 질문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별놈 다보겠네. 라는 답변이 나올 법도 하였지만 불자다운 친절을 베푸시면서 대웅전 아래 계곡방향으로 올라가도 되고, 대웅전 뒤편 계곡으로 올라가도 된다는 답변을 주셨다. 관암사에서 관봉까지는 0,9km에 불과하기 때문에 진로를 어느 방향으로 잡든 지간에 문제될 것이 없었다. 현 위치가 대웅전 바로 앞인 점을 감안하여 대웅전 뒤편 길로 부담 없이 진로를 잡았다.
- 대웅전 뒷문을 빠져나오자마자 들머리에서 100여m를 지나면서 갈렸던 탐방로와 합류하였다. 관암사로 이어지는 도로로 올라오지 아니하고 탐방로로 올라오면 이 지점에서 합류한다. 탐방로가 관암사를 비켜갈 수 있도록 개설되었던 것이다. 대웅전에서 15분쯤 오르면 다소 부담스러운 사면길이 끝나면서 고갯마루 안부에 이른다. 안부에는 정자각이 있어 쉼터로 기능하지만 이미 선점하고 노닥대시는 탐방객들로 만원사례이었다. 잠시 머물면서 눈치를 살펴본즉 방을 빼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좀 쉬어갈까 하고 머뭇거리다가 그냥 단 참에 올라가기로 마음먹고 발길을 옮겼다. 여기서 관암사 0,5km, 대한리 2,0km이다. 그렇다면 관봉까지 0,4km 남은 셈이었다. 그렇지만 관봉 1,8km란 이정표가 버젓이 세워져 있어 혼란을 부추겼다. 여기서 진행방향 오른쪽은 용주암 입구이고, 곧이어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용덕사 입구가 나온다. 용덕사 입구에 군밤장수가 성업 중이었다. 공짜로 맛보기 밤톨 한 알을 얻어 챙기기는 하였지만 그냥 돌아서는 바람에 죄를 지은 듯 뒤통수가 근질거림을 감수해야만 했다. 공짜로 한 알 챙긴 것이 내내 부담스러웠다. 용덕사입구에서 10여분 남짓 오르면서 관암사 대웅전 아래 샛길과 합류하였다.
- 용주암 입구 정자각에서 쉬엄쉬엄 20여분 오르면서 관봉 정상에 도착하였다. 관봉석조여래좌상 앞 기도처는 그야말로 발들이여 놓을 틈 없이 만원사례이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비는 기도 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던 것이다. 한 가지 소망을 이루기 위한 그 분들의 피나는 노고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관봉 정상에는 유리광전과 불연각이 있다. 기도용품 판매점 앞에 자리 잡고 일행 분들 인증 샷을 남기는 데에도 혼란을 감수해야만 했다. 얼마나 시끌벅적한지 관리요원으로부터 여기는 기도처입니다. 제발 조용히 좀 해주세요. 라는 간곡한 당부가 있었지만 막무가내이었다.
- 관봉 정상에서는 팔공산의 최고봉이면서 주봉인 비로봉이 팔공능선을 따라 아스라이 건너다보였다. 비로봉 좌우로 동봉과 서봉이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편 것처럼 뻗쳐있다. 정상의 남동쪽으로는 염불봉, 태실봉, 인동, 노족봉, 관봉 등이 연봉을 이루고 서쪽으로는 톱날바위, 파계봉, 파계재를 넘어 여기서 다시 북서쪽으로 꺾어져 멀리 가산을 거쳐 다부원의 소아현에 이르고 있다. 특히 동봉 일대는 암릉과 암벽이 어울려 팔공산의 경관을 대표하고 있다. 동쪽의 은해사, 남쪽의 동화사, 서쪽의 파계사 및 북쪽의 군위, 삼존석굴(국보 109호) 이외에도 많은 문화유적이 산재해있고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가 많다.
- 여기서 산행 팀을 먼저 출발시키고 문화탐방 팀과 합류하는 동안 20여분 머물렀다. 그동안 대구 동구일원과 경산시 와촌면 일원 조망을 즐기면서 갓바위에서 동봉까지 7,3km남짓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연장운영하지 못한 점에 대해 아쉬움을 곱씹어야만 했다. 인증 샷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처음부터 발걸음을 서둘렀다면 바른재에서 동봉까지 3,9km 구간을 넘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에 이르면서 더욱 아쉬움이 컸다. 한편 이를 알고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점에 대해 나도 이젠 예전의 나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면서 더욱 작아지고 나약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천둥에 개 뛰듯 싸 돌아치던 때가 참 좋았는데 하는 상념에 이르면서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 무렵 문화탐방 팀 일행 분들이 한 분 두 분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그제야 안내도우미 주제에 그건 아니지? 시방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여? 그렇게 무리해가면서 대열을 일탈하여 동봉에 발도장을 찍으면 누가 상주나? 라는 생각에 이르면서 이내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 11:25을 넘기면서 문화탐방 팀과 헤어져 동봉 방향으로 진로를 잡고 나 홀로 탐방 길에 올랐다. 정상에서 동봉 가는 길은 두 갈래이다. 불연각 앞에서 능선으로 진입해도 되고 선본사 방향으로 진입하여 접근할 수도 있다. 현 위치가 기도접수처 앞인 점을 감안하여 해우소 50m지점을 안내하는 방향으로 들어섰다. 앞서 가신 일행 분들 역시 이 길로 안내하였다. 하산 길 내리막 돌계단에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총무님으로부터 무선호출음이 산사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다짜고짜 대장님! 이 길이 맞아요? 라는 다급한 일성이었다. 나도 초행길인데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얼떨결에 나온 답변이 저는 가능하면 선본사를 경유하여 갈려고 합니다. 시방 막 출발하였습니다. 라는 답변이 고작이었다. 총무님께서는 이 길이 맞느냐? 안 맞느냐? 에 대한 답을 구했는데 동문서답이 되고 말았다. 혹시나 길을 잘 못 들었나 싶어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마음만 급했지 발걸음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드디어 50여m쯤 내려가면서 이름을 알 수 없는 기도처 건물이 나왔고 여기서 다시 50여m쯤 내려가면서 연이어 기도처 건물이 나왔다. 정상의 혼잡한 상황보다는 고요한 분위기가 무겁게 깔려있어 발걸음이 저절로 고양이발걸음이 되고 말았다. 그 무렵 그 지점에서 구세주를 만났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죽으란 법은 없구먼. 이란 속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 지점에서 관봉 0,1km, 선본사 1,0km를 안내하는 이정표를 만났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그렇다면 총무님께서도 이 지점에서 진로를 제대로 잡을 수 있었다는 점과 100여m 정도 지근거리 에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 그런데 문제는 선본사가 예상했던 것 보다 원거리에 있다는 점이었다. 선본사에서 동봉방향 탐방로가 있으면 다행인데 이 지점까지 되돌아와야 하는 상황이라면 왕복 2km가 부담으로 작용할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노릇이었다. 예전에는 못 올라 갈 나무는 처다 보지도 말라고 하였지만 요즘은 못 올라갈 나무는 사다리 놓고라도 올라가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여유 있게 시시비비 논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쉽게 NO로 결론을 내렸다. 만약 선본사를 경유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면 선발팀과의 합류 자체를 포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 갈림길에서 동봉 방향으로 진로를 잡는 순간 뒤에서 갑자기 아저씨! 하는 다급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즉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 한 분이 계셨다. 주변에 본인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런데 본인 말고 다른 분이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본인을 찾는 것이 분명하였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라고 다급히 말을 건네자 이 길로 가면 어디로 갑니까? 라는 질문이 곧바로 날라들었다. 말씨로 보아 이 지역 분이 분명하였다. 또한 갈림길에 이정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간과하였는지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저씨 이 길로 가면 동화사나 동봉 방향으로 가실 수도 있고 능선에서 갓바위를 거쳐 관암사로도 갈 수 있습니다. 라고 친절히 안내를 마치자 그럼 동봉으로 한 번 가 볼까? 하는 답변을 남기면서 얼버무리고 말았다. 서로 아저씨라는 표현을 쓴 것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결례를 한 것 갔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본인이 보기에는 그 분이 저보다 한 수 위로 보였는데 그 분께서 보기에는 본인이 한 수 위로 보였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럼 내가 그렇게 늙었단 말인가? 란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기운이 다운되면서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이내 아니 내 나이가 어때서? 산행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를 강변하면서 얼 차리기에 들어갈 수 있었다.
- 능선안부를 코앞에 둔 지점에서 총무님과 합류하여 동행하였다. 곧이어 능선안부에 이르자 동봉 6,7km, 관봉 양 방향 각0,6km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왔다. 이리가나 저리가나 관봉 0,6km인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난이도 면에서 비교되었으리라 본다.
- 노적봉직전 전망바위에 이르면서 선발팀과 합류하였다. 산행 팀 모두가 통제권에 들어오면서 마음이 느긋해 지면서 여유가 생겼다. 노적봉 바로 아래 바위동굴을 빠져나가면 노적봉 암봉으로 올라가는 샛길이 있다. 이미 노적봉 암봉에 올라 조망을 즐기는 산객들을 올려다보면서 부러운 눈초리를 보내면서 심적 갈등을 느껴야만 했다. 그 분들이 올라간 길을 찾아 노적봉 정상 탈환을 염두에 두기도 했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위험부담을 안고 무리수를 두는 것 보다는 올려다보면서 대리만족하고 시간을 벌자는 쪽으로 이내 마음이 굳어졌던 것이다. 여기서도 마음약해진 본인의 모습을 여실히 엿볼 수 있었다.
- 긴급구조신고처 제21지점 안부에서 밥자리를 폈다. 앞서가신 한 분을 제외하고 12명 단출한 식구가 각 6명씩 두 팀으로 나눠 먹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출발하면서 맨 앞에 자리를 잡고 진로를 선도하였다. 대충 짐작해도 20분 이내에 바른재갈림길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상했던대로 은해사갈림길. 헬기장을 지나면서 이내 갈림길이 나타났다. 그런데 문제는 이정표에 바른재라는 표식이 없어 판단을 흐리게 하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화사 이정이 표기된 점으로 봐서 바른재가 분명하였다. 이 지점에서 대기하고 합류하여 동행할까 하고 망설였지만 동화사 경내를 두루 살펴보겠다는 일념으로 평소 잘 사용하지 아니하고 지니고 다녔던 구겨진 진로안내표식지를 오랜만에 깔아놓고 동화사방향으로 진로를 잡고 발길을 서둘렀다. 바른재갈림길에서 관봉 3,4km, 동화사 3,4km, 동봉 3,9km이다.
- 바른재에서 30여분 내려오면서 앞서 출발하셨던 한 분과 합류하였다. 갑자기 계곡이 깊어지면서 인적이 드물었던 계곡에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마당바위로 불릴만한 넓은 암반 명당을 자리 잡고 왁자지껄 계곡이 떠나갈 듯한 웃음소리를 터트리면서 잡기놀이에 정신이 팔린 정신 나간 산객 한 패거리를 만났던 것이다. 하필이면 여기까지 와서 한다는 짓거리가 화투장이나 들여다보면서 고 스톱을 즐길 것이 뭐람 이라면서 속말로 불만을 토로해 보았지만 내 입만 더러워질 뿐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발길이 더울 빨라졌다.
- 14:07을 넘기면서 예전 산장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는 폐 가옥을 지나면서 차량통행이 가능할 정도의 임도가 나왔다. 이 도로는 대웅전, 봉황문갈림길까지 이어졌다. 무조건 대웅전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학사 경내로 접어들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절의 규모가 컸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부처님오신 날을 맞이하여 걸린 연등이 아름답게 빛을 발하면서 오늘따라 연등행렬이 더욱 눈부셨고 그 어느 때 보다도 돋보였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경내는 쥐죽은 듯 고요하였다. 도적질하듯 서둘러 한 바퀴 휙 돌아보고 통일약사여래대불이 세워진 108계단 방향으로 진로를 잡았다. 통일약사대불 앞 광장에 이르면서 총무님으로부터 무선호출이 요란하게 울렸다. 첫마디가 큰길에서 대웅전이 얼마나 걸려요? 라는 물음이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10분이란 응답이 저절로 나왔다. 본인이 큰길 갈림길에서 정확히 8분 걸렸기 때문에 2분을 보탰던 것이다. 저는 그냥 내려갈래요. 란 답변을 들으면서 무선교신이 끝났다.
- 봉황문에 이르면서 총무님으로부터 무선호출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또 뭐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무전기를 꺼내고 나니 대장님! 주차장이 여기가 아니래요? 주차장까지 20분이나 걸린대요? 이를 어쩌면 좋아요! 라는 넋두리가 김샌 목소리로 흘러나왔던 것이다. 현 위치를 확인해 보니 매표소이었다. 봉황문에서 매표소까지 5분 거리였다. 매표소에 도착해 보니 예전에 가끔씩 대구댁이란 이름으로 정기산행에 동행하시던 김 랑 경님 내외분께서 위문품을 잔뜩 준비하고 현장에 대기하면서 일행 분들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고맙고 눈물 나는 상봉이었던가. 감격! 감동! 바로 그 자체이었다. 그러나 상봉의 기쁨도 잠시 뒤로하고 시급한 당면 현안을 해결해야만했다. 일단 현 위치에 자리 잡고 후미 일행이 도착하는 대로 주차장에 대기 중인 버스를 부르는 방안에 의견이 모아졌다. 그 무렵 이 금 숙 남춘천산오름산악회장님의 지인이신 미소님께서 위문품을 싣고 현장에 도착하셨던 것이다. 수 백리 타향에 와서 감격의 상봉! 환희의 상봉! 이 연이어지면서 기분이 한껏 업 되었지만 하산일상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아니한 점에 대해 심기가 불편해 지면서 희비가 엇갈렸다.
- 죽으란 법은 없었다. 본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분들의 평소 쌓은 덕행을 가늠할 수 있는 순간을 맞이하였다. 미소님께서 제가 몇 번을 왕복하는 한이 있더라도 팔공산자동차주차장까지 이동을 책임지시겠다는 제안을 하시면서 서둘러 승차하라는 권고가 떨어졌던 것이다.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그 분이 바로 구세주였던 것이다. 2회를 왕복하고 나머지 5명은 시내버스로 주차장 인근까지 이동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일상을 갈무리하였다. 위 두 분의 노고와 위문에 깊이 감사드린다.
- 오늘하산행사는 텅 빈 팔공산자동차극장주차장을 전세 내어 호젓하고 풍성하게 치렀다. 김 랑 경 대구댁께서 준비해 오신 막걸리, 바나나, 얼음과자와 미소님께서 준비해 오신 수박과 박카스가 곁들여 졌는가 하면 김 기 자님께서 손수 주워 쑤신 도토리묵무침이 인기를 끌었다.
- 오늘 문화탐방 팀에서는 예정에 없던 팔공산케이블카를 타고 팔공산하 구석구석을 조망하는 영광을 누렸다. 팔공산케이블카는 경사가 있고 긴 코스이기에 경치를 구경하면서 동시에 스릴도 함께 누릴 수 있다. 케이블카 정상역은 신림봉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로봉 정상에 있는 제천단과 동쪽 갓바위 부처님과 함께 기복신앙의 대표적인 장소이다. 케이블카 정상역은 제천단과 대구월드컵경기장과 일직선상에 위치하며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형상에서도 몸통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풍수 지리적으로도 아주 좋은 기운을 가진 곳이다. 문화탐방 팀의 빛나는 행적에 박수를 보내면서 앞으로도 변함 없는 파이팅을 주문하는 바이다.
- 오늘 귀로는 군위군지역에서 정상진로를 벗어나 헤매는 바람에 상당시간 지체하였다. 산행으로 치면 알바를 한 셈이다. 며칠 전 서울발 광주행 고속버스가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7시간30만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바람에 난리법석을 떨었다는 기사를 접했었는데 오늘 우리도 예정에 없던 체험을 겪었다. 16:17에 팔공산자동차주차장을 출발하여 18:07에 군위IC에 진입하면서 사태가 수습되었다.
- 오늘 천리타향에서 환희! 감격! 감동! 주신 김 랑 경 대구댁과 미소님 그리고 일정운영에 협조해 주시고 도움 주신 모든 분들에게 에게 깊이 감사드리면서 팔공산 갓바위코스 일상정리를 여기서 마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Ⅴ. 특기사항
- 김 기 자님 도토리묵무침 협찬
- 함 길 홍님 쑥떡 협찬
- 김 랑 경(대구댁) 얼음과자, 바나나, 불로막걸리 협찬
- 미소(이금숙 남춘천산오름산악회장님 친구) 수박, 박카스협찬, 매표소에서 팔공산자동차극장주차장까지 일행 분들 이동 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