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생간]이 돈암서원 초창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기초 자료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김집, 송준길, 송시열 세 분 선생이 원장으로서 서원의 유사에게 서원에서 간행하던 [상례비요]의 교감을 한다거나 서원의 운영이나 문제점들에 대해서 조언을 하고 지시하는 간찰들을 모아서 첩으로 만든 것이다. 이 간찰첩의 운명은 19세기 후반 서원이 홍수로 침수되었을 때 일차적으로 손상을 입었다. 그러다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서원 밖으로 나와서 상당히 많은 간찰들은 절취되어서 낱장 간찰로 매매가 되고 지금은 반 남짓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모 수집가의 컬렉션이 시중에 나오면서 그 중에서 신독재의 간찰 한 점과 사계 간찰 한 점을 발견하였다. 다행히도 서원 원장에게 연락이 되어서 그쪽으로 들어가게 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모 옥션에 몇 년 전에 나왔던 우암 간찰 한 점도 이 간찰첩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같이 소개해둔다.
먼저 사계 간찰이다.
[鄭校理 姜佐郞 僉侍史]
戀想中 連承/兩書 知一家平安 深慰沈慰 此處幷依/舊 但以徭役極困 不能支堪 可悶可悶 [前]/示鄭元溟家婚事 甚可合 須/圖之 且近處他家亦訪問示及 聞/彼地旱乾 尙未下雨乎 雨水適中 農/事甚好矣 所示記事 前者已/送于敬叔 未知得達否 林公直以子病/爲擾 此人命薄 爲百事所侵 可憐可/歎 君之小學印紙 面見完尹給之/ 他冊印送 而其冊不送 恐有失之之患/ 再再問之 時未回報 可怪 喪禮備要幾/盡刻之 圖十五六丈未刻 不得印出/ 梁監軍多所求請 近欲渡海還/云 其人不足數也 奴賊有渡江之言/ 城中有時疑惧云 切欲見/公 農務方急 彼此不得出入 奈何 伏惟/下照 謹拜狀
壬五月初六日 長生 拜
前月晦哭奠而中于尼山 可慟 此友年過七十 得其死所 無復餘憾 見其子問之/ 號哭累日不食 得病而死 尤爲悲悼
[정 교리, 강 좌랑 여러분께]
그리워하던 중에 연이어서 두 통의 편지가 와서 일가가 평안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매우 위로가 됩니다. 이곳은 모두 의구합니다. 다만 요역이 매우 피곤하여 견딜 수가 없으니 매우 걱정입니다.
전에 말씀하신 정원명 집의 혼사는 매우 적합한 것 같습니다. 꼭 성사시키십시오. 또 근처의 다른 집들에게도 방문하여 알리십시오. 들으니 그곳은 가뭄으로 건조하다는데, 아직도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까? 비가 딱 맞게 오면 농사가 매우 좋습니다.
말씀하신 기사는 전자는 이미 경숙(象村 申欽의 字)에게 보냈는데 도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임공직(공직은 林檜의 字)는 아들 병으로 걱정이라는데, 이 사람은 박명하여서 여러 일들이 침해되니 가련하고 안타깝습니다.
군의 소학 인쇄용 종이는 완윤(전주부윤)을 만나서 주었습니다. 다른 책은 인쇄해서 보냈는데 그 책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렸나 걱정이 있어서 재삼 물어보았지만 아직도 회보를 하지 않으니 괴이합니다. [상례비요]는 거의 다 판각을 했고 그림 15~6장은 아직 판각을 하지 못하여 인출할 수가 없습니다.
梁監軍(梁之垣)이 많이 求請하는 것 같은데 근일에 바다를 건너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신경 쓸 게 없습니다. 奴賊이 도강한다는 말이 있어서 성중에 때때로 매우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정말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만 지금 농사일이 급하기 때문에 피차간에 출입을 할 수가 없군요. 어찌합니까? 살펴주십시오. 삼가 절하고 편지를 씁니다.
임술년(1622, 광해군14) 5월 초6일 장생 배
전달 그믐에 而中(金權)을 尼山에서 哭奠하였으니 애통합니다. 이 친구는 나이가 칠십을 넘어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다시 유감은 없습니다. 그 아들을 보고 물으니 여러 날 호곡하고 먹지 않다가 병은 얻어 죽었다고 하니 더욱 비통합니다.
이 간찰은 김장생이 1622년(광해군14)에 정 교리, 강 좌랑에게 보낸 것이다. 임년은 1622년 임술년으로 추정된다. 본문에 나오는 [상례비요]의 서문을 쓴 것이 만력경신년(1620)이고 상촌 신흠이 발문을 쓴 것은 천계원년(1621)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신의경이 편찬하고 김장생이 윤문을 하고 서문을 써서 신흠이 발문을 쓴 [상례비요]가 1622년에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 편지의 임년은 1622년 임술년이다.
본문의 첫번 째 내용은 정원명 가와 혼사 문제를 거론하였다. 鄭元溟은 [난중일기]에도 많이 등장한다. 김장생의 妹弟가 정철의 장자 鄭起溟인 것을 보면 정철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아 찾아보니 역시 정원명은 정철의 얼삼촌조카이다.(정철의 얼삼촌질. [隱峯全書]卷3 書 答李汝固(이식)問目 안방준(安邦俊) ...疏辭極好。但不合於討逆。思敬還取其草。藏之袖中。於是千頃等乃出其所製疏曰。諸生聽之。讀過一遍後。令寫疏生。卽書之疏頭。及他諸生。了不知疏中辭意矣。其時松相孼三寸姪鄭元溟。自順天適上京。以諸生陳疏事。告于松相。松相大驚。卽令元溟急急還下。移書梁千頃等。大責而沮止...)
두 번 째 내용은 임공직 즉 임회(林檜, 1562~1624)의 최근의 곤경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임회의 호는 관해(觀海)이며 공직은 자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유몽인과 함께 1582년(선조15)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같이 들어갔다.
세 번 째 내용은 [상례비요]의 간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상례비요]의 서문은 萬曆庚申(1620, 광해군12) 季夏 金長生이 序를 썼고 天啓元年(1621, 광해군13)辛酉 孟冬 上澣에 申欽이 跋을 썼으며, 戊子(1648, 인조26) 季冬에 金集가 識를 붙여 간행하였다. 그런데 이 편지에 이미 [상례비요]가 판각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상례비요]의 간행과 유포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사료이다. 또 [사계선생유고]에는 사계가 상촌에게 발문을 써줄 것을 재촉하는 편지글이 실려있다.( [사계선생유고]권3 서 答申敬叔(신흠) ... 韓益之陳疏之計似矣。渠雖不敢自爲子弟陳疏。託以他事不納。庶或可也。若金而中(權)輩。雖欲爲之。亦無如之何。孔子所謂喪欲速貧。正爲此也。已往之事。不須更言。因來示縷縷及之。宋新寧之子在喪前。與月沙(李廷龜)之壻洪金浦(霙)定婚。今則不諧矣。此子容貌才質甚佳。可合爲壻矣。此中[喪禮備要] 亡友申生義慶所著者 而僕爲之改定 今夏兩湖儒生 同力入刻 鄙作序文 疵病處望須刪潤 且作跋文以送儒生輩 欲得以爲重矣)
다음은 신독재의 간찰이다.
[謝狀上 金生員 榻下 (수결) 謹封]
謹承/惠書 甚慰戀懷 鈍刻退與否 不可遙/度 唯在尊量處之如何耳 大槪/刻役 不久將畢 深喜深喜 圖十九張 改/畫封上 餘不宣 謹謝狀上
辛卯四月初八日 集 狀上
城主以田稅捧上往船所 故僧人往還未/易 如是遲滯耳 刻張自/城主所看 故日將暮矣 所刻則雖/未極精而不至於麤耳
圖中諸尺樣張 毋以橫板刻/之 必用直板 雖幅狹 不能侵兩/面 只刻諸尺於一面 而以賴一面亦/無妨 大槪橫板乾燥 則愈短/狹 直板雖乾而無縮故也
[김 생원 탑하에 답장 편지 올림 (수결) 근봉]
삼가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그립던 차에 매우 위로가 됩니다. 무디게 판각된 것을 물리는가 여부는 멀리서 헤아릴 수가 없으니 오로지 당신께서 헤아려서 처리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대개 판각 일이 오래지 않아 끝날 것 같으니 매우 기쁩니다. 그림 19장은 바꿔그려서 올려보냅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삼가 답장 편지를 올립니다.
신묘년(1651, 효종2, 78세) 4월 초8일 집 편지 올림
성주(城主)가 전세(田稅)를 받기 위해서 선소(船所)에 갔습니다. 그래서 중들이 왕래하기가 쉽지 않아서 이처럼 지체되었습니다. 판각한 것은 성주가 보아야 하므로 날이 장차 저물 것 같습니다. 판각한 것이 비록 매우 정교하지는 않아도 거칠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림 중의 여러 자의 견양이 있는 페이지는 횡판으로 판각하지 말고 반드시 직판을 쓰십시오. 비록 폭이 좁더라도 두 면을 침범하면 안 됩니다. 단지 여러 자를 한 면에 판각을 하여 한 면에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대개 횡판은 건조하게 되면 더욱 짧고 좁아지지만 직판은 비록 건조해도 줄어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독재의 간찰은 [상례비요]를 간행하고 있는 돈암서원 유사 김 생원에게 판각하는 각수들을 잘 감독하여 책이 잘 나올 수 있게 힘써 달라는 내용이다. 尺樣을 판각하는 판은 直板을 쓰고 橫板은 쓰지말라는 자상한 당부를 하고 있다. 횡판은 건조하면 수축이 되어 원래의 자의 길이가 축소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 간찰은 [삼선생간]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기존의 파일들을 검색하다가 2017년 시중 옥션에 나온 간찰을 캡쳐해둔 우암의 간찰이 눈에 띄었다. 돈암서원 재임에게 보낸 간찰인데 서원 제향의 번육을 멀리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 편지이다. 이것도 [삼선생간]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