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山지방의 역사와 문화
一 松 韓 吉 洙
2016, 11, 9. 김영중 성도회장의 승용차에 인준식 이종우 시우 등 1970년대 성동구청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이 논산일원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
우선 09;00 광진 우체국 앞에서 출발한 승용차가 강변북로로 해서 영동대교에 진입하려는 순간 숨어서 근무하던 경찰에게서 끼어들기를 하였다고 3만 원짜리 딱지를 받았다.
아침부터 기분이 저조한데 이번에는 강남의 남부 순환로로 해서 경부고속도로를 타려는데 염곡지하도 부근에서는 아예 차가 질펀히 들어 누워서 낮잠을 자라고 한다. 자다가 깨다가 겨우 빠져나와서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천안에서 차령산맥을 넘어 김옥균 생가 터를 지나 정안휴게소에서 잠간 쉬고 공주방향으로 달려가 탄천 요금소로 나왔다.
논산은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한반도의 단전부에 위치해 있는 중요한 힘의 원천지로서 선사 시대부터 조상들이 정착하여 온 곳으로,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소속이 되었다.
논산 지역은 금강유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해왔는데 백제시대에는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과 덕근군(德近郡)의 2개 군에 속하였다. 또 660년(백제 의자왕 20)에 백제의 계백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와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 군대가 황산벌을 중심으로 백제 최후의 결전을 벌인 치열한 전쟁터이기도 하다.
신라시대에는 황등야산군을 황산군으로 고쳐 덕은군(德殷郡)과 함께 2군으로 나뉘었다. 고려 초에 이르러 황산을 연산으로, 덕은(德殷)을 덕은(德恩)으로, 석산(石山)은 석성(石城)으로 고쳤다. 특히 왕건은 황산에서 후백제 신검의 항복을 받아 삼한을 통일한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라 하여 황산을 천호산이라 부르고 그 밑에 개태사를 지었다.
1397년(조선 태조 6)에 덕은과 시진을 합쳐 덕진(德津)으로 하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연산군(連山郡)을 연산현(連山縣)으로, 1419년(세종 1)에는 덕은군을 은진현으로 개칭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정조 때는 니산현(尼山縣)을 노성현(魯城縣)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12년 4현을 4군으로 변경하였다. 1914년 3월 1일 연산 은진 노성 석성군 4군을 병합하여 논산군을 설치하였다. 1931년에는 금강 포구에 있어 물류의 집산지가 된 강경면이 강경읍으로, 1938년에는 논산면이 논산읍으로, 1963년에는 구자곡면과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을 합병하여 연무읍으로 각각 승격하였다. 1996년 3월 논산군이 시로 승격되었고 2003년 9월 19일 두마면이 계룡시로 분리되었다. 논산읍이 취암동과 부창동으로 분리되어 현재 2읍 12면 2동을 관할하는데 면적은 554.98㎢에 5만여 세대로서 인구는 13만 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우리가 맨 처음 들린 곳이 노성면 교촌리에 있는 파평 윤씨 종가인 尹拯(윤증) 가옥이다.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 군산에서 田씨 일가들 20여명이 견학을 왔는데 그 일행 중의 한명이 이곳의 내력을 소상히 알고 있어서 도우미 여직원은 뒷전으로 밀리고 이 분이 앞장을 서서 설명을 하고 있었기에 우리들도 그 일행과 같이 휩쓸려 같이 어울려 다녔다.
윤증(1629-1714) 선생은 유명한 성리학자로 여러 차례 판서, 우의정을 내렸으나 한 번도 벼슬길에 오른 적은 없었지만 정치개력의 기수인 소론의 거두이었다. 원래는 김장생의 제자들인 송시열 송준길 김집 등과 같은 서인계열이었으나 윤증 선생이 상을 당하여 송시열에게 묘비를 찬 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송시열이 묘비명을 찬 했으나 그 비문에 좋지 않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에 윤증이 이를 고쳐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나서 송시열과 등이 져서 노론 소론으로 갈라져서 윤증이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윤증은 일반 서민 들은 굶고 있는데 가졌다고 맘대로 하루 세끼 식사를 하는 것도 미안해서 굴뚝의 높이를 낮추어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게 했다는 이야기, 김제에 사는 부자 송성룡 서예가의 선대가 선의로 지어주었다는 기와집에 살지 않고 윤증 선생은 끝까지 초가에서 살았다는 이야기와 향교의 건물이 높다랗게 있어 관학이 사학인 이곳을 감시했다는 말, 건물 앞에 해시계가 있어 시간에 맞는 생활을 했다는 내용과 이곳은 옥녀 탄금 형으로 터가 아늑한 명당이라는 이야기 등 참고가 되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파평 윤 씨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한 문중 교육기관이었던 종학당에는 배롱 꽃이 볼만하다고 하는데 종학당을 가려고 그 터를 필자가 알아보니 이곳에서 4km정도 떨어져 있다고 하기에 그곳까지 찾아 가는 것은 포기했다
18세기 초에 건립한 명재 윤증 고택은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 문간채가 자리 잡고 있다. 중 문간채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서, 중 문간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뒤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윤증 고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취를 자랑하는 사랑채에 앉아있으면 맑고 시원한 바람이 무더위에 지친 심신을 달래준다,
이곳에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윤증(尹拯,)이 사용했던 물건들과 문중에 전해 내려오는 유물이 있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은 성리학과 예학에 밝고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어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이곳 노성에 머물며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매진했던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이다. 윤증 가내의 유품은 상투관, 빗, 빗치개, 살쩍밀이, 신, 백목화, 합죽선, 월자, 첩지, 비녀, 인장, 혼천의, 해시계 등의 생활 용품과 영당기적, 윤증(尹拯)초상 등의 회화 류, 겨울철 여성의 방한모인 아얌 등 복식 류가 있어 고택과 유봉영당 등에 보관되어 있다. 복식 류를 비롯한 각종 생활 자료는 윤증(尹拯)과 그의 후손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당시 양반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중 혼천의(渾天儀)와 해시계는 우리나라 초기 천문과학 형성과정과 당시 유학자들의 우주관을 보여준다. 이밖에 명재선생 유상 등을 비롯한 영정 및 관련 자료들은 '영당기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제작 시기나 제작에 참여한 여러 화가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 넓은 장독대에는 수백 개도 더 되는 듯한 장독과 돌로 만든 절구를 보는 것만도 장관이어서 프로 사진작가들이 줄을 서서 우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성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뒤 어렵게 찾아 간 김장생 묘소
정확한 안내 표지판이 없어서 7전8기라고 하여야 할 만큼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기어이 묘소를 찾았다. 가서 보니 조전손전(祖傳孫傳)이라(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은 할머니 양천 허 씨의 DNA를 물려받아 기호학파를 이끄는 뛰어난 학자가 되었다고 본다.
양천 허 씨의 비문에 그녀의 높은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알리고 있다. 비문에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양천 허 씨가 광산 김 씨의 집안으로 시집 왔으나 어린나이인 17세에 남편을 잃고 홀로 되었다고 한다. 부모가 이를 가엾게 여겨 개가를 시키려고 하였으나, 유복자인 아들을 업고 시집인 연산으로 내려와 시부모를 모시고 평생을 살았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런 양천 허 씨의 행적은 후에 나라에까지 알려져 정려를 받게 되었고 지금도 정문이 남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할머니의 성품과 법도, 규범들이 전해져 대대로 내려와 가문이 번창하고 발전하여 이런 행적을 후세에 알린다고 적혀 있다.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산7-4에 있는 김장생의 묘소 일원은 충남 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학문, 군사, 정치 등 커다란 영향을 준 광산김씨의 성지이다. 이 묘역 群 길 건너로 양천 허 씨를 모신 영모재가 보인다. 우리 일행 중에 광산 김 씨가 있어 사계 묘 앞에서 예를 올렸다. 신독재 김집의 묘소는 개태사 인근에서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양촌이나 벌곡으로 가는 천호산 고개를 넘어 가서 길가 왼쪽에 있기에 이곳의 참배는 뒤로 미루었다.
遯巖書院(돈암서원)
돈암서원은 묘소 근처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도 신축한 한옥들이 앞을 가려서 찾는데 애를 먹었다. 바로 입구에 있는 주유소에 가서 물어 보았으나 모른다는 대답에 실망이 컸다. 중형 버스가 나오는걸 보고 그 길로 들어가 보니 안쪽에 돈암서원이 숨어있었다. 서원에 들어서자 젊은이가 나오더니 자기가 안내원이라면서 앞장서서 설명을 해 주었다. 원래 돈암서원 입구에 돼지바위가 있어 豚巖서원이라 하여야 하나 돼지바위라 하면 듣기에 흉해서 밑에 받침을 하여 둔암서원이라는 명칭으로 불러야 하지만 돈암이라 읽기도 한다는 것이다.
돈암서원은 1993년 10월 18일 사적 제383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5,590㎡이다. 서원은 1634년(인조 12)에 창건했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예학파(禮學派) 유학자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웠으며 1660년(현종 1)에 사액(賜額)된 호서지방(충청도)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보존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역 내에는 강당 동재 서재 사우(사당) 장판각(藏板閣) 양성당(養性堂) 등 건물 10여 동과 돈암서원 비와 관리사 등이 있다. 이 중 사우(祠宇)인 유경사에는 김장생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그의 아들 김집(金集), 노론의 거두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 등을 배향하였다. 또 장판각에는 김장생 김집 김계휘(金繼輝)의 문집과 왕실의 하사품인 벼루 전적 등이 보관되어 있다. [황강실기] [사계유교] [상례비요] 등의 서적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응도당 장판각 등의 건물들과 하마비 송덕비가 남아 있다.
주요 유적·유물로는 돈암서원 비가 있는데 1645년 송시열이 찬하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원래 돈암서원이 다른 곳에 있었으나 장마에 물이 들어오기에 이곳으로 옮겨 왔음을 기록한 돈암서원 이건비(移建碑)는 1880년(고종 17)에 세웠고 유경사(惟敬祠)와 양성당 장판각 전사청(典祀廳)과 독특한 설게로 웅장하게 지은 응도당(凝道堂)이 있고 1660년(현종 1)에 사액 받은 '遯巖書院' 이라는 현판 등이 있다.
유경사의 꽃담에 전서체로 꽃 같은 글자를 넣었는데 안내원이 이를 설명 해 주었다. 지부해함(地負海涵) 대지는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는 모든 걸 포용한다.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 상서로운 햇빛과 보드라운 바람을 말한다.
유경사에 주향으로 모신 사계선생(長生)은 대대로 석학(碩學)과 명신을 많이 배출한 가문에 명문의 뿌리를 더욱 깊게 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가(大家)이며 광산 김 씨의 우뚝한 인물이다. 선생은 1548년(명종 3)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한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당대 8문장가의 한 사람인 송익필(宋翼弼)에게 예학(禮學)을 전수받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集)에게 전승시켜 조선 예학(朝鮮禮學)의 거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으며 그의 후손에서 7명의 대제학(大提學)이 배출되어 이때부터 광산 김씨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뿐 아니라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의 유학자를 후학으로 배출하였는데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다. 벼슬은 형조참판에 그쳤다. 83세에 연산(連山)에서 생을 마쳤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고 1717년(숙종 43년) 문묘(文廟)에 배향 되었으며 안성의 도기서원과 연산의 돈암서원 등을 비롯한 10여개 서원에 배향 되었는데 사계선생은 후손에게 다음 두 가지 유훈(遺訓)을 남겼다.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 모습이 아니니 만들지 말 것,
내 자손이 수십 대에 이르더라도 의(誼)를 두터이 지낼 것 등이었다.
그의 학문(學問)을 계승한 아들 집(集)은 18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참봉에 이르러 광해군(光海君)의 문란한 정치를 개탄하고 한때 은퇴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후 부여현감(扶餘縣監)으로 등용되어 지평(持平) 집의(執義)를 거쳐 공조참의(工曺參議)에 올랐으나 공서(功西 서인에서 갈라진 당파의 하나)가 집권하자 다시 퇴직했다가 뒤에 좌찬성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역임했다.
그는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예학의 체계를 세웠으며 문묘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장생의 아들 반(槃)은 집(集)의 동생으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10년 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전적(典籍)을 거쳐 형조좌랑(刑曹左郞)등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을 역임한 후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여섯 명 중 둘째 익희(益熙)는 인조 때 대사성(大司成:정3품)을 지내고 효종 때 형조 및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셋째 익겸(益兼)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되자 분신 자결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어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에 봉향되었다.
넷째 익훈(益勳)은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으며, 막내 익경(益炅)은 어려서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를 거쳐 형조참의, 동부승지를 역임한 후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올랐다. 1674년(현종 15) 예조참판 때 죽은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가 야기되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設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朞年說 만1년)이 채택되었기 양성에 유배되었다.
익겸의 아들 만기(萬基)는 1653년(효종 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수찬, 교리, 정언 등을 역임했다. 1671년(현종 12년) 딸이 세자빈이 되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동녕 부사가 되어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 졌다. 총융사를 거쳐 대제학에 올랐으며 1680년 경신대출척 때 훈련대장으로 공을 세워 보사공신이 되어 현종의 묘정에 배향 되었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인데 최초 족보인 서석보(瑞石譜)를 1677년(숙종 3년)에 만들었다.
그의 아우 만중(萬重)은 조선의 이름난 소설가로서 익겸(益兼)의 유복자로 태어나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정언, 지평, 수찬, 교리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 삼남지방(三南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정사(政事)를 조사하였고 1679년(숙종 5)에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예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이 되었다. 주위의 탄핵으로 남해(南海)에 유배되기도 했다.
효성이 지극한 만중은 귀양 갈 때 외에는 노모 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 어머니를 위로 하기위하여 한글로 된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하여 소설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706년(숙종 32) 그의 효행에 대하여 나라에서 정표(旌表 선행을 칭찬하고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림)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사씨남정기, 서포집, 서포만필, 고시선 등 이 있다.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다.
오늘 논산지방을 답사하면서 소론의 거두 윤증 선생 댁과 기호학파를 이끈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묘소와 훌륭한 제자를 양성하고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돈암서원을 두루 견학하는 영광을 입었다.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인에 비견되는 서인을 이끌었던 두 거유를 뵈오니 감개가 무량하고 오늘 하루 보람 있는 일을 했다는 자부심이 든다.
이 외에 논산지방에는 찾아 봐야 할 명승지와 명소가 많다.
강경의 옥녀봉
논산시 강경읍 북옥리에는 강경산이 있는데 이 산을 옥녀봉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이 산 아래로 흐르는 금강 물은 아주 맑았고, 산은 숲으로 우거져 있었으며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이 있어 경치가 좋았다. 그래서 달 밝은 보름날 하늘에서 선녀들이 이 산마루에 내려와 경치의 아름다움을 즐겼고 맑은 강물에 목욕을 하며 놀았다 한다. 한번 다녀간 선녀들은 영광으로 알고 자랑을 하였지만 옥황상제의 딸은 한번도 내려오지를 못했다. 선녀들이 어찌나 자랑하는지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해 팔월 보름날 옥황상제의 딸이 상제의 허락을 받아 이곳에 내려오게 되었으나 그 선녀는 끝내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고 말았다. 지금도 이 산 위에는 봉우리가 있는데 이 곳을 옥녀가 죽은 자리라 하여 옥녀봉이라 부르고 그녀가 들여다보던 거울은 바위로 변하여 용영대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곳에는 강경읍내와 멀리 논산시내, 드넓게 펼쳐진 논산, 강경평야와 금강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옥녀봉은 논산 8경 중 하나로, 송재정(정자)과 봉수대에서 강경읍내나 금강을 조망하기에 좋다. 옥녀봉 봉수대는 전북 익산 봉화산의 봉수를 받아 황화산성, 노성봉수로 연락을 취하던 곳이다. 송재정 바로 아래에는 국내 최초의 침례교회 예배당 터가 자리하고 있어 성지순례지로도 유명하다.
강경은 물류를 배로 운반하던 시절에 황해의 수산물이 모여들고 산과 들에서 나온 온갖 산 약초와 농산물이 모이는 곳으로서 전국의 3대시장이 섰다고 하는데 일제 때 부터 이곳에는 은행과 금융조합이 있었고 법원과 검찰청 그리고 경찰서가 있을 정도로 번화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영화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은진의 관촉사
관촉사 경내에는 은진미륵으로 더 알려진 고려시대의 거대한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조성되어 있다. 고대의 것으로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로 알려진 보살입상의 조성에 대해서는 조선 영조 19년(1743)에 세워진 사적비에 잘 나타나 있다. 관촉사 사적비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 반야산에서 나물을 캐고 있던 여인이 어디선가 아기 우는소리가 나기에 그곳으로 가보니 아이는 없고 커다란 바위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깜짝 놀란 여인이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관가에 보고하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하늘에서 불상을 조성하라고 내려 보낸 바위라는 결론을 짓고 혜명대사가 인부 100여 명을 데리고 약 37년의 공사 끝에 완공하였다고 하는데 바로 관촉사 미륵대불이다.
은진미륵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석제로 만든 높이 18.12m나 되는 커다란 불상이라는 점과 토속적인 조각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삼각형이며 옆으로 길게 째진 눈, 넓은 코, 한 일(一)자로 꼭 다문 큰 입이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목은 굵고 삼도(三道)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관음보살인 것 같다. 어깨에 걸쳐 입은 가사는 어깨에서 양쪽으로 길게 내리고 있으며, 가로무늬가 있고 몸 중앙으로 몇 개의 U형 옷 주름을 돌렸을 뿐 매우 단조롭다.
은은한 미소가 아름다운 은진미륵이 있는 관촉사는 배롱 꽃이 만개할 때 찾아야 한다. 밖에서 보면 2층이나 안에서 보면 통 층으로 되어 있는 대광명전에서는 법회를 연다.
석조 미륵보살입상, 석등 석탑과 마주하고 있는 미륵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동남향으로 세워져 있다. 미륵전 안으로 들어서면 은진미륵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예불을 드릴 수 있는 장소인데 미륵전 안에서 바라보면 미륵불이 특별한 모습으로 보인다.
관촉사에서 꼭 눈여겨보고 가야 할 배례석도 있다. 석탑 아래에는 대형 연꽃 모양이 그려진 배례 석을 보게 되는데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을 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윗면 가운데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좌우에 작은 연꽃 두 송이를 돋을새김 한 모습이 아름답다.
18m 높이의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등, 석탑이 일렬로 서 있는 특이한 배치를 볼 수 있는데 고려 시대에 조성된 석탑은 미륵전과 석등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화강석으로 높이는 3.43m로 4층 석탑으로 보이지만 기단부가 2층 기단이며 전체적인 모습은 5층 석탑으로 보인다고 한다. 은진미륵은 자연암반 위에 허리 부분을 경계로 하여 각각 하나의 통돌로 만들어진 이 보살상은 몸통에 비해 특별히 얼굴이 강조되어 있는 모습으로 불상 전체에서 느껴지는 강한 힘은 고려 시대 초기에 이 지방에서 유행하던 불교예술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삼성각은 조금 높은 곳에 있어 계단을 오르다 보면 은진미륵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삼성각에서 내려다보는 관촉사 경관은 시야가 트여 전망이 아름답기도 하다.
해탈문은 다른 사찰에서는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문으로 양쪽 돌기둥에 <해탈문 관촉사>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화강암을 모나게 깎아 양쪽 지주를 세운 모습으로 참배객들이 너무 많이 몰려 올 때에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서 축조하였다고 하는 석문이다. 해탈문 주변으로 가을날 단풍이 들면 금상첨화로 더 예쁠 것 같은 모습이다.
계백장군 유적지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소재하는 이곳은 성충 흥수와 더불어 백제의 3충신으로 꼽히는 백제 말기의 명장 계백 장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계백 장군은 의자왕 20년(660)에 나 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오자, 5천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5만 대군에 맞서 싸웠다. 전장에 나가기 전에 가족들이 적의 노비가 되는 부끄러움을 면하려고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떠났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한 화랑 관창 등 결사대의 용맹스러운 활약으로 4번의 싸움에서 이겼으나 수적인 열세로 신라군에게 패하여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곳을 계백 장군의 무덤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옛 문헌에서 계백의 목이 잘렸다고 전하는 수락산과 계백의 시신을 급히 거두어 가매장했다는 가장곡이 바로 이곳이라는 점과 계백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곡서원이 바로 뒤편에 있다는 점이다. 또한 무덤지역의 동남쪽이 백제와 신라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황산벌이라는 점도 보탬이 된다.
원래 무덤 일원은 돌 덧널(석곽)이 노출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에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과 같이 백제의 존망이 계백장군의 양어깨에 매달려 있는 절박한 순간이 왔다. 오죽하면 사랑하는 처 지식을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는 참담한 짓을 저지르고 현장에 나왔는데 어린화랑이 덤비라고 달려드는데 아침에 죽인 자식생각인들 왜 나지 아니했겠는가. 자기목숨도 제단에 바치려는 각오로 황산벌에 서 있는 계백장군의 마음을 아는지 황산벌을 오가는 구름도 숙연하다.
끝으로 개태사에 들렸다.
이 절은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에 소재한 사찰이다.
천호산 산정에 감도는 흰 구름은 개국사찰의 위용과 함께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있다.
개태사는 전성기엔 천 여 명의 승려가 상주하여 화엄법회를 갖는 등 승려 양성도량 역할을 담당하였고 한때에는 8만9암자를 소속시켰으며, 대각국사의 장경불사(교정)도 이곳에서 이루어 졌다 한다. 국가의 변고가 있을 때마다 중신들이 호국기도를 드리던 고려시대 최대의 호국수호사찰이었다.
그 후 우왕 2년부터 14년까지 3차례에 걸친 왜구의 침입으로 방화 약탈이 심하였고, 장수 박인계가 이곳 전투에서 왜구에게 패함으로써 개태사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빛을 잃은 개태사는 이후 5백 여 년 동안 폐사된 채 방치되었다가 1934년 김광영 불자에 의해 재건되었고 매몰되었던 미륵 삼존석불을 다시 세우고 5층탑도 세우면서 개태 도광사라 칭하였다.
지금의 개태사 경내에는 중요문화재로 보물 제219호인 사지석불입상(寺址石佛立像), 충남민속자료 제1호인 개태사 철확(鐵鑊), 충남문화재자료 제247호인 5층 석탑과 제275호인 석조(石槽)와 창운각, 우주각 등이 있다.
예전에 이 절에서 쓰던 철확, 즉 큰 가마솥은 승려들의 식사를 위해 국을 끓이던 것으로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의 큰 솥이었는데 일제가 숟가락 밥주발 등을 빼앗아 갔을 때에 이 솥을 징발하여 무기를 만들려고 운반하다가 천벌로 하늘에서 벼락이 치니 그냥 놓고 달아났던 것을 다시 제자리에 옮겨다 놓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논산 8경을 알아본다.
제1경 관촉사의 朝光, 관촉사 미륵불의 얼굴에 비치는 아침 햇살
제2경 탑전호의 鳴鴻, 호반에서 노니는 기러기 울음소리
제3경 대둔산의 落照, 단풍과 기암괴석에 비치는 저녁노을
제4경 계백장군 유적지의 淸風, 황산벌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
제5경 쌍계사의 夕鍾, 은은하게 퍼지는 저녁 종소리
제6경 개태사의 白雲, 천호산 정상에 노니는 흰 구름
제7경 옥녀봉의 明月, 옥녀봉과 금강을 비추는 빍은 달
제8경 노성산성의 暮雨, 저녁 산성에 내리는 보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