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계 심령 대 부흥회
2024년 2월 25일~28일 동안 심령대부흥성회가 개최되었다. ‘가장 존귀한 이름 예수 그리스도(요 20:21)’란 주제로 열린 이번 성회는 인천 푸른사랑교회 남근형(南根瀅) 목사가 이슬비에 옷 젖듯이 조용하나 힘 있게 10번의 집회를 인도하면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했던 은혜의 성회였다. 2017년 10월 15일에 김기택 목사가 인도한 심령부흥회가 개최된 이후 7년 만의 일이다. 그 이후 담임자의 교체(2018년)와 코로나 팬데믹 상태(2020년)로 인해서 부흥회는 기약도 없는 상태였었다. 그러다가 개최되었으니 영적 갈증에 목말라하는 심령들의 텃밭에는 해갈의 단비가 내리는 것 같았으리라.
한국교회 부흥회는 1903년 남감리회의 하디(Robert A, Hardie) 선교사가 원산에서 개최한 부흥의 불길이 그 시발점이었다. 그 이후 원산 부흥회는 확산되어 1904년 강원도 지경대부흥회(2월 중순), 개성부흥회(2월 26일) 서울 부흥회(4월)가 개최되었다. 서울과 개성에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간간이 사용되던 부흥회라는 말이 점차 보편화되어 1904년 6월의 발간된 「신학월보」에서 ‘부흥회’라는 사설을 특별하게 다루기도 했다. 하디의 부흥 집회는 1905년, 1906년에도 각처에서 개최되어 그 불길이 꺼질 줄 몰랐다. 마침내 1907년 평양의 대표적인 감리교 남산현교회와 장로교 장대현교회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이름 하여 1907년 평양대부흥회다. 그렇게 조선반도를 태웠던 부흥의 불길이 한국 교회 부흥의 시작이었고 지금까지 성장의 동력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부흥회는 대부분의 교회가 매년 중요 행사로 꼽고 있다.
봄의 문턱에서 열린 이번 성회는 신구약 성경을 넘나들면서 선포되는 말씀마다 오직 예수님만 담겨 있었다. 아담 이후 죄의 문제로 구원의 길이 막혔던 인간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한 번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다 이루셨으니 그리스도인은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들어가나 나가나 예수님 한 분만 붙들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원리를 깊이 깨달은 것이다. 남근형 목사는 그의 특유한 성격대로 첫날부터 잔잔하면서도 강력하게 사자후처럼 토해내는 설교에서 시종일관 성경의 대주어와 대전제가 예수님이시라고 굳건하게 못을 박고 시작했다. 구약성경의 아브라함 이야기도 예수님의 이야기고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엘리야 등등 위인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이야기니까 당연히 그들이 주어가 되는 게 맞지만 그들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미리 나타내는 주어일뿐이다. 결국 예수님은 주어 중의 주어가 되시는 대주어요, 대전제이신 것이다. 둘째 날 저녁 집회 때 빌 2:5~11의 말씀으로 ‘심령의 리모델링’이란 제하의 설교는 우리의 심령을 믿음의 집으로 리모델링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의 삶은 죄와 저주로 기초가 되었다. 그 위의 바닥은 ‘혼적(魂的) 묶임’으로 깔려 있고 거기에 부정적인 기대와 내적인 맹세라는 두 기둥이 세워져서 떠받치고 있는 천장은 저주의 말로 장식된 상태다. 그런 집의 지붕은 '충격적인 이미지'로 덮여 있으니 누가 보더라도 이 집에는 생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멸망의 집에서 아담 이후의 인류가 거처했던 것이다. 이런 집은 리모델링해야 한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로 기초를 삼아 죄를 해결하고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서 혼적 묶음을 바꾸어 경건한 관계로 바닥을 삼는다. 그 위에 긍정적인 기대와 내적인 고백이란 두 기둥을 세워 축복의 말로 장식된 천장을 떠받치고 예수님의 이미지로 지붕을 만들어 씌우면 진정 아름다운 믿음의 집을 완성하게 된다. 그래야 그 집은 오직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마귀가 나갔다가도 다시 들어올 수 없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의 인생 집은 모두 허물어지며 헛된 결과만 남길뿐이다.
또한 마 5:1~12절의 ‘산상수훈과 율법완성’이란 제하의 설교에서는 산상수훈의 실체를 알려주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하늘 백성이 지켜야 할 주옥같은 윤리적, 도덕적 교훈을 산에서 가르치셨다 해서 나중에 붙여진 명칭이다. 그 말씀도 율법처럼 사람이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 천하 만민 중에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사람은 하나도 없어서 구원받을 수 없다. 대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게 되었으므로 예수님은 진정 율법의 완성자가 되셨다. 산상수훈 역시 이를 완전하게 행하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실천함으로써 구원받은 증거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율법의 완성이다.
특히 팔복에서 예수님은 복받을 8명의 사람을 말씀하셨다. 즉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인데 과연 이들은 누구일까? 대부분 각각의 그리스도인으로 알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일깨워 주었다. 사람은 누구라도 이렇게 살 수 없기 때문에 여덟 가지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렇게 사셨으므로 비로소 우리는 천국과 위로, 땅을 기업으로 받고 의로 배부르게 된다. 또한 긍휼히 여김 받고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받게 된다. 팔복의 사람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산상수훈은 곧 율법의 완성인 셈이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이렇게 예수님이 대주어요 대전제가 되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성경을 보는 새로운 눈이 열렸다. 이런 신앙의 원리가 확고할 때 앞으로의 믿음 생활은 하나도 문제 될 게 없다. 때때로 역사하는 섭섭마귀, 삐침마귀, 싸늘마귀가 한 길로 왔다가 열 길로 쫓겨나가게 되니 궁극적으로 믿음의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이 승리가 곧 하나님이 주시는 의의 면류관이다. 오직 예수로 무장된 믿음의 기초가 든든하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가 넘칠 것이다. 그동안 이 원리를 간과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넘어지고 실족하는 불상사가 빈번했다. 이번 성회는 진정 오랜 믿음생활로 타성에 젖어 간과했던 믿음에 대해서 바르게 깨닫는 기회였다. 성회가 끝난 후 심령에 기쁨이 차오르는 느낌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태복음 17:8).