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말씀 / 마태복음 1:18-25
요절 / 마태복음 1:123, 찬송가/105장
90초룰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얼마 전, 일본하네다 공항에서 비행기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충돌한 비행기는 곧바로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JAL에 탄 379명 전원이 탈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44인승이상의 비행기는 사고발생시 모든 승객이 90초 이내에 탈출할 수 있도록 비행기를 설계해야 하고, 이를 훈련해야 한다는 메뉴엘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메뉴엘이 있을지라도 실제로 그것을 그대로 잘 따라서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위기의 때에 그 매뉴얼을 따름으로 모두 다 안전하게 대피하였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만 아니라, 내 인생에도 90초룰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90초가 아니라 90년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매뉴얼을 제공합니다. 마태복음이 내 인생의 90초룰이 되어 나를 구원하는 매뉴얼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님은 다윗왕의 후손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다윗 왕의 후손이 될 수 있는가를 오늘 말씀은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전합니다. 여기에 담긴 내 인생의 90초 룰, 구원의 매뉴얼은 무엇일까요?
1장,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18-20)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족보의 중심은 다윗입니다. 다윗을 중심으로 열네 대로 역사를 나눈 것도 그러하고, 무엇보다 다윗만을 ‘다윗 왕’으로 표현한 것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다윗왕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어떠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우리는 성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성탄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화려하게 기념합니다. 그런데 마태가 전하는 성탄은 아주 심각한 분위기에서 시작합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혼전임신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요셉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유대에서는 보통 아이가 서너 살 때에 부모들이 서로 결혼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12,3세가 되면 정혼을 합니다. 그렇게 정혼을 하면 법적으로 부부입니다. 그래서 남편 요셉, 아내 마리아 라고 부릅니다. 이 정혼 후에 혼인잔치를 하고 부부로 살기 시작합니다. 지금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이것을 부모들도 알고 양쪽 집안이 다 알고 온 동네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혼하고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이 터진 것입니다. 정혼은 ‘거룩’ 즉 ‘구별된다’는 말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이것은 정혼을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위하여 특별하게 구별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혼기간에 바람을 피는 것은 간음과 같이 취급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처벌에 가장 무거운 형벌은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화형이나 교수형보다 무겁습니다. 정혼한 여인이 간음을 한 경우에는 돌로 쳐 죽이도록 했습니다. 그만큼 무섭게 다루었습니다. 마리아가 정혼한 상태에서 아이를 잉태하는 것은 요셉만이 아니라 온 가족 공동체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위기상황입니다.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데, 약속정도가 아니라 결혼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느 날 마리아가 이상합니다. 이미지도 달라지고 그렇게 좋아하던 카페라테가 아니라 토마토 쥬스를 주문합니다. 같이 식사하다 헛구역질을 하기도 합니다. 뭔가 단단히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리아가 이야기 했겠죠? “요셉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핑계를 대도 하나님께 대냐고 더 화를 내지 않았을까요?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해하고 따지고 할 것도 없이 당장 파혼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리아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하는 배신감에 흥분하고 분노할 것입니다. 더구나 온 집안이 얽혀 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그냥 지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요셉은 마음이 상했지만 점잖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좋게 말하면 good man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요, 굳 맨인 것 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의롭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요셉은 이 문제를 자신의 감정이나 어떤 상황을 따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선한 길을 찾았습니다. 그때 그가 생각한 최선의 길은 이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파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셉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요, 의로운 판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마리아가 낳은 아들이 요셉과 전혀 상관없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다 틀어지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바빠지셨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천사를 요셉에게 보냅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나타나 전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요셉이 생각하는 마리아의 부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를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유대인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뚝 끊겼습니다. 400여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잉태를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뭔가 구체적으로 일하시기 시작하셨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 가운데서 새롭게 드러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이런 상징적인 뜻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람의 혈통을 따라 나신 분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대리모 역할만 했습니다. 죄인은 죄인을 잉태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가운데 나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자신을 드릴 준비가 되신 가운데 오셨습니다. 4월 국회위원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을 저마다 자신이 준비된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전혀 준비가 안 되어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우리를 구원할 준비된 구원의 주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2장,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 성경의 ‘예호슈아, 호쉐아’라는 이름과 같은 이름입니다.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예수’가 되었는데 정확히 하면 ‘예슈아’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는 이 이름은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아들들에게 주어진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들들에게 이 이름을 붙여 메시아를 대망하는 간절함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통상적으로 기대하는 구원은 죄로부터 구원이 아니라 로마의 압제로부터의 구원이었습니다. 일종의 정치적인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는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 데 그것도 ‘자기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그 백성의 범위가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기 백성’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받은 이스라엘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른 믿음의 후손들을 말합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주고자 하시는 것은 죄에서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고민은 예수님이 과연 내게 해 주실 것이 무엇인가? 또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은혜를 받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백성’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뭔가라도 받으려면 먼저 ‘자기 백성’의 범위에 들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일차적인 관심은 ‘자기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내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기 백성’인가? ‘믿음’의 사람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나를 무엇보다 나의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조건이고 제한입니다. 2030세대의 가장 큰 관심은 일자리와 주거문제라는 통계조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이 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온갖 정책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4050 세대가 불만이 많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이 일자리와 주거문제를 잘 해결하면 모든 인생문제가 끝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생문제는 산 너머 산입니다. 강 건너 또 강입니다. 요즘 MBTI로 자신을 분석하고 상대를 파악하는 것이 인기입니다. 유튜브를 보면, MBTI가 어떻게 되시나요? 라고 묻는 질문을 자주 보게 됩니다. 어떤 국회위원은 자신의 프로필에 자신의 MBTI가 ENTJ라고 당당히 밝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자신의 MBTI를 알고, 상대방의 MBTI를 잘 파악하면 문제가 잘 해결되나요? 저는 목회상당모임에서 MBTI보다 더 역사가 깊고 정교하다는 에니어 그램을 잠시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신기하고 뭔가 길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제 문제도 보이고, 정연 사모님의 문제도 명확하게 보이는 것 같고,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까지 보였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입니다. 상담자에게도 방향은 제시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왜죠? 사람은 MBTI나 에니어 그램으로 분석하고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줄 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때론 너무 단순하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수많은 분석과 이론이 있지만 결국 답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헐리우드 영화, 어번져스 시리즈처럼 이런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스토리는 단순합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이 아닌 초능력을 가진 구원자가 나타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 깨끗한 이미지로 정점에 올랐던 유명배우가 마약 사건으로 조사를 받아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어쩔 수 없다. 이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 같다.”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그 배우만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의 한계입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내 문제를 내 스스로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벤져스의 히어로즈들이 다 모여도 해결 못하는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그 이상의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절망의 상황에서 나를 이끌어줄 90초의 룰이 필요합니다.
천사가 전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이 분이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의 진정한 영웅이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 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자, 그는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밖에 방법이 없는 인생이 아니라, 이것이 방법인 인생이 됩니다. 이 예수님에게 구원을 얻는 복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처음으로 불면증에 시달릴 때가 군 병장시절이었습니다. 군에서 병장이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의 때입니다. 속된 말로 농땡이를 까도, 간부들이 눈 감아 줍니다. 왜, 그동안 고생 했으니까? 그런데 바로 행복의 때에, 저는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왜냐하면 휴가를 나가 2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3년간 사귀던 여친이 고무신을 꺾어 신고 캠퍼스에서 연하남과 데이트를 하고 있는 모습을 다 눈으로 똑똑히 보고야 말았습니다. 또 하나는 도서관에 불빛이 밤새도록 꺼지지 않고 켜져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친구의 말로는, 요즘은 예전처럼 술 먹고 흥청망청 하는 친구들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도서관에 가서 전공공부, 영어공부, 취업공부...등 열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여친에 대한 배신감으로 그리고 학생 운동 하느라, 연애 하느라 공부를 안 해, 학점이 별로 있데, 과연 졸업 후 취직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밤마다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자살은 무서워서 못하겠고, 인생 패배자로서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나 들어가 혼자 살고 싶었습니다. 일본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절망의 때에, 군에서 UBF목자님을 만나 성경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성경를 공부하고 예수님을 만나는 이 방법이 있었습니다. 지금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계십니까? 절망의 길을 걷고 계십니까? 이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는 이 방법이 있습니다.
3장,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22-25).
천사는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22).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23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이사야 7:14절의 인용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강대국으로 성장한 앗수르에 위협을 느낀 북이스라엘은 몇몇 나라와 동맹을 맺어서 이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남유다에게도 이 동맹에 가입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앗수르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유다 왕은 이 동맹에 가입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이 유다를 공격하였습니다. 군사력에서 도저히 당할 수 없었던 유다의 아하스 왕과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서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처럼 떨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유다 왕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마라. 타다 만 연기 나는 부지깽이와 같은 저들 때문에 겁먹지 마라. 저들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한다”(사 7:1-7). 하지만 아하스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도록 표적을 직접 주십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본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남쪽 유다를 구원할 징조로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말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남쪽 유다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사람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법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단순한 구원의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을 구원하신다는 메시아 예언이요, 또 이들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예언이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처녀인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시는 아이의 별명이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임’(함께, with), ‘마누’(우리, us)와 ‘엘’(하나님, GOD)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임마누엘 주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임마누엘 예언의 말씀 뒤를 계속 읽어보면 “그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사7:15)고 하였습니다.
임마누엘 주님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이 꿈꾸었던 ‘젖과 꿀을 먹는 시대’ 궁극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 주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공간은 출애굽기 때에는 성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에는 성전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베푸신 가장 큰 은혜는 그냥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죄를 없애 주시고, 나를 의롭게 해주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그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막이 되시고 성전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주시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임마누엘 주님을 통해서 젖과 꿀을 먹습니다. 과거 우리의 인생은 죄로 인해서 쓴 물을 마시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꿀 빠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처녀인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이 태어나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21)은 임마누엘로 예언된 말씀의 성취입니다(22). 무엇보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뿐 아니라 함께 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꿀빠는 인생을 살게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임마누엘 예수님 때문에 감사와 찬양이 우리의 노래요 기쁨이 됩니다. 마태복음의 맨 마지막은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임마누엘의 약속으로 끝납니다. 마태복음은 임마누엘로 시작해서 임마누엘로 끝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으로 시작해서 임마누엘 주님으로 끝이 납니다. 목자가 늘 양과 함께 하듯이 우리를 보호하며 지켜주십니다. 이 은혜를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임마누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래위의 발자국’이란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다.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이었다. 그는 모래 위에 난 두 사람의 발자국을 보았다. 하나는 그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었다. 자기 인생을 추억해 보니 그 때는 자기가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섭섭한 마음이 든 그는 주님께 물었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 늘 저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런데 제가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당신은 어디 계셨나요?”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자녀야, 나는 너를 결코 버려둔 적이 없다. 시련과 고통의 순간에 네가 보았던 그 발자국은 힘들어 하던 너를 업고 걸었던 바로 내 발자국이었단다.” 인생의 여정을 돌아보면, 임마누엘의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힘든 인생길을 갈 때는 우리를 업고서라도 함께 해 주십니다.
대학 졸업의 때, 제가 전도한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저의 학과 친구였는데, 그해 여름 수양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캠퍼스에 남아 더 훈련받고자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원 진학이 요즘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보통 경쟁률이 5대1-10대1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영어와 전공 시험을 보는데, 전공시험은 주로 족보에서 나오기에, 족보를 달달 외우면 어느 정도 잘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어 시험이 너무 어려워, 많은 학생들이 영어 시험에서 떨어집니다. 이 때문에 시험 전날,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었습니다. 저는 그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을 읽고 같이 기도했습니다. 임마누엘 주님이 그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처럼, 이제는 대학원 시험장에서도 그와 함께 해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 후, 그는 저에게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임마누엘 주님은 그와 함께 하셔서 그의 마음에 평안을 주실 뿐 아니라 대학원 시험에도 합격하게 해 주셨습니다. 저의 삶은 순간 순간, 힘든 순간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제가 30년 전, 임마누엘 주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해야겠습니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30년 전, 친구의 대학원입학 시험이란 큰 시험 앞에서 그와 함께 해 주셨던 것처럼, 오늘 지금 저와도 함께 해 주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저와 함께 해주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사자가 분부대로 아내를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낳은 후에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24,25). 요셉이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수 있었고, 또 예수님도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드러나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 시대, 우리가 바로 요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이 내 안에 임하고, 또 나를 통해 드러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